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재랑 인물 마구 뒤섞기 - 1. 빈 찬합/제갈공명
빈 찬합
유비와 제갈량이 계책과 병법을 논하는 자리에 출입할 수 있는 사람들은 지극히 한정되어 있었다. 유비와 형제의 의를 나눈 관우와 장비, 삼척동자도 그 이름을 안다는 조운, 그리고 제갈량. 다섯 사람은 찻상을 앞에 둔 채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주고받았다. 그들은 지금 조조의 수십만 대군과 대치 중이었으나, 제갈량은 그들을 개미떼보다도 못하게 보는 듯 했다.
제갈량의 태도가 그러하니 유비 역시 불안한 와중에 마음 한편으론 안심하고 있었다. 제갈량의 계책대로만 싸우면 대승을 거두니 관우와 장비 역시 하루 빨리 제갈량이 군사를 내고 자신들을 선봉에 세우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주공. 조조가 사자를 통해 선물을 보내왔습니다.”
제갈량과 더불어 병법과 옛 고사를 논하며 시간 가는 줄을 모르던 유비는, 그 말에 문득 고개를 들었다. 관우와 장비는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눈빛을 교환하고, 조운과 유비는 제갈량을 보았다. 깃털부채를 천천히 흔들며 부치고 있던 제갈량은, 짧은 웃음소리를 내며 부채를 내려놓았다.
“싸움이 시작되기 전 사자와 선물을 보내는 것은 흔히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상대를 타일러 싸움을 피하기 위한 계책이요, 두 번째는 상대를 격분시켜 평정을 잃게 하고 성급한 맹공을 끌어내기 위한 계책입니다. 조조는 안하무인이고 영웅들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주공을 얕잡아보기까지 하고 있으니, 이번 사자는 필시 두 번째 계책을 위해 보낸 것입니다.”
“선생의 통찰력에 탄복했소. 조조가 이 비에게 어떤 모욕을 주던, 이미 그 의중을 알고 있는데 속아 넘어갈리 있겠소? 여봐라. 사자는 막사를 내어 쉬게 하고, 선물은 안으로 들여라.”
병사가 가져온 것은 고운 비단으로 싼 꾸러미였다. 조운이 직접 꾸러미를 받아들었다. 병사가 막사 밖으로 나간 뒤, 조운은 직접 꾸러미를 풀었다. 자개장식으로 꾸민 찬합이었다. 조운의 안색이 변했다. 조운은 급히 뚜껑을 열어보았다. 찬합의 속은 비어있었다.
“엥? 이게 뭐요. 빈 찬합이라니, 무슨 선물이 이러오?”
“조조는 음험하고 남 놀리기를 좋아하는 자이니, 필시 이것에도 숨은 뜻이 있을 것이다.”
관우는 천천히 수염을 쓸어내리며 그렇게 평했다. 유비는 잠시 조운의 손에 들린 찬합을 바라보다가 제갈량에게 시선을 돌렸다.
“선생. 어찌 생각하시오? 이것에 무슨 뜻이 숨어있겠소?”
“좋군요. 좋아. 아주 절묘한 비유입니다. 조 장군. 그 찬합을 제게도 보여주시겠습니까.”
조운이 제갈량의 앞에 찬합을 내려놓자, 제갈량은 천천히 찬합을 살펴보았다. 오동나무로 만들고 검은 칠을 한 뒤 자개로 장식한 찬합은, 누가 보아도 귀하고 값어치가 많이 나가는 물건이었다.
“아주 좋은 찬합입니다.”
“군사! 나를 답답하게 하여 죽일 참이오? 조조 그 간사한 쥐 같은 놈이 무슨 뜻으로 이걸 보냈는지 어서 말해보시오!”
제갈량은 부채를 들어 입을 가렸다. 그의 마른 손이 찬합을 가리켰다.
“빈 찬합을 보낸 것은, 주공에게 더 이상 먹을 것이 없으리라는 뜻입니다. 큰 싸움으로 이겨 형주를 차지하고 주공의 기반을 모두 빼앗을 테니, 더 이상 주공의 몫은 남아있지 않으리라는 뜻이지요.”
“뭣이!”
공명의 풀이에 장비는 노하고야 말았다. 당장이라도 장팔사모를 꼬나들고 군영을 뛰쳐나갈 기세였다.
“군사! 당장 출정을 명해주시오. 내 당장 조조의 사신을 목베고, 군사 오천을 이끌고 당장 조조 저놈의 진채를 들이치리다. 누가 기반을 잃고, 누가 먹을 것이 없어지는지 어디 한 번 두고 봅시다!”
“익덕. 앉아라. 조금 전에 군사가 일러주지 않았더냐. 조조가 바라는 것은 우리가 격분하는 것이다.”
유비는 담담한 표정으로 그리 말하며 제갈량을 보았다. 제갈량은 별 일 아니라는 듯, 태연한 표정으로 부채를 살랑거리며 흔들고 있을 뿐이었다.
“맞습니다, 장군. 또한 사신을 목 베는 것은 법도에도 맞지 않습니다. 조조가 이리 절묘하고 재미난 선물을 보냈으니, 우리도 작은 선물을 보내 조조를 놀리면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군사께선 이미 생각해둔 방도가 있는 듯 하오.”
“저는 경전과 시문을 숨 쉬듯 외고 세상 보기를 손금 들여다보듯 하는 선비와 학자들과의 설전에서도 져본 일이 없습니다. 하물며 조조 따위야 문제가 될 리 있겠습니까?”
“좋소. 선생 뜻대로 해보시오.”
제갈량은 유비에게 예를 갖춰 인사하고, 병사 한명을 불러 명을 내렸다. 촉에서 가져온 햅쌀로 밥을 짓고, 제를 올릴 때 쓰는 좋은 향을 한 벌 준비하라는 것이었다. 제갈량의 생각을 알아챈 유비는 조용히 미소를 지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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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조는 제 앞에 놓인 찬합과 길쭉한 꾸러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제가 유비를 놀리기 위해 선물로 보낸 그 찬합이었다. 조조는 직접 꾸러미를 풀고 찬합의 뚜껑을 열었다. 흰 쌀로 지은 밥은 윤기가 흘렀고, 꾸러미 속에는 제를 지을 때 쓰는 향이 들어있었다.
“이건 제삿밥이구나.”
조조의 짧은 감상에, 그의 앞에 시립해 서있던 책사와 장군들 사이에 당황스런 술렁임이 퍼져나갔다.
“나는 유비에게 빈 찬합을 보냈고, 유비는 그 찬합에 제삿밥을 채워 다시 내게 보냈다. 이게 무슨 뜻일 것 같으냐? 누가 한 번 맞춰보겠느냐?”
조조가 좌우를 둘러보자, 책사 사이에서 순욱이 한 발 앞으로 걸어나왔다. 조조가 순욱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자, 순욱은 짧게 읍하고 입을 열었다.
“주공께선 유비에게 빈 찬합을 보내시며 그의 기반을 빼앗고 패망하도록 만들겠다는 뜻을 보이셨습니다. 그러나 유비는 그에 제삿밥을 채워 보냄으로써, 주공을 주살하고 제를 지내주겠다고 말하는 것이니, 그야말로 병과 약을 동시에 주겠다며 주공을 욕보려는 것입니다.”
조조는 순욱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조조 역시 이 선물의 뜻을 해석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뜻을 짐작하지 못하고 있던 다른 신료들은, 특히 무장들은 분노하여 금방이라고 칼을 빼어들 기세였다. 그들은 앞 다투어 자신을 선봉으로 세워 달라 청하기까지 했다. 조조는 소란이 가라앉기를 기다려,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만백성이 유비는 군자라 칭송하는데, 오늘 그 이유를 조금 알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나는 저들의 목숨줄을 끊겠다고 협박을 하였는데, 유비는 오히려 귀한 군량까지 써가며 밥을 짓고 내게 제사를 지내주겠다 하였으니 진정 군자의 기질을 가지고 있기는 했구나! 여봐라, 젓가락 한 벌을 가져와라.”
조조의 명에 병사 하나가 조조의 젓가락을 들고 왔다. 껄껄 웃으며 찬합 속의 밥을 먹는 조조를 보며, 그의 신하들은 당황하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조조를 말리려하자, 조조는 오히려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어 신하들의 말을 막았다.
“귀한 군량을 버리면 하늘이 노하신다. 형주의 쌀은 맛이 좋구나. 훗날 승전보를 울리고 다시 돌아갈 때, 모종을 가져가 북쪽에서도 재배를 해야겠다. 그대들도 맛이라도 보겠는가?”
조조는 그를 말리는 신하들을 무시하고 이내 찬합을 모두 비워버렸다.
조조는 이미 생각을 다 정리한 뒤였다. 사자는 유비가 보내는 선물이라며 이 찬합을 가져왔지만, 조조는 이것이 유비의 머릿속에서 나온 생각이라 판단하지 않았다. 유비는 자신이 보낸 찬합의 의미를 파악까지는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이런 재치나 기지를 발휘할 수 있는 인물은 되지 못한다. 이는 필시 유비의 책사 중 한 사람이 낸 계책일 것이다. 그것도, 아주 영리하고, 남 놀리기를 좋아하는 인물이.
제갈량. 네놈이겠구나. 조조는 그리 생각하며 속으로 웃었다. 아까운 선비가 유비에게로 가버렸다. 형주의 햅쌀로 지은 밥은 달았으나, 그러한 아쉬움에 입맛은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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