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질하는 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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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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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커크

*리부트 스타트렉 영화만 감상한 뒤 쓰는 날조글입니다. 캐릭터 붕괴, 원작 붕괴, 원작 설정 붕괴 주의.

*필자의 칸 편애 주의. 칸 보고 싶어서 쓰기 시작한 글이라 어쩔 수가 없습니다.

[My Crew]

8. 제임스.

- “네가 감히.”

[제임스.]

커크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낮은 목소리에 문득 잠에서 깨었다. 불조차 끄지 않고 까무룩 잠들었던 커크는 비몽사몽간에 몸을 뒤척였고, 가슴팍 위에 올려두었던 패드가 스르륵 미끄러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졸린 눈을 비비며 바닥을 더듬어 패드를 집어 올리자, 언제나처럼, 아무도 없는 어두운 함교를 홀로 차지하고 앉아있는 칸이 보였다.

커크는 칸의 혼잣말 중 절반은 알아듣지 못하고 흘려버렸다. 묵직한 수마를 떨쳐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지난 며칠간 새벽마다 들어왔던 칸의 목소리는 이제 자장가로 들릴 만큼 익숙해져 있었다. 커크는 칸이 부르는 이름의 주인은 그가 아니며, 우연히 얼굴 모를 누군가와 자신의 이름이 같았을 뿐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칸의 나직한 목소리가 부르는 자신의 이름을 들으면서, 조명을 꺼버리고 다시 눈을 감았다. 그가 잠들더라도, 새벽이 끝나 해가 떠오를 때까지 계속해서 들려올 목소리였다.

"함장님!"

Captain on the bridge! 커크가 함교에 들어서자 체콥이 외치는 다급한 목소리가 가장 먼저 들려왔다. 함교 내부는 소란스러웠다. 칸과 스팍이 뒤엉켜 바닥을 뒹굴고 있었고, 술루와 맥코이가 두 사람을 말리려다 밀쳐져 바닥을 나뒹굴거나 비틀거리고 있었다. 출항한지 얼마나 지났다고. 자신이 자리를 비운 것도 아주 잠깐인데, 함교 안에서, 선원들의 앞에서 이런 몸싸움이라니. 커크는 한숨을 내쉴 여유도 없이 급히 두 사람에게로 다가갔다.

"네가 감히."

 

 

 

칸이 스산한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냉담한 표정과, 서늘한 목소리와는 달리, 분노로 들끓다 못해 충혈 된 칸의 눈이 보였다. 스팍의 손이 칸의 목덜미에 닿아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스팍은 칸의 목덜미에서 손을 떼어내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었으며, 칸은 손에 핏줄이 돋아날 만큼 강한 힘으로 스팍의 손을 붙잡아 자신의 목덜미에서 떼어낼 수 없게 잡아두고 있었다.

 

스팍의 숨이 거칠었다. 벌컨의 주먹이 칸의 어깨와 머리를 서슴없이 내리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팍의 손을 움켜쥐고 놓아주지 않는 칸은, 일견 잔혹해 보이기까지 하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비웃음을 띤 입술 사이로 살짝 드러난 그의 치아가 맹수의 그것처럼 느껴질 지경이었다.

 

 

 

"그렇게 자신이 원하는 대로 날 건드려놓고, 쉽게 그만둘 수 있으리라 생각했나? 감히 나를 상대로?"

 

"..!"

스팍의 다리가 허공을 걷어찼으나, 허리를 깔고 앉은 칸에게 그의 발은 닿지 않았다. 칸의 손이 이윽고 스팍의 목을 움켜쥐었다.

 

 

 

"이 고통은 네 분수를 모르고 주제를 넘어버린 것에 대한 책임이다."

 

 

 

칸의 손이 이윽고 스팍의 목을 움켜쥐었다. 기다란 손가락이 하얀 뱀처럼 스팍의 목을 감아쥐고 강한 힘으로 졸랐다. 두 남자가 서로의 목덜미에 손을 댄 채, 누군가는 벗어나려 하고 누군가는 잡아두려 하며 점차 몸싸움이 격렬해지고 있었다. 심지어 함장이 함교로 들어선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한 두 사람을 말리기 위해, 커크는 두 사람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함교에서 뭐 하는 거야! 둘 다 그만.. 아윽!"

커크가 다가가 칸의 손을 붙잡았다. 스팍과 칸의 손에 그의 손이 닿는 순간, 그는 오른쪽 다리에 극심한 통증을 느끼며 주저앉았다.

"젠장, !"

오른쪽 무릎 부근을 부여잡고 끙끙거리는 커크에게 맥코이가 황급히 달려왔다. 숨이 턱 막히고 눈앞이 아찔할 만큼 날카로운 통증이었다. 커크의 목소리를 들은 칸의 고개가 커크를 향해 휙 돌아갔다. 칸이 맥코이의 부축을 받아 힘겹게 몸을 일으키고 있는 커크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동안, 스팍은 그에게 잡힌 손을 빼내며 칸의 몸을 떠밀었다.

칸은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순순히 물러났다. 칸은 자신의 손을 뿌리치고 몸을 일으키는 스팍을 느꼈으나, 그에 반응하지는 않았다. 그의 시선은 똑바로 커크를 향하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눈앞의 상대를 찢어발길 듯 맹렬하던 살기가 순식간에 수그러들었다.

"함장."

 

"아으으.. 방금 그거 뭐야. 너희 무슨 짓을 하고 있던 거야?"

 

 

 

커크는 끊어질 것 같은 종아리를 주무르며 칸과 스팍을 번갈아보았다. 칸은 커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몸을 일으켰다. 스팍은 우후라의 부축을 받으며 일어났다. 스팍 역시 오른쪽 다리를 절고 있었다. 칸의 관자놀이에 심한 멍이 들었으나, 칸은 전혀 아파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저 순식간에 열기가 빠져나가버린 듯한 눈으로, 아직 핏발 섰던 붉은 기운이 다 빠지지 않은 눈으로 커크를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그에게 듣는 것이 좋을 것 같군, 함장."

 

"?"

 

"난 일등항해사의 명령에 불복했다."

칸의 시선이 잠시 스팍을 스쳐 지나갔다. 칸도, 스팍도, 엉망진창인 몰골이었다. 칸은 손을 올려 흐트러진 머리칼을 대충 쓸어 넘겼다.

 

 

 

"그런 내가, 당신에게 그를 고자질하는 모양새가 누구에게든 좋아 보일 리는 없으니."

 

 

 

커크는 아픈 다리를 툭툭 털며 맥코이의 어깨를 짚고 몸을 일으켰다. 얼굴이 가까워지니 칸의 눈가에 맺힌 피멍울이 좀 더 선명히 보였다. 만일 평범한 지구인이었다면 두개골이 함몰되었을 벌컨의 힘이었다.

 

 

 

"함장. 허락한다면 자리를 벗어나고 싶다."

 

"어디를 가려고?"

 

"잠시 개인 쿼터에서 쉬려는 것뿐이야."

커크는 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칸은 커크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함교를 나가버렸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함교를 빠져나가는 그는 다리를 절지도, 비틀거리지도 않았다.

 

우후라는 스팍을 부축해 그의 의자에 앉혔다. 커크는 아직도 욱신거리는 다리를 절뚝이며 함장의 의자에 비스듬히 걸터앉았다.

 

 

 

"어떻게 된 거야?"

 

"존 해리슨은 함선이 정박해있는 지난 일주일간 매일 새벽, 이 함교를 출입했습니다. 그 누구의 동행도 없이, 혼자 대략 다섯 시간 가량을 함장님께서 지금 앉아계신 그 의자에 앉아있었습니다. 저는 그의 의도가 불분명한 행동에 대한 해명을 요구했습니다. 그는 이에 불응했고,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으며, 제가 그에게 강제력을 행사하려 하자 마찰이 생긴 것입니다."

커크는 스팍을 빤히 바라보며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그의 푸른 눈에 어린 것은 당황과 황당의 빛이었다.

 

 

 

맙소사, 그러니까 지금.. 마인드 멜딩을 시도했단 말이야? 저 칸에게?”

 

그렇습니다. 함장님. 저는 엔터프라이즈호를 위협하는 모든 요소를 경계하고 배제하여 항해 기간 동안 함선과 선원들의 안전을 도모할 의무가 있습니다.”

 

 

 

커크는 스팍의 말에 절로 나는 한숨을 숨기려 하지도 않았다. 칸은 앞으로도 절대로 자신에게, 또한 엔터프라이즈와 스타 플릿에게 협조적이거나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려 들지 않을 것이 분명했고, 자신은 넘기더라도 스팍과는 늘 부딪힐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오늘과 같은 분쟁이 앞으로 몇 번이나 일어날 것인지 생각도 하기 싫었으며, 그럴수록 칸은 엔터프라이즈에서 점차 고립되어갈 것이 뻔했다. 스팍은 벌컨이었고, 칸은 오만했다. 양측 누구도 '적당히'를 용납하지도 않을 것이며, 다른 선원들의 눈을 의식하지도 않으리라는 사실은 새삼 말할 것도 없었다.

커크의 몸을 샅샅이 훑던 맥코이의 트라이코더에 스트레스로 인한 호르몬 변화가 감지되자, 맥코이는 한쪽 입꼬리를 씰룩이며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아까 그 통증은 뭐야? 마인드 멜딩이랑은 달랐어. 너브 핀치 같은 것도 아니었고.”

 

그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고통 중 일부인 것으로 사료됩니다. 제가 읽어내고자 했던 기억은 지난 일주일간 이 함교에 있었던 시간의 것이었지만, 그는 상당한 과거의 기억을 떠올려 저를 강렬한 통증에 노출시켰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벌컨인 제가 정신적인 교감에 관한 문제에 있어 지구인인 존 해리슨에게 주도권을 빼앗기는 상황은 예상하지 못 했습니다. 또한 상당한 시간이 흐른 기억임에도 무의식 속에 잔재하는 고통을 선명하게 회상해낸 점이나 그런 방식으로 스스로를 방어해낸...”

"아아, 그만. 일단 거기까지만, 스팍."

커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어느 정도 통증이 사라진 다리를 툭툭 두드렸다. 맥코이가 다시 한 번 커크를 향해 트라이코더를 들이밀었으나 커크는 귀찮다는 표정으로 맥코이의 팔을 슬쩍 밀어냈다. 갑작스러운 통증과 심적인 요인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제외하면 별다른 문제가 발견되지 않은 터라, 맥코이는 순순히 트라이코더를 거뒀다.

커크는 다시 스팍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스팍의 무표정한 얼굴과 칸이 졸랐던 목덜미는 연두색, 초록색 멍이 번져 얼룩덜룩했다.

다음부턴 나한테 미리 언질이라도 해달라고.”

함장님께서 동의해주실 확률은 매우 희박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나한테 승인도 받기 전에 저질러버렸다?”

황당해하는 커크의 물음에 대답한 것은, 아직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트라이코더를 만지작거리며 커크의 뒤에 서있던 맥코이였다.

워우, 꼭 누구 닮아 가는데.”

커크는 맥코이를 흘겨보았다. 우후라가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렸다.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그들에게 등을 돌리고 앉아있는 술루 역시 그 말을 듣고 웃었으리라는 생각이 들어, 커크는 가볍게 콧등을 찡그렸다.

커크는 입맛을 다시며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다리의 통증은 거의 사라져 움직이는 것에 불편한 점은 없었다. 맥코이와 스팍의 시선이 커크를 쫓아 올라갔다.

무슨 일 생기면 호출해.”

그 자식한테 가려고?”

커크는 가벼운 표정으로 두 사람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 ‘그 자식이 앙심을 품고 선상반란을 계획하기 전에 미리 사과라도 해두려고?”

 

 

 

 

 

 

무슨 일이지. 함장.”

 

. 네가 또 무슨 미친 짓 하진 않나 감시하려고 왔어. 들어가도 될까?”

 

 

 

칸은 커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순순히 몸을 돌려 자리를 만들었다. 커크는 칸의 방 안으로 들어서며 주변을 휘둘러보았다. 필요 외의 가구들은 거의 배제되어있는 깔끔한, 달리 말하면 삭막한 방이었다. 침대와 책상, 의자와 서랍이 하나씩. 자신이 지구에 있을 때 선물했-마음에 들면 몇 권 가져가도 좋다고 했더니 칼같이 챙겨온-던 종이책 몇 권과 작은 상자 따위뿐인.

커크는 책상 위에 놓여있는 상자의 뚜껑을 슬쩍 젖혀보았다. 상자 안의 내용물은 적지 않은 양의 항생제를 비롯한 약품들이었다. 커크는 얌전히 상자의 뚜껑을 덮어두고 의자에 걸터앉았다. 커크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칸은 자신의 침대로 다가가 앉았다. 언제나처럼 칼같이 반듯한 자세였다.

 

 

 

저게 그때 가져갔던 그 약들이야? 일주일 내내 저것 때문에 본즈가 얼마나 짜증을 냈는지. 한 달 치 잔소리를 일주일 동안 몰아서 듣는 느낌이었다고.”

 

 

 

칸은 커크의 물음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을 뿐, 별다른 대꾸를 하지는 않았다. 커크는 문득 칸의 눈가에 시선이 닿았다. 새카맣게 짙었던 피멍은 잠깐 사이에 흐려져 지저분한 얼룩이 되어있었다. 곧 완전히 사라질 자국이었다. 커크는 자신이 칸에 대해 지나치게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다. 조금 전에 그 싸움을 보고서도 벌써 흐려지기 시작한 멍 자국이 아니라, 아직도 그에게 상처가 남아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어색할 만큼.

칸은 커크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라는 재촉을 담은 눈빛에 커크는 어깨를 으쓱이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왜 그렇게 화가 났던 건데?”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함장.”

평소처럼 무시하고 자리를 뜨던가, 비웃어버리고 비협조적으로 굴던가. 조용히 넘어갈 방법은 몇 가지나 있었잖아? 네 행동은 전부 기록되고, 그대로 스타플릿에 보고된다고. 이렇게 폭력적이고 통제되지 않는 모습을 보여 봐야 너와 네 선원들에게 좋을 것은 하나도 없어. 내가 이렇게 따로 말하러 오지 않아도, 그 정도는 이미 알고 있잖아.”

커크의 말에 칸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침묵은 길지 않았으나, 커크의 말에 답하는 칸의 목소리엔

 

 

 

"그는 내가 용납할 수 있는 선을 넘었다. 그뿐이야."

 

"네 선원들보다 더 중요한 ''이야?"

 

"글쎄."

 

 

 

칸은 문득 고개를 들어 커크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칸의 눈동자는 차가울 정도로 차분했다. 조금 전 분노로 물들었던 사나운 얼굴에 한 해 전의 기억이 문득 되살아났으나, 지금의 칸에게선 별다른 감정의 기색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의 눈동자가 가늘어지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윽고 그가 고개를 저으며 다시 입을 열어 대답할 때까지, 방안에는 두 사람의 숨소리와 어디선가 희미하게 들려오는 규칙적인 소음뿐이었다. 엔터프라이즈가 내는 숨소리라며, 스카티가 칭찬 일색을 늘어놓았던 부드러운 소음.

 

커크는 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의 냉소적인 태도는 스팍의 냉철함이나 맥코이의 신랄함과는 달랐다. 지나치게 오래 삭아 바스러져가는 삭막함 위로 깔린 잔혹함. 백여 명도 되지 않는 자신의 사람들은 목숨보다 소중할지 몰라도, 타인이라면 날벌레 한 마리만큼의 가치도 없다는 편협함.

 

 

 

"어려운 문제로군."

 

". 예상 밖의 대답인걸."

 

"어느 쪽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것이라면, 순서를 세우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겠나."

커크는 고개를 끄덕이며 의자의 등받이에 몸을 푹 파묻었다. 칸을 오래 바라보는 것은 힘에 부쳤다. 그의 감정은 선명했고, 또한 스스로를 감추지 않았다. 그의 감정이 전염되면, 압도되고 휩쓸릴 것만 같았다. 더군다나, 천하의 커크에게도 제법 부담될 만큼, 칸의 시선은 거침없었다.

 

커크는 짐짓 방안을 둘러보는 척 시선을 흘렸다. 서랍 위에 놓여있는 종이서적은 커크가 '선물'한 것이 대부분이었으나, 그가 처음 보는 것들도 섞여있었다. 출항 전 칸에게 허락된 개인적인 시간은 거의 없었는데, 언제 저런 책들을 구해왔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 책 옆에 놓인 작은 나뭇조각. 가구를 제외하면 이 방 안에 있는 것은 그것들이 전부였다. 커크는 서랍 위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작은 나뭇조각에 시선을 던졌다. 거리가 좀 떨어져 있어 자세히 살펴볼 수는 없었으나, 새 모양을 한 엄지손톱만 한 조각품이라는 것은 알아볼 수 있었다.

"그래서 결론은, 네가 새벽마다 내 의자를 차지하고 앉아서 뭘 했었는지는 설명할 의향이 없다?"

"설명하지 못할 것은 없다. 당신들이 내 말을 믿느냐와는 별개의 문제로."

"좋아, 적어도 나는 믿어주지."

여전히 방 안을 살펴보듯 이리저리 시선을 돌려대던 커크는, 자신을 바라보던 칸의 눈이 일순 가늘어졌던 것을 눈치 채지 못 했다.

"새삼 함장의 의자가 탐이 났던 게 아니라면, 새벽마다 아무도 없는 함교에서 뭘 하고 있던 건데? 그것도 일주일 내내?"

칸은 커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천천히 눈을 감아버렸다. 청록색 눈동자가 창백한 눈꺼풀 아래로 가려졌다. 대놓고 언짢은 기색을 내비치는 것과는 별개로, 칸은 의외로 순순히 대답했다.

"개인적인 추억을 회상했을 뿐이야. 당신이나 이 함선에 해를 끼칠만한 행동은 하지 않았다."

"그 회상의 내용은 밝히고 싶지 않을 테고. 그렇지?"

칸은 커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커크는 고개를 살짝 뒤로 젖히며 자신의 턱을 매만졌다. 말을 할 때마다 신중에 신중을 기하는 것은 그의 천성에 맞지 않는 태도였으나, 커크는 질문을 입 밖으로 내기 전, 다시 한 번 말을 골랐다. 사실 말을 고른다기보다는, 칸에게서 대답을 들을 수 있을지 없을지를 미리 예측해볼 뿐이었다. 자신이 과연 그를 떠볼 수 있을지, 자신의 거짓말이 그에게 통할지. 칸은 이미 자신이 감시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가 매일 새벽 함교를 찾았을 때에는 그 누구와도 마주치지 않았으나, 조금 전 공개적인 추궁-이렇게 불러도 좋다면-을 당했던 것이다.

그러나 도청장치를 설치해, 밤새도록 계속되던 당신의 혼잣말을 몰래 엿들었다고 말하기엔 얼굴이 지나치게 가려웠다. 사실 자신이 지금 이 질문을 하려하는 이유조차 모르고 있었다. 그저 계속해서 궁금해왔고, 마침 당사자와 단둘이 앉아있으려니 그 궁금증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는 것이다. 커크는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자신에게 일주일을 내리 묵혀온 호기심을 억누를만한 인내심은 없다고 여겼다. 다행히도 그 이름에 관해선 그럴싸한 핑계거리가 있었다.

"제임스."

커크의 말에 칸의 눈이 번쩍 뜨였다. 무력한 듯 담담하던 눈빛이 순식간에 날카로워졌다. 여전히 반듯한 자세였으나, 커크는 그가 그 자리에서 도사리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금방이라도 앞으로 튀어나와 자신의 입을 틀어막거나, 목을 꺾어버릴 수 있도록. 경계의 빛을 띤 채 긴장하고 있는 칸은 또다시 새롭게 사납고 낯설었다.

"네가 그때 날 그렇게 불렀잖아. 일주일 전에, 의무실에서."

"..그랬지."

"솔직히 말하면 그게 절대로 날 부른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거든. 갑자기 살갑게 이름으로 부를 만큼 서로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지금도 나를 몇 대 쥐어박아서 입을 막아버린 뒤에 방 밖으로 쫓아내버리고 싶지 않아?"

커크의 능청에도 칸은 웃지 않았다. 지구에서도 커크는 몇 번인가 칸에게 나름의 농담을 던졌고, 그때마다 칸은 피식 흐르는 웃음을 흘리거나, 그를 무시해버리곤 했다. 그러나 지금의 칸은 그를 비웃지도, 언제나 보이던 오만한 반응을 보이지도 않았다. 잔뜩 날이 선 채 커크의 얼굴을 똑바로 노려볼 뿐이었다.

커크는 대수롭지 않은 이야기를 건네듯 평온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여보였을 뿐이었다.

그 제임스라는 건 누구야? 일주일 내내 궁금했다고.”

밤마다 우주를 바라보며 말을 건네는 상대가 누구인지, 평소의 그에게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말투와 인사를 듣는 상대가 누구인지. 이따금 의미를 알 수 없는 밀어密語를 주고받는 상대가 누구인지 참을 수 없도록 궁금했다. 그의 이름이 자신과 같다는 사실에 조금 더 흥미가 동했을지도 몰랐다.

"아직 얼어있는 네 선원 중 하나인가?"

[내가 네 말을 왜 의심하겠어. 그랬다면 널 지구에 남기고 떠나진 않았을 거다.]

언젠가 엿들었던 칸의 혼잣말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음에도, 커크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질문을 던졌다. 혹여 자신이 그를 떠보고 있다는 것을 들킬까싶어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와 비슷한 증강인간 중 한 명일까. 커크는 그들의 수명을 몰랐다. 어쩌면 저 모습 그대로 평생 늙지도, 죽지도 않는다면. 그렇다면 칸이 찾는 제임스 역시 지구의 어딘가에서 조용히 숨어 살아가고 있을지도 몰랐다. 언젠가의 존 해리슨처럼, 또 다른 이름을 가지고.

문득 커크는 자신의 그 질문에 극도로 긴장하고 있던 칸의 기색이 살짝, 아주 살짝 풀어졌음을 느꼈다. 숨조차 거의 멈추고 있던 그가 조용히, 소리없이 긴 숨을 내뱉었다.

"그럴 리가."

칸은 처음으로 커크에게서 눈을 완전히 돌려버렸다. 청록색 시선이 흐르듯 미끄러졌다. 칸의 시선은 커크의 얼굴에서 책상 위로 옮겨가고, 서랍 위를 배회하다가, 작은 나뭇조각을 눈에 담았다. 칸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뜨며 다시 커크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흔들림 없는 눈이었으나, 커크는 그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었음을 눈치 챘다.

칸을 동요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었다. 그에겐 그 무엇도 가치가 없었으니까. 그를 분노하게 하고, 슬프게 하고, 두렵게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가 되찾고자하는 그의 사람들뿐이었다.

그리고 백여 개도 되지 않는 이름들 사이에서, 칸이 가장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은 '제임스'라는 이름이었다. 그 사실에, 제임스 티베리우스 커크는 기분이 묘해짐을 느꼈다. 어쩌면 이를 이용할 수도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고, 제법 효과가 좋을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나 타고난 그의 성격으로 인한 거부감이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그와는 별개로, 정확히 단정 지을 수 없는 흥미로움, 착잡함, 정체조차 모호한 감정들이 커크를 스쳐지나가며 일순간 그를 뒤흔들었다.

"그는 살아있다. 자유로운 곳에서 자유롭게 살아가고 있어. 그를 얼려서 그 좁디좁은 캡슐에 가둬놓는다니, 낙타가 바늘구멍을 지나가는 것보다도 불가능한 일이지."

칸의 입꼬리에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 커크는 문득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하지만 냉동 장치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아직까지 살아있을 리가 없잖아. 자그마치 300년이 지났어, . 무려 3세기가 지나가 버렸다고. 설마 너희들은 늙지도 않는 건가?"

"그럴 리가. 우리들도 나이를 먹는다. 너희들보다 천천히 늙어갈 따름이지. 300. 그래, 자그마치 300. 그런 시간은 그 누구라도 버틸 수 없겠지. 나조차도 버텨낼 수 없을 기나긴 세월이다."

칸의 눈동자에 문득 이채가 돌았다. 커크는 그의 청록색 눈동자에 빛이 어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마커스의 지시로 강제로 색을 벗겨냈던 칸의 눈동자는 초록색도, 푸른색도 아니었다.

"하지만, 커크. 난 확신하고 있어."

두 사람의 푸릇한 시선이 허공에서 얽혀들었다. 커크도, 칸도, 서로의 시선을 피하려들지 않았다.

"그에겐 그 무엇도 족쇄가 될 수 없다. 고작 300년이 문제가 된다고? 그럴 리가. 시간따위는 물론이고, 끝을 알 수 없는 이 우주조차도 그를 막을 수는 없어."

단정 짓는 칸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단 한 치의 의심도, 조금의 흔들림도 없을 견고한 목소리였다. 확신에 찬 칸의 얼굴을 보면서, 커크는 문득 숨이 차다고 느꼈다. 확신뿐만이 아니었다.

야만적이고 폭력적이던 과거의 어느 시간에,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쌓아올렸을 견고한 고성을 닮은. 그 단단함을 느낀 커크는 자신도 모르게 살짝 벌어졌던 입술을 꾹 다물어버렸다.

칸의 눈동자에 자신의 얼굴이 비치고 있다는 것이 새삼스러웠다. 그런 커크의 기색은 아랑곳하지 않고, 칸은 말을 맺었다.

"그 이름은, 그런 이름이니까."

시간이 흐르며 바스라져가는 그의 감정은 썩어가는 오두막을 닮지 않았다. 수백 년이 흘러 발견된 유적의 한 귀퉁이를 닮아있었다. 초라하게 쓰러져버리지 않도록, 그를 버텨주는 기둥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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