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질하는 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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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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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보고싶은대로 리라이팅 2. 이릉대전 下

 

 무사히 돌아온 유비는 군마와 혼란이 수습되자 좌우의 대신들을 불러모아 정무와 승상부의 일들을 물었는데, 가지런하고 빈틈없던 일들이 밀리고 쌓일 뿐만 아니라 매한가지로 흐트러지며 혼탁해져있어 유비는 분노하며 동시에 한탄하였다.

 공명은 매일 나를 부끄럽게 만드는구나! 내 손으로 나의 소하를 쫓아냈으니, 내가 어찌 한 황실을 부흥시킬 수 있겠는가!

 그리고 제갈량이 낙향한 고을을 물어, 예물을 준비하고 직접 말을 몰아 제갈량을 만나러 갔다. 수십 년 계속된 전란으로 백성들은 쉬이 피폐해지곤 하였으나, 제갈량이 은거하고 있다는 그 고을은 굶는 사람이 없고 백성들은 즐겁게 생업에 종사하니 유비는 이를 신기하게 여겼다. 병사를 시켜 그 까닭을 묻자 아낙이 밝은 얼굴로 답했다.

 본디 이 고을은 산적이 활개를 쳐 사람이 살기 어려운 마을이었습니다. 허나 자룡 장군께서 이 고을에 오신 뒤 직접 산에 올라 그들과 무용을 겨루고 설득하니, 그 무예와 인품에 감복한 산적들이 회개하여 직접 밭을 갈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고을에 사내가 적어 농사를 짓지 못하니, 승상께선 이 모든 것이 빨리 역적을 죽이지 못하고 오랫동안 싸움을 이어가는 자신의 업보라며 마음 아파 하시고, 적은 힘으로도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농법을 만들어 저희들에게 가르쳐주시니, 아낙과 어린 아이들의 힘만으로도 보리를 넉넉히 기를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추수를 기다리는 동안 배를 곪을 백성들을 걱정하며, 누군가 청하기도 전에 재산과 곡식을 풀어 모두를 도와주시니, 이 고을엔 어른과 아이는 물론이고 개 한마리에 이르기까지 배를 곪는 이가 없습니다.


 조금 더 나아가니 어린아이 한 무리가 크게 노래를 부르며 걸어가고 있었다. 유비가 귀를 기울여보니 태평한 세상을 노래하는 태평가였는데, 그 뜻이 심오하고 문장이 힘잔 것이 예사 노래가 아니었다. 유비가 아이 하나를 불러 누가 그 노래를 지었느냐 물었다. 아이는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와룡선생이십니다

 유비는 웃으며 물었다.

 어찌 와룡이라 부르느냐?

 아이는 막힘 없이 답했다.

 승상이라 부르시면 선생께서 깊이 슬퍼하시고 한탄하시기 때문입니다. 신하로서의 본분을 다하지 못하고 한적한 시골에 오시어 몸을 편히 뉘이고 계시니, 천자께 면목이 없다며 승상이라 부르시는 것을 엄히 금하셨습니다.

 유비는 그 말이 안타깝고 부끄러워 절로 눈물이 났다. 눈물을 훔친 유비는 아이에게 다시 물었다.

 와룡선생은 어찌 지내고 계시느냐?

 낮에는 마을의 크고 작은 분쟁들을 직접 살펴주시고, 밤에는 글을 모르는 자들에게 글을 알려주십니다. 낮에는 처리하시는 일마다 공정하고 정확하니 그 누구도 불만을 가지는 이가 없고, 밤에는 그 학식이 끝간데가 없으니 모든 사람들이 감탄하며 학업에 열중합니다. 다만 날로 병이 깊어지시며 끝내는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하신다 하니, 저희들은 와룡선생이 지으신 노래를 크게 불러 선생을 위로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말을 마친 아이는 유비에게 인사를 하고 다시 노래를 부르며 갈 길을 가버렸다. 유비가 조금 더 나아가니, 이번엔 한 떼의 장정들이 멧돼지를 지고 씩씩하게 걸어오고 있었다. 유비가 말을 멈추고 그들이 어딜 가는지 물었다. 장정들은 대답했다.

 저희는 사람의 탈을 쓴 금수로 살던 자들이나, 자룡 장군과 공명 선생 덕에 큰 깨달음을 얻고 지금은 산 위에서 화전을 일구며 살아가고 있는 치들입니다. 공명 선생의 병이 중하시다하여 걱정하던 찰나, 마침 덫에 커다란 멧돼지가 걸렸기에 공명 선생께 선물하러 가는 길입니다.

 장정들은 그렇게 답하고 바쁘게 걸음을 옮겼다. 조금 뒤에 약초꾼 한 사람이 낡은 꾸러미를 품에 안은 채 걸어왔다. 유비가 묻자, 약초꾼이 답했다.

 저는 산에서 약초를 캐어 팔아가는 필부입니다. 오늘 아침 귀한 삼뿌리를 발견하였기에, 공명 선생과 자룡 장군께 선물해드리러 가는 길입니다.

 이렇듯 온 마을 사람들이 하나되어 제갈량과 조운을 아끼고 사랑하니, 유비는 가슴이 먹먹하고 괴로웠다. 유비가 제갈량의 집에 도착하여 보니, 한 나라의 승상이었던 자가 사는 집이라곤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검소하였다. 담장은 높지 않고, 문은 좁으며, 드나들은 사람들은 모두 무명옷을 입고있으니, 유비는 탄복하며 사람을 불렀다.

 이윽고 제갈균이 직접 나와 유비를 맞이하였는데, 집안에 병자가 있어 목소리를 크게 낼 수 없음을 사죄하니 유비가 제갈균의 두 손을 마주잡고 울며 말했다.

 이 비는 아둔하고 성정이 포악하여, 공명선생께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질러버렸습니다. 이에 깊이 반성하고 용서를 빌고자 찾아왔으니, 선생께선 부디 저를 물리치지 마시고 공명선생을 만나뵐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제갈균은 공손히 소매를 모으며 답했다.

 천자께서 친히 걸음을 해주셨으니, 그 은혜를 어찌 모르겠습니까? 다만 형님께선 지금 병이 중하여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실 뿐만 아니라 자주 까무러치시니, 당장 만나뵈실 수 있는 상태인지는 확답을 드릴 수 없습니다. 일단 안으로 드시지요.

 아닙니다. 제가 어찌 편히 앉아 기다릴 수 있겠습니까? 선생을 처음 뵐 때 하였듯 시립하여 선생이 깨실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그리 서계시면 제가 형님께 그게 혼이 납니다. 부디 안으로 드셔서 조장군을 먼저 만나뵈시지요.

 유비가 놀라 물었다.

 자룡이 함께 지내고 있습니까?

 제갈균이 웃으며 답했다.

 형님께선 몸이 약하시고 저는 천성이 게으르니, 흙을 만지며 생활하기 어렵습니다. 허나 조장군은 나이를 잊은 듯 여전히 건강하시고 활력이 넘치시니, 형님과 같은 지붕 아래에서 먹고 자며 더불어 산지가 벌써 오래 됩니다. 직접 하인들과 함께 밭을 갈고 씨를 뿌리시니, 너 나 할 것 없이 성실하게 일하여 흙은 기름지게 변하고 넓은 밭엔 잔돌 하나 구경할 수 없습니다.

 제갈균은 유비를 밭으로 안내하였다. 과연 그곳엔 웃통을 벗고 직접 밭을 갈고 있는 조운이 있었는데, 반백이 가까워오는 나이가 무색하게 우람하고 하얀 등에는 흉터가 가득 남아있었다. 평생 전장을 누비면서도 상처 하나 나지 않았던 하얀 눈같은 몸에 저토록 심한 상처를 냈다는 사실이 부끄러워, 유비는 서둘로 조운의 앞으로 가 엎드렸다.

 장군. 이 모자란 비가 잘못을 뒤늦게 깨우치고 사죄를 드리러 왔습니다.

 조운은 황망히 쟁기를 내던지고 유비를 부축해 일으켰다.

 이러지 마십시오. 귀하신 분이 어찌 흙을 밟으시고 어찌 머리를 조아리십니까? 먼저 들어가 계십시오. 곧 찾아뵙겠습니다.

 유비가 그 말대로 제갈량의 집으로 돌아와 기다리고있자, 곧 땀을 씻고 의복을 갖춰입은 조운이 들어와 유비에게 절했다.

 어찌 이 궁벽한 시골에 직접 걸음하셨습니까. 불러주셨다면 당장에라도 밤낮으로 말을 달려 제가 직접 찾아갔을 것입니다.

 내 장군과 선생에게 지은 죄가 차마 입에 담기도 어려울 만큼 크거늘, 어찌 그런 무례를 범한단 말이오. 자룡. 내 그대를 볼 면목이 없으나 염치 불구하고 부탁드리리다. 자룡, 부디 나와 함께 돌아가주시구려.

 조운은 두 손을 모으며 답했다.

 이 운은 언제든지 폐하를 위해 창을 잡고 말을 달리며 선봉에서 싸울 각오가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공명선생의 병이 깊으니, 먼 길을 가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선생의 건강이 그리 위중합니까.

 유비가 걱정하는 얼굴로 물었다. 조운은 일전에 의원이 해준 말을 그대로 옮겼다.

 공명선생께선 십수년간 먹는 것은 적고, 신경 쓰는 것은 많으며, 잠은 적게 자고, 하는 일은 많으셨으니 몸이 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다만 지금에 이르러서야 봇물이 터지듯 모든 피로와 질병이 한꺼번에 밀려들어오니, 견디지 못하고 병석에 누우신 것입니다. 의원이 진찰 후 이르기를 마음을 평화롭게 하고 오래 휴식해야한다 하였으나, 밤낮으로 몸을 쉬지 않으시고, 마음 속엔 시름과 슬픔과 걱정이 가득하시니 자연히 병이 깊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유비가 다시 한탄하려 할 때, 하인이 찾아와 제갈량이 깨어났음을 알렸다. 제갈균을 찾는다는 말과 함께였다. 제갈균은 제갈량이 자신을 찾는 이유를 짐작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형님을 먼저 만나뵙고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그러나 유비는 황급히 따라일어나며 답했다.

 아닙니다. 선생께서 마다하지만 않으신다면 이 비도 함께 선생을 찾아뵙고 싶습니다. 한시라도 빨리 선생께 잘못을 빌고싶은 마음 뿐입니다.

 그 목소리가 하도 간곡하여, 제갈균은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유비와 함께 제갈량의 침실로 들어갔다. 제갈량의 침실은 사치스런 장식 하나 없어 검소하고 소박하였으나, 병자를 위해 태우는 향냄새로 가득하였다. 아직 휘장을 걷기도 전 제갈균은 익숙하게 자리로 가 붓을 들었다.

 아무리 상소를 올려도 궁중에서 간신들이 상소를 가로채어 찢고 불태우니 결코 천자께는 닿을 수 없을 것인데, 형님께선 어찌 매일같이 상소를 올리십니까? 이젠 그들이 형님께 역심이 있다 낭설을 퍼트릴 지경이니, 혹여 천자께서 형님을 의심하시고 노하시면 어찌하시렵니까?

 제갈량은 기침을 하면서도 제갈균을 엄히 꾸짖었다.

 개는 주인이 위험에 빠지면 온 힘을 다하여 짖고, 달려들어 대신 싸우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나는 폐하를 위해 함께 싸우지는 못할망정, 집안에서 편히 두 발을 뻗고 누워있지 않느냐? 넌 지금 나에게 개만도 못한 인간이 되라 권하는 것이다. 또한 천자께선 하늘이 내리신 영웅이며, 명군이실 뿐만 아니라, 봉황이나 용과 같은 분이시니, 그런 간신배들의 간언에 속으실 것 같으냐? 설령 나를 의심하신다 하더라도 이는 내가 천자께 충성을 다하여 믿음을 드리지 못한 것이니, 그 책임을 진다한들 무엇이 억울하겠느냐? 너는 더 이상 어지러운 말을 하지 말고, 내가 부르는 대로 받아적어라. 아아, 내게 붓을 들 힘이 없는 것이 천추의 한이로구나.

 그리고 유비에게 보낼 상소문의 내용을 읊으니, 문장마다 충성이 어려있어 유비의 가슴을 먹먹하게 하였다. 유비는 제갈량의 말이 기침으로 잠시 끊어진 틈을 타 바닥에 엎드리며 말했다.

 이 비가 잘못을 깨닫고 감히 용서를 구하기 위해 선생을 찾았습니다.

 조운이 휘장을 대신 걷어내자, 침상에 누워있는 제갈량의 모습이 보였다. 신선처럼 반듯하고 단정한 외모의 젊은 청년, 세상 누구나 알고 있는 호걸들에게 매서운 군령을 내리던 어린 책사의 모습은 간데 없고, 병자의 기색이 완연한 제갈량의 모습을 본 유비는 더욱 슬프게 울었다.

 폐하. 어찌 이 먼곳까지 오셨습니까.

 제갈량은 조운과 제갈균의 부축을 받아 몸을 일으키려했다. 그러나 유비는 두 사람을 말리며 제갈량의 침상으로 다가가, 비쩍 마른 그의 손을 두 손으로 감싸쥐었다.

 이 비는 어리석어, 끝내 선생의 은혜와 공을 잊고야 말았습니다. 대패하여 선생께서 마련하신 많은 군마가 꺾이고 난 뒤에야 이 비가 그간 쌓아온 승리들이 선생의 재주에 기댄 것임을 깨닫고야 만 것입니다. 그리하여 선생께 나의 잘못을 고하고, 염치없지만 다시 이 비의 곁에서 부족한 점을 깨우쳐주시기를 부탁드리고자 합니다.

 유비의 간곡한 목소리에 제갈량의 눈에도 눈물이 고였다. 군신은 마주 손을 잡고 울었다. 제갈량이 답했다.

 신은 이미 세 번 찾아보는 은혜를 입은 몸인데, 재주가 부족하여 그 은혜조차 갚지 못했습니다. 또 다시 신을 찾아주신 은혜는 또 어찌 갚을 수 있겠습니까. 폐하께서 신을 버리지 않고 써주신다면, 온 힘을 다 하여 살이 찢기고 뼈마디가 부수어질 때까지 폐하를 보필하며 한 왕조의 부흥을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제갈량과 조운은 수레를 타고 천자의 뒤를 따라 황궁으로 돌아가니, 모든 백성들이 향을 사르고 꽃을 뿌리며 그들을 배웅했다. 또한 대업을 이루신 뒤에는 다시 돌아와 그들을 보살펴줄 것을 부탁하니, 제갈량은 웃으며 하늘이 허락한다면 그리 하겠다 답했다. 제갈량이 다시 승상의 자리에 앉자 흐트러졌던 기강은 바로잡히고, 엉크러진 일들은 풀려나가니, 유비는 모든 국사를 제갈량과 논하고, 가르침을 청하기를 매일같이 하였다.

AND

내가 보고싶은대로 리라이팅 1. 이릉대전 上

 

 유비는 오나라를 정벌할 뜻을 밝혔으나 제갈량은 여러가지 이유를 대며 이를 반대하였다. 그러나 유비는 뜻을 굽히지 않았으니, 보다못한 조운이 제갈량을 거들어 유비를 말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유비는 노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조운을 꾸짖었다.

 너는 비록 우리와 도원결의 하지는 않았으나 관우와 장비는 너를 형제처럼 대했다. 그러나 너는 어찌 그들의 의리와 신의를 저버리고자 하느냐?

그리고 좌우에 명하여 조운을 끌어내 매질하게 했다. 제갈량은 조운의 나이가 많아 무거운 매를 견디지 못할 것이라 간하며 용서하여 줄 것을 엎드려 울며 빌었으나, 유비는 더욱 엄중히 좌우를 재촉할 뿐이었다. 조운은 모진 매를 맞으면서도 그 기세가 꺾이지 않았으니, 그를 지켜보는 모든 대소신료들이 감탄을 금치 못하였다.

 유비는 여전히 울며 엎드린 제갈량에게 말했다.

 내 승상의 몸이 약함을 이미 알고 있는 바, 차마 매질을 할 수는 없소. 그간의 정과 공을 생각해 이번만은 특히 벌을 내리지 않겠소. 만일 나를 도와 내 아우의 원수를 갚을 것이라면 나를 따르시오. 그러나 계속해서 내게 천륜을 져버리라 간할 것이라면, 전날 그대가 말했듯, 낙향하여 밭을 갈고 누에를 치며 검소히 사는 것이 좋겠소이다.

 제갈량은 울며 답했다.

 누추한 초려를 세 번이나 찾아주신 무거운 은혜를 아직 갚지 못하였으니, 신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다만 덕 많고 인자하신 폐하의 성정에 기대어, 주제넘는 부탁을 하나 더 드리고자 합니다. 조 장군은 폐하께서 신을 만나기도 전부터 폐하를 따르며 생사고락을 함께하고, 그간 세운 공이 결코 적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찌 이 덕 없고 공 없는 량보다 더 중한 벌을 내리신다는 말씀이십니까? 조 장군은 장판파의 수십만 군사 사이를 누비며 아기씨를 구해온 장수 중의 장수이나, 이젠 나이가 들어 몸이 예전같지 않을 것입니다. 부디 그간의 공을 생각하시어 이만 벌을 거두어주시고, 신과 함께 낙향하여 소를 치며 살도록 허락하여 주십시오.

 그 목소리가 하도 간곡하여 노한 유비의 성정도 조금 누그러졌다. 유비가 매질을 멈추라 명하자, 조운은 온몸에서 피를 흘리면서도 두 발로 유비 앞으로 걸어와 절했다.

 부디 옥체 보전하시옵소서.

 유비는 이미 조운과 제갈량의 뜻이 굳은 것을 깨닫고, 소매를 뿌리쳐 그들을 물렸다. 제갈량과 조운은 유비에게 길게 절하며 만수무강을 기원하고 낙향하였다.

 유비는 60만 군사와 함께 동오로 짓쳐들어갔다. 그러나 누가 예상이나 하였으랴. 유비의 대군은 한 장수의 책략에 꺾이고, 기치는 부러졌으며, 병사들은 앞과 뒤가 모두 막혀 오도가도 못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하늘이 이 비를 버리시는가!

 유비가 하늘을 우러르며 한탄하자, 그의 곁을 지키던 관평이 앞으로 나섰다.

 저희가 거병하기 직전, 승상께서 따로이 저를 불러 주머니 하나를 주셨습니다. 위급하고 방도를 찾을 수 없을 때 풀어보시라 하였으니, 그 안에 아무래도 계책이 들어있는 듯 합니다. 지금 저희는 앞뒤로 적을 맞아 커다란 위험이 닥친 바, 승상의 계책을 사용할 때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유비는 관평의 말을 듣고 직접 주머니를 열어보았다. 그 안에는 관평에게 보내는 편지와 한 가지 계책이 들어있었는데, 지금 유비의 상황을 손바닥 보듯 꿰뚫고 있었으며 계책 또한 절묘하였다. 또한 한 문장이 끝날 때마다 유비를 걱정하며 충성을 다할 것을 당부하니, 유비의 가슴 속엔 깊은 슬픔과 후회가 자리잡았다.

 아아, 나는 정말로 아둔한 물고기요, 공명은 그런 내게 하늘이 내려주신 깊은 물이다, 내가 어찌 그것을 잊었던가! 물고기가 주제를 잊고 물을 벗어나면 말라 죽는 것이 응당 당연한 일일진데, 공명의 덕과 충심은 마르지 않는 하해와 같으니, 천리 밖의 물고기에게도 살아날 방도를 내어주는구나! 무사히 돌아가거든 반드시 공명을 찾아 잘못을 빌고 용서를 구하리라!

 그리고 좌우의 장수들을 불러 공명의 계책을 따르도록 하니, 짓쳐드는 동오의 군사들을 막아내고, 꺾이고 상한 병사들이나마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다.

AND

소재랑 인물 마구 뒤섞기 - 1. 빈 찬합/제갈공명

빈 찬합


유비와 제갈량이 계책과 병법을 논하는 자리에 출입할 수 있는 사람들은 지극히 한정되어 있었다. 유비와 형제의 의를 나눈 관우와 장비, 삼척동자도 그 이름을 안다는 조운, 그리고 제갈량. 다섯 사람은 찻상을 앞에 둔 채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주고받았다. 그들은 지금 조조의 수십만 대군과 대치 중이었으나, 제갈량은 그들을 개미떼보다도 못하게 보는 듯 했다.

제갈량의 태도가 그러하니 유비 역시 불안한 와중에 마음 한편으론 안심하고 있었다. 제갈량의 계책대로만 싸우면 대승을 거두니 관우와 장비 역시 하루 빨리 제갈량이 군사를 내고 자신들을 선봉에 세우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주공. 조조가 사자를 통해 선물을 보내왔습니다.”

제갈량과 더불어 병법과 옛 고사를 논하며 시간 가는 줄을 모르던 유비는, 그 말에 문득 고개를 들었다. 관우와 장비는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눈빛을 교환하고, 조운과 유비는 제갈량을 보았다. 깃털부채를 천천히 흔들며 부치고 있던 제갈량은, 짧은 웃음소리를 내며 부채를 내려놓았다.

싸움이 시작되기 전 사자와 선물을 보내는 것은 흔히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상대를 타일러 싸움을 피하기 위한 계책이요, 두 번째는 상대를 격분시켜 평정을 잃게 하고 성급한 맹공을 끌어내기 위한 계책입니다. 조조는 안하무인이고 영웅들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주공을 얕잡아보기까지 하고 있으니, 이번 사자는 필시 두 번째 계책을 위해 보낸 것입니다.”

선생의 통찰력에 탄복했소. 조조가 이 비에게 어떤 모욕을 주던, 이미 그 의중을 알고 있는데 속아 넘어갈리 있겠소? 여봐라. 사자는 막사를 내어 쉬게 하고, 선물은 안으로 들여라.”

병사가 가져온 것은 고운 비단으로 싼 꾸러미였다. 조운이 직접 꾸러미를 받아들었다. 병사가 막사 밖으로 나간 뒤, 조운은 직접 꾸러미를 풀었다. 자개장식으로 꾸민 찬합이었다. 조운의 안색이 변했다. 조운은 급히 뚜껑을 열어보았다. 찬합의 속은 비어있었다.

? 이게 뭐요. 빈 찬합이라니, 무슨 선물이 이러오?”

조조는 음험하고 남 놀리기를 좋아하는 자이니, 필시 이것에도 숨은 뜻이 있을 것이다.”

관우는 천천히 수염을 쓸어내리며 그렇게 평했다. 유비는 잠시 조운의 손에 들린 찬합을 바라보다가 제갈량에게 시선을 돌렸다.

선생. 어찌 생각하시오? 이것에 무슨 뜻이 숨어있겠소?”

좋군요. 좋아. 아주 절묘한 비유입니다. 조 장군. 그 찬합을 제게도 보여주시겠습니까.”

조운이 제갈량의 앞에 찬합을 내려놓자, 제갈량은 천천히 찬합을 살펴보았다. 오동나무로 만들고 검은 칠을 한 뒤 자개로 장식한 찬합은, 누가 보아도 귀하고 값어치가 많이 나가는 물건이었다.

아주 좋은 찬합입니다.”

군사! 나를 답답하게 하여 죽일 참이오? 조조 그 간사한 쥐 같은 놈이 무슨 뜻으로 이걸 보냈는지 어서 말해보시오!”

제갈량은 부채를 들어 입을 가렸다. 그의 마른 손이 찬합을 가리켰다.

빈 찬합을 보낸 것은, 주공에게 더 이상 먹을 것이 없으리라는 뜻입니다. 큰 싸움으로 이겨 형주를 차지하고 주공의 기반을 모두 빼앗을 테니, 더 이상 주공의 몫은 남아있지 않으리라는 뜻이지요.”

뭣이!”

공명의 풀이에 장비는 노하고야 말았다. 당장이라도 장팔사모를 꼬나들고 군영을 뛰쳐나갈 기세였다.

군사! 당장 출정을 명해주시오. 내 당장 조조의 사신을 목베고, 군사 오천을 이끌고 당장 조조 저놈의 진채를 들이치리다. 누가 기반을 잃고, 누가 먹을 것이 없어지는지 어디 한 번 두고 봅시다!”

익덕. 앉아라. 조금 전에 군사가 일러주지 않았더냐. 조조가 바라는 것은 우리가 격분하는 것이다.”

유비는 담담한 표정으로 그리 말하며 제갈량을 보았다. 제갈량은 별 일 아니라는 듯, 태연한 표정으로 부채를 살랑거리며 흔들고 있을 뿐이었다.

맞습니다, 장군. 또한 사신을 목 베는 것은 법도에도 맞지 않습니다. 조조가 이리 절묘하고 재미난 선물을 보냈으니, 우리도 작은 선물을 보내 조조를 놀리면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군사께선 이미 생각해둔 방도가 있는 듯 하오.”

저는 경전과 시문을 숨 쉬듯 외고 세상 보기를 손금 들여다보듯 하는 선비와 학자들과의 설전에서도 져본 일이 없습니다. 하물며 조조 따위야 문제가 될 리 있겠습니까?”

좋소. 선생 뜻대로 해보시오.”

제갈량은 유비에게 예를 갖춰 인사하고, 병사 한명을 불러 명을 내렸다. 촉에서 가져온 햅쌀로 밥을 짓고, 제를 올릴 때 쓰는 좋은 향을 한 벌 준비하라는 것이었다. 제갈량의 생각을 알아챈 유비는 조용히 미소를 지었을 뿐이었다.


**

 

조조는 제 앞에 놓인 찬합과 길쭉한 꾸러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제가 유비를 놀리기 위해 선물로 보낸 그 찬합이었다. 조조는 직접 꾸러미를 풀고 찬합의 뚜껑을 열었다. 흰 쌀로 지은 밥은 윤기가 흘렀고, 꾸러미 속에는 제를 지을 때 쓰는 향이 들어있었다.

이건 제삿밥이구나.”

조조의 짧은 감상에, 그의 앞에 시립해 서있던 책사와 장군들 사이에 당황스런 술렁임이 퍼져나갔다.

나는 유비에게 빈 찬합을 보냈고, 유비는 그 찬합에 제삿밥을 채워 다시 내게 보냈다. 이게 무슨 뜻일 것 같으냐? 누가 한 번 맞춰보겠느냐?”

조조가 좌우를 둘러보자, 책사 사이에서 순욱이 한 발 앞으로 걸어나왔다. 조조가 순욱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자, 순욱은 짧게 읍하고 입을 열었다.

주공께선 유비에게 빈 찬합을 보내시며 그의 기반을 빼앗고 패망하도록 만들겠다는 뜻을 보이셨습니다. 그러나 유비는 그에 제삿밥을 채워 보냄으로써, 주공을 주살하고 제를 지내주겠다고 말하는 것이니, 그야말로 병과 약을 동시에 주겠다며 주공을 욕보려는 것입니다.”

조조는 순욱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조조 역시 이 선물의 뜻을 해석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뜻을 짐작하지 못하고 있던 다른 신료들은, 특히 무장들은 분노하여 금방이라고 칼을 빼어들 기세였다. 그들은 앞 다투어 자신을 선봉으로 세워 달라 청하기까지 했다. 조조는 소란이 가라앉기를 기다려,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만백성이 유비는 군자라 칭송하는데, 오늘 그 이유를 조금 알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나는 저들의 목숨줄을 끊겠다고 협박을 하였는데, 유비는 오히려 귀한 군량까지 써가며 밥을 짓고 내게 제사를 지내주겠다 하였으니 진정 군자의 기질을 가지고 있기는 했구나! 여봐라, 젓가락 한 벌을 가져와라.”

조조의 명에 병사 하나가 조조의 젓가락을 들고 왔다. 껄껄 웃으며 찬합 속의 밥을 먹는 조조를 보며, 그의 신하들은 당황하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조조를 말리려하자, 조조는 오히려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어 신하들의 말을 막았다.

귀한 군량을 버리면 하늘이 노하신다. 형주의 쌀은 맛이 좋구나. 훗날 승전보를 울리고 다시 돌아갈 때, 모종을 가져가 북쪽에서도 재배를 해야겠다. 그대들도 맛이라도 보겠는가?”

조조는 그를 말리는 신하들을 무시하고 이내 찬합을 모두 비워버렸다.

조조는 이미 생각을 다 정리한 뒤였다. 사자는 유비가 보내는 선물이라며 이 찬합을 가져왔지만, 조조는 이것이 유비의 머릿속에서 나온 생각이라 판단하지 않았다. 유비는 자신이 보낸 찬합의 의미를 파악까지는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이런 재치나 기지를 발휘할 수 있는 인물은 되지 못한다. 이는 필시 유비의 책사 중 한 사람이 낸 계책일 것이다. 그것도, 아주 영리하고, 남 놀리기를 좋아하는 인물이.

제갈량. 네놈이겠구나. 조조는 그리 생각하며 속으로 웃었다. 아까운 선비가 유비에게로 가버렸다. 형주의 햅쌀로 지은 밥은 달았으나, 그러한 아쉬움에 입맛은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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