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슬라이/현대au] 2017.07.16 롤겜만화 전력 21회 - 장마
너와 나는 아주 오랜 시간을 함께했고, 너는 언제나 나의 첫 사람이었다. 처음 사귄 친구였으며, 처음으로 좋아한 사람이었다. 나는 처음으로 아픈 짝사랑이라는 것을 해보았다. 처음으로 누군가를 생각하며, 늦은 밤 홀로 울어보았다.
너는 나를 챙겨주는 것을 무척 잘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를 잘 알아챘고, 내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도 잘 알고 있었다. 오직 내가 너를 원한다는, 단 한 가지 문제에 대한 갈망만을 눈치 채지 못했다.
언젠가 약속시간에 늦어 급하게 집에서 뛰쳐나온 날, 나는 우산을 깜빡하고 놓고나왔다. 꼼꼼한 너는 우산을 챙겨 나왔고. 언제나 역 앞에서 헤어졌던 날들과는 다르게, 그날 너는 우리 집까지 나를 바래다주었다. 우산 하나를 나눠 쓰고 집으로 걸어가는 그 시간이 너무 기뻐서, 그 뒤로 나는 종종 일부러 우산을 잊고나왔다. 그럴 때마다 너는 웃으며, 나를 집까지 바래다주었다.
언제부턴가 나는, 너를 만나러 갈 때에는 우산을 챙기지 않게 되었다. 항상 본체만체 해왔던 일기예보를 꼼꼼하게 확인하고, 일부러 비가 오는 날만을 골라 약속을 잡았다. 너는 늘 알겠다며 웃었다. 너와 내가 만나는 날마다 비가 왔지만, 너는 단 한 번도 나에게 투덜거리거나 약속을 미룬 적이 없었다. 그저 잘생긴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를 띤 채로, 왔어, 라이퀴아, 하고. 다정한 말투로 말을 건넸을 뿐이었다.
어느 날은 너조차도 우산이 없었다. 예고하지 않은 소나기가 내린 날이었다. 너는 우산을 사오겠다며 편의점에 들어갔다. 그날도 나는 네가 나를 집까지 바래다줄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편의점에서 나온 네 손에는 두 개의 우산이 들려있었다.
너 가져. 안 돌려줘도 돼. 상냥하게 말하며 내 손에 우산을 쥐여 준 너는, 먼저 우산을 쓰고 빗속으로 걸어 나갔다. 두어 걸음을 먼저 걸어간 너는, 네 뒷모습을 바라보며 우두커니 서있는 나를 돌아보았다. 네 얼굴에 의아한 기색이 비치기 전에, 나는 황급히 우산을 쓰고 네 뒤를 따랐다.
너와 나는 나란히 걸어갔지만, 우산은 두 개였다. 팔에 스치는 온기도, 한쪽 어깨를 축축하게 적시는 차가운 빗방울의 감촉도 없었다. 네가 사준 우산은 꽤 큰 것이었기 때문에, 그날 집으로 돌아온 내 어깨는 말라있었다.
아주 오랜만에, 다시 한 번, 늦은 밤, 홀로 울었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비가 오는 날마다 약속을 잡았다. 네가 무심하게 사주었을 우산이 집에 점점 쌓여갔다. 가끔은 네가 우산을 두 개 챙겨 나오는 날도 있었다. 네 우산을 빌린 다음날이면, 우산을 돌려준다는 명목으로 다시 너를 만날 수 있었기 때문에, 네 우산을 빌리는 것은 그렇게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래도 여전히, 우리는 두 개의 우산을 썼다.
장마가 찾아왔고, 매일같이 비가 내렸다. 나는 매일같이 너를 불러냈다. 너는 매일같이 나의 부름에 응했다. 덥고 습기 찬 날은 으레 불쾌해야 마땅하지만, 나는 그런 불쾌함조차 느낄 줄을 몰랐다. 마치 네게는 체온이 없는 것처럼, 네 곁에 바짝 붙어서있는 것은 즐겁고 행복하기 짝이 없었다. 너는 아니었겠지만. 그래도 너는 나를 밀어내거나 먼저 자리를 피하지 않았다. 나는 그것으로도 만족한 척을 할 줄 아는 아이가 되어있었다.
그날도 역시 장마였다. 집에서 나서기 전부터 비가 퍼붓고 있었다. 우산을 깜빡했다는 핑계를 댈 수는 없겠지 싶었다. 나는 네가 사준 우산 중 하나를 골라들었다. 네 눈동자 색을 꼭 닮은 청록색 우산이었다.
약속장소에서 나를 기다리는 너는, 검은 단색 우산을 쓰고 있었다. 나는 우산을 쓴 채 네게 달려갔다. 발을 내딛을 때마다 바닥에 고인 빗물이 튀었다. 너는 웃으며 가볍게 타박 아닌 타박을 주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양 웃어 보이고, 우산을 살짝 기울여 우산 위의 빗물을 쏟아버렸다. 약한 바람이 부는 날이었다. 사선으로 내린 빗줄기가 신발과 바지 끝단을 적셨다.
너와 함께 있는 시간은 짧디 짧았다. 평소와 똑같은 시간이 흘러도, 너와 함께 있는 날은 유독 그랬다.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을 때, 사람으로 가득한 지하철은 습하고 더웠다. 사람들의 우산이 다리에 부딪히며 바지를 적시고, 우산에서 떨어진 빗물이 발목을 타고 신발 속으로 들어왔다.
앉는 것은 꿈도 꿀 수 없을 만큼 지하철이 붐비는 날마다, 너는 늘 나에게 벽이나 구석진 자리를 양보했다. 내가 벽에 등을 대고 서면, 내 앞에 버텨선 너는 양팔로 벽을 짚어 내게 공간을 만들어주었다. 더운 여름에도 너에게선 땀 냄새 대신 좋은 냄새가 났다.
너는 내 말에 대답하거나, 휴대폰을 들여다보거나, 유리창에 맺혀 굴러가는 빗방울을 바라보았다. 나는 네 목소리를 듣는 것이 좋았고, 집중한 네 얼굴을 보는 것이 좋았고,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는 네 모습을 흘끔거리며 훔쳐보는 것이 좋았다. 그 시간은 즐겁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동시에 반길 수 없는 시간이었다. 이 시간이 길어질수록, 다시 두 개의 우산을 펴야하는 시간은 다가오고 있다는 뜻이었다. 나는 그 시간이 너무 아까워, 단 한 순간도 낭비하지 않으려 애를 썼다. 네가 시선을 돌릴 때마다, 내 시선은 네 얼굴을 쫓았다.
나는 단 한 번도 시선을 돌린 적이 없었기 때문에, 혹은 짧게 시선을 돌렸다가도 다시 네 얼굴이 보고 싶어 고개를 돌려버렸기 때문에, 늦은 밤의 지하철에서 창밖을 물끄러미 바라본 일이 거의 없었다. 다른 생각을 할 여유도 없었다. 어두운 밤의 유리창은 거울이나 다름없다는 것에 생각이 미치지 않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역에서 내린 우리는 익숙한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너와 나는 다른 출구로 나가야하지만, 너는 언제나 내가 가는 출구까지 따라 와줬다. 오늘도 너는 나를 따라왔다. 길고 긴 계단의 마지막 층계를 밟는 순간, 나는 다시 씁쓸해지려는 마음을 다잡았다.
들어가, 라이퀴아. 도착하면 연락하고. 다정한 네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들고 있던 우산의 손잡이를 꽉 움켜쥐었다. 이슬레이. 네 이름을 다급하게 부르자, 돌아서려던 너는 움직임을 멈추고 나를 보았다.
왜 그래? 물어보는 목소리는 다정하다. 나는 터질 것처럼 뛰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며, 용기를 짜내 입을 열었다. 우산 같이 쓰면 안 돼?
우산을 손에 들고 할 수 있는 말 중에, 가장 멍청하고 어이없는 말일 것이다. 너는 청록색 눈을 깜빡이며 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조금 울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순간의 충동을 참지 못한 혀를 깨물어버리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농담이었다고, 잘 가라고 인사를 해야 했다. 다음번의 만남을 위해서는, 이 상황을 수습해야했다.
너의 나직한 웃음소리에 말문이 막혔다. 너는 접었던 우산을 펴며, 먼저 빗속으로 걸어 나갔다. 그리고 우산을 조금 높이 치켜든 채, 내가 네 뒤를 따르기를, 네 우산 속으로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나는 네 우산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네가 가져온 우산은 두 사람이 쓰기엔 조금 작았다. 나도 너도, 한쪽 어깨가 젖어 들어갔다. 맞닿은 부분의 팔이 계속해서 스쳤다. 습기를 품은 공기는 끈적하고, 신발은 걸을 때마다 물이 배어나와 발바닥이 축축했다.
그러나 나는 불쾌한 줄도 몰랐다. 한 손에는 멀쩡한 우산을 들고, 나는 네 곁에 바짝 붙어 걸어갔다. 너에게선 좋은 냄새가 났다. 비 냄새도 향긋할 지경이었다.
오늘도 우산은 두 개였다. 그러나 팔에는 온기가 스쳤고, 한쪽 어깨는 젖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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