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질하는 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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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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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트렉/My Crew'에 해당되는 글 9건

  1. 2016.09.09
    [칸커크] My Crew - 9. 진통제 6
  2. 2016.08.25
    [칸커크] My Crew - 8. 제임스. 1
  3. 2015.12.18
    [칸커크] My Crew - 7. 항생제
  4. 2015.12.16
    [칸커크] My Crew - 6. 실전의 가르침
  5. 2015.12.15
    [칸커크] My Crew - 5. 잠입과 배신과 인질
  6. 2015.12.14
    [칸커크] My Crew - 4. 200년 전의 기술
  7. 2015.12.11
    [칸커크] My Crew - 3. 함장. 멍청한 함장.
  8. 2015.12.09
    [칸커크] My Crew - 2. 목줄을 맨 개
  9. 2015.12.08
    [칸커크] My Crew - 1. 우주는 아름답다. 2

*칸커크

*리부트 스타트렉 영화만 감상한 뒤 쓰는 날조글입니다. 캐릭터 붕괴, 원작 붕괴, 원작 설정 붕괴 주의.

*필자의 칸 편애 주의. 칸 보고 싶어서 쓰기 시작한 글이라 어쩔 수가 없습니다.

 

[My Crew]

9. 진통제

  - 이건 결국 당신에 관한 일이니까. 너에 관한 일들 중 내게 쉬웠던 것은 단 한 가지도 없었어, 제임스.

 

"허억..!"

 

커크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이불이 답답하게 몸을 휘감고 있었다. 커크는 땀에 젖은 이마를 손등으로 대충 닦아내며 숨을 몰아쉬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커다란 개, 굶주림, 하얀 옷을 입은 사람들, 더위, 사막, 두통, 두려움, 그밖에 온갖것들이 뒤엉키며 빠르게 기억 속에서 사라져갔다. 분명 괴로운 악몽이었으나,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젠장, 과음 한 것도 아닌데.."

 

커크는 중얼거리며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항해는 한 달을 넘어서고 있었으나, 그동안 발견한 것은 이미 연방의 데이터베이스에 등록되어있는 행성들과, 지적 생명체가 살지 않는 몇 개의 소행성뿐이었다. 탐사하기 위해 내려갔던 행성에선 모래폭풍을 만나 사흘정도 조난당하거나, 미확인 생명체에게 공격당하거나, 식물과 토양 샘플을 채집하기 위해 내려갔던 행성에서 정체모를 박테리아에 감염되어 이틀가량을 메디컬 베이에 감금되다시피 맥코이에게 붙잡혀있거나.

커크는 결코 선원들에게 탐사를 맡겨만 두지 않았다. 늘 자신이 직접 행성으로 내려갔고, 행성을 직접 탐사하려 했다. 그와 함께 탐사에 나서는 대원들이 늘 고정된 것은 아니었지만, 칸은 높은 확률로 탐사대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나마 칸이 말을 듣는 척이라도 해주는 것은 커크뿐이라는 단순한 주장이었으나, 대부분의 선원들은 그에 납득한 듯 했다. 그들은 지구인보다 세 배는 뛰어난 능력을 가졌다는 벌컨을 제압하는 칸을 보았다. 커크도, 스팍도 없는 함선에 칸만을 남겨둘 수는 없었다.

미확인 행성의 탐사는 늘 미지의 위험을 수반했고, 스팍과 칸이 가진 인간 이상의 능력은 닥쳐온 위기를 벗어나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다. 스팍의 조언을 따라 위기를 벗어난 것도 여러 번, 칸이 그들의 목숨을 구한 것도 여러번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칸과 스팍은 여전히 삐걱거렸고, 맥코이의 투덜거림과 잔소리는 커크를 괴롭혔고, 비슷한 일상은 반복되었다.

한 달 전의 몸싸움으로 칸은 더더욱 엔터프라이즈에서 고립되었지만, 스스로는 크게 신경 쓰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는 대부분의 명령에는 복종했지만, 어떤 명령에는 여전히 불복했으며, 누군가에게 호의를 사려는 성의도 노력도 보이지 않았다. 다른 세상의 사람인 양 구는 그에게 스스럼없이 다가가는 것은 스카티와 커크 정도였고, 최근엔 맥코이마저 그 대열에 합류한 참이었다. 맥코이는 벌칸이 아니기에, 커크는 혹여 그의 빈정거림이 칸의 신경을 건드리진 않을까 걱정했으나 칸은 맥코이에게 딱히 신경을 쓰는 듯 보이지는 않았다.

따분하고 골치가 아픈 나날들이 반복됨에, 잠들기 전에 딱 한 잔을 걸친 것뿐인데. 실컷 마시기나 했으면 억울하지나 않을 것을, 괜히 꿈자리만 사납고 기분 나쁜 두통이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커크는 짜증스레 이불을 발로 차 걷어냈다. 숨통을 옥죄듯 몸을 칭칭 감아버린 이불은 잘 풀리지도 않았다.

 

대충 샤워를 하고나니 찝찝한 기분은 적당히 씻겨 내려갔다. 그러나 뭉근한 두통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숙취가 생길 정도로 독한 술도 아니었는데, 아무래도 몸이 피곤한가 싶었다. 맥코이에게 적당히 둘러대고 진통제라도 얻어 볼까 고민했던 커크는 문득 칸의 방에 생각이 미쳤다. 칸의 방에 있던 작은 상자를 떠올린 것이다. 그 안에는 항생제와 진통제를 비롯한 각종 약품들이 가득 들어있었고, 커크의 관심 밖에 있을 화학약품이나 전문 의약품도 섞여있었다. 맥코이에게 폭풍 같은 잔소리를 듣느니, 일단 칸에게 한 번쯤 들려보자 싶었다.

지구와의 시차는 따로 계산을 해봐야 알 수 있을 테지만, 엔터프라이즈의 내부는 따지자면 이른 아침이나 다름없었다. 쿼터 밖은 한산했고, 커크는 자신의 쿼터에서 나와 칸의 쿼터 앞에 도착할 때까지 그 누구도 만나지 못했다.

 

". , 나야. 들어가도 될까?"

 

커크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벽에 이마를 기댔다. 서늘한 온도에 아주 잠시나마 두통이 잦아드는 듯 했다. 숨을 깊게 내뱉자 뇌를 휘젓고 있는 통증이 숨에 섞여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더운 숨이 흘러나왔다.

곧 문이 열리고, 머리카락 한 올 흐트러지지 않은 칸의 모습이 드러났다. 커크는 문에서 살짝 비껴나 벽에 이마를 댄 채 기대어 있었지만, 칸은 주변을 둘러보지도 않고 곧바로 커크를 발견하고 쳐다보았다. 아직 흐릿한 푸른 눈동자와 서늘하고 냉담한 청록색 눈동자가 서로를 마주보았다.

 

"무슨 일이지, 함장."

", 일단 들어가자. 본즈한테 들켜서 잔소리 듣긴 싫어."

"닥터 맥코이를 말하는 거라면, 그가 이쪽 방향으로 오가는 일은 거의.."

", 됐으니까. 나 머리 아프다고. 길게 떠들 정신도 없어."

 

칸은 커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몸을 틀어 공간을 만들었다. 커크가 그의 옆을 지나쳐 방으로 들어가는 동안, 커크는 서늘한 냄새를 맡았다. 칸과 스팍이 싸웠던 그날 이후로 칸의 방을 찾았던 적이 없는 커크는, 칸의 방을 둘러보다가 멈칫하고 말았다. 책 몇 권이 흩어져있을 뿐이었던 칸의 책상위에 가득한 것은 맥코이가 이따금 만지던 정밀도구와 온갖 화학식이 적혀있는 패드들이었다.

 

"이게 다 뭐야?"

 

커크는 칸이 나눠진 작은 상자 안에 들어있는 투명한 앰플 하나를 집어 올렸다.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은 검붉은 색의 액체였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새삼스럽게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설마 이거 다 네 피야?"

"그래."

 

칸은 문을 닫고 그 문에 기대어 섰다. 벽이 흰 탓인지, 단정히 갖춰 입은 검은 셔츠가 유독 도드라졌다. 커크는 손바닥 위로 앰플을 도르륵 굴려보았다. 약간의 점성을 가진 혈액이 앰플 안에서 출렁이는 것이 보였다. 상자 안에는 열 개는 족히 넘어 보이는 앰플들이 열을 맞춰 세워져있었다.

커크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앰플과 기구들을 기웃거리는 모습을, 칸은 조용히 지켜보았다.

 

"그런데 이거 본즈가 쓰던 것 같은데."

"맞아. 닥터 맥코이가 제공해준 물건이다."

"본즈가? ? 너희 둘 사이 별로 안 좋지 않았어?"

 

칸은 문에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켜 커크를 향해, 정확히는 책상을 향해 다가갔다. 칸이 가까이 다가올수록, 커크는 조금 전 방에 들어오면서 맡았던 것 같은 서늘한 향을 다시 느꼈다. 시원함이나 청량함과는 다른 감각이었다. 묵직하고, 날카롭고, 매캐할 만큼 맵고 답답한 냄새. 커크는 콧등을 조금 씰룩였으나, 별다른 내색을 내비치진 않았다. 적어도 스스로는 그렇게 생각할 수 있을 만큼 노력했다.

 

"내 몸에 적용된 기술은 이미 300년 전에 사장된 것이니까. 아무리 기술이 발전했어도, 근래의 인간이 모든 것을 밝힐 수는 없을 거다. 닥터 맥코이는 내가 가진 유전자의 특이점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지만, 그 역시 기술적인 한계에 부딪혔지. 기술적이라는 말은 어폐가 좀 있군. 말하자면.. 발상의 한계라고 할 수 있을까."

 

칸은 커크의 손에서 앰플을 가져가 다시 상자 안에 집어넣었다. 상자의 뚜껑이 굳게 닫히는 것을 보며, 커크는 칸이 더 이상 그에게 그 앰플을 보여줄 마음이 없음을 알았다.

 

"너희들에겐 너무나 당연한 일이, 우리들에겐 아니었으니까. 너희들의 시선으로 보기엔 비효율적이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우리들에겐 세상 그 무엇보다 놀라운 발견이었을 수도 있는 거다. 닥터 역시 이에 동의했고, 내게 설비를 제공하며 유전자를 비롯한 몇 가지를 연구해달라고 부탁했다."

"사장됐다니. 물론 옛날의 기술을 그대로 재현 할 수 없을지는 몰라도, 기록은 어느 정도 남아있을 것 아냐? 네가 그때 했던 말마따나, 생명공학은 늘 그 문명의 최첨단을 달리기 마련이라고. 제대로 된 기록이 없다는 건 말도 안 돼."

"없어. 적어도, '우리'를 만들어낸 실험에 대한 기록은."

 

칸이 '우리'라는 단어를 발음할 때, 커크는 그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칸이 정의하는 '우리'는 그의 소유인 존재들만을 뜻하는 것이 분명했고, 그의 소유욕이나 지배욕은 고작 몇 년, 몇 광년으로 흐리거나 건드릴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커크는 그것이 아득하면서도, 자그마치 5년이라는 시간을 들이다보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희망을 품기로 했다. 완전히 교화시킬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하다못해 미운정이라도 들 수 있다면야. 커크는 그런 생각을 하며 입을 열었다.

 

"왜 그렇게 확신하는데?"

"우리는 그 시설을 완벽하게 전복했기 때문이다. 생존자는 없어. 증거도 모두 불태우거나 부수어 흩어버렸지. 증인들은 너의 인간들의 손에 죽었고, 그나마 살아남은 생존자들은 잠들어있지."

 

상자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칸의 눈동자엔 미약한 경멸의 빛이 어려 있었다. 과거를 얼마나 기억하느냐고, 언젠가 커크가 지나가듯 물었다. 칸은 담담히 대답했다. 잊어선 안 될 것을 잊지는 않고있노라고.

 

"네 말만 들어보면 꼭 우리가 악당인 것 같다니까."

 

칸은 커크를 흘끗 돌아보았다. 커크는 그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씰룩였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 시간부터 내 방을 찾아온 이유는 뭐지?"

"아아, 그게. 머리가 좀 아파서. 혹시 약 가진 거 있어?"

 

칸은 커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래, 어이없겠지. 나도 알아. 커크는 아랫입술을 한 번 꾹 말아 물곤 어깨를 으쓱였다.

 

"술병 난 것 같단 말이야. 본즈한테 먼저 찾아갔다간 그 하이포 세례에, 잔소리 폭격.. 어휴, 못 버텨. 안 그래도 머리 아픈데."

 

커크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과장된 한숨을 쉬어보였다. 칸은 그런 커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예의 작은 상자를 끌어당겼다. 한 달여 전에 보았던 그 상자였다. 그 안에는, 커크의 흐려진 기억으로는 정확하게 비교는 할 수 없다지만, 예전과 다를 바 없이 온갖 종류의 약들이 뒤섞여 들어있었다.

 

이런 식의 임시처방은 당신에게 득이 될 것 없을 텐데.”

무슨 소리야?”

 

칸의 손이 몇 가지 약품을 꺼내는 동안, 그의 눈은 똑바로 커크를 향해있었다. 커크는 그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보면서, 장난스레 눈썹을 까딱거렸다.

 

당신의 체질에 관해 닥터 맥코이가 불평하던 것을 들었다. 취약한 면역체계, 대부분의 백신 등에 보이는 알레르기와 거부반응, 부작용. 당신에게 약을 처방할 때에는 평소보다 몇 배는 신경을 써야하니 귀찮기 그지없다.”

, 젠장, 본즈.. 그래, 당신이 아무리 담담히 읊어줘도 어떻게 말했을지 눈에 선하네. 아니, 귀에 선하네. 고마워, . 네 덕분에 오랜 친구와의 우정에 금이라도 갈 것 같군.”

 

커크는 입술을 삐죽이며 의자의 등받이에 몸을 푹 파묻었다. 칸이 능숙하게 약병들을 꺼내고, 적당량을 앰플에 덜어내고, 커크는 한 번도 다뤄본 적 없는 기계에 그 앰플들을 꽂아 넣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러니 당신의 의사 외에 다른 이에게 함부로 도움을 청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말이야. 간단한 진통제 한 알을 복용한 죄로 기도가 부어올라 질식사하고 싶지 않다면.”

, 살벌한 소리 그만하고. 네 말은 농담이 농담으로 안 들리거든. 그래서, 내게 위험하지 않은 진통제를 제조하는 건 ‘Mr. Super'에게도 어려운 일이야?”

 

누가 들어도 의도가 명백한-놀리려는- 그의 물음에, 칸은 커크를 흘끗 쳐다보았다.

 

당연한 것을.”

"."

 

커크는 고개를 기우뚱 기울이며 입술을 가볍게 삐죽였다. 칸은 배합기의 계기판을 만지며 커크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커크는 당황한 듯도 하고, 불만족스러운 듯도 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칸의 시선을 느낀 커크는 장난스럽게 한쪽 눈썹을 치켜 올리며 양 뺨을 문질렀다. 커크의 얼굴에 떠올라있던 표정은 스스로의 손끝에서 지워졌다.

 

솔직히 좀 의외인데. 당신이라면 엄청 잘난 척 하는 표정을 지으면서 이런 건 전혀 내게 문제될 것 없지.’ 하고 말할 줄 알았어.”

 

커크의 말에 칸은 피식 웃었다. 그는 약품들을 정리하고 분류해 다시 상자 안으로 갈무리해 넣고 있었다. 자신이 보기엔 색깔도, 모양도 다 똑같아 보이는 작은 약병들이었다. 그러나 라벨이 적인 약품의 이름들과 그 아래 적힌 깨알 같은 작은 글씨들은 새삼스럽게 읽어볼 필요도 없는 듯 했다.

 

“‘당신에게 위험하지 않은 약을 만드는 것. 이건 결국 당신에 관한 일이니까.”

 

커크가 빠르게 눈을 깜빡였으나, 칸의 시선은 이미 그에게 닿아있지 않았다. 칸은 몇 개의 약품 앰플이 꽂힌 배합기에 집중하고 있었다. 맑고 투명한 것, 탁하고 점성 있는 것, 유색 투명한 것, 커크는 자신의 육안만으로는 구분할 수조차 없을 몇 가지 약물들이 투명한 튜브를 통해 섞여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것을 지켜보고 있는, 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잠시만. , 뭐라고?”

 

칸은 서랍 안에서 깨끗이 세척되어있는 하이포를 꺼내며 그의 물음에 담담히 대답했다.

 

너에 관한 일들 중 내게 쉬웠던 것은 단 한 가지도 없었어, 제임스.”

 

커크는 눈을 빠르게 깜빡이다가 살짝 고개를 흔들며 털어냈다. 칸은 책상으로 다가와 가동 중인 배합기를 손끝으로 툭툭 두드리며 커크를 흘끗 쳐다보았다.

 

그래, 당신 말마따나. 단순히 환자의 체질을 고려해 알레르기 반응을 보일만한 재료가 사용되지 않은 약품들을 선별해 배합하는 것만을 이야기한다면, ‘이런 건 전혀 내겐 문제될 것 없지만 말이야.”

 

커크는 순식간에 오만한 표정을 짓는 그를 재수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그의 표정에 일말의 장난스러움이 섞여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한 스스로에 대해 속으로 혀를 차면서, 기계가 돌아가며 약물들이 섞여가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잘나셨어.”

나를 믿지 못하는 건가?”

믿고 자시고, 만약에 내가 조금이라도 잘못되면 넌 최소한 함장 살인 미수야.”

 

커크는 피식 웃으며 자신의 목 언저리까지 손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손을 흔들어 목을 자르는 듯한 시늉을 해보이며 혀를 빼물었다. 칸은 커크를 보며 피식 웃더니 비어있는 하이포를 집어 들었다. 기계에서 발생하는 소음은 거의 없다시피 했으나, 두 남자가 입을 다물어버리자 그 미세한 소리마저 선명하게 들려왔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 기계가 작동을 멈추자 칸은 배합기 안에서 앰플을 뽑아들었다. 몇 가지 약물이 섞여 제조된 투명한 액체가 앰플 안에서 찰랑였다. 하이포에 약품을 옮겨 담는 칸의 집중한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커크는 두 손으로 얼굴을 쓰다듬으며 몸을 앞으로 숙였다. 손등이 책상에 닿고, 손바닥에 얼굴이 파묻혔다. 커크는 더운 숨을 뱉었다. 약간의 열기가 섞인 숨이 손목을 타고 흘렀다.

 

함장. 손을.”

?”

 

커크는 고개를 조금 비틀어 칸을 쳐다보았다. 칸은 한 손에는 약물이 들어있는 하이포를 든 채, 커크를 향해 손을 내밀고 있었다. 커크는 여전히 두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은 채, 눈을 깜빡였다. 상대가 한 말의 저의를 이해하지 못했다는 뜻이었다.

빠르게 움직이는 눈꺼풀 아래에서 커크의 푸른 눈은 칸의 손가락과, 그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길고 흰 손가락이 그의 눈앞에서, 흔들림 없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손가락 하나하나를 눈에 담은 커크는, 다시 한 번 칸의 얼굴로 시선을 올려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소리 내어 입 밖으로 낸 질문은 없었으나, 설명을 요구하는 그 눈빛에 칸은 담담히 대답했다.

 

목덜미에 뭔가 닿는 것은 싫어하지 않았던가.”

".. 그렇긴 한데, 어떻게 알았어?"

 

커크는 눈동자를 데록 굴리며, 칸에게 손을 내밀었다. 커크의 손목을 잡은 칸은 그의 소매를 걷어 올리고, 흰 피부 아래로 비치는 핏줄을 찾아 하이포를 꽂았다. 통증은커녕, 살갗에 무언가가 닿았다는 사실조차 느껴지지 않을 만큼 부드러운 손짓이었다. 손목에서 느껴지는 칸의 높은 체온에 주의가 기울어졌기 때문일수도 있었다. 그의 손은 언제나 뜨거웠다. 손뿐만 아니라 체온 자체가 높았다. 크고 단단한 그의 손은, 길고, 희었으며, 뜨거웠다.

 

 

"젠장, . 너 또 그거 벗으려고 했지!"

"에이, 무슨 소리야, 본즈. 내가 언제. , 단단히 잘 쓰고 있잖아."

 

새로이 발견한 M급 행성을 탐사하기 위해 직접 내려온 것은 스팍과 커크, , 그리고 맥코이였다. 스캇은 엔진과 씨름하느라 머리를 싸매고 있었으니, 함장석은 술루의 차지였다. 운행 중 함선에 생긴 약간의 문제는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고, 그 모든 문제들 하나하나가 몽고메리 스캇에게 있어 해결 불가능한 절체절명의 위기인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모든 문제의 해결에는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했고, 스캇은 늘 정신없이 바빴다. 기술적인 조언이 필요해 그가 커크와 동행하는 경우는 물론이고, 이따끔은 그가 함선 내부에 있음에도 임시함장직은 술루가 맡게 되는 경우가 제법 허다했다.

그들이 착륙한 행성의 대기는 인간이 호흡은 가능할 정도의 성분이었으나, 면역체계가 엉망인 어떤 함장의 몸에는 부담이 될 종류의 박테리아가 포함되어있었다. 맥코이는 커크가 함선 안에 남아있기를 바랐으나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고, 결국 그들은 여과기와 산소호흡기를 비롯한 생명 유지장치가 내장된 특수 슈트를 입고 하선했다. 대기의 성분은 호흡이 가능할 뿐, 지구의 대기와 비교하면 산소가 부족하고, 열악하고 척박한 환경이었으니 비단 커크때문만은 아니었다.

토양과 식물의 샘플을 채취하는 것은 순조로웠다. 식물이 살고, 곳곳에 물웅덩이가 아직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커크는 이 행성에는 주기적으로 비도 내리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하늘은 맑았으나 저 멀리 구름이 보이고 있었다. 커크가 사방을 둘러보며 흥미로움에 눈을 빛내는 사이, 스팍과 맥코이는 간단한 실험과 시약으로 토양을 분석하는 중이었다. 그들은 모두 헬멧을 착용하고 있었으나, 무전을 통하면 의사소통에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산성 토양. 그래도 이건 수치가 좀 높은데, 어떻게 저런 규모의 식물 군락이 자연 발생 할 수 있는거지?"

"주기적인 염기성의 강수로 인해 토양의 성분이 중화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불규칙한 기온의 차이와 불안정한 기류도 중화열 발생으로 인한 대규모 대류현상이 원인이라고 가정하면.."

"염기성 비라니, 끝내주는군. 소나기라도 내리면 우리 모두 흐물흐물 녹아버리거나 중화열로 타버리는거 아닐까 몰라."

 

[들리십니까? 여기는 엔터프라이즈.]

 

문득 들려온 무전에, 세 사람은 퍼득 고개를 들었다. 맥코이는 그제서야 나무 하나에 기어올라가 매달려있는 커크를 보며 입을 딱 벌렸다.

 

"젠장, 짐! 뭐하는거야, 당장 내려와!"

 

그러나 커크는 맥코이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을 뿐이었다.

 

"엔터프라이즈. 여기는 커크. 잘 들려, 무슨 일이야?"

 

[기관실장이 트랜스포터 점검의 이유로 잠시 트랜스포터의 전원을 내릴 것을 요청해왔습니다. 대략 3시간 가량 트랜스포터 기능이 마비 될 것입니다.]

 

"어차피 조사계획은 다섯 시간이었잖아. 허가해 줘."

 

[그리고 기상이변이 관측되었습니다. 일시적인 통신장애가 일어날 것으로 예상됩니다만, 조사를 조기종료하시고 이만 함선으로 귀환하시는 건 어떻습니까? 트랜스포터의 점검이 끝나고 행성의 대기가 안정되면 다시 조사를 재개하셔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만.]

 

"아아, 됐어. 괜찮아. 생존 키트도 가지고 있고, 산소도, 식량도 오늘 하루 넉넉히 버틸 만큼은 챙겨서 내려왔다고. 고작 세 시간 정도야 고립된다고 해도 위험할 것 없어. 무슨 일 있거나 트랜스포터 점검 끝나면 바로 알려줘. 커크 아웃."

 

커크는 굵직한 나뭇가지에 걸터앉은 채, 자신을 향해 열성적으로 화를 내고있는 자신의 친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를 놀리는건 이쯤 해두지 않으면, 나중에 함선으로 돌아갔을 때 또다시 어마무지하게 혼나겠지. 그렇게 생각한 커크는 나무 위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그리고 문득, 같이 내려온 한 사람이 아까부터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가만. 칸은 어디갔지?"

"칸? 그 자식이라면 아까 저쪽으로 가버리던데."

"칸. 여기는 커크. 칸, 칸, 어디 있어? 내 목소리 들려?"

 

대답은 곧장 돌아오지 않았다. 맥코이가 침을 삼키는 기색이 느껴졌다. 칸이 또다시 그들을 배신했을리는 없었다. 그에 대핸 믿음이 아니었고, 이런 행성에서 홀로 도망쳐 잠적해버리거나 함장과 부함장의 목숨을 노린듯 그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안감은 어쩔 수 없었다. 어쨌든 지금은, 트랜스포터를 꺼버린 직후인 것이다.

 

[선명히 들린다, 함장.]

 

그래서 뒤늦게 칸의 대답이 들려왔을 때, 커크는 허탈함에 피식 웃음이 났다.

 

"개자식. 너 지금 어디 있어? 당장 나타나지 않으면 얼굴 보자마자 페이저를 갈겨버릴거야."

 

[정중히 사양하지. 주변을 둘러보고 지형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보다 함장. 뒤를 확인하는 것이 좋을 것 같군.]

 

"뒤?"

 

칸의 말에 커크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그곳에는 나무들 외에는 특별한 것이 보이지 않았다.

 

"아무것도 없는데."

 

[위다. 하늘을 보도록.]

 

"하늘? 하늘에 뭐가 있다고.."

"워워, 짐. 저기 있는 구름, 아까보다 커졌잖아?"

 

맥코이가 커크의 어깨를 툭 쳤다. 맥코이와 스팍의 시선을 따라 하늘을 올려다본 커크는, 조금 전 자신이 눈을 떼기 직전보다 두 배 이상 커진 구름을 발견했다. 오묘한 빛깔이지만 묵직해보이는 구름이었다. 누가 봐도 한바탕 비를 쏟아낼 모양새였다. 조금전 맥코이와 스팍이 나누던 대화가 떠올랐다. 염기성 비가 뭐 어쨌다고 했더라?

그들은 특수 슈트덕에 느끼지 못했으나, 약간의 습기를 머금은 바람이 그들의 몸을 한 바퀴 훑고 지나갔다.

커크는 눈을 한번 감았다 떴다. 기분탓인지, 그만큼 구름이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것인지, 구름은 또다시 방금 전보다 좀 더 커진 듯 보였다. 커크는 숨을 고르는가 싶더니, 몸을 돌리며 소리쳤다.

 

"젠장, 달려!"

 

세 사람은, 구름을 피해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

오타수정은 나중에

AND

*칸커크

*리부트 스타트렉 영화만 감상한 뒤 쓰는 날조글입니다. 캐릭터 붕괴, 원작 붕괴, 원작 설정 붕괴 주의.

*필자의 칸 편애 주의. 칸 보고 싶어서 쓰기 시작한 글이라 어쩔 수가 없습니다.

[My Crew]

8. 제임스.

- “네가 감히.”

[제임스.]

커크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낮은 목소리에 문득 잠에서 깨었다. 불조차 끄지 않고 까무룩 잠들었던 커크는 비몽사몽간에 몸을 뒤척였고, 가슴팍 위에 올려두었던 패드가 스르륵 미끄러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졸린 눈을 비비며 바닥을 더듬어 패드를 집어 올리자, 언제나처럼, 아무도 없는 어두운 함교를 홀로 차지하고 앉아있는 칸이 보였다.

커크는 칸의 혼잣말 중 절반은 알아듣지 못하고 흘려버렸다. 묵직한 수마를 떨쳐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지난 며칠간 새벽마다 들어왔던 칸의 목소리는 이제 자장가로 들릴 만큼 익숙해져 있었다. 커크는 칸이 부르는 이름의 주인은 그가 아니며, 우연히 얼굴 모를 누군가와 자신의 이름이 같았을 뿐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칸의 나직한 목소리가 부르는 자신의 이름을 들으면서, 조명을 꺼버리고 다시 눈을 감았다. 그가 잠들더라도, 새벽이 끝나 해가 떠오를 때까지 계속해서 들려올 목소리였다.

"함장님!"

Captain on the bridge! 커크가 함교에 들어서자 체콥이 외치는 다급한 목소리가 가장 먼저 들려왔다. 함교 내부는 소란스러웠다. 칸과 스팍이 뒤엉켜 바닥을 뒹굴고 있었고, 술루와 맥코이가 두 사람을 말리려다 밀쳐져 바닥을 나뒹굴거나 비틀거리고 있었다. 출항한지 얼마나 지났다고. 자신이 자리를 비운 것도 아주 잠깐인데, 함교 안에서, 선원들의 앞에서 이런 몸싸움이라니. 커크는 한숨을 내쉴 여유도 없이 급히 두 사람에게로 다가갔다.

"네가 감히."

 

 

 

칸이 스산한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냉담한 표정과, 서늘한 목소리와는 달리, 분노로 들끓다 못해 충혈 된 칸의 눈이 보였다. 스팍의 손이 칸의 목덜미에 닿아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스팍은 칸의 목덜미에서 손을 떼어내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었으며, 칸은 손에 핏줄이 돋아날 만큼 강한 힘으로 스팍의 손을 붙잡아 자신의 목덜미에서 떼어낼 수 없게 잡아두고 있었다.

 

스팍의 숨이 거칠었다. 벌컨의 주먹이 칸의 어깨와 머리를 서슴없이 내리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팍의 손을 움켜쥐고 놓아주지 않는 칸은, 일견 잔혹해 보이기까지 하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비웃음을 띤 입술 사이로 살짝 드러난 그의 치아가 맹수의 그것처럼 느껴질 지경이었다.

 

 

 

"그렇게 자신이 원하는 대로 날 건드려놓고, 쉽게 그만둘 수 있으리라 생각했나? 감히 나를 상대로?"

 

"..!"

스팍의 다리가 허공을 걷어찼으나, 허리를 깔고 앉은 칸에게 그의 발은 닿지 않았다. 칸의 손이 이윽고 스팍의 목을 움켜쥐었다.

 

 

 

"이 고통은 네 분수를 모르고 주제를 넘어버린 것에 대한 책임이다."

 

 

 

칸의 손이 이윽고 스팍의 목을 움켜쥐었다. 기다란 손가락이 하얀 뱀처럼 스팍의 목을 감아쥐고 강한 힘으로 졸랐다. 두 남자가 서로의 목덜미에 손을 댄 채, 누군가는 벗어나려 하고 누군가는 잡아두려 하며 점차 몸싸움이 격렬해지고 있었다. 심지어 함장이 함교로 들어선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한 두 사람을 말리기 위해, 커크는 두 사람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함교에서 뭐 하는 거야! 둘 다 그만.. 아윽!"

커크가 다가가 칸의 손을 붙잡았다. 스팍과 칸의 손에 그의 손이 닿는 순간, 그는 오른쪽 다리에 극심한 통증을 느끼며 주저앉았다.

"젠장, !"

오른쪽 무릎 부근을 부여잡고 끙끙거리는 커크에게 맥코이가 황급히 달려왔다. 숨이 턱 막히고 눈앞이 아찔할 만큼 날카로운 통증이었다. 커크의 목소리를 들은 칸의 고개가 커크를 향해 휙 돌아갔다. 칸이 맥코이의 부축을 받아 힘겹게 몸을 일으키고 있는 커크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동안, 스팍은 그에게 잡힌 손을 빼내며 칸의 몸을 떠밀었다.

칸은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순순히 물러났다. 칸은 자신의 손을 뿌리치고 몸을 일으키는 스팍을 느꼈으나, 그에 반응하지는 않았다. 그의 시선은 똑바로 커크를 향하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눈앞의 상대를 찢어발길 듯 맹렬하던 살기가 순식간에 수그러들었다.

"함장."

 

"아으으.. 방금 그거 뭐야. 너희 무슨 짓을 하고 있던 거야?"

 

 

 

커크는 끊어질 것 같은 종아리를 주무르며 칸과 스팍을 번갈아보았다. 칸은 커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몸을 일으켰다. 스팍은 우후라의 부축을 받으며 일어났다. 스팍 역시 오른쪽 다리를 절고 있었다. 칸의 관자놀이에 심한 멍이 들었으나, 칸은 전혀 아파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저 순식간에 열기가 빠져나가버린 듯한 눈으로, 아직 핏발 섰던 붉은 기운이 다 빠지지 않은 눈으로 커크를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그에게 듣는 것이 좋을 것 같군, 함장."

 

"?"

 

"난 일등항해사의 명령에 불복했다."

칸의 시선이 잠시 스팍을 스쳐 지나갔다. 칸도, 스팍도, 엉망진창인 몰골이었다. 칸은 손을 올려 흐트러진 머리칼을 대충 쓸어 넘겼다.

 

 

 

"그런 내가, 당신에게 그를 고자질하는 모양새가 누구에게든 좋아 보일 리는 없으니."

 

 

 

커크는 아픈 다리를 툭툭 털며 맥코이의 어깨를 짚고 몸을 일으켰다. 얼굴이 가까워지니 칸의 눈가에 맺힌 피멍울이 좀 더 선명히 보였다. 만일 평범한 지구인이었다면 두개골이 함몰되었을 벌컨의 힘이었다.

 

 

 

"함장. 허락한다면 자리를 벗어나고 싶다."

 

"어디를 가려고?"

 

"잠시 개인 쿼터에서 쉬려는 것뿐이야."

커크는 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칸은 커크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함교를 나가버렸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함교를 빠져나가는 그는 다리를 절지도, 비틀거리지도 않았다.

 

우후라는 스팍을 부축해 그의 의자에 앉혔다. 커크는 아직도 욱신거리는 다리를 절뚝이며 함장의 의자에 비스듬히 걸터앉았다.

 

 

 

"어떻게 된 거야?"

 

"존 해리슨은 함선이 정박해있는 지난 일주일간 매일 새벽, 이 함교를 출입했습니다. 그 누구의 동행도 없이, 혼자 대략 다섯 시간 가량을 함장님께서 지금 앉아계신 그 의자에 앉아있었습니다. 저는 그의 의도가 불분명한 행동에 대한 해명을 요구했습니다. 그는 이에 불응했고,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으며, 제가 그에게 강제력을 행사하려 하자 마찰이 생긴 것입니다."

커크는 스팍을 빤히 바라보며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그의 푸른 눈에 어린 것은 당황과 황당의 빛이었다.

 

 

 

맙소사, 그러니까 지금.. 마인드 멜딩을 시도했단 말이야? 저 칸에게?”

 

그렇습니다. 함장님. 저는 엔터프라이즈호를 위협하는 모든 요소를 경계하고 배제하여 항해 기간 동안 함선과 선원들의 안전을 도모할 의무가 있습니다.”

 

 

 

커크는 스팍의 말에 절로 나는 한숨을 숨기려 하지도 않았다. 칸은 앞으로도 절대로 자신에게, 또한 엔터프라이즈와 스타 플릿에게 협조적이거나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려 들지 않을 것이 분명했고, 자신은 넘기더라도 스팍과는 늘 부딪힐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오늘과 같은 분쟁이 앞으로 몇 번이나 일어날 것인지 생각도 하기 싫었으며, 그럴수록 칸은 엔터프라이즈에서 점차 고립되어갈 것이 뻔했다. 스팍은 벌컨이었고, 칸은 오만했다. 양측 누구도 '적당히'를 용납하지도 않을 것이며, 다른 선원들의 눈을 의식하지도 않으리라는 사실은 새삼 말할 것도 없었다.

커크의 몸을 샅샅이 훑던 맥코이의 트라이코더에 스트레스로 인한 호르몬 변화가 감지되자, 맥코이는 한쪽 입꼬리를 씰룩이며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아까 그 통증은 뭐야? 마인드 멜딩이랑은 달랐어. 너브 핀치 같은 것도 아니었고.”

 

그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고통 중 일부인 것으로 사료됩니다. 제가 읽어내고자 했던 기억은 지난 일주일간 이 함교에 있었던 시간의 것이었지만, 그는 상당한 과거의 기억을 떠올려 저를 강렬한 통증에 노출시켰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벌컨인 제가 정신적인 교감에 관한 문제에 있어 지구인인 존 해리슨에게 주도권을 빼앗기는 상황은 예상하지 못 했습니다. 또한 상당한 시간이 흐른 기억임에도 무의식 속에 잔재하는 고통을 선명하게 회상해낸 점이나 그런 방식으로 스스로를 방어해낸...”

"아아, 그만. 일단 거기까지만, 스팍."

커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어느 정도 통증이 사라진 다리를 툭툭 두드렸다. 맥코이가 다시 한 번 커크를 향해 트라이코더를 들이밀었으나 커크는 귀찮다는 표정으로 맥코이의 팔을 슬쩍 밀어냈다. 갑작스러운 통증과 심적인 요인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제외하면 별다른 문제가 발견되지 않은 터라, 맥코이는 순순히 트라이코더를 거뒀다.

커크는 다시 스팍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스팍의 무표정한 얼굴과 칸이 졸랐던 목덜미는 연두색, 초록색 멍이 번져 얼룩덜룩했다.

다음부턴 나한테 미리 언질이라도 해달라고.”

함장님께서 동의해주실 확률은 매우 희박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나한테 승인도 받기 전에 저질러버렸다?”

황당해하는 커크의 물음에 대답한 것은, 아직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트라이코더를 만지작거리며 커크의 뒤에 서있던 맥코이였다.

워우, 꼭 누구 닮아 가는데.”

커크는 맥코이를 흘겨보았다. 우후라가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렸다.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그들에게 등을 돌리고 앉아있는 술루 역시 그 말을 듣고 웃었으리라는 생각이 들어, 커크는 가볍게 콧등을 찡그렸다.

커크는 입맛을 다시며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다리의 통증은 거의 사라져 움직이는 것에 불편한 점은 없었다. 맥코이와 스팍의 시선이 커크를 쫓아 올라갔다.

무슨 일 생기면 호출해.”

그 자식한테 가려고?”

커크는 가벼운 표정으로 두 사람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 ‘그 자식이 앙심을 품고 선상반란을 계획하기 전에 미리 사과라도 해두려고?”

 

 

 

 

 

 

무슨 일이지. 함장.”

 

. 네가 또 무슨 미친 짓 하진 않나 감시하려고 왔어. 들어가도 될까?”

 

 

 

칸은 커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순순히 몸을 돌려 자리를 만들었다. 커크는 칸의 방 안으로 들어서며 주변을 휘둘러보았다. 필요 외의 가구들은 거의 배제되어있는 깔끔한, 달리 말하면 삭막한 방이었다. 침대와 책상, 의자와 서랍이 하나씩. 자신이 지구에 있을 때 선물했-마음에 들면 몇 권 가져가도 좋다고 했더니 칼같이 챙겨온-던 종이책 몇 권과 작은 상자 따위뿐인.

커크는 책상 위에 놓여있는 상자의 뚜껑을 슬쩍 젖혀보았다. 상자 안의 내용물은 적지 않은 양의 항생제를 비롯한 약품들이었다. 커크는 얌전히 상자의 뚜껑을 덮어두고 의자에 걸터앉았다. 커크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칸은 자신의 침대로 다가가 앉았다. 언제나처럼 칼같이 반듯한 자세였다.

 

 

 

저게 그때 가져갔던 그 약들이야? 일주일 내내 저것 때문에 본즈가 얼마나 짜증을 냈는지. 한 달 치 잔소리를 일주일 동안 몰아서 듣는 느낌이었다고.”

 

 

 

칸은 커크의 물음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을 뿐, 별다른 대꾸를 하지는 않았다. 커크는 문득 칸의 눈가에 시선이 닿았다. 새카맣게 짙었던 피멍은 잠깐 사이에 흐려져 지저분한 얼룩이 되어있었다. 곧 완전히 사라질 자국이었다. 커크는 자신이 칸에 대해 지나치게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다. 조금 전에 그 싸움을 보고서도 벌써 흐려지기 시작한 멍 자국이 아니라, 아직도 그에게 상처가 남아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어색할 만큼.

칸은 커크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라는 재촉을 담은 눈빛에 커크는 어깨를 으쓱이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왜 그렇게 화가 났던 건데?”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함장.”

평소처럼 무시하고 자리를 뜨던가, 비웃어버리고 비협조적으로 굴던가. 조용히 넘어갈 방법은 몇 가지나 있었잖아? 네 행동은 전부 기록되고, 그대로 스타플릿에 보고된다고. 이렇게 폭력적이고 통제되지 않는 모습을 보여 봐야 너와 네 선원들에게 좋을 것은 하나도 없어. 내가 이렇게 따로 말하러 오지 않아도, 그 정도는 이미 알고 있잖아.”

커크의 말에 칸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침묵은 길지 않았으나, 커크의 말에 답하는 칸의 목소리엔

 

 

 

"그는 내가 용납할 수 있는 선을 넘었다. 그뿐이야."

 

"네 선원들보다 더 중요한 ''이야?"

 

"글쎄."

 

 

 

칸은 문득 고개를 들어 커크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칸의 눈동자는 차가울 정도로 차분했다. 조금 전 분노로 물들었던 사나운 얼굴에 한 해 전의 기억이 문득 되살아났으나, 지금의 칸에게선 별다른 감정의 기색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의 눈동자가 가늘어지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윽고 그가 고개를 저으며 다시 입을 열어 대답할 때까지, 방안에는 두 사람의 숨소리와 어디선가 희미하게 들려오는 규칙적인 소음뿐이었다. 엔터프라이즈가 내는 숨소리라며, 스카티가 칭찬 일색을 늘어놓았던 부드러운 소음.

 

커크는 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의 냉소적인 태도는 스팍의 냉철함이나 맥코이의 신랄함과는 달랐다. 지나치게 오래 삭아 바스러져가는 삭막함 위로 깔린 잔혹함. 백여 명도 되지 않는 자신의 사람들은 목숨보다 소중할지 몰라도, 타인이라면 날벌레 한 마리만큼의 가치도 없다는 편협함.

 

 

 

"어려운 문제로군."

 

". 예상 밖의 대답인걸."

 

"어느 쪽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것이라면, 순서를 세우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겠나."

커크는 고개를 끄덕이며 의자의 등받이에 몸을 푹 파묻었다. 칸을 오래 바라보는 것은 힘에 부쳤다. 그의 감정은 선명했고, 또한 스스로를 감추지 않았다. 그의 감정이 전염되면, 압도되고 휩쓸릴 것만 같았다. 더군다나, 천하의 커크에게도 제법 부담될 만큼, 칸의 시선은 거침없었다.

 

커크는 짐짓 방안을 둘러보는 척 시선을 흘렸다. 서랍 위에 놓여있는 종이서적은 커크가 '선물'한 것이 대부분이었으나, 그가 처음 보는 것들도 섞여있었다. 출항 전 칸에게 허락된 개인적인 시간은 거의 없었는데, 언제 저런 책들을 구해왔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 책 옆에 놓인 작은 나뭇조각. 가구를 제외하면 이 방 안에 있는 것은 그것들이 전부였다. 커크는 서랍 위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작은 나뭇조각에 시선을 던졌다. 거리가 좀 떨어져 있어 자세히 살펴볼 수는 없었으나, 새 모양을 한 엄지손톱만 한 조각품이라는 것은 알아볼 수 있었다.

"그래서 결론은, 네가 새벽마다 내 의자를 차지하고 앉아서 뭘 했었는지는 설명할 의향이 없다?"

"설명하지 못할 것은 없다. 당신들이 내 말을 믿느냐와는 별개의 문제로."

"좋아, 적어도 나는 믿어주지."

여전히 방 안을 살펴보듯 이리저리 시선을 돌려대던 커크는, 자신을 바라보던 칸의 눈이 일순 가늘어졌던 것을 눈치 채지 못 했다.

"새삼 함장의 의자가 탐이 났던 게 아니라면, 새벽마다 아무도 없는 함교에서 뭘 하고 있던 건데? 그것도 일주일 내내?"

칸은 커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천천히 눈을 감아버렸다. 청록색 눈동자가 창백한 눈꺼풀 아래로 가려졌다. 대놓고 언짢은 기색을 내비치는 것과는 별개로, 칸은 의외로 순순히 대답했다.

"개인적인 추억을 회상했을 뿐이야. 당신이나 이 함선에 해를 끼칠만한 행동은 하지 않았다."

"그 회상의 내용은 밝히고 싶지 않을 테고. 그렇지?"

칸은 커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커크는 고개를 살짝 뒤로 젖히며 자신의 턱을 매만졌다. 말을 할 때마다 신중에 신중을 기하는 것은 그의 천성에 맞지 않는 태도였으나, 커크는 질문을 입 밖으로 내기 전, 다시 한 번 말을 골랐다. 사실 말을 고른다기보다는, 칸에게서 대답을 들을 수 있을지 없을지를 미리 예측해볼 뿐이었다. 자신이 과연 그를 떠볼 수 있을지, 자신의 거짓말이 그에게 통할지. 칸은 이미 자신이 감시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가 매일 새벽 함교를 찾았을 때에는 그 누구와도 마주치지 않았으나, 조금 전 공개적인 추궁-이렇게 불러도 좋다면-을 당했던 것이다.

그러나 도청장치를 설치해, 밤새도록 계속되던 당신의 혼잣말을 몰래 엿들었다고 말하기엔 얼굴이 지나치게 가려웠다. 사실 자신이 지금 이 질문을 하려하는 이유조차 모르고 있었다. 그저 계속해서 궁금해왔고, 마침 당사자와 단둘이 앉아있으려니 그 궁금증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는 것이다. 커크는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자신에게 일주일을 내리 묵혀온 호기심을 억누를만한 인내심은 없다고 여겼다. 다행히도 그 이름에 관해선 그럴싸한 핑계거리가 있었다.

"제임스."

커크의 말에 칸의 눈이 번쩍 뜨였다. 무력한 듯 담담하던 눈빛이 순식간에 날카로워졌다. 여전히 반듯한 자세였으나, 커크는 그가 그 자리에서 도사리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금방이라도 앞으로 튀어나와 자신의 입을 틀어막거나, 목을 꺾어버릴 수 있도록. 경계의 빛을 띤 채 긴장하고 있는 칸은 또다시 새롭게 사납고 낯설었다.

"네가 그때 날 그렇게 불렀잖아. 일주일 전에, 의무실에서."

"..그랬지."

"솔직히 말하면 그게 절대로 날 부른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거든. 갑자기 살갑게 이름으로 부를 만큼 서로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지금도 나를 몇 대 쥐어박아서 입을 막아버린 뒤에 방 밖으로 쫓아내버리고 싶지 않아?"

커크의 능청에도 칸은 웃지 않았다. 지구에서도 커크는 몇 번인가 칸에게 나름의 농담을 던졌고, 그때마다 칸은 피식 흐르는 웃음을 흘리거나, 그를 무시해버리곤 했다. 그러나 지금의 칸은 그를 비웃지도, 언제나 보이던 오만한 반응을 보이지도 않았다. 잔뜩 날이 선 채 커크의 얼굴을 똑바로 노려볼 뿐이었다.

커크는 대수롭지 않은 이야기를 건네듯 평온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여보였을 뿐이었다.

그 제임스라는 건 누구야? 일주일 내내 궁금했다고.”

밤마다 우주를 바라보며 말을 건네는 상대가 누구인지, 평소의 그에게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말투와 인사를 듣는 상대가 누구인지. 이따금 의미를 알 수 없는 밀어密語를 주고받는 상대가 누구인지 참을 수 없도록 궁금했다. 그의 이름이 자신과 같다는 사실에 조금 더 흥미가 동했을지도 몰랐다.

"아직 얼어있는 네 선원 중 하나인가?"

[내가 네 말을 왜 의심하겠어. 그랬다면 널 지구에 남기고 떠나진 않았을 거다.]

언젠가 엿들었던 칸의 혼잣말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음에도, 커크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질문을 던졌다. 혹여 자신이 그를 떠보고 있다는 것을 들킬까싶어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와 비슷한 증강인간 중 한 명일까. 커크는 그들의 수명을 몰랐다. 어쩌면 저 모습 그대로 평생 늙지도, 죽지도 않는다면. 그렇다면 칸이 찾는 제임스 역시 지구의 어딘가에서 조용히 숨어 살아가고 있을지도 몰랐다. 언젠가의 존 해리슨처럼, 또 다른 이름을 가지고.

문득 커크는 자신의 그 질문에 극도로 긴장하고 있던 칸의 기색이 살짝, 아주 살짝 풀어졌음을 느꼈다. 숨조차 거의 멈추고 있던 그가 조용히, 소리없이 긴 숨을 내뱉었다.

"그럴 리가."

칸은 처음으로 커크에게서 눈을 완전히 돌려버렸다. 청록색 시선이 흐르듯 미끄러졌다. 칸의 시선은 커크의 얼굴에서 책상 위로 옮겨가고, 서랍 위를 배회하다가, 작은 나뭇조각을 눈에 담았다. 칸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뜨며 다시 커크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흔들림 없는 눈이었으나, 커크는 그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었음을 눈치 챘다.

칸을 동요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었다. 그에겐 그 무엇도 가치가 없었으니까. 그를 분노하게 하고, 슬프게 하고, 두렵게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가 되찾고자하는 그의 사람들뿐이었다.

그리고 백여 개도 되지 않는 이름들 사이에서, 칸이 가장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은 '제임스'라는 이름이었다. 그 사실에, 제임스 티베리우스 커크는 기분이 묘해짐을 느꼈다. 어쩌면 이를 이용할 수도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고, 제법 효과가 좋을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나 타고난 그의 성격으로 인한 거부감이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그와는 별개로, 정확히 단정 지을 수 없는 흥미로움, 착잡함, 정체조차 모호한 감정들이 커크를 스쳐지나가며 일순간 그를 뒤흔들었다.

"그는 살아있다. 자유로운 곳에서 자유롭게 살아가고 있어. 그를 얼려서 그 좁디좁은 캡슐에 가둬놓는다니, 낙타가 바늘구멍을 지나가는 것보다도 불가능한 일이지."

칸의 입꼬리에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 커크는 문득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하지만 냉동 장치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아직까지 살아있을 리가 없잖아. 자그마치 300년이 지났어, . 무려 3세기가 지나가 버렸다고. 설마 너희들은 늙지도 않는 건가?"

"그럴 리가. 우리들도 나이를 먹는다. 너희들보다 천천히 늙어갈 따름이지. 300. 그래, 자그마치 300. 그런 시간은 그 누구라도 버틸 수 없겠지. 나조차도 버텨낼 수 없을 기나긴 세월이다."

칸의 눈동자에 문득 이채가 돌았다. 커크는 그의 청록색 눈동자에 빛이 어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마커스의 지시로 강제로 색을 벗겨냈던 칸의 눈동자는 초록색도, 푸른색도 아니었다.

"하지만, 커크. 난 확신하고 있어."

두 사람의 푸릇한 시선이 허공에서 얽혀들었다. 커크도, 칸도, 서로의 시선을 피하려들지 않았다.

"그에겐 그 무엇도 족쇄가 될 수 없다. 고작 300년이 문제가 된다고? 그럴 리가. 시간따위는 물론이고, 끝을 알 수 없는 이 우주조차도 그를 막을 수는 없어."

단정 짓는 칸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단 한 치의 의심도, 조금의 흔들림도 없을 견고한 목소리였다. 확신에 찬 칸의 얼굴을 보면서, 커크는 문득 숨이 차다고 느꼈다. 확신뿐만이 아니었다.

야만적이고 폭력적이던 과거의 어느 시간에,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쌓아올렸을 견고한 고성을 닮은. 그 단단함을 느낀 커크는 자신도 모르게 살짝 벌어졌던 입술을 꾹 다물어버렸다.

칸의 눈동자에 자신의 얼굴이 비치고 있다는 것이 새삼스러웠다. 그런 커크의 기색은 아랑곳하지 않고, 칸은 말을 맺었다.

"그 이름은, 그런 이름이니까."

시간이 흐르며 바스라져가는 그의 감정은 썩어가는 오두막을 닮지 않았다. 수백 년이 흘러 발견된 유적의 한 귀퉁이를 닮아있었다. 초라하게 쓰러져버리지 않도록, 그를 버텨주는 기둥이 있었다.

AND

*칸커크

*리부트 스타트렉 영화만 감상한 뒤 쓰는 날조글입니다. 캐릭터 붕괴, 원작 붕괴, 원작 설정 붕괴 주의.

*필자의 칸 편애 주의. 칸 보고 싶어서 쓰기 시작한 글이라 어쩔 수가 없습니다.


[My Crew]

7. 항생제

    - “내 말을 믿나?”

       “응? 나한테 거짓말 했어?”


칸이 탄 함선은 그대로 다른 함선을 향해 돌진했다. 최대로 끌어올린 출력으로 빠르게 날아드는 함선은, 그대로 다른 함선과 충돌했다. 두 함체가 산산이 부서지며 큰 폭발이 일어나고, 그에 휘말린 다른 함선이 연쇄적으로 부서지며 폭발했다.

그 요란한 폭발들로 엔터프라이즈가 크게 요동쳤다. 직접적인 손상은 없었으나, 선원들은 혼미해진 정신을 가다듬으려 고개를 가볍게 털었다.


“체콥? 어떻게 됐나, 체콥?”

“아으으…….”


통신기 너머로는 체콥의 앓는 목소리만 들려왔다. 커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직 기체가 완전히 안정화되지 않았다는 술루의 만류에도 커크는 함교를 벗어났다. 전송실로 가는 통로의 전등이 깜빡거리며 점멸했다. 함선이 망가지는 일이 또 일어난다는 생각은 만약에라도 하고 싶지 않았다.

엔터프라이즈의 기체가 다시 한 번 크게 흔들렸다. 함교의 화면을 확인할 수 없으니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자신이 자리를 비운 동안에도 스팍이 알아서, 적절한 조치를 취해줄 것이다. 커크는 벽을 짚으며 비틀거렸다. 앞으로 몇 걸음 걸어가기도 어려울 만큼 심한 진동이었다. 그는 그대로 자세를 낮추고 흔들림이 사그라질 때까지 잠시 기다리려했다.

어지럽게 흔들리는 시야 끝에 거뭇한 형체가 보인 것은 그때였다. 누군가를 어깨 위에 짊어진 사람의 형상이었다. 그 역시 벽에 손을 짚고 있긴 했으나, 그는 심한 흔들림에도 아랑곳 않고 커크를 향해 똑바로 걸어오고 있었다. 커크는 그가 칸이라는 것을 금세 알아보았다. 그런 이질감을 풍길 수 있는 사람은 이 함선 내에 얼마 없었다.

칸은 커크를 보고도 별다른 말을 건네지 않았다. 그가 바로 앞까지 다가왔을 때, 요동치던 함선은 어느 정도 안정되었다. 커크는 그제야 칸이 짊어진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보았다. 그는 의식을 잃은 체콥이었다.


“어떻게 된 거야?”

“넘어지면서 머리를 부딪친 모양이더군.”

“다른 선원들은?”

“부상은 없었다. 단순히 의식만 잃은 선원들은 의자에 고정해두고 이 소년만 데리고 나온 거야.”


커크는 칸에게서 풍기는 검은 피의 냄새에 얼굴을 찡그렸다. 그가 온통 뒤집어쓴, 인간이 아닌 자가 흘린 검은 피에선 역한 냄새가 났다. 칸은 체콥을 커크에게 넘겼다. 핏방울이 후두둑 떨어졌다.


“무슨 짓을 한 거야?”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을 했을 뿐이다.”

“함선을 통째로 들이박아서 연쇄 추돌 사고를 일으키는 게?”

“항로 계산은 완벽했다. 다만 마지막 조작을 하기 전에 엔터프라이즈로 전송되어 왔을 뿐이야.”


커크는 체콥을 들쳐 업으며 칸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피를 대강 닦아낸 얼굴엔 아직 검은 얼룩 같은 자국이 남아있었다.


“미친 놈.”

“또 듣는군.”


칸은 대수롭지 않게 넘겨들으며 커크를 지나쳐 걸어갔다. 커크는 그가 남기는 검붉은 발자국을 바라보다가, 요란하게 울리는 통신기를 들어올렸다.


“그래, 무슨 일이야.”


[어디에 계십니까, 함장님?]


“전송실로 가는 통로야. 체콥이 의식을 잃어서 의무실로 데려가려고.”


[적함은 전멸했고, 나머지 충돌 위험이 있는 대형 잔해들은 페이저를 이용하여 정리했습니다. 더 이상의 위험요소는 없다고 판단되어 전초기지를 향해 워프 경로를 설정하려 합니다. 잔해들로부터 벗어나고 있습니다.]


스팍의 차분한 보고를 들으며 커크는 칸이 걸어간 방향으로 흘끗 시선을 주었다. 그는 이미 모습을 감춘 뒤였다. 남은 흔적은 피로 찍힌 발자국 뿐이었다.


“그래, 그렇게 해. 참, 본즈 거기 있어?”


[예.]


“의무실로 오라고 좀 말해줘. 혹시 방금 충격으로 다친 선원들이 더 있을지도 모르니까 선내에 방송도 좀 부탁해.”


[알겠습니다, 함장님.]





전초기지에 도착한 그들은 여독을 풀 새도 없이 곧바로 보고부터 올려야했다. 칸이 직접 보고를 하는 것이 가장 간단한 일이었지만, 칸은 ‘몸이 좋지 않다’는 핑계로 보고를 커크에게 미뤄버렸다. 커크는 그만큼 설득력 없는 변명도 없을 것이라 생각하며 속으로 불만을 삼켰다.


“그 말을 믿으라는 건가?”


전초기지의 관리소장은 커크의 구두보고를 듣고 영 못미덥다는 표정을 지었다. 스팍의 보조적인 설명이 있었지만, 뜬금없이 나타난 우주함대의 기습이라는 것은 쉽게 믿을 수 있을 것이 아니었다.


“사실입니다. 녹화된 영상은 후에 증거물로 제출하겠습니다.”


스팍은 소장을 향해 담담한 눈빛을 던졌다. 소장은 두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푹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그 대단한 전투를 치렀다는 남자는 왜 오지 않았나? 그도 주요 참고인이니 같이 오는 편이 나았을 텐데.”

“몸이 좋지 않아 쉬고 있습니다.”

“몸이 좋지 않다고?”


존 해리슨이 어떤 인물인지에 대한 사항을 이미 전달받았던 소장은 눈을 가늘게 떴다. 커크는 그 표정을 단번에 알아봤으나, 뻔뻔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네.”


더 이상의 변명은 없었다. 관리소장은 엔터프라이즈의 함장과 부함장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만 돌아가 보게. 이틀 뒤의 정기보고에서 자세한 사항을 듣기로 하지.”


커크와 스팍은 경례를 붙여 올리고 소장실에서 벗어났다.


“젠장, 망할 자식.”


커크는 소장실의 문이 닫히자마자 괜스레 바닥에 발길질을 하며 투덜거렸다. 스팍의 시선이 느껴지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은 커크의 버릇없는 행동거지에 새삼스레 타박을 할 사이는 아니었다.


“날 엿 먹이려고 제 방에 틀어박힌 게 틀림없어.”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 자식은 날 정말, 정말, 정말, 싫어하니까 말이야, 스팍.”


커크는 복도를 스쳐지나가는 여성 연구원에게 눈썹을 까딱여 인사를 보내며 중얼거렸다. 칸이 자신을 좋아할 이유는 없었다. 그에게 마땅히 미움 받아야 할 이유를 꼽아보라고 하면 정작 할 말은 없었지만, 그래도 새삼스레 억울해할 필요는 없었다. 반드시 이유가 있어야만 하는 악의는 벌칸 사이에서나 통할법한 이야기였고, 칸은 야만스러울 정도로 인간적인 본능에 충실한 남자였다.


“내가 올라가지. 서류 작업은 귀찮으니까 네가 좀 해줘.”

“예, 함장님.”


스팍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자 커크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었다. 건물 밖으로 나오자 보이는 것은 푸른 하늘이었다. 약간의 인공적인 조작만으로도 충분한 산소를 머금게 된 대기는 지구와 제법 비슷한 환경을 만들고 있었다.


“엔터프라이즈. 올려줘.”


흰 빛무리에 둘러싸여 전송되어 올라가는 커크를 바라보던 스팍은,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커크는 도킹 허가가 떨어졌음을 알렸다. 술루가 수동으로 엔터프라이즈를 운행하는 동안 커크는 맥코이를 찾았다. 그러나 함교에는 그가 없었다.


“우후라, 본즈는?”

“의료실에 계실 거예요.”

“그래, 고마워.”


커크가 의료실 문을 열었을 때, 의료실 안에는 두 사람 뿐이었다. 맥코이는 침대에 걸터앉아 칸의 말을 듣고 있었다. 꼿꼿이 서있는 칸의 자세는 더할 나위 없이 반듯했고, 표정은 언제나처럼 딱딱했다.


“그게 전부인가?”

“그래.”

“실망스럽군.”

“짐만큼 나를 열 받게 할 수 있는 자식도 그다지 많진 않은데 말이야, 넌 그중에서도 특출한 것 같군.”


칸의 서늘한 청록색 눈동자가 맥코이를 응시하다가 열린 문을 향했다. 그의 무심한 시선을 받은 커크는 헛기침을 하며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여긴 무슨 일이야, 짐? 어디 아프기라도 해?”

“어, 아니. 드디어 우주선에서 탈출할 수 있게 되었다는 소식을 알려주려고 왔는데.”

“오, 그래? 그거 참 젠장 맞게 잘됐군. 이 자식을 당장 생명유지 장비 없이 우주로 던져버리라는 명령이 떨어졌다거나, 그런 소식은 없어?”

“글쎄. 하지만 말은 좀 조심하는 게 좋지 않을까, 본즈. 그 자식은 당장에 네 머리가 반쪽이 나도록 쪼개버릴 수도 있는 놈이라고.”


맥코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의료실을 나갔다. 칸은 멀어지는 맥코이의 뒷모습에는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커크의 눈을 뚫어져라 보고있었다.


“왜 왔지?”

“무슨 소리야? 방금 본즈한테 하는 말 못 들었어?”

“일개 의료 장교에게 겨우 그런 말을 전하려고, 함장이 입항 수속마저 미뤄둔 채 직접 함교 내부를 돌아다닌다는 말인가?”

“미뤄둔 게 아니라 내 부함장에게 일임한 거고, 본즈는 우주를 정말 끔찍하게 싫어해서 말이야. 겨우 그런 말이라고 하기엔 꽤 큰 선물이란 말이야. 그럼 넌 왜 여기에 와있는 건데? 이 함선에서 이 장소랑 가장 상관없는 사람은 너 아니야?”

“말하지 않았나.”


칸의 대답에도 커크는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며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해보였을 뿐이었다.


“몸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약이 필요했고. 의료실을 찾는 것에 그 이상의 이유가 필요한가?”


커크는 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역시 농담하는 센스만큼은 스팍보다 낫다니까. 그래, 어디에서 지낼 거야? 혹시 함선에 이상이 있지는 않을까 싶어서 정밀 검사를 받기로 했어. 일주일 정도는 이 행성에 머무르게 될 거야. 아마 선원들 대부분은 기지에서 지낼 텐데.”


칸은 커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커크가 눈을 가늘게 떴으나 칸은 더 이상의 대답은 하지 않았다.


“아무도 없는 함선에 혼자 남아있겠다고? 아, 물론 당직 선원이나 기술자들은 함선에 남아있겠지만…….”

“문제라도?”


커크는 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없어. 너야말로 필요한 건 없는 건가?”

“항생제가 필요하다. 그리고 함선 내부에 있는 의료 연구 시설의 일부를 사용하고 싶다. 의사는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 알 수 없다며 처방을 거부하더군.”

“그건 나도 동감이긴 한데. 무슨 다른 속셈이 있는 건 아니고?”

“전혀.”


칸의 짧은 대답에 커크는 어깨를 가볍게 으쓱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병자의 기색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그가 항생제를 요구하는 상황도 상황이거니와, 상식적으로 그에게 평범한 항생제가 필요하다는 말을 쉽게 납득할 수는 없었다. 세균감염이, 죽은 사람마저 살려낼 수 있는 특수한 항체를 가진 그에게 문제가 될 리가 없다.

본즈의 성질을 긁고 싶은 모양이지. 커크는 그렇게 생각하며 피식 웃었다. 친구에 대한 장난기가 되살아난 커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원하는 만큼 가져다가 사용해. 본즈에겐 내가 말해두지.”

“내 말을 믿나?”

“응? 나한테 거짓말 했어?”


커크의 되물음에 칸은 입을 다물었다. 눈썹이 미세하게 씰룩였다. 그의 표정을 ‘한심하다’는 뜻으로 읽어낸 커크는 괜스레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네가 허튼 짓 할 사람이 아니란 건 알아. 지구에 남아있는 네 크루들의 안위가 달린 문제니까. 그들의 목숨과 네 자존심이나 자유 같은 것들을 놓고 저울질 해봐야, 네 선택은 뻔하지. 안 그래?”

“지나치게 순진한 생각이야, 함장.”

“진심은 어디서나 통하는 법이거든.”

“그런 바보 같은 환상에선 언제 깨어날 생각이지? 다시 한 번 배신당한 뒤에?”


커크는 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시원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는 칸이 이상하게 생각할 정도로 칸에게 호의적이었다. 칸은 그것이 자신의 마음을 열게 하기 위한 것이라는 노력임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는 모든 방면에서 뛰어났다. 평범한 인간들의 술수나 감정싸움따위야 그에겐 문제될 것도 없을 터다.

커크는 칸을 이른바 ‘교화’시키겠다며 자신의 선원으로 받아들인 터였다. 그의 호감을 사기 위한 노력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다. 칸은 그런 커크의 처신이 못내 못마땅할 것이다. 목적 없는 호의가 있을 리 없다마는, 그 사실을 알고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기껍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얼마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가식에 기대야하는, 무기력한 자신의 꼴이 마음에 들리가 없었다. 그는 칸이었으니까.


“네가 네 손으로 네 사람의 목을 꺾어버리는 꼴을 내 두 눈으로 본다면, 그때는 한 번 고민해보지.”


커크의 말에 칸의 눈이 조금 커졌다. 그러나 커크가 보기엔 시종일관 딱딱하고 무심한 표정일 뿐이었다. 커크가 한 말의 내용 탓에 화가 난 듯도 했다. 그는 칸에게서 시선을 거뒀다. 커크는 그에게서 그 이상의 반응을 기대하지 않기로 했다.


“제임스.”


그래서 칸이 그의 등을 바라보며 그의 이름을 불렀을 때, 커크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를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칸은 오른손을 움찔거리고 있었다. 손을 뻗으려다가 주먹을 쥐며 눌러 참는 것이 보였다.


“왜 그래?”

“…아니.”


칸은 고개를 저으며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났다. 드물게 방어적인 자세에 커크는 의아함을 느꼈으나 칸은 손을 털며 자세를 바로 했다.


“아무것도 아니다. 실수를 한 것 같군. 신경 쓸 것 없다.”

“아니, 다짜고짜 이름을 불러놓고 그런 말을 해봐야……. 그래, 네 마음대로 해. 나 간다.”


커크는 의료실을 나가기 직전에 다시 한 번 뒤를 돌아보았다. 칸은 한 손으로 제 얼굴을 덮은 채, 천천히 숨을 내쉬고 있었다. 천천히 힘이 빠져 쳐지는 어깨를 보면서 커크는 낯섦을 느꼈다. 평소의 그가 공기처럼 한 겹 두르고 다니는 이질감과는 또 다른 감각이었다. 보아선 안될 모습을 본 것 같은 민망함에 커크는 자리를 떴다.






기지 내에 마련된 복지시설은 모든 선원들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커크는 스팍의 도움을 받아 보고서를 작성하는 일이 바빠, 이틀째 몸을 쉴 틈이 없었다. 다만 휴게실 하나를 통째로 차지하고 앉아 푹신한 소파 위에서 작업을 하는 것으로 타협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창밖으로 지나가는 여성 직원들을 바라보며 아쉬운 입맛을 다신 커크는, 소파 위에서 발버둥을 치며 기지개를 켰다.


“하룻밤 사이에 사고를 치진 않았겠지.”

“누가. 네가?”


소파 등받이에 몸을 푹 파묻고 앉아 보충해야할 의약품 목록을 작성 중이던 맥코이가 시큰둥하게 되물었다. 술루와 체콥, 그리고 스카티까지, 다섯 남자가 모인 휴게실은 복작거리고 답답한 공기가 가시지 않았다.


“아니, 나 말고 칸 말이야.”

“아아, 엔터프라이즈에 남아있겠다고 했다며? 그리고 네놈은 그러라고 냉큼 허락해줬고, 의료 장교인 내 의견을 무시하고 항생제를 다 퍼다 줬다고?”

“그냥 항생제일 뿐이잖아, 본즈. 그걸로 설마 폭탄이라도 만들 생각이겠어?”

“모르지. 그 자식 머릿속에 무슨 화학식이 들어있을지 어떻게 알아. 물리공식 몇 줄로 기술자들은 홀랑홀랑 넘어가고 있는 모양이더만. 아무튼 그자식이 요구한 항생제의 양은 말도 안 되는 수준이었다고. 그 정도를 한 번에 처방했다간, 내 의사인생 처음으로 약 먹다가 죽는 꼴을 보겠더구먼.”

“알아서 하겠지. 자살할 생각은 없을 거야.”

“그걸 네가 어떻게 아냐고? 저 잘난 강화인간께서 다시 한 번 스타플릿의 개가 된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다가 약을 들이마시고 죽어버릴지?”

“그야, 너희만 놔두고 죽을 생각은 없는 나랑 똑같을 테니까?”


스카티는 커크의 말을 듣더니 헛기침을 하며 휴게실을 나갔다. 커크의 말에 휴게실 안에는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한 번 죽었던 놈이 말은 잘 한다.”


맥코이의 투덜거림에도 기운이 빠진 것이 느껴졌다. 덜그럭거리고, 자그락거리는 소음만 들릴 뿐,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스카티가 나갔던 문을 부술 듯 열고 들어오며 패드를 흔들어댈 때까지.


“이 양반 이상한 짓 하고 있는뎁쇼?”

“무슨 일이야, 스캇?”

“밤새 뭐 하고 있나 싶어서 좀 살펴보려고 했는데, 방에도 없고 의료실에도 없더라고요. 그래서 여기저기 찾아보고 있었는데, 함교에서 내내 혼자 놀고 있수다.”

“미스터 스카티. 그런 행동은 보안 규정에 어긋나는…….”


커크는 손짓으로 스팍의 설교를 막으며 스카티의 패드를 제 앞으로 끌어당겼다. 스카티는 화면을 조작해 녹화한 영상을 재생시켰다.


불이 꺼진 함교는 무척 어두웠다. 어둠 속에서 사람이 움직이는 형태만이 희미하게 보일 뿐이었다. 키를 보았을 때, 남자인 것이 확실했다. 칸일 것은 뻔했다.

칸은 계기판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간단한 조작 몇 번으로 화면을 켰다. 우주의 모습이 화면 가득 차올랐다. 우주의 연약한 빛이 함교 안을 희미하게 밝혔다. 칸은 천천히 뒤로 돌아 함장의 의자로 다가갔다. 그리고 손을 뻗었다.

의자를 어루만지는 손길은 느릿했으나 탐욕스럽지 않았다. 의자에 천천히, 거만하게 몸을 눕히듯 기대앉는 몸짓은 자연스러웠다. 커크는 칸의 입술이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그는 우주를 바라보며 혼잣말을 하고 있었다. 그의 오른손이 천천히 올라갔다.

허공을 헤집던 그의 손은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손을 잡고, 팔을 쓸어 올리고, 어깨를 한 번 움켜쥐었다가, 뺨을 쓰다듬었다. 자연스러운 손짓이었다. 수도 없이, 몇 번이나 해본 적 있는 동작이라는 것이 드러나는 손짓이었다.


“뭐라고 하는 거지?”

“뭐라고 하고 있어?”

“응. 그런데 어두워서 입모양이 제대로 안보여.”


기억 속의 누군가를 더듬던 칸은 올라간 만큼 느린 속도로 내려갔다. 허벅지 위에 얌전히 놓인 손은 그 뒤로 움직이지 않았다. 동영상을 몇 배속으로 재생을 해보아도, 칸은 굳어버린 돌조각처럼 꼼짝도 하지 않은 채로 아주 오랫동안 함장의 의자에 앉아있었다. 아침을 바라보는 늦은 새벽이 되어서야, 칸은 의자에서 일어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함교 내부를 정리하고 그대로 빠져나갔다.


“뭘 한 거야, 이 자식은?”

“글쎄. 내 의자가 탐이 났나?”

“말조심해, 짐. 이 자식이 잠재적인 배신자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고. 저게 놈이 선상 반란을 꾀하고 있다는 증거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애초에 안 하지?”

“본즈.”


커크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맥코이는 그런 그에게 다시 한 소리를 퍼부으려다가, 한숨을 내쉬며 입을 다물었다.


“스캇. 이거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도청장치라도 설치하라굽쇼?”

“혹시 모르니까 한 번 해봐. 만약에 오늘 밤에도 칸이 함교로 온다면 뭔가 하나라도 건질 수 있겠지. 그 음성파일, 내가 직접 들을 수 있을까?”

“아무렴. 내가 그 정도도 못할까봐.”


스카티의 자신만만한 목소리를 들으며 커크는 웃었다. 그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리자, 그는 당장에라도 준비하겠다며 휴게실을 나가버렸다. 슬쩍 그를 따라 나가려던 커크는, 맥코이와 스팍의 눈총을 받고 앓는 소리를 내며 다시 소파에 몸을 파묻었다.






커크는 침대에 누워 뒹굴며 패드의 화면을 넘기고 있었다. 엔터프라이즈 내부의 모습이 빠르게 지나갔다. 함선 안에 남아있는 선원들 대부분이 잠자리에 들거나 자신의 일에 집중하고 있었고, 칸은 자신의 침대 위에 반듯하게 앉아있었다. 그가 이윽고 침대에서 일어난 것은, 자정이 지나고도 두 시간이 더 흐른 뒤였다.

칸은 유령처럼 일어나 자신의 방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엔터프라이즈의 함교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아직 함선 내부를 돌아다니는 선원들이 간혹 있긴 했지만, 칸은 그 누구와도 마주치지 않았다. 어젯밤과 똑같이 조용히 함교로 들어온 칸은, 조용히 화면을 켜고, 함장의 의자에 앉았다. 커크는 스카티가 넘겨준 수신기를 귀에 꽂고 전원을 켰다.


[제임스.]


다짜고짜 들려온 자신의 이름에 커크는 놀라 침대에서 몸을 벌떡 일으킬 뻔 했다. 혹시 칸이 도청장치의 존재를, 그리고 우주공간 너머에서 패드를 통해 자신을 감시하고 있음을 눈치라도 챈 것인지.

그러나 칸은 오른손을 뻗어, 누군가의 손을 잡는 시늉을 했다.


[약속하지 않았나. 언제쯤 날 찾아낼 생각인거지.]


그 말을 듣고서야, 커크는 칸이 부르는 이름이 자신의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제임스라는 이름이 흔한 것은 아니었으니까. 어쩌면 기억을 되찾기 전, 존 해리슨이었을 때 알게 된 남자의 이름일지도 몰랐다.


[난 약속을 지키고 있어. 그래, 아직까진 지키고 있지. 그러니까 빨리 나를 찾아내라. 우주 따위는, 시간 따위는 네게 문제될 것이 없다고 하지 않았나.]


칸이 찾는 제임스가 누구인진 몰라도 허세가 심한 양반이었던 모양이다. 커크는 피식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않으며 자세를 편하게 고쳐 누웠다. 자신이 관음증 환자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지금 이 상황은 제법 흥미로웠다. 단단한 석회질 껍데기를 열고 내보인, 조개의 속살 같은 느낌이 들었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입에 담는 칸은, 상당히 매력적인 감칠맛을 가진 모습이었다.


[…나보다 오래 살아남아서, 내 시체를 비웃어주겠다고 하지 않았나.]


귓가에 들리는 칸의 목소리가 한결 부드러워지고, 미약한 떨림이 어리는 것이 느껴졌다. 감정을 읽을 수 있는 칸의 목소리라는 것이 너무 낯설어서, 커크는 눈을 가늘게 뜬 채 패드의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러나 이어지는 칸의 목소리에, 커크는 잠시 말을 잊었다.


[만일 네가 아직도 살아있다면, 3백 살도 넘은 노인이겠군.]


그가 찾고 있는 제임스라는 남자는, 과거의 잔재였다. 3백 년 전의 인간.


[아니. 그럴 리가. 내가 네 말을 왜 의심하겠어. 그랬다면 널 지구에 남기고 떠나진 않았을 거다.]


상상 속의 상대와 대화를 하는 칸은 다정했고, 목소리엔 물기가 묻는 듯 했다. 커크는 그런 그의 목소리가 어색하고, 그 내용이 우스워 눈을 데록 굴렸다. 어느 행성의 상식으로도, 인간이 3백 년 동안 생존하기란 불가능한 문제다. 그 불가능을 뛰어넘어 살아있는 존재의 목소리를 들으며 하는 생각치곤 비관적인 내용이지만, 칸이 말하는 ‘약속’이라는 것은 지켜질 수 없는 것이고 그것을 칸 역시 알고 있음이 틀림없다.


[너를 실망시키느니 죽는 게 낫지.]


그의 목소리에서 묻어나는 그 다정함에, 커크는 괜스레 민망해져 패드를 엎어버리고 수신기의 전원을 껐다. 내일 다른 선원들이 물어보면, 마커스 제독에 대한 뒷담화나 하고 있었더라고 둘러대기로 마음먹었다.

AND

*칸커크

*리부트 스타트렉 영화만 감상한 뒤 쓰는 날조글입니다. 캐릭터 붕괴, 원작 붕괴, 원작 설정 붕괴 주의.

*필자의 칸 편애 주의. 칸 보고 싶어서 쓰기 시작한 글이라 어쩔 수가 없습니다.


[My Crew]

6. 실전의 가르침

    - 이 세상에 돌이킬 수 있는 것은 없어.”


“지도자의 생명은 그 무엇보다 무겁고 귀중한 거야, 함장. 왕이 살아있는 한, 그 국민은 어디서든 혼란에 빠지지 않을 채 살아갈 수 있다. 돌아갈 장소가 어딘가에는 남아있음을 알기 때문에. 우두머리는 단순히 영웅 심리에 취해서, 자신의 수족들을 보호하겠다는 명목으로 자위하며 사지로 뛰어들어선 안 돼. 막중한 책임을 외면하지 않고 자신의 목숨을 바쳐 무고한 수많은 사람들을 살린 영웅? 평화의 시대에나 통하는 지루한 논리다.”


녹색 외계인은 구속구를 채우기 위해 허공을 배회하는 칸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칸의 입가에 삐딱한 미소가 어렸다. '항복'을 맹신하는 어리석은 적. 평화와 평온에 찌든 순수하고 젊은 함장. 이 부드럽고 여린 시대는 그에게 있어 하품이 나올 정도로 따분하고 밋밋한 시간이었다.

그러나 그런 세상에도 여전히 부조리는 존재하고, 불필요한 권력과 계급이 존재하며, 부당히 착취당하는 가녀린 자들이 있다. 그의 임무는 여전히 끝나지 않은 것이다. 3백여 년을 뛰어넘은 지금도 여전히.


“그래서 네 한 목숨 보전을 위해서 엔터프라이즈를 배신하고, 냉동인간들의 목숨을 포기하겠다는 소리야? 참 대단한 성군 나셨군. 적어도 네 가족에 대한 애정은 진짜인줄로 알았더니.”

“적절한 단어를 고르지 못하는군, 함장. 난 그 누구도 배신하지 않았어. 내가 누굴 배신할 수 있다는 거지?”


커크를 바라보는 칸의 시선은 차분했다. 커크는 그의 시선에서 어떤 감정을 읽어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배신은 '믿음'으로부터 나오는 행위다. 엔터프라이즈호에 탑승한 그 누가 나를 믿고 있다는 거지? 지금 내가 배신할 수 있는 존재가 이 우주를 통틀어 몇이나 될 것 같나? 어느 누가 내게 믿음을 보내고 있다는 거지? 나를 믿는 이들은 모두 차갑고 오래된 잠에 빠져 300년째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들 말고도 내게 마음을 쓸 여지가 있는 자가 존재한다면, 혹시나 하는 기대를 걸고 있던 당신 정도겠지.”


힐난의 빛인가. 그도 아니라면 오랫동안 지쳐온 자의 삭막하고 건조한 눈빛인가. 사사건건 간섭하고 있는 자신에 대한 짜증. 위험과 위협과 자극에 대한 흥분. 다채롭지만 하나같이 사납거나 부정적인 감정들 위로 두텁게 한 겹 깔린 오만함과 우월감.


“아니면 내가 순순히 항복을 했다고 '믿고'있는 어리석은 이 녹색 병사들이라던가.”


칸은 잡힌 손목을 천천히 치켜들었다. 동료에게서 넘겨받은 구속구를 칸의 손목에 막 채우려던 상대는 예상외의 악력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커크가 칸이 마지막에 덧붙인 말을 채 이해하기도 전에, 비틀린 입술 사이로 음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실전의 가르침을 주겠다, 함장.”


그는 커크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팔이 빠르게 휘둘러졌다. 그는 그의 손목을 단단히 움켜쥐고 있던 상대의 손을 떨쳐내고 그대로 손을 위로 뻗었다. 창백한 손가락이 녹색 비늘 사이에 구슬처럼 박혀있던 상대의 눈을 후벼 팠다. 상대는 비명을 지르며 구속구를 놓쳤고, 칸은 그대로 상대의 멱살을 움켜쥐고 끌어당겼다.

외계인 병사들이 당황하여 커크에게로 겨누던 무기를 칸에게로 겨눌 즈음엔, 칸은 안구를 잃은 인질의 목을 움켜쥔 채 그들의 흐트러진 포위망을 벗어나 있었다. 인질의 두 눈에서 거무죽죽한 피가 눈물처럼 흘렀다.


“첫 번째, 모든 종족을 통틀어 가장 보편적이고 치명적인 급소는 눈이다. 시각이 완전히 퇴화하지만 않았다면 말이야. 지금처럼 정체를 알 수 없는 적들의 적진으로 침투한 경우, 가장 먼저 조명 시스템을 살펴라. 빛에 대한 의존도가 적을수록 고통과 일시적인 혼란을 주는 정도의 효과밖에는 줄 수 없으니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하지. 하지만 대부분은 상대를 전투 불능 상태로 만들고 효과적으로 제압할 수 있다.”

“…이, 이 미친 자식.”


커크는 얼이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제 병사들은 모두 커크에게서 등을 돌린 채 칸을 향해 무기를 겨누고 있었다. 혼란이 가스처럼 좁지 않은 그 공간을 가득 메웠다. 커크는 의식적으로 숨을 쉬었다. 가슴이 영 답답하고 뻐근했다. 군집한 녹색 병사들 사이에서 누군가가 낮고 빠르게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그가 지휘자인 모양이었다.

칸의 입꼬리가 한차례 더 뒤틀리며 완연한 비웃음을 그렸다. 지휘관 즈음 되는 자라면, 적어도 생각은 할 줄 안다는 뜻이렷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분명히 통제할 수 없는 변수는 존재한다.


“두 번째, 지적 생명체에게는 감정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이용해라. 공동체에서는 어떤 방식으로든 인연이 생기고, 감정적인 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지. 사지로 향하는 성질의 임무를 수행중이거나, 지속적으로 위험에 노출되는 집단이라면 더더욱. 감정은 실전에 있어서 그 무엇보다 강력한 약점이다.”


칸은 잔인하게 눈을 빛내며 인질로 잡힌 병사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녹색 비늘 덮인 인질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처절한 비명을 내뱉는 것이 보이고 들렸다.


“인질이 있다면 감정적인 동요를 일으키기 훨씬 수월하지. 인질에게 굴욕을 안겨라. 끔찍한 고통을 주는 정도면 돼. 간단하지. 비명을 지르게 하고, 비굴하게 목숨을 구걸하도록 만들어.”

“적당히 해, 이 자식아!”

“그러다보면…”


우득, 어깨가 완전히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인질의 찢어지는 비명이 허공을 갈랐다. 병사 중 하나가 괴성을 지르며 칸을 향해 뛰쳐나왔다. 그는 지휘관의 통제를 벗어나 칸에게 무기를 겨누고, 무기의 작동 장치를 건드렸다. 뭉툭한 쇠막대기처럼 보였던 그것의 앞부분이 떨어져 나가며 날카롭고 거대한 송곳 같은 날이 드러났다.


“주로 감수성이 풍부하고 어린놈들이 젊은 혈기를 참지 못하고 저렇게 중요한 정보를 노출하곤 하지.”


병사는 네 개의 손으로 무기를 단단히 움켜쥔 채 돌진했다. 칸은 인질로 잡고 있던 병사의 어깨를 놓고, 그에게 달려드는 상대를 향해 집어던졌다. 달려오던 그는 힘없이 나가떨어지는 그의 동료를 붙잡기 위해 세 개의 손을 무기로부터 떨어트렸다. 그가 동료의 몸을 단단히 끌어안았을 때, 칸은 이미 자리를 박차고 그의 앞으로 튀어나간 뒤였다.

칸은 그의 손목을 차올렸다. 뼈가 부러지는 소리에 커크는 미간을 좁혔다. 병사는 신음을 흘리며 무기를 놓쳤고, 동료의 몸을 끌어안고 그대로 바닥으로 넘어지듯 쓰러져 나뒹굴었다.


“자, 사용 방법을 도저히 알 수 없던 쇠막대기에서 살상력을 가진 날카로운 무기가 되었군. 이제 세 번째다, 함장. 세 번째 가르침은, 어쭙잖은 예상을 하지 말라는 거야.”


칸은 바닥으로 떨어지는 무기를 날렵하게 낚아챘다. 날은 서슬 퍼렇게 날카로웠다. 손잡이를 한 손으로 잡고 가볍게 휘둘러보는 동작에서도 바람을 가르는 위협적인 소리가 났다.


“모든 경우의 수를 떠올리고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하며 유동적이면서도 완벽한 전략을 세울 자신이 없다면, 예상은 곧 편견과 선입관이 되어 다방면의 사고를 차단하지.”


사방에서 금속성의 소음들이 들려왔다. 지휘관의 명령에 따라 병사들이 일제히 각자 무기의 안전장치를 해제하고 있었다.


“아무런 생각을 하지 마. 직접 목격한 것만이 그 자체로 진실이고 사실이다. 닫혀있는 상자 속 고양이의 생사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듯이.”

“칸.”


칸은 무기를 높이 쳐들었다. 그렇게 위협적인 자세로 석상처럼 흔들림 없이 버텨선 채, 싸늘한 시선으로 사방을 훑었다.


“신체구조는 제법 많은 정보를 줄 수 있지. 이들은 네 개의 팔을 가지고 있으니 대부분의 무기들은 네 개의 손을 필요로 할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것은 단순한 물리 타격 계열의 무기들뿐일 것인데, 외피나 뼈의 강도는 지구인의 두 배 가량 되는군. 아쉽게도 당신이 대인격투능력을 직접 발휘하기는 힘들겠어.”


압도하고 있다. 그가 말하던, 야만성으로. 살기와 폭력으로. 그의 본질에 가까운 것. 모든 생명체의 본성에 새겨진 그것으로.


지휘관은 더 이상 돌발행동을 하는 병사가 생기지 않도록 목소리를 높여 끊임없이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좁고 밀폐된 공간에, 적은 하나고 그들은 여럿이다. 섣불리 무기를 사용하기 시작했다간 그들끼리 서로를 상처 입히게 될 가능성이 농후했다. 게다가 그곳은 무기고의 앞이었고, 동력실의 지척이었다. 전투가 무기에 영향을 주어 연쇄적인 피해가 생길 가능성도, 동력실까지 퍼질 피해도 생각해야했다.

그리고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자신의 병사 두 명을 자신의 발치에 늘어놓고 응시하고 있는 정체불명의 침입자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확연한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그다지 불리한 위치가 아니라는 사실을. 적어도 평범한 병사나 용병은 아니라는 소리다. 평범하지 않은 사고를 할 수 있는 자.

그러나 그는 혼자다. 일행이 하나 있긴 하지만, 그의 동료라는 자는 그에게 무기를 겨누고 있지 않은가-심지어 그 무기조차 거꾸로 들고 있다-. 절대적인 우위는 자신과 병사들이 가지고 있다. 지금처럼 도발에 넘어가 한 명씩 차례대로 당하지만 않는다면. 병사들을 진정시키고, 차분히 상대해나가면 될 일이다.


“모든 문명의 파악은 무기에서 시작해라. 생명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것……. 무기와 의학 기술은 항상 기술력의 최첨단을 달리기 마련이지. 무기도 현지에서 조달하는 편이 효율적이다. 지구의 무기가 외계인에게는 통하지 않을 수도 있으니.”

“그만둬, 칸. 제발 그쯤 해! 돌이킬 수 없는 짓은 하지 말라고!”

“본인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대해선 고민하지 마. 적의 손을 빌리는 것을 부끄러워할 필요 없다. 지금처럼. 어떤 고민이나 시행착오를 거칠 필요도 없이, 모든 무기가 즉시 사용 가능한 상태로 바뀌지 않았나?”


칸은 커크의 외침을 듣지 못한 척,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으며 높이 쳐들었던 팔을 휘둘렀다. 그러나 그 끝에 찔린 것은 칸의 발밑에서 버르적거리던 두 병사가 아니었다. 매서운 소리와 함께 바람을 가르며 날아간 날카로운 끝에 꿰뚫린 것은, 빠르고 또렷한 목소리로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리고 있던 자였다. 지휘관으로 추정되는.


“네 번째. 지휘관은 스스로의 신분을 노출하지 말 것. 반대로, 수적 열세에 처했을 때에는 지휘관 사살을 최우선으로 여길 것.”


거무죽죽한 피가 또다시 튀었다. 칸이 던진 날카로운 창은 상대의 머리 절반을 날려버리면서도 멈추지 않고 날아가 뒤에 서있던 병사의 가슴에 꽂혔다. 날카로운 비명이 울려 퍼짐과 동시에, 그 공간의 모든 이는 혼란에 빠졌다. 한 사람을 제외하고.

정의를 내릴 수도, 마땅한 호칭을 붙일 수도 없는 무기들이 두 명의 인간을 노리고 발사되고 휘둘러졌다. 대부분의 병사들은 칸을 향해 몰려갔다. 커크는 어정쩡하게 들고 있던 무기-아직도 어떻게 작동을 시켜야 하는지 파악하지 못한-를 내던지고 칸이 던진 창을 향해 달려갔다. 지구인의 것보다 배는 높은 점성을 가진 피가 무기에 끈적하게 엉겨붙어있었다. 그러나 그것에 한가롭게 불만을 터트릴 여유는 없었다. 병사 두어 명이 커크를 발견하고, 그가 칸의 동료였다는 사실을 상기한 것이다. 더불어 그가 칸에 비해선 훨씬 덜 호전적이며, 제압하기 쉬우리라는 예상을 하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이다.



“실드 잔여 에너지가 27%로 떨어졌습니다.”

“스코티. 워프 동력의 에너지 일부를 실드로 돌려주십시오. 오차범위를 5% 이내로 고정하고 잔여 에너지를 50%로 유지해주세요.”

“오-케이.”


술루의 보고를 들은 스팍은 담담히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그에 대답하는 스카티의 말꼬리는 늘어졌다. 그들이 보고 있는 소리 없는 영상은 등장인물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선명하거나 자세한 것이 아니었다. 인간의 형체를 하고 있는 것이 둘, 그리고 비슷하지만 한 쌍의 팔이 더 달린 것이 다수.

엔터프라이즈에서 지켜볼 수 있는 것은 검은 단색을 배경으로 격하게 움직이는 초록색, 수십 개의 외곽선들이었다. 꼭 삼차원 영상 모델링 프로그램처럼 보이는 것들이, 화면을 가득 채우며 격하게 넘실거렸다. 오로지 선으로만 이루어진 2차원의 자료로 상세한 상황을 파악하기는 어려웠다.

스팍은 귓가에서 끊임없이 들려오는 파열음과 비명소리에 불쾌함을 느꼈다. 그러나 수신기를 귀에서 빼낼 수는 없었다. 싸움에 열중하고 있는 칸은 잠시 말을 멈췄지만, 그가 언제 다시 입을 열지 쉽게 예상할 수 없었다. 그가 내키는 때, 하고 싶은 말이 문득 생각나면 그는 망설이지 않고 다시 말을 꺼낼 것이다. 그러면 순진한 그들의 함장은 그의 뱀 같은 목소리를 다시 마주해야 한다.

커크를 칸의 곁에 혼자 놔둘 수는 없었다. 이미 그들은 자신의 손이 닿을 수 없는 곳에 있지만, 귀만이라도 열어두어야 했다. 속내를 알 수 없는 칸의 의중을 그나마 짐작이라도 할 수 있는 것은, 커크가 아니라 스팍이었다.



푸욱. 살이 찢기고 무언가가 꽂히는 소리와 함께 비명이 울렸다. 숨이 끊어진 상대가 천천히 바닥으로 쓰러졌다. 커크는 들고 있던 무기를 던지듯이 내려놓고 숨을 골랐다. 폐가 찢어질듯 아팠다. 그는 힘겹게 헐떡이며 칸을 보았다. 칸은 시체들 사이에 우뚝 서서, 눈을 감고 고개를 쳐든 채 가만히 서있었다. 그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커크로서는 알 수 없었다. 기도를 하는 듯도 했고, 숨을 고르는 것 같기도 했다.

커크의 시선을 느낀 칸은 눈을 뜨고 천천히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청록색 눈동자에 열기라곤 없었다. 바닥에 널린 시체보다도 더 차가운 온도였다.


“돌이킬 수 없는 짓은 하지 말라고?”


칸은 커크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그 표정은 결코 호의적이지도, 살갑지도 않았다. 언제나와 같은 비웃음도 아니었다. 체념 섞인 그 표정은 어쩌면 지친 듯 보이기도 했다.


“마지막 가르침이다. 함장.”


칸은 커크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악수를 청하거나, 부축을 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검은 피로 흠뻑 젖은 손바닥을 보여주며 말했다.


“이 세상에 돌이킬 수 있는 것은 없어.”


칸의 손바닥을 내려다보는 커크의 시선은 가라앉아있었다. 칸은 커크를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커크가 놀라 그의 팔을 쳐내기도 전에, 칸은 그의 주머니에서 통신기를 꺼내갔다.


“듣고 있나, Mr. 스팍.”


[예.]


“함장을 데려가라. 이런 상태로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아. 도움은커녕 제 몸 하나 제대로 지키지 못할 것 같군. 날 감시할 필요는 없다. 난 당신들을 배신하지 않아. 적어도 이번 항해에서는.”


[제가 당신을 믿을 수 있는 타당한 근거를 제시해주시면 저도 안심하고 당신의 말에 따를 수 있겠습니다만. 현재로선 당신의 말을 신뢰할 수 없습니다.]


“믿지 않겠다면 어쩔 수 없지. 동행하도록 하겠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내가 함장을 보호하지 못해 그의 신변에 문제가 생긴다면 그 책임은 누가 지게 되나? 만일의 사태를 예상해서 함장의 보호를 요청한 나인가, 아니면 그 요청을 거절한 당신인가?”


칸은 더 이상 스팍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손에 힘을 주었다. 그의 손가락 사이에서 소형 통신기는 간단하게 부서졌다. 부서진 부속품이 바닥으로 우수수 떨어졌다. 칸은 남은 잔해를 커크를 향해 휙 던지고 걸음을 옮겼다.

커크는 정신을 차리고 그를 쫓아가려했다. 그러나 곧 그의 몸은 빛무리에 휩싸였다. 익숙한 감각이 찾아왔다.


“짐!”


가장 먼저 들린 것은 맥코이의 목소리였다. 커크는 감았던 눈을 떴다. 쿵쿵거리는 발소리가 울렸다. Dammit, Jim. 이젠 입버릇처럼 따라붙는 어휘가 익숙했다.


“이게 무슨 꼴이야. 일단 가서 좀 닦아야겠어.”

“난 괜찮아, 본즈.”

“의사로서 충고하건데 절대 안 괜찮아. 이 검은 거 뭐야. 다 피잖아? 네 면역체계로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장담 못해. 빨리 가서 씻고 나와.”

“하지만 아직 칸이 저기 남았어. 그 녀석이 무슨 일을 벌일지…….”

“그건 너보다 저 홉고블린이 더 잘 처리할 테니까 넌. 제발. 좀. 가서. 씻어.”


맥코이는 숫제 으르렁거리며 한 마디 한 마디를 뚝뚝 끊어 말했다. 커크의 고집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커크는 온몸에 뒤집어쓰다시피 했던 검은 피를 닦아내고,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마자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맥코이에게 붙잡혀 의료실로 끌려갔다. 맥코이의 험악한 기세에 눌린 커크는 조용히 입을 다문 채 하이포 세례를 받고, 채혈과 트라이코더를 포함한 각종 검사들을 마친 뒤에야 풀려날 수 있었다.

그가 함교로 돌아왔을 때, 스팍은 정면에 출력되는 영상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선원들이 제각기 자신의 업무에 집중하는 동안, 스팍과 체콥, 스카티는 말없이 영상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어떻게 됐어, 스팍?”

“함교를 성공적으로 장악했습니다.”


스팍은 의자에서 일어났다. 함장의 의자에 털썩 주저앉은 커크는 녹색으로 가득한 화면을 보았다. 제법 오랫동안 영상을 들여다보아 익숙해진 스팍이나 다른 크루들과는 달리, 커크는 화면이 무엇을 뜻하고 있는 것인지 빠르게 파악할 수는 없었다.


“이게 저쪽 함선 내부 영상이야?”

“예. 직접적인 영상은 감지할 수 없고, 모션센서를 해킹해 입체 영상으로 바꿔 출력하고 있습니다.”


모든 녹색 선이 멈춰있는 가운데, 천천히 움직이고 있는 형체가 하나 있었다. 여러 개의 선이 겹쳐져 뚜렷한 모양을 파악할 수는 없었지만 그것이 칸임은 쉽게 알아챌 수 있었다.


“저거 칸 맞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야?”

“영상을.”


스팍의 목소리가 들리자 즉시 화면에 출력되던 영상이 바뀌었다. 적함으로 전송되기 전의 영상을 아직 기억하고 있던 커크는 당황하여, 눈을 크게 뜨고 두어 번 깜빡이는 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엔터프라이즈를 둘러싸고 있던 함대는 사라졌다. 그들의 함선 주변을 맴도는 것은 우주쓰레기라고 불릴 것들이었다. 부서진 함선의 잔해들.

광자어뢰와 비슷한 모양을 한 정체 모를 무기들이 함선들 사이를 날아다녔다. 조준은 정확했고, 비록 구식 미사일일지언정 파괴력은 무시할 수 없었다. 엔터프라이즈호에는 아무런 타격을 주지 못하던 그 공격으로, 저들의 함선은 처참하게 부서져갔다.


“함장님. 슬슬 그를 이쪽으로 전송해야합니다.”

“아아, 그렇지. 체콥. 전송할 수 있겠어?”

“예, 함당님! 잠씨만 기다려주쎄요!”


통신기 너머로 체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커크를 함선으로 전송시킨 것은 체콥이었다. 칸 역시 그가 수동으로 조작하여 전송시켜올 생각인 듯 했다.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는 함선에서, 분주히 움직이는 상대를 정확히 잡아내기란 제법 까다로운 일이었으니까. 엔터프라이즈에선 그가 가장 적임자였다.


“조준이 끈나씁니다, 함당님! 당장 전송 가능함니다!”

“그래. 그대로 유지해. 저 자식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 돌발행동에도 대처할 수 있게 준비하고.”


교전은 쉽게 끝나지 않았지만 승기는 한쪽으로 확실히 기울고 있었다. 조금 전 장악한 타문명의 함선을 제 손발처럼 부리는 것을 보며, 커크는 마른 침을 삼켰다. 고전 영화에나 나올법한 촌스러운 교전은 생각보다 화려하고 처절했다. 안전장치가 확실히 마련되지 않은 함선들은 적중하는 구식 미사일 하나만으로도 완파되어버렸다.

그리고 우주공간을 가로지르던 구식 미사일 하나가, 칸이 타고 있는 함선에 맞는 것을 보았다. 그 장면을 목격한 커크는 황급히 예의 화면을 찾았다. 모션센서를 해킹하여 출력하는 그 영상에서, 누군가가 바닥으로 쓰러졌다가 비틀거리며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치명적인 피해를 입힐 만큼 위력적인 공격을 가한 것은 아니었으나, 함선의 일부가 작동하지 못하게 된 것 만큼은 확실해보였다. 계기판을 조작하던 칸이 사납게 내리치는 것을 보았다. 비록 초록색 선화로 이루어진 형체이기에 자세한 표정을 살필 수는 없더라도, 그가 분노하고 있음은 너무나 확실했다.


그리고 그가 다시 계기판을 들여다보는 모습을 보고, 커크는 무언가의 예지를 느꼈다. 직접 겪은 일은 아니기에 데쟈뷰라고 부르기에는 애매했다. 그러나 그가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인지는 분명했다.


“젠장, 저 미친 놈. 체콥, 내가 신호하는 즉시 그를 전송해와. 다른 선원들은 모두 자기 자리를 지키고, 충격에 대비한다.”


커크는 초록빛 화면속의 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의 손이 마지막으로 계기판을 내리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가 시체가 널린 그 조타실 내부에서 홀로 분주하게 오가는 동안, 우주를 비추고 있는 화면에선 움직임이 끊이지 않았다. 칸이 타고있는 함선이 제자리에서 천천히 회전하는 동안, 미사일이 두 대나 더 명중했다. 함선에선 이미 불꽃이 일고 있었다.

칸이 주먹으로 내리치듯 계기판을 강하게 두드리는 순간, 커크는 고함을 버럭 질렀다.


“지금. 체콥, 지금!”


그 순간 칸의 함선이 질주하기 시작했다. 급발진이나 다름없는 급격한 속도로 쏘아지듯 튀어나갔다. 그 목표는 아직 격추시키지 못한 세 대의 다른 함선들이었다. 커크의 귓가에 체콥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 잠시만요, 타겟을 놓쳤……! 아닙니다, 잡을 수 이써요! 잡을 수……!”



AND

*칸커크

*리부트 스타트렉 영화만 감상한 뒤 쓰는 날조글입니다. 캐릭터 붕괴, 원작 붕괴, 원작 설정 붕괴 주의.

*필자의 칸 편애 주의. 칸 보고싶어서 쓰기 시작한 글이라 어쩔수가 없습니다.

 

[My Crew]

5. 잠입과 배신과 인질

    - “네 놈을 믿는 게 아니었어.”

 

Dammit. 맥코이가 습관적으로 중얼거렸다. 또 시작이군. 저 망할 놈의 자식. 칸은 자신의 어깨를 잡은 커크의 손을 한 번 보고, 눈썹을 치켜 올리며 커크의 얼굴을 한 번 보았다. 커크는 말간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나도 갈 거라고. 두 번 말하지 않겠다는 듯, 그의 표정은 더할 나위 없이 고집스럽고 확고했다.

 

“저는 반대합니다, 함장님.”

 

스팍은 기계적이고 딱딱한 목소리로 커크에게 반대하고 나섰다. 그러나 커크가 그를 돌아볼 때까지, 그의 시선은 칸의 뒤통수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짧게 자른 단정한 머리와, 검은 셔츠 위로 조금 드러난 목덜미. 그곳에 칸의 얼굴이라도 있는 양 단호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칸도 분명히 그의 시선을 느꼈다. 그러나 새삼스레 뒤를 돌아보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스팍은 이 함선의 그 누구보다도 강박적으로 규칙을 지키는 벌칸이었다. 그가 칸이 대처할 수 없을 돌발적인 행동을 취할 리는 없다. 그러니 굳이 몸을 돌려 그에게 시선을 던지거나 새삼 경계할 필요는 없다. 벌칸은 논리적인 종족이니, 논리적으로 특정한 예상범위를 벗어나는 행동은 하지 않을 것이다.

스팍은 다른 벌칸에 비해 감정적인 행동을 보이는 경우도 종종 있었으나, 그것은 그다지 흔한 경우는 아니었다. 치명적인 위급사항이거나, 커크의 안위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사건일 때. 지금은 둘 다 해당되지 않는다. 그들에게 나름대로 맹렬한 공격이 쏟아지고 있었으나 아직 실드가 소진되기까지 한 시간 정도의 여유가 있다. 커크가 위험을 무릅쓰겠다고 버티는 중이지만 칸이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은 아니니 그를 향해 거부감을 드러낼 이유도 없다……. 스팍의 움직임은 쉽게 예상할 수 있고,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그에게 대처할 수 있는 계획을 짜는 것도 쉽다.

이 순간 칸의 신경은, 온통 커크에게로 쏟아지고 있었다. 함장이 이토록 쉽게 함선을 비우겠다는 뜻을 내비친다. 일 년 전에는 상황이 워낙에 급박했으니까. 벤전스는 당장에라도 엔터프라이즈를 가루로 만들고 탑승자 전원을 죽여 버릴 수 있을 만큼 막강하고 잔인한 상대였으니까.

그러나 지금 그들이 상대하는 적은 결코 위협적이지 않았고, 상황도 그다지 급박하지 않았다. 실드의 잔여 에너지가 떨어진다고 해도, 비상 전력이나 워프코어의 에너지를 일부 실드로 돌려 사용한다면, 조금 과장해서 이 자리에서 이틀은 더 버틸 수 있을 것이다. 그 안에 적 함대의 무기가 떨어지지 않을 리도 없고. 사실 칸의 말을 깡그리 무시하고 당장 워프를 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

혹여 칸이 그들을 배신할 꿍꿍이가 있다고 여기고 감시역을 자처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아니면 또 다른 속셈을 품고 있거나, 갑작스레 출현한 함대의 공격 자체가 스타플릿의 연극일지도 몰랐다. 함장인 커크만이 사전에 언질을 받은, 누군가를 속이기 위한 사기극. 그밖에도 있을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를 생각해보며 칸은 짧은 생각에 빠졌다.

그것은 칸이 커크를 겪어보지 못했기에 생긴 혼란이었다. 커크가 어디로 튀어 오를지 모르는 고무공 같은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무척 단순한 인간임을 겼어보지 못했기 때문에. 새로운 사건이나 자극에 얼마나 눈을 빛내는 인간인지를.

 

“함장님이 방금 말씀하셨듯이 저 미확인함선 안에 어느 정도의 병력이 존재할지 알 수 없습니다. 존 해리슨 중령이 전송되어 넘어가겠다는 작전 역시 비합리적이라고 판단되어 전적으로 찬성할 수는 없지만, 함장님께서 그와 동행하시겠다는 것은 납득조차 하기 어려운 제안입니다. 아군의 전력이 부족할 경우를 걱정하시는 거라면 차라리 전투장교 몇 명을 동행하게 하시는 게 낫습니다.”

 

스팍의 목소리를 귓등으로 흘려들으며 생각을 마친 칸은 그들이 나누는 대화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자신이 어떤 결론을 내리던지, 그에겐 커크의 동행을 거부할 이유나 권리가 없었다.

그렇게 판단한 칸은 어깨를 가볍게 털어 커크의 손을 떼어내고,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스카티를 지나쳐 성큼 걸음을 옮겼다. 전송실을 찾기 위해 관광객처럼 길을 물을 필요는 없었다. 그는 이미 엔터프라이즈의 내부 구조를 대부분 외우고 있었다. 스카티는 커크와 스팍, 그리고 멀어져가는 칸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칸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은 곧 함교를 벗어났다.

 

“스팍.”

“예. 함장님.”

“날 말리는 게 아무런 소용이 없을 거라는 건 알고 있지?”

“예상은 하고 있습니다만 불합리한 결정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저의 의무이자 제가 맡은 가장 중요한 업무입니다. 함장님.”

 

커크는 늘 한결같은 답을 하는 그의 일등 항해사를 보며 가볍게 웃었다. 그와 함께 우주를 누빈 것이 벌써 몇 년째인데, 이쯤 되면 슬슬 지겨워서 포기할 법도 한데. 맥코이는 이제 커크의 무모함에 제법 적응해서, 그가 무슨 사고를 치겠다고 통보를 하든지 간에 그저 가볍게 비속어를 내뱉으며 무자비하게 하이포를 찔러 넣을 준비를 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자, 그럼 내가 없는 동안 우리의 엔티를 잘 부탁해. 임시 함장.”

“당신의 신변에 문제가 생기면 어떻게 합니까?”

“비상 프로토콜을 따라야지. 네가 제일 잘하는 거잖아?”

 

커크는 스팍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리고 스팍이 그를 향해 다시 입을 열기 전에, 낮고 빠르게 읊조렸다. 입술조차 거의 움직이지 않고.

 

“칸을 혼자 저기로 보낼 수는 없어. 그가 저 함선을 탈취한 뒤에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 난 지금 감시역을 자처하는 거야, 스팍. 오, 아니, 스팍. 지금은 그냥 입 다물고 내 말만 들어. 난 당장 칸을 따라가야 하니까 너랑 실랑이를 할 시간은 없다고. 아무 일 없을 거야. 칸은 지금 인질이 잡혀있어. 그가 전혀, 전, 혀, 통제할 수 없는 곳에. 난 안전해. 적어도 칸으로부터는. 저 정체불명의 적군으로부턴 어떨지 모르겠지만.”

“함장님.”

“그래도 안심이 안 되지? 그럴 줄 알았어. 스캇한테 미리 받아둔 거야. 이거 받아.”

 

커크는 스팍의 손에 작은 기계를 쥐어 주었다. 스팍이 용도를 묻기도 전에 커크는 자신의 귀를 툭툭 두드렸다.

 

“장거리 도청장치야. 성능은 확실하지. 스카티가 직접 만든 거라고. 정 안심이 안 되면 그거라도 귀에 꽂고 있어. 칸이 하는 말 정도야 남김없이 네 귀로 전해줄 거야. 저 자식이 무슨 수작을 부리든, 내가 눈치 못 채면 너라도 눈치 채야해.”

“하지만, 함장님. 도청장치로는 그의 비언어적 표현까지 감지할 수 없습니다. 그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서라면 차라리 당신 대신 제가 그와 동행하는 편이 효과적입니다.”

“저 젠장 맞게 우월한 자식은 적어도 너보단 나를 더 좋아하니까 말이야. 음, 아니지. 좀 덜 싫어하니까 말이야.”

 

위험 속으로 뛰어드는 것은 그의 습관과도 같은 것이었다. 스팍은 결국 커크의 고집을 꺾을 수 없음을 인정하고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커크가 넘겨준 도청장치의 송신기는 손 안에 단단히 감추고 있었다. 금속과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작은 기계가 체온으로 미지근하게 덥혀지는 것이 느껴졌다.

커크는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몇몇 사람들에게 경쾌하게 손을 흔들어준 뒤 칸과 스카티를 찾아 함교를 나섰다.

커크가 전송실에 도착했을 때, 스카티는 칸에게 손바닥 크기의 작은 기계를 들이대며 열을 올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 안에는 일종의 해킹 프로그램이 들어있다, 이 말이요. 댁이 이걸 저 함선의 모션 센서에 접속만 시켜주면 이쪽에서 그쪽 상황을 실시간으로 모니터링 할 수 있다고.”

“날 감시하기도 한결 편해지겠지. 하지만 그 기계와 프로그램을 사용해서 모션 센서를 해킹하려면 일단 ‘연결’해야 할 텐데. 연결 단자가 맞지 않는다면 애초에 접속조차 불가능해. 저 함선의 컴퓨터에 원격 접속 기능이 탑재되어있다는 보장도 없다.”

 

칸은 스카티의 손에 들려있던 패드를 향해 고갯짓을 하며 손을 내밀었다. 넘겨달라는 뜻이었다. 스카티는 아무런 생각 없이 패드를 넘겨주려다가 멈칫했다.

 

“이건 왜 달라고 그러쇼?”

“해킹 프로그램의 알고리즘을 확인하려는 거다. 이 기계를 저 함선의 컴퓨터에 직접 연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느니, 차라리 저곳으로 전송된 뒤에 내가 중앙 프로그램에 접속해서 센서를 해킹하고 엔터프라이즈에 연결하는 것이 빠를 거야.”

“우리랑 같은 언어권일 줄은 어떻게 알고?”

“언어는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을 거다. 중요한 건 시스템의 구성이고, 지적 생명체가 최고의 효율을 위해 상상하고 구상하고 실제로 구현할 수 있는 알고리즘은 대부분 엇비슷하지. 오차범위가 그리 다양하거나 넓진 않아.”

 

스카티는 반신반의한 표정으로 기계를 패드에 연결하고, 해킹 프로그램의 알고리즘을 허공으로 옮겨 띄웠다. 칸이 복잡한 수식과 문자들을 빠르게 눈으로 훑고 있을 즈음, 커크가 전송실로 들어섰다.

 

“뭐야, 스캇?”

“‘Mr. Super’의 뛰어난 해킹 능력을 목격할 준비를 하고 있수. 조만간 명예퇴직이라도 생각해봐야겠구먼. 내 후임은 Mr. Super로 해주쇼. 실력도 좋고, 똑똑하고, 헤어스타일도 당신만큼이나 완벽하네.”

 

스카티의 빈정거림인지 별 의미 없는 푸념인지 모를 주절거림이 끝나기 전에, 칸이 먼저 복잡한 홀로그램으로부터 시선을 떼었다. 스카티는 눈을 끔뻑였고, 커크는 간단히 몸을 풀고 있었다.

 

“그만 출발할까, 함장. 아마 페이저 무기는 사용하지 않는 편이 좋을 텐데, 괜찮겠나.”

“걱정 마. 대인격투실력은 평균 이상이라고.”

 

스카티는 어깨를 으쓱이곤 전송을 위해 계기판 앞에 자리를 잡았다. 최대한 정확한 좌표를 측정하여 입력한 뒤 간단히 화면을 조작한 스카티는 두 사람을 향해 간단한 손 인사를 건넸다.

 

“이번엔 배신당하지 마쇼.”

 

스카티가 커크를 향해 농담처럼 한 마디를 던지는 순간, 두 사람은 엔터프라이즈호를 떠났다.

 

 

 

전송이 끝나고 시야가 확보되자 커크는 주변을 휘 둘러보았다. 그로선 난생 처음 보는 물건들이 즐비한 곳이었다. 그러나 그곳이 어디인지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무기고인 모양이네.”

“그래.”

 

칸은 컴퓨터처럼 보이는 묘한 모양의 구조물 앞으로 휭하니 가버렸다. 커크는 도청장치를 주머니 속에 넣고 전원을 켰다. 미세한 알림음과 함께 송신기가 켜졌다. 아마 지금쯤 스팍 역시 수신기의 전원을 켰을 것이다.

 

“운이 좋았군.”

 

커크의 중얼거림을 들은 칸은 외계 컴퓨터의 구조물을 살펴보다가 그를 흘끗 돌아보았다. 익숙한 눈빛이 커크에게 전해져왔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한심하고 지루하고 재미없고 생각 없는 말을 할 수가 있느냐, 뭐 그런 의미의 시선.

 

“왜 그런 눈으로 봐?”

“무슨 눈을 말하는 건가?”

“뭐랄까……. 뱀? 사자?”

“‘싱’은 사자를 뜻하지.”

 

칸은 미련 없이 고개를 돌리고 다시 구조물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가 마침내 계기판에 손을 대기 시작한 것은 반분의 시간이 더 지났을 때였다. 커크는 주변을 둘러보며 무기들을 구경했다. 처음 보는 디자인의 무기들뿐이었지만 대부분은 물리적인 타격을 주는 물건으로 보였다. 총과 비슷한 모양새를 가진 것들도 제법 되었다. 커크는 금속 재질의 막대기처럼 보이는 것을 손가락으로 쓸어보았다. 먼지는 묻어나오지 않았다. 관리자가 성실하거나, 자주 사용하거나, 둘 중 하나일 텐데.

 

“뭔지는 알고 건드리는 거야? 계기판을 읽을 수나 있어?”

“Mr.스카티에게 한 말을 그대로 읊어주지. 언어는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을 거다. 중요한 건 시스템의 구성이고, 지적 생명체가 최고의 효율을 위해 상상하고 구상하고 실제로 구현할 수 있는 알고리즘은 대부분 엇비슷하지. 오차범위가 그리 다양하거나 넓진 않아.”

“그래?”

“그래. 변수는……. 요즘 시대의 말로 하자면 ‘거기서 거기’다. 경우의 수는 2의 4승.”

“흠. 의외로 간단하군.”

 

칸은 빠른 속도로 버튼을 누르며 말을 이었다. 그는 커크를 향해 어떤 관심도 전하지 않았다. 모든 신경은 눈앞의 기계로 쏠려있었다. 본인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사실은 인지나 하고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 그 뒤에 0이 여덟 개가 붙지.”

“켁! 뭐? 지금 그걸 다 계산하고 앉아있겠다고?”

“우선 중앙 시스템을 해킹해 기본적인 알고리즘을 파악하고, 시스템에 적용했을 때 비효율적인 처리 속도와 오차 범위가 넓은 순서대로 몇 가지 변수를 제외시키고 나면…….”

 

칸은 굽혔던 허리를 펴며 마지막 버튼을 눌렀다. 커크는 그 손놀림이 ‘경쾌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커크를 향해 고개를 돌리지 않았으므로, 커크는 그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끝났군. 이만 갈까?”

 

그리고 그다지 보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았다. 아마도 무척 건방지고 재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을 것 같아서.

 

“놀리니까 재밌냐.”

 

커크의 불만 섞인 중얼거림에 칸은 딱히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무기고를 한 바퀴 휘 둘러보더니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용도가 불분명한 물건들 사이에서, 그가 사용할 무기를 망설임 없이 선택하고 무장했다.

 

“좋겠군. Mr. Super는 처음 보는 물건들도 매뉴얼을 달달 외운 것처럼 완벽하게 파악할 수 있어서.”

 

칸은 그제야 바쁘게 움직이던 걸음을 멈추고 커크를 흘끗 돌아보았다. 커크도 적당한 무기들을 골라 집어 들고 있었다. 문득 따가운 시선을 느낀 커크 역시 칸을 보았다. 칸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씰룩이는 것이 보였다.

 

“그런 눈으로 날 보지 마, 함장. 그런 눈빛엔 약하거든.”

“무슨 눈?”

“강아지.”

 

Puppy. 한껏 조롱을 담은 목소리에 커크는 잠시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뭐야!]

 

스팍은 한쪽 눈썹을 씰룩 올렸다. 커크가 버럭 소리를 지른 목소리가 그의 귀에 꽂힌 수신기를 통해 가감 없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스팍은 혹시 자신이 그의 결정에 반대한 것에 대한 앙금을 이런 식으로 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봤다. 그러나 커크는 그 정도로 꽁한 인간은 아니었다. 그저 단순히 칸의 조롱을 참치 못하고 감정적으로 대응했을 가능성이 더 높았다.

 

[작고 연약하고 귀여운 강아지 같은 눈을 하고 있지 않나. 주인이 놀아주지 않아 토라진 것 같은 눈을.]

 

수신기를 통해 칸의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칸!]

[해리슨이다. 대령.]

 

커크가 참지 못하고 칸의 이름을 외쳤을 때, 음울한 웃음기를 머금고 있던 칸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싸늘하게 바뀌었다.

 

[스타플릿의 개 노릇을 하고 있는 건 칸 누니엔 싱이 아니라 존 리처드 해리슨 중령이다.]

[어? 아, 그래. 알았어. 뭘 그렇게 정색을 하고 그러나, 해리슨 중령. 주의하지.]

 

비언어적 표현을 감지할 수 없다는 생각은 수정해야 할 것 같았다. 칸이 어떤 표정을 지었을지, 스팍의 눈에는 무척 선명하게 떠올랐으므로. 그는 자신의 감정에 충실했고, 어떠한 가식도 없었다. 그러나 스팍은 그 솔직함이 그의 도덕성에서 나온 결과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스스로가 지나치게 우월했기에, 자신의 감정을 숨길 필요도, 절제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것은 그의 자만이자 오만이었다.

스팍은 전방의 스크린에 띄워진 입체 홀로그램을 주시했다. 칸이 함선의 모션 센서를 해킹하여 보낸 신호를 스카티가 잡아내, 시각적으로 정보를 파악하기 용이한 이미지로 만들어 화면으로 띄우는 중이었다. 배경음악처럼 끊임없이 깔리는 스카티의 불만 가득한 중얼거림은 신경을 쏟아 인식할 가치가 없는 것이다. 스팍은 그렇게 판단한 뒤 자신의 귀에 꽂혀있는 수신기로 정신을 집중했다.

 

 

 

칸은 커크에게 시선 한 번 던지지 않은 채 출입문으로 보이는 곳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칸이든 해리슨이든 어차피 다 자기 이름인데 뭘 그렇게 까다롭게 구는 거람. 커크는 터지려는 불만을 속으로 삼키며 그의 뒤를 쫓았다.

 

“길은 알고 가는 거야?”

“아까 당신도 보지 않았나, 함장? 함교에서 말이다. Mr.술루가 직접 스캔한 뒤 내부구조를 스크린에 띄웠고, 분명히 당신도 그 자리에 함께 있었는데.”

“미안하게 됐군. 난 난생 처음 보는 함선의 내부구조의 외곽선만 보고 함선의 설계도를 머릿속에 그릴 수 있는 재주는 없어서.”

 

칸은 커크의 투덜거림에 더 이상 맞장구칠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와의 대화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없다. 적어도 이 함선에 대해서, 그리고 앞으로 그들을 향해 닥쳐올 적에 대해선 자신이 그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 역시 무지하긴 마찬가지였지만. 적어도 자신은, 그들의 언어 체계와 지적 능력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파악했다고 자신하니까.

이를테면, 이 함선의 주인들은 표의문자를 사용한다. 눈앞의 개폐장치를 조작하는 데에는 그 정도의 정보만 있으면 충분했다. 버튼을 누르면, 문이 열린다. 칸은 복잡한 계기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커크를 돌아보았다.

 

“준비는 끝났나?”

“뭘 새삼 준비를 해?”

“당연한 것을 묻는군. 미지의 존재에 대한 전투 준비를 묻는 거다.”

 

커크는 그의 대답에 헛웃음을 흘렸다. 나라다호의 사건에서는……, 스카티가 영 엉뚱한 곳으로 그와 스팍을 전송시키는 바람에 그들은 도착하자마자 상황도 파악하지 못하고 싸워야했다. 그러나 지금 그들은 경비병조차 보이지 않는 조용한 무기고로 전송되어있었다. 문명의 노출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페이저를 사용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두 사람은 여유롭게 무장을 마친 뒤였다. 끝끝내 사용법을 파악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여차하면 쇠몽둥이처럼 쓸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 잠입한지 얼마나 지났다고. 최대한 조용히 함교를 찾아가서 지휘부만 제압하면 되는 것 아냐?”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면 유감이로군.”

 

칸은 개폐장치를 작동시켰다. 약간의 소음과 함께 문이 열리고, 커크는 다시 불퉁하게 질문을 던지려던 입을 다물었다. 뭐가 그렇게 유감인 일이 많은 거야, 하는 질문은 입안에서 맴돌았다. 문 밖에는 다수의 무장 병력이 문을 향해 정체를 알 수 없는 무기를 겨눈 채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일단은 인간과 비슷한 모양새를 갖춘 외계인들이었다. 직립보행이 가능한 신체구조를 가진. 다만 팔이 한 쌍 더 달려있었고, 녹색 피부는 비늘로 덮여있었다. 커크는 그들을 보며 곤충을 연상해야할지, 뱀을 비롯한 파충류를 연상해야할지 헷갈렸다.

칸은 무장했던 무기들을 그들이 보는 앞에서 바닥으로 멀찍이 던져두었다. 그리곤 빈손을 어깨높이로 들어 올려 비무장상태를 알리며 그들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커크는 여전히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진정시키지 못한 채 들고 있던 무기를 칸의 등으로 겨눴다.

 

“뭐가 그렇게 유감인 일이 많은 거야?”

 

입안을 맴돌던 질문을 내뱉고, 커크는 스스로의 혀를 깨물고 싶었다. 이것 말고 분명히 해야 할 질문들이 몇 개는 될 텐데. 칸이 가벼운 한숨을 내쉬는 것이 보였다. 커크는 그의 뒤통수를 노려보고 있었지만, 그의 표정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새삼스럽게 멍청한 질문이로군, 함장. 굳이 지금 할 필요도 없는 말이고.”

 

한심해 죽겠다는 기색이 역력한 어투였다.

 

“그래. 새삼 멍청해진 김에, 멍청한 질문 하나 더 해보자. 젠장. 대답이 뻔히 예상되는 데 질문을 하려니 진짜로 빌어먹을 멍청이가 된 기분이네. 저들이 어떻게 우리의 침입을 이토록 빨리 알아차렸지?”

 

칸은 이미 무기고를 벗어나 그들의 곁으로 가까이 다가간 다음이었다. 그가 별다른 저항의 기미를 보이지 않자 무장한 녹색 외계인들 역시 그에게서 신경을 거두는 것이 느껴졌다. 그들은 오히려 커크를 향해 경계의 시선을 던졌다. 그들 중 누군가가 그를 향해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으나, 커크는 그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내용은 뻔했지만. 아마도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라, 그런 의미일 것이다.

칸은 커크를 흘끗 돌아보았다. 녹색비늘 피부를 가진 외계인들 사이에 서있는 그의 창백한 피부와 차가운 청록색 눈동자는 냉혈동물을 연상시켰다. 파충류. 뱀. 소리 없이 은밀하게 움직이고, 순식간에 누군가의 혈관을 불태울 치명적인 독을 품은 사내.

 

“내가 보안 시스템을 우회하지 않았으니까.”

 

Shit. 낮게 중얼거린 커크는 그에게 쇳덩어리에 불과한 무기를 고쳐 잡았다. 이 빌어먹을 쇠막대의 사용법만 알았다면 당장 칸을 향해 난사하고도 남았을 기분이었다.

 

“네 놈을 믿는 게 아니었어.”

“후회의 말은 언제 내뱉듯이 늦는 법이야.”

“지구에 잡혀있는 네 인질들은 까맣게 잊어버린 모양이로군.”

“잊을 수 있을 리가. 그들은 내 전부인데.”

 

절그럭거리는 쇳소리가 났다. 녹색 외계인이 수갑처럼 보이는 물건을 가져오는 것이 보였다. 인질을 들먹이며 협박을 하는 꼴이라니, 꼭 악당이 된 것 같아서 기분이 찝찝했지만 지금 커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다지 없었다.

 

“하지만 그들의 목숨이, 정체조차 알 수 없는 금속덩어리들을 들고 적진 한복판으로 뛰어들 이유는 되지 않아. 사용 방법을 알 수 없는 무기에 무슨 의미가 있지? 나방이 모닥불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 멍청한 짓이라는 건 누구나 동의할 거다. 돌바닥에 머리를 짓찧는 것과 다를 바가 있나? 난 목숨을 걸고 자해하는 취미는 없어.”

“누군들 그런 취미가 있겠어. 하지만 난 승산이 없다고 동료를 배신하진 않을 거야.”

“그러시겠지. 그 누구보다 도덕적이고 모범적인 함장님께선.”

 

녹색 외계인이 칸을 향해 아마도 수갑일 물건을 내밀었다. 칸은 빈손을 그를 향해 순순히 뻗었다. 그러나 칸의 시선은 여전히 커크를 향해있었기에, 칸의 팔은 정확한 자리를 찾지 못하고 허공을 약간 헛돌았다. 커크는 기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허우적거린다고? 저 ‘칸’이?

 

“저돌적이고, 양심적이고, 맹목적인 함장. 하지만 그렇게 단순히, 닥치는 대로 들이박았다간 너와 너의 선원들 전부를 죽음으로 몰고 갈 뿐이야.”

AND

*칸커크

*리부트 스타트렉 영화만 감상한 뒤 쓰는 날조글입니다. 캐릭터 붕괴, 원작 붕괴, 원작 설정 붕괴 주의.

*필자의 칸 편애 주의. 칸 보고싶어서 쓰기 시작한 글이라 어쩔수가 없습니다.

 

[My Crew]

4. 200년 전의 기술

   - “당장 눈앞의 싸움만 피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건가, 함장?”

 

엔터프라이즈는 푸른 잔상을 남기며 우주를 가로질렀다. 함선 자체는 어마무지한 속도로 날아가는 중이었으나 내부에는 물리적인 작은 흔들림조차 없었다. 그러나 마냥 평화로운 것은 아니었다. 분란의 중심점은 뻔했다. 칸. 커크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함교에 제한 없이 출입할 수 있는 것은 수석장교들과 함교에 배속된 일부 선원들뿐입니다. 소속조차 정해지지 않은 자에게 함교 출입의 권한을 줄 수는 없습니다, 함장님.”

“스팍, 제발. 적당히 하자고.”

“나도 그건 마음에 안 들어, 짐. 그 녀석이 하루 종일 함교에 서서 삐딱한 표정으로 우리를 훑어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 스트레스로 머리가 빠지고 없던 위염까지 생길거야.”

“본즈. 칸이 네 시야에 항상 노출되어 있는 쪽이 좋은 거야. 어디서 뭘 하는지 모르게 엔터프라이즈를 돌아다니면서 은밀한 곳에서 널 감시 한다고 생각하는 게 더 끔찍하지 않아?”

 

통상적인 함장의 권위라는 것은 찾아볼 수 없다. 본디 엔터프라이즈가 다른 집단보다 훨씬 유하고 친근한 분위기의 함선이긴 했으나, 오늘은 특히 그 정도가 심했다. 그만큼 엔터프라이즈의 함교는 불만과 불안에 가득 차있었다. 커크는 생각보다 완강한 저항에 당황했으나 고집을 꺾지는 않았다. 크루들 역시 그 사실을 깨달았는지, 그에게 반대한다기보다 그저 일방적인 불만들을 토해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 소란도 거기까지였다.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문으로 향했다. 무소속을 뜻하는 검은색 셔츠를 입은 칸이 함교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는 함교의 입구에 멈춰 서서 커크를 보았다.

 

“함장?”

 

Captain? 깊은 울림을 가진 낮은 목소리가 부드럽게 커크를 불렀다. 적어도 지금 그에게 시비를 걸 생각은 없는 듯 했다. 커크는 슬쩍 입꼬리를 끌어올려 선명한 미소 지으며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들어와도 돼.”

 

몇몇 크루들이 궁시렁거리는 불만에 찬 소리들이 들려왔다. 그러나 칸은 아랑곳하지 않고 당당한 걸음걸이로 다가와 커크의 앞에 섰다. 군인들의 경례를 올려붙이는 칸의 몸놀림엔 날카로운 절도가 배여 있었다.

 

“중령, 존 리처드 해리슨. 오늘부로 엔터프라이즈호의 무소속 장교로 배정되었습니다.”

“그래. 잘 부탁하지, 해리슨 중령.”

 

곁에서 맥코이가 가증스럽다며 몸서리를 치는 것을 무시하고, 커크는 칸에게 손을 내밀었다. 칸은 그를 향해 내민 손을 흘낏 내려다보았다. 한쪽 입꼬리가 비죽 올라갔다. 흐릿한 비웃음을 띤 채, 칸은 커크의 손을 마주잡았다. 두 사람이 천천히 악수를 하는 동안, 함교 내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쏟아졌다.

 

“당신은 지금부터 내 허가 없이도 자유로이 함교에 출입할 수 있어. 하지만 되도록이면 나나 수석 장교들의 시선이 닿는 곳에 있어줬으면 좋겠군. 어디론가 가게 된다면 행선지도 알려주고. 이유는 딱히 설명하지 않아도 알겠지.”

“예. 함장.”

“좋아. 그럼 이제 그걸 풀자고.”

 

커크는 칸의 목에 채워진 구속구를 가리켰다. 칸의 얼굴에 걸려있던 비웃음이 지워졌다. 비죽하게 올라가있던 칸의 입꼬리가 순식간에 내려갔다. 칸이 천천히 눈을 깜빡이며 커크를 바라보는 동안 스팍이 그를 제지했다.

 

“그 결정 역시 찬성할 수 없습니다, 함장님. 그가 저희들을 다시 배신 할 확률은 낮지 않습니다. 만일의 경우에 그를 제압할 재빠른 대처를 위해서는 그의 구속구를 해제해서는 안 됩니다. 그 구속구만이 현재 저희가 가지고 있는 거의 유일한 방어도구입니다.”

“그럼 해리슨 중령은 반란의 여지가 있다는 이유로 앞으로 5년간의 항해와 탐사 과정동안 계속해서 동맥에 칼날을 꽂은 채 지내야 한다는 뜻인가, 스팍? 그건 네가 그토록 중요하게 여기는 ‘윤리적인 행동’이야? 내 생각엔 아닌데.”

 

커크는 칸의 어깨를 잡아당겨 상체를 조금 숙이게 하곤 구속구의 해제 버튼을 찾아 눌렀다. 허공에 떠오른 스크린에 보안 접속 코드를 입력하자 구속구에서 미세한 기계음이 들려왔다. 동맥에 꽂혀있던 바늘이 안전하게 회수되고, 이내 구속구의 잠금장치가 풀렸다.

 

“그리고 잊고 있는 모양인데, 스팍. 해리슨 중령에 관련된 모든 문제의 최종결정권은 내게 있어. 네가 아무리 반대하더라도 소용없다는 걸 미리 말해둘게. 앞으로도 대체적으로 말이야.”

 

칸은 일주일 만에 자유로워진 목덜미를 문지르다가 커크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까닥여 인사했다. 커크는 그의 목에 선명히 남아있는 멍 자국을 보며 잠시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칸이 옷깃을 정리하자 검다 못해 푸르죽죽해진 목덜미의 멍은 금세 가려졌다. 아마 몇 시간 뒤면 사라질 거다.

 

커크는 함장의 의자에 익숙하게 걸터앉았고, 칸은 커크의 뒤에 선 채 함교 내부를 휘 둘러보았다. 크루들은 그와 눈이라도 마주칠까 황급히 자신의 업무에 집중하는 척 했다. 두려움의 반응이 아니었다. 두려움도 섞였을지는 모르지만, 대부분은 명백한 혐오의 반응이었다.

그러나 칸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의 예상범위 내의 반응들이었다. 참으로 재미없는 작자들이다. 칸은 함교의 내부를 머릿속에 기계적으로 새겨 넣으며 생각에 잠겼다.

어차피 엔터프라이즈는 그의 함선이 아니었고, 이 함선에 타고 있는 크루들 역시 그의 사람이 아니다. 그는 스타플릿과 커크에게 협조하며 일단 인질로 잡혀있는 72명, 그의 사람들의 안전을 도모하기만 하면 된다. 그 외에는 관심도, 흥미도 없었다. 수많은 적을 만들며 살아온 그는 적대적인 시선에 새삼 상처를 받을 만큼 심약하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이 그런 한가하고 감성적인 생각에 잠겨있을 만큼 여유로운 상태가 아니라는 것도 알았다.

 

 

그들이 목표한 스타플릿의 전초기지에 닿기까지 소요될 예상시간은 일주일이었다. 거의 일주일이 다 지나도록, 칸은 엔터프라이즈의 일원으로 녹아들기 위한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았다. 그에게 적대적인 자는 무시했으며, 그에게 말을 걸어오는 자-예를 들면 커크나 스카티, 그리고 의외로 체콥-에게는 적당히 예의를 갖춰 대꾸할 따름이었다.

 

한 가지 의외인 점이라면, 그가 체콥에게 비교적 많은 관심을 보였다는 것이다. 그에게 다정하게 대한다거나, 특별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가끔씩 체콥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생각에 잠기곤 하는 것이다. 체콥은 그의 시선을 무척 부담스러워했고, 술루는 칸이 체콥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 자체를 탐탁치 않아했다. 그나마 커크가 다행이라고 여긴 것은, 대부분의 크루들이 칸의 앞에서 칸에 대한 불만을 터트리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스팍은 감정적인 태도를 좀처럼 보이지 않았고, 맥코이는 칸을 볼 때마다 커크를 향해 궁시렁거리며 불만을 토했다. 그 두 사람의 태도는 어찌 보면 평소와 똑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평소와 다른 것은 캐롤이었다. 그녀는 칸에게 적개심을 보이는 것은 물론이요, 칸으로 인해 마음에 상처를 받을 때마다 커크에게마저 종종 원망하는 눈빛을 보내곤 했다.

 

칸은 커크의 말대로 대부분의 시간을 함교에서 보냈다. 그의 의자에 앉아 조용히 생각에 잠겨있거나, 함교에 서있는 투명한 보드에 그때그때 떠오르는 공식이나 착상 등을 적곤 하면서. 칸이 보드 가득 복잡한 수식과 기호들을 채워 넣고 한 발 물러나 공식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노라면 스카티가 무심하게 지나가는 척 그의 뒤로 스쳐지나간다. 그러다가 우뚝 걸음을 멈추고, 투명 보드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비속어를 내뱉으며 보드 앞으로 달려든다. 스카티가 무언가를 중얼거리며 수식들을 읽고 있으면, 칸은 오류를 발견했다며 보드를 미련 없이 지워버린다.

거진 일주일 사이 몇 번이나 반복된 일이었다. 커크는 함교에 울려 퍼지는 스카티의 짧은 욕설이 익숙해져버렸다는 것이 새삼 재미있었다. 스카티가 호들갑을 떨 때마다 칸에게 확연한 거부감을 표시하던 체콥이 호기심을 느끼며 그를 흘끗 곁눈질하는 모습도 종종 보였다. 적어도 과학 장교들, 그 아래의 생도들, 그리고 기술자들은 칸의 지식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는 자들이 많았다. 그들 대부분은 칸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심하게 배척하지도 않았다. 스카티는 시간이 지날수록 칸이 썩 마음에 드는 눈치였고, 스카티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던 킨저 역시 자신을 정중히 대하는 칸에게 별다른 적대감을 드러내지 않았다.

 

칸은 킨저뿐 아니라 모든 이를 정중하게 대했다. 냉소적인 그의 태도 탓에 자주 조롱으로 비춰지긴 했지만, 예의만큼은 확실하게 차리는 것이었다. 필요 이상의 갈등이 조장되는 것에 피곤함과 귀찮음을 느끼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타인과의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새로운 인간관계를 만들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스카티는 커크에게 허락을 구한 뒤 칸을 데리고 엔터프라이즈의 곳곳을 보여주는 것에 재미를 붙였다. 칸은 그 일에 그다지 흥미를 느끼는 기색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스카티의 안내를 받으며 엔터프라이즈의 곳곳을 돌아다녔다. 함교에만 갇혀있는 것은 제법 지루하고 따분한 일이었기에.

칸은 함선뿐만 아니라 다방면으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 날 저녁이면 스카티와 함께 다니며 그가 살펴본 장소들의 대략적인 설계도를 그려낼 정도였다. 스카티의 전문 용어와 엔지니어들의 속어가 가득 섞인 수다를 막힘없이 이해하고, 대답하기도 했다. 커크가 스카티에게 칸이 마음에 드느냐고 물었을 땐 펄쩍 뛰며 부정하긴 했으나, 적어도 스카티와 킨저만큼은 더 이상 지나가는 칸의 뒤통수로 모욕적인 손짓을 던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지금도 간간히 그러는 선원들이 보였다-. 물론 칸은 그런 소심한 모욕들을 모두 눈치 챘고, 무시하거나, 청록색의 싸늘한 눈동자로 잠시 동안 상대를 물끄러미 응시할 뿐이었다. 그러면 상대는 슬쩍 시선을 돌리고 자리를 피해버린다.

 

엔터프라이즈에 탑승한 선원들 중 칸의 힘을 직접 목격했던 이는 몇 되지 않았다. 일 년 전의 사건에서도 정신없이 휩쓸리다 얼떨결에 지구로 귀환한 선원들도 제법 되었고, 일 년 사이 보충된 인력들도 꽤 많았다. 칸이 무슨 짓을 했는지는 들었기에 그를 미워했지만, 정작 그의 만행을 직접 두 눈으로 목도하지 못한 이들도 많았다. 실제로 겪었다고 하더라도, 벌써 일 년 전의 과거였다. 평범한 사람의 기억은 주관이 섞이며 제멋대로 퇴색되거나 변형되기 마련이다.

 

그들이 칸의 힘을 다시 목도하는 것은 엿새째 되는 날이었다. 전초기지의 도착을 하루 앞둔 시점.

 

애초에 지구에서 그들이 목표한 전초기지로 직행했다면, 지속적으로 최고 속도로 항해한다고 가정했을 때, 나흘이면 도착했을 것이다. 그러나 커크는 기존의 항로를 우회하는 길을 택했다. 중립 지역을 통해 아직 탐험선이 닿은 적 없던 작은 미발견 지역으로 나가, 미지의 지역을 이틀 동안 가로지르며 간단한 사전답사를 겸한 탐사를 할 계획이었다.

 

보고되지 않은 행성이나 이상 현상은 목격되지 않았다. 애초에 행성 연합의 두 주둔지 사이의 작은 지역이었다. 커다란 위협이나 놀랄만한 발견에 대한 기대는 애초에 없었다. 그저 기분이나 내고, 각오나 다질 요량으로. 그렇게 평화롭게 첫 목적지에 닿을 줄 알았다.

 

“함장님. 전방에 미확인 함대가 출현했습니다.”

 

레이더를 확인하던 술루가 급하게 커크를 찾았다. 분명 근방에 생명체가 살 수 있는 행성은커녕, 어떤 교신 신호조차 확인되지 않았는데. 함장의 자리에 흐트러진 자세로 걸터앉아 무료하게 기지개나 켜고 있던 커크는, 갑작스런 적의 출현에 당황했다. 그러나 그는 타고나길 함장이었다. 어린 나이로 인한 경험 부족을 메우며 무려 ‘그’ 엔터프라이즈의 함장직을 꿋꿋이 지켜나갈 수 있음에는 그의 무모할 정도의 담력과 순발력도 어느 정도 영향을 끼친 것이 분명했다. 아마도 상당히 많은 부분을.

 

“전방에 실드를 올려.”

“예, 함장님.”

“그리고 교신을 시도해봐. 일단 상대의 정체부터 파악해.”

“상대가 응답하지 않습니다!”

 

커크는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미간을 꾹 눌렀다. 미확인 함선들은 말 그대로 함대였다. 외관상으론 처음 보는 기종이었다. 엔터프라이즈에 비해 크기도 무척 작았지만 전투 기능이 현저히 떨어지는 엔터프라이즈에게, 열 대가 넘어가는 함선 부대는 위협적일 수밖에 없었다. 커크가 다시 명령을 하려 입을 열었을 때였다. 미확인 함선으로부터 발사된 무기가 엔터프라이즈의 실드를 때렸다.

 

“윽……!”

 

함체가 크게 요동쳤다. 통상적인 교전 중에 겪는 충격이 아니었다.

 

“뭐에 맞은 거야, 술루?”

“모르겠습니다, 함장님. 처음 보는 무기입니다. 충격에 비해 실드가 크게 손상되진 않았습니다.”

“워프 준비해.”

 

술루의 보고를 듣는 사이, 두 번의 충격이 더 전해져왔다. 커크가 혼란스러움에 이마를 짚는 순간, 함교의 문이 열리며 칸이 뛰어 들어왔다.

 

“스캔은?”

“해리슨?”

“스캔은 했나, 함장?”

“소용없을 거야. 저들은 이미 무기를 날려대고 있다고. 이미 실드를 다 올리고도 남았지. 차라리 동력을 빨리 끌어 모아서 워프를…….”

“스캔 해. 실드는 없을 거다.”

“무슨 뜻이야?”

“우리는 포위당했다, 함장. 안전하게 도망칠 수 있다는 보장은 없어. 워프 하는 순간엔 미묘한 연쇄반응으로 인해 실드가 불안정해질 수 있다. 상대의 무기가 페이저라면 상관없지만, 지금 저들이 사용하는 무기는 당신에게 익숙한 물건이 아니다. 차라리 실드를 유지한 채 싸워야 해. 그 쪽이 승리 할 수 있는 확률이 더 높아.”

“엔터프라이즈는 전투 함선이 아니야, 해리슨 중령.”

“한 가지 확인할 사항이 있습니다. 당신은 저들이 사용하는 무기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까? 현재 스타플릿의 생도들이 받는 실전 교육과정의 다수의 사례들 중 지금의 상황과 정확히 일치하는 사례는 없습니다. 당신이 가진 지식의 정확성과 적절함에 의문을 제기하겠습니다.”

 

스팍이 커크를 거들어 칸에게 반대하고 나섰으나, 칸은 그들을 향해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술루는 워프 경로 설정을 마친 뒤, 스캐닝 시스템을 준비하며 어느 쪽이든 커크의 결정에 곧바로 따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스캔 해. 날 믿어봐, 함장.”

 

커크는 잠시 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칸은 전방을 비추고 있는 스크린을 바라보며 적함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커크는 술루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스캔 해, 술루.”

“예, 함장님.”

 

체콥은 술루를 보조하며 칸을 흘끗 보았다.

 

체콥은 칸에게서 위화감을 느꼈다. 지난 일주일동안 늘 짓고 있던 냉소적인 표정이었는데도, 어쩐지 낯설었다. 삭막하고 숨 막히는 공기를 두르고 있었다. 체콥은 일 년 전의 사건에서 칸을 직접 대면한 적이 없었다. 그가 칸의 모습을 본 것은, 그 누구도 그를 환영하지 않는 함교 안에서 뻔뻔하고 무표정한 얼굴로 혼자만의 생각에 잠겨있는 모습뿐이었다. 오만함. 거만함. 그런 것들. 체콥은 칸이 내뿜는 매서운 느낌이 ‘살기’라는 것을 몰랐다. 그런 것을 내뿜을 수 있는 남자라는 것을 처음 보았다.

 

“스캔 완료 되었습니다, 함장님. 정말로 실드는 올라가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처음 보는 기종입니다. 내부 구조가…….”

“실드를 올리지 않은 게 아니야.”

 

칸은 스크린에 떠오른 적함의 구조를 보며 입가에 비웃음을 걸었다.

 

“실드를 올릴만한 기술이 없는 거다. 저건 두 세기 전의 모델이야.”

 

다시 한 번 적함의 무기가 엔터프라이즈의 실드를 때렸다. 함체가 크게 흔들렸으나 칸의 자세에는 작은 흔들림조차 없었다.

 

“엔터프라이즈를 공격하고 있는 이 무기는 페이저가 아니다. 구식 미사일이지. 저들은 적어도 지구보다 200년 즈음 낙후된 문명에서 살던 자들인 모양이다.”

“200년 전의 기술을 어떻게 알아본 거야? 그걸 다 외우고 있었다니, 당신도 참 별나군.”

“너희들에겐 별 의미 없는 역사일 뿐일지 몰라도, 내겐 아니니까.”

 

칸은 커크를 돌아보았다. 서늘한 눈동자에 날카롭고 살벌한 빛이 어려 있었다. 커크는 그 눈빛을 본 일이 있었다. 최초의 사건이었던 런던 테러에 이어, 데이스트롬을 덮쳤던 두 번째 테러. 그를 처음 보았던 때. 방 안으로 무자비하게 페이저를 난사하던 냉혹한 살인마.

 

“어떻게 할 거지, 함장?”

“무슨 뜻이야?”

“저들이 '미사일'을 쏘았다는 건 우리를 죽이겠다고 마음먹었다는 뜻이다.”

 

커크는 의아한 얼굴로 술루를 보았다. 술루는 실드를 체크하고 있었다. 꽤 오랫동안 공격을 받고 있었음에도, 실드의 잔여 수치는 87% 언저리를 가리키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살기가 실린 공격은 아닌데. 커크의 시큰둥한 반응에 칸은 답답하다는 듯, 혹은 한심하다는 듯, 복잡한 시선으로 커크를 보았다.

 

“그들이 현재 가지고 있는 모든 화력을 퍼부으려 마음먹었다는 뜻이야. 화력이 약하니 실감이 나지 않는 모양이군. 저들의 문명 수준을 고려했을 때, 비유하자면 우리에게 광자어뢰와 페이저를 쏟아 붓고 있는 셈이다. 예를 들어줘야 이해를 하겠나? 저들이 벤전스의 절반만 되는 기술력을 가지고 있었다면, 엔터프라이즈의 이 얇디얇은 실드는 진즉에 날아가고 우리는 지금쯤 우주로 쓸려나가 먼지가 되고도 남았을 거야.”

 

칸은 낮게 목을 울리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가소로워서.

 

“그래서 요지가 뭐지, 해리슨 중령? 확실히 지금 저들이 우리의 실드에 큰 타격은 주지 못하고 있지만 언제까지 여기에 멈춰 서서 공격을 받고 있을 수는 없어. 당신 말대로 뒤떨어진 문명의 함선이라면 엔터프라이즈의 속도를 따라올 순 없을 테니 작은 고장의 위험을 무릅쓰더라도 빨리 워프를…….”

“당장 눈앞의 싸움만 피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건가, 함장?”

 

스팍이 두 사람을 향해 다가왔다. 그러나 칸은 그를 향해선 어떤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다. 칸의 시선은 커크를 똑바로 향해있었다. 눈빛만으로도 그를 꿰뚫어 죽여 버릴 듯 강렬한 시선이었다. 그러나 그 강한 시선은 커크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그가 머릿속으로 몇 번이나 찢어발기고 있는 상대는 저 초라한 함선에 타고있는 얼굴 모를 적이었다.

 

“스타플릿의 전초기지로부터 하루거리에, 열 척 이상의 전투 함대가 나타났다. 그리고 어떠한 교신의 의지도 보이지 않고, 상대방의 신분조차 확인하지 않은 채 화력을 퍼붓는다. 이게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겠나, 함장? 저들은 싸움을 원하고 있는 자들이야. 스타플릿으로의 공격이란 말이다.”

“그게 어쨌다는 거야? 저 함대를 보라고. 저런 군대는 한 트럭이 더 몰려와도 아무런 위협이 되지 못해.”

“하찮은 미물의 한심한 공격이라고 해서, 반역 행위를 묵인해선 안 돼. 그런 안일한 생각으론 결국 아무 것도 지켜낼 수 없다, 함장. 우리를 향해 저런 한심한 공격을 퍼붓고 있는 저 함대에게 지금 당장 적절한 응징을 가하지 않는다면, 현재 연합에 속하지 않은 모든 세력들의 도전을 암묵적으로 허용한다는 메시지를 남기게 될 거야. 무궁한 발전의 가능성을 가진 미개한 문명에도, 우리보다 막강한 화력을 가진 미지의 선진 문명에도 말이야.”

 

칸은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상세히 설명해야 한다는 것이 귀찮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커크는 눈에 보이지 않는 미지의 세력까지 염두에 둔 채 생각하고 행동하는 일은 익숙하지 않았다. 그의 관심사는 탐험과 모험이었다. 복잡하고, 어쩌면 정치의 성향까지 띨 수 있는 상황에 대한 판단력은, 다른 고위직의 장교들에 비해 현저히 떨어진다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저 함대를 향해 페이저라도 난사하라는 뜻인가?”

“그건 안 될 말이지, 함장. 저들이 페이저와 실드에 대한 개념을 정립하기까지, 지구의 발전 속도에 빗대어보자면 대략 두 세기가 지나야 할 거다. 문명의 발전에 직접적인 영감을 줄 수 있는 행동은 최대한 배제하는 것이 좋아.”

 

엔터프라이즈와, 커크와, 자신. 그들을 싸잡아 물어뜯고 싶어 하는 이들은 생각보다 많을 터다. 칸은 그들에게 만일의 여지를 남기고 싶은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그럼 어쩌자는 건데? 이제 수수께끼는 그만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해보게, 해리슨 중령.”

 

커크는 피곤한 표정을 숨기지 않으며 자신의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실드의 잔여 에너지가 70% 미만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칸은 커크를 향해 완전히 몸을 돌렸다. 그의 청록색 시선은 사나운 열기를 품고 있는 듯 했다. 마주보는 것만으로도 피부를 따끔거리게 하는 강렬함이 있었다. 그는, 현 인류와는 전혀 다른 또 다른 인류였다. 한 인류의 우두머리. 과거의 그림자들의 제왕. 그 사실을 새삼스레 함교에 각인시켰다. ‘나는 너희들과 다르다’고.

 

“날 전송해주시오. 저 함선 속으로.”

“뭐?”

 

커크는 관자놀이를 문지르던 손을 멈칫하며 칸을 보았다. 칸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낮게 으르렁거리는 포식자의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날 적함 속으로 전송해. 함선을 탈취하고, 나머지 함선들을 격추시키도록 하지.”

“저 속에 군사가 몇 명이나 탑승하고 있는 줄 알고 그런 말을 해?”

“몇 명이든 상관없다. 적어도 나는.”

 

칸은 평온한 어조로 답했다. 아, 그래. 어련하시겠어. 궁시렁거린 커크는 근처를 어슬렁거리는 스카티를 흘끗 보았다.

 

“스캇. 그를 저 함선 속으로 당장 전송할 수 있어?”

“뭐 그런 걸 새삼 물어보고 그래. 나라다호로도 전송했었구먼. 기본적인 실드도 없는 저런 고철덩어리 속으로 보내주는 거야 간단하지.”

“좋아.”

 

커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스카티는 칸을 향해 따라오라는 손짓을 했고, 칸은 별다른 반응 없이 그를 향해 한 발을 내딛었다. 그 순간, 커크가 칸의 어깨를 움켜쥐며 활발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갈 거야.”

AND

*칸커크

*리부트 스타트렉 영화만 감상한 뒤 쓰는 날조글입니다. 캐릭터 붕괴, 원작 붕괴, 원작 설정 붕괴 주의.

 

[My Crew]

3. 함장. 멍청한 함장.

   - “날 죽이고 싶은가, Mr.커크?”

 

그 후로 일주일간 커크의 집에는 손님이 끊이지 않았다. 커크의 동료들 대부분은 아직 칸에 대한 적대심을 버리지 못했다. 칸은 이미 엔터프라이즈를 격추시키려 한 전적이 있었고, 커크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위협하기도 했다. 그런 위험인물을 그들의 함장과 단둘이 놔둘 수는 없었다. 커크가 아무리 괜찮다고 주장하더라도 그의 크루들은, 이미 함장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경지에 올라있었다.

그들은 매일 번갈아가며 커크의 집을 들락거리곤 했다. 그리고 밤이 늦도록 커크의 집에서 떠나려하지 않았고, 커크는 자신의 안전을 위한 크루들의 처절한 노력을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들도 그들 나름대로 함장의 독단적인 명령을 납득하기 위해서 애를 쓰고 있는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덕분에 커크의 침대는 그의 집을 찾아온 누군가의 차지가 되고, 커크는 소파에서 잠을 청했다. 커크는 칸이 수면을 취할 마땅한 자리가 없는 것을 걱정했지만, 칸은 상관 없다며 순순히 소파를 양보했다. 실상 그는 잠을 거의 자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커크가 잠들기 전에는 휴식을 취하는 모습을 전혀 보여주지 않았고, 커크가 눈을 떴을 때에는 창가에 반듯하게 서서 거리를 내려다보고 있곤 했다.

 

커크의 집을 찾는 크루들의 발걸음은 출항하기 하루 전의 밤에 간신히 멈췄다. 그날만큼은 아무도 커크의 집을 찾지 않았다. 그들은 5년 동안 지구를 떠나있을 것이고, 대부분은 긴 이별에 대한 인사를 나누고 함께 시간을 보내야 할 사람들이 있었다. 스팍은 우후라와 함께 시간을 보낼 것이라고 했고, 맥코이는 딸아이와 대화를 나누고 싶다고 했더랬다. 그녀와 만날 방법이 있을지가 문제였지만.

커크는 창가에 서서 야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지구에 머무르는 동안은 매일 보는 풍경이지만, 아마 몇 달 안에 무척 그리워질 것이다. 지겹도록 변화 없이 마냥 화려한 샌프란시스코의 야경.

 

“5년 뒤엔 많이 바뀔까.”

 

매일 볼 땐 모르더라도, 몇 년 동안 떠나있다 보면 어색해지지 않을까. 커크는 창문에 머리를 기대며 중얼거렸다. 꿍, 창문에 머리가 부딪히며 작고 둔탁한 소리가 났다.

 

“그리 많이 변하진 않더군.”

 

등 뒤에서 무심한 목소리가 대답했다. 커크는 창문에 머리를 기댄 채 흘끗 눈을 굴렸다. 해가 진 뒤의 유리창은 거의 거울이나 다름없다. 유리창에 그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커크가 일주일간 칸에 대해 알게 된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 칸은 자신의 흔적을 숨기는 일에 무척 능숙했고, 두 사람이 대화를 길게 나누지도 않았다. 조금만 대화가 길어지려하면 감시원-커크는 그의 집에 쳐들어오는 크루들을 일단 이렇게 부르기로 마음먹었다-이 대놓고 경계의 빛을 띠었고, 칸은 상대와 피곤한 신경전을 벌여가면서까지 커크와 나누고 싶은 대화는 없는 모양이었다. 그는 별다른 미련 없이 대화를 끊었고, 자리를 털고 일어나버리거나 읽던 책을 다시 집어 들곤 했다.

 

그런 칸과 가장 먼저 가까워진 것은 스카티였다. 커크는 그 사실을 의외라고 받아들여야 할지, 아니면 당연한 것이라고 받아들여야 할지 헷갈렸다. 칸은 엔터프라이즈를 거의 넝마조각으로 만들었던 자였고, 1년 전의 사건이 대강 마무리 된 뒤에 칸을 향해 무척 분노했던 것이다.

그러나 칸은, 스카티가 적개심을 계속 유지하기엔, 그의 취향에 딱 들어맞는 분야의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심지어 놀라울 만큼 방대하고, 전문적인 지식과 이론들을. 칸은 벤전스를 직접 설계했던 자다. 함선, 무기, 워프코어를 비롯한 각종 전문적인 기술에 능통했으며, 발명에 대한 창의성도 제법 갖추고 있었다. 스카티는 커크의 집에서 하룻밤을 보낸 뒤, 칸에 대한 평가를 ‘빌어먹을 개자식’에서 ‘나쁜 녀석’정도로 수정했다. 함선의 실드를 보완하는 기술에 대한 대화가 그의 마음에 제법 들었던 것이다.

 

“그래?”

 

칸은 생각보다 말이 많은 자였다. 엔터프라이즈의 누구처럼 수다스러운 사람은 아니었으나, 그를 향한 질문을 묵살하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커크의 혼잣말에도 간간히 대답하곤 해서, 커크는 일주일 사이에 혼잣말이 조금 늘었다. 아무리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려도 칸은 그의 목소리를 놓치지 않았고, 의미 없는 말이었을지언정 간간히 대꾸를 하곤 했다. 그러다보면 다른 대화가 꼬리를 물고, 그렇게 잠시 시간을 보내다가 커크가 먼저 자리를 뜬다. 그런 식의 대화가 제법 익숙해졌다.

 

칸은 소파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종이재질의 책이 가득 담긴 트렁크를 펼쳐놓고, 하루 종일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가끔은 창 앞에 서서 바깥의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곤 했다.

칸은 식사조차도 거의 하지 않았다. 그의 식사량은 커크의 절반도 되지 않았다. 자신보다 체격이 좋은 칸의 식사량을 의아하게 생각하는 커크에게, 칸은 별 일 아니라는 듯 이유를 설명했다. 그는 보통의 인간보다 적은 열량을 섭취하더라도 충분한 에너지를 낼 수 있다고. 전쟁이나 전투시에는 항상 넉넉한 식량을 확보하기도, 운반하거나 보관하기도 어려우니 효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그렇게 개조되었노라고. 며칠정도는 아예 식사를 하지 않아도 생활에 큰 지장은 없다는 이야기도 했다.

 

칸이 읽는 책의 대부분은 셰익스피어의 작품이었다. 커크가 그 이유를 물었을 때, 칸은 입가에 명백한 비웃음을 띠며 그가 얼마나 대단한지 궁금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칸은, 셰익스피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셰익스피어는 인도와도 바꾸지 않는다는 영국의 오래된 격언에 코웃음을 쳤다. 그러나 그는, 일주일만에 커크가 가지고 있던 거의 모든 셰익스피어를 읽었다.

 

“간판이나 건물 정도는 바뀌겠지만. 걱정할 만큼의 변화는 없을 거다. 5년이 아니라 300년이 지나더라도 인간들이 사는 모습은 크게 달라지지 않아.”

 

커크는 몸을 돌려 유리창에 등을 기대며 칸을 보았다. 칸은 햄릿의 마지막 장을 넘기고 있었다. 내리뜬 그의 눈은 서늘한 빛을 품고 있었다.

 

“흠.”

 

커크는 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냉장고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공감은커녕 이해조차 한 것은 아니었다. 자신은 아마 평생을 가더라도 300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미래의 세상에서 눈을 뜨는 경험을 할 일은 없을 테니 앞으로도 그다지 그를 이해할 자신은 없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반드시 그를 이해해야 할 필요성도 그다지 느끼지는 못했다. 그가 진짜 동료가 되리라는 확신은 할 수 없었기에. 칸은 그의 삶을 한 번 되찾아 주었으니, 자신도 그를 한 번 돕는 것에는 최선을 다 할 생각이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신경을 쓸 만큼의 호감은 없었다.

 

“칸.”

 

커크는 냉장고에서 캔을 하나 꺼내 칸을 향해 던졌다. 칸은 책에서 시선을 떼지도 않은 채 날아오는 캔을 가볍게 받아들었다.

 

“…술?”

“가기 전에 한 잔 하자고. 항해 도중엔 구경도 못 할 테니까.”

 

칸은 책을 덮고 책더미 위에 조용히 내려놓았다. 트렁크를 향해선 시선조차 주지 않았으나 책은 흐트러짐 없이 정확이 각을 맞춰 제자리를 찾았다. 커크는 그의 예민한 감각을 보면서 새삼 놀라는 단계는 벗어나있었다. 사소한 곳에서 느껴지는 위화감과 이질감에 익숙해지기에는 일주일이면 충분했다. 커크가 사소한 것에 그다지 마음을 오래 두지 않는 탓도 있었다. 잊어버리기도 곧잘 잊어버렸다.

커크는 캔을 따며 칸의 맞은편에 의자를 놓고 풀썩 주저앉았다. 그가 두어 모금 캔을 비우며 목을 축일 때까지, 칸은 손에 들린 캔을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었다. 보편적인 음료캔과 비슷한 크기였지만 그의 손에 들려있으니 어린아이들의 장난감으로 쓰기 위해 만든 작은 모형 같았다. 그의 손은 단단했으며, 크고 길었다.

 

“술은 안마시나?”

“술은 내게 별다른 의미가 없다.”

“의미가 없어?”

“취하지 않으니까.”

 

그 말에 커크는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단순히 술에 강하다는 뉘앙스의 표현은 아니었으니까. 칸의 특이한 체질에 생각이 미친 것은 한 박자 뒤였다. 커크는 어깨를 으쓱였다.

 

“술은 딱히 취하려고 마시는 것만은 아니지.”

"흐응?"

"기분 좀 내자는 거야. 각오도 좀 다지고."

“흐려진 의식으로 무슨 각오를 다질 수 있다는 건지 모르겠군.”

“아, 그냥 하는 소리야. 민망하니까 스팍 같은 소리는 적당히 하고 술이나 마셔.”

 

칸은 커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캔을 땄다. 술을 삼키는 소리는 조용한 방 안에서 생각보다 크게 들렸다. 칸은 캔을 반쯤 비우곤 소파에 편안하게 몸을 기댔다. 눈을 지그시 감은 그 얼굴은 무표정하고 창백해서, 유령을 보는 것 같았다.

어쩌면 정말로 유령일지도 몰랐다. 300년 전의 세상을 살던 사람이라면, 그의 말마따나 과거의 잔재라는 표현이 정확히 들어맞을지도.

커크 역시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다시 술을 삼켰다. 알싸하게 입안을 데우는 열기가 느껴졌다. 캔 하나 즈음은 한 번에 들이킨다고 하더라도 심하게 취하거나 하지는 않는다. 그들이 마시고 있는 것은 술이라고 부르기도 멋쩍을 만큼 약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내일 우주로 나갈 것이고, 우주의 무중력 상태에서는 아주 적은 알코올로도 금세 취해버릴 수 있으니까 주의해야한다. 함선 내에서 작동중인 중력 장치는 아무런 고장의 징조가 없었으나, 만일의 상황이라는 것이 있는 것이다. 커크는 천천히 술을 삼키며 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날 죽이고 싶은가, Mr.커크?”

 

칸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뱀이 속삭이는 듯,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그러나 커크는 그의 질문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고, 천천히 눈을 깜빡이며 그에게 되물었다.

 

“무슨 뜻이지?”

“말 그대로. 나를 향한 살인 충동을 느끼는지 물어본 거야.”

 

칸은 천천히 눈을 떴다. 창백한 눈꺼풀 아래 가려진 눈동자는 여전히 서늘하고 차가웠다. 청록색. 커크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칸의 눈동자는 초록색이 짙은 청록색의 눈동자였다. 그러나 어두운 조명 탓인지, 지금 칸의 눈동자는 푸른색으로 보였다.

빙산. 언젠가 자료 화면을 통해 본 적이 있다. 빙산이 뒤집히며, 차디찬 바닷물 속에서 수천 년을 얼어왔던 빙산의 밑동이 밖으로 드러난 사진. 그 얼음은 푸른빛이었다. 섬뜩할 정도로 어둡고 깊은 청색. 칸의 눈은 그 거대한 얼음덩어리를 떠올리게 했다.

그만큼 냉정하고 차분한 눈이었다. 그러나 커크는 그의 눈에 분노가 어리는 것도, 눈물이 흐르는 모습도 본 적이 있었다…….

 

“신경전이라면 제발 관둬. 내일이면 좋든 싫든 넌 엔터프라이즈에 탑승할거고, 72개의 냉동 캡슐들이 스타플릿에 보관되고 있는 이상 넌 우리에게 협조할 수밖에 없잖아. 기왕 같은 배를 탈 거, 좋게좋게…….”

“내가 듣고 싶은 대답은 그게 아니야.”

 

칸은 남은 술을 벌컥 들이켰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 혈색이 돌지도, 눈동자에 어떠한 떨림이 생기지도 않았다. 눈빛이 한층 더 날카로워졌다. 얼음장처럼 차디찬 물이라도 마신 것처럼.

 

“당신이 나을 향해 품고 있는 감정. 하고 있는 생각. 그런 것들을 묻고 있는 거야, 커크.”

 

칸은 비어버린 캔을 내려놓은 뒤, 천천히 손을 뻗어 자신의 셔츠 단추를 잡았다. 목 끝까지 정갈하게 채워놓은 단추를 두어 개 풀어내니 그의 목을 옥죄고 있는 구속구가 드러났다.

 

“당신이 직접 채운 이것……. 이 구속구에는 아주 미세하고 날카로운 바늘이 내장되어있어. 그리고 지금 그 바늘은 내 동맥에 꽂혀있지. 이 구속구를 물리적으로 제거하려고 한다면 그 바늘이 움직이면서 혈관을 후벼 파는 거야. 사실 장기간 착용을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목숨을 위협할 수 있는 물건이지.”

 

칸은 커크의 탐탁지 않은 표정을 보며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너희들은 정의와 선을 외치지만 결국은 이렇게 잔인한 사람들이다. 야만성을 인정하지 않고 배척하면서도, 결국은 그 야만성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것들.

 

“강제로 뜯어낼 필요도 없어. 구속구를 움켜쥐고 힘으로 조금만, 아주 조금만 돌려도 곧바로 동맥이 찢어질 거다. 그럼 피가 분수처럼 솟을 거고. 난 동맥이 끊어지는 정도로 죽지는 않겠지만, 일시적으로 과다출혈로 인한 무기력함과 쇼크를 겪게 될 거야. 그러면 당신은 몸을 가누지 못하는 나를 흠씬 두들겨 팰 수 있겠지.”

 

목소리는 한없이 나긋했으나 그의 표정은 결코 다정하지 않았다. 더없이 잔인한 표정을 짓는 그를 보며, 커크는 적잖이 당황했다. 그는 언제나처럼 냉소적이었지만 적대적이진 않았고, 그 말이 진심인지 농담인지조차 구별할 수 없었다. 어쩌면 그런 커크의 표정을 지켜보는 것을 즐거워하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어쩌라는 거야?”

 

커크는 불퉁한 목소리로 대꾸하며 캔을 마저 비웠다. 칸은 소파에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다리를 꼰 채, 당당히 앉아있는 그 모습 그대로 눈동자를 굴려 커크를 훑어보았다. 커크는 그 눈길을 받아내며 뒷목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칸의 시선이 자신을 향할 때마다, 뱀이 온몸을 훑으며 기어가는 듯 한 느낌을 받았다.

 

“해볼 텐가?”

 

칸은 서늘하게 속삭이며 고개를 까딱였다. 커크는 그 말에 헛숨을 들이켰다. 대답이 나오기까지 몇 초도 걸리지 않았다.

 

“미친놈.”

“하지 않을 텐가?”

“당연한 거 아냐? 내가 알겠쇼, 하면서 냉큼 네 목을 따버릴 또라이라고 생각했어? 난 사이코패스도 아니고 살인자도 아냐.”

“꽤 좋은 복수의 기회 아닌가? 내가 죽인 네 친구를 위한 복수.”

 

커크는 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작게 욕설을 내뱉으며 들고 있던 캔을 찌그러트렸다. 커크의 투덜거림을 들은 칸은 한쪽 눈썹을 살짝 까딱였을 뿐이었다.

 

“그래, 네 놈 얼굴을 볼 때마다 파이크 함장님이 생각나. 우주에서 너한테 배신당하고 공격받던 일도 생각나고. 그 공격으로 엔터프라이즈가 망가지는 바람에 그 수리를 위해서 내 목숨을 걸었던 일도 생각나서 짜증나고. 그리고 그 불쾌감들을 애써 억누르며 잘해보려는 내 신경을 살살 긁고 있는 당신의 태도도 짜증나서 죽어버릴 것 같군. 그래서 열이 뻗치고 널 두들겨 패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은데 말이야.”

“그런데?”

“지금 와서 복수네 어쩌네 하면서 달려들기엔 좀 구질구질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지금 당신의 태도가 영 섬뜩해. 무슨 꿍꿍이를 감추고 있는지 알게 뭐야.”

 

칸은 자신의 턱을 매만지고 있다가 알만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당신의 생각인가?”

“이번엔 또 뭐라는 거야?”

 

커크는 그의 말을 듣곤 잠시 얼굴을 찡그렸다가 짧게 혀를 찼다.

 

“기분 나쁜 놈 같으니라고. 내가 아무리 생각이 없어도 넌 아주 교활한 녀석이니까, 네 말은 일단 경계하고 봐야 한다는 것 정도는 나도 알아.”

“현명한 판단이로군.”

 

칸은 낮은 소리로 웃었다. 동굴에서 울리는 듯 무겁고 어두운 목소리였다.

 

“하지만 난 지금 당신을 속일 생각은 없다. 그냥 궁금할 뿐이야. 만일 당신에게 날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온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지. 난 당신의 친구라던 제독을 죽였고, 당신의 함선에 타고 있던 수많은 선원들을 죽이려고 했는데, 도대체 왜 당신이 날 살리기 위해 이렇게까지 애를 쓰는 건지."

 

커크는 칸의 말에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가벼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당신한테 목숨 빚을 한 번 졌으니까. 그냥 그걸 갚으려고 한 것뿐이야."

"빚?"

"그래. 당신의 혈청으로……."

"혈청?"

 

칸은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커크는 그런 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되물었다.

 

"무슨 소리인지 몰라?"

"전혀."

 

칸은 천천히 자신의 턱을 매만지며 커크를 노골적으로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엔 지난 일주일간 단편적으로 들어왔던 이야기들이 재배열되고, 서로 상관관계를 맺으며 몇 가지 추측들을 새로이 도출해내고 있었다. 그는 순식간에 다수의 예상 시나리오를 짜냈지만 섣불리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칸은, 아직은 조심스럽게 행동해야 할 때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현재 스타플릿의 모든 정보로부터 철저히 격리되어있는 그는, 비교적 약자의 축에 속했다. 약한 이는 신중해야한다. 확실한 우위를 점할 때까지.

 

"내 기억은 너의 일등 항해사가 죽일 각오로 내 얼굴을 두들겨 패던 지점에서 끊겼다. 내 혈청을 사용했다니. 죽을 고비를 넘긴 모양이지?"

"아아, 뭐. 방사능 피폭으로. 거의 죽었다가 살아났지."

"흐응."

 

칸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피가 가지는 효능을 그가 모를 리가 없는 것이다.

 

자신의 혈청이 만들어 졌다는 것은 충분한 양의 피를 채취했다는 것이고, 구금실에서의 채혈 이외의 기억이 자신에게 없는 이상, 그의 피가 언제 뽑혔는지는 명료했다. 그가 의식이 없는 순간. 인간 여자의 페이저를 몇 번이나 맞고, 분노한 벌컨의 주먹으로 구타당한 직후.

감정 없는 벌컨이 그토록 분노할 일이라면, 아마 그가 아끼는 함장의 신변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일 확률이 가장 높다. 벌컨이 그를 찾아온 것은 엔터프라이즈호가 지구로 돌아온 직후였으니, 아마도 커크가 말한 방사능 피폭은 우주에서 이루어졌을 거고, 우주에서 함선이 아닌 다른 장소에서 방사능 피폭을 당할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리고 함선에서 단기간에 치사량에 이를 수 있는 방사능이 유출되는 장소는 쉽게 특정해낼 수 있고…….

 

칸은 지난 일주일간 이런 식으로 정보를 얻어왔다. 그가 알고 있는 1년 전의 사실과, 커크가 내뱉는 단편적인 문장이나 생각들로. 그와의 대화는 제법 유용한 경우가 많았다.

 

맥코이는 커크에게, 칸의 피가 연구할 가치가 매우 높다고 말했다. 그가 가진 특별한 항체를 연구해보면 어떤 불치병도 고칠 수 있는 말 그대로의 '만병통치약'을 만들어내는 것도 꿈이 아니라고. 그의 피만 있으면 불사의 군대를 만들 수도 있고, 죽은 사람을 다시 살려낼 수도 있을 거라고.

그래서 맥코이는 그의 피와 세포가 가진 효능을 최대한 숨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의사로서는 연구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연구의 결과로 얻게 될 성과들은 윤리적으로 옳지 않은 것들이 태반일 것이 뻔했기 때문에. 스팍도 맥코이의 생각에 동의했고, 칸의 피가 사회적으로 일으킬 윤리 문제와 파장에 맥코이보다도 구체적으로 예상하고 걱정했다. 결국 그는 커크가 방사능에 피폭되었다는 사실 자체를 보고에 넣지 않았다. 거짓보고를 한다는 사실을 탐탁치 않아했으나, 개인의 양심보다는 사회의 안정을 우선하는 것이 논리적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커크의 주치의는 맥코이였으니 그의 정확한 상태를 알고 있는 것 역시 맥코이뿐이었다. 칸의 피로 혈청을 만들어내는 작업 역시 그가 직접 했다. 진실을 은폐하는 것은 쉬웠다.

그래도 칸은, 어쩐지 다 알고 있으려니. 커크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가 모르는 것이 있어 자신에게 묻는다는, 일종의 도움을 구한다는 사실은 어쩐지 낯설었다. 일주일 전, 그가 날짜를 물어왔을 때처럼. 그는 늘 커크보다 몇 발자국 앞서있었고, 앞서있어야만 할 것 같았다.

 

"어쨌든 당신의 혈청이 나를 구하고 우주로 다시 나갈 수 있는 기회를 줬어. 난 당신을 당장 사형시키자는 사람들 사이에서 당신을 구해냈고, 당신의 가족들을 구할 수 있는 기회를 줬고. 이정도면 비슷하게 주고받은 거지?"

 

칸은 어깨를 살짝 으쓱였을 뿐 별다른 대답은 없었다. 그의 손은 무의식적으로 목에 걸린 구속구를 만지고 있었다. 보안 접속 코드가 없는 한 물리적으로는 해체하기 어려울 뿐더러, 강제로 해체를 시도하는 순간 내장된 약물이 주입될 것이다. 독극물이 들어있지는 않을 테고, 설령 독이라고 하더라도 그의 목숨을 당장 앗아갈 수는 없겠지만, 다른 인간들의 앞에서 정신을 잃는다거나 하는 추태를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더군다나 그의 적과 다를 바 없는 이들에게는 더더욱. 그들의 앞에서 연약한 모습을 보임으로써 정신적인 승리의 희열을 줄 수는 없었다. 그것은 치욕이다.

 

이 섬뜩한 금속재질의 목줄은, 엔터프라이즈가 출항하는 순간 해제 허가가 떨어질 것이다. 그렇다면 커크는, 이 목줄을 풀어줄 것인가? 우주에서, 칸의 처우와 신병에 대한 최종 결정권은 커크가 가지게 된다. 설마 도움이나 증원을 기대할 수도 없는 우주 한복판에서, 그의 유일한 목줄을 그리 쉽게 해제시켜버릴까 싶다가도. 제임스 티베리우스 커크라는 사내가 자신의 예상보다 제법 기상천외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새삼 상기하면 그저 우스워 절로 입가에 비웃음이 그려지는 것이다.

 

함장. 멍청한 함장.

AND

*칸커크

*리부트 스타트렉 영화만 감상한 뒤 쓰는 날조글입니다. 캐릭터 붕괴, 원작 붕괴, 원작 설정 붕괴 주의.

 

[My Crew]

2. 목줄을 맨 개

    - 목줄을 맨 개. 칸은 본인이 딱 그런 꼴이라고 느꼈다.

 

 

커크는 투명한 벽을 가볍게 두드렸다. 반듯한 자세로 정면을 바라보고 있던 남자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깜빡. 창백한 눈꺼풀이 천천히 깜빡였다. 남자의 무표정한 얼굴에는 어떤 변화도 없었다.

 

“기분은 어때, Mr.해리슨?”

 

칸은 커크와, 커크의 뒤에 반듯한 자세로 서있는 스팍을 한 번씩 번갈아 쳐다보았다. 이윽고 다시 커크에게로 시선을 준 칸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다지 좋진 않군. Mr.커크.”

 

원래도 음침할 정도로 낮은 목소리는 목이 잠겨 한 층 더 낮아져있었다. 오랫동안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은 탓이다. 커크는 굳은 표정을 애써 풀려 하지 않았다. 그에게도 그만의 사정이 있었음을 알고, 원하던 원치 않던 그에게 어느 정도의 감정적인 공감도 느꼈지만, 존 해리슨, 칸은 엔터프라이즈호를 공격하고, 수백만 명의 사상자를 낸 극악무도한 테러범이었다.

 

“존 해리슨 중령. 당신은 일주일 뒤에 지구를 떠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오랫동안 지구로 돌아오지 못할 거야.”

“그런가. 또다시 추방령이라도 내려진 모양이군. 3백 년 뒤에 다시 만나세. Mr.커크.”

 

칸의 가벼운 대꾸에 커크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가볍게 웃었다. 칸은 청록색 눈동자로 두 남자를 물끄러미 응시할 뿐이었다.

 

"나도 그랬으면 좋겠지만 아쉽게도 다시 만나는 데에 그렇게 긴 시간이 필요할 것 같지는 않아. 당신은 일주일 뒤에 엔터프라이즈호에 승선할거야. 그리고 오랫동안 지구로 돌아올 수 없을 거고. 질문사항 있나?"

"하나."

 

Just one. 목소리는 여전히 탁했으나 발음만은 정확했다. 음절 하나 흘리지 않는 칸의 말을 들으면서, 커크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창백한 낯빛과 무표정한 표정에도 불구하고, 그는 묘한 매력을 느끼게 하는 남자였다. 같은 남자로서, 혹은 인간이라는 동등한 종족으로서 포식자의 위압감을 느끼며 위축되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가 질문을 내뱉었을 때, 커크는 그가 다시 농담을 하는 줄로만 알았다.

 

"오늘이 며칠이지?"

 

커크는 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좋아. 유머 감각은 스팍보단 뛰어나군."

 

칸은 커크의 대답을 듣고도 시선을 돌리지도, 어떤 반응을 보이지도 않았다. 칸의 건조한 시선을 마주하던 커크는 스팍을 돌아보았고, 스팍은 칸 못지않은 무표정으로 칸을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었다.

 

"아. 설마 농담이 아니었나?"

"내가 농담을 할 이유가 없지 않나, Mr.커크."

 

커크는 그제야 존 해리슨을 곧바로 격리시켰다는 말의 뜻을 이해했다. 문자 그대로의 의미였던 것이다. 그는 냉동 상태에서 깨어난 직후 이 방으로 압송되어, 철저하게 격리되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당신이 벤전스를 샌프란시스코에 들이박은 뒤로 일 년 정도 지났어."

"그런가."

"별로 놀라진 않는군."

"처음 듣는 말이 아니거든."

 

300년을 뛰어넘는 경험도 했던 자에게 1년 정도야. 커크는 고개를 끄덕이곤 구금실을 지키고 있던 담당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를 꺼내주게. 아처 원수의 허가가 떨어졌네."

"Yes, sir."

 

그가 구금실의 문을 열기 위해 자리를 뜨자, 커크는 다시 칸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인사를 건넸다.

 

"자, 또 보자고. 300년이 아니라 300초 뒤에."

 

커크의 농담에 칸은 옅은 웃음을 띠었다. 커크는 칸의 한 쪽 입꼬리가 분명히 올라갔다고 느꼈다. 칸은 천천히 몸을 돌려, 구금실의 문을 열어준 담당자를 향해 절도 있는 동작으로 걸음을 옮겼다.

 

***

 

칸은 수갑을 푼 손목을 매만지며 커크의 앞에 섰다. 칸의 시선엔 거침이 없었고, 그 시선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노골적이었다. 커크는 그 시선을 받아내며 물었다.

 

"1년 전에는 어디에서 살았지?"

"런던. 31섹터. 마커스가 비밀요원들을 위해 직접 마련한 세이프 하우스가 있었다."

"그럼 그곳에서 지내는 건 무리일 테고… 혹시 누군가와 같이 사는 건 불편한가?"

"무슨 의미지?"

 

커크는 칸의 물음에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했다.

 

"별거 아냐. 당분간은 룸메이트로 지내자는 뜻이지 뭐."

"함장님."

 

스팍이 커크를 불렀으나 커크는 손을 내저었다. 스팍의 판단은 언제나 옳았지만, 냉정하고 정확한 만큼 유난스러운 구석이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나도 네가 무슨 말 하려는지 아는데, 스팍."

"함장님께서 몇 시간 전에 분명히 말씀하신대로, 그는 최고 레벨의 위험인물입니다. 이자와 함장님을 같은 공간에 오랜 시간 방치해둘 수는 없습니다."

"스팍……."

 

본인 앞에서 막힘없이 튀어나온 '최고 레벨 위험인물'이라는 단어에, 커크는 짧은 한숨을 속으로 삼켰다. 그러나 칸은 한 쪽 눈썹을 살짝 까딱였을 뿐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대화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걱정은 그만 해도 된다고, 스팍. 솔직히 말하면 넌 정말로 도움이 안 될 것 같아."

"하지만 함장님. 함장님께선 지금 해리슨 중령에게 구속구를 채우는 것조차 잊으셨습니다."

"잊은 게 아니라……."

 

이 눈치 없는 외계인아. 커크는 스팍에게서 시선을 돌려 칸을 흘끗 보았다. 칸은 손을 올려 자신의 턱을 매만지며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구속구?"

"…그래. 당신을 풀어주는 조건으로 지구를 떠나기 전까지 당신의 목에 구속구를 채우라는 명령이 따라붙었어. 만일 당신이 내 통제를 벗어나 마구 날뛴다면 구속구에 내장된 마취약이 주사되는 거야."

"알만하군. 그런데 어째서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은 거지?"

"당신이 지금은 날뛸 생각이 없어보여서."

 

커크의 대답에 칸은 웃었다. 피식, 가볍게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낸 그는 커크를 향해 살짝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막 수갑을 푼 내 목에 또 족쇄를 채우기도 싫었겠지. 난 상관없으니 채우도록 해. 문제가 될 여지는 남기지 않는 것이 서로에게 좋지."

 

커크는 스팍이 내미는 구속구를 받아들었다. 손바닥에 느껴지는 차가운 촉감이 제법 섬뜩했다. 칸은 허리를 조금 숙이긴 했으나 여전히 커크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커크는 살짝 치뜬 그의 눈이 구금실의 유리창 너머에서 보았을 때보다 조금 더 파랗게 보인다고 생각했다.

커크는 칸의 옷깃을 조금 끌어내리고 그의 목덜미에 구속구를 채웠다. 커크가 구속구를 손에 쥐고 있었던 시간은 무척 짧았다. 체온으로 그 냉기를 덮을만한 시간조차 없었다. 맨살에 닿는 느낌이 소름끼칠 법도 한데, 칸은 작은 떨림조차 없었다.

찰칵. 금속 고리가 맞물리는 소리가 들렸다. 칸은 다시 허리를 펴고 바르게 고쳐 섰다. 각 잡힌 그의 자세는 누가 보아도 모범적인 군인의 모습이었다.

 

"난 뭘 하면 되는 거지, '함장'?"

 

칸은 구속구에 내장된 바이오센서가 가동되는 소리를 들었다. 그의 목덜미에 꼭 맞게 조여들고, 동맥의 위치를 찾아내는 소리다. 미세한 바늘이 결국 동맥을 찾아내 찌르는 것이 느껴졌다. 억지로 구속구를 풀어내려하면 곧바로 진정제가 주입될 것이고, 구속구를 악력으로 회전시켜 바늘의 위치를 임의로 바꾸려한다면 아마도 동맥이 찢어질 것이다.

 

"난 당신의 약점을 분명히 알고 있어.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서 당장 '내 말을 듣지 않으면 큰일이 벌어질 거다'라면서 윽박지르고 협박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 그런데 아마 이 복도에도 분명히 폐쇄회로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을 거고, 내 입모양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사람도 분명히 있을 거란 말이야."

 

목줄을 맨 개. 칸은 본인이 딱 그런 꼴이라고 느꼈다. 그러나 그의 기분이 어떻든 간에, 커크는 짐짓 유쾌한 목소리로 농담처럼 한 마디를 툭 내던졌다.

 

"그러니까 일단 여길 나가는 것부터 시작하자고."

 

*** 

 

커크는 창문을 가린 커튼을 힘차게 걷었다. 요즘 세상에야 누가 직접 커튼을 치고 걷겠느냐마는, 커크는 커튼을 여닫을 때마다 들리는 커튼 고리의 마찰음을 제법 좋아했다. 샌프란시스코의 멋들어진 야경이 펼쳐졌다.

 

"조명."

 

불을 밝힌 커크는, 난장판이 된 방안을 둘러보며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찌그러진 음료수-대부분 술-캔과 먹다 남은 음식들, 과자 부스러기들. 읽다가 대강 던져둔 책과 잡지들. 대강 뭉쳐 던져놓은 그의 옷들. 그리고 사용한 콘돔 포장지와 찢어진 스타킹-…

 

"집이 좀 지저분하네."

 

커크의 말에도 칸은 별다른 대꾸가 없었다. 커크가 쓰레기들을 한 구석으로 대강 밀어놓는 동안 집안을 훑어보던 칸은 바닥에 펼쳐진 채 놓여있는 잡지를 집어 들었다.

그 모습을 본 커크는 터지려는 웃음을 가까스로 참았다. 성인 잡지를 들고 있는 칸이라니!

그러나 칸은 잡지의 내용물이 아니라 종이 재질의 잡지 그 자체에 관심이 있는 것 같았다. 흥미를 느끼는 표정이 분명했다.

 

"몇 권 더 있는데 줄까?"

 

커크는 이미 침실을 향해, 정확히는 침대를 향해-커크의 집은 꽤 넓긴 해도 기본적으로는 원룸이었다-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침대 아래로 기어들어간 커크가 낑낑거리며 묵직한 트렁크를 끌어내고 허리를 두드리며 몸을 일으켰을 때, 그는 말없이 자신의 뒤에 서있는 칸을 보며 흠칫 놀랐다.

 

"여기서 대충 골라봐. 전부 책이니까. 책이라기 보단 골동품들이지만."

"뜻밖이로군."

 

칸은 책으로 가득한 100Kg의 대형 트렁크를 가볍게 들어올렸다. 그 모습을 본 커크가 칸의 말을 이해하는 데에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그거 무슨 뜻인데?"

 

그러나 칸에게서 별다른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 천하의 제임스 티베리우스 커크에게 고서 수집 취미라니, 하나도 어울리지 않는다는 건 나도 알아. 커크는 테이블에 트렁크를 올려놓는 칸의 뒷모습을 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욕실로 들어가 버렸다. 곧 그가 부른 지원군이 올 것이다. 그 전에 간단하게 샤워라도 해둘 생각이었다. 예의 ‘지원군’이 커크에게 얼마나 호의적이든, 설령 무슨 일이 있어도 커크의 편을 들어줄 절대적이고 절친한 아군이라고 하더라도, 칸과 단 둘이 마주보고 앉아있도록 방치할 수는 없으니.

 

 

커크는 수건으로 머리를 대강 털어내며 욕실을 나왔다. 스며든 물기 탓에 셔츠가 몸에 달라붙었으나 찝찝하진 않았다. 따듯한 물로 샤워를 하자 몸의 긴장이 풀리고 노곤함이 몰려왔으나 커크는 눈을 빠르게 깜빡여 몰려오는 잠을 쫓았다. 시계를 보니 그가 곧 도착할 때가 되었다. 커크는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책을 넘기고 있는 칸을 보았다.

팔걸이에 팔꿈치를 기댄 채 가볍게 이마를 짚고 있는 칸의 자세는 무척 편안해보였다. 다리를 꼬고 앉은 채 무릎 위에 올려놓은 책은 흔들림 없이 안정적으로 놓여있었다. 종이로 만들어진 두꺼운 책이라는 건, 요즘 세상에선 어쩌면 평생 만져보지도 못하는 사람도 있을 터다. 종이로 만든 책을 넘기는 것에 익숙하지 못한 사람들은 책을 만지는 손길이 항상 어색하기 마련이었다. 커크는 칸의 모습을 지켜보며 그가 3세기 전의 사람임을 새삼 깨달았다. 묘한 위화감을 품고 있는 자였다.

기다리는 사람은 오지 않고 조용하고 어색한 시간만 흘렀다. 칸은 억지로 커크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사실 그는 커크를 향해 시선조차 돌리지 않았다. 소파에 편안하게 몸을 기댄 채 조용히 책에만 시선을 던지고 있을 뿐이었다. 그가 읽고 있는 책의 표지를 기웃거리던 커크는 밖에서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어서와, 본즈."

"무슨 일이야, 짐. 안 그래도 몇 년이나 지구를 떠나야하니 마음이 심란해 죽겠구먼."

"거기에 고민거리를 하나 더 얹어주려고."

"그건 또 무슨…"

 

커크는 맥코이를 집 안으로 끌어당겼고, 그가 문을 닫는 사이에 맥코이가 손에 들고 있던 가방을 툭 떨어트리는 소리를 들었다.

문의 자동 잠금 장치가 설정되는 동안에도 맥코이는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가만히 서있을 뿐이었다.

 

"저어기, 본즈?"

 

Dammit, Jim… 맥코이가 멍하니 속삭였다. 커크가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는 순간 맥코이는 커크를 향해 몸을 돌리고, 그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저 녀석이 왜 여기 있는 거야?"

"일단 진정해, 본즈."

"저 썩을 녀석이 왜 네 집 거실 소파를 차지하고 앉아서 리어왕을 읽고 있는 거냐고, 망할 자식아…!"

 

맥코이는 속삭이듯 쏟아낸 말이었으나 칸에게도 분명히 들렸을 것이다. 그러나 칸은 현관문 앞의 두 남자를 향해 어떠한 관심도 주지 않았다.

 

"일단 진정해봐, 본즈. 다른 사람들도 다 오면 한 번에 설명을…"

"또 누굴 부른 건데, 이 멍청이가! 이게 동네방네 떠들고 다닐 일이야?"

 

절묘하게도 그 순간, 초인종을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칸이 갈아입을 옷을 들고 욕실로 들어간 뒤, 커크는 소파와 테이블을 밀어버리고 거실에 둘러앉은 그의 크루들에게 대략적인 상황 설명을 해주고 있었다. 우후라는 스팍의 곁에서 그의 손을 꼭 잡은 채 욕실 쪽을 흘끗 바라보았다. 그의 연인이 갑자기 그녀를 불러내 지구인 남자가 입는 평상복과 생필품의 준비를 도와달라고 했을 때 까지만 해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꿈도 꾸지 못했다. 혹시 그들의 함장이 무슨 사고라도 쳤을까 어림짐작은 했지만…

술루와 체콥도 서로를 쳐다보며 말을 잊었고, 스카티는 입을 떡 벌린 채 커크를 멍하니 보았다. 킨저는 조용히 눈을 깜빡일 뿐이고, 맥코이는 체념한 얼굴로 절레절레 고개를 젓는다. 캐롤은 몸을 웅크린 채 두려운 기색으로 욕실 문을 응시했다. 그리고 스팍은 우후라의 손을 마주잡은 채 차분한 얼굴로 커크를 조용히 바라볼 뿐이었다.

 

"-그래서 그도 일주일 뒤에 엔터프라이즈호에 동승하게 될 거야."

"이, 이, 미친 함장놈!"

 

Fucking Crazy Captain!! 스카티가 커크를 향해 소리를 빽 질렀다. 커크는 그 말에 눈썹을 살짝 까딱였을 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맥코이는 한숨을 내쉬곤 커크를 향해 복잡한 심경이 담긴 시선을 던졌다.

 

"이미 저지른 일을 번복할 수는 없으니 그렇다고 치자. 네가 함장이 된 이래로 지난 4년 동안 친 사고 중에 이보다 더한 것도 수두룩했으니까. 3년? 4년? 얼마나 됐지? 느낌상으론 10년도 더 지난 것 같은데! 스캇, 일단 좀 진정해봐. 저저번 탐사 때만 해도… 아 생각해보니 새삼 열 받네. 개자식."

 

빠르게 중얼거리던 맥코이는 커크의 뒤통수를 한 대 후려갈기며 이를 뿌득 갈았다. 커크는 별다른 항의도 하지 못한 채 아픈 머리를 대충 문질렀다.

 

"내가 궁금한 건 딱 두 가지야. 하나, 대체 왜 저 자식을 그렇게 살리고 싶어 했는지. 그리고 두 번째는, 이제 어떻게 할 건지."

 

커크는 거실에 둘러앉은 그의 크루들을 천천히 둘러보고, 마지막으로 그의 일등 항해사에게 시선을 던졌다.

 

"난 작년에 죽을 뻔했어. 사실 거의 죽어버렸지. 그런데 칸의 혈청 덕분에 되살아났고. 그런 표정 짓지 마, 본즈. 너희들이 내 생명의 은인이지. 그건 확실히 알고 있어.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너희들만으론 날 되살릴 수 없었을 거야. 그렇지?"

 

본즈는 커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불만스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지금이 아니더라도 그의 얼굴은 항상 불만에 차있긴 했다. 커크는 그런 생각을 하며 명백한 그의 불쾌한 기색을 애써 무시하려했다.

 

"그런데 그가 재판조차 없이 사형선고를 당하는 꼴이 보기 싫었어."

"그럼 재판에 회부하라고 발의했으면 됐잖아!"

 

커크는 맥코이의 그 말에 반가운 기색을 내비쳤다. 금세 아무렇지 않은 척 시치미를 뗐지만, 그를 잘 아는 맥코이는 그의 표정을 금세 알아보았다.

 

"부당하잖아!"

"뭐가 부당한데!"

"냉동 캡슐에서 탈출한 게 군법재판이 열릴 만큼 막중한 죄야?"

"그야 보통은!"

"보통은?"

 

잠시 생각을 정리하던 맥코이는 한숨과 함께 씹어뱉듯 내뱉었다.

 

"…보통은 냉동 캡슐에서 탈출하는 일이 없지. 젠장."

 

그 자식은 테러범에 살인자에 배신자라고, 짐! 범죄자를 법정에 세우는 건 당연한 거야! 맥코이의 외침에 커크는 당당하게 대답했다.

 

"넌 뭔가를 착각하고 있어, 본즈. 그 테러와 살인과 배신에 대한 벌이 바로 냉동형이었어. 그가 저질렀던 일에 대한 벌은 이미 선고 된 다음이었다고."

 

맥코이는 잠시 커크를 바라보다가 스팍을 향해 휙 고개를 돌렸다. 그는 온 표정을 다해 소리 없이 외치고 있었다. 이 배신자 고블린!

 

"너지, 스팍?"

"질문에 목적어가 필요 이상으로 생략되어있습니다. Dr.맥코이."

"짐이 저렇게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는 말을 생각해낼 수 있을 리가 없어. 네가 짜준 레퍼토리겠지, 스팍?"

"나름대로 논리적인 추측이군요. 결론만 말씀드리자면, 옳은 결론을 도출해내셨습니다."

"아, 정말 돌아버리겠군. 너까지 정신을 놔버리면 어쩌자는 거야!"

"납득할 수 없는 발언입니다, Dr.맥코이. 전 지금 제 상태를 정확히 인지하고 있으며 지극히 이성적입니다."

"그런데 왜 저 자식의 말도 안 되는 장단에 맞춰주고 있는 건데?"

"어차피 저희들 중 그 누구도 그를 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말에 맥코이는 허탈한 웃음소리를 흘렸다. 그 말은 맞다. 엔터프라이즈의 그 누구라도, 커크가 저렇게까지 고집을 피운다면, 결국은 그의 말을 들어줄 수밖에 없다. 그것이 그들의 함장에 대한 깊은 애정이었고, 몇 년 동안 쌓인 신뢰의 정도였다.

 

"그래, 좋아. 좋다고. 이 질문은 이제 됐어. 이제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도 될까? 이의 없지? 그래, 사실은 이게 진짜 중요한 문제야. 이제부터 어떻게 할 생각이야? 저 살아 움직이는 흉기 같은 자식을 어떻게 다룰 셈인데?"

 

그 말에 커크는, 오늘 했던 그 어떤 대화보다도 빠르게 답을 내놓았다.

 

 

"그러게. 어떻게 하지?"

 

 

문제는, 그것이 너무나 커크다운 대답이었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설정해보자면, 생도 시절의 제임스 커크.

 

Dammit! 맥코이가 혀끝에 걸린 욕설을 내뱉으려 할 때였다.

 

"그 질문엔 아주 모범적인 답안이 준비되어있을 텐데."

 

냉랭한 목소리가 들렸다. 거실에 둘러앉아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돌아갔다. 욕실에서 나온 칸은 젖은 머리를 대충 쓸어 넘긴 채 청록빛 눈동자로 그들을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었다. 언제부터 그 자리에 있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아무도 그의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일순 넓은 집안에 긴장을 동반한 적막이 감돌았다.

 

"너희들은 이미 내 치명적인 약점을 알고 있다. 그렇지 않은가, Mr.스팍?"

"약쩜? 그게 먼떼요?"

 

체콥은 잔뜩 주눅이 든 채로도 용케 입을 열었다. 그의 질문은 스팍과 커크를 향해 있었으나, 대답한 것은 칸이었다.

 

"내 가족… 나의 동료들."

 

My crew……. 중얼거리는 칸의 목소리는 속삭임에 가까웠으나, 그와 제법 거리를 둔 채 앉아있는 사람들의 귀에 무척 선명하게 들려왔다.

 

"72명의 내 동료들은 스타플릿의 연구소 안에 남아있지. 너희들은 그들을 인질로 잡고 나에게 충성을 요구하면 되는 거야. 아주 명확하고 간단한 해결책이지. 그렇지 않나?"

 

칸은 얼굴 가득 신랄한 비웃음을 띠고 있었다. 너희들은 그저 그런 놈들일 뿐이다. 불신이 가득 담긴 그 웃음에 커크는 마음이 착잡해졌다. 이건…, 그러니까, 그가 처음 만났던 스팍보다도 훨씬 심하다.

평범한 검은색 셔츠와 바지를 입고, 벽에 비스듬히 기대어있을 뿐인데도, 칸은 그들의 목에 페이저를 들이밀고 목숨을 위협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가 현재 비무장상태라고 하더라도 큰 의미는 없었다. 그는 맥코이의 비유대로 존재 자체로서 하나의 흉기인 존재였다. 그는 맨 손으로 두개골을 아작 낼 수도, 목을 부러트릴 수도 있다.

 

"그 뒤에 당신의 손에 두개골이 으스러져 죽으면 된다는 말인가요?"

 

캐롤이 가시 돋친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의 눈에는 공포와 혼란이 어렸다. 그녀의 무릎을 부러트리고 그녀의 눈앞에서 그녀의 아버지를 살해했던 남자의 눈은, 꼭 상어를 닮았다.

 

칸은 그녀를 향해 가소롭다는 시선을 보냈을 뿐, 별다른 대답은 하지 않았다. 커크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찌되었든, 치프들은 결국 그의 결정에 동의해주었다. 적어도 오늘은, 그 사실에 만족해야할 듯 했다.

AND

*칸커크.

*스타트렉은 전혀 본 적 없음. 딱 [스타트렉/다크니스] 한 편 보고, 이틀정도 네이버 검색으로 공부하고 망상글 쓰는 것이니 캐릭터 붕괴, 원작 붕괴, 원작 설정 붕괴 주의. 비긴즈도 본 적 없음.

 

[My Crew]

1. 우주는 아름답다.

    -우주는 어둠이 아니라, 어두운 빛의 공간인 것이다.

 

 

5년. 이제 일주일 뒤면 그는 우주로 떠나는 엔터프라이즈호에 몸을 실을 것이고, 그리고 5년 동안은 지구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우주는 아름답다. 우주의 어둠은 색을 품고 있다. 오색가지로 찬란히 빛나는 빛들이다. 어둠이 아니라, 어두운 빛의 공간인 것이다.

커크는 바의 한 구석을 차지하고 앉아 술을 들이키는 중이었다. 요 며칠간은 끊이지 않는 송별회들의 연속이었다. 지구인들에게 제임스 커크는 우주의 영웅이었고, 그의 친구들을 제외하고도 그를 좋아하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았다. 우주로 가기 전의 마지막 보름을, 그는 화려함 속에 파묻혀있었다. 친구들이 사주는 술과, 예쁘고 매력적인 아가씨들. 그리고 곧 떠날 긴 여행과 모험에 대한 설렘. 꽤 즐겁고 평화로운 날들이었다.

그의 통신기가 울리기 전까진.

 

“여보세여어.”

“함장님?”

“오, 스팍……. 아 좀 꺼져봐, 새끼야. 나 지금 통화 하는 거 안보여? 응, 구래에……. 무슨 일이야, 스팍?”

 

커크가 술에 취해 자신의 목에 팔을 감으며 크게 웃어대는 친구 하나를 밀쳐내며 욕설을 내뱉었다. 그 역시 상당히 술이 올라 한창 이분이 좋아지던 참이었다. 통신기 너머에서 스팍의 한숨소리가 들렸다.

 

“긴급회의가 소집되었습니다. 당장 와주셔야겠습니다, 함장님.”

“긴그읍? 또 무슨 일이 벌어진 건데 그래? 난 이미 퇴근한…….”

“존 해리슨.”

 

스팍은 냉랭한 목소리로 짧게, 흔하디흔할 이름을 발음했다. 존, 리처드, 해리슨. 그 어느 음절도 개성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이름들이다. 그러나 커크에게는, 아니었다.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등골이 오싹해지며 술이 순식간에 깨었다.

 

“자세한건 직접 만나서 이야기해드리겠습니다. 그럼……. 모쪼록 서둘러주십시오, 함장님.”

 

통신이 끊겼다. 커크는 멍하니 앉아 있다가 자신의 앞에 놓여있던 잔을 움켜쥐었다. 잔 안에 반쯤 담겨있던 술을 목구멍으로 쏟아 부었다. 화끈한 느낌은 있었으나, 술에 취하지는 않았다. 취할 수가 없었다.

커크는 동석했던 이들에게 대강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말을 흐리며 재빨리 술집을 빠져나왔다. 그가 그의 일등항해사 스팍의 얼굴을 마주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평소 그가 소요하던 시간의 절반도 채 되지 않는 듯 했다.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건물 내부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러나 커크는 평소와 비슷한 소란과 활기 속에서 유난이 굳은 분위기를 풍기는 얼굴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와 같은 지위를 가진 자들. 커크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멀리에서 스팍이 빠른 걸음걸이로 그를 향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스팍. 그게, 무슨 소리야? 그…….”

“여기서 이야기를 할 사항은 아닙니다, 함장님. 듣는 귀가 많습니다. 일단 데이스트롬으로 가시죠. 가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커크는 고개를 끄덕이며 승강기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새벽이 가까워지는 시간에 승강기를 사용하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오늘도 마찬가지여서, 커크는 스팍과 단 둘이 승강기에 오르고 문이 닫히자마자 급히 다그쳐 물었다.

 

“칸에 대한 사항이라고? 그는 벌써 일 년 전의 범죄자야. 그런데 이제 와서 그에 대한 처우를 논하기라고 한다는 거야?”

“그게 아닙니다, 함장님. 그가…….”

 

스팍은 층계 버튼을 누르며 커크를 보았다. 커크의 새파란 눈동자에 얼핏 복잡한 감정이 담긴 것이 보였다. 주된 감정은 혼란스러움이었으나, 그의 오묘하고 세세한 느낌까지 파악하기엔, 그는 절반이나마 벌칸이었다.

 

“깨어났습니다.”

“뭐? 깨어나다니, 설마, 칸? 칸, 그자가 깨어났다는 건가?”

“예. 함장님.”

 

스팍의 대답에 커크는 입을 떡 벌렸다. 그가 들쑤셔놓은 도시는 아직도 복구 중이었다. 그의 사람들을 잃었다는 상심 하나만으로, 드레드노트 급 전투용 함선으로 샌프란시스코를 갈아엎어버릴 마음을 품을 수 있는 자.

게다가 그는, 그 계획을 실제로 실행으로 옮길 수도 있는 악몽 같은 자다. 어떤 미친놈이 무슨 원대한 계획을 품은 채 그를 깨울 생각을 하단 말인가? 하물며 존 해리슨의 해동-해동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니 그가 무슨 냉동 피자라도 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잠시 웃겼다-에 대한 그 어떤 안건도 보고된 적이 없……. 커크의 생각이 거기까지 닿았을 때, 커크를 물끄러미 지켜보던 스팍은 커크가 갑자기 벌렸던 입을 다무는 것을 보았다.

 

“누가 그를 풀어 준거지, 스팍?”

“…….”

“누구도 그를 자기 멋대로 되살려낼 수는 없잖아. 그는 최고 레벨의 위험인물이라고!”

“아무도 그를 풀어주지 않았습니다.”

 

승강기는 아무런 덜컹거림도, 소음도 없이 매끄럽게 상승하고 있었다. 커크가 스팍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짓자 스팍은 부연설명을 덧붙였다.

 

“저도 정확히는 알지 못합니다만……. 그자가 자력으로 극저온 보존 장치를 탈출했다고 합니다. 현재 그는 구금실에 격리되어있으며, 어떤 진정제도 그에게 듣지 않는다고 하고요. 제가 파악한 것은 이게 전부입니다.”

 

맑은 소리가 흐르며 승강기의 문이 열렸다. 스팍과 커크는 승강기에서 내리는 도중에도 데이스트롬으로 하나둘 모여들고 있는 함장들과 그들의 일등항해사들을 볼 수 있었다. 아직 영문을 파악하지 못한 사람이 서너 명. 그리고 딱딱하게 굳은 표정의 대다수. 커크는 누군가 그의 뒤를 스쳐지나가며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런 괴물은 진작 폐기했어야 했어…….

그들이 데이스트롬에 각기 자리를 잡고 앉았을 때, 마지막 한 사람의 입장과 함께 데이스트롬의 문이 굳게 잠겼다. NX-01 엔터프라이즈호의 함장이었던 조나단 아처는 원수 급의 간부였으나 기꺼이 몸소 긴급회의에 참석하겠노라 뜻을 밝혔다. 아직 마커스 제독의 후임이 확정되지 않은 탓에. 내부적으로 대대적인 인사이동과 개편을 시행하기엔, 스타플릿은 너무나 바빴다. 반파된 도시와 수많은 사상자들이 빠른 속도로 수습된 것은 정부기관 뿐 아니라 스타플릿 역시 총력을 기울여 도시 복구에 힘썼기 때문이었다.

 

“급박한 사안이니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겠네. 다들 대략적으로는 상황을 파악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네만…….”

 

아처가 자신의 자리로 걸어가는 동안 각자 의자를 하나씩 차지하고 앉은 함장과 일등항해사들의 앞에는 푸른 스크린이 떠올랐다. 폐쇄회로카메라의 영상처럼 보이는 화면 속에는, 커크의 눈에 비교적 익숙한 물건들이 보였다. 73개의 냉동캡슐들.

영상 속 당직 기술자는 졸린 눈을 비비며 기지개를 켜더니, 책상 위에 올려두었던 컵에 물을 채우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웠다. 화면 속에는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73개의 극저온 보존 장치들과, 그 장치들을 관리하는 컴퓨터. 그런데 기술자가 자리를 비우고 채 30초도 지나지 않아 갑작스레 경보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아주 우연한 사고였네. 극저온 보존 장치들을 제어하는 메인 시스템에 아주 작은 오류가 생겼지.”

 

영상에선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요란한 경보음이 울린 것이 분명했다. 채 10초도 지나기 전, 기술자는 컵까지 내던진 채 컴퓨터 앞으로 뛰어 돌아왔다. 그리고 급히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어쩌면 요란한 사이렌 소리에 가려졌기에, 그 기술자는 아무런 소리도 듣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영상을 지켜보는 커크의 눈이 커졌다. 이 방 안에 앉아있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의 표정에 놀라움이 어렸다.

영상 속에서, 73개의 극저온 보존 장치 중에서 단 하나의 장치에, 변화가 있었다. 기술자가 컴퓨터 화면에 정신을 쏟고 있는 동안, 보존 장치의 모양이 점차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내부에서 강한 힘으로 타격하고 있다는 것이 너무나 분명한 모양새였다. 장치의 표면이 툭툭 불거져 나오고 있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보존 장치의 유리 부분이 깨지며 남자의 팔이 불쑥 튀어나왔다. 기술자가 시스템의 오류를 전력으로 찾아내어 고치는 데 걸린 시간은 단 30초뿐이었다. 놀라울 정도로 빠른 대응이었다. 이정도면 극저온 보존 장치에는 별다른 영향이 가지 않을 것이다. 물론 내일 아침 보고 때에는 상사에게 왕창 깨지긴 하겠지만.

그렇게 생각하며 뒤를 돌아본 당직 기술자는, 누군가가 인위적이고 무자비한 힘으로 찌그러트린 극저온 보존 장치 한 기와, 바닥에 쓰러져있는 검은 머리의 사내를 발견하고 비명을 질렀다. 그는 정신없이 비상벨을 누르며 경비를 호출했다…….

 

“이게 사실입니까? 조작된 영상이 아니고요?”

“그 판단은 스스로 해보게.”

 

한참의 침묵 끝에 나온 질문과, 곧바로 떨어진 대답. 그리고 또다시 침묵이 이어졌다. 함장과 일등항해사들의 얼굴을 찬찬히 둘러본 아처는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영상을 통해서 보았듯이……. 조금 전, 극저온 보존 장치의 관리 시스템에 문제가 생겼네. 아주 작은 오류였고, 담당자의 적절하고 신속한 대처로 시스템이 정상화될 때까진 40초……, 정확히 39.713초가 걸렸다고 하네.”

 

커크는 멈춰진 영상을 다시 재생시켰다. 무장한 경비들이 방으로 들어오고, 바닥에 쓰러진 남자에게 기절 모드의 페이저건을 들이댄다. 그리고 아직 혼수상태로 보이는 남자를 제압하고 구속해서, 방에서 끌고 나간다…….

 

“그는 시스템 오류가 발생한 뒤, 10초도 되지 않아 의식을 되찾았고, 자력으로 장치에서 탈출하기까지 단 30초……. 어떤 냉동인간도 저런 식으로 깨어날 순 없어. 깨어나는 순간 목숨을 잃는 것이 정상이지. 하지만 저 자는 지금 놀라울 정도의 회복력을 보이고 있네.”

 

화면이 넘어갔다. 또 다른 영상이 출력되고 있었다. 구금실로 보이는 방 안에는 예의 그 남자가 의자에 앉아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화면은 구금실의 폐쇄회로 카메라와 직접 연결되어있네. 현재 그가 갇혀있는 구금실을 그대로 비춰주고 있다는 말이야. 믿겨지나? 단 세 시간 전에 자신의 손으로 냉동 캡슐을 부수고 탈출한 자라는 것이.”

 

회의실 내부에는 적막이 감돌았다. 여러 사람의 숨소리와, 간간히 침을 삼키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아처는 담담한 말투로 말을 맺었다.

 

“이 자가 바로 존 해리슨이네. 자네들이 급히 소집된 이유이기도 하지. 이 자를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커크는 화면 속의 남자를, 존 해리슨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조각해놓은 듯 아무런 변화 없는 표정과 반듯하고 각이 잡힌 자세는 기억 속의 그 모습 그대로였다. 창백한 낯빛도 달라지지 않았다.

 

"저항의 기미는 보이지 않습니까?"

 

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커크의 귀에 누군가의 질문이 들려왔다. 순간 커크는 시선을 느끼고 옆을 돌아보았다. 스팍이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커크는 장난스럽게 한쪽 눈썹을 치켜보였으나 스팍의 굳은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이미 이어질 상황이 전부 시뮬레이션 된 모양이었다.

 

"보다시피 아직은 어떠한 저항도 하지 않았네. 냉동장치에서 깨어난 직후에 곧바로 구금실에 격리되었으니 아무런 상황도 파악하지 못한 것이지. 무작정 날뛰지는 않을 걸세. 어리석은 자는 아니니까."

"그렇다면 스타플릿 내부의 상황과 대략적인 정세를 파악한 뒤엔 언제든지 다시 날뛸 수 있다는 것 아닙니까? 이런 회의를 소집할 것도 없었습니다. 저런 극악의 위헌인물은 법정에 세울 것도 없지요. 당장 사형시켜야합니다."

 

커크는 그의 목소리가 어쩐지 낯이 익는다고 생각했다. 그런 괴물은 진작 폐기했어야 했어……. 그 목소리다. 커크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발언중인 사내를 보았다. 삼십대 후반으로 보이는 사내, 약 반 년 전, 새로이 임명된 함장이다. 커크는 아직 그의 이름을 몰랐다.

 

"그를 사로잡았을 때 애초에 얼릴 것이 아니라 죽였어야 했습니다. 그자가 파괴한 도시는 아직도 완전히 복구될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의 테러로 목숨을 잃은 사람이 몇이고, 땅에 떨어진 스타플릿의 명예와 신뢰는 아직 회복되지도 않았습니다. 그가 저 장치 안에서 깊은 잠에 빠져있을 때에도 그를 폐기할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고요……."

 

그 말에 커크는 괜스레 울컥하는 기분이 되었다. 그는 낮은 목소리를 내었다. 으르렁거리는 듯 한 소리가 났다.

 

"그건 폐기가 아니라 사형이라고 하는 겁니다, 대령."

 

아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커크를 보았다. 엔터프라이즈의 함장… 아처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

 

"다른 사람들의 의견은 어떤가. 기탄없이 말해보게."

 

발언의 기회는 공평하게 주어졌으나 대부분의 의견은 비슷했다. 그를 당장 죽여야 한다. 그래도 재판을 열어 정당한 심판을 받게 해야 한다. 그의 유전자 정보와 능력, 그리고 그만의 재생력이 가진 가치를 고려한다면 다시 냉동시키는 것이 좋다……. 자신의 의견을 밝히지 않은 함장은 커크 뿐이었다. 아처는 커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고, 자연스레 모든 사람들의 시선도 커크에게로 향했다. 그러나 커크는 당황하지도 주눅 들지도 않았다. 그는 당당한 표정으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전 그를 이대로 살려두자는 쪽입니다."

 

스팍은 이미 그의 대답을 예상하고 있었던 듯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커크는 스팍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놀라거나 경악에 찬 표정을 짓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그 순간 커크는 아처가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인자한 표정을 짓고 있는 듯 했다.

 

"그를 살려두자고요? 일 년 전의 테러를 다시 겪자는 겁니까?"

 

그 질문엔 커크가 아닌 스팍이 대답했다.

 

"아니오. 다시는 겪지 않기를 바라는 겁니다."

 

커크는 놀란 눈으로 스팍을 보았다. 칸에 대한 문제에 있어서, 그는 결코 우호적이지 않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에.

 

"우리 중 그 테러를 막을 수 있는 힘이 있는 자가 있었습니까? 제가 결국 그를 제압하기는 했었지만 당시에도 저는 목숨을 걸어야 했으며… 저 혼자만의 힘으로는 그를 제압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단 한 명의 손에 도시가 부서지는 모습을 무기력하게 지켜보기만 했습니다. 아무도 그를, 그의 테러를 막을 수 있는 힘이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표정에 불쾌함이 떠올랐다. 스팍의 발언은 그들의 자존심을 심하게 건드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가능합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스팍 중령?"

"말 그대로입니다. 스타플릿이 대응할 수 없는 적. 혹은 큰 희생과 힘을 필요로 하는 적에게, 그는 대응할 수 있습니다."

"스타플릿은 군사기관이 아닙니다!"

"적에겐 그 사실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스타플릿이 군사기관이든, 연구기관이든, 심지어 학생들이 다니는 평범한 학교라고 하더라도. 적에게 중요한 것은, 지배하거나 빼앗을 가치가 있느냐. 그것뿐입니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스타플릿이 지금껏 성장해온 데에는 스파플릿 자체의 병력이 우수하거나 뛰어난 방어 시스템이 존재하기 때문이 아니라……, 아직까지 큰 공격을 받은 일이 없다는 기적덕분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존 해리슨은 압도적인 힘을 가지고 있고, 그를 따르는 자가 일흔 명을 넘어갑니다. 그들의 우두머리인 존 해리슨은 그 일흔두 명을 완벽히 통제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며, 그를 죽이는 것은 잠정적으로 스타플릿의 소유가 될 수도 있었던 커다란 병력의 손실을 뜻하게 됩니다."

"우리의 힘으로 지금껏 잘 해왔고, 커다란 위기도 몇 번이나 넘겼습니다. 새삼 새로운 위험부담을 끌어안아야 하는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변화 없이는 번영도 없기 때문입니다, 대령님."

 

존 해리슨의 폐기를 운운하던 남자는 입가에 비웃음을 띠었다.

 

"전 지금까지 벌칸은 지극히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종족이라고 알고 있었는데요."

 

그러나 스팍은 그의 모욕에 아무런 반응도 내보이지 않았다. 지금까지와 같은 억양으로 빠르게 말을 맺을 따름이었다.

 

"전 지극히 논리적인 판단에 따라 발언하고 있습니다, 대령님."

"변화 없이 번영은 없다? 그것이 그렇게 논리적인 논리인줄은 몰랐군요."

"아니오. 전 논리적이고 객관적으로 저의 함장에 대한 판단을 내렸을 뿐입니다."

 

스팍에게 집중되었던 시선이 일제히 커크에게로 향했다. 커크는 저의 함장-my captain-이라는 스팍의 어휘 선택에 괜스레 뿌듯함과 민망함을 느끼는 중이었다.

 

"커크 대령님 본인의 의견이 분명한 이상, 대령님은 어떤 이유로든 존 해리슨의 사형을 납득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납득하지 못하는 명령에 순순히 따를 인물도 아니고요. 그렇다면 그는 반드시 위험을 무릅쓰려 할 것이고, 이는 함장님님과 엔터프라이즈호의 안전 문제에도 직결될 수 있습니다. 저의 함장을 설득하는 것보단 여러분 전체를 설득하는 것이 차라리 가능성이 높을 정도니까요."

 

사람들의 얼굴에 미묘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러나 스팍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제 개인적인 생각까지 직속상관도 아닌 대령님께 보고해야 할 의무는 없으나 대령님의 질문을 답을 요구하시는 군령으로 해석하여 보고 드린 것이니 그런 의도가 아닌 질문이었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이해가지 않는 부분이 있으십니까?"

 

스팍을 노려보는 함장의 눈빛에 짜증이 어렸다. 그러나 아처는 더 이상 회의가 산만해지도록 방치하지 않았다. 약한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으며 주의를 끈 아처는 커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니 자네의 의견은, 존 해리슨을 스타플릿의 일원으로 받아들이자는 뜻인가?"

"그는 원래부터 스타플릿 소속이었습니다. 적어도 마커스 전 제독이 그를 발견한 뒤부터, 1년 전까지는 말입니다."

 

커크는 퉁명스레 대답을 하며 회의실 안을 둘러보았다. 커크에게 절대로 호의적인 분위기는 아니었다. 존 해리슨의 사형을 강력히 주장하던 예의 대령은 입을 다물고 있었으나, 또 다른 남자가 입을 열었다. 그의 직급을 보아하니, 누군가의 일등항해사인 모양이었다.

 

“그를 무슨 수로 아군으로 포섭한다는 말입니까? 그리고 만일 그를 회유하는 데에 실패한다면, 또다시 커다란 희생을 치러야만 할 것입니다. 이번에야말로 도시가 전부 날아가 버릴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스팍의 발언에 마음이 솔깃한 이들도 분명히 있었다. 확신에 찬 벌칸만큼 설득력 있는 근거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다음이 문제였다. 커크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스팍을 보았으나 스팍은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커크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느라 몇 사람이 서로 눈빛을 교환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저희들은 그 한 사람을 위해 쏟아 부을 자본도, 여유도 없습니다. 현재 도시 재건만 해도 힘에 부치는 상황이고, 5년 탐사 계획의 시작도 일주일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

 

그 말에 커크의 머릿속을 번쩍 스치는 아이디어가 있었다. 아마… 본즈에게 된통 혼나고 스카티에게는 몇 대 맞게 될지도 모르겠지만. 그러나 묘한 확신이 들었다. 아마도 존 해리슨-, 아니, 칸은…….

 

"제가 맡도록 하겠습니다."

"함장님?"

 

스팍은 절도 있는 동작으로 고개를 돌려 커크를 보았다. 그러나 커크는 확신에 찬 표정으로 방 안의 사람들을 보고 있었다.

 

"말씀하신 5년 탐사 계획은 저의 임무입니다. 일단 지금 이곳에서 구두로 인력 증원을 요청합니다. 후에 정식으로 서류를 제출하지요. 존 해리슨을 제가 맡도록 하겠습니다."

"그게 진심입니까, 커크 대령?"

 

스팍은 커크에게 질문하는 남자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섞여있는 것을 눈치챘다. 이건 어쩌면 함정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커크는 스스로 떠올린 기가 막힌 아이디어에 집중하고 흥분하느라 그 기색을 눈치 채지 못한 듯 했다.

 

"만일 우주에서라면 그가 폭주한다고 하더라도 또다시 3백만 명의 인명피해를 입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리고 엔터프라이즈호는 벤전스호와는 달라서 그 혼자의 힘으로는 운행할 수도 없으니 그가 제멋대로 우주선을 탈취하여 테러를 감행할 수도 없고요."

"그자가 5년 뒤에 지구로 귀환하고 나서도 위험한 생각을 품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있습니까?"

"자그마치 5년입니다. 그가 아무리 철저한 인간이라고 하더라도 그 긴 시간동안 수백 명의 선원들을 모두 속일 수는 없을 겁니다. 탐사 경과보고와 더불어 존 해리슨에 대한 관찰보고 역시 정기적으로 이루어진다면 만족하시겠습니까?"

 

마커스의 사망은 스타플릿 내부에 큰 혼란을 가져왔다. 혼란은 곧 더없는 기회이기도 했다. 안정된 조직에선 꿈도 꿀 수 없는 권력과 출세의 기회였다. 젊은 나이의 영웅 제임스. T. 커크는, 그가 권력에 관심이 없다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꽤 눈에 거슬리는 존재였다.

실패할 가능성이 높은, 혹 그의 목숨까지도 앗아갈 수 있는 일이다. 그런 일을 스스로 떠맡으려한다는 것은, 커크를 못마땅해 하는 이들에게는 제법 솔깃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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