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슬라이/판타지au] [Homunculus] - 09
“이봐, ‘선생님’.”
에이스의 부름에 라이퀴아와 아이작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갔다. 장작더미를 우르르 쏟아놓은 에이스가 뻐근한 어깨를 주무르며 라이퀴아의 곁으로 다가왔다. 아이작을 안은 채 현관계단에 앉아 볕을 쬐던 라이퀴아는, 옆으로 몸을 움직여 자리를 만들어주었다. 그의 옆에 에이스가 털썩 주저앉자, 아이작은 노골적으로 얼굴을 구겼다.
“고마워요. 삯은 드릴게요.”
“아니, 됐어. ‘우리사이’에 장작정도야 뭐. 그 팔뚝으로 제대로 나를 수나 있겠어? 이 꼬맹이는 어림도 없을 거고.”
그 말에 아이작은 에이스를 노려보았다. 푸른 눈동자가 어린아이치곤 제법 살벌한 눈빛을 띠었다. 그러나 에이스를 콧방귀도 끼지 않은 채, 한쪽 손으로 제 턱을 괴었다. 검을 쓰는 에이스의 손은 크고 거칠었다. 아이작은 제 작은 손을 흘끗 보다가, 라이퀴아의 옷자락을 꾹 움켜쥐며 품에 얼굴을 묻었다.
"그런데 말이야. 내가 마을에 떠도는 소문을 하나 들었는데."
라이퀴아는 어쩐지 시무룩해진 아이작의 등을 다정히 쓸어내리며 에이스를 보았다. 정리되지 않은 머리카락 사이로 언뜻 보이는 눈매는 여전히 사나웠지만, 라이퀴아는 그가 인상만큼 난폭하거나 사나운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경계가 심한 아이작과도 곧잘 어울려주었고, 제게도 제법 살갑게 대해주었다. 처음에는 응석이라는 남자의 중재가 없으면 대화를 제대로 이어가지도 못할 정도였지만.
“소문이라뇨?”
“댁이 왕년에 어디 신을 모시던 신관이었다고.”
아이작의 등을 토닥이던 손이 잠시 멈칫했다.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다. 손끝이 떨리거나 손짓이 어색해지지도 않았다. 그러나 아이작은 의아한 표정으로 라이퀴아를 올려다보았고, 에이스의 눈은 가늘어졌다.
“왜 그런 소문이 퍼졌지.”
“아주 퍼진 건 아니야. 아직 네가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도 많던데..”
에이스는 라이퀴아를 처음 만난 날로부터 날짜를 세어보았다. 벌써 계절이 두 번 바뀌었다. 적어도 반년 이상은 지났다는 소리다. 생필품을 구하기 위해 마을에도 자주 내려갔으며, 마을사람들과 교류가 전혀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존재감은 신기할 정도로 희미했다.
에이스가 소문을 듣게 된 것도 우연이었고, 저 산에 사는 남자가 실은 어디서 신을 모신 적이 있다더라, 하는 지나가는 말이었다. 에이스는 애초에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냥 생각이 나 문득 던져봤다고 하는 편이 옳았다.
“진짜야?”
“아뇨.”
“와, 거짓말 진짜 못한다. 너 말이야, 전부터 생각한 건데..”
“선생님 괴롭히지 마세요.”
아이작이 에이스의 말허리를 잘라먹었다. 라이퀴아는 그런 아이작을 나무라듯 어깨를 살짝 움켜쥐었으나, 소년을 실제로 혼내지는 않았다. 에이스는 아이작을 향해 눈을 부라렸으나, 아이작은 조금도 주눅 들지 않은 채 에이스를 향해 혀를 낼름 내밀곤 라이퀴아의 옷자락을 꼭 움켜쥐었다.
“아, 됐다. 솔직히 상관없거든. 그냥 궁금해서 물어보고 싶었던 것뿐이지.”
“뭐가 궁금한데요?”
“내가 지금까진 종교나 공부에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었거든. 그런데 갑자기 막 신앙심이 샘솟네.”
에이스는 히죽 웃으며 라이퀴아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아이작은 커다란 에이스의 손을 노려보며 깨물까 말까 진지한 고민을 해야 했다.
“이제 와서 종교에 귀의해보려는 불민한 중생에게 가르침을 내려주십사 부탁해도 되나 싶어서 말이야. 침대 위에서면 더 좋고. 밤새도록 열중할 자신 있거든.”
“저런, 불쌍해라. 힘들어서 아주 정신을 놔버렸구나. 그러게 좀 쉬었다가 하라니까.”
반년이 넘는 시간동안 간간히 물을 길어다주거나 장작을 날라주면서, 에이스는 수도 없이 ‘수작’이라고 불릴만한 말들을 몇 번이나 던져왔다. 그럴 때마다 라이퀴아는 정중하게 대꾸하거나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피했다. 그러나 일정한 선을 넘어가면 단호하게 끊어내고 자리를 떴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턴 존댓말 사이사이에는 간간히 반말이 섞여 나오기 시작했으며, 점점 그 선이 뒤로 물러나는 것도 느껴졌다. 느리지만 착실한 변화에, 에이스는 드물게 인내심을 가지고 오랫동안 기다리는 중이었다. 일정에 차질이 생긴다는 부하들의 불만도 무시한 채, 이 궁벽한 시골마을에 반년을 넘게 엉덩이를 붙이고 있는 것이다.
라이퀴아는 아이작을 품에서 내려놓고 몸을 일으켰다. 착하게 자신을 올려다보는 아이작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준 라이퀴아는, 물과 돈을 가져오겠다며 집안으로 들어갔다.
“왜 자꾸 선생님을 괴롭혀요?”
아이작은 불만 가득한 얼굴로 에이스를 노려보았다. 에이스는 웃기지도 않은 이야기를 들었다는 양 피식 헛웃음을 흘리며 아이작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뭐, 임마. 내가 언제?”
“선생님은 옛날이야기 안 좋아한단 말이에요. 하지 말아요.”
“내가 알아서 해. 꼬맹이는 어른들 말하는데 끼어들 생각 하지 말고 들어가서 낮잠이나 자지 그래?”
“당신이 선생님에 대해 뭘 안다는 거야.”
아이작은 계단에 앉아있던 몸을 벌떡 일으켰다. 분노로 가늘게 어깨가 떨리고, 숨이 씨근거렸다. 어린아이라곤 생각할 수 없는 복잡한 눈빛이 어렸다. 그러나 에이스는 여전히 가소롭다는 얼굴로, 아이작을 향해 까딱 턱짓을 했을 뿐이었다.
“넌 선생님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
소년의 목소리가 스산하게 들려왔다. 작은 손이 주먹을 쥐었다 펴며 꼼지락거렸다.
“라이퀴아를 상처 입히지 마. 가만히 놔두지 않을 거야.”
“허. 네가 가만두지 않으면 어쩔 건데. 때리기라도 하려고?”
“죽일 거야.”
망설임 없이 대답한 소년은, 가볍게 움켜쥔 주먹을 입 앞으로 가져갔다. 에이스는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리며 다시 손을 뻗어 아이작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애들이야 언제나 죽인다는 말을 쉽게 입에 담았고, 실제로도 사납거나 잔혹한 일들을 곧잘 떠올리기도 했다. 나이에 비해 살기는 제법 날카로웠으나, 그래봐야 열 살도 되지 않은 작은 아이일 뿐이었다.
“아서라, 네가 무슨. 어디서 그런 소리 함부로 하면 네 ‘선생님’ 욕먹어.”
“내가 못할 것 같아?”
“허어? 이 꼬맹이가 별..”
에이스는 눈을 가늘게 뜨고 아이작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소년의 손가락 사이로 붉은 빛이 일렁인 것 같았다.
마당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또 장난을 치고 있는 모양이지, 라이퀴아는 그렇게 생각하며 차가운 물이 든 컵과 동전을 세어둔 주머니를 챙겼다. 평소에 지불하던 금액보다 액수를 조금 늘렸다. 힐더는 생각보다 유명한 용병들이었고, 그만큼 몸값도 높았으며, 이정도의 액수야 우스우리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에이스는 분명히 라이퀴아에게 많은 것을 해주고 있었고, 어떤 식으로든 그에 따른 보답을 해주고 싶었다. 그가 수십 번을 던져온 농담처럼 몸을 내어줄 수도, 마음의 한 자락을 나눠줄 수도 없었다. 결국 그가 줄 수 있는 것은 약간의 돈 뿐이었다.
문을 열고 마당으로 나섰을 때, 쏟아지는 햇살을 뚫고 두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흐트러진 차림새로 아이작의 팔을 낚아채 잡고 있는 에이스와, 그에게 한쪽 팔을 잡힌 채 버둥거리고 있는 아이작. 아이작의 두 다리는 땅에서 떨어져 있었다. 그것을 본 순간, 라이퀴아는 들고 있던 컵을 떨어트리고 말았다.
“아, 마침 잘 나왔다. 너 미쳤어? 이 어린애한테 마법을 함부로 가르치면..”
“당장 내려놔!”
라이퀴아가 고함을 지르고, 동시에 어린아이의 날카로운 비명이 허공을 찢었다. 투둑. 에이스는 무언가가 끊어져나가는 파열음을 들었다. 발버둥을 치던 아이작의 몸이 바닥으로 툭 떨어지고, 애처로운 신음과 울음이 터져나왔다.
에이스가 소년의 팔을 놓친 것이 아니다. 소년의 팔이, 인간의 몸이라면 결코 일어나지 않을 형태로, 그대로 찢어져 떨어져버린 것이다.
라이퀴아는 아이작에게로 황급히 달려가 작은 몸을 일으켜 품에 안았다. 옷소매가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액체로 젖어들었다. 에이스를 노려보는 라이퀴아의 눈에 격렬한 원망과 분노가, 동시에 약간의 두려움이 어렸다.
“뭐.. 이게 뭐야?”
“당장 꺼져.”
라이퀴아는 에이스의 얼굴을 향해 쥐고 있던 주머니를 집어던졌다. 덜렁거리는 어린아이의 팔을 붙잡고 당황하고 있던 에이스는, 동전이 가득 들어있는 주머니에 직격으로 얼굴을 맞고 비틀거렸다. 라이퀴아는 그의 손에서 찢겨나간 팔을 낚아채며 몸을 일으켰다. 아이작은 품 안에서 애써 울음을 삼키며, 작은 몸을 가늘게 떨고 있었다.
“다신 찾아오지 마.”
라이퀴아는 아이의 몸을 안고 급히 집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거칠게 닫혔다. 에이스는 멍하니 서서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그는 검을 잡고 사는 용병이었고, 의사와는 다른 의미로 사람의 몸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사람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적어도 사람의 몸은 기본적인 내구성을 갖추고 있다. 한쪽 팔을 잡고 들어 올렸더라도, 어깨가 탈구되거나 근육이 다칠 수는 있지만 저런 식으로 팔이 완전히 찢겨나갈 수는 없는 것이다.
에이스는 천천히 바닥으로 시선을 떨어트렸다. 바닥은 검은 액체로 흠뻑 젖어있었다. 그는 천천히 허리를 숙여 검게 물든 흙을 만져보았다. 피는 아니었다. 피라고 하기엔 점성이 없었고, 묘한 냄새가 나는 액체였다.
에이스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는 조용히 귀를 기울여 보았으나, 집안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없었다.
“..아, 망할. 뭐가 뭔지, 진짜..”
에이스는 혀를 차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이작이 가지고 놀았는지, 마당 한구석에 아무렇게나 굴러다니고 있는 빗자루가 보였다. 에이스는 빗자루를 가져와 검게 변해버린 흙을 덮고, 주변을 휘 둘러보았다. 멀리서나마 아이의 비명소리를 들었다면 한 번쯤 무슨 일인가 살피러 올 법도 하건만, 인적 드문 산속엔 아무도 없는 모양이었다.
에이스는 바닥에 굴러다니는 돈주머니를 주워들었다. 동전으로 가득한 주머니는 제법 묵직했다. 그는 동전 주머니를 만지작거리다가, 머리를 묶은 끈을 풀어 한쪽 끝을 주머니에 덧대어 묶었다. 나머지 끝은 문고리에 단단히 매어두고, 빈손으로 그 자리를 떠났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
“아이작. 아이작.”
아이작은 자신을 다급하게 부르는 라이퀴아의 목소리에 천천히 눈을 떴다. 라이퀴아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아이작의 어깨를 꽉 움켜쥐고 있었다. 하얀 손가락 사이로 쉴 새 없이 검은 물이 뿜어져 나왔다.
아이작은 설핏 웃으며 손을 뻗었다. 라이퀴아의 얼굴에 튄 검은 자국을 닦아주려 했으나, 이미 소년의 손도 지저분해진 뒤였다.
보통 사람이라면 팔이 찢겨나가는 순간 쇼크로 정신을 잃거나, 이미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이작은 통증에 몸을 떨면서도, 라이퀴아를 향해 웃어줄 만큼의 여유는 유지할 수 있었다.
“죄.. 송해요, 선생님..”
“아니야. 미안해. 미안해, 아이작. 조금만 참아. 금방 고쳐줄게.”
“선생님, 울지.. 마세요..”
아이작의 얼굴 위로, 맑은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라이퀴아가 주문을 외우자, 아이작의 눈이 스르륵 감겼다. 가물거리던 푸른 눈동자는 마지막까지 라이퀴아의 얼굴을 비췄다.
라이퀴아는 평온한 숨을 내쉬며 잠든 아이의 얼굴을 잠시 들여다보다가, 몸을 일으켜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방을 절반은 채울 커다란 테이블 위에 쌓여있던 것들을 한쪽으로 몰아내고, 축 늘어진 아이의 작은 몸을 눕혔다. 작은 가위로 상의를 찢어 벗기고, 찢겨나간 팔을 옆에 내려두었다. ‘작업’에 필요한 약품과 도구들을 꺼내는 손길은 분주했다.
-울려버렸네.
아이작은 나긋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아름다운 얼굴의 남자가, 남자의 푸른 눈 눈동자가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네.”
아이작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울지도, 떨지도, 화를 내지도 않았다. 남자는 아이작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눈높이를 맞췄다. 꼭 닮은 두 개의 눈동자가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전 벌을 받아야 해요.”
아이작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꿈속의 자신은 온전한 두 팔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저는 저를 용서할 수 없어요. 그러니 저에겐 벌이 필요해요.”
-알고 있어. 네게 그 맹세를 시킨 건 나니까. 너는 기억하지 못하는 모양이지. 그게 네 스스로 한 생각인 줄 알았어?
남자는 아이작을 향해 손을 뻗었고, 아이작은 남자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조심스럽게 얹었다. 남자의 손은 크고, 희었으며, 곧은 뼈대를 가지고 있었다.
“제게 벌을 주시나요?”
아이작을 바라보는 남자의 눈에서, 온기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라이퀴아는 언제나 아이작을 다정하게 바라보았고, 그와 시도 때도 없이 다투는 에이스 역시 눈빛엔 활기와 열기가 있었다. 그러나 이 남자는, 언제나와 같이 무감정한 눈으로 자신을 평가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 라이퀴아는 너를 너무 쉽게 용서할 테니까.
남자는 아이작의 손을 감싸 쥐었다. 소름이 돋을 정도로 차가운 손이었다.
-내가 아니면 누가 널 벌할 수 있겠어.
남자는 아이작의 손을 천천히 잡아당겼다. 아이작의 작은 몸이 남자의 품에 폭 안겼다. 애정 한 조각 섞이지 않은 포옹은 전혀 기쁘지 않았고, 두근거리지도 않았으며, 위압감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남자는 아이작의 이마에 천천히 입술을 내렸다. 아이작은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남자의 등 뒤로, 흉측한 피막날개가 돋아난 것을 본 것 같았다. 눈을 한 번 깜빡이자, 날개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이건 무슨 벌인가요?”
-네가 내가 되는 벌이야.
보기 좋은 입술에 비스듬한 미소가 걸렸다. 아이작은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남자는 아이작의 고수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다정하기보단, 아무런 감정 없이 메말라 오히려 사려 깊어진 손길이었다.
-너는 내가 될 거야. 점점 나를 닮아갈 거야. 지금도 많은 부분을 닮았지만, 점점 더 많이 닮아가겠지.
남자는 아이작을 안은 팔을 풀어주었다. 라이퀴아가 그를 안았던 팔을 풀 때면, 아이작은 멀어지는 그 온기가 아쉬워 꼼지락거리거나 다시 라이퀴아의 품에 매달리곤 했다. 그러나 이 남자에게는 조금도 그럴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아이작은 눈앞의 남자에게 약간의 두려움까지 느끼고 있었다.
-아무것도 참지 마. 하고 싶은 것은 모두 하고, 마음껏 욕심과 투정을 부려. 원하는 것은 모두 손에 넣어.
남자의 말에 아이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아이작을 보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제발 부탁이야, 이슬레이..”
아이작은 천천히 눈을 떴다. 익숙한 천장이 보였다. 천천히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뒤돌아 앉은 라이퀴아의 작은 등이 보였다.
라이퀴아는 아이작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액자를 손에 쥐고 있었다. 정확히는 늘 책상 위에 뒤집어 놓여있어 그 안의 내용물을 확인할 수 없었던 액자였다. 라이퀴아는 아이작이 그의 물건을 함부로 만졌다고 해서 혼을 낸 적은 한 번도 없었으나, 아이작은 애초에 라이퀴아의 물건을 함부로 뒤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이번에도 널 잃을 순 없어..”
액자 속엔 누군가의 초상화처럼 보이는 그림이 꽂혀있었다. 검은 머리와 푸른 눈동자를 가진, 아름다운 얼굴의 남자였다. 아이작은 그 남자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
라이퀴아의 손가락이 액자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아이작은 입술을 달싹였다.
“선생.. 님..”
마른 목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갈라져 볼품없었지만, 라이퀴아는 반색을 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액자를 책상 위에 올려놓은 라이퀴아가 급히 침대로 다가와 아이작의 손을 잡았다. 찢겨나갔던 팔이 다시 붙었는지, 새로운 팔을 만들었는지, 어쨌든 손은 제대로 움직일 수 있었고 따듯한 온기도 느껴졌다.
“사흘 만에 깨어났어. 팔은 어때? 아프진 않니? 다른 데는 아픈 곳 없니?”
“목이 말라요.”
“그래. 물을 떠다 줄게.”
라이퀴아가 손을 놓고 일어나자, 아이작은 라이퀴아가 앉아있던 의자로 시선을 돌렸다.
“선생님.”
“응?”
“저 액자요.”
아이작이 의자 위에 눕혀놓은 액자를 가리키자, 라이퀴아의 입가가 조금 일그러졌다. 그러나 라이퀴아는 결국 액자를 집어, 아이작에게 건네주었다. 아이작은 깨끗하게 닦여있는 액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낯익은 얼굴이었으나, 다정한 미소를 띠고 있는 표정만큼은 낯설기 그지없었다.
“이 사람 이름이 이슬레이예요?”
“그래.”
“선생님이 사랑했던 사람이고요?”
아이작은 말문이 막힌 라이퀴아를 바라보며 설핏 미소를 지어보였다. 오랫동안 잠을 잔 얼굴은 조금 수척해 보였지만, 기분이 나빠 보이거나 슬퍼보이지는 않았다.
“..아이작.”
“전 이 사람을 알아요. 꿈에서 몇 번이나 봤어요. 이야기도 많이 해줬어요. 꿈이라서, 기억 못하는 것도 많지만.. 가끔은 잠이 안 들어도 목소리가 들려요. 가슴 속인지 머릿속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이작은 웃으며 액자를 돌려주었다. 돌려받는 라이퀴아의 손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아이작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정확히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긴장으로 속이 뒤집히고, 토할 것처럼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선생님.”
아이작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바닥을 딛는 걸음걸이가 비틀거려서, 라이퀴아는 황급히 아이작의 팔을 붙잡아주었다. 아이작의 작은 두 손이 라이퀴아의 손을 감싸 쥐었다. 라이퀴아는 아이작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푸른 눈을 멍하니 들여다보았다.
“선생님이 그 사람의 신이었대요.”
“..네가, 어떻게 그걸.”
“전 이제부터 그 사람이 될 거래요. 점점 닮아갈 거래요. 어떻게 되는지는 모르겠어요. 그 사람은 하나도 자세하게 말해주진 않아요. 그런데 자세하게 말해줘도, 어차피 전 못 알아들을 테니까 물어보진 않았어요. 전 선생님이 가르쳐주시는 공부도 아직 잘 모르잖아요.”
“아이작.. 아이작. 나는, 지금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 나는 지금..”
아이작은 라이퀴아의 손을 놓고, 목에 팔을 감아 꼭 끌어안았다. 작은 아이의 포옹은 부서질 듯 연약해서, 라이퀴아는 꼼짝도 하지 못한 채 그대로 굳어있을 수밖에 없었다.
“잘 모르겠는데, 무섭진 않아요. 선생님이 있어서 그런가봐요.”
“..아이작.”
아이작은 라이퀴아를 안았던 팔을 풀었다. 순진한 얼굴에 순진한 웃음이 피었다.
“그 사람은 선생님을 사랑한대요. 선생님은 그 사람의 신이었대요.”
아이작은 라이퀴아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자신의 작은 손 위에 라이퀴아의 손을 얹고,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웃었다.
“저도 선생님을 사랑해서 괜찮은가봐요. 선생님은 나한테도 신인 것 같아요.”
아이작은 사랑이 무엇인지, 신과 신앙은 어떤 것인지 알지 못했다. 아이작이 라이퀴아에게 물어본 적도, 라이퀴아가 아이작에게 설명을 해준 적도 없었다. 그러나 아이작은 그렇게 말하며 라이퀴아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그 눈빛도, 그 움직임도, 라이퀴아에게는 무척 낯익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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