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슬라이/판타지au] [Homunculus] - 07
남자의 얼굴은 아름다웠으나 창백했고, 표정은 서글프다 못해 우울했다.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의 눈빛은 복잡했으나, 아이작은 그 강렬하고 뒤엉킨 감정을 모두 읽어내기엔 너무 어리고 경험이 없었다.
질투와 부러움, 걱정스러움, 기대감이 한데 뒤섞인 표정의 남자가 입을 열었다. 언제나와 같은 꿈이었다.
-라이퀴아를 기쁘게 해주고 싶다고 했지.
“네.”
-꽃을 꺾어서 선물해보렴.
아이작은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갸우뚱, 아이다운 표정을 지으며 눈을 깜빡이는 것은 아름답지만 우울한 얼굴의 남자가 가르쳐준 것이었다. 라이퀴아의 앞에서 그 표정을 지으면, 라이퀴아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아이작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곤 했다.
“꽃이요?”
-그래. 네가 직접 키운 꽃이 있지 않니.
남자의 입가에 아름다운 미소가 떠올랐다. 남자는 길고 곧은 손가락으로 자신의 귀를, 정확히 말하자면 관자놀이를 가리켰다.
-하얀 꽃 한 송이를 꺾어서 라이퀴아의 귀에 꽂아주렴. 잘 어울릴 거야.
“선생님이 기뻐하실까요? 귀찮아하시면..”
-분명히 기뻐할 거야. 깜짝 놀랄지도 몰라. 꽃밭을 보여주는 것도 좋겠지.
아이작은 망설이며 얼른 대답하지 못했다. 남자는 무릎을 꿇고 허리를 숙여 아이작과 눈높이를 맞췄다. 꼭 닮은 두 쌍의 푸른 눈동자가 서로를 바라보았다.
-나를 믿어. 나만큼 라이퀴아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없어.
라이퀴아는 사흘에 한 번씩만 물을 주기로 약속한 것 외에는, 화단의 관리를 전적으로 아이작에게 맡겨놓았다. 아이작은 잠자리 머리맡에 작은 그릇을 가져다놓고, 매일 아침 화단에서 작은 돌맹이 하나를 가져와 그릇 안에 담으며 날짜를 세었다.
하루하루를 손꼽아 기다리는 아이작의 모습이, 라이퀴아는 제법 기쁜 모양이었다. 화단 곁에서 떠날 생각을 하지 않는 아이작을 위해 커다란 밀짚모자를 사오고, 아이작이 화단을 돌보고 돌아오면 직접 손을 씻기며 아이의 재잘거림을 들어주었다.
처음으로 화단에서 작은 싹이 머리를 내민 날, 아이작은 흥분하여 뺨까지 상기시킨 채 라이퀴아에게 달려와 손을 잡아끌었다. 그날 저녁, 두 사람은 조촐한 파티를 열었다.
아이작이 화단을 돌보러 나가있는 동안, 라이퀴아는 두꺼운 책을 읽거나 복잡한 공식을 계산하며 연구실에 틀어박혀있는 경우가 많았다.
아이작이 연구실로 들어오거나 소란을 피워 방해를 한다고 해서 라이퀴아가 아이작에게 화를 내지는 않겠지만, 아이작은 언제나 라이퀴아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발소리는 물론 숨소리까지 죽이곤 했다.
그러나 그날만은 달랐다. 라이퀴아는 멀리서부터 쿵쿵거리는 소리를 낼 정도로 급하게 달려오는 아이작의 발소리를 들었다. 저렇게 달리면 관절에 무리가 갈 텐데. 라이퀴아는 걱정스러운 마음에 읽던 책에서 눈을 떼었다.
연구실의 문이 노크도 없이 벌컥 열렸다. 아이작은 두 손을 꼭 모아 쥔 채, 라이퀴아를 향해 달려왔다. 라이퀴아는 달려드는 아이의 몸을 가볍게 받아내어 안아올렸다.
“무슨 일이야, 아이작.”
“꽃이 폈어요, 선생님.”
아이작은 활짝 웃으며 두 손을 라이퀴아 앞으로 내밀었다. 하얀 꽃잎과 노란 꽃술을 가진 작은 꽃송이가 아이의 손바닥 위에 올라가있었다.
“그렇다고 꽃을 꺾어오면 어떡하니.”
“선생님께 드리고 싶어서..”
방금 꺾어왔음에도, 작은 꽃은 벌써 끄트머리가 시들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아이작은 그보다 귀한 것은 없다는 듯, 조심스러운 손길로 라이퀴아의 귓가에 꽃을 꽂아주었다.
라이퀴아의 눈이 조금 커지고, 아이작의 몸을 안은 손이 가볍게 떨렸다. 아이작이 의아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이자, 라이퀴아는 애써 미소 지으며 아이작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도 꽃은 함부로 꺾으면 안 돼.”
“네. 죄송해요, 선생님.”
“아니야, 미안할 것까진 없고. 앞으로는 그러지 말기야. 약속하자.”
라이퀴아는 아이작에게 새끼손가락을 내밀었고, 아이작은 손가락을 걸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평소처럼 긴장하거나, 결의를 다지는 굳은 얼굴은 아니었다. 아이작은 라이퀴아의 무릎에서 뛰어내려, 두 손으로 라이퀴아의 손을 붙잡고 끌어당겼다.
“선생님, 같이 화단에 가요. 꽃이 많이 피었어요.”
아이작은 좀처럼 흥분하거나 목소리가 커지지 않는 아이였고, 라이퀴아에게 무언가를 먼저 나서서 요구하는 일도 거의 없었다.
그러나 아이작은 조금씩 활발해졌다. 라이퀴아는 아이작의 그 변화가, 가끔씩 그들을 찾아와 짧게나마 몇 마디 대화를 나누고 사라지는 에이스 덕분인가 싶었다.
에이스는 말씨가 거칠고 다혈질이었으나, 아이작과 제법 오래 대화를 이어가곤 했다. 아이작은 마냥 얌전하고 시무룩한 아이였지만, 에이스에게는 유독 으르렁거리고 성질을 부렸다. 에이스는 어린아이의 놀림이나 어설픈 빈정거림에도 발끈하여 목소리를 키우기 일쑤였으나, 억지로 문을 열고 들어오거나 아이작에게 직접 손찌검을 하지는 않았다.
아이작이 유독 말수가 적고 자신의 눈치를 보는 것은 결국 외로워서가 아닐까. 라이퀴아는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입 안이 썼다.
그러나 아이작은 아직 남들과 섞여서 살아갈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고, 자신 역시 아직은 타인에게 아이작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아이작이 에이스와 곧잘 어울리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조금 섭섭한 마음이 드는 것도 이런 감정의 연장선상일지도 몰랐다.
라이퀴아는 순순히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이가 조금 더 아이다워지고, 활발해졌으면 좋겠다고 바라던 것이 불과 얼마 전이었다. 그러나 그 앞에 ‘자신에 의해서’라는 조건이 생략되어 있었다는 것을 최근에야 깨달았다. 그 소유욕과 이기심이 부끄럽고, 스스로가 경멸스러웠다. 라이퀴아는 터져 나오려는 한숨을 간신히 삼켜냈다.
“그래. 그동안 얼마나 잘 키웠는지 볼까.”
라이퀴아는 웃으며 아이작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아이작은 라이퀴아와 발걸음을 맞춰 걷는 것을 좋아했다. 라이퀴아는 일부러 아이작의 걸음에 맞춰 보폭을 줄이는 것이 익숙해져있었다. 그러나 오늘의 아이작은 들떠있었고, 얼굴엔 무언가를 기대하는 듯한 표정이 선명하게 떠올라있었다. 아이는 몇 번이나 넘어질 뻔 하면서도, 바쁜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하루종일 연구실에 틀어박혀있던 라이퀴아는 문을 열고나오자마자 쏟아진 햇빛에 눈을 가늘게 떴다. 날씨가 좋았다. 힘이 약한 아이작도 충분히 들 수 있을 작은 조리개와, 끝부분에 흙이 잔뜩 엉겨 붙은 모종삽이 마당을 뒹굴고 있었다.
작은 화단에는 색색의 꽃들이 피어나있었다. 어떤 것은 이미 만개해 꽃술을 드러내고 있었고, 어떤 것은 터지기 직전의 봉오리가 한껏 부풀어있었다. 라이퀴아는 햇빛에 눈이 익숙해지길 기다리며, 아이작과 함께 천천히 화단으로 다가갔다.
“저 나무인형은 뭐니?”
“장난감이에요. 그 아저씨들이 가져다 줬어요.”
나무를 깎아 만든 목각인형은 그다지 비싼 고급품은 아니었지만, 라이퀴아는 속으로 그 가격을 헤아리고 있었다. 쓸데없는 빚을 지고 싶진 않았다. 다음번에 다시 오거든 값을 지불해야지, 그렇게 생각하던 라이퀴아는 자신이 자연스럽게 ‘다음’을 떠올렸다는 사실을 깨닫고 흠칫해버렸다.
그들을 자주 찾아오는 사람이 있어선 안 된다. 언제 글로리아의 추적자들이 따라붙을지 모르는 일이다. 자신뿐이라면 얼마든지 도망치거나 따돌릴 수 있겠지만, 아이작은 아니다.
만약 글로리아에서 그들을 찾아내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에이스가 위화감을 느끼게 될 위험도 있었다. 어쩌면 이미 느끼고 있을지도 몰랐다. 아이작 또래의 아이들은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것이 보통이었으나, 에이스를 만나고 몇 달이 흐르는 동안, 아이작은 조금도 자라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왜 화단에 세워놨어?”
“그냥, 여기가 자리인 것 같아서..”
화단으로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니, 인형을 그냥 꽃 사이에 세워둔 것이 아니었다. 화단의 흙을 일부 파내고, 인형이 넘어지지 않도록 다리를 절반이나 묻어두었다. 밝은 빛에 눈이 익숙해지자, 마냥 하얗고 따갑던 시야가 선명하게 개었다.
화단의 모습을 눈에 담은 라이퀴아는 그 자리에서 그대로 굳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흰색, 노란색, 파란색, 보라색 꽃들이 화단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누가 보아도 이상할 것 하나 없는 평범한 화단이었다. 그러나 라이퀴아는 그 형태가 너무나 눈에 익었다.
글로리아는 신을 위한 도시였고, 도시 안의 화려함과 사치스러움은 모두 신의 경건함을 찬양하기 위한 것이었다. 상아를 깎아 만든 거대한 동상은 신들의 모습을 묘사한 것이었으며, 그 동상의 발치에 심어둔 꽃들은 신의 권능과 업적을 기리는 데에 그 쓸모가 있었다.
꽃은 언제나 씨를 맺고 어디서나 싹이 돋아나기에, 화단의 모양은 언제나 변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화단을 관리하는 이들은 매일 화단의 모양을 자세히 살펴야 했으며, 시든 꽃이 있다면 파내고 같은 색의 꽃을 옮겨 심거나, 다른 색의 꽃이 피면 즉시 뽑아내야 했다. 그들은 배를 곪고 매를 맞아가며 꽃들의 위치와 배치를 외웠다.
라이퀴아는 따로 그것을 외울 필요는 없었지만, 그래도 거진 10년을 매일같이 오가며 보아왔던 것이다. 매일매일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오싹할 만큼 일정한 모양을 유지하던 화단이, 비록 조잡하고 어설프지만 제법 엇비슷하게 눈앞에 재현되어 있었다.
이곳에 꽃씨를 심은 것은 아이작이다.
라이퀴아는 아이작의 앞에 무릎을 꿇고 눈높이를 맞췄다. 아이작의 팔을 붙잡은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아이작은 의아한 눈으로, 다급한 표정을 짓고 있는 라이퀴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저 꽃, 왜 저렇게 심은 거니? 저 인형은 왜 화단에 둔 거고? 응? 아이작.”
아이작은 그토록 여유가 없는 라이퀴아의 표정을 처음 보았기에, 당황하여 입을 달싹였다. 자신은 지금껏 한 번도 자신의 뚜렷한 공상에 대해 라이퀴아에게 설명한 적이 없었다. 그것은 라이퀴아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고 혼자 놀기 위해 개발한 놀이였고, 라이퀴아가 그것을 달가워할 리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작에게는, 라이퀴아에게 거짓말을 한다는 선택지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아이작은 라이퀴아에게 그동안 자신이 해왔던 공상과 상상에 대한 설명을 했다. 찬란한 햇빛이 부서지는 아름다운 도시와, 커다란 건물 안에서 새하얀 옷을 입고 기도를 올리는 선생님을 상상했던 일들을 고백하고, 상상속의 꽃밭을 만들어보려 했다는 것도 털어놓았다.
아이작의 설명을 듣는 라이퀴아의 얼굴이 조금씩 일그러졌다. 언제나 상냥하게 웃던 눈가가 젖어들었다. 아이작이 말을 마치고 라이퀴아의 눈치를 보고 있자, 라이퀴아는 아이작의 몸을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고마워.. 고마워, 아이작..”
그렇게 중얼거리는 라이퀴아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아이작은 지금까지 라이퀴아가 울음을 참는 것을 여러 번 보아왔지만, 이번만은 실패한 모양이었다. 한쪽 어깨가 천천히 젖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선생님이 실패하시는 것도 있구나. 아이작은 그렇게 생각하며 작은 손으로 라이퀴아의 등을 서툴게 다독였다.
-거봐. 내가 뭐랬어.
꿈속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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