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질하는 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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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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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커크

*리부트 스타트렉 영화만 감상한 뒤 쓰는 날조글입니다. 캐릭터 붕괴, 원작 붕괴, 원작 설정 붕괴 주의.

 

[My Crew]

2. 목줄을 맨 개

    - 목줄을 맨 개. 칸은 본인이 딱 그런 꼴이라고 느꼈다.

 

 

커크는 투명한 벽을 가볍게 두드렸다. 반듯한 자세로 정면을 바라보고 있던 남자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깜빡. 창백한 눈꺼풀이 천천히 깜빡였다. 남자의 무표정한 얼굴에는 어떤 변화도 없었다.

 

“기분은 어때, Mr.해리슨?”

 

칸은 커크와, 커크의 뒤에 반듯한 자세로 서있는 스팍을 한 번씩 번갈아 쳐다보았다. 이윽고 다시 커크에게로 시선을 준 칸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다지 좋진 않군. Mr.커크.”

 

원래도 음침할 정도로 낮은 목소리는 목이 잠겨 한 층 더 낮아져있었다. 오랫동안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은 탓이다. 커크는 굳은 표정을 애써 풀려 하지 않았다. 그에게도 그만의 사정이 있었음을 알고, 원하던 원치 않던 그에게 어느 정도의 감정적인 공감도 느꼈지만, 존 해리슨, 칸은 엔터프라이즈호를 공격하고, 수백만 명의 사상자를 낸 극악무도한 테러범이었다.

 

“존 해리슨 중령. 당신은 일주일 뒤에 지구를 떠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오랫동안 지구로 돌아오지 못할 거야.”

“그런가. 또다시 추방령이라도 내려진 모양이군. 3백 년 뒤에 다시 만나세. Mr.커크.”

 

칸의 가벼운 대꾸에 커크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가볍게 웃었다. 칸은 청록색 눈동자로 두 남자를 물끄러미 응시할 뿐이었다.

 

"나도 그랬으면 좋겠지만 아쉽게도 다시 만나는 데에 그렇게 긴 시간이 필요할 것 같지는 않아. 당신은 일주일 뒤에 엔터프라이즈호에 승선할거야. 그리고 오랫동안 지구로 돌아올 수 없을 거고. 질문사항 있나?"

"하나."

 

Just one. 목소리는 여전히 탁했으나 발음만은 정확했다. 음절 하나 흘리지 않는 칸의 말을 들으면서, 커크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창백한 낯빛과 무표정한 표정에도 불구하고, 그는 묘한 매력을 느끼게 하는 남자였다. 같은 남자로서, 혹은 인간이라는 동등한 종족으로서 포식자의 위압감을 느끼며 위축되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가 질문을 내뱉었을 때, 커크는 그가 다시 농담을 하는 줄로만 알았다.

 

"오늘이 며칠이지?"

 

커크는 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좋아. 유머 감각은 스팍보단 뛰어나군."

 

칸은 커크의 대답을 듣고도 시선을 돌리지도, 어떤 반응을 보이지도 않았다. 칸의 건조한 시선을 마주하던 커크는 스팍을 돌아보았고, 스팍은 칸 못지않은 무표정으로 칸을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었다.

 

"아. 설마 농담이 아니었나?"

"내가 농담을 할 이유가 없지 않나, Mr.커크."

 

커크는 그제야 존 해리슨을 곧바로 격리시켰다는 말의 뜻을 이해했다. 문자 그대로의 의미였던 것이다. 그는 냉동 상태에서 깨어난 직후 이 방으로 압송되어, 철저하게 격리되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당신이 벤전스를 샌프란시스코에 들이박은 뒤로 일 년 정도 지났어."

"그런가."

"별로 놀라진 않는군."

"처음 듣는 말이 아니거든."

 

300년을 뛰어넘는 경험도 했던 자에게 1년 정도야. 커크는 고개를 끄덕이곤 구금실을 지키고 있던 담당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를 꺼내주게. 아처 원수의 허가가 떨어졌네."

"Yes, sir."

 

그가 구금실의 문을 열기 위해 자리를 뜨자, 커크는 다시 칸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인사를 건넸다.

 

"자, 또 보자고. 300년이 아니라 300초 뒤에."

 

커크의 농담에 칸은 옅은 웃음을 띠었다. 커크는 칸의 한 쪽 입꼬리가 분명히 올라갔다고 느꼈다. 칸은 천천히 몸을 돌려, 구금실의 문을 열어준 담당자를 향해 절도 있는 동작으로 걸음을 옮겼다.

 

***

 

칸은 수갑을 푼 손목을 매만지며 커크의 앞에 섰다. 칸의 시선엔 거침이 없었고, 그 시선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노골적이었다. 커크는 그 시선을 받아내며 물었다.

 

"1년 전에는 어디에서 살았지?"

"런던. 31섹터. 마커스가 비밀요원들을 위해 직접 마련한 세이프 하우스가 있었다."

"그럼 그곳에서 지내는 건 무리일 테고… 혹시 누군가와 같이 사는 건 불편한가?"

"무슨 의미지?"

 

커크는 칸의 물음에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했다.

 

"별거 아냐. 당분간은 룸메이트로 지내자는 뜻이지 뭐."

"함장님."

 

스팍이 커크를 불렀으나 커크는 손을 내저었다. 스팍의 판단은 언제나 옳았지만, 냉정하고 정확한 만큼 유난스러운 구석이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나도 네가 무슨 말 하려는지 아는데, 스팍."

"함장님께서 몇 시간 전에 분명히 말씀하신대로, 그는 최고 레벨의 위험인물입니다. 이자와 함장님을 같은 공간에 오랜 시간 방치해둘 수는 없습니다."

"스팍……."

 

본인 앞에서 막힘없이 튀어나온 '최고 레벨 위험인물'이라는 단어에, 커크는 짧은 한숨을 속으로 삼켰다. 그러나 칸은 한 쪽 눈썹을 살짝 까딱였을 뿐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대화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걱정은 그만 해도 된다고, 스팍. 솔직히 말하면 넌 정말로 도움이 안 될 것 같아."

"하지만 함장님. 함장님께선 지금 해리슨 중령에게 구속구를 채우는 것조차 잊으셨습니다."

"잊은 게 아니라……."

 

이 눈치 없는 외계인아. 커크는 스팍에게서 시선을 돌려 칸을 흘끗 보았다. 칸은 손을 올려 자신의 턱을 매만지며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구속구?"

"…그래. 당신을 풀어주는 조건으로 지구를 떠나기 전까지 당신의 목에 구속구를 채우라는 명령이 따라붙었어. 만일 당신이 내 통제를 벗어나 마구 날뛴다면 구속구에 내장된 마취약이 주사되는 거야."

"알만하군. 그런데 어째서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은 거지?"

"당신이 지금은 날뛸 생각이 없어보여서."

 

커크의 대답에 칸은 웃었다. 피식, 가볍게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낸 그는 커크를 향해 살짝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막 수갑을 푼 내 목에 또 족쇄를 채우기도 싫었겠지. 난 상관없으니 채우도록 해. 문제가 될 여지는 남기지 않는 것이 서로에게 좋지."

 

커크는 스팍이 내미는 구속구를 받아들었다. 손바닥에 느껴지는 차가운 촉감이 제법 섬뜩했다. 칸은 허리를 조금 숙이긴 했으나 여전히 커크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커크는 살짝 치뜬 그의 눈이 구금실의 유리창 너머에서 보았을 때보다 조금 더 파랗게 보인다고 생각했다.

커크는 칸의 옷깃을 조금 끌어내리고 그의 목덜미에 구속구를 채웠다. 커크가 구속구를 손에 쥐고 있었던 시간은 무척 짧았다. 체온으로 그 냉기를 덮을만한 시간조차 없었다. 맨살에 닿는 느낌이 소름끼칠 법도 한데, 칸은 작은 떨림조차 없었다.

찰칵. 금속 고리가 맞물리는 소리가 들렸다. 칸은 다시 허리를 펴고 바르게 고쳐 섰다. 각 잡힌 그의 자세는 누가 보아도 모범적인 군인의 모습이었다.

 

"난 뭘 하면 되는 거지, '함장'?"

 

칸은 구속구에 내장된 바이오센서가 가동되는 소리를 들었다. 그의 목덜미에 꼭 맞게 조여들고, 동맥의 위치를 찾아내는 소리다. 미세한 바늘이 결국 동맥을 찾아내 찌르는 것이 느껴졌다. 억지로 구속구를 풀어내려하면 곧바로 진정제가 주입될 것이고, 구속구를 악력으로 회전시켜 바늘의 위치를 임의로 바꾸려한다면 아마도 동맥이 찢어질 것이다.

 

"난 당신의 약점을 분명히 알고 있어.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서 당장 '내 말을 듣지 않으면 큰일이 벌어질 거다'라면서 윽박지르고 협박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 그런데 아마 이 복도에도 분명히 폐쇄회로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을 거고, 내 입모양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사람도 분명히 있을 거란 말이야."

 

목줄을 맨 개. 칸은 본인이 딱 그런 꼴이라고 느꼈다. 그러나 그의 기분이 어떻든 간에, 커크는 짐짓 유쾌한 목소리로 농담처럼 한 마디를 툭 내던졌다.

 

"그러니까 일단 여길 나가는 것부터 시작하자고."

 

*** 

 

커크는 창문을 가린 커튼을 힘차게 걷었다. 요즘 세상에야 누가 직접 커튼을 치고 걷겠느냐마는, 커크는 커튼을 여닫을 때마다 들리는 커튼 고리의 마찰음을 제법 좋아했다. 샌프란시스코의 멋들어진 야경이 펼쳐졌다.

 

"조명."

 

불을 밝힌 커크는, 난장판이 된 방안을 둘러보며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찌그러진 음료수-대부분 술-캔과 먹다 남은 음식들, 과자 부스러기들. 읽다가 대강 던져둔 책과 잡지들. 대강 뭉쳐 던져놓은 그의 옷들. 그리고 사용한 콘돔 포장지와 찢어진 스타킹-…

 

"집이 좀 지저분하네."

 

커크의 말에도 칸은 별다른 대꾸가 없었다. 커크가 쓰레기들을 한 구석으로 대강 밀어놓는 동안 집안을 훑어보던 칸은 바닥에 펼쳐진 채 놓여있는 잡지를 집어 들었다.

그 모습을 본 커크는 터지려는 웃음을 가까스로 참았다. 성인 잡지를 들고 있는 칸이라니!

그러나 칸은 잡지의 내용물이 아니라 종이 재질의 잡지 그 자체에 관심이 있는 것 같았다. 흥미를 느끼는 표정이 분명했다.

 

"몇 권 더 있는데 줄까?"

 

커크는 이미 침실을 향해, 정확히는 침대를 향해-커크의 집은 꽤 넓긴 해도 기본적으로는 원룸이었다-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침대 아래로 기어들어간 커크가 낑낑거리며 묵직한 트렁크를 끌어내고 허리를 두드리며 몸을 일으켰을 때, 그는 말없이 자신의 뒤에 서있는 칸을 보며 흠칫 놀랐다.

 

"여기서 대충 골라봐. 전부 책이니까. 책이라기 보단 골동품들이지만."

"뜻밖이로군."

 

칸은 책으로 가득한 100Kg의 대형 트렁크를 가볍게 들어올렸다. 그 모습을 본 커크가 칸의 말을 이해하는 데에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그거 무슨 뜻인데?"

 

그러나 칸에게서 별다른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 천하의 제임스 티베리우스 커크에게 고서 수집 취미라니, 하나도 어울리지 않는다는 건 나도 알아. 커크는 테이블에 트렁크를 올려놓는 칸의 뒷모습을 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욕실로 들어가 버렸다. 곧 그가 부른 지원군이 올 것이다. 그 전에 간단하게 샤워라도 해둘 생각이었다. 예의 ‘지원군’이 커크에게 얼마나 호의적이든, 설령 무슨 일이 있어도 커크의 편을 들어줄 절대적이고 절친한 아군이라고 하더라도, 칸과 단 둘이 마주보고 앉아있도록 방치할 수는 없으니.

 

 

커크는 수건으로 머리를 대강 털어내며 욕실을 나왔다. 스며든 물기 탓에 셔츠가 몸에 달라붙었으나 찝찝하진 않았다. 따듯한 물로 샤워를 하자 몸의 긴장이 풀리고 노곤함이 몰려왔으나 커크는 눈을 빠르게 깜빡여 몰려오는 잠을 쫓았다. 시계를 보니 그가 곧 도착할 때가 되었다. 커크는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책을 넘기고 있는 칸을 보았다.

팔걸이에 팔꿈치를 기댄 채 가볍게 이마를 짚고 있는 칸의 자세는 무척 편안해보였다. 다리를 꼬고 앉은 채 무릎 위에 올려놓은 책은 흔들림 없이 안정적으로 놓여있었다. 종이로 만들어진 두꺼운 책이라는 건, 요즘 세상에선 어쩌면 평생 만져보지도 못하는 사람도 있을 터다. 종이로 만든 책을 넘기는 것에 익숙하지 못한 사람들은 책을 만지는 손길이 항상 어색하기 마련이었다. 커크는 칸의 모습을 지켜보며 그가 3세기 전의 사람임을 새삼 깨달았다. 묘한 위화감을 품고 있는 자였다.

기다리는 사람은 오지 않고 조용하고 어색한 시간만 흘렀다. 칸은 억지로 커크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사실 그는 커크를 향해 시선조차 돌리지 않았다. 소파에 편안하게 몸을 기댄 채 조용히 책에만 시선을 던지고 있을 뿐이었다. 그가 읽고 있는 책의 표지를 기웃거리던 커크는 밖에서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어서와, 본즈."

"무슨 일이야, 짐. 안 그래도 몇 년이나 지구를 떠나야하니 마음이 심란해 죽겠구먼."

"거기에 고민거리를 하나 더 얹어주려고."

"그건 또 무슨…"

 

커크는 맥코이를 집 안으로 끌어당겼고, 그가 문을 닫는 사이에 맥코이가 손에 들고 있던 가방을 툭 떨어트리는 소리를 들었다.

문의 자동 잠금 장치가 설정되는 동안에도 맥코이는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가만히 서있을 뿐이었다.

 

"저어기, 본즈?"

 

Dammit, Jim… 맥코이가 멍하니 속삭였다. 커크가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는 순간 맥코이는 커크를 향해 몸을 돌리고, 그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저 녀석이 왜 여기 있는 거야?"

"일단 진정해, 본즈."

"저 썩을 녀석이 왜 네 집 거실 소파를 차지하고 앉아서 리어왕을 읽고 있는 거냐고, 망할 자식아…!"

 

맥코이는 속삭이듯 쏟아낸 말이었으나 칸에게도 분명히 들렸을 것이다. 그러나 칸은 현관문 앞의 두 남자를 향해 어떠한 관심도 주지 않았다.

 

"일단 진정해봐, 본즈. 다른 사람들도 다 오면 한 번에 설명을…"

"또 누굴 부른 건데, 이 멍청이가! 이게 동네방네 떠들고 다닐 일이야?"

 

절묘하게도 그 순간, 초인종을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칸이 갈아입을 옷을 들고 욕실로 들어간 뒤, 커크는 소파와 테이블을 밀어버리고 거실에 둘러앉은 그의 크루들에게 대략적인 상황 설명을 해주고 있었다. 우후라는 스팍의 곁에서 그의 손을 꼭 잡은 채 욕실 쪽을 흘끗 바라보았다. 그의 연인이 갑자기 그녀를 불러내 지구인 남자가 입는 평상복과 생필품의 준비를 도와달라고 했을 때 까지만 해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꿈도 꾸지 못했다. 혹시 그들의 함장이 무슨 사고라도 쳤을까 어림짐작은 했지만…

술루와 체콥도 서로를 쳐다보며 말을 잊었고, 스카티는 입을 떡 벌린 채 커크를 멍하니 보았다. 킨저는 조용히 눈을 깜빡일 뿐이고, 맥코이는 체념한 얼굴로 절레절레 고개를 젓는다. 캐롤은 몸을 웅크린 채 두려운 기색으로 욕실 문을 응시했다. 그리고 스팍은 우후라의 손을 마주잡은 채 차분한 얼굴로 커크를 조용히 바라볼 뿐이었다.

 

"-그래서 그도 일주일 뒤에 엔터프라이즈호에 동승하게 될 거야."

"이, 이, 미친 함장놈!"

 

Fucking Crazy Captain!! 스카티가 커크를 향해 소리를 빽 질렀다. 커크는 그 말에 눈썹을 살짝 까딱였을 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맥코이는 한숨을 내쉬곤 커크를 향해 복잡한 심경이 담긴 시선을 던졌다.

 

"이미 저지른 일을 번복할 수는 없으니 그렇다고 치자. 네가 함장이 된 이래로 지난 4년 동안 친 사고 중에 이보다 더한 것도 수두룩했으니까. 3년? 4년? 얼마나 됐지? 느낌상으론 10년도 더 지난 것 같은데! 스캇, 일단 좀 진정해봐. 저저번 탐사 때만 해도… 아 생각해보니 새삼 열 받네. 개자식."

 

빠르게 중얼거리던 맥코이는 커크의 뒤통수를 한 대 후려갈기며 이를 뿌득 갈았다. 커크는 별다른 항의도 하지 못한 채 아픈 머리를 대충 문질렀다.

 

"내가 궁금한 건 딱 두 가지야. 하나, 대체 왜 저 자식을 그렇게 살리고 싶어 했는지. 그리고 두 번째는, 이제 어떻게 할 건지."

 

커크는 거실에 둘러앉은 그의 크루들을 천천히 둘러보고, 마지막으로 그의 일등 항해사에게 시선을 던졌다.

 

"난 작년에 죽을 뻔했어. 사실 거의 죽어버렸지. 그런데 칸의 혈청 덕분에 되살아났고. 그런 표정 짓지 마, 본즈. 너희들이 내 생명의 은인이지. 그건 확실히 알고 있어.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너희들만으론 날 되살릴 수 없었을 거야. 그렇지?"

 

본즈는 커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불만스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지금이 아니더라도 그의 얼굴은 항상 불만에 차있긴 했다. 커크는 그런 생각을 하며 명백한 그의 불쾌한 기색을 애써 무시하려했다.

 

"그런데 그가 재판조차 없이 사형선고를 당하는 꼴이 보기 싫었어."

"그럼 재판에 회부하라고 발의했으면 됐잖아!"

 

커크는 맥코이의 그 말에 반가운 기색을 내비쳤다. 금세 아무렇지 않은 척 시치미를 뗐지만, 그를 잘 아는 맥코이는 그의 표정을 금세 알아보았다.

 

"부당하잖아!"

"뭐가 부당한데!"

"냉동 캡슐에서 탈출한 게 군법재판이 열릴 만큼 막중한 죄야?"

"그야 보통은!"

"보통은?"

 

잠시 생각을 정리하던 맥코이는 한숨과 함께 씹어뱉듯 내뱉었다.

 

"…보통은 냉동 캡슐에서 탈출하는 일이 없지. 젠장."

 

그 자식은 테러범에 살인자에 배신자라고, 짐! 범죄자를 법정에 세우는 건 당연한 거야! 맥코이의 외침에 커크는 당당하게 대답했다.

 

"넌 뭔가를 착각하고 있어, 본즈. 그 테러와 살인과 배신에 대한 벌이 바로 냉동형이었어. 그가 저질렀던 일에 대한 벌은 이미 선고 된 다음이었다고."

 

맥코이는 잠시 커크를 바라보다가 스팍을 향해 휙 고개를 돌렸다. 그는 온 표정을 다해 소리 없이 외치고 있었다. 이 배신자 고블린!

 

"너지, 스팍?"

"질문에 목적어가 필요 이상으로 생략되어있습니다. Dr.맥코이."

"짐이 저렇게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는 말을 생각해낼 수 있을 리가 없어. 네가 짜준 레퍼토리겠지, 스팍?"

"나름대로 논리적인 추측이군요. 결론만 말씀드리자면, 옳은 결론을 도출해내셨습니다."

"아, 정말 돌아버리겠군. 너까지 정신을 놔버리면 어쩌자는 거야!"

"납득할 수 없는 발언입니다, Dr.맥코이. 전 지금 제 상태를 정확히 인지하고 있으며 지극히 이성적입니다."

"그런데 왜 저 자식의 말도 안 되는 장단에 맞춰주고 있는 건데?"

"어차피 저희들 중 그 누구도 그를 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말에 맥코이는 허탈한 웃음소리를 흘렸다. 그 말은 맞다. 엔터프라이즈의 그 누구라도, 커크가 저렇게까지 고집을 피운다면, 결국은 그의 말을 들어줄 수밖에 없다. 그것이 그들의 함장에 대한 깊은 애정이었고, 몇 년 동안 쌓인 신뢰의 정도였다.

 

"그래, 좋아. 좋다고. 이 질문은 이제 됐어. 이제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도 될까? 이의 없지? 그래, 사실은 이게 진짜 중요한 문제야. 이제부터 어떻게 할 생각이야? 저 살아 움직이는 흉기 같은 자식을 어떻게 다룰 셈인데?"

 

그 말에 커크는, 오늘 했던 그 어떤 대화보다도 빠르게 답을 내놓았다.

 

 

"그러게. 어떻게 하지?"

 

 

문제는, 그것이 너무나 커크다운 대답이었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설정해보자면, 생도 시절의 제임스 커크.

 

Dammit! 맥코이가 혀끝에 걸린 욕설을 내뱉으려 할 때였다.

 

"그 질문엔 아주 모범적인 답안이 준비되어있을 텐데."

 

냉랭한 목소리가 들렸다. 거실에 둘러앉아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돌아갔다. 욕실에서 나온 칸은 젖은 머리를 대충 쓸어 넘긴 채 청록빛 눈동자로 그들을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었다. 언제부터 그 자리에 있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아무도 그의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일순 넓은 집안에 긴장을 동반한 적막이 감돌았다.

 

"너희들은 이미 내 치명적인 약점을 알고 있다. 그렇지 않은가, Mr.스팍?"

"약쩜? 그게 먼떼요?"

 

체콥은 잔뜩 주눅이 든 채로도 용케 입을 열었다. 그의 질문은 스팍과 커크를 향해 있었으나, 대답한 것은 칸이었다.

 

"내 가족… 나의 동료들."

 

My crew……. 중얼거리는 칸의 목소리는 속삭임에 가까웠으나, 그와 제법 거리를 둔 채 앉아있는 사람들의 귀에 무척 선명하게 들려왔다.

 

"72명의 내 동료들은 스타플릿의 연구소 안에 남아있지. 너희들은 그들을 인질로 잡고 나에게 충성을 요구하면 되는 거야. 아주 명확하고 간단한 해결책이지. 그렇지 않나?"

 

칸은 얼굴 가득 신랄한 비웃음을 띠고 있었다. 너희들은 그저 그런 놈들일 뿐이다. 불신이 가득 담긴 그 웃음에 커크는 마음이 착잡해졌다. 이건…, 그러니까, 그가 처음 만났던 스팍보다도 훨씬 심하다.

평범한 검은색 셔츠와 바지를 입고, 벽에 비스듬히 기대어있을 뿐인데도, 칸은 그들의 목에 페이저를 들이밀고 목숨을 위협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가 현재 비무장상태라고 하더라도 큰 의미는 없었다. 그는 맥코이의 비유대로 존재 자체로서 하나의 흉기인 존재였다. 그는 맨 손으로 두개골을 아작 낼 수도, 목을 부러트릴 수도 있다.

 

"그 뒤에 당신의 손에 두개골이 으스러져 죽으면 된다는 말인가요?"

 

캐롤이 가시 돋친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의 눈에는 공포와 혼란이 어렸다. 그녀의 무릎을 부러트리고 그녀의 눈앞에서 그녀의 아버지를 살해했던 남자의 눈은, 꼭 상어를 닮았다.

 

칸은 그녀를 향해 가소롭다는 시선을 보냈을 뿐, 별다른 대답은 하지 않았다. 커크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찌되었든, 치프들은 결국 그의 결정에 동의해주었다. 적어도 오늘은, 그 사실에 만족해야할 듯 했다.

AND

*칸커크.

*스타트렉은 전혀 본 적 없음. 딱 [스타트렉/다크니스] 한 편 보고, 이틀정도 네이버 검색으로 공부하고 망상글 쓰는 것이니 캐릭터 붕괴, 원작 붕괴, 원작 설정 붕괴 주의. 비긴즈도 본 적 없음.

 

[My Crew]

1. 우주는 아름답다.

    -우주는 어둠이 아니라, 어두운 빛의 공간인 것이다.

 

 

5년. 이제 일주일 뒤면 그는 우주로 떠나는 엔터프라이즈호에 몸을 실을 것이고, 그리고 5년 동안은 지구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우주는 아름답다. 우주의 어둠은 색을 품고 있다. 오색가지로 찬란히 빛나는 빛들이다. 어둠이 아니라, 어두운 빛의 공간인 것이다.

커크는 바의 한 구석을 차지하고 앉아 술을 들이키는 중이었다. 요 며칠간은 끊이지 않는 송별회들의 연속이었다. 지구인들에게 제임스 커크는 우주의 영웅이었고, 그의 친구들을 제외하고도 그를 좋아하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았다. 우주로 가기 전의 마지막 보름을, 그는 화려함 속에 파묻혀있었다. 친구들이 사주는 술과, 예쁘고 매력적인 아가씨들. 그리고 곧 떠날 긴 여행과 모험에 대한 설렘. 꽤 즐겁고 평화로운 날들이었다.

그의 통신기가 울리기 전까진.

 

“여보세여어.”

“함장님?”

“오, 스팍……. 아 좀 꺼져봐, 새끼야. 나 지금 통화 하는 거 안보여? 응, 구래에……. 무슨 일이야, 스팍?”

 

커크가 술에 취해 자신의 목에 팔을 감으며 크게 웃어대는 친구 하나를 밀쳐내며 욕설을 내뱉었다. 그 역시 상당히 술이 올라 한창 이분이 좋아지던 참이었다. 통신기 너머에서 스팍의 한숨소리가 들렸다.

 

“긴급회의가 소집되었습니다. 당장 와주셔야겠습니다, 함장님.”

“긴그읍? 또 무슨 일이 벌어진 건데 그래? 난 이미 퇴근한…….”

“존 해리슨.”

 

스팍은 냉랭한 목소리로 짧게, 흔하디흔할 이름을 발음했다. 존, 리처드, 해리슨. 그 어느 음절도 개성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이름들이다. 그러나 커크에게는, 아니었다.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등골이 오싹해지며 술이 순식간에 깨었다.

 

“자세한건 직접 만나서 이야기해드리겠습니다. 그럼……. 모쪼록 서둘러주십시오, 함장님.”

 

통신이 끊겼다. 커크는 멍하니 앉아 있다가 자신의 앞에 놓여있던 잔을 움켜쥐었다. 잔 안에 반쯤 담겨있던 술을 목구멍으로 쏟아 부었다. 화끈한 느낌은 있었으나, 술에 취하지는 않았다. 취할 수가 없었다.

커크는 동석했던 이들에게 대강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말을 흐리며 재빨리 술집을 빠져나왔다. 그가 그의 일등항해사 스팍의 얼굴을 마주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평소 그가 소요하던 시간의 절반도 채 되지 않는 듯 했다.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건물 내부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러나 커크는 평소와 비슷한 소란과 활기 속에서 유난이 굳은 분위기를 풍기는 얼굴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와 같은 지위를 가진 자들. 커크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멀리에서 스팍이 빠른 걸음걸이로 그를 향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스팍. 그게, 무슨 소리야? 그…….”

“여기서 이야기를 할 사항은 아닙니다, 함장님. 듣는 귀가 많습니다. 일단 데이스트롬으로 가시죠. 가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커크는 고개를 끄덕이며 승강기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새벽이 가까워지는 시간에 승강기를 사용하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오늘도 마찬가지여서, 커크는 스팍과 단 둘이 승강기에 오르고 문이 닫히자마자 급히 다그쳐 물었다.

 

“칸에 대한 사항이라고? 그는 벌써 일 년 전의 범죄자야. 그런데 이제 와서 그에 대한 처우를 논하기라고 한다는 거야?”

“그게 아닙니다, 함장님. 그가…….”

 

스팍은 층계 버튼을 누르며 커크를 보았다. 커크의 새파란 눈동자에 얼핏 복잡한 감정이 담긴 것이 보였다. 주된 감정은 혼란스러움이었으나, 그의 오묘하고 세세한 느낌까지 파악하기엔, 그는 절반이나마 벌칸이었다.

 

“깨어났습니다.”

“뭐? 깨어나다니, 설마, 칸? 칸, 그자가 깨어났다는 건가?”

“예. 함장님.”

 

스팍의 대답에 커크는 입을 떡 벌렸다. 그가 들쑤셔놓은 도시는 아직도 복구 중이었다. 그의 사람들을 잃었다는 상심 하나만으로, 드레드노트 급 전투용 함선으로 샌프란시스코를 갈아엎어버릴 마음을 품을 수 있는 자.

게다가 그는, 그 계획을 실제로 실행으로 옮길 수도 있는 악몽 같은 자다. 어떤 미친놈이 무슨 원대한 계획을 품은 채 그를 깨울 생각을 하단 말인가? 하물며 존 해리슨의 해동-해동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니 그가 무슨 냉동 피자라도 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잠시 웃겼다-에 대한 그 어떤 안건도 보고된 적이 없……. 커크의 생각이 거기까지 닿았을 때, 커크를 물끄러미 지켜보던 스팍은 커크가 갑자기 벌렸던 입을 다무는 것을 보았다.

 

“누가 그를 풀어 준거지, 스팍?”

“…….”

“누구도 그를 자기 멋대로 되살려낼 수는 없잖아. 그는 최고 레벨의 위험인물이라고!”

“아무도 그를 풀어주지 않았습니다.”

 

승강기는 아무런 덜컹거림도, 소음도 없이 매끄럽게 상승하고 있었다. 커크가 스팍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짓자 스팍은 부연설명을 덧붙였다.

 

“저도 정확히는 알지 못합니다만……. 그자가 자력으로 극저온 보존 장치를 탈출했다고 합니다. 현재 그는 구금실에 격리되어있으며, 어떤 진정제도 그에게 듣지 않는다고 하고요. 제가 파악한 것은 이게 전부입니다.”

 

맑은 소리가 흐르며 승강기의 문이 열렸다. 스팍과 커크는 승강기에서 내리는 도중에도 데이스트롬으로 하나둘 모여들고 있는 함장들과 그들의 일등항해사들을 볼 수 있었다. 아직 영문을 파악하지 못한 사람이 서너 명. 그리고 딱딱하게 굳은 표정의 대다수. 커크는 누군가 그의 뒤를 스쳐지나가며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런 괴물은 진작 폐기했어야 했어…….

그들이 데이스트롬에 각기 자리를 잡고 앉았을 때, 마지막 한 사람의 입장과 함께 데이스트롬의 문이 굳게 잠겼다. NX-01 엔터프라이즈호의 함장이었던 조나단 아처는 원수 급의 간부였으나 기꺼이 몸소 긴급회의에 참석하겠노라 뜻을 밝혔다. 아직 마커스 제독의 후임이 확정되지 않은 탓에. 내부적으로 대대적인 인사이동과 개편을 시행하기엔, 스타플릿은 너무나 바빴다. 반파된 도시와 수많은 사상자들이 빠른 속도로 수습된 것은 정부기관 뿐 아니라 스타플릿 역시 총력을 기울여 도시 복구에 힘썼기 때문이었다.

 

“급박한 사안이니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겠네. 다들 대략적으로는 상황을 파악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네만…….”

 

아처가 자신의 자리로 걸어가는 동안 각자 의자를 하나씩 차지하고 앉은 함장과 일등항해사들의 앞에는 푸른 스크린이 떠올랐다. 폐쇄회로카메라의 영상처럼 보이는 화면 속에는, 커크의 눈에 비교적 익숙한 물건들이 보였다. 73개의 냉동캡슐들.

영상 속 당직 기술자는 졸린 눈을 비비며 기지개를 켜더니, 책상 위에 올려두었던 컵에 물을 채우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웠다. 화면 속에는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73개의 극저온 보존 장치들과, 그 장치들을 관리하는 컴퓨터. 그런데 기술자가 자리를 비우고 채 30초도 지나지 않아 갑작스레 경보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아주 우연한 사고였네. 극저온 보존 장치들을 제어하는 메인 시스템에 아주 작은 오류가 생겼지.”

 

영상에선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요란한 경보음이 울린 것이 분명했다. 채 10초도 지나기 전, 기술자는 컵까지 내던진 채 컴퓨터 앞으로 뛰어 돌아왔다. 그리고 급히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어쩌면 요란한 사이렌 소리에 가려졌기에, 그 기술자는 아무런 소리도 듣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영상을 지켜보는 커크의 눈이 커졌다. 이 방 안에 앉아있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의 표정에 놀라움이 어렸다.

영상 속에서, 73개의 극저온 보존 장치 중에서 단 하나의 장치에, 변화가 있었다. 기술자가 컴퓨터 화면에 정신을 쏟고 있는 동안, 보존 장치의 모양이 점차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내부에서 강한 힘으로 타격하고 있다는 것이 너무나 분명한 모양새였다. 장치의 표면이 툭툭 불거져 나오고 있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보존 장치의 유리 부분이 깨지며 남자의 팔이 불쑥 튀어나왔다. 기술자가 시스템의 오류를 전력으로 찾아내어 고치는 데 걸린 시간은 단 30초뿐이었다. 놀라울 정도로 빠른 대응이었다. 이정도면 극저온 보존 장치에는 별다른 영향이 가지 않을 것이다. 물론 내일 아침 보고 때에는 상사에게 왕창 깨지긴 하겠지만.

그렇게 생각하며 뒤를 돌아본 당직 기술자는, 누군가가 인위적이고 무자비한 힘으로 찌그러트린 극저온 보존 장치 한 기와, 바닥에 쓰러져있는 검은 머리의 사내를 발견하고 비명을 질렀다. 그는 정신없이 비상벨을 누르며 경비를 호출했다…….

 

“이게 사실입니까? 조작된 영상이 아니고요?”

“그 판단은 스스로 해보게.”

 

한참의 침묵 끝에 나온 질문과, 곧바로 떨어진 대답. 그리고 또다시 침묵이 이어졌다. 함장과 일등항해사들의 얼굴을 찬찬히 둘러본 아처는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영상을 통해서 보았듯이……. 조금 전, 극저온 보존 장치의 관리 시스템에 문제가 생겼네. 아주 작은 오류였고, 담당자의 적절하고 신속한 대처로 시스템이 정상화될 때까진 40초……, 정확히 39.713초가 걸렸다고 하네.”

 

커크는 멈춰진 영상을 다시 재생시켰다. 무장한 경비들이 방으로 들어오고, 바닥에 쓰러진 남자에게 기절 모드의 페이저건을 들이댄다. 그리고 아직 혼수상태로 보이는 남자를 제압하고 구속해서, 방에서 끌고 나간다…….

 

“그는 시스템 오류가 발생한 뒤, 10초도 되지 않아 의식을 되찾았고, 자력으로 장치에서 탈출하기까지 단 30초……. 어떤 냉동인간도 저런 식으로 깨어날 순 없어. 깨어나는 순간 목숨을 잃는 것이 정상이지. 하지만 저 자는 지금 놀라울 정도의 회복력을 보이고 있네.”

 

화면이 넘어갔다. 또 다른 영상이 출력되고 있었다. 구금실로 보이는 방 안에는 예의 그 남자가 의자에 앉아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화면은 구금실의 폐쇄회로 카메라와 직접 연결되어있네. 현재 그가 갇혀있는 구금실을 그대로 비춰주고 있다는 말이야. 믿겨지나? 단 세 시간 전에 자신의 손으로 냉동 캡슐을 부수고 탈출한 자라는 것이.”

 

회의실 내부에는 적막이 감돌았다. 여러 사람의 숨소리와, 간간히 침을 삼키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아처는 담담한 말투로 말을 맺었다.

 

“이 자가 바로 존 해리슨이네. 자네들이 급히 소집된 이유이기도 하지. 이 자를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커크는 화면 속의 남자를, 존 해리슨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조각해놓은 듯 아무런 변화 없는 표정과 반듯하고 각이 잡힌 자세는 기억 속의 그 모습 그대로였다. 창백한 낯빛도 달라지지 않았다.

 

"저항의 기미는 보이지 않습니까?"

 

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커크의 귀에 누군가의 질문이 들려왔다. 순간 커크는 시선을 느끼고 옆을 돌아보았다. 스팍이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커크는 장난스럽게 한쪽 눈썹을 치켜보였으나 스팍의 굳은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이미 이어질 상황이 전부 시뮬레이션 된 모양이었다.

 

"보다시피 아직은 어떠한 저항도 하지 않았네. 냉동장치에서 깨어난 직후에 곧바로 구금실에 격리되었으니 아무런 상황도 파악하지 못한 것이지. 무작정 날뛰지는 않을 걸세. 어리석은 자는 아니니까."

"그렇다면 스타플릿 내부의 상황과 대략적인 정세를 파악한 뒤엔 언제든지 다시 날뛸 수 있다는 것 아닙니까? 이런 회의를 소집할 것도 없었습니다. 저런 극악의 위헌인물은 법정에 세울 것도 없지요. 당장 사형시켜야합니다."

 

커크는 그의 목소리가 어쩐지 낯이 익는다고 생각했다. 그런 괴물은 진작 폐기했어야 했어……. 그 목소리다. 커크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발언중인 사내를 보았다. 삼십대 후반으로 보이는 사내, 약 반 년 전, 새로이 임명된 함장이다. 커크는 아직 그의 이름을 몰랐다.

 

"그를 사로잡았을 때 애초에 얼릴 것이 아니라 죽였어야 했습니다. 그자가 파괴한 도시는 아직도 완전히 복구될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의 테러로 목숨을 잃은 사람이 몇이고, 땅에 떨어진 스타플릿의 명예와 신뢰는 아직 회복되지도 않았습니다. 그가 저 장치 안에서 깊은 잠에 빠져있을 때에도 그를 폐기할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고요……."

 

그 말에 커크는 괜스레 울컥하는 기분이 되었다. 그는 낮은 목소리를 내었다. 으르렁거리는 듯 한 소리가 났다.

 

"그건 폐기가 아니라 사형이라고 하는 겁니다, 대령."

 

아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커크를 보았다. 엔터프라이즈의 함장… 아처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

 

"다른 사람들의 의견은 어떤가. 기탄없이 말해보게."

 

발언의 기회는 공평하게 주어졌으나 대부분의 의견은 비슷했다. 그를 당장 죽여야 한다. 그래도 재판을 열어 정당한 심판을 받게 해야 한다. 그의 유전자 정보와 능력, 그리고 그만의 재생력이 가진 가치를 고려한다면 다시 냉동시키는 것이 좋다……. 자신의 의견을 밝히지 않은 함장은 커크 뿐이었다. 아처는 커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고, 자연스레 모든 사람들의 시선도 커크에게로 향했다. 그러나 커크는 당황하지도 주눅 들지도 않았다. 그는 당당한 표정으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전 그를 이대로 살려두자는 쪽입니다."

 

스팍은 이미 그의 대답을 예상하고 있었던 듯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커크는 스팍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놀라거나 경악에 찬 표정을 짓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그 순간 커크는 아처가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인자한 표정을 짓고 있는 듯 했다.

 

"그를 살려두자고요? 일 년 전의 테러를 다시 겪자는 겁니까?"

 

그 질문엔 커크가 아닌 스팍이 대답했다.

 

"아니오. 다시는 겪지 않기를 바라는 겁니다."

 

커크는 놀란 눈으로 스팍을 보았다. 칸에 대한 문제에 있어서, 그는 결코 우호적이지 않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에.

 

"우리 중 그 테러를 막을 수 있는 힘이 있는 자가 있었습니까? 제가 결국 그를 제압하기는 했었지만 당시에도 저는 목숨을 걸어야 했으며… 저 혼자만의 힘으로는 그를 제압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단 한 명의 손에 도시가 부서지는 모습을 무기력하게 지켜보기만 했습니다. 아무도 그를, 그의 테러를 막을 수 있는 힘이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표정에 불쾌함이 떠올랐다. 스팍의 발언은 그들의 자존심을 심하게 건드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가능합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스팍 중령?"

"말 그대로입니다. 스타플릿이 대응할 수 없는 적. 혹은 큰 희생과 힘을 필요로 하는 적에게, 그는 대응할 수 있습니다."

"스타플릿은 군사기관이 아닙니다!"

"적에겐 그 사실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스타플릿이 군사기관이든, 연구기관이든, 심지어 학생들이 다니는 평범한 학교라고 하더라도. 적에게 중요한 것은, 지배하거나 빼앗을 가치가 있느냐. 그것뿐입니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스타플릿이 지금껏 성장해온 데에는 스파플릿 자체의 병력이 우수하거나 뛰어난 방어 시스템이 존재하기 때문이 아니라……, 아직까지 큰 공격을 받은 일이 없다는 기적덕분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존 해리슨은 압도적인 힘을 가지고 있고, 그를 따르는 자가 일흔 명을 넘어갑니다. 그들의 우두머리인 존 해리슨은 그 일흔두 명을 완벽히 통제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며, 그를 죽이는 것은 잠정적으로 스타플릿의 소유가 될 수도 있었던 커다란 병력의 손실을 뜻하게 됩니다."

"우리의 힘으로 지금껏 잘 해왔고, 커다란 위기도 몇 번이나 넘겼습니다. 새삼 새로운 위험부담을 끌어안아야 하는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변화 없이는 번영도 없기 때문입니다, 대령님."

 

존 해리슨의 폐기를 운운하던 남자는 입가에 비웃음을 띠었다.

 

"전 지금까지 벌칸은 지극히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종족이라고 알고 있었는데요."

 

그러나 스팍은 그의 모욕에 아무런 반응도 내보이지 않았다. 지금까지와 같은 억양으로 빠르게 말을 맺을 따름이었다.

 

"전 지극히 논리적인 판단에 따라 발언하고 있습니다, 대령님."

"변화 없이 번영은 없다? 그것이 그렇게 논리적인 논리인줄은 몰랐군요."

"아니오. 전 논리적이고 객관적으로 저의 함장에 대한 판단을 내렸을 뿐입니다."

 

스팍에게 집중되었던 시선이 일제히 커크에게로 향했다. 커크는 저의 함장-my captain-이라는 스팍의 어휘 선택에 괜스레 뿌듯함과 민망함을 느끼는 중이었다.

 

"커크 대령님 본인의 의견이 분명한 이상, 대령님은 어떤 이유로든 존 해리슨의 사형을 납득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납득하지 못하는 명령에 순순히 따를 인물도 아니고요. 그렇다면 그는 반드시 위험을 무릅쓰려 할 것이고, 이는 함장님님과 엔터프라이즈호의 안전 문제에도 직결될 수 있습니다. 저의 함장을 설득하는 것보단 여러분 전체를 설득하는 것이 차라리 가능성이 높을 정도니까요."

 

사람들의 얼굴에 미묘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러나 스팍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제 개인적인 생각까지 직속상관도 아닌 대령님께 보고해야 할 의무는 없으나 대령님의 질문을 답을 요구하시는 군령으로 해석하여 보고 드린 것이니 그런 의도가 아닌 질문이었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이해가지 않는 부분이 있으십니까?"

 

스팍을 노려보는 함장의 눈빛에 짜증이 어렸다. 그러나 아처는 더 이상 회의가 산만해지도록 방치하지 않았다. 약한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으며 주의를 끈 아처는 커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니 자네의 의견은, 존 해리슨을 스타플릿의 일원으로 받아들이자는 뜻인가?"

"그는 원래부터 스타플릿 소속이었습니다. 적어도 마커스 전 제독이 그를 발견한 뒤부터, 1년 전까지는 말입니다."

 

커크는 퉁명스레 대답을 하며 회의실 안을 둘러보았다. 커크에게 절대로 호의적인 분위기는 아니었다. 존 해리슨의 사형을 강력히 주장하던 예의 대령은 입을 다물고 있었으나, 또 다른 남자가 입을 열었다. 그의 직급을 보아하니, 누군가의 일등항해사인 모양이었다.

 

“그를 무슨 수로 아군으로 포섭한다는 말입니까? 그리고 만일 그를 회유하는 데에 실패한다면, 또다시 커다란 희생을 치러야만 할 것입니다. 이번에야말로 도시가 전부 날아가 버릴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스팍의 발언에 마음이 솔깃한 이들도 분명히 있었다. 확신에 찬 벌칸만큼 설득력 있는 근거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다음이 문제였다. 커크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스팍을 보았으나 스팍은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커크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느라 몇 사람이 서로 눈빛을 교환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저희들은 그 한 사람을 위해 쏟아 부을 자본도, 여유도 없습니다. 현재 도시 재건만 해도 힘에 부치는 상황이고, 5년 탐사 계획의 시작도 일주일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

 

그 말에 커크의 머릿속을 번쩍 스치는 아이디어가 있었다. 아마… 본즈에게 된통 혼나고 스카티에게는 몇 대 맞게 될지도 모르겠지만. 그러나 묘한 확신이 들었다. 아마도 존 해리슨-, 아니, 칸은…….

 

"제가 맡도록 하겠습니다."

"함장님?"

 

스팍은 절도 있는 동작으로 고개를 돌려 커크를 보았다. 그러나 커크는 확신에 찬 표정으로 방 안의 사람들을 보고 있었다.

 

"말씀하신 5년 탐사 계획은 저의 임무입니다. 일단 지금 이곳에서 구두로 인력 증원을 요청합니다. 후에 정식으로 서류를 제출하지요. 존 해리슨을 제가 맡도록 하겠습니다."

"그게 진심입니까, 커크 대령?"

 

스팍은 커크에게 질문하는 남자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섞여있는 것을 눈치챘다. 이건 어쩌면 함정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커크는 스스로 떠올린 기가 막힌 아이디어에 집중하고 흥분하느라 그 기색을 눈치 채지 못한 듯 했다.

 

"만일 우주에서라면 그가 폭주한다고 하더라도 또다시 3백만 명의 인명피해를 입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리고 엔터프라이즈호는 벤전스호와는 달라서 그 혼자의 힘으로는 운행할 수도 없으니 그가 제멋대로 우주선을 탈취하여 테러를 감행할 수도 없고요."

"그자가 5년 뒤에 지구로 귀환하고 나서도 위험한 생각을 품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있습니까?"

"자그마치 5년입니다. 그가 아무리 철저한 인간이라고 하더라도 그 긴 시간동안 수백 명의 선원들을 모두 속일 수는 없을 겁니다. 탐사 경과보고와 더불어 존 해리슨에 대한 관찰보고 역시 정기적으로 이루어진다면 만족하시겠습니까?"

 

마커스의 사망은 스타플릿 내부에 큰 혼란을 가져왔다. 혼란은 곧 더없는 기회이기도 했다. 안정된 조직에선 꿈도 꿀 수 없는 권력과 출세의 기회였다. 젊은 나이의 영웅 제임스. T. 커크는, 그가 권력에 관심이 없다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꽤 눈에 거슬리는 존재였다.

실패할 가능성이 높은, 혹 그의 목숨까지도 앗아갈 수 있는 일이다. 그런 일을 스스로 떠맡으려한다는 것은, 커크를 못마땅해 하는 이들에게는 제법 솔깃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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