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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라이/성반전/학원물AU/백함] 공립 아슬람 고등학교 02

-화장

*다음편 있어서 02 아닙니다 언젠간 또 쓰고싶은거 생길지도 몰라서 그냥 일단 붙여놓은겁니다..


 라이퀴아는 스스로를 꾸미는 것에 큰 관심이 없었다. 예쁘고 귀여운 옷을 좋아하긴 했지만, 유명브랜드의 상품을 반드시 가지고 싶다던가, 한정수량으로 출시된 화장품 같은 것보단 만화책 한 권, 과자 한 봉지에 돈을 쓰는 쪽을 선호했기 때문이다. 

 이슬레이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두리번거리는 라이퀴아를 바라보며 조용히 미소를 짓고 있었다. 백화점의 VVIP에게만 개방되는 특별 갤러리는, 라이퀴아가 처음 보는 물건들로 가득 차있었다.

 

"라이퀴아. 이쪽으로 와봐."

 

 이슬레이는 푹신한 소파에 기대앉아 카탈로그를 넘기며 손짓으로 직원을 불렀다. 갤러리 입구에서 두 손을 공손이 모으고 있던 여직원이 재빨리 다가왔다. 라이퀴아가 구경을 끝내고 이슬레이를 향해 다가오는 사이, 이슬레이의 긴 손가락이 카탈로그의 한 면을 훑었다.

 

"이쪽 라인 다 보여줘요."

".. 죄송합니다, 아가씨. 다른 제품들은 다 있는데, 이 색상은 현재 재고가 없어서요."

"그럴리가요? 제가 이번 시즌 제품들은 하나씩 준비해달라고 분명히 말씀 드렸던 것 같은데."

 

 이슬레이의 목소리가 살짝 높아졌다. 미미한 변화였지만, 그 목소리를 듣고 있는 두 사람은 그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라이퀴아는 조금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지만, 이슬레이의 말에 대답하던 직원은 허리를 90도로 꺾으며 연신 고개를 숙이고 사과를 해댔다.

 

"정말 죄송합니다, 아가씨. 발송 과정에 문제가 생겨서요, 입고될 때 그 제품 하나만 빠진 채로 들어왔거든요. 바로 본사에 클레임 넣었고, 지금 긴급으로 항공편 수배해서 배송 중입니다."

 

 이슬레이는 직원의 사과에도 상당히 심기가 불편해보였다. 이 백화점은 VVIP 대우가 참 특별하네요. 아버지도 이런 상황을 겪으신 적이 있는지 한 번 여쭤볼까요. 이슬레이의 짜증에 직원은 몇 번이나 거듭 사과할 뿐이었다.

 

"이슬레이. 이슬레이."

 

 보다 못한 라이퀴아가 이슬레이의 손목을 붙잡았다. 이슬레이는 다시 한 바탕 쏟아내려던 말을 멈추고 라이퀴아를 돌아보았다. 라이퀴아는 웃으며 이슬레이의 손을 두 손으로 꼭 붙잡았다.

 

"너무 화 내지 마. 실수하셨다잖아. 나중에 또 오면 되지. ?"

"..."

"나 나중에 여기 또 구경하고 싶어. 또 올 때 나도 불러주라. ? ?"

 

 라이퀴아의 말에 이슬레이는 잠시 눈을 깜빡이다가, 옅은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슬레이의 기세가 누그러진 것을 느낀 직원은 안도의 한숨을 속으로 삼키며, 이슬레이가 찾은 나머지 화장품이라도 가져오기 위해 급히 자리를 떴다.

 

"그런데 이게 뭐야? 립스틱?"

". 이번 시즌 한정 에디션으로 나온 건데, 이건 지금 내가 바르고 있는 거야. 너한테도 잘 어울릴 것 같아서 하나 선물해주고 싶었는데.“

진짜? 근데 나는 화장품 잘 몰라서.. 이게 나한테 어울릴까?”

그래서 지금 한 번 테스트 해보고 선물하려고 했는데.. 이렇게 됐네.”

 

 이슬레이는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지 않는 상황을 언제나 낯설어했다. 그것을 잘 알고있는 라이퀴아는, 조금 쳐진 이슬레이의 어깨를 쓸어주었다. 이슬레이는 웃으며 라이퀴아를 바라보다가, 그녀의 손목을 잡아끌며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럼 다른 거 먼저 보자, 라이퀴아. 여기 있는 것 중에 마음에 드는 거 없어? 다 가져가도 돼.”

사주는 거야? 그치만 나 이런 건 잘 몰라서 고르기가 좀.. 그리고 다 비싼 거 아냐? 막 받기도 좀 그런데..”

괜찮아. 아버지가 여기 VVIP 회원이신데, 그거 유지하려면 한 달에 얼마씩 지불해야 되거든. 그런데 이번 달엔 아버지도 어머니도 바쁘셔서 신경을 못 쓰셨대. 그래서 나한테 친구 데려와서 아무거나 사도된다고, 여기 카드도 주셨는걸.”

 

 이슬레이는 익숙하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갤러리 안을 돌아다녔다. 조금 전까지 언짢았던 기분은 다 풀린 듯 했다. 라이퀴아는 속으로 웃으며 이슬레이의 뒤를 졸졸 쫓아다녔다.

 다른 아이들이 이슬레이는 변덕스럽고 제멋대로 굴어 비위를 맞추기 어렵다며 투덜거리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라이퀴아는 속으로 조용히 웃었다. 이슬레이는 잘 토라지지도 않았고, 짜증이 났더라도 말 한마디면 금세 화를 풀었다. 라이퀴아에게 이슬레이는 누구보다 착하고 상냥한 친구였다.

 옷을 입은 마네킹 옆에 라이퀴아를 세우고, 행거에 걸린 옷을 내려 라이퀴아에게 대보고, 반지며 목걸이 같은 것들을 라이퀴아에게 걸었다가 다시 고개를 저으며 원래 자리에 돌려두기를 몇 번이나 반복하던 이슬레이는, 신발이 놓인 진열대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 이거 너한테 어울릴 것 같다. 이거 한 번 신어봐, 라이퀴아.”

. 나 이런 굽 있는 신발 별로 안 신어봤는데.”

그럼 지금 한 번 신어봐. 내가 신겨줄게, 이리 와. ?”

 

 이슬레이는 한 손으로 라이퀴아의 손을, 다른 손으로는 구두 한 켤레를 든 채 갤러리 곳곳에 놓인 의자 앞으로 라이퀴아를 데려갔다. 그 모습이 너무 즐거워 보여, 라이퀴아는 더 이상 거절하지 못하고 이슬레이의 뒤를 따라갔다.

 이슬레이는 의자에 라이퀴아를 앉히고,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라이퀴아는 아무리 깨끗하게 청소된 바닥이라도 그냥 앉는 것은 상상할 수조차 없고, 야외에선 의자에 앉을 때에도 담요를 찾는 이슬레이를 알고 있었기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슬레이는 무릎이 땅에 닿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라이퀴아의 발목을 잡고 신발과 양말을 벗겨냈다.

 

내가, 할 수 있어, 이슬레이..”

괜찮아. 내가 해줄게.”

 

 토끼무늬가 프린팅 된 양말을 곱게 접어 옆에 내려놓던 이슬레이가 라이퀴아를 올려다보며 웃었다. 라이퀴아는 그 미소를 한 번도 거절한 적이 없었다. 라이퀴아는 어물거리며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고, 이슬레이는 구두를 집어 들었다.

 

너 발목 예쁘다.”

 

 이슬레이의 말에 라이퀴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너도, 너만큼은 아니야, 이 비슷한 대답을 했다면 이슬레이는 좋아할까. 그런 생각이 스쳐지나가긴 했으나, 라이퀴아는 이런 분위기에서 그런 말을 하며 태연하게 웃을 수 있는 성격은 아니었다.

 이슬레이는 꼼질거리며 오므리는 작은 발가락을 보며 웃음을 삼켰다. 발등에 입을 맞추고 입술 자국을 남기는 상상을 했다. 물론 당황하고 놀랄 것이 뻔하니, 실행에 옮기지는 않는다.

 그러다 이슬레이는 문득, 무언가에 생각이 닿았다.

 

됐다. 한 번 걸어볼래?”

.. 넘어질 것 같은데.”

내가 손 잡아줄게.”

 

 신발의 굽은 걷기 곤란할 정도로 높은 것은 아니었으나, 늘 운동화나 단화만을 신던 라이퀴아에겐 낯선 높이였다. 이슬레이는 라이퀴아의 앞에 서서 두 손을 끌어 잡은 채, 라이퀴아의 보폭에 맞춰 뒷걸음질을 쳤다.

 

괜찮아? 불편하거나, 발 아프거나, 그런 건 없어?”

 

 라이퀴아는 소리를 내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평소보다 눈높이가 높아진 탓에, 늘 올려다보던 이슬레이의 눈을 거의 정면에서 마주해야했기 때문이다. 똑바로 마주본 이슬레이의 눈은 평소에 보던 것과는 또 달라서, 라이퀴아는 간질거리는 기분을 누르기 위해 표정을 굳혀야 했다. 입고리가 가늘게 떨렸다.

 직원이 이슬레이가 요구한 화장품들을 가지고 갤러리로 들어왔다. 이슬레이는 다시 라이퀴아를 데리고 소파로 돌아갔다. 이슬레이는 무심한 손짓으로 직원을 멀리 물리고, 새 제품이 분명한 화장품의 포장을 뜯었다. 당황한 라이퀴아는 눈을 깜빡일 뿐이었다.

 

그렇게 막 뜯어도 돼?”

다 사가지, . 너 가져. 다 너 줄게. 눈 감아봐, 라이퀴아. 화장 해줄게.”

 

 라이퀴아는 어물어물 눈을 감았다.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몇 번 나더니, 차갑고 긴 손가락이 얼굴 위를 스치는 것이 느껴졌다. 화장품 냄새와 이슬레이의 향수 냄새가 섞인 향긋한 냄새가 났다.

 손가락, 퍼프, 브러쉬, 그리고 라이퀴아가 촉감만으론 구분해낼 수 없는 정체불명의 무언가가 분주하게 라이퀴아의 얼굴 위를 훑었다. 라이퀴아는 가끔 제 뺨이나 턱을 짚는 손가락에 집중했다. 이슬레이의 손은 생각보다 차가웠다.

 오래 눈을 감고 있어 살짝 지루해진 라이퀴아는 가늘게 눈을 떴다. 가장 먼저 보인 건 이슬레이의 입술이었다. 제 눈썹을 다듬느라 집중한 채 살짝 벌어진 입술에서, 연약하게 흘러나온 숨이 라이퀴아의 얼굴에 닿았다. 좋은 냄새가 났다. 라이퀴아는 당황하여 눈을 꾹 감아버렸다. 갑자기 움찔하는 라이퀴아를 보고 이슬레이가 소리를 죽여 웃는 것이 느껴졌으나, 라이퀴아는 모른 체 했다.

 

다 됐다. 거울 한 번 볼래?”

 

 딸깍. 무언가를 닫는 소리가 났다. 라이퀴아는 꾹 감고 있던 눈을 조심스레 떴다. 이슬레이는 테이블에 놓인 둥근 거울을 라이퀴아를 향해 돌려주었다. 라이퀴아는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낯설어, 눈만 깜빡이고 있을 뿐이었다. 화려하지 않은 화장이었지만, 낯설었다.

 

립은 마땅히 발라줄만한 게 없어서.. . 이쪽 봐봐, 라이퀴아.”

 

 어렵사리 거울에서 눈을 뗀 라이퀴아가 이슬레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슬레이는 한 손으로 라이퀴아의 뺨을 감싸고, 다른 손은 자신의 입술로 가져갔다.

 이슬레이는 엄지손가락으로 자신의 입술을 힘주어 누르고, 천천히 훑었다. 하얀 손가락 끝에 붉은 칠이 묻어났다. 라이퀴아가 당황하는 사이, 이슬레이의 손가락은 라이퀴아의 입술로 옮겨갔다. 예의 하얗고 차가운 손가락이 라이퀴아의 입술을 천천히 훑었다. 라이퀴아는 멍하니 이슬레이의 얼굴을 바라볼 뿐이었다.

 

, 역시 예쁘다. 거울 봐봐. 어때? 잘 어울리지.”

 

 이슬레이는 생긋 웃으며 거울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라이퀴아는 화장이 조금 번진 이슬레이의 입술과, 아직 붉은 자국이 남아있는 이슬레이의 손끝에 시선이 닿았다. 갑자기 목 뒤가 화끈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으응.. 고마워.”

 

 라이퀴아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웅얼거렸다. 분명 귀 끝이 붉어졌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슬레이는 다른 물건을 또 가져올 생각인지,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또각거리는 발소리가 경쾌하게 멀어졌다. 라이퀴아는 흘끔, 이슬레이의 뒷모습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목적지를 정하지 못하고 방황하던 시선은, 이슬레이의 가느다란 발목으로 떨어졌다.

 너 발목 예쁘다. 그 말이 문득 떠올라서, 라이퀴아는 다시 고개를 푹 숙여버리고 말았다. 그 탓에, 막상 저질러놓고 저도 민망해 괜스레 꼼질거리고 있는 이슬레이의 손은 결국 발견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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