덕질하는 뿜이

블로그 이미지
by O.A

TAG CLOUD

  • Total hit
  • Today hit
  • Yesterday hit

[서서제갈]

살인의 추억

 

달빛마저 흐려, 유독 어둠이 짙은 밤이었다. 잠들어있던 서서는 바람소리에 섞여 들려오는 낯선 소리에 눈을 떴다. 이젠 잠든 사이에 누군가의 손에 목이 달아날 걱정 따위는 하지 않아도 되는 생활을 하고 있으면서도, 서서는 새벽마다 자주 잠을 깼다. 잠을 설친 날이면 하루 종일 몸이 피곤했으나, 협객으로 살던 시절에 들었던 버릇은 쉽게 없어지지 않았다.

다시 잠을 청하려던 서서는, 두 번째 들려오는 낯선 소리에 눈을 번쩍 떴다. 어쩌면 훨씬 전부터 계속해서 들려오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원직 형님..”

제갈량의 목소리였다. 혹여 남이 들을까, 숨을 잔뜩 죽인.

등잔 하나 밝혀들지 않은 제갈량은 어둠 속에서 떨고 있었다. 서서는 다급히 제갈량에게로 다가갔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익숙한 냄새가 풍겨왔다.

형님..”

무슨 일이냐, 량아.”

형님, .. 나 어찌합니까?”

서서가 제갈량의 어깨를 붙잡았다. 아무리 말랐어도, 이젠 열일곱 살을 먹은 사내아이다. 어깨가 두 손 뿌듯이 잡혔다.

무슨 일이야. 진정하고 말해 보거라. 아니다, 여긴 너무 어두운 것 같으니 안으로 들어가자꾸나. 들어가서 불을 밝히고..”

서서의 그 말에 제갈량은 다급하게 서서의 손목을 붙잡았다. 서서는 아이의 손이 끈적하다고 느꼈다.

, 아니 됩니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도,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작고 연약했다. 서서는 의아하게 느끼면서도 제갈량의 어깨를 쓸어주었다. 언제나 당차고 머리가 좋은 아이가, 이토록 당황하고 혼란스러워할만한 일이 무엇인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다만 아이에게서 희미하게 풍겨오는 피냄새가 어떤 가능성을 떠올리게 할 뿐이었다.

.. 내가, 사람을..”

제갈량은 결국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내가 사람을 죽였습니다, 형님...”

 

어른 하나 없이, 어린 형제 둘이서 살고 있는 집. 전란을 피해 도망쳐오긴 했으나, 낭야의 제갈 가문이라는 후광. 태수를 지냈던 그들의 숙부. 도둑들이 노리기엔 썩 괜찮은 조건이었다.

서서는 좀처럼 진정하지 못하는 제갈량을 달래고, 피를 뒤집어쓴 몸을 깨끗하게 씻기고, 피에 젖은 옷가지는 불에 태웠다. 바닥에 흥건한 핏자국을 모두 지우고, 시체는 멍석에 말았다. 서서의 이마에 땀이 맺히는 동안, 제갈량은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여전히 떨고 있을 뿐이었다.

서서는 멍석으로 만 시체를 어깨에 짊어졌다. 수레를 끌면 바퀴소리에 누군가가 깰 것이다.

잠든 척, 조용히 있거라. 금방 돌아오마. 알겠지?”

“...”

제갈량은 무릎을 끌어안으며 대답했다. 서서는 그대로 발소리를 죽인 채, 제갈량의 집을 나섰다.

 

이젠 좀 진정이 됐니?”

샛별이 떴다. 서서는 밤새 제갈량을 안고 등을 쓸어주며 달래주었다. 처음엔 사시나무 떨 듯 떨리던 몸도 서서히 떨림이 멎어갔다.

처음 만났을 땐 제 반 토막만한 어린아이였는데, 어느새 이렇게 자라서 품안을 가득 채운다. 서서는 그 사실에 새삼스러운 기분이 된 채로, 제갈량의 몸을 안고 있던 팔을 풀었다.

“..시체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산에 묻고 왔다. 깊이 파묻고 왔으니 당장 큰 비가 내려도 들킬 일은 없을 거다.”

제갈량은 고개를 끄덕이며 소매로 얼굴을 문질러 눈물자국을 지웠다. 조금 전까지 피로 젖어 불쾌하던 감각은 사라진 뒤였다. 그러나 온몸에 벌레가 기어가는 것 같은 소름끼치는 느낌은 좀처럼 지워지지 않았다. 손은 계속해서 떨렸으며, 목덜미 뒤가 서늘하다가도 순식간에 열이 오르며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미안하다. 도둑이 들 거라는 생각을 못했구나. 내가 진작 신경을 더 썼어야 하는데.”

“..실망하지 않으셨습니까? 저는.. 원직 형님, 저는..”

제갈량은 또다시 가빠오려는 숨을 억지로 가다듬었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현실을 외면할 수 있지만,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사람을.. 죽였는데요.”

“..난세가 아니냐, 량아.”

서서는 제갈량의 손을 끌어당겨 잡았다. 의연한 체 하고 있어도, 아직도 손은 떨리고 있었다. 제갈량은 서서의 말에도 납득하지 못한 것 같았다. 서서는 잠시 고민하다가, 제갈량의 손을 두 손으로 쥐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도 사람을 죽인 적이 있다.”

결코 꺼내고 싶지 않았던 이야기였다. 살인자를 향한 경멸과 힐난, 두려움에 질린 시선들을 또다시 받아내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단은, 눈앞의 아이가 자신을 자책하기 전에, 달래는 것이 무엇보다 급했다.

?”

나 역시 사람을 죽였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어쩌다보니 말이다. 그런데 내가 널 이해하지 못할 이유는 또 무엇이겠느냐.”

서서는 제갈량의 눈빛이 가늘게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겁을 낼까. 아니면 그간 숨겨온 것에 대해 화를 낼까. 그러나 제갈량의 반응은 서서가 예상했던 그 어떤 것도 아니었다.

형님도 저처럼, 이리 두려우셨습니까?”

서서의 손을 잡은 제갈량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때의 형님도, 저처럼, 속이 메스껍고, 어지럽고, 무섭고, 혼란스럽..”

제갈량은 말을 맺지 못했다. 다시 눈물이 흘렀기 때문이다. 서서는 제갈량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아이의 몸을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떨리고 있는 등을 다독이며 쓸어주었다.

비슷했을지도, 그보단 덜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자신은 제법 거친 세상에 몸을 담고 있었으니까. 서서는 끊어진 제갈량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저희가 왜 이런 일을 겪어야 합니까?”

이윽고 다시 들려온 제갈량의 목소리에는 미미한 분노가 스며들어있었다. 서서는 조용히 제갈량의 이름을 불렀으나, 제갈량에겐 그 목소리가 닿지 않는 것 같았다. 아이는 서서히 자신의 생각과 스스로의 세상에 침전되고 있었다.

어째서 저희들은 누군가를 약탈하고, 누군가를 해치며 살아가야합니까? 나 혼자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나 혼자 군자의 도리를 공부하는 것이, 이 난세에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저들이 나를 살인자로 만들고, 짐승으로 만듭니다.”

서서는 아이의 정수리 언저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서서 자신도 그리 많은 나이라곤 할 수 없었다. 자신의 학문이 깊고, 높은 뜻을 통달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품 안의 아이보다는, 어쨌든 자신이 아끼는 아우보다는 몇 살이건 더 먹은 어른이고, 아이보다 앞서 비슷한 고민을 오랫동안 해왔다.

당장 정답을 일러줄 수는 없다. 정답은 존재하지도 않는 문제이다. 그러나 아이가 스스로의 밑동을 갉아먹다가, 잘못된 방향으로 기울어지기 전에 붙잡아주는 역할쯤은 그도 해낼 수 있을 것이다.

조금 자라나다 말 새싹이나 병든 나뭇가지라면 어찌 되든 상관없다. 그러나 서서는 아이의 재능을 알고 있었다. 아이는, 제갈량은, 거대하게 자라 가지로 하늘을 덮고, 끝내 황궁의 가장 깊고 높은 천장을 떠받드는 대들보가 될 수 있는 나무다. 아이의 분노가 엇나간 방향으로 흘러간다면, 그보다 큰 재앙도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공부를 멈춰선 안 되는 것이다, 량아.”

제갈량은 눈물로 젖은 얼굴을 들어 서서를 올려다보았다. 서서는 부드러운 표정으로 아이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서서의 소매 끝이 젖어 들어갔다.

조조의 병사가 도륙한 수십만 백성들 중에, 그의 아비를 두 눈으로 보기라도 한 사람이 몇 명이나 될 것 같니?”

“...”

조조에게도 저들이 있었고, ‘저들이 그의 아비를 죽였다. 조조가 저들을 구분하여 제 적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알고, 순리와 성현의 말씀을 따랐다면, 지금처럼 세상 사람들이 그를 두려워하면서도 미워하겠니? 아니다. 사람들은 모두 그를 우러르고, 그의 효심을 찬양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몇 번이나 정도를 벗어났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짐승이나 진배없는 자가 되고야 만 것이다.”

내가 조조처럼 될 것이라 말씀하시는 겁니까?”

가능성은 있겠지.”

서서는 품에 안고 있던 제갈량을 내려놓았다. 제갈량은 여전히 마르지 않은 눈으로 서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서서가 중간에 잘라 삼킨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서서는 잠시 단어를 고르다가, 신중히 입을 열었다.

넌 대단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아이다, 량아. 넌 아직 어리지만, 난 몇 번이나 너의 재주에 탄복해왔다. 너는 조조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한 존재도, 혹은 전혀 다른 사람이 될 수도 있어. 넌 스스로를 관중과 악의에 비견한다만, 난 어쩌면 네가 그 두 분보다 대단한 사람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그런 생각을 종종 한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원직 형님.”

차분히, 오래, 충분히 생각해보렴. 너는 답을 찾아낼 수 있을 거다. 너는 아주 영리하고 똑똑하니까.”

서서는 제갈량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주고, 진중하고 무겁던 말투를 가볍게 바꿨다. 갑작스레 경쾌해진 목소리에 제갈량은 당황하여 대답할 틈을 놓치고 말았다. 많이 놀랐겠구나. 놀랐을 땐 한숨 푹 자는 게 최고란다. 오늘은 나도 여기에서 잘 테니, 걱정 말고 들어가서 눈이나 좀 붙이거라. 그 어조는 조금 과장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해서, 제갈량은 토를 달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그저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고, 감사합니다, 형님, 하는 인사를 올린 뒤,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눈을 감았을 뿐이다.

서서는 마루에 걸터앉아, 오랫동안 하늘을 그저 올려다보고만 있었다. 아이가 자라, 주군을 선택하고 그 밑에서 뜻을 펼칠 때가 올 것이다. 아마 그렇게 먼 미래는 아닐지도 모른다. 그때 아이가 내지르는 그 불길이 얼마나 크게 타오를 것인지, 누구를 태울 것인지, 서서는 그 무엇도 예상할 수 없었다. 자신이 짐작하기엔 너무 크게 자랄 아이였다.

다만 크게 엇나가지만 않았으면. 바르고 좋은 주군을 만났으면. 그렇게 막연한 소원을 빌며 하늘을 향해 한숨을 크게 한 번 쉬었을 뿐이었다.

 

***

 

어렸을 때..”

조운은 제갈량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달구경을 하다가 분위기에 취했는지, 제갈량의 눈빛은 평소와 다르게 조금 흐릿했다.

오늘과는 다르게 달빛이 아주 흐린 날에.. 사람을 죽인 일이 있었지요.”

제갈량은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담담한 표정이었으나, 찻잔은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손끝이 가늘게 떨린 것이다.

그러십니까.”

동생과 저 뿐인 집에.. 도둑이 들었답니다. 숙부님이 돌아가시고 몇 해나 지났을까.. 사실 이러한 난세에, 몇 년이 지나도록 별다른 사고가 없었던 것이 천운에 가깝다고 하는 편이 맞겠습니다만.”

군사.”

조운은 조용히 제갈량을 불렀다. 눈을 내리깔고 있던 제갈량은 답지 않게 조금 머뭇거리다가, 천천히 시선을 올려 조운의 눈을 보았다.

괜찮습니다. 어째서 그렇게 당황하십니까.”

“...”

아무도 군사를 비난하지 않을 것입니다. 적어도 이 운은 그렇습니다.”

“..그러십니까.”

제가 지금껏 죽인 사람의 수만 해도 천 명은 넘어갈 것입니다. 이 전란 속에서 그런 일은 빈번한 것입니다. 하물며 군사께선 스스로의 영달과 사심을 채우기 위해 남을 해한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크게 죄책감 가지실 필요 없습니다.”

제갈량은 조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장군. 덕분에 오랜 시간 가슴을 억누르던 죄책감이 조금 덜해진 것도 같습니다. 제갈량의 인사에 조운은 꾸벅 고개를 숙였을 뿐이었다.

제갈량은 다시 달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서서는 이제 그의 곁에 없었다. 먼 곳으로 떠나갔다. 제갈량은 오늘처럼 그 사실이 아쉽게 느껴지는 날이 없었다. 제갈량은 그날 서서가 제게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것은 일종의 걱정이었고, 동시에 기대였다. 자신은 그의 기대를 충족할 의무를 지고 있지는 않았다. 동시에 그의 기대를 져버릴만한 행보를 보인 적도 없었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그랬다. 제갈량은 무언가 결정을 내리고, 생각을 거듭하고, 책략을 짜낼 때마다 손끝의 거스러미처럼 툭툭 걸리는 서서의 기대가 부담스럽고, 신경 쓰였다. 두 사람은 이제 편지조차 닿을 수 없을 만큼 떨어졌으나, 그 기대만큼은 좀처럼 벗어던질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런 기대를, 그리고 걱정을 해주는 것도 서서뿐이다. 제갈량은 그렇게 생각하며 피식 웃어버리고 말았다.

이제 제갈량의 곁에는 사람들이 많았고, 그들이 제갈량에게 거는 기대는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무거워졌으며, 어깨와 세 치 혀에 짊어진 목숨은 수만에 달했다. 아우와 제 어린 목숨이나 보살피며 간신히 살아가던 시절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나날이었다.

그러나 외로운 것은 어쩔 수가 없는 일이다.

'기타 > 삼국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자룡공명] 제갈부인전 2  (0) 2017.12.06
[자룡공명] 제갈부인전  (0) 2017.12.04
[서서제갈] 이따금씩 우연은 호흡곤란을 동반한다.  (0) 2017.11.19
[IF썰] 이릉대전 下  (0) 2017.11.17
[IF썰] 이릉대전 上  (0) 2017.11.16
AND

[이슬라이/성반전/학원물AU/백함] 공립 아슬람 고등학교 02

-화장

*다음편 있어서 02 아닙니다 언젠간 또 쓰고싶은거 생길지도 몰라서 그냥 일단 붙여놓은겁니다..


 라이퀴아는 스스로를 꾸미는 것에 큰 관심이 없었다. 예쁘고 귀여운 옷을 좋아하긴 했지만, 유명브랜드의 상품을 반드시 가지고 싶다던가, 한정수량으로 출시된 화장품 같은 것보단 만화책 한 권, 과자 한 봉지에 돈을 쓰는 쪽을 선호했기 때문이다. 

 이슬레이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두리번거리는 라이퀴아를 바라보며 조용히 미소를 짓고 있었다. 백화점의 VVIP에게만 개방되는 특별 갤러리는, 라이퀴아가 처음 보는 물건들로 가득 차있었다.

 

"라이퀴아. 이쪽으로 와봐."

 

 이슬레이는 푹신한 소파에 기대앉아 카탈로그를 넘기며 손짓으로 직원을 불렀다. 갤러리 입구에서 두 손을 공손이 모으고 있던 여직원이 재빨리 다가왔다. 라이퀴아가 구경을 끝내고 이슬레이를 향해 다가오는 사이, 이슬레이의 긴 손가락이 카탈로그의 한 면을 훑었다.

 

"이쪽 라인 다 보여줘요."

".. 죄송합니다, 아가씨. 다른 제품들은 다 있는데, 이 색상은 현재 재고가 없어서요."

"그럴리가요? 제가 이번 시즌 제품들은 하나씩 준비해달라고 분명히 말씀 드렸던 것 같은데."

 

 이슬레이의 목소리가 살짝 높아졌다. 미미한 변화였지만, 그 목소리를 듣고 있는 두 사람은 그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라이퀴아는 조금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지만, 이슬레이의 말에 대답하던 직원은 허리를 90도로 꺾으며 연신 고개를 숙이고 사과를 해댔다.

 

"정말 죄송합니다, 아가씨. 발송 과정에 문제가 생겨서요, 입고될 때 그 제품 하나만 빠진 채로 들어왔거든요. 바로 본사에 클레임 넣었고, 지금 긴급으로 항공편 수배해서 배송 중입니다."

 

 이슬레이는 직원의 사과에도 상당히 심기가 불편해보였다. 이 백화점은 VVIP 대우가 참 특별하네요. 아버지도 이런 상황을 겪으신 적이 있는지 한 번 여쭤볼까요. 이슬레이의 짜증에 직원은 몇 번이나 거듭 사과할 뿐이었다.

 

"이슬레이. 이슬레이."

 

 보다 못한 라이퀴아가 이슬레이의 손목을 붙잡았다. 이슬레이는 다시 한 바탕 쏟아내려던 말을 멈추고 라이퀴아를 돌아보았다. 라이퀴아는 웃으며 이슬레이의 손을 두 손으로 꼭 붙잡았다.

 

"너무 화 내지 마. 실수하셨다잖아. 나중에 또 오면 되지. ?"

"..."

"나 나중에 여기 또 구경하고 싶어. 또 올 때 나도 불러주라. ? ?"

 

 라이퀴아의 말에 이슬레이는 잠시 눈을 깜빡이다가, 옅은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슬레이의 기세가 누그러진 것을 느낀 직원은 안도의 한숨을 속으로 삼키며, 이슬레이가 찾은 나머지 화장품이라도 가져오기 위해 급히 자리를 떴다.

 

"그런데 이게 뭐야? 립스틱?"

". 이번 시즌 한정 에디션으로 나온 건데, 이건 지금 내가 바르고 있는 거야. 너한테도 잘 어울릴 것 같아서 하나 선물해주고 싶었는데.“

진짜? 근데 나는 화장품 잘 몰라서.. 이게 나한테 어울릴까?”

그래서 지금 한 번 테스트 해보고 선물하려고 했는데.. 이렇게 됐네.”

 

 이슬레이는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지 않는 상황을 언제나 낯설어했다. 그것을 잘 알고있는 라이퀴아는, 조금 쳐진 이슬레이의 어깨를 쓸어주었다. 이슬레이는 웃으며 라이퀴아를 바라보다가, 그녀의 손목을 잡아끌며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럼 다른 거 먼저 보자, 라이퀴아. 여기 있는 것 중에 마음에 드는 거 없어? 다 가져가도 돼.”

사주는 거야? 그치만 나 이런 건 잘 몰라서 고르기가 좀.. 그리고 다 비싼 거 아냐? 막 받기도 좀 그런데..”

괜찮아. 아버지가 여기 VVIP 회원이신데, 그거 유지하려면 한 달에 얼마씩 지불해야 되거든. 그런데 이번 달엔 아버지도 어머니도 바쁘셔서 신경을 못 쓰셨대. 그래서 나한테 친구 데려와서 아무거나 사도된다고, 여기 카드도 주셨는걸.”

 

 이슬레이는 익숙하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갤러리 안을 돌아다녔다. 조금 전까지 언짢았던 기분은 다 풀린 듯 했다. 라이퀴아는 속으로 웃으며 이슬레이의 뒤를 졸졸 쫓아다녔다.

 다른 아이들이 이슬레이는 변덕스럽고 제멋대로 굴어 비위를 맞추기 어렵다며 투덜거리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라이퀴아는 속으로 조용히 웃었다. 이슬레이는 잘 토라지지도 않았고, 짜증이 났더라도 말 한마디면 금세 화를 풀었다. 라이퀴아에게 이슬레이는 누구보다 착하고 상냥한 친구였다.

 옷을 입은 마네킹 옆에 라이퀴아를 세우고, 행거에 걸린 옷을 내려 라이퀴아에게 대보고, 반지며 목걸이 같은 것들을 라이퀴아에게 걸었다가 다시 고개를 저으며 원래 자리에 돌려두기를 몇 번이나 반복하던 이슬레이는, 신발이 놓인 진열대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 이거 너한테 어울릴 것 같다. 이거 한 번 신어봐, 라이퀴아.”

. 나 이런 굽 있는 신발 별로 안 신어봤는데.”

그럼 지금 한 번 신어봐. 내가 신겨줄게, 이리 와. ?”

 

 이슬레이는 한 손으로 라이퀴아의 손을, 다른 손으로는 구두 한 켤레를 든 채 갤러리 곳곳에 놓인 의자 앞으로 라이퀴아를 데려갔다. 그 모습이 너무 즐거워 보여, 라이퀴아는 더 이상 거절하지 못하고 이슬레이의 뒤를 따라갔다.

 이슬레이는 의자에 라이퀴아를 앉히고,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라이퀴아는 아무리 깨끗하게 청소된 바닥이라도 그냥 앉는 것은 상상할 수조차 없고, 야외에선 의자에 앉을 때에도 담요를 찾는 이슬레이를 알고 있었기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슬레이는 무릎이 땅에 닿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라이퀴아의 발목을 잡고 신발과 양말을 벗겨냈다.

 

내가, 할 수 있어, 이슬레이..”

괜찮아. 내가 해줄게.”

 

 토끼무늬가 프린팅 된 양말을 곱게 접어 옆에 내려놓던 이슬레이가 라이퀴아를 올려다보며 웃었다. 라이퀴아는 그 미소를 한 번도 거절한 적이 없었다. 라이퀴아는 어물거리며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고, 이슬레이는 구두를 집어 들었다.

 

너 발목 예쁘다.”

 

 이슬레이의 말에 라이퀴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너도, 너만큼은 아니야, 이 비슷한 대답을 했다면 이슬레이는 좋아할까. 그런 생각이 스쳐지나가긴 했으나, 라이퀴아는 이런 분위기에서 그런 말을 하며 태연하게 웃을 수 있는 성격은 아니었다.

 이슬레이는 꼼질거리며 오므리는 작은 발가락을 보며 웃음을 삼켰다. 발등에 입을 맞추고 입술 자국을 남기는 상상을 했다. 물론 당황하고 놀랄 것이 뻔하니, 실행에 옮기지는 않는다.

 그러다 이슬레이는 문득, 무언가에 생각이 닿았다.

 

됐다. 한 번 걸어볼래?”

.. 넘어질 것 같은데.”

내가 손 잡아줄게.”

 

 신발의 굽은 걷기 곤란할 정도로 높은 것은 아니었으나, 늘 운동화나 단화만을 신던 라이퀴아에겐 낯선 높이였다. 이슬레이는 라이퀴아의 앞에 서서 두 손을 끌어 잡은 채, 라이퀴아의 보폭에 맞춰 뒷걸음질을 쳤다.

 

괜찮아? 불편하거나, 발 아프거나, 그런 건 없어?”

 

 라이퀴아는 소리를 내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평소보다 눈높이가 높아진 탓에, 늘 올려다보던 이슬레이의 눈을 거의 정면에서 마주해야했기 때문이다. 똑바로 마주본 이슬레이의 눈은 평소에 보던 것과는 또 달라서, 라이퀴아는 간질거리는 기분을 누르기 위해 표정을 굳혀야 했다. 입고리가 가늘게 떨렸다.

 직원이 이슬레이가 요구한 화장품들을 가지고 갤러리로 들어왔다. 이슬레이는 다시 라이퀴아를 데리고 소파로 돌아갔다. 이슬레이는 무심한 손짓으로 직원을 멀리 물리고, 새 제품이 분명한 화장품의 포장을 뜯었다. 당황한 라이퀴아는 눈을 깜빡일 뿐이었다.

 

그렇게 막 뜯어도 돼?”

다 사가지, . 너 가져. 다 너 줄게. 눈 감아봐, 라이퀴아. 화장 해줄게.”

 

 라이퀴아는 어물어물 눈을 감았다.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몇 번 나더니, 차갑고 긴 손가락이 얼굴 위를 스치는 것이 느껴졌다. 화장품 냄새와 이슬레이의 향수 냄새가 섞인 향긋한 냄새가 났다.

 손가락, 퍼프, 브러쉬, 그리고 라이퀴아가 촉감만으론 구분해낼 수 없는 정체불명의 무언가가 분주하게 라이퀴아의 얼굴 위를 훑었다. 라이퀴아는 가끔 제 뺨이나 턱을 짚는 손가락에 집중했다. 이슬레이의 손은 생각보다 차가웠다.

 오래 눈을 감고 있어 살짝 지루해진 라이퀴아는 가늘게 눈을 떴다. 가장 먼저 보인 건 이슬레이의 입술이었다. 제 눈썹을 다듬느라 집중한 채 살짝 벌어진 입술에서, 연약하게 흘러나온 숨이 라이퀴아의 얼굴에 닿았다. 좋은 냄새가 났다. 라이퀴아는 당황하여 눈을 꾹 감아버렸다. 갑자기 움찔하는 라이퀴아를 보고 이슬레이가 소리를 죽여 웃는 것이 느껴졌으나, 라이퀴아는 모른 체 했다.

 

다 됐다. 거울 한 번 볼래?”

 

 딸깍. 무언가를 닫는 소리가 났다. 라이퀴아는 꾹 감고 있던 눈을 조심스레 떴다. 이슬레이는 테이블에 놓인 둥근 거울을 라이퀴아를 향해 돌려주었다. 라이퀴아는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낯설어, 눈만 깜빡이고 있을 뿐이었다. 화려하지 않은 화장이었지만, 낯설었다.

 

립은 마땅히 발라줄만한 게 없어서.. . 이쪽 봐봐, 라이퀴아.”

 

 어렵사리 거울에서 눈을 뗀 라이퀴아가 이슬레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슬레이는 한 손으로 라이퀴아의 뺨을 감싸고, 다른 손은 자신의 입술로 가져갔다.

 이슬레이는 엄지손가락으로 자신의 입술을 힘주어 누르고, 천천히 훑었다. 하얀 손가락 끝에 붉은 칠이 묻어났다. 라이퀴아가 당황하는 사이, 이슬레이의 손가락은 라이퀴아의 입술로 옮겨갔다. 예의 하얗고 차가운 손가락이 라이퀴아의 입술을 천천히 훑었다. 라이퀴아는 멍하니 이슬레이의 얼굴을 바라볼 뿐이었다.

 

, 역시 예쁘다. 거울 봐봐. 어때? 잘 어울리지.”

 

 이슬레이는 생긋 웃으며 거울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라이퀴아는 화장이 조금 번진 이슬레이의 입술과, 아직 붉은 자국이 남아있는 이슬레이의 손끝에 시선이 닿았다. 갑자기 목 뒤가 화끈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으응.. 고마워.”

 

 라이퀴아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웅얼거렸다. 분명 귀 끝이 붉어졌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슬레이는 다른 물건을 또 가져올 생각인지,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또각거리는 발소리가 경쾌하게 멀어졌다. 라이퀴아는 흘끔, 이슬레이의 뒷모습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목적지를 정하지 못하고 방황하던 시선은, 이슬레이의 가느다란 발목으로 떨어졌다.

 너 발목 예쁘다. 그 말이 문득 떠올라서, 라이퀴아는 다시 고개를 푹 숙여버리고 말았다. 그 탓에, 막상 저질러놓고 저도 민망해 괜스레 꼼질거리고 있는 이슬레이의 손은 결국 발견하지 못했다.

AND


[서서제갈] 이따금씩 우연은 호흡곤란을 동반한다.


0.

이따금씩 우연은 호흡곤란을 동반한다.

 

1.

온 나라가 전란으로 들썩이는 난세였다. 형주는 어느 지방보다 평화로운 곳이었지만, 가장 낮은 곳에서 살아가는 백성들은 여전히 고단했다. 한 떼의 성난 군사들이 짓쳐들면, 그 무자비한 학살을 피해 도망치는 것만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저항이었다.

서서는 그들 사이에 섞여, 고개를 숙인 채 걸어가고 있었다. 머리를 풀어헤치고 얼굴에 흙을 발랐으나, 이 피난민들 사이에서 그 정도의 초췌함은 특별히 눈에 띌 것도 없었다. 관리들이 아직 눈에 불을 켜고 자신을 찾고 있을 테지만, 정확한 용모파기가 그려진 것도 아닐뿐더러 이 많은 사람들 틈에 섞여있으니 천리안을 가졌다 하더라도 쉽게 자신을 찾아내지는 못할 터였다.

문득 서서는 제 소매를 꽉 붙드는 작은 힘을 느끼고 뒤를 돌아보았다.

마르고 혈색이 좋지 않은 어린 아이가 자신의 소매를 붙든 채 연약한 숨을 내쉬고 있었다. 얼굴이 희다 못해 창백하고, 눈에 초점이 맞지 않았다. 서서는 아이가 현기증을 느끼는 것을 알아채고 급히 손을 뻗어 아이의 몸을 끌어당겼다. 바닥으로 넘어지려던 아이의 몸이, 서서의 품 안으로 무너지듯 쓰러졌다.

서서는 당황하여 급히 주변을 살폈다. 그들과 가까이에 있던 사람들은 흘끗 시선을 던지긴 했으나,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는 않았다. 서서는 황급히 아이를 안아들고 목청껏 소리쳤다.

이보시오! 여기 어린 아이가 있소! 아이를 잃어버린 사람 없소이까! 이 아이의 보호자가 누구시오!”

그러나 서서의 다급한 외침에도 나서는 이는 없었다. 서서는 어설프게 아이를 안아 든 채,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이 인파 사이에서 아이의 부모를 찾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는 아이를 버리고 갈 수는 없었다.

얘야. 정신 좀 차려보아라. 네 이름이 뭐니? 아니, 네 부모님의 이름은? 어디에서 왔니?”

그러나 아이는 숨을 헐떡이며 가슴을 쥐어뜯을 뿐, 대답을 하지 못했다. 잠시 고민하던 서서는 아이를 등에 업었다. 제 소매를 꼭 움켜쥐고 놓지 않는 손이, 저를 살려 달라 애원하는 듯 느껴졌기 때문이다.

객잔은 어딜 가나 만석이었지만, 서서는 요령 좋게 허름한 쪽방 하나를 얻을 수 있었다. 누가 보아도 창고로 쓰다가 급하게 물건만 드러낸 듯 보이는 방이었고, 가격은 터무니없이 비쌌다. 그러나 서서는 불평하지 않았다. 제 한 몸뿐이라면 어딘가에서 노숙을 할 수도 있었겠으나, 아이에겐 안 될 말이었다.

아이는 병약하고 지친 기색이 완연한 중에도, 사랑받으며 귀하게 자란 티가 났다. 추레한 몰골의 서서가 그런 아이를, 심지어 의식을 잃은 아이를 등에 업고 객잔에 들어섰을 때, 주인은 당연히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서서는 나이차가 많이 나는 동생이라 둘러대고, 방값에 약간의 돈을 더 얹어 주인이 그 말을 믿도록 만들었다.

 

2.

선잠에 들었던 서서가 이른 새벽에 문득 눈을 떴을 때, 어둠 속에서 별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두 개의 눈동자에 놀란 것은 그간 협객으로 살며, 그리고 혼자 도망치며 살아온 시간이 너무 긴 탓이었다. 품속의 단도보다 낮에 구해준 아이의 존재에 먼저 생각이 미친 것은, 두 사람 모두에게 천운이라고 할 수 있었다.

“..언제부터 깨어있었니?”

조금 전에 깼습니다. 선생은 누구십니까?”

되묻는 아이의 목소리는 똘똘하기 그지없었다. 제법 영리한 아이겠구나 싶어, 서서는 피식 웃으며 답했다.

나는 그저 떠돌며 살아가는 야인이고, 전란을 피해 정처 없이 도망치는 중이다. 다시 만날 기약도 없는 내 이름은 알아 무엇 하겠니.”

하지만 성함을 모르면 어찌 은혜를 갚겠습니까?”

아이의 당돌한 말에 서서는 작은 소리로 웃었다.

은혜는 갚지 않아도 좋으니 네 몸이나 잘 살펴라. 그래, 네 부모는 누구고, 어쩌다가 홀로 떨어져버린 거냐?”

부모님은 돌아가셨고, 숙부님과 어린 아우와 함께 피난을 가던 중이었습니다. 어지러움이 심해져 잠시 숙부님을 놓쳤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숙부님을 찾을 수 없어 급하게 나아가다가 문득 눈앞이 아득해져 쓰러져버린 것입니다.”

숙부님의 성함은 어찌 되시냐? 어쨌든 다시 찾아야 할 것 아니냐.”

어둠 속에서 아이가 움직이는 모양새가 희미하게 보였다. 흔히 아이들이 뻐길 때 그러하듯, 작은 어깨를 쭉 펴는 것 같았다.

괜찮습니다. 이 량은 비록 아직 어리긴 해도, 혼자서도 갈 길을 찾아낼 재주 정도는 있습니다. 날이 밝는 대로 떠날 테니 선생께도 더 이상 폐를 끼치진 않을 것입니다. 허나 선생의 이름을 모르니 앞으로도 영영 구해주신 은혜를 갚을 길이 없을 것 같아 그것만이 걱정입니다.”

그 당찬 목소리가 귀여워 서서는 피식 웃어버렸다. 서서는 아이의 어깨를 잡아 침상에 눕히며 대답했다.

그래, 알려주마. 내 이름은 서서요, 자는 원직이다. 다만 내 이름을 밝히는 것을 꺼리는 것에는 이유가 다 있으니, 다른 사람들에겐 나를 만났다는 말을 하지 말거라. 네가 특히 영특한 것 같아 너에게만 특별히 알려주는 것이다. 알겠니?”

.”

아이는 그러겠다고 거듭 약조했고, 서서는 그런 아이를 달래 다시 재웠다. 아직 완전히 동이 트려면 몇 시진은 더 기다려야했다.

 

3.

서서는 등 뒤로 흐르는 식은땀을 느끼며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관리 한 사람과 병사 두 사람이, 매서운 눈초리로 서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용모파기를 가지고 있었으나, 서서의 얼굴이 지저분하고 머리를 풀어헤쳐 잘 알아볼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결국 서서가 묵었던 객잔의 주인이, 서서가 떠난 두 관아에 신고를 한 모양이었다. 그들은 함께 있던 어린아이에 대하여 자꾸만 물었을 뿐 서서가 누구인지는 캐묻지 않았으나, 조사를 받다보면 과거의 죄가 들통 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서서가 참담한 기분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그는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한 소년을 발견했다. 어제 아침 객잔을 나와 헤어진, 이름 모를 그 소년이었다. 그의 곁에 어린 아이를 업은 사내가 함께 서있는 것을 보니, 아이의 말대로 혼자서 숙부를 잘 찾아낸 모양이었다.

그래, 그래도 한 사람은 구했으니 됐다. 이것은 그간 내가 쌓아온 업보의 결과다. 그래도 죽기 전 저 어린 것 하나 정도는 구했으니..

서서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문득 숙부의 손을 놓은 아이가 서서에게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네 이놈, 선복아! 어딜 갔었던 거야!”

아이의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서서는 물론이고, 관리와 병사들 모두 당황하여 뒤를 돌아보았다. 아이는 관리를 향해 두 손을 모아 공손하게 인사했다.

이놈은 저희 집 하인 놈인데, 선생께선 무슨 일로 그러십니까? 저에게 말씀하시지요.”

관리는 여전히 의심하는 눈초리로 서서를 흘끗 보았으나, 조금 전처럼 그를 다그쳐 묻지는 않았다.

공자는 뉘시오?”

관리의 태도는 적대적이진 않았으나, 어린아이라면 충분히 겁을 먹을 만큼 위압적인 목소리였다. 그러나 아이는 전혀 주눅 들지 않고 태연하게 대답했다.

저는 낭야의 제갈씨로, 이름은 량이며, 사예교위를 지내신 제갈풍의 후손이요, 연주 태산군 군승을 지내신 제갈규의 차남이며, 예장태수를 지내신 제갈현은 저의 숙부 되십니다. 이놈은 선복이라는 놈으로 제 아비 때부터 저희 집 일을 도와온 가노인데, 제 몸이 유독 약하여 언제나 제 곁에서 시중을 들게 해왔습니다. 그런데 함께 피난길에 올랐으나 중간에 이놈이 길을 잃은 듯하여, 이틀 째 찾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아이는 태연한 얼굴로 잘도 거짓말을 지어내었다. 서서는 아이가 저를 도우려 한다는 것을 느끼고, 아이의 장단에 맞춰 고개를 조아렸다. 관리와 병사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였으나, 이미 아이의 성과 집안 내력을 모두 들은 뒤라 더 이상 되묻기도 난감한 듯 했다. 그들은 작은 목소리로 몇 마디 말을 주고받은 뒤, 실례했다며 짧은 사과의 말을 남기고 돌아갔다.

관리와 병사들이 돌아간 뒤, 아이는 서서를 올려다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제가 은혜를 갚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 고맙구나.”

제 조카가 하는 양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사내가 다가왔다. 사내는 서서보다도 훨씬 나이가 많았지만, 서서에게 예의를 갖추며 인사했다. 서서는 황망히 마주 인사하며 흘끔 눈치를 보았다.

량을 구해주셨다는 원직 선생이십니까?”

“... 그렇습니다.”

남에게 이름을 밝히지 말라 거듭 당부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다만 량은 저를 아비처럼 여기고 따르니, 제 말에 차마 거역하지 못하고 선생의 성함을 제게 알린 것입니다. 부디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제갈량이 서서의 시선을 피해 딴청을 부리는 것을 본 제갈현이 급히 덧붙였다. 서서는 그저 아니라며 손을 내저을 뿐이었다.

헌데, 어째서 이름을 숨기고 다니시는 것입니까? 조금 전 관리와 병사들이 선생을 붙잡은 것도 그 이유와 연관이 있는 것인지요?”

서서는 대답하지 못했다. 주변에 듣는 귀도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살인죄를 알게 되면 지금은 호의적인 상대의 태도가 어떻게 변할지 가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답을 망설이는 서서를 본 제갈현은 어조를 바꾸어 다시 말했다.

선생을 곤란하게 하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허나 방금과 같은 수모를 또 겪지 않으시리라는 보장이 없으니, 당분간은 저희와 동행하시는 것이 어떨까 하는 말씀을 드리고자 했던 것입니다.”

서서는 제갈현의 말을 금방 이해할 수 없었다. 그의 대답이 늦어지는 것이 거절의 뜻이라고 생각한 제갈현은 급히 말을 덧붙였다.

다른 부탁을 드리려는 것은 아닙니다. 조금 전에 량이 둘러대었듯, 저희 식솔들과 동행하시며 선복이라는 이름으로 신분을 속이시는 것은 어떠하신지 여쭈는 것입니다. 물론 정말로 가노로 부리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량과 함께 지내시며 혹여 아이가 또 아프거나 쓰러지거든 돌봐주실 수 있겠습니까? 길은 혼잡하고 일이 번잡하여, 저 혼자 어린아이까지 모두 챙기기에는 힘이 부쳐 그렇습니다.”

아이는 서서의 소매를 붙잡은 채 올려다보았다. 허락하라는 표정이었다. 전혀 거절할 이유가 없는 제안이었다. 그러나 서서는 그간 살아온 환경 탓인지 선뜻 그러겠노라 대답할 수가 없었다. 한참을 망설이던 서서가 이윽고 꺼낸 말은, 대답이 아닌 질문이었다.

어째서 저를 이렇게까지 도와주시는지요? 저는 의심이 많아 호의로 베풀어주신 은혜에도 선뜻 답을 드릴 수가 없습니다.”

아닙니다. 이 난세에 누가 남을 쉬이 믿을 수 있겠습니까. 다만 량은 돌아가신 제 형님이 맡겨주신 아이로, 제겐 아들이나 다름없습니다. 제 불찰로 아이를 잃어버려 세상이 무너지는 듯 했는데, 이토록 무사히 돌아오게 된 것은 모두 하늘의 덕이요 선생의 은혜입니다. 저는 다만 그 은혜를 갚고자 함이니, 부디 의심하지 마십시오. 또한 량에게는 선생과 연배가 비슷한 형이 하나 있었는데, 피난길에 갑작스레 떨어지게 되어 적잖이 외로움을 타는 모양이니, 선생께서 량을 형제 대하듯 하여주시면 저는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서서는 다시 제 소매를 잡아당기는 아이의 힘을 느꼈다. 아이에게로 시선을 돌리자,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서서는 피식 웃어버리고 말았다. 아이의 표정이 너무나 분명했기에, 너도 정말 그랬으면 좋겠냐고 새삼 물을 것도 없었다.

감사합니다. 그럼 염치 불구하고 신세를 지겠습니다.”

서서는 제갈현에게 공손히 인사하며 답했다. 제갈량은 서서의 그 말을 듣고 활짝 웃으며, 소매를 놓고 그의 손을 잡았다.

'기타 > 삼국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자룡공명] 제갈부인전  (0) 2017.12.04
[서서제갈] 살인의 추억  (0) 2017.12.04
[IF썰] 이릉대전 下  (0) 2017.11.17
[IF썰] 이릉대전 上  (0) 2017.11.16
[IF썰/(弱)조조공명] 빈 찬합  (0) 2017.11.13
AND

ARTICLE CATEGORY

분류 전체보기 (119)
미애만 (10)
일애만 (2)
스타트렉 (15)
룬의아이들 (0)
드라마 (25)
웹툰 (37)
게임 (1)
(14)
기타 (11)
1차창작 (1)
자캐커뮤 (1)
로오히 (1)

RECENT ARTICLE

RECENT COMMENT

CALENDAR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ARCHI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