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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서제갈]

살인의 추억

 

달빛마저 흐려, 유독 어둠이 짙은 밤이었다. 잠들어있던 서서는 바람소리에 섞여 들려오는 낯선 소리에 눈을 떴다. 이젠 잠든 사이에 누군가의 손에 목이 달아날 걱정 따위는 하지 않아도 되는 생활을 하고 있으면서도, 서서는 새벽마다 자주 잠을 깼다. 잠을 설친 날이면 하루 종일 몸이 피곤했으나, 협객으로 살던 시절에 들었던 버릇은 쉽게 없어지지 않았다.

다시 잠을 청하려던 서서는, 두 번째 들려오는 낯선 소리에 눈을 번쩍 떴다. 어쩌면 훨씬 전부터 계속해서 들려오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원직 형님..”

제갈량의 목소리였다. 혹여 남이 들을까, 숨을 잔뜩 죽인.

등잔 하나 밝혀들지 않은 제갈량은 어둠 속에서 떨고 있었다. 서서는 다급히 제갈량에게로 다가갔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익숙한 냄새가 풍겨왔다.

형님..”

무슨 일이냐, 량아.”

형님, .. 나 어찌합니까?”

서서가 제갈량의 어깨를 붙잡았다. 아무리 말랐어도, 이젠 열일곱 살을 먹은 사내아이다. 어깨가 두 손 뿌듯이 잡혔다.

무슨 일이야. 진정하고 말해 보거라. 아니다, 여긴 너무 어두운 것 같으니 안으로 들어가자꾸나. 들어가서 불을 밝히고..”

서서의 그 말에 제갈량은 다급하게 서서의 손목을 붙잡았다. 서서는 아이의 손이 끈적하다고 느꼈다.

, 아니 됩니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도,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작고 연약했다. 서서는 의아하게 느끼면서도 제갈량의 어깨를 쓸어주었다. 언제나 당차고 머리가 좋은 아이가, 이토록 당황하고 혼란스러워할만한 일이 무엇인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다만 아이에게서 희미하게 풍겨오는 피냄새가 어떤 가능성을 떠올리게 할 뿐이었다.

.. 내가, 사람을..”

제갈량은 결국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내가 사람을 죽였습니다, 형님...”

 

어른 하나 없이, 어린 형제 둘이서 살고 있는 집. 전란을 피해 도망쳐오긴 했으나, 낭야의 제갈 가문이라는 후광. 태수를 지냈던 그들의 숙부. 도둑들이 노리기엔 썩 괜찮은 조건이었다.

서서는 좀처럼 진정하지 못하는 제갈량을 달래고, 피를 뒤집어쓴 몸을 깨끗하게 씻기고, 피에 젖은 옷가지는 불에 태웠다. 바닥에 흥건한 핏자국을 모두 지우고, 시체는 멍석에 말았다. 서서의 이마에 땀이 맺히는 동안, 제갈량은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여전히 떨고 있을 뿐이었다.

서서는 멍석으로 만 시체를 어깨에 짊어졌다. 수레를 끌면 바퀴소리에 누군가가 깰 것이다.

잠든 척, 조용히 있거라. 금방 돌아오마. 알겠지?”

“...”

제갈량은 무릎을 끌어안으며 대답했다. 서서는 그대로 발소리를 죽인 채, 제갈량의 집을 나섰다.

 

이젠 좀 진정이 됐니?”

샛별이 떴다. 서서는 밤새 제갈량을 안고 등을 쓸어주며 달래주었다. 처음엔 사시나무 떨 듯 떨리던 몸도 서서히 떨림이 멎어갔다.

처음 만났을 땐 제 반 토막만한 어린아이였는데, 어느새 이렇게 자라서 품안을 가득 채운다. 서서는 그 사실에 새삼스러운 기분이 된 채로, 제갈량의 몸을 안고 있던 팔을 풀었다.

“..시체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산에 묻고 왔다. 깊이 파묻고 왔으니 당장 큰 비가 내려도 들킬 일은 없을 거다.”

제갈량은 고개를 끄덕이며 소매로 얼굴을 문질러 눈물자국을 지웠다. 조금 전까지 피로 젖어 불쾌하던 감각은 사라진 뒤였다. 그러나 온몸에 벌레가 기어가는 것 같은 소름끼치는 느낌은 좀처럼 지워지지 않았다. 손은 계속해서 떨렸으며, 목덜미 뒤가 서늘하다가도 순식간에 열이 오르며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미안하다. 도둑이 들 거라는 생각을 못했구나. 내가 진작 신경을 더 썼어야 하는데.”

“..실망하지 않으셨습니까? 저는.. 원직 형님, 저는..”

제갈량은 또다시 가빠오려는 숨을 억지로 가다듬었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현실을 외면할 수 있지만,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사람을.. 죽였는데요.”

“..난세가 아니냐, 량아.”

서서는 제갈량의 손을 끌어당겨 잡았다. 의연한 체 하고 있어도, 아직도 손은 떨리고 있었다. 제갈량은 서서의 말에도 납득하지 못한 것 같았다. 서서는 잠시 고민하다가, 제갈량의 손을 두 손으로 쥐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도 사람을 죽인 적이 있다.”

결코 꺼내고 싶지 않았던 이야기였다. 살인자를 향한 경멸과 힐난, 두려움에 질린 시선들을 또다시 받아내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단은, 눈앞의 아이가 자신을 자책하기 전에, 달래는 것이 무엇보다 급했다.

?”

나 역시 사람을 죽였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어쩌다보니 말이다. 그런데 내가 널 이해하지 못할 이유는 또 무엇이겠느냐.”

서서는 제갈량의 눈빛이 가늘게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겁을 낼까. 아니면 그간 숨겨온 것에 대해 화를 낼까. 그러나 제갈량의 반응은 서서가 예상했던 그 어떤 것도 아니었다.

형님도 저처럼, 이리 두려우셨습니까?”

서서의 손을 잡은 제갈량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때의 형님도, 저처럼, 속이 메스껍고, 어지럽고, 무섭고, 혼란스럽..”

제갈량은 말을 맺지 못했다. 다시 눈물이 흘렀기 때문이다. 서서는 제갈량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아이의 몸을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떨리고 있는 등을 다독이며 쓸어주었다.

비슷했을지도, 그보단 덜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자신은 제법 거친 세상에 몸을 담고 있었으니까. 서서는 끊어진 제갈량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저희가 왜 이런 일을 겪어야 합니까?”

이윽고 다시 들려온 제갈량의 목소리에는 미미한 분노가 스며들어있었다. 서서는 조용히 제갈량의 이름을 불렀으나, 제갈량에겐 그 목소리가 닿지 않는 것 같았다. 아이는 서서히 자신의 생각과 스스로의 세상에 침전되고 있었다.

어째서 저희들은 누군가를 약탈하고, 누군가를 해치며 살아가야합니까? 나 혼자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나 혼자 군자의 도리를 공부하는 것이, 이 난세에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저들이 나를 살인자로 만들고, 짐승으로 만듭니다.”

서서는 아이의 정수리 언저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서서 자신도 그리 많은 나이라곤 할 수 없었다. 자신의 학문이 깊고, 높은 뜻을 통달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품 안의 아이보다는, 어쨌든 자신이 아끼는 아우보다는 몇 살이건 더 먹은 어른이고, 아이보다 앞서 비슷한 고민을 오랫동안 해왔다.

당장 정답을 일러줄 수는 없다. 정답은 존재하지도 않는 문제이다. 그러나 아이가 스스로의 밑동을 갉아먹다가, 잘못된 방향으로 기울어지기 전에 붙잡아주는 역할쯤은 그도 해낼 수 있을 것이다.

조금 자라나다 말 새싹이나 병든 나뭇가지라면 어찌 되든 상관없다. 그러나 서서는 아이의 재능을 알고 있었다. 아이는, 제갈량은, 거대하게 자라 가지로 하늘을 덮고, 끝내 황궁의 가장 깊고 높은 천장을 떠받드는 대들보가 될 수 있는 나무다. 아이의 분노가 엇나간 방향으로 흘러간다면, 그보다 큰 재앙도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공부를 멈춰선 안 되는 것이다, 량아.”

제갈량은 눈물로 젖은 얼굴을 들어 서서를 올려다보았다. 서서는 부드러운 표정으로 아이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서서의 소매 끝이 젖어 들어갔다.

조조의 병사가 도륙한 수십만 백성들 중에, 그의 아비를 두 눈으로 보기라도 한 사람이 몇 명이나 될 것 같니?”

“...”

조조에게도 저들이 있었고, ‘저들이 그의 아비를 죽였다. 조조가 저들을 구분하여 제 적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알고, 순리와 성현의 말씀을 따랐다면, 지금처럼 세상 사람들이 그를 두려워하면서도 미워하겠니? 아니다. 사람들은 모두 그를 우러르고, 그의 효심을 찬양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몇 번이나 정도를 벗어났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짐승이나 진배없는 자가 되고야 만 것이다.”

내가 조조처럼 될 것이라 말씀하시는 겁니까?”

가능성은 있겠지.”

서서는 품에 안고 있던 제갈량을 내려놓았다. 제갈량은 여전히 마르지 않은 눈으로 서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서서가 중간에 잘라 삼킨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서서는 잠시 단어를 고르다가, 신중히 입을 열었다.

넌 대단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아이다, 량아. 넌 아직 어리지만, 난 몇 번이나 너의 재주에 탄복해왔다. 너는 조조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한 존재도, 혹은 전혀 다른 사람이 될 수도 있어. 넌 스스로를 관중과 악의에 비견한다만, 난 어쩌면 네가 그 두 분보다 대단한 사람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그런 생각을 종종 한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원직 형님.”

차분히, 오래, 충분히 생각해보렴. 너는 답을 찾아낼 수 있을 거다. 너는 아주 영리하고 똑똑하니까.”

서서는 제갈량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주고, 진중하고 무겁던 말투를 가볍게 바꿨다. 갑작스레 경쾌해진 목소리에 제갈량은 당황하여 대답할 틈을 놓치고 말았다. 많이 놀랐겠구나. 놀랐을 땐 한숨 푹 자는 게 최고란다. 오늘은 나도 여기에서 잘 테니, 걱정 말고 들어가서 눈이나 좀 붙이거라. 그 어조는 조금 과장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해서, 제갈량은 토를 달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그저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고, 감사합니다, 형님, 하는 인사를 올린 뒤,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눈을 감았을 뿐이다.

서서는 마루에 걸터앉아, 오랫동안 하늘을 그저 올려다보고만 있었다. 아이가 자라, 주군을 선택하고 그 밑에서 뜻을 펼칠 때가 올 것이다. 아마 그렇게 먼 미래는 아닐지도 모른다. 그때 아이가 내지르는 그 불길이 얼마나 크게 타오를 것인지, 누구를 태울 것인지, 서서는 그 무엇도 예상할 수 없었다. 자신이 짐작하기엔 너무 크게 자랄 아이였다.

다만 크게 엇나가지만 않았으면. 바르고 좋은 주군을 만났으면. 그렇게 막연한 소원을 빌며 하늘을 향해 한숨을 크게 한 번 쉬었을 뿐이었다.

 

***

 

어렸을 때..”

조운은 제갈량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달구경을 하다가 분위기에 취했는지, 제갈량의 눈빛은 평소와 다르게 조금 흐릿했다.

오늘과는 다르게 달빛이 아주 흐린 날에.. 사람을 죽인 일이 있었지요.”

제갈량은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담담한 표정이었으나, 찻잔은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손끝이 가늘게 떨린 것이다.

그러십니까.”

동생과 저 뿐인 집에.. 도둑이 들었답니다. 숙부님이 돌아가시고 몇 해나 지났을까.. 사실 이러한 난세에, 몇 년이 지나도록 별다른 사고가 없었던 것이 천운에 가깝다고 하는 편이 맞겠습니다만.”

군사.”

조운은 조용히 제갈량을 불렀다. 눈을 내리깔고 있던 제갈량은 답지 않게 조금 머뭇거리다가, 천천히 시선을 올려 조운의 눈을 보았다.

괜찮습니다. 어째서 그렇게 당황하십니까.”

“...”

아무도 군사를 비난하지 않을 것입니다. 적어도 이 운은 그렇습니다.”

“..그러십니까.”

제가 지금껏 죽인 사람의 수만 해도 천 명은 넘어갈 것입니다. 이 전란 속에서 그런 일은 빈번한 것입니다. 하물며 군사께선 스스로의 영달과 사심을 채우기 위해 남을 해한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크게 죄책감 가지실 필요 없습니다.”

제갈량은 조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장군. 덕분에 오랜 시간 가슴을 억누르던 죄책감이 조금 덜해진 것도 같습니다. 제갈량의 인사에 조운은 꾸벅 고개를 숙였을 뿐이었다.

제갈량은 다시 달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서서는 이제 그의 곁에 없었다. 먼 곳으로 떠나갔다. 제갈량은 오늘처럼 그 사실이 아쉽게 느껴지는 날이 없었다. 제갈량은 그날 서서가 제게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것은 일종의 걱정이었고, 동시에 기대였다. 자신은 그의 기대를 충족할 의무를 지고 있지는 않았다. 동시에 그의 기대를 져버릴만한 행보를 보인 적도 없었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그랬다. 제갈량은 무언가 결정을 내리고, 생각을 거듭하고, 책략을 짜낼 때마다 손끝의 거스러미처럼 툭툭 걸리는 서서의 기대가 부담스럽고, 신경 쓰였다. 두 사람은 이제 편지조차 닿을 수 없을 만큼 떨어졌으나, 그 기대만큼은 좀처럼 벗어던질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런 기대를, 그리고 걱정을 해주는 것도 서서뿐이다. 제갈량은 그렇게 생각하며 피식 웃어버리고 말았다.

이제 제갈량의 곁에는 사람들이 많았고, 그들이 제갈량에게 거는 기대는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무거워졌으며, 어깨와 세 치 혀에 짊어진 목숨은 수만에 달했다. 아우와 제 어린 목숨이나 보살피며 간신히 살아가던 시절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나날이었다.

그러나 외로운 것은 어쩔 수가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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