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슬라이/동양풍AU] 두 손 안의 황제
황궁은 가장 고귀한 이들의 거처였고, 소수의 황족들이 누리는 삶은 수많은 이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유지되고 있었다. 거대한 궁 안에는 남녀노소를 불문한, 많은 이들이 살고 있었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노예의 신분이나 다름없었다. 특히 관직에 나아갈 만큼 충분한 나이를 먹지 않은 아이들은 신분의 차이가 극명히 갈렸다.
이슬레이의 조부는 환관이었다. 그는 이십여 년 간 황제를 두 번이나 갈아치웠으며, 세 번째 황제를, 즉 지금의 황제를 모실 즈음엔 황제보다 더한 권력을 누리고 있었다. 그는 환관이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권력이라고도 할 수 있는 양자를 들였고, 머리가 희끗해질 즈음에는 손자를 보았다.
이슬레이는 어머니를 닮아 외모가 수려했으며, 아버지를 닮아 머리가 좋았다. 또한 그는 황궁의 안뜰을 마음껏 구경하고, 꽃을 꺾어도 혼나지 않는 몇 안 되는 아이 중 하나였다. 조부의 손을 잡고 처음 황궁에 왔던 날, 이슬레이는 화려한 건물과 아름다운 정원을 마음에 들어 했다.
그러나 아이의 흥미는 생각보다 금방 떨어졌고, 그는 정원의 일부분을 망가트리거나 제 또래 하인, 하녀들을 괴롭히는 것에 재미를 붙였다. 궁녀들과 환관들은 황제의 소유였으나, 그는 황족보다도 귀한 아이이니 누구도 나무랄 수는 없었다.
이슬레이는 연못가에 핀 수국을 꺾어들었다. 하얀 손가락이 연약한 꽃잎을 부드럽게 훑다가, 꽃송이를 꽉 움켜쥐었다. 꽃이 망가지며 풀냄새가 훅 끼쳤다. 이슬레이는 손 안에서 망가진 수국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미련 없이 연못 안으로 던져 넣었다. 비단잉어 몇 마리가 모여들었다. 이제 누군가는 저 꽃잎들을 건져내기 위해 연못 속으로 뛰어들어야 할 테지만, 그것은 자신이 신경 쓸 바가 아니었다.
이슬레이는 몸을 돌렸다. 환관 몇이 제 뒤를 따르고 있었다. 소년이 작은 손을 내밀자, 환관들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비단보를 꺼냈다. 소년의 손에 묻었던 풀물은 매화꽃을 수놓은 새하얀 비단보로 옮겨갔다.
“네가 자꾸 꽃을 망가트리는 거야?”
이슬레이는 등 뒤에서 들려온 앳된 목소리에 눈썹을 까딱였다. 고작 일곱 살 된 아이가 짓기에는 지나치게 신경질적인 표정이 스쳐지나갔다. 이슬레이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저보다 조금 더 작고 어려보이는 아이가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는 환관이나 궁녀를 대동하고 있거나 화려한 장신구를 차고 있지는 않았으나, 외국에서 들여온 귀한 옷감으로 지은 옷을 입고 있었다. 이슬레이는 고개를 살짝 치켜들었다. 내리깐 눈은 서늘한 빛을 품고 있었다.
“그래.”
“왜 망가트리는 거야?”
“내가 그러고 싶으니까.”
“그것보다 재미있는 놀이도 많잖아.”
“재미없어. 따분해.”
“정말?”
이슬레이의 눈이 가늘어졌다. 자신은 날 때부터 세상에서 가장 귀한 아이로 태어났다. 하늘의 아들이라는 황제는 자신의 조부를 아버지라 부르며 따른다. 그렇다면 조부는 곧 하늘이고, 자신은 하늘의 혈육이다.
그런 자신에게 똑바로 말을 걸어올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자신의 몸에 작은 생채기라도 생기면, 유모는 심한 매를 맞고 쫓겨났다. 하인들은 언제나 고개를 조아렸고, 어른들도 제 눈치를 살폈다. 아이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혹여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이 제게 시비를 걸었다가 울면서 돌아간 날 저녁이면, 그 아이의 아비가 아이의 손을 잡고 찾아와 머리에서 피가 날 때까지 바닥에 머리를 처박아댔다.
이슬레이의 뒤를 따르던 환관과 궁녀들은 작은 아이의 얼굴을 보고 당황한 듯 술렁였지만, 이슬레이는 눈앞의 아이가 누구든지 상관없었다. 아이 역시 불친절한 이슬레이의 태도를 신경 쓰지 않는 듯 보였다. 아이는 이슬레이를 향해, 고사리 같은 손을 내밀었다.
“나랑 같이 놀자. 난 재미있고 귀한 장난감이 많아.”
“장난감은 나도 가지고 있어. 지금은 없지만.”
“하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더 많을걸.”
아이의 말에 이슬레이는 노골적으로 얼굴을 찡그렸다. 그는 더할 나위 없이 풍족한 환경에서 자라왔기에, 별것 아닌 그 말이 일종의 모욕으로 들릴 지경이었다.
“좋아, 한 번 보자.”
이슬레이는 아이의 손을 잡았다. 아이는 방긋 웃음을 지어보이고, 이슬레이의 손을 잡아끌었다. 아이는 제법 기분이 들떠보였다. 서두르다가 옷자락을 밟고 넘어질 뻔한 것을, 이슬레이가 붙잡아주기까지 했다.
이슬레이가 조부와 함께 가마에 올랐을 때, 이슬레이의 손에는 황금으로 만든 새장이 들려있었다. 새장 안에는 눈처럼 흰 깃털을 가진 잉꼬 두 마리가 깃털을 손질하고 있었다. 이슬레이는 다정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조부에게, 황금새장을 들어보이며 사실대로 대답했다.
“라이퀴아라는 애가 준 거예요.”
“라이퀴아? 라이퀴아라면..”
노인의 눈이 일순 가늘어졌다. 황궁에 그 이름을 가진 아이는 단 한 명뿐이었다.
그다지 총애를 받지 못했던 후궁이 죽어가며 낳은 아이. 태후는 관심조차 주지 않았고, 가진 권력이라곤 쌀 한 톨 만큼도 없는 애물단지. 황제의 씨로 태어나긴 했으나, 가까이 둔다고 해서 어떠한 이득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 애가 마음에 드니?”
“잘 모르겠어요. 심심해서 잠깐 같이 놀았던 것뿐이에요.”
“그렇구나.”
이슬레이는 제 머리를 쓰다듬는 조부에게 편안하게 몸을 기댔다. 새장의 창살 사이로 손가락을 밀어 넣자, 순한 잉꼬가 소년의 손끝에 부리를 비볐다.
노인은 아이의 작은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아끼는 손자가 처음으로 만든 또래친구에, 벌써부터 간섭을 하고 싶진 않았다. 아이가 싫증을 낸다면, 그때 가서 치워버리면 될 일이었다. 이슬레이는 많은 것들에 대해 쉽게 싫증을 내어왔다. 사람이라고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선물을 받았으니 답례를 해야겠구나. 내일은 과자라도 들고 갈 테냐?”
노인의 물음에 이슬레이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할아버지.”
***
“안녕, 이슬레이.”
“안녕.”
라이퀴아의 정체를 대강은 알고 있음에도 여전한 하대에, 환관들은 불안한 기색으로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누각에 앉아 푸른 청옥을 깎아 만든 구슬을 가지고 놀고 있던 라이퀴아는, 이슬레이의 방문이 반가운지 살가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다시 올 줄은 몰랐어.”
“그래?”
이슬레이가 가볍게 고갯짓을 하자, 환관들은 받쳐 들고 있던 작은 상을 두 사람 앞에 내려놓았다. 화려한 화과자와 달콤한 향기가 나는 차에, 라이퀴아의 표정이 조금 더 밝아졌다.
“와, 예쁘다.”
“잉꼬에 대한 답례야.”
라이퀴아는 화과자를 손으로 덥썩 집어 입으로 가져갔다. 다도와는 거리가 먼 그 행동에 이슬레이의 미간이 조금 좁아졌다. 그러나 별다른 핀잔을 주지는 않았다.
바람이 불 때마다 누각 위로 늘어진 나뭇가지가 흔들리며 소리를 냈다. 이슬레이는 억지로 대화를 이어가려 머리를 싸매지 않았다. 라이퀴아도 그런 냉랭한 태도에 거부감을 나타내지 않았다. 일곱 살, 다섯 살 먹은 두 아이는 나란히 누각에 앉아, 잔잔한 연못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너는 왜 혼자 돌아다녀?”
“응?”
무심한 이슬레이의 물음에 라이퀴아는 눈을 깜빡였다. 이슬레이의 시선은 과자부스러기로 지저분해진 라이퀴아의 무릎에 머물러있었다.
“내관이든 궁녀든, 시중을 들어줄 사람이 없잖아.”
이슬레이는 누각 아래 고개를 조아리고 서있는 환관들을 고갯짓으로 가리켰다. 라이퀴아는 옷 위로 떨어진 부스러기를 털어내며 작은 소리로 웃었다.
“죽고 싶지 않아서 그래.”
“무슨 소리야, 그건 또.”
“난 형제들이 아주 많아. 그리고 나중에 형님들 중 누군가가 황제가 된다면, 많은 형님과 누이들이 죽거나 궁 밖으로 나갈 거야. 아바마마도 마찬가지셨으니까.”
라이퀴아는 작은 찻잔을 들어올렸다. 도자기찻잔이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라이퀴아는 아주 미세하게, 손을 떨고 있었다.
“난 죽고 싶지도 않고, 궁 밖으로 나가고 싶지도 않아서..”
“그럼 황제가 되면 되잖아?”
라이퀴아는 이슬레이의 말에 깜짝 놀라며 누각 아래 늘어선 환관들을 쳐다보았다. 그들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고, 이슬레이도 크게 걱정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그러나 라이퀴아는 불안한 얼굴로 제 옷자락을 만지작거리며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런 말 함부로 하면 안 돼..”
이슬레이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고, 조금 식은 차를 한 모금 더 마셨을 뿐이었다.
***
“할아버지.”
이슬레이는 발판을 밟고 의자 위로 기어 올라갔다. 하인 하나가 냉큼 찻잔을 내어왔다. 노인은 손자의 찻잔에 직접 차를 따라주고, 작은 손에 다과를 쥐어주었다.
“무슨 일이냐?”
“할아버지는 황제를 두 번이나 바꾸셨지요?”
노인이 눈짓하자, 자리를 지키고 있던 하인은 방을 빠져나갔다. 이슬레이의 말을 듣고서도 새삼 허둥거리지는 않았다. 그 정도로 겁이 많고 소란스러운 자였다면 애초에 그의 곁에 남기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랬지. 전대 황제와 지금의 황제를 모두 내 손으로 세웠단다.”
“황제를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황제를 네 손으로 만들고 싶으냐?”
이슬레이는 노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네.”
노인은 아이의 대답이 썩 마음에 드는지, 흡족한 미소를 띤 채 고개를 끄덕였다. 이슬레이는 손에 들린 과자를 입으로 가져가며,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제 조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래, 누구를 황제로 세우고 싶니?”
“라이퀴아요.”
"그래. 그 아이를 다음 황제로 만들어주마."
이슬레이는 과자를 앞니로 갉작이며 대답했고, 노인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양, 노인의 대답은 가볍기 그지없었다.
“못할 것도 없지. 하지만 나는 이제 나이가 제법 많단다. 그 아이가 성인이 될 쯤에는 더욱 늙어있겠지. 네 아비는 정치나 권력에 관심이 없는데, 내가 죽은 뒤에는 어찌하려고 그러니?”
“그땐 저도 어른이 되어있을 거예요.”
“할 수 있겠니?”
“어려운가요?”
아이의 당돌한 물음에 노인은 나직한 웃음을 터트렸다. 과자를 다 먹은 아이가 탁상 위로 손을 뻗었다. 노인은 가장 달고 맛있는 과자를 집어 아이의 손에 쥐어주었다.
“어려울 것 없지. 넌 영특하니, 가르치는 재미도 있겠구나. 배워볼 테냐? 어찌해야 황제를 통째로 손에 넣을 수 있는지 말이다.”
이슬레이는 그 말에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서 먹거라, 차가 식겠구나. 노인은 다정히 말하며 비어있는 자신의 찻잔에 차를 따랐다. 이슬레이는 손에 쥔 과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작게 한 입 베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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