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질하는 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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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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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이 닿지 않는 심해는 어둡고 추웠다. 기괴한 모양새의 물고기들이 두 사람의 곁을 스쳐지나갔다. 라이퀴아는 이슬레이의 목을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물살을 따라 너울거리는 자신의 옷자락이 거추장스러울 만도 하건만, 이슬레이는 별다른 내색 없이 라이퀴아를 더욱 품안으로 당겨 안으며 허리를 단단히 끌어안았다.


지금부터는 아무하고도 말을 하면 안 돼.”

누구를 만나러 가는 거야?”


이슬레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간단하게 설명할 수는 없는 문제였다.


. 그런데 좀 위험하거든.”

위험하다니?”

사기꾼 같은 작자야. 말을 아주 잘해. 만약 그 말장난에 휘말려서 자기도 모르게 대답을 해버리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나도 모르겠다. 무슨 일이든 벌일 수 있는 자니까.”


동굴의 입구는 거대한 바위틈 사이에 반쯤 가려져 쉽게 찾아낼 수 없었다. 라이퀴아의 발목에 감겨드는 억센 해초를 손으로 뜯어낸 이슬레이는, 긴장한 라이퀴아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춰주고 동굴 안으로 들어섰다.

그 순간, 날카로운 쇠붙이가 목덜미를 짓눌렀다. 이슬레이의 미간이 좁아졌다.


[무슨 짓이냐.]


이슬레이의 입술이 달싹이고, 라이퀴아는 알아들을 수 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슬레이는 라이퀴아의 어깨를 당겨 안으며 제 목에 칼을 들이댄 상대를 노려보았다. 검은 베일로 얼굴을 가린 인어가 두 사람을 서늘한 시선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예의를 갖춰라. 심해에서 가장 위대한 분의 거처다.]

[그 심해 역시 내 아버지의 지배하에 놓여있다는 것을 모르는 모양이지.]


굳은 표정으로 상대를 노려보던 이슬레이는, 라이퀴아를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잠깐만. 걱정하지 마. 별 일 없을 거야.”


나직하게 속삭이는 목소리는 평소와 다름없었다. 이슬레이는 라이퀴아를 안았던 팔을 풀고, 라이퀴아의 목에 닿은 칼날을 움켜쥐었다. 힘을 주어 칼날을 밀어내자, 날에 베인 손바닥에서 스며 나온 피가 물속으로 퍼져나갔다.

상대는 이슬레이의 말로 그의 정체를 유추한 뒤 제법 당황한 기색이었다. 이슬레이는 그의 손목을 비틀어 억지로 칼을 빼앗았다. 상아를 깎아 손잡이를 만들고 태양을 아로새긴 생김새로 미루어보아, 육지에서 만들어진 물건임이 분명했다. 적어도 바다에서 난 재료를 사용했다면 이슬레이의 몸에 상처를 낼 수는 없었을 테니까.


[네가 원하는 예의가 무엇인지 모르겠구나. 심해의 지배자에 대한 존경심을 담아 공물을 바치마. 그것이면 만족하겠느냐?]


이슬레이는 상대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자신의 긴 머리칼을 모아 쥐었다. 목덜미 뒤쪽으로 날카로운 칼날이 옮겨갔다.

썩둑, 탐스러운 머리채가 통째로 잘려나갔다. 이슬레이는 들고 있던 칼을 놓아버렸다. 칼은 가라앉으며, 동굴 바닥으로 천천히 떨어졌다. 칼날이 돌바닥에 부딪히는 소리는 그리 크게 나지 않았다.


[네 주인에게 전해주거라. 주술의 재료로 쓰기에 퍽 좋을 것이다.]


이슬레이는 검은 베일의 인어에게 자신의 머리채를 던져버리고 다시 라이퀴아를 끌어안았다. 그가 물속으로 퍼져나가는 검은 머리카락들을 황급히 움켜쥐고 긁어모으는 동안, 이슬레이는 라이퀴아를 데리고 그의 곁을 스쳐지나갔다.


저래도 괜찮아?”

걱정돼?”


라이퀴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이슬레이는 낮은 소리로 웃었다. 언짢은 기색은 아니었지만, 자존심이 조금 상한 것도 같았다.


감히 너를 위협했잖아. 내 눈 앞에서.”

네가 누구인지 몰랐나보지.”

상관없어. 내가 알바야?”


라이퀴아의 허리를 안은 팔에 힘이 들어갔다. 동굴의 벽을 따라 촘촘하게 박아놓은 이름 모를 원석에서 흘러나오는 빛이 조금씩 강해졌다. 라이퀴아는 푸르스름한 빛이 어린 이슬레이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지금은 잘 보여야 하니까 참아 준거야.”

잘 보이다니?”

이 동굴의 주인한테 말이야.”


라이퀴아는 동굴의 벽에 이상한 모양의 그림자가 꿈틀거리는 것을 보았다. 라이퀴아의 눈이 커지는 순간, 그림자는 웅크리고 있던 몸을 일으켰다. 이슬레이는 그 자리에 멈춰섰다.


잘 아시는군요.”


쇠를 긁어내듯, 소름끼치고 거슬리는 목소리였다. 라이퀴아는 귀를 막고 싶은 것을 억지로 눌러 참았다. ‘잘 보여야 한다는 말이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대놓고 귀를 틀어막는 행동이 그림자의 주인을 언짢게 만들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모든 물의 주인이 되실 첫 번째 왕자님. 부디 바다와 같은 넓은 아량으로 제 수하의 무례를 용서해주시길. 평생 빛을 보지 못하고 자란 놈인지라, 귀하신 분의 존안을 알아보지 못한 것뿐입니다.”

불경한 말은 그쯤 해두지. 아버지께선 아직 건재하시다.”


기분 나쁜 목소리는 킬킬대며 웃었다. 이슬레이는 얼굴을 찡그린 채 그림자가 어린 벽을 노려보았다. 촉수처럼 여러 가닥으로 뻗어 나온 그림자가 벽을 타고 오르며 넘실거렸다. 이슬레이는 라이퀴아를 제 등 뒤로 감추며 손을 꽉 움켜잡았다.


하하. 무엇을 그리 두려워하십니까. 이 너른 바다에서 두 번째로 고귀하고 강한 존재가 아니십니까.”

난 거래를 하러 왔다. 쓸데없는 대화는 생략하지.”


벽에 어린 그림자가 마치 몸을 일으키듯 점점 커졌다. 처음엔 단지 벽에 어린 그림자였을 뿐이었으나, 이젠 이슬레이와 라이퀴아의 머리로 드리워지며 그들을 굽어보고 있었다. 라이퀴아는 그림자가 금방이라도 벽을 뚫고 튀어나와 그들의 목을 움켜쥘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육지로 올라갈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줘.”

육지 말이지요. 얼마나 오랫동안?”


이슬레이는 라이퀴아를 흘끗 돌아보았다. 겁에 질릴만한 상황이었으나, 라이퀴아는 꿋꿋하게 그림자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슬레이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어렸다.


인간의 수명만큼.”

예에, 인간의 수명 말이지요.. 그것 참 짧고 가벼운 조건이로군요.”


그림자는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웃었다. 라이퀴아조차 그 안에 담겨있는 비틀린 악의와 빈정거림을 느낄 수 있었다. 라이퀴아가 이슬레이를 붙잡은 손에 힘을 주자, 이슬레이는 손가락을 미끄러트려 라이퀴아의 손을 깍지 끼워 잡았다.


단순히 인간의 다리를 달라는 것이 아니야.”

아아, 물론이죠. 전 그리 멍청하고 우둔하며 눈치가 없진 않답니다. 사기꾼도 아니지요. 다만 저도 장사꾼인 만큼, 셈은 확실히 해주셔야 하는데..”

내가 값을 지불하지 못할 것 같은가.”

아이고, 그럴 리가요. 제가 감히 왕자님을 의심하겠습니까. 온 바다가 당신의 소유나 다름없다는 것은 바다에서 나고 자랐다면 모두가 알고 있을 텐데요. 다만..”


이슬레이는 눈을 가늘게 뜬 채 그림자를 똑바로 쏘아보았다. 불쾌함을 숨기지 않는 고압적인 표정이었다. 말꼬리를 늘이던 목소리는 언뜻 비굴하게까지 들리는 어조로 말을 이었다.


제가 취급하는 약과 주술도구들은 모두 귀한 재료를 힘겹게 모아, 갖은 연구 끝에 완성한 것들이지요. 제 자식이나 다름없는 것들인데, 진주 몇 알과 바꿔드리자니 제 좁은 속이 비틀립니다, 그려. 아니, 비싸다는 말이 아닙니다. 다만 왕자님께 진주나 산호는 아무것도 아니질 않습니까. 그런 것들은 지느러미에 채이고도 남으실 텐데..”

그럼 무엇을 원한다는 말이지?”


킬킬, 그림자는 음산하게 웃었다. 흥분하기라도 한 양, 꿈틀거리는 움직임이 한 층 더 격해졌다.


왕자님이 가지고 계신 것 중 가장 귀한 것을 하나만 내어주시지요. 세상에 둘도 없는 것 말입니다. 그것만 제게 주신다면 강한 힘도, 물의 권능도, 오롯이 지닌 채 육지로 가실 수 있도록 약을 내어드리겠습니다.”

이 아이는 안 돼.”


단호한 목소리가 반사적으로 튀어나왔다. 이슬레이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말을 뱉고 보니 뒤늦게 아차 싶었으나, 그렇다고 이미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적당히 말을 얼버무릴 수 있는 상대도 아니었다.


왕의 권위에 도전하거나 명예에 누를 끼치는 요구 역시 들어줄 수 없다.”

그럼요. 제가 어찌 감히 그런 것까지 바라겠습니까. 더군다나 이미 귀한 선물을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왕자님의 아름다운 머리카락은 제가 요긴하게 잘 쓰도록 하겠습니다.”


동굴 천장을 반쯤 덮을 만큼 거대해졌던 그림자가 서서히 줄어들었다. 이슬레이는 어딘가에서 나타나 제 눈앞으로 서서히 가라앉는 작은 병을 받아냈다. 문어의 먹물처럼 검은 액체가 들어있었다. 병을 기울이니, 푸르스름한 빛이 스며들며 오묘한 빛깔로 빛나는 것이 보였다.


드시지요. 인간의 다리를 얻게 되실 겁니다.”

아직 내게서 무엇을 받아갈지 듣지 못했는데.”

전 왕자님 뒤의 그 인간도 건드리지 않을 것이고, 바다의 질서에 도전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제가 그 외의 무엇을 원하든, 왕자님께선 지불하실 생각이 아니십니까? 그렇다면 그 대가를 미리 듣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입니까?”


이슬레이는 그림자를 노려보다가, 이로 마개를 비틀어 열었다. 검은 액체가 연기처럼 물속으로 번져나갔다. 이슬레이는 제 곁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라이퀴아를 바라보고 부드럽게 웃어준 뒤, 단숨에 병 안의 내용물을 비워버렸다.

잠시 뒤, 이슬레이는 목 안쪽이 타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그대로 정신을 잃어버렸다.

 

***


파도가 허벅지를 때리는 감각에 라이퀴아는 정신을 차렸다. 온몸이 물에 젖은 솜처럼 무거웠다. 자신의 한 쪽 손은 누군가에게 단단히 붙잡혀있었다. , 이슬레이의 손이다. 라이퀴아는 그렇게 생각하며 희미해지려는 의식을 애써 붙잡았다.

지금 자신이 누워있는 곳이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분명 정신을 잃기 전의 자신은 이슬레이와 함께 어두운 동굴을 찾아갔고, 그곳에서 이슬레이는 검은색의 물약을 마셨고, 잠시 뒤 피를 토하는 것처럼, 마신 것보다 훨씬 많은 양의 검은 액체를 토해내기 시작했으며, 자신은 깜짝 놀라 그의 이름을 부르며 몸을 붙들었다. 그러던 중 그가 토해낸 검은 것이 물을 타고 퍼지며 일부를 자신도 들이마셨고, 자신은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이슬..레이..!”


라이퀴아는 번쩍 눈을 뜨며 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잠시 현기증이 일었으나, 가볍게 고개를 흔들어 떨쳐냈다. 문득 바닷바람이 그의 몸을 스쳐지나갔다. 젖은 몸에 바람이 닿으니 절로 몸이 떨렸다.

두 사람은 어느 해변에 정신을 잃고 쓰러져있었다. 파도가 넘실거리며 다리와 허리를 적셨다.

라이퀴아는 제 곁에 쓰러져있는 전라의 남자를 조심스럽게 안아들었다. 호흡은 거칠었으나, 분명히 숨은 쉬고 있었다. 아침 해가 떠오르고 있는 해변엔 밝은 햇빛이 쏟아졌다. 물기를 머금은 백옥 같은 피부는 그 햇빛 속에서 아름답게 빛났다.


“...”


움찔, 얼굴을 찡그린 이슬레이는 천천히 눈을 떴다. 푸른 눈동자에 라이퀴아의 얼굴이 비쳤다.


이슬레이. 괜찮아? 정신이 들어? 아픈 덴 없어? 갑자기 이상한.. 검은 물을 막 토해서..”


라이퀴아는 다급한 목소리로 쉴 새 없이 질문을 던졌고, 이슬레이는 기운 없는 미소를 띤 채 손을 뻗어 라이퀴아의 뺨을 쓰다듬었다. 그는 라이퀴아의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해 입술을 달싹였다.

그 순간, 그의 얼굴에 어렸던 미소가 사라졌다.


이슬레이? 왜 그래? ? 어디가 아파?”


이슬레이는 고개를 저으며 몇 번이나 입술을 벙긋거렸다. 당황하여 허둥거리던 라이퀴아의 얼굴이, 순식간에 경악으로 물들었다.


목소리가.. 안 나와?”


끄덕. 이슬레이는 입을 꾹 다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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