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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서제갈] 이따금씩 우연은 호흡곤란을 동반한다.


0.

이따금씩 우연은 호흡곤란을 동반한다.

 

1.

온 나라가 전란으로 들썩이는 난세였다. 형주는 어느 지방보다 평화로운 곳이었지만, 가장 낮은 곳에서 살아가는 백성들은 여전히 고단했다. 한 떼의 성난 군사들이 짓쳐들면, 그 무자비한 학살을 피해 도망치는 것만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저항이었다.

서서는 그들 사이에 섞여, 고개를 숙인 채 걸어가고 있었다. 머리를 풀어헤치고 얼굴에 흙을 발랐으나, 이 피난민들 사이에서 그 정도의 초췌함은 특별히 눈에 띌 것도 없었다. 관리들이 아직 눈에 불을 켜고 자신을 찾고 있을 테지만, 정확한 용모파기가 그려진 것도 아닐뿐더러 이 많은 사람들 틈에 섞여있으니 천리안을 가졌다 하더라도 쉽게 자신을 찾아내지는 못할 터였다.

문득 서서는 제 소매를 꽉 붙드는 작은 힘을 느끼고 뒤를 돌아보았다.

마르고 혈색이 좋지 않은 어린 아이가 자신의 소매를 붙든 채 연약한 숨을 내쉬고 있었다. 얼굴이 희다 못해 창백하고, 눈에 초점이 맞지 않았다. 서서는 아이가 현기증을 느끼는 것을 알아채고 급히 손을 뻗어 아이의 몸을 끌어당겼다. 바닥으로 넘어지려던 아이의 몸이, 서서의 품 안으로 무너지듯 쓰러졌다.

서서는 당황하여 급히 주변을 살폈다. 그들과 가까이에 있던 사람들은 흘끗 시선을 던지긴 했으나,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는 않았다. 서서는 황급히 아이를 안아들고 목청껏 소리쳤다.

이보시오! 여기 어린 아이가 있소! 아이를 잃어버린 사람 없소이까! 이 아이의 보호자가 누구시오!”

그러나 서서의 다급한 외침에도 나서는 이는 없었다. 서서는 어설프게 아이를 안아 든 채,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이 인파 사이에서 아이의 부모를 찾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는 아이를 버리고 갈 수는 없었다.

얘야. 정신 좀 차려보아라. 네 이름이 뭐니? 아니, 네 부모님의 이름은? 어디에서 왔니?”

그러나 아이는 숨을 헐떡이며 가슴을 쥐어뜯을 뿐, 대답을 하지 못했다. 잠시 고민하던 서서는 아이를 등에 업었다. 제 소매를 꼭 움켜쥐고 놓지 않는 손이, 저를 살려 달라 애원하는 듯 느껴졌기 때문이다.

객잔은 어딜 가나 만석이었지만, 서서는 요령 좋게 허름한 쪽방 하나를 얻을 수 있었다. 누가 보아도 창고로 쓰다가 급하게 물건만 드러낸 듯 보이는 방이었고, 가격은 터무니없이 비쌌다. 그러나 서서는 불평하지 않았다. 제 한 몸뿐이라면 어딘가에서 노숙을 할 수도 있었겠으나, 아이에겐 안 될 말이었다.

아이는 병약하고 지친 기색이 완연한 중에도, 사랑받으며 귀하게 자란 티가 났다. 추레한 몰골의 서서가 그런 아이를, 심지어 의식을 잃은 아이를 등에 업고 객잔에 들어섰을 때, 주인은 당연히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서서는 나이차가 많이 나는 동생이라 둘러대고, 방값에 약간의 돈을 더 얹어 주인이 그 말을 믿도록 만들었다.

 

2.

선잠에 들었던 서서가 이른 새벽에 문득 눈을 떴을 때, 어둠 속에서 별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두 개의 눈동자에 놀란 것은 그간 협객으로 살며, 그리고 혼자 도망치며 살아온 시간이 너무 긴 탓이었다. 품속의 단도보다 낮에 구해준 아이의 존재에 먼저 생각이 미친 것은, 두 사람 모두에게 천운이라고 할 수 있었다.

“..언제부터 깨어있었니?”

조금 전에 깼습니다. 선생은 누구십니까?”

되묻는 아이의 목소리는 똘똘하기 그지없었다. 제법 영리한 아이겠구나 싶어, 서서는 피식 웃으며 답했다.

나는 그저 떠돌며 살아가는 야인이고, 전란을 피해 정처 없이 도망치는 중이다. 다시 만날 기약도 없는 내 이름은 알아 무엇 하겠니.”

하지만 성함을 모르면 어찌 은혜를 갚겠습니까?”

아이의 당돌한 말에 서서는 작은 소리로 웃었다.

은혜는 갚지 않아도 좋으니 네 몸이나 잘 살펴라. 그래, 네 부모는 누구고, 어쩌다가 홀로 떨어져버린 거냐?”

부모님은 돌아가셨고, 숙부님과 어린 아우와 함께 피난을 가던 중이었습니다. 어지러움이 심해져 잠시 숙부님을 놓쳤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숙부님을 찾을 수 없어 급하게 나아가다가 문득 눈앞이 아득해져 쓰러져버린 것입니다.”

숙부님의 성함은 어찌 되시냐? 어쨌든 다시 찾아야 할 것 아니냐.”

어둠 속에서 아이가 움직이는 모양새가 희미하게 보였다. 흔히 아이들이 뻐길 때 그러하듯, 작은 어깨를 쭉 펴는 것 같았다.

괜찮습니다. 이 량은 비록 아직 어리긴 해도, 혼자서도 갈 길을 찾아낼 재주 정도는 있습니다. 날이 밝는 대로 떠날 테니 선생께도 더 이상 폐를 끼치진 않을 것입니다. 허나 선생의 이름을 모르니 앞으로도 영영 구해주신 은혜를 갚을 길이 없을 것 같아 그것만이 걱정입니다.”

그 당찬 목소리가 귀여워 서서는 피식 웃어버렸다. 서서는 아이의 어깨를 잡아 침상에 눕히며 대답했다.

그래, 알려주마. 내 이름은 서서요, 자는 원직이다. 다만 내 이름을 밝히는 것을 꺼리는 것에는 이유가 다 있으니, 다른 사람들에겐 나를 만났다는 말을 하지 말거라. 네가 특히 영특한 것 같아 너에게만 특별히 알려주는 것이다. 알겠니?”

.”

아이는 그러겠다고 거듭 약조했고, 서서는 그런 아이를 달래 다시 재웠다. 아직 완전히 동이 트려면 몇 시진은 더 기다려야했다.

 

3.

서서는 등 뒤로 흐르는 식은땀을 느끼며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관리 한 사람과 병사 두 사람이, 매서운 눈초리로 서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용모파기를 가지고 있었으나, 서서의 얼굴이 지저분하고 머리를 풀어헤쳐 잘 알아볼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결국 서서가 묵었던 객잔의 주인이, 서서가 떠난 두 관아에 신고를 한 모양이었다. 그들은 함께 있던 어린아이에 대하여 자꾸만 물었을 뿐 서서가 누구인지는 캐묻지 않았으나, 조사를 받다보면 과거의 죄가 들통 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서서가 참담한 기분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그는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한 소년을 발견했다. 어제 아침 객잔을 나와 헤어진, 이름 모를 그 소년이었다. 그의 곁에 어린 아이를 업은 사내가 함께 서있는 것을 보니, 아이의 말대로 혼자서 숙부를 잘 찾아낸 모양이었다.

그래, 그래도 한 사람은 구했으니 됐다. 이것은 그간 내가 쌓아온 업보의 결과다. 그래도 죽기 전 저 어린 것 하나 정도는 구했으니..

서서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문득 숙부의 손을 놓은 아이가 서서에게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네 이놈, 선복아! 어딜 갔었던 거야!”

아이의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서서는 물론이고, 관리와 병사들 모두 당황하여 뒤를 돌아보았다. 아이는 관리를 향해 두 손을 모아 공손하게 인사했다.

이놈은 저희 집 하인 놈인데, 선생께선 무슨 일로 그러십니까? 저에게 말씀하시지요.”

관리는 여전히 의심하는 눈초리로 서서를 흘끗 보았으나, 조금 전처럼 그를 다그쳐 묻지는 않았다.

공자는 뉘시오?”

관리의 태도는 적대적이진 않았으나, 어린아이라면 충분히 겁을 먹을 만큼 위압적인 목소리였다. 그러나 아이는 전혀 주눅 들지 않고 태연하게 대답했다.

저는 낭야의 제갈씨로, 이름은 량이며, 사예교위를 지내신 제갈풍의 후손이요, 연주 태산군 군승을 지내신 제갈규의 차남이며, 예장태수를 지내신 제갈현은 저의 숙부 되십니다. 이놈은 선복이라는 놈으로 제 아비 때부터 저희 집 일을 도와온 가노인데, 제 몸이 유독 약하여 언제나 제 곁에서 시중을 들게 해왔습니다. 그런데 함께 피난길에 올랐으나 중간에 이놈이 길을 잃은 듯하여, 이틀 째 찾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아이는 태연한 얼굴로 잘도 거짓말을 지어내었다. 서서는 아이가 저를 도우려 한다는 것을 느끼고, 아이의 장단에 맞춰 고개를 조아렸다. 관리와 병사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였으나, 이미 아이의 성과 집안 내력을 모두 들은 뒤라 더 이상 되묻기도 난감한 듯 했다. 그들은 작은 목소리로 몇 마디 말을 주고받은 뒤, 실례했다며 짧은 사과의 말을 남기고 돌아갔다.

관리와 병사들이 돌아간 뒤, 아이는 서서를 올려다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제가 은혜를 갚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 고맙구나.”

제 조카가 하는 양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사내가 다가왔다. 사내는 서서보다도 훨씬 나이가 많았지만, 서서에게 예의를 갖추며 인사했다. 서서는 황망히 마주 인사하며 흘끔 눈치를 보았다.

량을 구해주셨다는 원직 선생이십니까?”

“... 그렇습니다.”

남에게 이름을 밝히지 말라 거듭 당부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다만 량은 저를 아비처럼 여기고 따르니, 제 말에 차마 거역하지 못하고 선생의 성함을 제게 알린 것입니다. 부디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제갈량이 서서의 시선을 피해 딴청을 부리는 것을 본 제갈현이 급히 덧붙였다. 서서는 그저 아니라며 손을 내저을 뿐이었다.

헌데, 어째서 이름을 숨기고 다니시는 것입니까? 조금 전 관리와 병사들이 선생을 붙잡은 것도 그 이유와 연관이 있는 것인지요?”

서서는 대답하지 못했다. 주변에 듣는 귀도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살인죄를 알게 되면 지금은 호의적인 상대의 태도가 어떻게 변할지 가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답을 망설이는 서서를 본 제갈현은 어조를 바꾸어 다시 말했다.

선생을 곤란하게 하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허나 방금과 같은 수모를 또 겪지 않으시리라는 보장이 없으니, 당분간은 저희와 동행하시는 것이 어떨까 하는 말씀을 드리고자 했던 것입니다.”

서서는 제갈현의 말을 금방 이해할 수 없었다. 그의 대답이 늦어지는 것이 거절의 뜻이라고 생각한 제갈현은 급히 말을 덧붙였다.

다른 부탁을 드리려는 것은 아닙니다. 조금 전에 량이 둘러대었듯, 저희 식솔들과 동행하시며 선복이라는 이름으로 신분을 속이시는 것은 어떠하신지 여쭈는 것입니다. 물론 정말로 가노로 부리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량과 함께 지내시며 혹여 아이가 또 아프거나 쓰러지거든 돌봐주실 수 있겠습니까? 길은 혼잡하고 일이 번잡하여, 저 혼자 어린아이까지 모두 챙기기에는 힘이 부쳐 그렇습니다.”

아이는 서서의 소매를 붙잡은 채 올려다보았다. 허락하라는 표정이었다. 전혀 거절할 이유가 없는 제안이었다. 그러나 서서는 그간 살아온 환경 탓인지 선뜻 그러겠노라 대답할 수가 없었다. 한참을 망설이던 서서가 이윽고 꺼낸 말은, 대답이 아닌 질문이었다.

어째서 저를 이렇게까지 도와주시는지요? 저는 의심이 많아 호의로 베풀어주신 은혜에도 선뜻 답을 드릴 수가 없습니다.”

아닙니다. 이 난세에 누가 남을 쉬이 믿을 수 있겠습니까. 다만 량은 돌아가신 제 형님이 맡겨주신 아이로, 제겐 아들이나 다름없습니다. 제 불찰로 아이를 잃어버려 세상이 무너지는 듯 했는데, 이토록 무사히 돌아오게 된 것은 모두 하늘의 덕이요 선생의 은혜입니다. 저는 다만 그 은혜를 갚고자 함이니, 부디 의심하지 마십시오. 또한 량에게는 선생과 연배가 비슷한 형이 하나 있었는데, 피난길에 갑작스레 떨어지게 되어 적잖이 외로움을 타는 모양이니, 선생께서 량을 형제 대하듯 하여주시면 저는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서서는 다시 제 소매를 잡아당기는 아이의 힘을 느꼈다. 아이에게로 시선을 돌리자,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서서는 피식 웃어버리고 말았다. 아이의 표정이 너무나 분명했기에, 너도 정말 그랬으면 좋겠냐고 새삼 물을 것도 없었다.

감사합니다. 그럼 염치 불구하고 신세를 지겠습니다.”

서서는 제갈현에게 공손히 인사하며 답했다. 제갈량은 서서의 그 말을 듣고 활짝 웃으며, 소매를 놓고 그의 손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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