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질하는 뿜이

블로그 이미지
by O.A

TAG CLOUD

  • Total hit
  • Today hit
  • Yesterday hit

'기타'에 해당되는 글 11건

  1. 2018.04.24
    [적벽] 선생. 부디. - 아대
  2. 2018.04.22
    [적벽] 선생. 부디. - 삼고초려
  3. 2017.12.06
    [자룡공명] 제갈부인전 2
  4. 2017.12.04
    [자룡공명] 제갈부인전
  5. 2017.12.04
    [서서제갈] 살인의 추억
  6. 2017.11.19
    [서서제갈] 이따금씩 우연은 호흡곤란을 동반한다.
  7. 2017.11.17
    [IF썰] 이릉대전 下
  8. 2017.11.16
    [IF썰] 이릉대전 上
  9. 2017.11.13
    [IF썰/(弱)조조공명] 빈 찬합
  10. 2017.11.12
    [IF썰/(弱)자룡공명] 용은 하늘의 아들이 되고

판소리뮤지컬 적벽

관운장 위주 망상글.


[적벽] 선생. 부디.

아대



조조의 백만 대군이 남하한다. 군량은 산을 이뤘고, 깊은 골짜기나 거센 강도 하룻밤이면 메꾼다. 조조의 군사가 지나간 자리는 마치 메뚜기 떼가 갉아먹은 논두렁처럼 변한다더라.

소문은 민간인과 군사들을 가리지 않고 빠르게 퍼져나갔다. 운장을 따르는 병사들은 한의 병사들 중에서도 가장 군기가 잡혀있는 정예병이다. 그런 이들까지 소문에 술렁일 정도라면, 다른 곳의 상황은 보지 않아도 뻔했다.

운장은 현덕에게 인사를 하고 자리에서 물러났다. 현덕은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으나, 금방 휴식을 취하러 갈 것 같지는 않았다. 현덕 역시 고민이 많은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의 고민은 조조 따위에 대한 두려움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운장은 그것을 알 수 있었다.

운장과 익덕과 자룡의 무예가 아무리 출중한들, 공명의 지략이 아무리 뛰어나고 병사들이 한 마음 한 뜻으로 현덕을 따른들, 그들만의 힘으로 조조의 대군을 막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이는 오 역시 마찬가지였고, 결국 한과 오는 동맹을 맺어 조조에게 대항하는 것만이, 유일하고 가장 합리적인 방법이었다.

그러나 이 동맹이 언제까지고 견고하게 이어지리라 믿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두 나라간의 동맹은 불안정하기 그지없었으며, 양국의 관계에서 주도권을 차지하고, 조금이라도 더 많은 부담을 상대에게 넘기고, 이득은 가져오기 위한 신경전의 연속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역할을 맡을 수 있는 것은 오직 공명뿐이다.

공명은 이를 잘 알고 있었기에, 스스로 사자가 되어 오로 건너가겠노라 말했다. 현덕은 그런 공명을 막지 않았으나, 적진 한복판으로 공명 한 사람만을 보내는 것이 불안한 듯 했다. 운장이나 자룡을 데려가라는 현덕의 말에, 공명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운장과 익덕, 자룡은 병력을 충분히 준비하고 병사들을 훈련시키는 데에 주력하라는 뜻이었다.

공명은 자신의 안위는 전혀 걱정하지 않는 듯 했다. 다만 자신이 정해주는 날짜와 장소를 잘 기억했다가, 자룡을 때에 맞춰 그곳으로 보내달라는 말을 덧붙였을 뿐이다.

군사의 명이고, 책사의 계책이었다. 운장은 그 말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문득 익덕에게 시선이 닿았다. 공명을 노려보는 익덕의 표정엔 불만이 가득했다. 아마 자신과 현덕이 없었다면, 이미 불충한 소리가 나와도 열 번은 더 나왔으리라.

운장은 익덕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익덕은 찔끔한 얼굴로 운장을 돌아보더니, 슬쩍 시선을 돌려버렸다. 운장은 단호한 표정으로 익덕을 물러나게 했다. 익덕은 군말 없이 자리를 떴다. 마지막까지 공명을 향해 불만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않은 채였다.

낮의 일을 떠올린 운장은 걷던 걸음을 멈추고, 느리지만 절도 있는 몸짓으로 천천히 몸을 돌렸다. 운장의 걸음은 공명의 방으로 향했다.

군사.”

시중을 들 아이도, 보초를 설 병사도 귀찮고 번잡하다며 물려버린 탓에, 운장은 직접 공명을 부르며 방으로 들어서야 했다. 공명은 단정한 차림새로 앉아, 세필로 죽간에 무언가를 적어 넣고 있었다.

공명은 운장에게 시선을 옮기지도, 자리를 권하지도 않았다. 그저 쥐고 있던 붓을 놓고, 다 쓴 죽간을 바닥에 펼쳐 먹을 말리며, 동시에 새로운 죽간을 집어 들며 뻐근한 목을 좌우로 한 번 흔들 었을 뿐이다.

운장 역시 괜한 공치사는 하지 않았다. 시간이 늦었으니 이만 들어가 쉬라며 휴식을 권하지도, 늦은 시간까지 고생이 많다며 공명의 노고를 치하하지도, 공명이 쓰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해 하거나 호기심을 보이지도 않았다.

군사. 내게 따로 명하실 것은 없습니까.”

없소.”

달그락. 공명은 새로운 죽간을 받침대에 세우고 붓을 집어 들었다. 더 이상의 대화는 원치 않는다는 명백한 태도였다. 그러나 운장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익덕의 일로 드릴 말씀이 있소.”

형제의 일은 장군과 주공께서 잘 보살피고 계시지 않소이까. 세 분의 일에 내가 보탤 말은 없을 듯 하오만.”

운장은 공명의 곁으로 다가가, 그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공명이 처음으로 운장을 향해 흘끗 시선을 던졌다. 운장은 자신의 손목으로 다른 손을 가져가며 입을 열었다.

잠시 손을 내밀어 주시겠소?”

운장을 한참이나 빤히 바라보던 공명은, 붓을 놓지 않은 채 왼손을 내밀었다. 운장은 자신의 손목에 차고 있던 아대를 풀어, 공명의 손목에 단단히 묶어주었다.

공명은 한참동안 제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오랫동안 사용해왔던 운장의 아대는 길이 잘 들어있었고, 늘 정갈하고 조용한 생활을 하는 주인의 성품을 보여주듯 그리 낡지는 않은 물건이었다.

운장은 한 군을 통솔하는 장수이자, 현덕이 가장 아끼고 믿는 최측근이며, 한의 공공연한 이인자다. 그런 그가 제 앞에서 무릎을 꿇고, 고작 아대 따위의 하찮은 무장을 손수 챙긴다. 이 상황을 눈치 채지 못하기엔, 그리고 운장의 뜻을 알아채지 못하기엔, 공명은 너무 명민했다.

익덕은 대놓고 공명을 불편하게 여기고 있었으나, 제 형제들에게는 끔찍하고 깍듯했다. 불같은 성품 탓에 간혹 실수를 저지르긴 하나 현덕과 운장의 뜻을 거스르는 일은 결코 없었으니, 운장이 공명을 따르겠노라 약조하면 익덕 역시 별 수 없으리라. 익덕 뿐만 아니라 운장을 따르는 수많은 병사들 역시, 더 이상 군말 없이 공명을 따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만큼 운장의 그림자는 크고 무거웠다.

익덕은 고사하고 일개 편장조차 없는 자리였으나, 그렇다고 해서 운장의 행동이 가지는 의미와 무게가 덜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되려 그들을 지켜보는 시선이 없는 만큼, 그 무게는 곱절로 더해졌다.

아대를 단단히 매어준 운장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공명의 곁에서 물러났다. 살짝 고개를 숙이며 두 손을 모아 예를 갖추는 모습에서, 비굴함 따위는 찾아볼 수조차 없었다.

형님께 가장 필요한 사람은 바로 그대이니, 무사히 돌아와 형님의 꿈을 이루어 주시오. 형님의 꿈이 우리 형제들의 꿈이고, 형님들 따르는 한의 병사들의 꿈이니, 부디 무사히 돌아와 형님이 꿈꾸던 세상을 우리 앞에 열어주시오.

수많은 말을 삼키고 운장이 내뱉은 말은 단 한마디였다.

그럼.”

운장은 그대로 몸을 돌려 공명의 앞에서 사라졌다. 공명은 죽간 위에 붓을 대려다가, 문득 자신의 손목에 묶인 아대로 다시 한 번 시선을 옮겼다. 무늬 없이 그저 검은 색의 아대는, 어쩐지 원래의 주인을 닮은 구석이 있었다.

공명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 다시 붓을 고쳐 쥐었다. 오로 떠나기 전에 처리해야할 일들이 아직도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부디. 선생, 부디. 운장이 삼켰을 말들은 의식 깊숙한 곳으로 밀어버리고, 공명은 유려한 필체로 죽간 위에 글을 적어내리기 시작했다.

AND

판소리뮤지컬 적벽

관운장 위주 망상글.


[적벽] 선생. 부디.

삼고초려


힘과 무예만으로는 이룰 수 없는 것이 있다. 운장이 그것을 깨달은 것은 거듭되는 패배와 실패에 절망을 배울 즈음이었다. 운장과 익덕, 자룡. 그들은 말 한필과 창 한 자루만 있다면 백만대군이 두렵지 않은 만인지적의 장수들이었으나, 그들의 주군 현덕은 그 무엇도 이루지 못한 채 패전을 거듭할 뿐이었다.

조조 따위야 무서울 것이 뭐 있소? 조조가 아니라 조조 할애비가 온다 해도 소제가 다 물리칠 것이니, 중형은 걱정인들 마시오.”

익덕은 그렇게 말하며 자신 만만하게 가슴을 팡팡 두드렸고, 현덕은 그런 익덕이 든든하다며 부드럽게 웃고 말 뿐이었다. 그러나 운장은 조조가 아니라 조인 따위가 쳐들어올 때조차 마음껏 싸우지 못하고 상황을 살피며 몸을 사려야한다는 생각에 가슴이 답답했다.

그렇기에 운장은 서서의 능력과 책략에 감탄했으며, 서서가 떠나며 천거한 공명이란 자가 절실했다. 천하의 불쌍한 억조창생들을 가슴에 품은 현덕만큼이야 절절하겠느냐마는, 그런 현덕의 꿈이 더 이상 좌절하거나 짓밟히는 모습을 보지 않기 위해서라도 운장에게는 공명이 필요했다.

얼굴도 모르는 이를 모시고자 현덕이 세 번이나 직접 발걸음을 하는 것은 운장에게도 달가운 일일 수 없었다. 운장에게 하늘 아래 진정한 영웅은 오직 현덕뿐이었다. 그러나 운장은 내색하지 않았다. 매번 불만 가득한 얼굴로 투덜거리고 씨근거리는 익덕을 달랠 뿐이었다.

그렇게 어렵게, 아주 어렵게 만난 공명은, 꼭 신선 같은 사람이었다.

낭설을 듣고 허행하였나이다.”

현덕을 거절하는 공명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운장의 눈은 언제나 현덕을 쫓고 있었다. 그렇기에 운장은, 공명을 처음으로 눈에 담은 순간의 현덕을 보았다. 언제나 부드럽고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으나 차마 완전히 지워내진 못했던 깊은 수심이 물러나고, 무겁고 두터운 구름 사이로 햇살이 스며 나오듯 환해지는 현덕의 표정을 보고야 말았던 것이다.

형님에겐 이 자가 반드시 필요하다.

뇌리를 스친 그 생각을 자각하였을 때, 운장은 이미 공명의 앞을 막아선 뒤였다.

공명이 운장을 올려다본다. 운장은 평생 기치창검을 높이 들고 수천 군사를 호령해온 장수들도, 자신의 앞에 서면 움츠러드는 것을 왕왕 보아왔다. 그러나 공명은 똑바로 운장의 눈을 마주보았다. 당장이라도 자신의 목을 한 손으로 꺾어버릴 수도 있을 만인지적의 장수 앞에서도, 전혀 두려움 없는 당당한 눈빛이었다.

익덕의 말대로다. 밭이나 조금 갈아보았을까, 평생 죽간보다 무거운 것은 들어본 적도 없을 듯한 백면서생이니, 여기서 자신이나 익덕이 공명을 묶어 강제로 신야로 끌고 간다 한들 제대로 반항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운장은 무릎을 꿇었다. 자신의 행동에 익덕이 당황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으나, 운장은 그대로 공명에게 고개마저 숙여버렸다. 뒷덜미로 냉정한 시선이 차분하게 쏟아졌다. 잠시 자신을 그렇게 내려다보던 공명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 자신을 지나쳐갔다.

운장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익덕 역시 공명에게 무릎을 꿇었다. 그러나 공명은 무심한 바람처럼 표표히 익덕마저 지나쳤다.

결국 현덕이 다시 공명을 불렀다. 공명에게 도움을 청하고, 고통 받는 민초들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리는 현덕의 목소리는 애간장이 끊어질 듯 애절하고 절실했다. 현덕의 울음을 들으며 운장은 몇 번이고 청했다. 감히 현덕을 앞질러 입 밖으로 말을 뱉지는 않았으나, 공명이라면 분명히 알아들을 것이다. 그런 이유모를 확신을 가진 채, 운장은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였다.

선생. 부디.

AND

[자룡공명] 제갈부인전 2

 

 “조 장군! 조 장군!”


 급히 말을 달리던 조운은 애타게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급히 고삐를 당겼다. 아이를 안은 미부인이 하인 한 사람의 부축을 받으며 달려오고 있었다. 조운은 말에서 뛰어내렸다. 감부인을 장판교까지 모셨던 말은 이미 지쳐있었다.


 “부인, 괜찮으십니까?”

 “저는, 저는 괜찮습니다만, 군사가..”


 미부인은 말을 맺지 못하고 눈물을 보였다. 조운을 만나니 긴장이 풀리고 안심이 된 탓이다. 그러나 조운의 얼굴은 창백해졌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군사께 무슨 일이 있습니까? 군사는, 군사는 지금 어디 계십니까?”

 “군사는 스스로 미끼가 되어 나와 다른 방향으로 도망쳤습니다. 나와 아두를 안전하게 피신시키려고.. 장군, 어서 가서 군사를 구해주세요. 군사가 아무리 뛰어난 재주를 가졌다 한들, 결국 여인의 몸이 아닙니까. 또한 우악스런 병사들에게 이치와 논리가 통할 리가 있겠습니까.”


 조운은 다른 병사가 타고 있던 말의 고삐를 넘겨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지치지 않은 갈색 말이었다.


 “부인께선 제 말을 타고 어서 주공의 곁으로 가십시오. 저는 군사를 구해 함께 돌아가겠습니다.”


 예를 갖추고 인사를 길게 올릴 시간마저 아까웠다. 조운은 다급한 마음을 애써 가다듬으며 고삐를 강하게 바투 쥐었다.


**

 

 “...”


 제갈량은 터져 나오려는 비명을 애써 억눌렀다. 병사들의 우악스런 손길이 그녀의 팔과 머리채를 마구잡이로 붙잡고 끌어냈다. 이리저리 숨고 달아나며 한 떼의 병사들을 유인하는 일은 애초에 그녀에게 무리였다. 젖 먹던 힘까지 짜냈던 몸은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삐걱거렸고, 가슴속엔 불덩이가 들어찬 듯 뜨겁고 아팠다.

 다급히 도망치던 제갈량은 버려진 듯 보이는 창고를 찾아냈고, 그 구석에서 썩어가고 있던 짚더미 속으로 몸을 숨겼으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병사 하나가 마구잡이로 내지른 창에 허벅지 부근을 찔렸다. 병사들은 킬킬 웃으며 제갈량을 끌어냈고, 반항할 기운조차 소진한 그녀를 질질 끌고 가기 시작했다. 땅에 붉은 핏자국이 남았다.

 창고 밖으로 끌려 나온 제갈량은 다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거의 무너져가는 돌담 옆의 작은 우물이 보였다. 저 안에 물이 남아있을까. 제갈량은 그런 생각을 했다.

 이들은 자신이 누구인지 아직 모르는 것이 분명했다. 유비가 새로 얻은 군사 제갈량이 여인이라는 소문은 들어보았을지도 모르겠으나, 일개 병사들까지 자신의 생김새를 알 리 없었다. 다만 저들은 포식자의 심정으로, 눈앞에서 도망치는 먹잇감을 쫓아 무작정 달려왔을 뿐이었다. 약한 여인과 아이들은 사냥놀이의 장난감으로 안성맞춤일 것이다.

 반항의 기색이 없자, 머리채를 단단히 움켜쥐고 있던 손이 떨어져나갔다. 제갈량은 제 팔을 움켜쥔 사내의 커다란 손을 보았다. 이들은 당장은 자신을 죽일 생각은 없어보였다.

 저들의 주인인 조조가 색을 밝히는 것은 삼척동자도 모두 아는 사실이었다. 그들은 그녀의 얼굴이 반반한 것과, 그녀가 걸친 새하얀 옷이 제법 비싸 보인다는 이유로 사로잡은 그녀를 그들의 주인에게 진상하러 가는 것일지도 몰랐다. 혹은 저들끼리 취하려는 것인지도, 아니면 다른 장소로 끌고가 죽이려는 것인지도 몰랐다.

 차라리 죽여 버리면 다행이겠건만. 제갈량은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있었다. 물론 그녀는 결코 죽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대로 사로잡혀 조조를 대면하는 것은 더욱 안 될 말이었다.

 조조는 상황판단이 빠른 자다. 만일 제갈량의 정체를 알게 된다면, 그녀는 그 즉시 포로가 아닌 인질이 될 것이다. 그리고 유비에겐 결코 유리할리 없는 거래의 패로서 제시될 것이다. 만일 그러한 상황이 온다면, 유비는 제갈량을 단호히 포기할 수 있을 것인가? 답은 말할 것도 없었다.

 차라리 우물로 뛰어내리자. 제갈량은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운이 좋다면 즉사할 것이고, 실패하더라도 성난 병사들의 칼에 숨이 끊어질 것이다. 만일 저 우물 밑에 아직 물이 남아있다면, 익사하거나 위에서 던지는 돌에 맞아 죽거나, 둘 중 하나일 테지. 어쨌든 자신으로 인해 유비의 세력이 괴멸당하는 지경까지 가지는 않을 것이다.


 “으악!”


 제갈량은 제 팔을 붙잡은 병사의 손을 물어뜯었다. 병사가 고통에 제갈량을 뿌리치자, 그녀는 땅바닥을 구르듯 기어 우물을 향해 달려갔다. 마지막 힘을 쥐어짜낸 몸부림이었다.

 그러나 날랜 병사들은 그런 그녀를 두고만 보지 않았다. 병사들의 시선을 끌기 위해 풀어헤친 머리채가 걸림돌이 되었다. 우물과 가장 가까이 서있던 병사가 그녀의 머리채를 낚아채었다. 제갈량은 그대로 넘어져버렸다. 가벼운 몸은 흙먼지를 일으키지도 못했다.


 “이 미친년이..”


 그녀에게 손을 물린 병사가 씩씩대며 다가와 칼을 뽑았다. 제갈량은 몸을 웅크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 때였다.


 “감히 누구를 핍박하느냐!”


 벽력같은 고함이 터지고, 그들을 향해 황급히 달려오는 말발굽소리가 들렸다. 병사들이 당황하여 수런거릴 틈도 없이, 공기를 찢는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허공을 가른 창이 무언가를 무수며 꿰뚫는 소리는 비명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제갈량은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그녀를 향해 달려오는 것은 틀림없는 조운이었다. 병사들이 허둥대는 동안, 조운은 시체에 꽂힌 창을 뽑아들어 제갈량을 에워싼 병사들을 도륙했다. 살이 찢기고 피가 튀었다. 다리에서 흘러나온 피로 서서히 젖어 들어가던 제갈량의 흰 옷에, 타인의 피가 함빡 덧씌워졌다.


 “, ..”

 “군사! 괜찮으십니까?”


 조운은 급히 말에서 뛰어내리며 제갈량을 불렀다. 제갈량은 문득 눈가가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긴장이 풀리니 눈물이 나오려했다. 그러나 제갈량은 애써 참아냈다. 아직은 마음을 놓아서는 안됐다.


 “부인과 작은 주공께선 어찌되셨습니까?”

 “두 분 모두 무사하십니다. 지금쯤 주공의 곁에 다다르셨을 것입니다. 저는 군사를 모셔가기 위해 왔습니다.”

 “그럼 되었습니다. 저는 이미 다리를 심하게 다쳐 움직일 수 없으니, 장군만이라도 어서 주공께 돌아가세요. 조조의 병사들이 개미떼처럼 많다하나, 장군의 무예라면 능히 뚫고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럴 순 없습니다, 군사. 말에 오르십시오. 제가 길을 내어보겠습니다.”


 조운의 말에 제갈량은 고개를 저었다. 이미 각오를 굳힌 단호한 얼굴이었다.


 “보십시오. 저는 이미 다리가 잘 움직이지 않는 지경입니다. 몸이 불편한 사람을 거느린 채, 어찌 수십만 대군의 포위를 뚫고 빠져나가려 하십니까?

 저는 이미 장군이 오시기 전부터 죽음을 각오하고, 저 우물로 뛰어내리려 마음을 먹었습니다. 조조가 저를 사로잡아 인질로 쓰는 것을 막기 위함입니다. 그러니 정 마음이 불편하시거든, 제가 뛰어내린 뒤 돌담을 무너트려 우물을 막아주십시오. 저들이 제 시체를 가져가지 못하게만 해주셔도 이 량은 장군의 은혜에 감사드릴 것입니다.”


 제갈량은 진짜로 몸을 일으켜 우물로 다가가려 했다. 조운은 당황하여 황급히 제갈량의 앞을 막아섰다. 제갈량은 젊은 장군의 떨리는 눈동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무슨 말이십니까, 군사. 제가 어찌 그럴 수 있겠습니까. 함께 돌아가십시다. 주공께서 군사를 걱정하고 계십니다.”

 “어서 가세요, 장군. 이러고 계시다간 정말로 둘 다 죽습니다. 이 량의 재주야 글이나 읽고 학문이나 하는 선비들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이니, 제가 죽어도 주공께선 새로운 선비를 찾아 군사로 삼으시면 됩니다.

 하지만 장군은 세상에 둘도 없는 만인지적의 장수가 아니십니까? 주공께선 다른 이들에 비해 군세도 기반도 약하시니, 장군의 뛰어난 무용은 주공께 없어선 안 되는 것입니다.”


 조운은 제갈량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들고 있던 창을 내던졌다. 제갈량이 당황하는 사이, 조운은 단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저는 일개 필부로, 여러 해 동안 주공을 따르며 많은 것을 배웠으나 제 사람을 버리는 법만큼은 배우지 못했습니다. 군사께서 가지 않으시겠다면 저 역시 가지 않습니다. 이곳에서 군사와 함께 죽겠습니다.”


 그리고 조운은 정말로 엄심갑을 벗으려했다. 제갈량은 조운을 말리기 위해 한 발을 앞으로 내딛었으나, 다친 다리로 중심을 잡지 못해 크게 몸이 휘청였다. 조운은 넘어지려는 제갈량을 부축해 일으켰다. 제갈량은 조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떨어트렸다.


 “이미 늦었습니다. 저들은 더욱 포위를 두텁게 하고 있을 것입니다. 장군께서 저를 데리고 가신다면 필시 뚫지 못할 텐데요.”

 “있는 힘껏 뚫어보겠습니다. 장판교까지만 도달한다면, 그 뒤는 익덕 형님께서 도와주실 겁니다.”


 조운은 망토를 풀어 제갈량의 어깨에 둘러주었다. 새하얀 망토는 피로 간간히 얼룩이 져있었다. 제갈량은 손을 들어 창고의 입구를 가리켰다. 제갈량을 찾기 위해 창고로 들어오느라, 병사들이 내렸던 말이 아직 그대로 창고 근처를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저기 하얀 말이 있습니다. 저 말을 타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지만 너무 눈에 띄지 않을까요?”

 “제가 원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제게 생각이 있으니, 따라주세요.”


 조운은 제갈량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그녀의 몸을 번쩍 안아들었다. 피가 바닥 위에 붉은 점을 그렸다. 조운은 제갈량을 말 위에 올리고, 자신도 올라타며 그녀의 몸을 단단히 끌어안았다.


 “상처를 지혈할 시간이 없습니다. 조금만 견뎌주십시오.”

 “정말로 괜찮으시겠습니까? 저를 안고 어찌 싸우실 생각이십니까.”


 조운은 창을 고쳐 쥐며 담담한 미소를 지어보였을 뿐이었다.


 “이 자룡, 한 번 내뱉은 말은 반드시 지킬 것입니다. 주공의 곁으로, 함께 돌아갑시다.”

 

***

 

 조운은 초조했다. 창이 부러지면 죽은 병사의 것을 빼앗아 쓰고, 피할 수 있는 것은 비껴 흘리고, 날아드는 화살은 민첩하게 쳐냈다. 조운의 무예가 아무리 뛰어나다고 하나, 몸이 자유롭지 못한 상태에서 품 안의 여인을 지키며 싸운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조운을 초조하게 만드는 것은 그 상황이 아니었다. 제갈량의 몸을 감싼 망토 한 구석이 점점 붉게 물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제갈량은 창을 잡고 말을 타며 싸우는 무인이 아니었다. 이런 종류의 상처엔 익숙하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여인이기에 체력은 더욱 떨어지고, 안 그래도 약한 몸은 거의 기진한 상태였다. 한시라도 빨리 돌아가야 한다. 더 늦기 전에. 다치지 않고, 온전히.


 “장군.”


 제갈량의 목소리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말조차 타지 못할 만큼 몸이 약해 늘 수레를 이용하는 몸이었다. 하물며 이토록 격하게 흔들리는 난전중의 승마에, 계속해서 긴장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으니 지치는 것은 당연했다.


 “한 가지 계교가 있습니다. 크게 소리를 쳐, 장군의 이름을 밝히시는 겁니다.”

 “저희는 타고 있는 말도 희고, 걸치고 있는 옷가지도 흽니다. 이미 충분히 눈에 띄는 상황인데, 제가 그리 소리를 치면 더욱 많은 이목이 집중될 것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이목을 끌어, 장군과 제가 여기에 있는 것을 조조가 알게 해야 합니다. 조조는 인재에 대한 욕심이 많고, 또한 그에게 있어 저희들은 어린아이보다 연약한 존재입니다. 반드시 방심을 하고 자만에 가득 차있을 것인즉, 저희들을 발견하게 되면 장군의 무예와 저의 지략을 탐내며 반드시 생포하라 명을 내릴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병사들은 온 힘을 다해 싸울 수 없으니, 반드시 살아날 길이 생기겠군요.”


 조운은 제갈량과 대화를 하는 중에도 두 명의 목을 베었다. 피가 솟구치는 소리, 시체가 넘어지는 소리에 제갈량은 움찔하며 몸을 움츠렸다. 조운은 제갈량을 안은 팔에 힘을 주며, 피에 젖은 창을 높이 치켜들었다.


 “상산의 조자룡이 여기 있다! 일찍이 박망파에서 너희들을 모조리 태우고 물속에 처넣은 제갈군사를 모시고 황숙께 돌아가는 길이니, 하늘이 내리신 귀한 인연을 방해하려는 자는 이 자룡의 창이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그대들은 모두 목 없는 귀신이 되리라!”


 자룡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달려드는 병사가 반, 그 말을 듣고 주춤거리는 군사가 반이었다. 그러나 제갈량의 계교는 적중하여, 차츰 두 사람을 향해 날아드는 화살이 잦아들고 날카로운 창검이 물러났다. 갈고리와 올가미, 커다란 방패들은 창날에 비하면 훨씬 상대하기 쉬웠다. 애초에 자룡은 품 안의 제갈량이 다칠까 제대로 된 기량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날붙이가 사라진다면 일은 훨씬 쉬워진다.

 병사들의 그의 발목에 올가미를 걸기 전, 조운은 결국 한 방향의 포위를 뚫고 한 가닥 살길을 찾아내어 바람처럼 말을 달렸다.


 “군사. 군사, 되었습니다. 조금만 더 견디십시오.”


 간신히 장비가 지키는 장판교를 지난 조운은, 정신없이 말을 달리며 중얼거렸다. 품 안의 군사를 감싸다가 꿰뚫린 어깻죽지며, 예리한 검에 베인 허리에서 쉴 새 없이 피가 흘렀으나, 자신의 상처를 살펴볼 틈은 없었다. 제갈량을 감싼 하얀 망토는 이미 그 색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검붉게 물든 망토는 지나치게 무거워져있었다.

 저 멀리, 멈춰서있는 유비의 식솔들이 보였다. 익숙한 얼굴들이었다. 조운은 이를 악물었다. 고지가 눈앞이었다.


 “자룡!”

 “주공!”


 조운은 제갈량을 안은 채 말에서 내렸다. 다리에 힘이 풀려 비틀거렸으나, 넘어지진 않았다. 유비는 조운의 상처를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군사.. 군사께서, 다치셨습니다. 제때 지혈을 해드리지 못해서.. 피를 많이 흘리셨는데..”


 조운은 허둥거리며 제갈량을 감싼 망토를 벗겨냈다. 조운이 아무리 말을 걸어도, 대답은커녕 어떠한 반응도 없는 제갈량이 걱정됐기 때문이다.

 제갈량은 정신을 잃은 채 조운의 팔에 안겨있었다. 장비에게 뒤를 맡기고 장판교를 지나며 완전히 정신을 놓아버린 듯 했다. 제갈량의 얼굴은 원래 희었으나, 피를 많이 흘린 탓에 창백하게 질려있었다. 아직 숨은 쉬고 있었으나, 곧 끊어질 듯 가늘었다.

 조운은 황망한 얼굴로 유비를 보았다. 유비는 좌우의 사람을 시켜 제갈량을 부축하게 했다. 감부인이 기꺼이 마차를 내어주었다. 의자의 곁에서 오랫동안 조수 노릇을 해왔다는 여인 한 명이 같이 마차에 올랐다.


 “자룡. 자네는 또 어찌 이리 많이 다쳤단 말인가. 자네도 어서 가서 치료를 받아야 하네.”

 “저는.. 괜찮습니다. 주공께선 먼저 출발하십시오. 저는 가서 익덕 형님을 모셔오겠습니다.”

 “그럴 수 없네. 자네를 잃을 수는 없어. 자네도 어서 수레에 오르게. 말을 타는 것도, 싸우는 것도 모두 의자에게 상처를 보인 다음일세. 이건 명령이야.”


 유비는 조운의 손을 부여잡았다. 저 멀리서 급한 부름을 받은 의자가 허둥지둥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정말 고맙네. 살아서 돌아와주어 고맙고.. 군사를 데리고 와주어 고마워. 자네가 아니었다면 난 오늘 두 개의 손발을 잃을 뻔 했네..”


 조운은 유비의 눈물에 오히려 어쩔 줄 몰라 하는 기색이었다. 그가 유비의 인사에 예의를 갖춰 인사하고 병사들의 부축을 받아 물러나는 동안, 유비는 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조운이 제갈량과 함께 돌아온 것은 천운이 따라주었기 때문이다. 제갈량은 이런 식의 무모한 돌파를 계획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누구보다 상황을 객관적이고 정확하게 파악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수십만 적군 속에 외롭게 고립된 상황이라면, 아마도 조운 하나만들 살려 돌려보내고 자신은 남으려 했을 것이다. 그것이 그나마 성공할 확률이 높은 방법이기 때문에.

 유비는 수십 리 떨어진 곳에서 나누었을 대화와, 설득을 가늠해보았다. 이내 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저 멀리서 호탕하게 웃으며 달려오는 장비를 발견한 유비는, 이내 몸을 돌려 자신도 말 위에 올랐다. 잠시 멈추었던 행렬은 다시 출발했다. 강하는 이제 지척이었다.

 

 

AND

[자룡공명] 제갈부인전

 

 조운은 유비의 방으로 들어섰다. 침실이었다. 유비는 다른 군주에 비해 엄격히 권위를 세우거나 허례허식을 따지는 편은 아니었으나, 침실까지 드나들 수 있는 사람들은 지극히 한정되어있었다. 관우와 장비, 자신, 그리고 제갈량.

 조운은 가볍게 예를 취하며 두 사람에게 인사를 올렸다. 유비는 부드러운 표정으로 손짓하여 조운에게 자리를 권했다. 그러나 제갈량은 조운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언제나 여유롭다 못해, 간혹 냉담하게 비치는 미소를 머금고 있던 입술이 오늘만큼은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어려운 일이 닥친 모양이구나. 조운은 그렇게 생각했다. 혹시 조조가 수십만 대군을 일으킨 것일까. 아니면, 손권이 또다시 형주를 빼앗으려 드는 것일까. 그것이 아니라면.. 도대체 우리의 군사를 저렇게 긴장시킬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단 말인가.

 조운이 질문을 입 밖으로 내기 전, 유비가 먼저 입을 열었다.


 “괜찮으시겠소?”

 “괜찮지 않은들 어찌하겠습니까.”


 제갈량의 목소리엔 피로가 묻어났다. 조운이 영문을 모른 채 두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동안, 제갈량은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고 이내 입을 열었다.


 “주공께서 새로이 혼인을 올리실까 합니다.”


 조운은 가만히 눈을 깜빡였다. 유비는 이미 세 번의 혼인을 했다. 또 다른 부인이나 첩실을 얻는 것은 전혀 누가 되는 일이 아니었다. 이미 저 위의 조가는 부인이 열다섯에 첩실은 수백이라지 않은가. 물론 혼인은 인륜지대사이니만큼 신중히 결정해야하는 문제지만, 오랫동안 생사고락을 함께 했다고는 하나 일개 장수일 뿐인 자신과는 상관없는 문제였다. 의논이라면 유비의 가족과 하는 편이 옳았다.


 “그렇습니까.”

 “그 이상은 묻지 않으십니까?”

 “주공의 일입니다. 어찌 제가 함부로 왈가왈부할 수 있겠습니까.”

 “아니요. 그 누구보다 장군의 허락이 가장 중요합니다.”


 조운은 의아한 얼굴로 제갈량을, 그리고 여전히 침묵을 지키고 있는 유비를 번갈아보았다. 제갈량은 내리깔고 있던 눈을 바로 떠 조운을 똑바로 마주했다. 유비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제갈량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가 주공의 첩실로 들어가려 하니까요.”

 “..?”


 자룡은 헛것을 들은 사람처럼 멍한 표정을 지었다. 제갈량은 쥐어짜내듯 목소리에 힘을 주어 간신히 한 글자씩을 뱉어냈다.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나, 조운은 그 뒤에 비친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어찌 모르겠는가. 자신의 온 마음을 다 내어준 정인일진데.


 “이 량은 병서와 옛 성현의 말씀을 부지런히 공부하여 몇 가지 재주를 익히고, 끝내 조가나 손가 따위는 개미보다 하찮게 여기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들의 마음과 그들의 병법을 손금 보듯 볼 수 있으니, 이는 결코 어리석은 만용이 아닙니다.

 그러나 저는 한낱 여인이 아닙니까. 제가 아무리 놀라운 재주를 선보이고 수십 번의 전투를 승리로 이끈 들, 관 장군과 장 장군은 물론이요, 가장 낮은 병사들조차 마음으로 저를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병사들이 군사를 진정으로 따르지 않으면 반드시 군율이 흐트러지고, 군령은 지켜지지 않을 것이니, 전투는 당연히 패하게 될 것이며, 나아가서는 유황숙의 병사들은 여인의 호령을 받는다하여 비웃음을 사고 백성들의 민심은 떠나갈 것입니다.”


 조운은 제갈량의 차분한 설명을 들으며 주먹을 말아 쥐었다. 그는 아직 분노하지 않았다. 다만 모든 것이 갑작스럽고 혼란스러워, 당황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허나 제가 주공을 지아비로 모신다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관 장군과 장 장군에겐 형수가 되니 그들은 저를 주공을 모시듯 섬길 수밖에 없으며, 낮은 병사들은 주군의 부인에게 예를 갖추고 그 명령에 복종해야 합니다. 또한 사람들은 이 량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지아비를 섬기며 사지를 함께하는 열녀로 볼 것이니.. 민심을 얻기에도 좋습니다.”


 제갈량은 자리에서 일어나 조운의 앞으로 걸어왔다. 옷자락 아래로 신발이 보였다. 언젠가 조운이 선물한 그 신발을 신고 있었다. 조운은 그제야, 자신이 시선을 아래로 떨어트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제갈량은 천천히 몸을 숙여, 조운의 앞에 엎드렸다.


 “장군께선 부디 노여워 마시고, 대업을 위해 남녀의 사사로운 정은 잊어주시길 청합니다. 주공께선 장군이 마음으로 따르지 않는다면 결코 이 혼사를 행하지 아니할 것이라 못 박으셨으니, 장군의 허락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조운은 입을 꾹 다물었다. 조운은 지금껏 몇 번이나 제갈량의 명을 받았고, 언제나 기꺼운 마음으로 명을 수행해왔다. 그러나 그 어떤 명령도 방금 들은 이 말보다 어렵고 잔인하진 않았다.

 어렵고 잔인했다. 정말로. 차라리 자신을 승산 없는 싸움으로, 결코 돌아올 수 없을 사지로 내모는 명이었다면 지금처럼 참담한 기분이 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조운은 제갈량의 작은 등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천천히 유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유비는 여전히 부드러운 그 미소를 띤 채, 조운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저어보였다. 원치 않는다면 허락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었다. 제 사람의 마음을 다치게 하느니 차라리 어렵고 불확실한 길을 가겠다는 뜻이었다. 유비는 늘 그런 사람이었다.

 떨리고 일렁이던 조운의 눈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조운은 자리에서 일어나, 제갈량의 앞으로 다가갔다. 바닥에 엎드린 그녀의 팔을 부축하여 일으켰다. 소매 아래로 잡히는 팔은, 며칠사이 더 말라있었다.


 “어찌 새삼스럽게 제 의견을 물으십니까. 주공과 군사의 뜻이 곧 이 운의 뜻이니, 저는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 뜻대로 하십시오.”

자룡.”


 유비는 조용히 조운을 불렀다. 그러나 조운은 유비를 향해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제갈량의 얼굴을 향해있었다. 한없이 애타고 애절한 시선이었다.


 “나는 자네의 마음을 알고, 군사의 마음도 알고 있네. 두 사람이 서로를 아끼고 은애함을 알고 있는데, 내가 어찌 그럴 수 있겠나. 원치 않는다면 거절해도 좋네.”


 자룡은 입술을 달싹였다. 쉽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제갈량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조운을 보지 않고 있었다. 차라리 얼굴을 들어 표정이라도 보여주면 좋으련만. 이미 제 시선은 또렷이 느끼고 있을 터인데.

 그러나 제갈량은 끝내 조운을 외면하고 말았다. 그 단호한 태도에서 답을 읽은 조운은, 한숨 섞인 미소를 지으며 유비의 말에 답을 내놓았다.


 “형제는 손발이요, 여인은 의복이라 하였습니다. 주공께선 저를 관, 장 두 분 못지않은 형제의 정으로 대해주시는데, 무슨 염치로 여인을 향한 사사로운 정조차 꺾지 못하겠습니까. 저는 신경 쓰지 않으셔도 좋으니, 다만 두 분 께서는 대업과 고통 받는 백성만을 생각하여 주십시오.”

 

***

 

 사람들은 황숙이 현인을 얻는다며 기뻐했다. 붉은 등과 붉은 비단과 붉은 꽃이 온 사방을 붉게 수놓았다. 악공들의 연주가 어둠을 헤집으며 퍼져나갔다.

 신방에 앉은 신부는 얼굴 앞으로 붉은 천을 늘어트리고 있었다. 곧 신랑이 다가와 천을 걷어낼 것이고, 신부를 안아 침상으로 데려갈 것이다. 내 군사껜 손가락 하나 대지 않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정인을, 내가 어찌 취하겠소. 나는 그런 짐승 같은 짓은 하지 못합니다. 유비는 몇 번이나 그렇게 약속하였으나, 그것이 위로가 되진 못했다. 혹여 애가 들어선들, 그것이 자신과 무슨 상관이 있으랴. 오히려 아이가 생기면 자신의 위치는 더욱 확고해 질 테니, 이 혼인의 목적과는 부합하는 일이다.

 그리고 만일 아이가 생긴다면, 조운이 자신을 향한 마음을 정리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자신은 평생 그에 대한 애정을 가슴 속에 품고 살아가겠지만.. 그와 자신의 관계에 끝을 고한 것은 자신이다. 자신은 그에게 불평을 할 어떠한 자격도 없었다. 그도 훗날 고운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고, 자식을 낳는다면.. 자신은 과거의 한 시절 추억으로 남을 것이고.. 내키지는 않는 일이지만..

 한없이 부정적이고 우울한 상념에 빠져들던 제갈량은,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느끼지 못했다. 제갈량이 퍼득 정신을 차린 것은, 저벅거리는 발소리가 지척으로 다가온 뒤였다. 긴장한 듯 뻣뻣한 걸음걸이로 다가온 신랑은 신부의 앞에 섰다. 붉은 천 사이로 남자의 신발이 보였다.

 스릉. 검이 천천히 뽑혀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저 검 끝이 붉은 천을 걷어내면 모든 것이 끝난다. 제갈량은 눈을 감았다. 가슴을 꽉 틀어막은 습한 열기가 괴로워, 깊은 한숨을 소리죽여 내쉬었다. 눈물을 머금은 숨이 허공으로 흩어졌다.

 날을 세우지 않은 검이 천천히 천을 걷어내었다. 그 아래 숨겨진, 슬픔으로 창백한 신부의 얼굴이 드러났다. 제갈량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자신을 찾아온 신랑을 올려다보았다.


 붉은 옷을 입은 조운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 .”


 제갈량은 당황한 목소리로 조운을 불렀다. 조운은 들고 있던 가검을 떨어트렸다. 둔탁한 소리를 내며 검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어찌.. , 일입니까?”

 “주공께서.. 저를 은밀히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몰래 사람을 불러 지은.. 붉은 옷을 내주시더이다.”


 조운은 천천히 제갈량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단단한 손이 천천히 올라와 제갈량의 뺨을 어루만졌다. 원래도 말랐던 뺨은, 마르다 못해 수척해져있었다. 조운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제갈량을 바라보며, 두 손으로 신부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신부의 눈에서 결국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는 당신을 평생 이렇게 부르고 싶었지만.. 앞으로는.. 평생 부르지 못할 말이지만, 오늘 밤만은 당신을 원 없이 부르겠습니다.”


 제갈량은 손을 들어 올려 조운의 손을 감싸 쥐었다. 조운은 울컥 치받는 것을 간신히 삼키며, 제 손을 감싸 쥔 제갈량의 손을 바라보았다. 그가 살아생전 보았던 그 어떤 것보다도 곱고 연약해서, 혹여 힘을 주면 부러질까 마음 놓고 잡아보지도 못한 손이었다.


 “부인..”


 이렇게 빨리 끝이 올 것을 알았더라면, 조금 더 잡아볼 것을. 볕이 좋은 날에는 물이 오른 꽃가지를 꺾어 선물할 것을. 술에 취한 체, 이 작은 몸을 꽉 한번 안아나 볼 것을.

 제갈량은 눈을 감았다. 쉴 새 없이 눈물이 흘렀다. 조운은 신부의 몸을 안아들었다. 병약하고 마른 신부는 깃털만큼 가벼웠다. 신부의 하얀 손이, 그의 붉은 옷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AND

[서서제갈]

살인의 추억

 

달빛마저 흐려, 유독 어둠이 짙은 밤이었다. 잠들어있던 서서는 바람소리에 섞여 들려오는 낯선 소리에 눈을 떴다. 이젠 잠든 사이에 누군가의 손에 목이 달아날 걱정 따위는 하지 않아도 되는 생활을 하고 있으면서도, 서서는 새벽마다 자주 잠을 깼다. 잠을 설친 날이면 하루 종일 몸이 피곤했으나, 협객으로 살던 시절에 들었던 버릇은 쉽게 없어지지 않았다.

다시 잠을 청하려던 서서는, 두 번째 들려오는 낯선 소리에 눈을 번쩍 떴다. 어쩌면 훨씬 전부터 계속해서 들려오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원직 형님..”

제갈량의 목소리였다. 혹여 남이 들을까, 숨을 잔뜩 죽인.

등잔 하나 밝혀들지 않은 제갈량은 어둠 속에서 떨고 있었다. 서서는 다급히 제갈량에게로 다가갔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익숙한 냄새가 풍겨왔다.

형님..”

무슨 일이냐, 량아.”

형님, .. 나 어찌합니까?”

서서가 제갈량의 어깨를 붙잡았다. 아무리 말랐어도, 이젠 열일곱 살을 먹은 사내아이다. 어깨가 두 손 뿌듯이 잡혔다.

무슨 일이야. 진정하고 말해 보거라. 아니다, 여긴 너무 어두운 것 같으니 안으로 들어가자꾸나. 들어가서 불을 밝히고..”

서서의 그 말에 제갈량은 다급하게 서서의 손목을 붙잡았다. 서서는 아이의 손이 끈적하다고 느꼈다.

, 아니 됩니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도,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작고 연약했다. 서서는 의아하게 느끼면서도 제갈량의 어깨를 쓸어주었다. 언제나 당차고 머리가 좋은 아이가, 이토록 당황하고 혼란스러워할만한 일이 무엇인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다만 아이에게서 희미하게 풍겨오는 피냄새가 어떤 가능성을 떠올리게 할 뿐이었다.

.. 내가, 사람을..”

제갈량은 결국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내가 사람을 죽였습니다, 형님...”

 

어른 하나 없이, 어린 형제 둘이서 살고 있는 집. 전란을 피해 도망쳐오긴 했으나, 낭야의 제갈 가문이라는 후광. 태수를 지냈던 그들의 숙부. 도둑들이 노리기엔 썩 괜찮은 조건이었다.

서서는 좀처럼 진정하지 못하는 제갈량을 달래고, 피를 뒤집어쓴 몸을 깨끗하게 씻기고, 피에 젖은 옷가지는 불에 태웠다. 바닥에 흥건한 핏자국을 모두 지우고, 시체는 멍석에 말았다. 서서의 이마에 땀이 맺히는 동안, 제갈량은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여전히 떨고 있을 뿐이었다.

서서는 멍석으로 만 시체를 어깨에 짊어졌다. 수레를 끌면 바퀴소리에 누군가가 깰 것이다.

잠든 척, 조용히 있거라. 금방 돌아오마. 알겠지?”

“...”

제갈량은 무릎을 끌어안으며 대답했다. 서서는 그대로 발소리를 죽인 채, 제갈량의 집을 나섰다.

 

이젠 좀 진정이 됐니?”

샛별이 떴다. 서서는 밤새 제갈량을 안고 등을 쓸어주며 달래주었다. 처음엔 사시나무 떨 듯 떨리던 몸도 서서히 떨림이 멎어갔다.

처음 만났을 땐 제 반 토막만한 어린아이였는데, 어느새 이렇게 자라서 품안을 가득 채운다. 서서는 그 사실에 새삼스러운 기분이 된 채로, 제갈량의 몸을 안고 있던 팔을 풀었다.

“..시체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산에 묻고 왔다. 깊이 파묻고 왔으니 당장 큰 비가 내려도 들킬 일은 없을 거다.”

제갈량은 고개를 끄덕이며 소매로 얼굴을 문질러 눈물자국을 지웠다. 조금 전까지 피로 젖어 불쾌하던 감각은 사라진 뒤였다. 그러나 온몸에 벌레가 기어가는 것 같은 소름끼치는 느낌은 좀처럼 지워지지 않았다. 손은 계속해서 떨렸으며, 목덜미 뒤가 서늘하다가도 순식간에 열이 오르며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미안하다. 도둑이 들 거라는 생각을 못했구나. 내가 진작 신경을 더 썼어야 하는데.”

“..실망하지 않으셨습니까? 저는.. 원직 형님, 저는..”

제갈량은 또다시 가빠오려는 숨을 억지로 가다듬었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현실을 외면할 수 있지만,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사람을.. 죽였는데요.”

“..난세가 아니냐, 량아.”

서서는 제갈량의 손을 끌어당겨 잡았다. 의연한 체 하고 있어도, 아직도 손은 떨리고 있었다. 제갈량은 서서의 말에도 납득하지 못한 것 같았다. 서서는 잠시 고민하다가, 제갈량의 손을 두 손으로 쥐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도 사람을 죽인 적이 있다.”

결코 꺼내고 싶지 않았던 이야기였다. 살인자를 향한 경멸과 힐난, 두려움에 질린 시선들을 또다시 받아내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단은, 눈앞의 아이가 자신을 자책하기 전에, 달래는 것이 무엇보다 급했다.

?”

나 역시 사람을 죽였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어쩌다보니 말이다. 그런데 내가 널 이해하지 못할 이유는 또 무엇이겠느냐.”

서서는 제갈량의 눈빛이 가늘게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겁을 낼까. 아니면 그간 숨겨온 것에 대해 화를 낼까. 그러나 제갈량의 반응은 서서가 예상했던 그 어떤 것도 아니었다.

형님도 저처럼, 이리 두려우셨습니까?”

서서의 손을 잡은 제갈량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때의 형님도, 저처럼, 속이 메스껍고, 어지럽고, 무섭고, 혼란스럽..”

제갈량은 말을 맺지 못했다. 다시 눈물이 흘렀기 때문이다. 서서는 제갈량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아이의 몸을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떨리고 있는 등을 다독이며 쓸어주었다.

비슷했을지도, 그보단 덜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자신은 제법 거친 세상에 몸을 담고 있었으니까. 서서는 끊어진 제갈량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저희가 왜 이런 일을 겪어야 합니까?”

이윽고 다시 들려온 제갈량의 목소리에는 미미한 분노가 스며들어있었다. 서서는 조용히 제갈량의 이름을 불렀으나, 제갈량에겐 그 목소리가 닿지 않는 것 같았다. 아이는 서서히 자신의 생각과 스스로의 세상에 침전되고 있었다.

어째서 저희들은 누군가를 약탈하고, 누군가를 해치며 살아가야합니까? 나 혼자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나 혼자 군자의 도리를 공부하는 것이, 이 난세에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저들이 나를 살인자로 만들고, 짐승으로 만듭니다.”

서서는 아이의 정수리 언저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서서 자신도 그리 많은 나이라곤 할 수 없었다. 자신의 학문이 깊고, 높은 뜻을 통달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품 안의 아이보다는, 어쨌든 자신이 아끼는 아우보다는 몇 살이건 더 먹은 어른이고, 아이보다 앞서 비슷한 고민을 오랫동안 해왔다.

당장 정답을 일러줄 수는 없다. 정답은 존재하지도 않는 문제이다. 그러나 아이가 스스로의 밑동을 갉아먹다가, 잘못된 방향으로 기울어지기 전에 붙잡아주는 역할쯤은 그도 해낼 수 있을 것이다.

조금 자라나다 말 새싹이나 병든 나뭇가지라면 어찌 되든 상관없다. 그러나 서서는 아이의 재능을 알고 있었다. 아이는, 제갈량은, 거대하게 자라 가지로 하늘을 덮고, 끝내 황궁의 가장 깊고 높은 천장을 떠받드는 대들보가 될 수 있는 나무다. 아이의 분노가 엇나간 방향으로 흘러간다면, 그보다 큰 재앙도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공부를 멈춰선 안 되는 것이다, 량아.”

제갈량은 눈물로 젖은 얼굴을 들어 서서를 올려다보았다. 서서는 부드러운 표정으로 아이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서서의 소매 끝이 젖어 들어갔다.

조조의 병사가 도륙한 수십만 백성들 중에, 그의 아비를 두 눈으로 보기라도 한 사람이 몇 명이나 될 것 같니?”

“...”

조조에게도 저들이 있었고, ‘저들이 그의 아비를 죽였다. 조조가 저들을 구분하여 제 적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알고, 순리와 성현의 말씀을 따랐다면, 지금처럼 세상 사람들이 그를 두려워하면서도 미워하겠니? 아니다. 사람들은 모두 그를 우러르고, 그의 효심을 찬양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몇 번이나 정도를 벗어났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짐승이나 진배없는 자가 되고야 만 것이다.”

내가 조조처럼 될 것이라 말씀하시는 겁니까?”

가능성은 있겠지.”

서서는 품에 안고 있던 제갈량을 내려놓았다. 제갈량은 여전히 마르지 않은 눈으로 서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서서가 중간에 잘라 삼킨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서서는 잠시 단어를 고르다가, 신중히 입을 열었다.

넌 대단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아이다, 량아. 넌 아직 어리지만, 난 몇 번이나 너의 재주에 탄복해왔다. 너는 조조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한 존재도, 혹은 전혀 다른 사람이 될 수도 있어. 넌 스스로를 관중과 악의에 비견한다만, 난 어쩌면 네가 그 두 분보다 대단한 사람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그런 생각을 종종 한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원직 형님.”

차분히, 오래, 충분히 생각해보렴. 너는 답을 찾아낼 수 있을 거다. 너는 아주 영리하고 똑똑하니까.”

서서는 제갈량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주고, 진중하고 무겁던 말투를 가볍게 바꿨다. 갑작스레 경쾌해진 목소리에 제갈량은 당황하여 대답할 틈을 놓치고 말았다. 많이 놀랐겠구나. 놀랐을 땐 한숨 푹 자는 게 최고란다. 오늘은 나도 여기에서 잘 테니, 걱정 말고 들어가서 눈이나 좀 붙이거라. 그 어조는 조금 과장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해서, 제갈량은 토를 달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그저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고, 감사합니다, 형님, 하는 인사를 올린 뒤,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눈을 감았을 뿐이다.

서서는 마루에 걸터앉아, 오랫동안 하늘을 그저 올려다보고만 있었다. 아이가 자라, 주군을 선택하고 그 밑에서 뜻을 펼칠 때가 올 것이다. 아마 그렇게 먼 미래는 아닐지도 모른다. 그때 아이가 내지르는 그 불길이 얼마나 크게 타오를 것인지, 누구를 태울 것인지, 서서는 그 무엇도 예상할 수 없었다. 자신이 짐작하기엔 너무 크게 자랄 아이였다.

다만 크게 엇나가지만 않았으면. 바르고 좋은 주군을 만났으면. 그렇게 막연한 소원을 빌며 하늘을 향해 한숨을 크게 한 번 쉬었을 뿐이었다.

 

***

 

어렸을 때..”

조운은 제갈량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달구경을 하다가 분위기에 취했는지, 제갈량의 눈빛은 평소와 다르게 조금 흐릿했다.

오늘과는 다르게 달빛이 아주 흐린 날에.. 사람을 죽인 일이 있었지요.”

제갈량은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담담한 표정이었으나, 찻잔은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손끝이 가늘게 떨린 것이다.

그러십니까.”

동생과 저 뿐인 집에.. 도둑이 들었답니다. 숙부님이 돌아가시고 몇 해나 지났을까.. 사실 이러한 난세에, 몇 년이 지나도록 별다른 사고가 없었던 것이 천운에 가깝다고 하는 편이 맞겠습니다만.”

군사.”

조운은 조용히 제갈량을 불렀다. 눈을 내리깔고 있던 제갈량은 답지 않게 조금 머뭇거리다가, 천천히 시선을 올려 조운의 눈을 보았다.

괜찮습니다. 어째서 그렇게 당황하십니까.”

“...”

아무도 군사를 비난하지 않을 것입니다. 적어도 이 운은 그렇습니다.”

“..그러십니까.”

제가 지금껏 죽인 사람의 수만 해도 천 명은 넘어갈 것입니다. 이 전란 속에서 그런 일은 빈번한 것입니다. 하물며 군사께선 스스로의 영달과 사심을 채우기 위해 남을 해한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크게 죄책감 가지실 필요 없습니다.”

제갈량은 조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장군. 덕분에 오랜 시간 가슴을 억누르던 죄책감이 조금 덜해진 것도 같습니다. 제갈량의 인사에 조운은 꾸벅 고개를 숙였을 뿐이었다.

제갈량은 다시 달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서서는 이제 그의 곁에 없었다. 먼 곳으로 떠나갔다. 제갈량은 오늘처럼 그 사실이 아쉽게 느껴지는 날이 없었다. 제갈량은 그날 서서가 제게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것은 일종의 걱정이었고, 동시에 기대였다. 자신은 그의 기대를 충족할 의무를 지고 있지는 않았다. 동시에 그의 기대를 져버릴만한 행보를 보인 적도 없었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그랬다. 제갈량은 무언가 결정을 내리고, 생각을 거듭하고, 책략을 짜낼 때마다 손끝의 거스러미처럼 툭툭 걸리는 서서의 기대가 부담스럽고, 신경 쓰였다. 두 사람은 이제 편지조차 닿을 수 없을 만큼 떨어졌으나, 그 기대만큼은 좀처럼 벗어던질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런 기대를, 그리고 걱정을 해주는 것도 서서뿐이다. 제갈량은 그렇게 생각하며 피식 웃어버리고 말았다.

이제 제갈량의 곁에는 사람들이 많았고, 그들이 제갈량에게 거는 기대는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무거워졌으며, 어깨와 세 치 혀에 짊어진 목숨은 수만에 달했다. 아우와 제 어린 목숨이나 보살피며 간신히 살아가던 시절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나날이었다.

그러나 외로운 것은 어쩔 수가 없는 일이다.

'기타 > 삼국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자룡공명] 제갈부인전 2  (0) 2017.12.06
[자룡공명] 제갈부인전  (0) 2017.12.04
[서서제갈] 이따금씩 우연은 호흡곤란을 동반한다.  (0) 2017.11.19
[IF썰] 이릉대전 下  (0) 2017.11.17
[IF썰] 이릉대전 上  (0) 2017.11.16
AND


[서서제갈] 이따금씩 우연은 호흡곤란을 동반한다.


0.

이따금씩 우연은 호흡곤란을 동반한다.

 

1.

온 나라가 전란으로 들썩이는 난세였다. 형주는 어느 지방보다 평화로운 곳이었지만, 가장 낮은 곳에서 살아가는 백성들은 여전히 고단했다. 한 떼의 성난 군사들이 짓쳐들면, 그 무자비한 학살을 피해 도망치는 것만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저항이었다.

서서는 그들 사이에 섞여, 고개를 숙인 채 걸어가고 있었다. 머리를 풀어헤치고 얼굴에 흙을 발랐으나, 이 피난민들 사이에서 그 정도의 초췌함은 특별히 눈에 띌 것도 없었다. 관리들이 아직 눈에 불을 켜고 자신을 찾고 있을 테지만, 정확한 용모파기가 그려진 것도 아닐뿐더러 이 많은 사람들 틈에 섞여있으니 천리안을 가졌다 하더라도 쉽게 자신을 찾아내지는 못할 터였다.

문득 서서는 제 소매를 꽉 붙드는 작은 힘을 느끼고 뒤를 돌아보았다.

마르고 혈색이 좋지 않은 어린 아이가 자신의 소매를 붙든 채 연약한 숨을 내쉬고 있었다. 얼굴이 희다 못해 창백하고, 눈에 초점이 맞지 않았다. 서서는 아이가 현기증을 느끼는 것을 알아채고 급히 손을 뻗어 아이의 몸을 끌어당겼다. 바닥으로 넘어지려던 아이의 몸이, 서서의 품 안으로 무너지듯 쓰러졌다.

서서는 당황하여 급히 주변을 살폈다. 그들과 가까이에 있던 사람들은 흘끗 시선을 던지긴 했으나,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는 않았다. 서서는 황급히 아이를 안아들고 목청껏 소리쳤다.

이보시오! 여기 어린 아이가 있소! 아이를 잃어버린 사람 없소이까! 이 아이의 보호자가 누구시오!”

그러나 서서의 다급한 외침에도 나서는 이는 없었다. 서서는 어설프게 아이를 안아 든 채,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이 인파 사이에서 아이의 부모를 찾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는 아이를 버리고 갈 수는 없었다.

얘야. 정신 좀 차려보아라. 네 이름이 뭐니? 아니, 네 부모님의 이름은? 어디에서 왔니?”

그러나 아이는 숨을 헐떡이며 가슴을 쥐어뜯을 뿐, 대답을 하지 못했다. 잠시 고민하던 서서는 아이를 등에 업었다. 제 소매를 꼭 움켜쥐고 놓지 않는 손이, 저를 살려 달라 애원하는 듯 느껴졌기 때문이다.

객잔은 어딜 가나 만석이었지만, 서서는 요령 좋게 허름한 쪽방 하나를 얻을 수 있었다. 누가 보아도 창고로 쓰다가 급하게 물건만 드러낸 듯 보이는 방이었고, 가격은 터무니없이 비쌌다. 그러나 서서는 불평하지 않았다. 제 한 몸뿐이라면 어딘가에서 노숙을 할 수도 있었겠으나, 아이에겐 안 될 말이었다.

아이는 병약하고 지친 기색이 완연한 중에도, 사랑받으며 귀하게 자란 티가 났다. 추레한 몰골의 서서가 그런 아이를, 심지어 의식을 잃은 아이를 등에 업고 객잔에 들어섰을 때, 주인은 당연히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서서는 나이차가 많이 나는 동생이라 둘러대고, 방값에 약간의 돈을 더 얹어 주인이 그 말을 믿도록 만들었다.

 

2.

선잠에 들었던 서서가 이른 새벽에 문득 눈을 떴을 때, 어둠 속에서 별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두 개의 눈동자에 놀란 것은 그간 협객으로 살며, 그리고 혼자 도망치며 살아온 시간이 너무 긴 탓이었다. 품속의 단도보다 낮에 구해준 아이의 존재에 먼저 생각이 미친 것은, 두 사람 모두에게 천운이라고 할 수 있었다.

“..언제부터 깨어있었니?”

조금 전에 깼습니다. 선생은 누구십니까?”

되묻는 아이의 목소리는 똘똘하기 그지없었다. 제법 영리한 아이겠구나 싶어, 서서는 피식 웃으며 답했다.

나는 그저 떠돌며 살아가는 야인이고, 전란을 피해 정처 없이 도망치는 중이다. 다시 만날 기약도 없는 내 이름은 알아 무엇 하겠니.”

하지만 성함을 모르면 어찌 은혜를 갚겠습니까?”

아이의 당돌한 말에 서서는 작은 소리로 웃었다.

은혜는 갚지 않아도 좋으니 네 몸이나 잘 살펴라. 그래, 네 부모는 누구고, 어쩌다가 홀로 떨어져버린 거냐?”

부모님은 돌아가셨고, 숙부님과 어린 아우와 함께 피난을 가던 중이었습니다. 어지러움이 심해져 잠시 숙부님을 놓쳤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숙부님을 찾을 수 없어 급하게 나아가다가 문득 눈앞이 아득해져 쓰러져버린 것입니다.”

숙부님의 성함은 어찌 되시냐? 어쨌든 다시 찾아야 할 것 아니냐.”

어둠 속에서 아이가 움직이는 모양새가 희미하게 보였다. 흔히 아이들이 뻐길 때 그러하듯, 작은 어깨를 쭉 펴는 것 같았다.

괜찮습니다. 이 량은 비록 아직 어리긴 해도, 혼자서도 갈 길을 찾아낼 재주 정도는 있습니다. 날이 밝는 대로 떠날 테니 선생께도 더 이상 폐를 끼치진 않을 것입니다. 허나 선생의 이름을 모르니 앞으로도 영영 구해주신 은혜를 갚을 길이 없을 것 같아 그것만이 걱정입니다.”

그 당찬 목소리가 귀여워 서서는 피식 웃어버렸다. 서서는 아이의 어깨를 잡아 침상에 눕히며 대답했다.

그래, 알려주마. 내 이름은 서서요, 자는 원직이다. 다만 내 이름을 밝히는 것을 꺼리는 것에는 이유가 다 있으니, 다른 사람들에겐 나를 만났다는 말을 하지 말거라. 네가 특히 영특한 것 같아 너에게만 특별히 알려주는 것이다. 알겠니?”

.”

아이는 그러겠다고 거듭 약조했고, 서서는 그런 아이를 달래 다시 재웠다. 아직 완전히 동이 트려면 몇 시진은 더 기다려야했다.

 

3.

서서는 등 뒤로 흐르는 식은땀을 느끼며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관리 한 사람과 병사 두 사람이, 매서운 눈초리로 서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용모파기를 가지고 있었으나, 서서의 얼굴이 지저분하고 머리를 풀어헤쳐 잘 알아볼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결국 서서가 묵었던 객잔의 주인이, 서서가 떠난 두 관아에 신고를 한 모양이었다. 그들은 함께 있던 어린아이에 대하여 자꾸만 물었을 뿐 서서가 누구인지는 캐묻지 않았으나, 조사를 받다보면 과거의 죄가 들통 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서서가 참담한 기분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그는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한 소년을 발견했다. 어제 아침 객잔을 나와 헤어진, 이름 모를 그 소년이었다. 그의 곁에 어린 아이를 업은 사내가 함께 서있는 것을 보니, 아이의 말대로 혼자서 숙부를 잘 찾아낸 모양이었다.

그래, 그래도 한 사람은 구했으니 됐다. 이것은 그간 내가 쌓아온 업보의 결과다. 그래도 죽기 전 저 어린 것 하나 정도는 구했으니..

서서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문득 숙부의 손을 놓은 아이가 서서에게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네 이놈, 선복아! 어딜 갔었던 거야!”

아이의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서서는 물론이고, 관리와 병사들 모두 당황하여 뒤를 돌아보았다. 아이는 관리를 향해 두 손을 모아 공손하게 인사했다.

이놈은 저희 집 하인 놈인데, 선생께선 무슨 일로 그러십니까? 저에게 말씀하시지요.”

관리는 여전히 의심하는 눈초리로 서서를 흘끗 보았으나, 조금 전처럼 그를 다그쳐 묻지는 않았다.

공자는 뉘시오?”

관리의 태도는 적대적이진 않았으나, 어린아이라면 충분히 겁을 먹을 만큼 위압적인 목소리였다. 그러나 아이는 전혀 주눅 들지 않고 태연하게 대답했다.

저는 낭야의 제갈씨로, 이름은 량이며, 사예교위를 지내신 제갈풍의 후손이요, 연주 태산군 군승을 지내신 제갈규의 차남이며, 예장태수를 지내신 제갈현은 저의 숙부 되십니다. 이놈은 선복이라는 놈으로 제 아비 때부터 저희 집 일을 도와온 가노인데, 제 몸이 유독 약하여 언제나 제 곁에서 시중을 들게 해왔습니다. 그런데 함께 피난길에 올랐으나 중간에 이놈이 길을 잃은 듯하여, 이틀 째 찾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아이는 태연한 얼굴로 잘도 거짓말을 지어내었다. 서서는 아이가 저를 도우려 한다는 것을 느끼고, 아이의 장단에 맞춰 고개를 조아렸다. 관리와 병사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였으나, 이미 아이의 성과 집안 내력을 모두 들은 뒤라 더 이상 되묻기도 난감한 듯 했다. 그들은 작은 목소리로 몇 마디 말을 주고받은 뒤, 실례했다며 짧은 사과의 말을 남기고 돌아갔다.

관리와 병사들이 돌아간 뒤, 아이는 서서를 올려다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제가 은혜를 갚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 고맙구나.”

제 조카가 하는 양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사내가 다가왔다. 사내는 서서보다도 훨씬 나이가 많았지만, 서서에게 예의를 갖추며 인사했다. 서서는 황망히 마주 인사하며 흘끔 눈치를 보았다.

량을 구해주셨다는 원직 선생이십니까?”

“... 그렇습니다.”

남에게 이름을 밝히지 말라 거듭 당부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다만 량은 저를 아비처럼 여기고 따르니, 제 말에 차마 거역하지 못하고 선생의 성함을 제게 알린 것입니다. 부디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제갈량이 서서의 시선을 피해 딴청을 부리는 것을 본 제갈현이 급히 덧붙였다. 서서는 그저 아니라며 손을 내저을 뿐이었다.

헌데, 어째서 이름을 숨기고 다니시는 것입니까? 조금 전 관리와 병사들이 선생을 붙잡은 것도 그 이유와 연관이 있는 것인지요?”

서서는 대답하지 못했다. 주변에 듣는 귀도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살인죄를 알게 되면 지금은 호의적인 상대의 태도가 어떻게 변할지 가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답을 망설이는 서서를 본 제갈현은 어조를 바꾸어 다시 말했다.

선생을 곤란하게 하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허나 방금과 같은 수모를 또 겪지 않으시리라는 보장이 없으니, 당분간은 저희와 동행하시는 것이 어떨까 하는 말씀을 드리고자 했던 것입니다.”

서서는 제갈현의 말을 금방 이해할 수 없었다. 그의 대답이 늦어지는 것이 거절의 뜻이라고 생각한 제갈현은 급히 말을 덧붙였다.

다른 부탁을 드리려는 것은 아닙니다. 조금 전에 량이 둘러대었듯, 저희 식솔들과 동행하시며 선복이라는 이름으로 신분을 속이시는 것은 어떠하신지 여쭈는 것입니다. 물론 정말로 가노로 부리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량과 함께 지내시며 혹여 아이가 또 아프거나 쓰러지거든 돌봐주실 수 있겠습니까? 길은 혼잡하고 일이 번잡하여, 저 혼자 어린아이까지 모두 챙기기에는 힘이 부쳐 그렇습니다.”

아이는 서서의 소매를 붙잡은 채 올려다보았다. 허락하라는 표정이었다. 전혀 거절할 이유가 없는 제안이었다. 그러나 서서는 그간 살아온 환경 탓인지 선뜻 그러겠노라 대답할 수가 없었다. 한참을 망설이던 서서가 이윽고 꺼낸 말은, 대답이 아닌 질문이었다.

어째서 저를 이렇게까지 도와주시는지요? 저는 의심이 많아 호의로 베풀어주신 은혜에도 선뜻 답을 드릴 수가 없습니다.”

아닙니다. 이 난세에 누가 남을 쉬이 믿을 수 있겠습니까. 다만 량은 돌아가신 제 형님이 맡겨주신 아이로, 제겐 아들이나 다름없습니다. 제 불찰로 아이를 잃어버려 세상이 무너지는 듯 했는데, 이토록 무사히 돌아오게 된 것은 모두 하늘의 덕이요 선생의 은혜입니다. 저는 다만 그 은혜를 갚고자 함이니, 부디 의심하지 마십시오. 또한 량에게는 선생과 연배가 비슷한 형이 하나 있었는데, 피난길에 갑작스레 떨어지게 되어 적잖이 외로움을 타는 모양이니, 선생께서 량을 형제 대하듯 하여주시면 저는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서서는 다시 제 소매를 잡아당기는 아이의 힘을 느꼈다. 아이에게로 시선을 돌리자,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서서는 피식 웃어버리고 말았다. 아이의 표정이 너무나 분명했기에, 너도 정말 그랬으면 좋겠냐고 새삼 물을 것도 없었다.

감사합니다. 그럼 염치 불구하고 신세를 지겠습니다.”

서서는 제갈현에게 공손히 인사하며 답했다. 제갈량은 서서의 그 말을 듣고 활짝 웃으며, 소매를 놓고 그의 손을 잡았다.

'기타 > 삼국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자룡공명] 제갈부인전  (0) 2017.12.04
[서서제갈] 살인의 추억  (0) 2017.12.04
[IF썰] 이릉대전 下  (0) 2017.11.17
[IF썰] 이릉대전 上  (0) 2017.11.16
[IF썰/(弱)조조공명] 빈 찬합  (0) 2017.11.13
AND

내가 보고싶은대로 리라이팅 2. 이릉대전 下

 

 무사히 돌아온 유비는 군마와 혼란이 수습되자 좌우의 대신들을 불러모아 정무와 승상부의 일들을 물었는데, 가지런하고 빈틈없던 일들이 밀리고 쌓일 뿐만 아니라 매한가지로 흐트러지며 혼탁해져있어 유비는 분노하며 동시에 한탄하였다.

 공명은 매일 나를 부끄럽게 만드는구나! 내 손으로 나의 소하를 쫓아냈으니, 내가 어찌 한 황실을 부흥시킬 수 있겠는가!

 그리고 제갈량이 낙향한 고을을 물어, 예물을 준비하고 직접 말을 몰아 제갈량을 만나러 갔다. 수십 년 계속된 전란으로 백성들은 쉬이 피폐해지곤 하였으나, 제갈량이 은거하고 있다는 그 고을은 굶는 사람이 없고 백성들은 즐겁게 생업에 종사하니 유비는 이를 신기하게 여겼다. 병사를 시켜 그 까닭을 묻자 아낙이 밝은 얼굴로 답했다.

 본디 이 고을은 산적이 활개를 쳐 사람이 살기 어려운 마을이었습니다. 허나 자룡 장군께서 이 고을에 오신 뒤 직접 산에 올라 그들과 무용을 겨루고 설득하니, 그 무예와 인품에 감복한 산적들이 회개하여 직접 밭을 갈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고을에 사내가 적어 농사를 짓지 못하니, 승상께선 이 모든 것이 빨리 역적을 죽이지 못하고 오랫동안 싸움을 이어가는 자신의 업보라며 마음 아파 하시고, 적은 힘으로도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농법을 만들어 저희들에게 가르쳐주시니, 아낙과 어린 아이들의 힘만으로도 보리를 넉넉히 기를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추수를 기다리는 동안 배를 곪을 백성들을 걱정하며, 누군가 청하기도 전에 재산과 곡식을 풀어 모두를 도와주시니, 이 고을엔 어른과 아이는 물론이고 개 한마리에 이르기까지 배를 곪는 이가 없습니다.


 조금 더 나아가니 어린아이 한 무리가 크게 노래를 부르며 걸어가고 있었다. 유비가 귀를 기울여보니 태평한 세상을 노래하는 태평가였는데, 그 뜻이 심오하고 문장이 힘잔 것이 예사 노래가 아니었다. 유비가 아이 하나를 불러 누가 그 노래를 지었느냐 물었다. 아이는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와룡선생이십니다

 유비는 웃으며 물었다.

 어찌 와룡이라 부르느냐?

 아이는 막힘 없이 답했다.

 승상이라 부르시면 선생께서 깊이 슬퍼하시고 한탄하시기 때문입니다. 신하로서의 본분을 다하지 못하고 한적한 시골에 오시어 몸을 편히 뉘이고 계시니, 천자께 면목이 없다며 승상이라 부르시는 것을 엄히 금하셨습니다.

 유비는 그 말이 안타깝고 부끄러워 절로 눈물이 났다. 눈물을 훔친 유비는 아이에게 다시 물었다.

 와룡선생은 어찌 지내고 계시느냐?

 낮에는 마을의 크고 작은 분쟁들을 직접 살펴주시고, 밤에는 글을 모르는 자들에게 글을 알려주십니다. 낮에는 처리하시는 일마다 공정하고 정확하니 그 누구도 불만을 가지는 이가 없고, 밤에는 그 학식이 끝간데가 없으니 모든 사람들이 감탄하며 학업에 열중합니다. 다만 날로 병이 깊어지시며 끝내는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하신다 하니, 저희들은 와룡선생이 지으신 노래를 크게 불러 선생을 위로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말을 마친 아이는 유비에게 인사를 하고 다시 노래를 부르며 갈 길을 가버렸다. 유비가 조금 더 나아가니, 이번엔 한 떼의 장정들이 멧돼지를 지고 씩씩하게 걸어오고 있었다. 유비가 말을 멈추고 그들이 어딜 가는지 물었다. 장정들은 대답했다.

 저희는 사람의 탈을 쓴 금수로 살던 자들이나, 자룡 장군과 공명 선생 덕에 큰 깨달음을 얻고 지금은 산 위에서 화전을 일구며 살아가고 있는 치들입니다. 공명 선생의 병이 중하시다하여 걱정하던 찰나, 마침 덫에 커다란 멧돼지가 걸렸기에 공명 선생께 선물하러 가는 길입니다.

 장정들은 그렇게 답하고 바쁘게 걸음을 옮겼다. 조금 뒤에 약초꾼 한 사람이 낡은 꾸러미를 품에 안은 채 걸어왔다. 유비가 묻자, 약초꾼이 답했다.

 저는 산에서 약초를 캐어 팔아가는 필부입니다. 오늘 아침 귀한 삼뿌리를 발견하였기에, 공명 선생과 자룡 장군께 선물해드리러 가는 길입니다.

 이렇듯 온 마을 사람들이 하나되어 제갈량과 조운을 아끼고 사랑하니, 유비는 가슴이 먹먹하고 괴로웠다. 유비가 제갈량의 집에 도착하여 보니, 한 나라의 승상이었던 자가 사는 집이라곤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검소하였다. 담장은 높지 않고, 문은 좁으며, 드나들은 사람들은 모두 무명옷을 입고있으니, 유비는 탄복하며 사람을 불렀다.

 이윽고 제갈균이 직접 나와 유비를 맞이하였는데, 집안에 병자가 있어 목소리를 크게 낼 수 없음을 사죄하니 유비가 제갈균의 두 손을 마주잡고 울며 말했다.

 이 비는 아둔하고 성정이 포악하여, 공명선생께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질러버렸습니다. 이에 깊이 반성하고 용서를 빌고자 찾아왔으니, 선생께선 부디 저를 물리치지 마시고 공명선생을 만나뵐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제갈균은 공손히 소매를 모으며 답했다.

 천자께서 친히 걸음을 해주셨으니, 그 은혜를 어찌 모르겠습니까? 다만 형님께선 지금 병이 중하여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실 뿐만 아니라 자주 까무러치시니, 당장 만나뵈실 수 있는 상태인지는 확답을 드릴 수 없습니다. 일단 안으로 드시지요.

 아닙니다. 제가 어찌 편히 앉아 기다릴 수 있겠습니까? 선생을 처음 뵐 때 하였듯 시립하여 선생이 깨실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그리 서계시면 제가 형님께 그게 혼이 납니다. 부디 안으로 드셔서 조장군을 먼저 만나뵈시지요.

 유비가 놀라 물었다.

 자룡이 함께 지내고 있습니까?

 제갈균이 웃으며 답했다.

 형님께선 몸이 약하시고 저는 천성이 게으르니, 흙을 만지며 생활하기 어렵습니다. 허나 조장군은 나이를 잊은 듯 여전히 건강하시고 활력이 넘치시니, 형님과 같은 지붕 아래에서 먹고 자며 더불어 산지가 벌써 오래 됩니다. 직접 하인들과 함께 밭을 갈고 씨를 뿌리시니, 너 나 할 것 없이 성실하게 일하여 흙은 기름지게 변하고 넓은 밭엔 잔돌 하나 구경할 수 없습니다.

 제갈균은 유비를 밭으로 안내하였다. 과연 그곳엔 웃통을 벗고 직접 밭을 갈고 있는 조운이 있었는데, 반백이 가까워오는 나이가 무색하게 우람하고 하얀 등에는 흉터가 가득 남아있었다. 평생 전장을 누비면서도 상처 하나 나지 않았던 하얀 눈같은 몸에 저토록 심한 상처를 냈다는 사실이 부끄러워, 유비는 서둘로 조운의 앞으로 가 엎드렸다.

 장군. 이 모자란 비가 잘못을 뒤늦게 깨우치고 사죄를 드리러 왔습니다.

 조운은 황망히 쟁기를 내던지고 유비를 부축해 일으켰다.

 이러지 마십시오. 귀하신 분이 어찌 흙을 밟으시고 어찌 머리를 조아리십니까? 먼저 들어가 계십시오. 곧 찾아뵙겠습니다.

 유비가 그 말대로 제갈량의 집으로 돌아와 기다리고있자, 곧 땀을 씻고 의복을 갖춰입은 조운이 들어와 유비에게 절했다.

 어찌 이 궁벽한 시골에 직접 걸음하셨습니까. 불러주셨다면 당장에라도 밤낮으로 말을 달려 제가 직접 찾아갔을 것입니다.

 내 장군과 선생에게 지은 죄가 차마 입에 담기도 어려울 만큼 크거늘, 어찌 그런 무례를 범한단 말이오. 자룡. 내 그대를 볼 면목이 없으나 염치 불구하고 부탁드리리다. 자룡, 부디 나와 함께 돌아가주시구려.

 조운은 두 손을 모으며 답했다.

 이 운은 언제든지 폐하를 위해 창을 잡고 말을 달리며 선봉에서 싸울 각오가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공명선생의 병이 깊으니, 먼 길을 가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선생의 건강이 그리 위중합니까.

 유비가 걱정하는 얼굴로 물었다. 조운은 일전에 의원이 해준 말을 그대로 옮겼다.

 공명선생께선 십수년간 먹는 것은 적고, 신경 쓰는 것은 많으며, 잠은 적게 자고, 하는 일은 많으셨으니 몸이 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다만 지금에 이르러서야 봇물이 터지듯 모든 피로와 질병이 한꺼번에 밀려들어오니, 견디지 못하고 병석에 누우신 것입니다. 의원이 진찰 후 이르기를 마음을 평화롭게 하고 오래 휴식해야한다 하였으나, 밤낮으로 몸을 쉬지 않으시고, 마음 속엔 시름과 슬픔과 걱정이 가득하시니 자연히 병이 깊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유비가 다시 한탄하려 할 때, 하인이 찾아와 제갈량이 깨어났음을 알렸다. 제갈균을 찾는다는 말과 함께였다. 제갈균은 제갈량이 자신을 찾는 이유를 짐작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형님을 먼저 만나뵙고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그러나 유비는 황급히 따라일어나며 답했다.

 아닙니다. 선생께서 마다하지만 않으신다면 이 비도 함께 선생을 찾아뵙고 싶습니다. 한시라도 빨리 선생께 잘못을 빌고싶은 마음 뿐입니다.

 그 목소리가 하도 간곡하여, 제갈균은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유비와 함께 제갈량의 침실로 들어갔다. 제갈량의 침실은 사치스런 장식 하나 없어 검소하고 소박하였으나, 병자를 위해 태우는 향냄새로 가득하였다. 아직 휘장을 걷기도 전 제갈균은 익숙하게 자리로 가 붓을 들었다.

 아무리 상소를 올려도 궁중에서 간신들이 상소를 가로채어 찢고 불태우니 결코 천자께는 닿을 수 없을 것인데, 형님께선 어찌 매일같이 상소를 올리십니까? 이젠 그들이 형님께 역심이 있다 낭설을 퍼트릴 지경이니, 혹여 천자께서 형님을 의심하시고 노하시면 어찌하시렵니까?

 제갈량은 기침을 하면서도 제갈균을 엄히 꾸짖었다.

 개는 주인이 위험에 빠지면 온 힘을 다하여 짖고, 달려들어 대신 싸우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나는 폐하를 위해 함께 싸우지는 못할망정, 집안에서 편히 두 발을 뻗고 누워있지 않느냐? 넌 지금 나에게 개만도 못한 인간이 되라 권하는 것이다. 또한 천자께선 하늘이 내리신 영웅이며, 명군이실 뿐만 아니라, 봉황이나 용과 같은 분이시니, 그런 간신배들의 간언에 속으실 것 같으냐? 설령 나를 의심하신다 하더라도 이는 내가 천자께 충성을 다하여 믿음을 드리지 못한 것이니, 그 책임을 진다한들 무엇이 억울하겠느냐? 너는 더 이상 어지러운 말을 하지 말고, 내가 부르는 대로 받아적어라. 아아, 내게 붓을 들 힘이 없는 것이 천추의 한이로구나.

 그리고 유비에게 보낼 상소문의 내용을 읊으니, 문장마다 충성이 어려있어 유비의 가슴을 먹먹하게 하였다. 유비는 제갈량의 말이 기침으로 잠시 끊어진 틈을 타 바닥에 엎드리며 말했다.

 이 비가 잘못을 깨닫고 감히 용서를 구하기 위해 선생을 찾았습니다.

 조운이 휘장을 대신 걷어내자, 침상에 누워있는 제갈량의 모습이 보였다. 신선처럼 반듯하고 단정한 외모의 젊은 청년, 세상 누구나 알고 있는 호걸들에게 매서운 군령을 내리던 어린 책사의 모습은 간데 없고, 병자의 기색이 완연한 제갈량의 모습을 본 유비는 더욱 슬프게 울었다.

 폐하. 어찌 이 먼곳까지 오셨습니까.

 제갈량은 조운과 제갈균의 부축을 받아 몸을 일으키려했다. 그러나 유비는 두 사람을 말리며 제갈량의 침상으로 다가가, 비쩍 마른 그의 손을 두 손으로 감싸쥐었다.

 이 비는 어리석어, 끝내 선생의 은혜와 공을 잊고야 말았습니다. 대패하여 선생께서 마련하신 많은 군마가 꺾이고 난 뒤에야 이 비가 그간 쌓아온 승리들이 선생의 재주에 기댄 것임을 깨닫고야 만 것입니다. 그리하여 선생께 나의 잘못을 고하고, 염치없지만 다시 이 비의 곁에서 부족한 점을 깨우쳐주시기를 부탁드리고자 합니다.

 유비의 간곡한 목소리에 제갈량의 눈에도 눈물이 고였다. 군신은 마주 손을 잡고 울었다. 제갈량이 답했다.

 신은 이미 세 번 찾아보는 은혜를 입은 몸인데, 재주가 부족하여 그 은혜조차 갚지 못했습니다. 또 다시 신을 찾아주신 은혜는 또 어찌 갚을 수 있겠습니까. 폐하께서 신을 버리지 않고 써주신다면, 온 힘을 다 하여 살이 찢기고 뼈마디가 부수어질 때까지 폐하를 보필하며 한 왕조의 부흥을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제갈량과 조운은 수레를 타고 천자의 뒤를 따라 황궁으로 돌아가니, 모든 백성들이 향을 사르고 꽃을 뿌리며 그들을 배웅했다. 또한 대업을 이루신 뒤에는 다시 돌아와 그들을 보살펴줄 것을 부탁하니, 제갈량은 웃으며 하늘이 허락한다면 그리 하겠다 답했다. 제갈량이 다시 승상의 자리에 앉자 흐트러졌던 기강은 바로잡히고, 엉크러진 일들은 풀려나가니, 유비는 모든 국사를 제갈량과 논하고, 가르침을 청하기를 매일같이 하였다.

AND

내가 보고싶은대로 리라이팅 1. 이릉대전 上

 

 유비는 오나라를 정벌할 뜻을 밝혔으나 제갈량은 여러가지 이유를 대며 이를 반대하였다. 그러나 유비는 뜻을 굽히지 않았으니, 보다못한 조운이 제갈량을 거들어 유비를 말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유비는 노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조운을 꾸짖었다.

 너는 비록 우리와 도원결의 하지는 않았으나 관우와 장비는 너를 형제처럼 대했다. 그러나 너는 어찌 그들의 의리와 신의를 저버리고자 하느냐?

그리고 좌우에 명하여 조운을 끌어내 매질하게 했다. 제갈량은 조운의 나이가 많아 무거운 매를 견디지 못할 것이라 간하며 용서하여 줄 것을 엎드려 울며 빌었으나, 유비는 더욱 엄중히 좌우를 재촉할 뿐이었다. 조운은 모진 매를 맞으면서도 그 기세가 꺾이지 않았으니, 그를 지켜보는 모든 대소신료들이 감탄을 금치 못하였다.

 유비는 여전히 울며 엎드린 제갈량에게 말했다.

 내 승상의 몸이 약함을 이미 알고 있는 바, 차마 매질을 할 수는 없소. 그간의 정과 공을 생각해 이번만은 특히 벌을 내리지 않겠소. 만일 나를 도와 내 아우의 원수를 갚을 것이라면 나를 따르시오. 그러나 계속해서 내게 천륜을 져버리라 간할 것이라면, 전날 그대가 말했듯, 낙향하여 밭을 갈고 누에를 치며 검소히 사는 것이 좋겠소이다.

 제갈량은 울며 답했다.

 누추한 초려를 세 번이나 찾아주신 무거운 은혜를 아직 갚지 못하였으니, 신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다만 덕 많고 인자하신 폐하의 성정에 기대어, 주제넘는 부탁을 하나 더 드리고자 합니다. 조 장군은 폐하께서 신을 만나기도 전부터 폐하를 따르며 생사고락을 함께하고, 그간 세운 공이 결코 적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찌 이 덕 없고 공 없는 량보다 더 중한 벌을 내리신다는 말씀이십니까? 조 장군은 장판파의 수십만 군사 사이를 누비며 아기씨를 구해온 장수 중의 장수이나, 이젠 나이가 들어 몸이 예전같지 않을 것입니다. 부디 그간의 공을 생각하시어 이만 벌을 거두어주시고, 신과 함께 낙향하여 소를 치며 살도록 허락하여 주십시오.

 그 목소리가 하도 간곡하여 노한 유비의 성정도 조금 누그러졌다. 유비가 매질을 멈추라 명하자, 조운은 온몸에서 피를 흘리면서도 두 발로 유비 앞으로 걸어와 절했다.

 부디 옥체 보전하시옵소서.

 유비는 이미 조운과 제갈량의 뜻이 굳은 것을 깨닫고, 소매를 뿌리쳐 그들을 물렸다. 제갈량과 조운은 유비에게 길게 절하며 만수무강을 기원하고 낙향하였다.

 유비는 60만 군사와 함께 동오로 짓쳐들어갔다. 그러나 누가 예상이나 하였으랴. 유비의 대군은 한 장수의 책략에 꺾이고, 기치는 부러졌으며, 병사들은 앞과 뒤가 모두 막혀 오도가도 못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하늘이 이 비를 버리시는가!

 유비가 하늘을 우러르며 한탄하자, 그의 곁을 지키던 관평이 앞으로 나섰다.

 저희가 거병하기 직전, 승상께서 따로이 저를 불러 주머니 하나를 주셨습니다. 위급하고 방도를 찾을 수 없을 때 풀어보시라 하였으니, 그 안에 아무래도 계책이 들어있는 듯 합니다. 지금 저희는 앞뒤로 적을 맞아 커다란 위험이 닥친 바, 승상의 계책을 사용할 때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유비는 관평의 말을 듣고 직접 주머니를 열어보았다. 그 안에는 관평에게 보내는 편지와 한 가지 계책이 들어있었는데, 지금 유비의 상황을 손바닥 보듯 꿰뚫고 있었으며 계책 또한 절묘하였다. 또한 한 문장이 끝날 때마다 유비를 걱정하며 충성을 다할 것을 당부하니, 유비의 가슴 속엔 깊은 슬픔과 후회가 자리잡았다.

 아아, 나는 정말로 아둔한 물고기요, 공명은 그런 내게 하늘이 내려주신 깊은 물이다, 내가 어찌 그것을 잊었던가! 물고기가 주제를 잊고 물을 벗어나면 말라 죽는 것이 응당 당연한 일일진데, 공명의 덕과 충심은 마르지 않는 하해와 같으니, 천리 밖의 물고기에게도 살아날 방도를 내어주는구나! 무사히 돌아가거든 반드시 공명을 찾아 잘못을 빌고 용서를 구하리라!

 그리고 좌우의 장수들을 불러 공명의 계책을 따르도록 하니, 짓쳐드는 동오의 군사들을 막아내고, 꺾이고 상한 병사들이나마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다.

AND

소재랑 인물 마구 뒤섞기 - 1. 빈 찬합/제갈공명

빈 찬합


유비와 제갈량이 계책과 병법을 논하는 자리에 출입할 수 있는 사람들은 지극히 한정되어 있었다. 유비와 형제의 의를 나눈 관우와 장비, 삼척동자도 그 이름을 안다는 조운, 그리고 제갈량. 다섯 사람은 찻상을 앞에 둔 채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주고받았다. 그들은 지금 조조의 수십만 대군과 대치 중이었으나, 제갈량은 그들을 개미떼보다도 못하게 보는 듯 했다.

제갈량의 태도가 그러하니 유비 역시 불안한 와중에 마음 한편으론 안심하고 있었다. 제갈량의 계책대로만 싸우면 대승을 거두니 관우와 장비 역시 하루 빨리 제갈량이 군사를 내고 자신들을 선봉에 세우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주공. 조조가 사자를 통해 선물을 보내왔습니다.”

제갈량과 더불어 병법과 옛 고사를 논하며 시간 가는 줄을 모르던 유비는, 그 말에 문득 고개를 들었다. 관우와 장비는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눈빛을 교환하고, 조운과 유비는 제갈량을 보았다. 깃털부채를 천천히 흔들며 부치고 있던 제갈량은, 짧은 웃음소리를 내며 부채를 내려놓았다.

싸움이 시작되기 전 사자와 선물을 보내는 것은 흔히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상대를 타일러 싸움을 피하기 위한 계책이요, 두 번째는 상대를 격분시켜 평정을 잃게 하고 성급한 맹공을 끌어내기 위한 계책입니다. 조조는 안하무인이고 영웅들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주공을 얕잡아보기까지 하고 있으니, 이번 사자는 필시 두 번째 계책을 위해 보낸 것입니다.”

선생의 통찰력에 탄복했소. 조조가 이 비에게 어떤 모욕을 주던, 이미 그 의중을 알고 있는데 속아 넘어갈리 있겠소? 여봐라. 사자는 막사를 내어 쉬게 하고, 선물은 안으로 들여라.”

병사가 가져온 것은 고운 비단으로 싼 꾸러미였다. 조운이 직접 꾸러미를 받아들었다. 병사가 막사 밖으로 나간 뒤, 조운은 직접 꾸러미를 풀었다. 자개장식으로 꾸민 찬합이었다. 조운의 안색이 변했다. 조운은 급히 뚜껑을 열어보았다. 찬합의 속은 비어있었다.

? 이게 뭐요. 빈 찬합이라니, 무슨 선물이 이러오?”

조조는 음험하고 남 놀리기를 좋아하는 자이니, 필시 이것에도 숨은 뜻이 있을 것이다.”

관우는 천천히 수염을 쓸어내리며 그렇게 평했다. 유비는 잠시 조운의 손에 들린 찬합을 바라보다가 제갈량에게 시선을 돌렸다.

선생. 어찌 생각하시오? 이것에 무슨 뜻이 숨어있겠소?”

좋군요. 좋아. 아주 절묘한 비유입니다. 조 장군. 그 찬합을 제게도 보여주시겠습니까.”

조운이 제갈량의 앞에 찬합을 내려놓자, 제갈량은 천천히 찬합을 살펴보았다. 오동나무로 만들고 검은 칠을 한 뒤 자개로 장식한 찬합은, 누가 보아도 귀하고 값어치가 많이 나가는 물건이었다.

아주 좋은 찬합입니다.”

군사! 나를 답답하게 하여 죽일 참이오? 조조 그 간사한 쥐 같은 놈이 무슨 뜻으로 이걸 보냈는지 어서 말해보시오!”

제갈량은 부채를 들어 입을 가렸다. 그의 마른 손이 찬합을 가리켰다.

빈 찬합을 보낸 것은, 주공에게 더 이상 먹을 것이 없으리라는 뜻입니다. 큰 싸움으로 이겨 형주를 차지하고 주공의 기반을 모두 빼앗을 테니, 더 이상 주공의 몫은 남아있지 않으리라는 뜻이지요.”

뭣이!”

공명의 풀이에 장비는 노하고야 말았다. 당장이라도 장팔사모를 꼬나들고 군영을 뛰쳐나갈 기세였다.

군사! 당장 출정을 명해주시오. 내 당장 조조의 사신을 목베고, 군사 오천을 이끌고 당장 조조 저놈의 진채를 들이치리다. 누가 기반을 잃고, 누가 먹을 것이 없어지는지 어디 한 번 두고 봅시다!”

익덕. 앉아라. 조금 전에 군사가 일러주지 않았더냐. 조조가 바라는 것은 우리가 격분하는 것이다.”

유비는 담담한 표정으로 그리 말하며 제갈량을 보았다. 제갈량은 별 일 아니라는 듯, 태연한 표정으로 부채를 살랑거리며 흔들고 있을 뿐이었다.

맞습니다, 장군. 또한 사신을 목 베는 것은 법도에도 맞지 않습니다. 조조가 이리 절묘하고 재미난 선물을 보냈으니, 우리도 작은 선물을 보내 조조를 놀리면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군사께선 이미 생각해둔 방도가 있는 듯 하오.”

저는 경전과 시문을 숨 쉬듯 외고 세상 보기를 손금 들여다보듯 하는 선비와 학자들과의 설전에서도 져본 일이 없습니다. 하물며 조조 따위야 문제가 될 리 있겠습니까?”

좋소. 선생 뜻대로 해보시오.”

제갈량은 유비에게 예를 갖춰 인사하고, 병사 한명을 불러 명을 내렸다. 촉에서 가져온 햅쌀로 밥을 짓고, 제를 올릴 때 쓰는 좋은 향을 한 벌 준비하라는 것이었다. 제갈량의 생각을 알아챈 유비는 조용히 미소를 지었을 뿐이었다.


**

 

조조는 제 앞에 놓인 찬합과 길쭉한 꾸러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제가 유비를 놀리기 위해 선물로 보낸 그 찬합이었다. 조조는 직접 꾸러미를 풀고 찬합의 뚜껑을 열었다. 흰 쌀로 지은 밥은 윤기가 흘렀고, 꾸러미 속에는 제를 지을 때 쓰는 향이 들어있었다.

이건 제삿밥이구나.”

조조의 짧은 감상에, 그의 앞에 시립해 서있던 책사와 장군들 사이에 당황스런 술렁임이 퍼져나갔다.

나는 유비에게 빈 찬합을 보냈고, 유비는 그 찬합에 제삿밥을 채워 다시 내게 보냈다. 이게 무슨 뜻일 것 같으냐? 누가 한 번 맞춰보겠느냐?”

조조가 좌우를 둘러보자, 책사 사이에서 순욱이 한 발 앞으로 걸어나왔다. 조조가 순욱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자, 순욱은 짧게 읍하고 입을 열었다.

주공께선 유비에게 빈 찬합을 보내시며 그의 기반을 빼앗고 패망하도록 만들겠다는 뜻을 보이셨습니다. 그러나 유비는 그에 제삿밥을 채워 보냄으로써, 주공을 주살하고 제를 지내주겠다고 말하는 것이니, 그야말로 병과 약을 동시에 주겠다며 주공을 욕보려는 것입니다.”

조조는 순욱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조조 역시 이 선물의 뜻을 해석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뜻을 짐작하지 못하고 있던 다른 신료들은, 특히 무장들은 분노하여 금방이라고 칼을 빼어들 기세였다. 그들은 앞 다투어 자신을 선봉으로 세워 달라 청하기까지 했다. 조조는 소란이 가라앉기를 기다려,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만백성이 유비는 군자라 칭송하는데, 오늘 그 이유를 조금 알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나는 저들의 목숨줄을 끊겠다고 협박을 하였는데, 유비는 오히려 귀한 군량까지 써가며 밥을 짓고 내게 제사를 지내주겠다 하였으니 진정 군자의 기질을 가지고 있기는 했구나! 여봐라, 젓가락 한 벌을 가져와라.”

조조의 명에 병사 하나가 조조의 젓가락을 들고 왔다. 껄껄 웃으며 찬합 속의 밥을 먹는 조조를 보며, 그의 신하들은 당황하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조조를 말리려하자, 조조는 오히려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어 신하들의 말을 막았다.

귀한 군량을 버리면 하늘이 노하신다. 형주의 쌀은 맛이 좋구나. 훗날 승전보를 울리고 다시 돌아갈 때, 모종을 가져가 북쪽에서도 재배를 해야겠다. 그대들도 맛이라도 보겠는가?”

조조는 그를 말리는 신하들을 무시하고 이내 찬합을 모두 비워버렸다.

조조는 이미 생각을 다 정리한 뒤였다. 사자는 유비가 보내는 선물이라며 이 찬합을 가져왔지만, 조조는 이것이 유비의 머릿속에서 나온 생각이라 판단하지 않았다. 유비는 자신이 보낸 찬합의 의미를 파악까지는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이런 재치나 기지를 발휘할 수 있는 인물은 되지 못한다. 이는 필시 유비의 책사 중 한 사람이 낸 계책일 것이다. 그것도, 아주 영리하고, 남 놀리기를 좋아하는 인물이.

제갈량. 네놈이겠구나. 조조는 그리 생각하며 속으로 웃었다. 아까운 선비가 유비에게로 가버렸다. 형주의 햅쌀로 지은 밥은 달았으나, 그러한 아쉬움에 입맛은 썼다.

AND

용은 하늘의 아들이 되고

 

제갈량은 아픈 머리를 짚으며 침상에 풀썩 주저앉았다. 오늘만 같은 말을 열 번은 더 들었을 터다. 그 말에 화를 내고, 타이르고, 설전을 벌여 설득해 상대를 돌려보낸 횟수도 그만큼은 된다는 소리다. 본디 몸이 약한 제갈량은 체력이 완전히 바닥났음을 느꼈다. 이런 쓸데없는 논쟁과 고민 말고도 할 일은 산더미처럼 쌓여있거늘, 죽간을 향해 손을 뻗을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승상. 조장군께서 오셨습니다.”

그를 시중드는 내관 하나가 그리 알려왔다. 제갈량은 규율을 지키는 것에 있어선 엄격하지만, 한 나라의 승상으로서 누리는 권력을 체감하고자 아랫사람을 핍박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내관에게도 예의를 지키고, 큰 실수만 하지 않으면 대개는 상냥한 제갈량의 날선 모습에 내관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들라하시게. 다른 이들은 모두 이십 보 밖으로 물리도록 하고.”

, 승상.”

제갈량은 그리 명했다. 옷깃은 여몄으나, 침상에서 일어날 생각은 하지 않았다. 제갈량에게 자룡은 그런 사람이었다. 자룡 역시 이해해줄 것이다. 그는 제갈량의 사람됨과 신념과 각오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최근 제갈량이 처한 상황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통찰력과, 타인을 생각하는 배려와 다정함 역시 갖추고 있었으므로.

승상.”

어서 오시오, 장군. 무슨 일입니까?”

죄송합니다. 고단하실 줄 알면서도 무례를 범했습니다.”

아닙니다. 자룡이라면 먹던 것을 세 번 뱉고서라도 일어나 맞이해야지요.”

자룡은 과분한 말이라며 겸손하게 답했다. 제갈량은 그런 자룡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장군이 이런 말을 듣고자 절 찾아오진 않으셨겠지요. 정무를 보는 때를 피해 저를 따로 찾은 것은 제게 하고자 하는 말이 있기 때문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남에게는 할 수 없는 말이 아니라면, 앞으론 이리 사사로이 찾아오시면 아니 됩니다, 장군. 장군은 이제 이 나라의 가장 큰 장수입니다. 저와 이리 사적인 만남을 가지시면, 사람들은 저 뿐만 아니라 장군마저 의심할 것입니다.”

제갈량은 조운을 타이르듯 부드럽게 말했다. 그들이 젊었을 적, 아직 기반을 잡지 못한 채 거센 난세의 기류에 휩쓸려 좌충우돌하던 시절부터, 조운이 가르침을 청할 때마다 으레 들려주던 다정한 목소리였다. 문득 그 시절을 떠올린 제갈량의 얼굴엔 옅은 미소가 떠올랐으나, 조운의 표정은 여전히 굳어있었다. 긴장을 하다못해, 결연하기까지 한 얼굴이었다. 수십만 대군을 눈앞에 두고도 당당한 조운에게서,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운 표정이었다.

저는 상관없습니다. 승상에 대한 견해는 진정 오해일지도 모르나, 소장에 대한 이야기라면 오해가 아니라 통찰이 됩니다.”

무슨 뜻입니까, 자룡.”

제갈량은 조운의 말을 곧바로 알아들었다. 제갈량은 평생 서책과 시문을 끼고 사는 선비들과의 설전에서도 한 번도 진 적이 없었다. 우직하고 정직한 무장인 조운이 말을 조금 돌려한들, 그 뜻을 파악하지 못할 리도 없었다. 그러나 제갈량은 단번에 얼굴을 굳히고, 굳이 그렇게 다시 한 번 되물었다. 조운이 자신의 표정과 반응을 보고, 머쓱한 얼굴로 소장이 실언을 했습니다, 소장도 나이를 먹으니 그냥 문득 옛 생각이 나, 승상과 술잔을 기울이며 옛 이야기를 나누고싶어 찾아온 것입니다, 그리 답해주기를 바랬다.

승상. 구석을 받고 제위에 오르십시오.”

자룡!”

제갈량은 앉아있던 침상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무릎 위에 올려두었던 부채가 바닥으로 떨어졌으나, 제갈량은 그것을 주울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조운은 제갈량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어앉고 고개를 죽였다.

어찌, 어찌 자룡마저 내게 그런 말을 하시오!”

승상.”

내가 선제께 받은 은혜가 얼마고, 그분께 바친 마음이 어떠하며, 그대들과 더불어 선제께 충성한 시간이 얼마인지는, 자룡이 가장 잘 알지 않소? 조정의 다른 이들은 뒤늦게 우리와 뜻을 함께하거나, 속이 없고 이익을 쫓는 소인배들이니 참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자룡이 어찌 그러오? 그대가 어찌..”

승상. 그러기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승상을 잘 알고, 선제의 뜻과 꿈을 알고, 저희가 함께한 시간을 모두 기억하기에, 이리 노하실 것을 알고도 찾아와 드리는 말씀입니다.”

제갈량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있었다. 급히 일어난 탓에 눈앞이 까맣게 점멸하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비틀거리는 몸을 억지로 다잡았다. 목덜미 뒤로 열이 오르고, 가슴에 무거운 돌덩이가 얹힌 듯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승상. 승상께선 스물일곱, 어린 나이에 세상으로 나오셨습니다. 승상을 만나기 전, 선제께선 반평생을 강적들에게 핍박받으시면서도, 역적을 처단하고, 한 황실을 부흥시켜, 나라를 안정시키고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하시겠다는 높은 꿈 하나를 위해 몸을 아끼지 않고 동분서주하셨습니다. 그리고 승상을 얻은 뒤로는 이무기가 여의주를 얻고, 용이 삼일우를 만나듯, 승상의 뛰어난 책략과 운장, 익덕, 한승, 맹기의 용맹이 더불어 어우러지니, 역적 조씨를 처단하고 한 황실을 부흥시킬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제갈량은 고개를 돌려버렸다. 더는 듣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조운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제갈량은, 이번만큼은 저돌적이고 우직한 그의 성정이 원망스러울 지경이었다.

조조가 얼마나 강대했습니까? 동오의 손권은 또한 얼마나 단단한 기반을 가지고 있었습니까? 선제께선 그토록 강한 적들의 사이에서 때로는 수모를 감내하시고, 때로는 목숨을 핍박받으시고, 때로는 당당히 맞서시며 이윽고 이 땅을 일궈내셨습니다. 하지만 승상. 태자께서는.. 직언을 용서하십시오. 지금의 태자께서는 아직 배움이 얕고 재주가 미력하시어, 선제의 대업을 능히 이어가실 수 없으십니다.”

그만 하시오, 자룡! 어찌 그런 말을 입에 담으십니까? 만일 그대의 말이 사실이라 하여도, 신하된 자로서 마음을 다해 주군을 모시며 맡은바 직무를 다하고, 성실히 보좌하여 대업을 이어나가면 되는 일입니다. 그것이 신하의 도리요, 군자의 책임입니다. 그대는 어찌 나에게 또 다른 조비가 되어 황위를 찬탈하라 종용하십니까?”

시간과 사람과 물자가 충분하다면 저도 그리 하였을 것입니다. 승상의 명을 받아 전장을 누비고, 가장 선봉에 서서 승상과 폐하의 창과 방패가 되어 적들을 무찌를 것입니다. 하지만 승상.”

조운은 말을 한 번 끊었으나, 제갈량은 그 뒤로 이어질 말을 짐작할 수 있었다. 제갈량은 나라의 크고 작은 정무를 모두 총괄하고 있었고, 나라 안팎의 사정을 그보다 더 정확하고 포괄적으로 꿰고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조운이 하려는 말은 제갈량이 가장 걱정하고 있는, 동시에 가장 외면하고 싶은 현실이었다.

우리에겐 이제 아무것도 없습니다.”

조운의 말에 제갈량은 짧은 탄식을 내뱉으며, 다시 침상 위로 주저앉고 말았다. 쓰러졌다는 말이 더 정확할 듯 했다.

제갈량이 피땀 흘려 일군 군량과 병사들은 모두 이릉에서 한줌의 재가 되어버렸다. 이제 그들의 손에 남은 것은, 위나 오의 병력에 절반도 되지 않을, 상하고 사기가 꺾인 병사 한 줌뿐이었다.

무너진 성벽은 몇 개월이면 쌓을 수 있고, 부족한 곡식은 다음 해에 추수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은 어찌한단 말인가. 사내아이를 낳아, 창을 들고 말을 몰 수 있을 때까지 길러내고 가르치는 것은 수십 년이 걸리는 일이다. 자식과 오라비와 아버지를 빼앗긴 백성들의 민심을 다시 거두는 것은 또 얼마가 걸린단 말인가.

제갈량은 다시 조운을 보았다. 훤칠하고 잘생긴 소년 장수였던 상산의 조자룡은, 이제 반백이 넘어 노장이라 불러도 좋을 나이가 되었다. 먹는 시간, 자는 시간을 줄여가며 일하는 자신의 몸이 하루가 다르게 나빠지는 것도 느끼고 있었다.

제갈량은 알고 있었다. 조운과 자신은 이 나라를 든든히 받치고 있는 기둥이었다. 그리고 이 나라는, 단 두 개의 기둥으로 간신히 유지되고 있었다. 오래된 고목처럼, 앞으로도 천 년은 더 갈듯하던 관우와 장비와 유비가 모두 세상을 떠난 지금, 두 사람마저 사라진다면 앞으로의 일은 장담할 수 없다.

그래, 시간이 문제다. 사람과 물자는, 어떻게 해서든 만들어 댈 수 있다. 그러나 시간만큼은, 저 옛날의 소하가 살아 돌아온다 하더라도, 그것만큼은 어찌할 수가 없는 문제다.

내가 어찌해야한단 말입니까..”

제갈량은 탄식했다. 가슴속에 불덩이가 들어찬 듯 했다. 선제를 부르며 목 놓아 울고 싶었다. 하루하루 하늘이 원망스러운 날 뿐이었다.

조운은 바닥에 떨어진 부채를 주워들었다.

승상. 제위에 오르십시오. 세상 사람들이 승상을 역적이라 욕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승상의 공명과 명성을 위해 선제의 뜻을 꺾지 마십시오. 지금도 어디에선가 핍박받으며 굶어 죽어가는, 가여운 백성들을 외면하지 마십시오. 나라를 위한 충은 주군을 위한 충보다 크고 밝은 것입니다. 세상을 안정시키고 400년 한 왕조를 부흥시키는 일에, 뒤따라올 오명이 두려워 망설이는 것은 졸장부나 하는 일이고, 사사로운 이익을 쫓는 소인배들의 생각입니다.”

그것은 억지였고, 말장난이었다. 제갈량이 조운의 언변을 꺾는 것은, 얇은 회초리를 분질러 꺾는 것보다도 쉬운 일이었다. 그러나 제갈량은 반박하지 않았다. 그저 소매로 얼굴을 가리고, 깊은 한숨만을 내쉬고 있을 뿐이었다.

승상. 부디 대업을 이루십시오. 그리고 대업을 이루는 그날, 황위를 다시 선양하고 융중으로 돌아가 농사를 짓고 삽시다. 저는 승상의 곁에서 직접 흙을 만지고 나무를 기르며, 평생 승상을 스승으로 모시고, 죽는 날까지 가르침을 청하겠습니다.”

조운은 두 손으로 부채를 받쳐 들었다. 제갈량은 고개를 죽인 조운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망설임으로 떨리는 손이, 조운이 내민 부채를 머뭇거리며 받아들였다.


**

일찍이 한 왕조가 세워질 때, 한고조 유방께선 유씨가 아닌 자는 황제가 될 수 없다 하셨다. 그러나 간악한 조씨가 천자를 핍박하고, 이내 하늘의 뜻을 거슬러 참혹한 짓을 저질러 버렸으니, 천하가 공노하고 역적의 생살을 씹고자 하였으나, 그 힘이 막강하여 그 누구도 당당히 분노치 못하였다.

이에 선제께선 400년 한 왕조의 계승을 천명하시고, 억울하게 돌아가신 천자를 위해 역적을 토벌코자 맹세하셨다. 한 왕조의 신하라면 누구나 그 매서운 뜻과 기세를 받들고, 온 힘을 다해 북으로 진격하여 기울어가는 한 황실을 바로 세워야 할 것이나, 동오의 손권과 그를 따르는 소인배 무리는 개인의 사사로운 이익을 쫓아, 오히려 역적과 손을 잡고 관운장을 해하였다.

관운장은 선제와 형제의 정을 나누고, 한날한시에 태어나진 못했으나 한날한시에 죽기로 도원결의하였다. 선제께선 형제를 잃은 슬픔에 깊이 한탄하셨고, 관운장의 넋을 달래고, 하늘이 내려준 인륜을 끊어버린 손권의 죄를 묻기 위해 직접 군사를 일으키셨다.

그러나 후안무치한 동오의 개들은 뉘우침도 없이, 황실의 종친인 선제 역시 핍박하여 돌아가시게 만들었으니, 이들이 저 역적 조씨와 다를 것이 무엇인가? 선제께선 이 량을 직접 찾으시고, 선제의 유지를 직접 받들어, 저 역적들을 죽여 세상을 편안케 하라 명하셨다.

이 량은 유씨가 아니고, 인덕이 부족하여 대업을 이어갈 수 없으니 통촉하여 달라 거듭 빌었으나, 선제께선 마찬가지로 400년 한 왕조와 가여운 민초들을 거듭 부탁하시며 승하하셨다.

이에 이 량은 미천하고 부족한 재주로나마 선제의 유언과 유지를 받들고, 위로는 역적을 처단하며 동으로는 선제와 관운장, 장익덕의 원수를 갚아 한을 풀 때까지 식소사번하여, 몸이 부서져도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을 하늘에 고한다. 나의 뜻은 이 몸이 죽은 뒤에야 비로소 멈추리라.

다만 이 량은 결코 황위와 권력에 욕심이 있지 아니함을 하늘과 대소신료와 만백성 앞에 고하는 바이다. 선제의 유지를 받들고 대업을 이루며, 나라가 안정되어 백성들이 부르는 태평가가 어전 앞까지 들리는 그 날, 이 량은 분수에 넘치는 자리를 다시 유씨에게 선양하고, 선제께서 세 번이나 찾아주셨던 그 융중으로 돌아가, 직접 누에를 치고 농사를 지을 것이다.

이는 나의 진심이고 하늘이 그것을 알고 있으니, 만약 내가 저 역적들과 마찬가지고 역심을 품는 날이 오거든 하늘이 직접 천벌을 내려, 이 한 목숨을 거두어 가리라.

AND

ARTICLE CATEGORY

분류 전체보기 (119)
미애만 (10)
일애만 (2)
스타트렉 (15)
룬의아이들 (0)
드라마 (25)
웹툰 (37)
게임 (1)
(14)
기타 (11)
1차창작 (1)
자캐커뮤 (1)
로오히 (1)

RECENT ARTICLE

RECENT COMMENT

CALENDAR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ARCHI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