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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뮤지컬 적벽

관운장 위주 망상글.


[적벽] 선생. 부디.

아대



조조의 백만 대군이 남하한다. 군량은 산을 이뤘고, 깊은 골짜기나 거센 강도 하룻밤이면 메꾼다. 조조의 군사가 지나간 자리는 마치 메뚜기 떼가 갉아먹은 논두렁처럼 변한다더라.

소문은 민간인과 군사들을 가리지 않고 빠르게 퍼져나갔다. 운장을 따르는 병사들은 한의 병사들 중에서도 가장 군기가 잡혀있는 정예병이다. 그런 이들까지 소문에 술렁일 정도라면, 다른 곳의 상황은 보지 않아도 뻔했다.

운장은 현덕에게 인사를 하고 자리에서 물러났다. 현덕은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으나, 금방 휴식을 취하러 갈 것 같지는 않았다. 현덕 역시 고민이 많은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의 고민은 조조 따위에 대한 두려움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운장은 그것을 알 수 있었다.

운장과 익덕과 자룡의 무예가 아무리 출중한들, 공명의 지략이 아무리 뛰어나고 병사들이 한 마음 한 뜻으로 현덕을 따른들, 그들만의 힘으로 조조의 대군을 막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이는 오 역시 마찬가지였고, 결국 한과 오는 동맹을 맺어 조조에게 대항하는 것만이, 유일하고 가장 합리적인 방법이었다.

그러나 이 동맹이 언제까지고 견고하게 이어지리라 믿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두 나라간의 동맹은 불안정하기 그지없었으며, 양국의 관계에서 주도권을 차지하고, 조금이라도 더 많은 부담을 상대에게 넘기고, 이득은 가져오기 위한 신경전의 연속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역할을 맡을 수 있는 것은 오직 공명뿐이다.

공명은 이를 잘 알고 있었기에, 스스로 사자가 되어 오로 건너가겠노라 말했다. 현덕은 그런 공명을 막지 않았으나, 적진 한복판으로 공명 한 사람만을 보내는 것이 불안한 듯 했다. 운장이나 자룡을 데려가라는 현덕의 말에, 공명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운장과 익덕, 자룡은 병력을 충분히 준비하고 병사들을 훈련시키는 데에 주력하라는 뜻이었다.

공명은 자신의 안위는 전혀 걱정하지 않는 듯 했다. 다만 자신이 정해주는 날짜와 장소를 잘 기억했다가, 자룡을 때에 맞춰 그곳으로 보내달라는 말을 덧붙였을 뿐이다.

군사의 명이고, 책사의 계책이었다. 운장은 그 말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문득 익덕에게 시선이 닿았다. 공명을 노려보는 익덕의 표정엔 불만이 가득했다. 아마 자신과 현덕이 없었다면, 이미 불충한 소리가 나와도 열 번은 더 나왔으리라.

운장은 익덕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익덕은 찔끔한 얼굴로 운장을 돌아보더니, 슬쩍 시선을 돌려버렸다. 운장은 단호한 표정으로 익덕을 물러나게 했다. 익덕은 군말 없이 자리를 떴다. 마지막까지 공명을 향해 불만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않은 채였다.

낮의 일을 떠올린 운장은 걷던 걸음을 멈추고, 느리지만 절도 있는 몸짓으로 천천히 몸을 돌렸다. 운장의 걸음은 공명의 방으로 향했다.

군사.”

시중을 들 아이도, 보초를 설 병사도 귀찮고 번잡하다며 물려버린 탓에, 운장은 직접 공명을 부르며 방으로 들어서야 했다. 공명은 단정한 차림새로 앉아, 세필로 죽간에 무언가를 적어 넣고 있었다.

공명은 운장에게 시선을 옮기지도, 자리를 권하지도 않았다. 그저 쥐고 있던 붓을 놓고, 다 쓴 죽간을 바닥에 펼쳐 먹을 말리며, 동시에 새로운 죽간을 집어 들며 뻐근한 목을 좌우로 한 번 흔들 었을 뿐이다.

운장 역시 괜한 공치사는 하지 않았다. 시간이 늦었으니 이만 들어가 쉬라며 휴식을 권하지도, 늦은 시간까지 고생이 많다며 공명의 노고를 치하하지도, 공명이 쓰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해 하거나 호기심을 보이지도 않았다.

군사. 내게 따로 명하실 것은 없습니까.”

없소.”

달그락. 공명은 새로운 죽간을 받침대에 세우고 붓을 집어 들었다. 더 이상의 대화는 원치 않는다는 명백한 태도였다. 그러나 운장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익덕의 일로 드릴 말씀이 있소.”

형제의 일은 장군과 주공께서 잘 보살피고 계시지 않소이까. 세 분의 일에 내가 보탤 말은 없을 듯 하오만.”

운장은 공명의 곁으로 다가가, 그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공명이 처음으로 운장을 향해 흘끗 시선을 던졌다. 운장은 자신의 손목으로 다른 손을 가져가며 입을 열었다.

잠시 손을 내밀어 주시겠소?”

운장을 한참이나 빤히 바라보던 공명은, 붓을 놓지 않은 채 왼손을 내밀었다. 운장은 자신의 손목에 차고 있던 아대를 풀어, 공명의 손목에 단단히 묶어주었다.

공명은 한참동안 제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오랫동안 사용해왔던 운장의 아대는 길이 잘 들어있었고, 늘 정갈하고 조용한 생활을 하는 주인의 성품을 보여주듯 그리 낡지는 않은 물건이었다.

운장은 한 군을 통솔하는 장수이자, 현덕이 가장 아끼고 믿는 최측근이며, 한의 공공연한 이인자다. 그런 그가 제 앞에서 무릎을 꿇고, 고작 아대 따위의 하찮은 무장을 손수 챙긴다. 이 상황을 눈치 채지 못하기엔, 그리고 운장의 뜻을 알아채지 못하기엔, 공명은 너무 명민했다.

익덕은 대놓고 공명을 불편하게 여기고 있었으나, 제 형제들에게는 끔찍하고 깍듯했다. 불같은 성품 탓에 간혹 실수를 저지르긴 하나 현덕과 운장의 뜻을 거스르는 일은 결코 없었으니, 운장이 공명을 따르겠노라 약조하면 익덕 역시 별 수 없으리라. 익덕 뿐만 아니라 운장을 따르는 수많은 병사들 역시, 더 이상 군말 없이 공명을 따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만큼 운장의 그림자는 크고 무거웠다.

익덕은 고사하고 일개 편장조차 없는 자리였으나, 그렇다고 해서 운장의 행동이 가지는 의미와 무게가 덜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되려 그들을 지켜보는 시선이 없는 만큼, 그 무게는 곱절로 더해졌다.

아대를 단단히 매어준 운장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공명의 곁에서 물러났다. 살짝 고개를 숙이며 두 손을 모아 예를 갖추는 모습에서, 비굴함 따위는 찾아볼 수조차 없었다.

형님께 가장 필요한 사람은 바로 그대이니, 무사히 돌아와 형님의 꿈을 이루어 주시오. 형님의 꿈이 우리 형제들의 꿈이고, 형님들 따르는 한의 병사들의 꿈이니, 부디 무사히 돌아와 형님이 꿈꾸던 세상을 우리 앞에 열어주시오.

수많은 말을 삼키고 운장이 내뱉은 말은 단 한마디였다.

그럼.”

운장은 그대로 몸을 돌려 공명의 앞에서 사라졌다. 공명은 죽간 위에 붓을 대려다가, 문득 자신의 손목에 묶인 아대로 다시 한 번 시선을 옮겼다. 무늬 없이 그저 검은 색의 아대는, 어쩐지 원래의 주인을 닮은 구석이 있었다.

공명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 다시 붓을 고쳐 쥐었다. 오로 떠나기 전에 처리해야할 일들이 아직도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부디. 선생, 부디. 운장이 삼켰을 말들은 의식 깊숙한 곳으로 밀어버리고, 공명은 유려한 필체로 죽간 위에 글을 적어내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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