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질하는 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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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룡공명] 제갈부인전

 

 조운은 유비의 방으로 들어섰다. 침실이었다. 유비는 다른 군주에 비해 엄격히 권위를 세우거나 허례허식을 따지는 편은 아니었으나, 침실까지 드나들 수 있는 사람들은 지극히 한정되어있었다. 관우와 장비, 자신, 그리고 제갈량.

 조운은 가볍게 예를 취하며 두 사람에게 인사를 올렸다. 유비는 부드러운 표정으로 손짓하여 조운에게 자리를 권했다. 그러나 제갈량은 조운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언제나 여유롭다 못해, 간혹 냉담하게 비치는 미소를 머금고 있던 입술이 오늘만큼은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어려운 일이 닥친 모양이구나. 조운은 그렇게 생각했다. 혹시 조조가 수십만 대군을 일으킨 것일까. 아니면, 손권이 또다시 형주를 빼앗으려 드는 것일까. 그것이 아니라면.. 도대체 우리의 군사를 저렇게 긴장시킬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단 말인가.

 조운이 질문을 입 밖으로 내기 전, 유비가 먼저 입을 열었다.


 “괜찮으시겠소?”

 “괜찮지 않은들 어찌하겠습니까.”


 제갈량의 목소리엔 피로가 묻어났다. 조운이 영문을 모른 채 두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동안, 제갈량은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고 이내 입을 열었다.


 “주공께서 새로이 혼인을 올리실까 합니다.”


 조운은 가만히 눈을 깜빡였다. 유비는 이미 세 번의 혼인을 했다. 또 다른 부인이나 첩실을 얻는 것은 전혀 누가 되는 일이 아니었다. 이미 저 위의 조가는 부인이 열다섯에 첩실은 수백이라지 않은가. 물론 혼인은 인륜지대사이니만큼 신중히 결정해야하는 문제지만, 오랫동안 생사고락을 함께 했다고는 하나 일개 장수일 뿐인 자신과는 상관없는 문제였다. 의논이라면 유비의 가족과 하는 편이 옳았다.


 “그렇습니까.”

 “그 이상은 묻지 않으십니까?”

 “주공의 일입니다. 어찌 제가 함부로 왈가왈부할 수 있겠습니까.”

 “아니요. 그 누구보다 장군의 허락이 가장 중요합니다.”


 조운은 의아한 얼굴로 제갈량을, 그리고 여전히 침묵을 지키고 있는 유비를 번갈아보았다. 제갈량은 내리깔고 있던 눈을 바로 떠 조운을 똑바로 마주했다. 유비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제갈량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가 주공의 첩실로 들어가려 하니까요.”

 “..?”


 자룡은 헛것을 들은 사람처럼 멍한 표정을 지었다. 제갈량은 쥐어짜내듯 목소리에 힘을 주어 간신히 한 글자씩을 뱉어냈다.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나, 조운은 그 뒤에 비친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어찌 모르겠는가. 자신의 온 마음을 다 내어준 정인일진데.


 “이 량은 병서와 옛 성현의 말씀을 부지런히 공부하여 몇 가지 재주를 익히고, 끝내 조가나 손가 따위는 개미보다 하찮게 여기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들의 마음과 그들의 병법을 손금 보듯 볼 수 있으니, 이는 결코 어리석은 만용이 아닙니다.

 그러나 저는 한낱 여인이 아닙니까. 제가 아무리 놀라운 재주를 선보이고 수십 번의 전투를 승리로 이끈 들, 관 장군과 장 장군은 물론이요, 가장 낮은 병사들조차 마음으로 저를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병사들이 군사를 진정으로 따르지 않으면 반드시 군율이 흐트러지고, 군령은 지켜지지 않을 것이니, 전투는 당연히 패하게 될 것이며, 나아가서는 유황숙의 병사들은 여인의 호령을 받는다하여 비웃음을 사고 백성들의 민심은 떠나갈 것입니다.”


 조운은 제갈량의 차분한 설명을 들으며 주먹을 말아 쥐었다. 그는 아직 분노하지 않았다. 다만 모든 것이 갑작스럽고 혼란스러워, 당황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허나 제가 주공을 지아비로 모신다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관 장군과 장 장군에겐 형수가 되니 그들은 저를 주공을 모시듯 섬길 수밖에 없으며, 낮은 병사들은 주군의 부인에게 예를 갖추고 그 명령에 복종해야 합니다. 또한 사람들은 이 량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지아비를 섬기며 사지를 함께하는 열녀로 볼 것이니.. 민심을 얻기에도 좋습니다.”


 제갈량은 자리에서 일어나 조운의 앞으로 걸어왔다. 옷자락 아래로 신발이 보였다. 언젠가 조운이 선물한 그 신발을 신고 있었다. 조운은 그제야, 자신이 시선을 아래로 떨어트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제갈량은 천천히 몸을 숙여, 조운의 앞에 엎드렸다.


 “장군께선 부디 노여워 마시고, 대업을 위해 남녀의 사사로운 정은 잊어주시길 청합니다. 주공께선 장군이 마음으로 따르지 않는다면 결코 이 혼사를 행하지 아니할 것이라 못 박으셨으니, 장군의 허락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조운은 입을 꾹 다물었다. 조운은 지금껏 몇 번이나 제갈량의 명을 받았고, 언제나 기꺼운 마음으로 명을 수행해왔다. 그러나 그 어떤 명령도 방금 들은 이 말보다 어렵고 잔인하진 않았다.

 어렵고 잔인했다. 정말로. 차라리 자신을 승산 없는 싸움으로, 결코 돌아올 수 없을 사지로 내모는 명이었다면 지금처럼 참담한 기분이 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조운은 제갈량의 작은 등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천천히 유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유비는 여전히 부드러운 그 미소를 띤 채, 조운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저어보였다. 원치 않는다면 허락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었다. 제 사람의 마음을 다치게 하느니 차라리 어렵고 불확실한 길을 가겠다는 뜻이었다. 유비는 늘 그런 사람이었다.

 떨리고 일렁이던 조운의 눈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조운은 자리에서 일어나, 제갈량의 앞으로 다가갔다. 바닥에 엎드린 그녀의 팔을 부축하여 일으켰다. 소매 아래로 잡히는 팔은, 며칠사이 더 말라있었다.


 “어찌 새삼스럽게 제 의견을 물으십니까. 주공과 군사의 뜻이 곧 이 운의 뜻이니, 저는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 뜻대로 하십시오.”

자룡.”


 유비는 조용히 조운을 불렀다. 그러나 조운은 유비를 향해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제갈량의 얼굴을 향해있었다. 한없이 애타고 애절한 시선이었다.


 “나는 자네의 마음을 알고, 군사의 마음도 알고 있네. 두 사람이 서로를 아끼고 은애함을 알고 있는데, 내가 어찌 그럴 수 있겠나. 원치 않는다면 거절해도 좋네.”


 자룡은 입술을 달싹였다. 쉽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제갈량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조운을 보지 않고 있었다. 차라리 얼굴을 들어 표정이라도 보여주면 좋으련만. 이미 제 시선은 또렷이 느끼고 있을 터인데.

 그러나 제갈량은 끝내 조운을 외면하고 말았다. 그 단호한 태도에서 답을 읽은 조운은, 한숨 섞인 미소를 지으며 유비의 말에 답을 내놓았다.


 “형제는 손발이요, 여인은 의복이라 하였습니다. 주공께선 저를 관, 장 두 분 못지않은 형제의 정으로 대해주시는데, 무슨 염치로 여인을 향한 사사로운 정조차 꺾지 못하겠습니까. 저는 신경 쓰지 않으셔도 좋으니, 다만 두 분 께서는 대업과 고통 받는 백성만을 생각하여 주십시오.”

 

***

 

 사람들은 황숙이 현인을 얻는다며 기뻐했다. 붉은 등과 붉은 비단과 붉은 꽃이 온 사방을 붉게 수놓았다. 악공들의 연주가 어둠을 헤집으며 퍼져나갔다.

 신방에 앉은 신부는 얼굴 앞으로 붉은 천을 늘어트리고 있었다. 곧 신랑이 다가와 천을 걷어낼 것이고, 신부를 안아 침상으로 데려갈 것이다. 내 군사껜 손가락 하나 대지 않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정인을, 내가 어찌 취하겠소. 나는 그런 짐승 같은 짓은 하지 못합니다. 유비는 몇 번이나 그렇게 약속하였으나, 그것이 위로가 되진 못했다. 혹여 애가 들어선들, 그것이 자신과 무슨 상관이 있으랴. 오히려 아이가 생기면 자신의 위치는 더욱 확고해 질 테니, 이 혼인의 목적과는 부합하는 일이다.

 그리고 만일 아이가 생긴다면, 조운이 자신을 향한 마음을 정리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자신은 평생 그에 대한 애정을 가슴 속에 품고 살아가겠지만.. 그와 자신의 관계에 끝을 고한 것은 자신이다. 자신은 그에게 불평을 할 어떠한 자격도 없었다. 그도 훗날 고운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고, 자식을 낳는다면.. 자신은 과거의 한 시절 추억으로 남을 것이고.. 내키지는 않는 일이지만..

 한없이 부정적이고 우울한 상념에 빠져들던 제갈량은,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느끼지 못했다. 제갈량이 퍼득 정신을 차린 것은, 저벅거리는 발소리가 지척으로 다가온 뒤였다. 긴장한 듯 뻣뻣한 걸음걸이로 다가온 신랑은 신부의 앞에 섰다. 붉은 천 사이로 남자의 신발이 보였다.

 스릉. 검이 천천히 뽑혀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저 검 끝이 붉은 천을 걷어내면 모든 것이 끝난다. 제갈량은 눈을 감았다. 가슴을 꽉 틀어막은 습한 열기가 괴로워, 깊은 한숨을 소리죽여 내쉬었다. 눈물을 머금은 숨이 허공으로 흩어졌다.

 날을 세우지 않은 검이 천천히 천을 걷어내었다. 그 아래 숨겨진, 슬픔으로 창백한 신부의 얼굴이 드러났다. 제갈량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자신을 찾아온 신랑을 올려다보았다.


 붉은 옷을 입은 조운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 .”


 제갈량은 당황한 목소리로 조운을 불렀다. 조운은 들고 있던 가검을 떨어트렸다. 둔탁한 소리를 내며 검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어찌.. , 일입니까?”

 “주공께서.. 저를 은밀히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몰래 사람을 불러 지은.. 붉은 옷을 내주시더이다.”


 조운은 천천히 제갈량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단단한 손이 천천히 올라와 제갈량의 뺨을 어루만졌다. 원래도 말랐던 뺨은, 마르다 못해 수척해져있었다. 조운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제갈량을 바라보며, 두 손으로 신부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신부의 눈에서 결국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는 당신을 평생 이렇게 부르고 싶었지만.. 앞으로는.. 평생 부르지 못할 말이지만, 오늘 밤만은 당신을 원 없이 부르겠습니다.”


 제갈량은 손을 들어 올려 조운의 손을 감싸 쥐었다. 조운은 울컥 치받는 것을 간신히 삼키며, 제 손을 감싸 쥔 제갈량의 손을 바라보았다. 그가 살아생전 보았던 그 어떤 것보다도 곱고 연약해서, 혹여 힘을 주면 부러질까 마음 놓고 잡아보지도 못한 손이었다.


 “부인..”


 이렇게 빨리 끝이 올 것을 알았더라면, 조금 더 잡아볼 것을. 볕이 좋은 날에는 물이 오른 꽃가지를 꺾어 선물할 것을. 술에 취한 체, 이 작은 몸을 꽉 한번 안아나 볼 것을.

 제갈량은 눈을 감았다. 쉴 새 없이 눈물이 흘렀다. 조운은 신부의 몸을 안아들었다. 병약하고 마른 신부는 깃털만큼 가벼웠다. 신부의 하얀 손이, 그의 붉은 옷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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