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질하는 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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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새왕1

*오메가버스 세계관 날조 주의..

 

“어쩐지 알파의 기질이 보이는 것 같군요.”

나이든 집사의 말에 세 남자의 시선이 동시에 돌아갔다. 쾅, 세게 닫히고 나간 문은 잘게 떨다가 멈췄다.

“두 분의 앞에서 주눅 들지 않는다는 점에 말입니다.”

“속단은 일러요, 알프레드. 저 아이는 이제 고작 열두 살이니까요.”

브루스는 단호한 말투로 대답했다. 그러나 자신의 앞에서 꼿꼿하게 고개를 쳐들고, 데미안에게 박박 대들던 아이의 기세는 실로 엄청났다. 그 당찬 표정을 떠올리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코가 아릴 정도로 진한 알파의 향이 방안을 그득 메우고 있었다. 베타인 팀과 알프레드는 크게 개의치 않는 듯 했으나, 알파인 브루스는 그 향을 분명히 맡을 수 있었다. 데미안을 흘끗 돌아보자, 멋쩍은 듯 한 표정으로 혀를 차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제 고작 열두 살 먹은 어린애의 도발에 말려들어 마구잡이로 알파의 향을 뿜어낸 것이 제가 생각하기도 유치했던 것이다.

데미안은 이제 겨우 열여덟이었다. 스무 살이 넘은 성인 남성과 비교해도 꿇리지 않을 큰 키와 넓은 어깨를 가지고 있었지만, 아직 앳된 티도 다 벗지 못한 소년이었다. 알파로 각성한 시기는 얼마 지나지도 않았고, 꾸준한 교육과 관리와 훈련을 받고 있었지만 아직 스스로를 통제하는 것은 서툴렀다.

“틀린 말은 아니죠, 뭐.”

“그 입 당장 다물어, 드레이크.”

“제이슨은 제가 잘 타일러볼게요. 물론 데미안이 슬슬 로빈의 이름을 포기해주는 게 깔끔하긴 할 테지만.”

“감히 로빈의 이름을 뒷골목 부랑아였던, 근본도 모를 고아..”

데미안은 움찔하며 입을 다물었다. 그는 급히 브루스의 눈치를 살폈으나, 브루스는 그의 말에 크게 개의치 않는 기색이었다. 데미안은 그의 굳어버린 입버릇대로 혀를 차며, 고개를 휙 돌려버렸다.

“어쨌든 싫어.”

“누가 봐도 너보단 저 애한테 어울리는 이름이라는 것만 알아둬, 거인아.”

팀은 읽던 책을 내려놓고 소파에서 일어섰다. 어린애를 달래는 일에서는, 적어도 브루스나 데미안보단 그가 적임자였다. 팀 본인과 알프레드를 포함한 이 방의 네 남자 모두 그 사실을 알고있었다.

“네 허리 간신히 넘는 애한테 유치하게 목에 핏대 세우지 말고.”

“한 마디만 더 했다간 꽁꽁 묶어서 케이브 천장에 거꾸로 매달아둘 줄 알아.”

“브루스가 그걸 용납할거라고 생각해?”

팀은 마지막 한 마디까지 이죽거린 뒤, 조용히 자리를 떴다.

 

“제이슨이 늦는군요.”

신문을 접던 브루스가 문득 손목시계를 보며 말했다. 다리미로 빳빳하게 다린 신문이 반의 반 크기로 접혀 테이블 위에 놓였다. 곧 알프레드의 손이 신문을 집어 들었다. 팀은 그 말에 계단쪽을 흘끗 보았고, 데미안은 고개를 찡그렸다.

“아직 일어나지 않았나요?”

“방문을 두드렸을 때 대답을 하긴 하셨습니다만. 방으로 들어오진 말라고 하시기에 직접 채비를 도와드리진 못했습니다.”

“이제 그녀석도 열다섯 살이에요. 알프레드.”

데미안이 퉁을 놓았지만, 브루스는 다시 한 번 시계를 볼 뿐이었다. 먹음직스러운 송아지고기 스튜가 식어가고 있었다.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그들은 늘 아침식사를 함께했다. 알프레드는 늘 사람의 머릿수대로 식사를 준비했고, 늙은 집사를 실망시키는 것이 싫은 저택의 남자들은 적어도 아침식사만큼은 꾸역꾸역 참석했다. 전날 무슨 다툼이 있었어도, 몸이 아파도, 식탁에 빈자리가 있는 날은 거의 없었다. 제이슨도 그 규칙에 곧 적응했고, 지난 3년간 꼬박꼬박 식탁의 한 구석을 차지했다.

“제가 불러올게요.”

데미안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자, 팀은 뜻밖이라는 얼굴을 했다. 브루스는 방에서 나오기 싫다는 제이슨을 억지로 끌어낼 사람이 아니었고, 팀은 아이를 어떻게든 설득하고 달래겠다며 방문 앞에서 한세월을 보낼 것이 분명했다. 브루스는 바쁜 사람이었다. 더 이상 아버지의 귀한 시간을 낭비하도록 하고 싶진 않았다.

데미안은 계단을 올랐다. 복도를 걸었다. 익숙한 집안인데도 낯설었다. 사춘기를 겪으며 부쩍 사납고 예민해진 제이슨과 매번 부딪히는 일은 귀찮고 짜증나는 일이어서, 데미안은 사적으로 그의 곁에 가는 일을 늘 피해왔다.

“야. 토드. 뭐하냐. 빨리 나와.”

대답이 없다. 데미안은 방문을 덜컥 열었다. 침대 위에 볼록 튀어나온 이불이 보였다. 잔뜩 옹송그린 몸의 윤곽을 떠올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야.”

데미안은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소년을 다시 한 번 불렀다. 그의 부름에 제이슨의 몸이 움찔하는 것이 보였다. 데미안은 드물게 인내심을 발휘해 소년의 반응을 기다리기로 했다. 이불을 걷어내지도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고, 흐리게 떨리는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나 아파.. 오늘은 아침 못먹겠다고 전해줘..”

“지랄 말고 일어나. 어제 저녁까지 멀쩡히 돌아다니던 놈이.”

데미안은 성큼 방안으로 들어와 침대를 향해 다가갔다. 침대로 가까이 다가갈수록 은은한 열기와 달달한 향내가 느껴졌다. 알프레드가 들어와 보지도 않았다더니, 오늘은 아침에도 제대로 환기를 하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무슨 방향제를 놓아둔 것인지는 몰라도, 달지만 역하진 않은 향이 제법 마음에 들었다.

데미안은 이불을 잡고 거칠게 걷어냈다. 멱살이라도 잡아 일으켜 세울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불을 걷어냄과 동시에 훅 끼쳐오는 향기에, 데미안은 손을 멈췄다.

침대가 흠뻑 젖어있었다. 아이의 얼굴에 가득한 식은땀만이 원인은 아니었다. 바지와 침대를 모두 척척하게 적신 액체는 데미안도 익히 알고 있는 것이었다. 드문 것도 아니다. 그도 몇 번인가 본 일이 있었다. 어디까지나 밖에서만 이었지만.

데미안은 손을 뻗어 제이슨의 이마를 짚어보려다가 멈칫했다. 얼굴 위를 맴돌던 손이 거둬지지도, 더 이상 뻗어나가지도 않았다. 제이슨은 가물거리는 눈을 뜨며 데미안을 올려다보았다. 눈에 어린 뭉근한 열기는 몇 번인가 보아온 것이었다.

“데미안..”

제이슨의 입술이 달싹이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본능적인 요구를 담은 부름은 그의 탓이 아니었다. 어린아이의 목소리에 깃든 색기 역시 혐오할 대상은 아니었다.

“나 아파..”

제이슨의 얼굴과 머리칼은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있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데미안의 손에 제 젖은 얼굴을 부볐다. 알파의 손에 닿자 한층 농밀해진 오메가의 향이 훅 풍겨왔다. 강렬한 열기에 데미안은 어깨를 흠칫 굳혔다.

“..데미안..”

오메가가 알파를 원한다. 열기에 불타 없어진 이성은 돌아올 생각을 않고 있었다. 언제까지 지속될지 모를 것이었다.

“도와줘..”

일단 브루스에게 알려야한다. 데미안은 아득해지려는 이성을 다잡으며 그의 이름을 떠올렸다. 아버지. 브루스. 그에게 받은 가르침을 떠올렸다. 오메가를 마주한, 설익은 알파로서의 욕구를 힘겹게 억눌렀다.

데미안은 그대로 몸을 돌려 방을 빠져나왔다. 문을 세차게 닫아버리고 성급히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강렬한 향내가 코끝에 머물렀다.

 

제이슨은 작았다. 그맘때의 데미안보다도, 심지어 그맘때의 팀보다도 작았다. 부족한 영양 상태와 열악한 성장환경 탓이려니 여겼지만, 웨인 저택의 더할 나위 없이 풍족한 환경에서 3년을 보내면서도 아이의 몸집은 크게 불지 않았다. 어쩌면 밤늦게까지 도시를 뛰어다니며, 제대로 된 수면을 취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가 될까 싶었다. 그러나 브루스는 그것 외에도 또 다른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제이슨은 자신이 오메가라는 사실을 쉽게 납득하지 못했다. 강한 알파인 브루스와 데미안을, 그리고 베타치고는 무척 뛰어난 능력을 가진 팀을 보고 자란 제이슨은 자신도 은연중에 알파가, 혹은 못해도 베타가 되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도 자라면 그들만큼 강하고 뛰어나질 것이라고.

그러나 개인의 기호로 거부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제이슨은 결국 브루스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알파와 오메가사이의 복종이 아니었다. 심통이 가득 난 제이슨은 사사건건 브루스와 부딪히는 일이 더욱 빈번해졌지만, 자신의 형질에 조금씩 적응하려 노력했다.

억제제를 빼먹는 일도 없었고, 브루스의 복잡한 검사도 꼬박꼬박 받았다. 히트사이클의 주기를 꼼꼼하게 체크하고, 가져야할 마음가짐과 각오에 대한 일장연설도 들었다. 막상 히트사이클이 닥치면 큰 소용없을 가르침일 수도 있었으나, 제이슨은 특유의 자존심과 고집으로 알파 없이도 몇 번의 주기를 제법 훌륭하게 버텨냈다.

한 달에 한 번이라는 주기는 제법 잦은 축이라고 생각했다. 제이슨은 못내 그것이 불만이었다. 하루 만에 끝나버리는 일이라지만, 이틀쯤 전부터 크게 불안정해지는 상태와, 예의 그날이 지난 다음에도 풀리지 못한 묵직한 피로로 인해 하루정도는 꼼짝도 하지 못했다. 나흘, 길게는 닷새 동안 집안에만 틀어박혀있는 것은 전혀 그의 마음에 드는 일이 아니었다.

제이슨은 절대로 알파를 찾지 않았다. 히트사이클이 지나가는 내내 방안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 브루스는 생리적인 현상으로 맺는 관계를, 그것도 꼭 필요한, 결국엔 피할 수 없을 관계를 비난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제이슨은 아직 어린 자신이 이름도 모를 알파와 하룻밤 뒹구는 꼴을 보여주기는 싫었다. 제이슨은 어떤 이유로든 브루스를 실망시키는 것이 두려운, 그의 사이드킥이었다.

 

데미안은 늦은 새벽에 간신히 잠이 들었다. 제이슨이 패트롤에서 제외 된지 사흘째 되는 날이었다. 여섯 번째였나, 일곱 번째였나. 제이슨의 첫 번째 히트사이클 이후로 대력 반년쯤 지났다.

데미안은 제이슨이 주기적으로 패트롤에서 빠져야 한다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납득도 하고 있었다. 차라리 더 강한 억제제의 도움을 받겠다는 소년에게 화를 내고 윽박을 질러 단념시킨 것도 그였다. 고담의 밤거리는, 특히 뒷골목은 어느 도시의 그것보다 더럽고 위험했다. 그런 더러운 곳에 홀로 떨어질 오메가가 어떤 꼴을 당할지는 너무나도 뻔한 일이기 때문에.

그러나 그 이유를 납득했다고 하더라도, 그리고 절대로 고깝게 여기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신체에 찾아오는 피로는 다른 문제였다. 늘어난 일과 그에 따른 스트레스로 인해 예민해진 그는, 좀처럼 잠들지 못한 채 한참을 뒤척였다.

더군다나 그는, 아주 오랜만에 찾아온 러트를 겪었다. 한동안은 이런 일이 없었는데. 그렇다고 당장 저택 밖으로 빠져나가 오메가를 구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아무런 징조도 없이, 그의 방에 들어섬과 동시에 갑작스레 찾아온 러트였다. 어디선가 오메가의 향기가 흘러들어 그의 코끝을 스치는 것 같았다. 언젠가 한 번쯤은 맡아본 적 있었던 것 같은. 기억속에 아스라이 묻힌 향이였다.

충동적인 감정을 조절하는 것은 쉬워야만 했다. 본능에 쉽게 굴복하는 것은 그의 자존심에 걸맞은 행동이 아니었다. 데미안은 어렵게, 간신히 잠이 들었다.

 

소리죽인 발걸음이 그의 침대로 다가왔다. 데미안은 예민한 감각으로, 조심스럽게 카펫 위를 밟는 움직임을 느꼈다. 묵직한 잠에서 깨어나려 힘겹게 노력하는 동안, 조심스러운 침입자는 그의 이불 속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데미안은 코끝을 스치는 달큰한 향을 맡았다. 최근에 맡았던 것인데. 데미안은 몽롱한 상태에서 기억 속을 헤집었다. 아, 그래. 방에 들어오는 순간에 맡았다고 착각했던 그 냄새다. 희미하게 그의 후각을 자극했던 그 향이, 강렬하게 그를 덮쳤다. 이불속으로 파고들었다. 데미안은 무의식중에 향기를 향해 손을 뻗었다. 뜨거운 체온이 손가락에 감겼다.

“데미안.”

데미안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힘겹게 눈을 떴다. 흐렸던 시야가 천천히 선명해지며, 앳된 얼굴이 보였다. 늘 불퉁하게 찡그리고 있던 얼굴이, 상기된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열에 들뜬 뭉근한 시선이 자신의 얼굴에 닿는 것이 느껴졌다.

데미안은 상대가 누구인지를 깨닫자, 순식간에 잠이 달아났다. 몸을 일으키려했다. 그러나 그의 행동을 예상한 소년의 손이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기운 없는 소년의 손짓에도, 데미안은 꼼짝을 할 수가 없었다.

“쉬이..”

제이슨의 속삭임에 다디단 향이 스며있었다. 데미안은 후끈 달아오르는 몸을 느꼈다. 그의 지난 기억 속에서, 다시 기억의 파편 하나가 떠올랐다. 방에 들어온 순간 느꼈던 향기와, 그 향기에서 오던 기시감. 반년 전쯤의 기억이었다. 소년의 방에서 아무런 대비 없이 맡았던, 그 향기였다.

“내 방에.. 들어왔었어?”

데미안은 숨을 헐떡였다. 이불속이 뜨거웠다. 벗은 상체 위로, 자신의 배를 깔고 앉은 소년의 바지가 미끈거릴 정도로 젖어있는 것이 느껴졌다.

“무슨 짓이야, 토드. 정신 차려.”

제이슨의 입꼬리가 비죽 올라갔다. 데미안의 시선이 불안정한 것이 느껴졌다.

오메가에게 히트사이클이 찾아오듯, 알파에겐 러트가 찾아온다. 데미안은 점차 노련해지고 있는 알파였다.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지쳐있는 이맘때가 아니면 흔들리는 모습을 보기 힘들었다.

다리가 덜덜 떨려 걷기도 힘든 상황에서, 제이슨은 알프레드의 시선을 피해 데미안의 방에서 얼마간 시간을 보냈다. 데미안은 ‘품위’를 중시 여겼다. 자신의 본능을 습관적으로 억누르곤 했다. 어떤 것에 대해서든. 그는 성에 대해선 상당히 담백한 위치를 고수했다.

제이슨은 데미안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제 것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데미안의 체온 역시 달아오른 것이 느껴졌다. 자신을 밀어내려 팔을 잡는 손이 미묘하게 떨렸다.

“네가 필요해, 데미안.”

어린아이의 목소리에 담긴 색기가 지나쳤다. 데미안은 눈을 질끈 감았다. 소년의 부드러운 입술이 그의 입술을 덮었다. 데미안은 차마, 그를 밀어내지 못했다.

 

데미안은 자신의 품안에서 빠져나가는 온기를 느꼈다. 품은 금세 식었지만, 오메가의 향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데미안은 그 향에서 뿌듯한 만족감을 느꼈다. 무거운 수마가 끊임없이 눈꺼풀을 내리눌렀다.

천천히 옷을 챙겨 입는 제이슨의 몸짓이 느껴졌지만 데미안은 그를 만류하지 않았다. 브루스를 실망시킬 것이 갑작스레 걱정이라도 된 것이겠지 싶었다. 어차피 아침이면 다 들킬 테지만. 자신과 소년의 향기가 마구잡이로 뒤섞였다. 이제 몇 시간 남지 않은 아침까진, 지워지지도 않을 것이다.

지금껏 잘 참아오던 아이가 왜 갑자기 자신을 찾아온 것인지도 모르겠고, 러트를 유도하겠답시고 자신의 방에 멋대로 체향을 남겨버린 행위도 괘씸하기 그지없었지만 지금은 나무랄 생각이 없었다. 아주 오랜만에 품에 안은 오메가는, 그가 애써 외면해오던 감각을 충실히 채워주었다. 기분이 좋았다. 몸이 편안했다.

제이슨의 손이 조심스럽게 뻗어와 자신의 이마를 한 번 어루만지고 떨어졌다. 데미안은 그의 작은 손에 자신의 얼굴을 비볐다. 제이슨은 그의 얼굴을 그렇게 잠시 만지다가, 그대로 방을 빠져나갔다.

 

데미안은 텅 비어버린 식탁을 보며 약간 당황해있었다. 넓은 식탁에는 그와 팀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알프레드에게 듣자하니 오늘 새벽에 제이슨이 저택을 빠져나갔다는 것이다. 그리고 브루스 역시 급한 일이 있어 자리를 비웠다고 했다. 두 사람 모두 해외로 나가는 비행기(물론 한 명은 평범한 여객기를 타진 않았다)를 탔는데, 하늘의 도우심인지 두 사람의 행선지가 같다고 했다.

팀은 막내의 갑작스러운 가출이 신경 쓰이는 모양이었다. 그들은 제이슨의 주기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새벽이라면, 히트사이클이 완전히 끝나지 않았을 시간일지도 몰랐다. 원래대로라면 다음날까진 종일 잠으로 하루를 보내던 아이가, 무리해서 해외까지 찾아갈 일이 무엇인지 그는 짐작하지 못했다.

그것은 데미안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그는 팀과는 달리 아무런 걱정을 하지 않았다. 브루스가 그를 데려올 것이니까. 멋대로 고담을 떠나버린 것이 좀 괘씸하긴 하지만, 그건 가벼운 훈계 정도면 충분할 것 같았다. 데미안은 아침식사를 깨작거리는 팀에게 퉁을 놓았다. 회사 일이나 잘 해.

 

그리고 데미안이 돌려받은 것은, 작은 소년의 싸늘한 주검이었다. 아이가, 친어머니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이 언제인지는 알 수 없었다. 모진 꼴을 당했다고 했다. 크로우바가 전신의 뼈를 부러트리다시피, 작고 여린 소년의 몸을 난도질하듯 두들겨 팼다고. 친모에게 배신당하고, 그런 주제에 제 어미를 구하겠다고 끝까지 애쓰다가, 결국 두 사람 모두 조커의 손에 죽었노라고.

데미안은 울지 않았다. 그런 감상적인 행동은 지양해야만 했다. 그는 담담한 얼굴로 브루스의 설명을 듣고, 티는 내지 않으려 노력하지만 깊이 상심한 그에게 별 의미 없을 위로의 말을 건넸다. 아버지의 탓이 아니에요. 브루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무슨 생각으로 아이가 자신을 찾아왔을지, 데미안은 쉽게 추측할 수 없었다. 오메가들이 겪는 상황과, 그들이 하는 생각은 평생 미지의 영역으로, 자신은 결코 동감할 수 없을 영역으로 남아있을 터였다.

혹, 이런 서글픈 미래를 예감했던 것일까. 아니면 돌아오지 않을 생각이었던 것일까.

둘 다 아닐 것이다. 전자는 제이슨이 가진 능력 밖의 일이었고, 후자는 불가능했다. 제이슨이 아닌 척 하면서도 그들에게, 브루스에게, 알프레드에게, 팀에게, 이 웨인 저택에, 그리고 자신에게 가진 애착을 생각해본다면.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더 이상 물어볼 아이도 없으니까. 이제 간신히 제 가슴팍에 닿던 열다섯의 소년은 없었다. 대답을 들을 수도 없을 질문은 마음 한구석으로 밀어버렸다. 힘들긴 해도, 못할 일은 아니었다. 자신은 이제 스물한 살이나 먹은, 어른이었으니까.

데미안은 문득 고개를 들었다. 자신이 제이슨의 방으로 향했음을 뒤늦게 인지했다. 데미안은 주저하다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방안 가득 밴 다디단 향기가 느껴졌다.

첫 히트사이클을 자신에게 보이고, 첫 경험을 자신에게 내어주었던, 어린 오메가의 향이었다.

“..제이슨.”

아이의 이름을 소리 내어 불러보았다. 흔하디흔한 이름임에도, 입술에 감기는 어감은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데미안은, 자신이 그의 이름을 처음 불러봤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다. 너무나 늦어버린 깨달음이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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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제이슨 위주로..

파판 설정을 잘 모르겠어서 내 마음대로 설정 날조함+소설 아니고 그냥 썰 정리

1. 이단자랑 이슈가르드인은 싸운다

2. 용기사라는 존재는 없음. 창술사는 있지만 인게임처럼 붕붕 날아다니는 용기사는 없다

3. 웨인 가문은 이슈가르드의 귀족. 브루스는 국민적인 전쟁 영웅. 가끔 재능 있는 고아들을 거둬서 기름.

 

***

#1

***

실내복만을 입고 밖으로 뛰쳐나온 딕은 목덜미를 쓸고 가는 차가운 바람에 온몸을 떨었다. 눈 덮인 이슈가르드는 언제나 추웠지만, 딕은 한가하게 코트를 찾아 챙길 시간이 없었다. 몇 명의 하인들이 저택의 입구에서 웅성거리는 것이 보였다. 딕을 쫓아 나온 데미안이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으나, 딕은 그에게 주의를 주는 것도 잊었다.

하인들의 틈바구니를 비집으며 앞으로 나아간 딕은 비명에 가까운 부름을 내질렀다.

"브루스! !"

"아버지!"

데미안이 황급히 뛰쳐나가 브루스를 부축하려다가 멈칫했다. 브루스는 어디에 손을 대야할지 모를 정도로 온몸이 만신창이였다. 그는 팀의 부축을 받으며 힘겹게 신음을 흘렸고, 그러면서도 품에 안고 있는 거대한 꾸러미는 놓으려 하지 않았다. 그는 하인들의 손마저 뿌리치며 부들부들 떨리는 걸음을 간신히 옮기고 있었다.

"브루스, 괜찮아요? 데미안, 가서 환술사들을 불러 모아. 저택 안에 있는 환술사들이라면 전부 다."

"알았어."

데미안은 급한 걸음으로 저택으로 날듯이 뛰어 들어갔다. 딕의 목소리를 알아들은 브루스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입술이 달싹였으나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쇳소리 같은 쉬어버린 숨소리를 알아들은 딕은 브루스를 향해 다가갔다.

"일단 기대요, 브루스. 저택으로 가요. 빨리 가서 치료를.."

"...."

브루스는 딕에게 품에 안고 있던 꾸러미를 넘겨주었다. 피냄새가 섞인 지독한 악취가 훅 끼쳤다. 그러나 딕은 얼굴 한번 찡그리는 일 없이 그것을 넘겨받았다. 묵직한 무게가 느껴졌다.

".... 아이를.."

브루스는 결국 정신을 잃었다. 갑자기 쏠려오는 무게에 그를 부축하던 팀이 휘청거렸다. 하인들이 브루스를 부축해 저택 안으로 옮기려 분주히 움직이는 모습을 보면서, 딕은 안고 있던 것의 천을 조금 걷어보았다.

그리고 그대로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피로 얼룩진 꾸러미 안에 들어있는 것은 사람이었다. 그것도 그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알아보기도 힘들 정도로 처참한 몰골에, 기억속의 모습보다도 조금 더 자랐긴 했지만, 딕은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

딕은 희미한 숨을 흘리는 그를 끌어안았다. 피로 옷자락이 눅눅하게 젖어드는 것이 느껴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의 이름은 한숨 같은 속삭임으로 흘러나왔다.

"제이슨.."

 

***

#2

***

브루스가 실종된 지 일 년이 조금 안 된 날이었다. 죽은 줄 알았던 주인의, 혹은 영웅의 귀환에 저택의 하인이나 영지의 백성들은 환호하고 열광했다. 저 악독한 이단자들의 소굴로 홀로 뛰어들어 브루스를 구해온 티모시 웨인도 구설수에 올랐다. 작은 영웅이라고.

비록 중태였지만, 그의 쾌유는 너무나 당연한 일로 생각됐다. 최고의 환술사와 비술사들이 하루 종일 달라붙어 그를 돌봐 줄테니까. 그 기대에 부응하듯 브루스는 사흘도 되지 않아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 사실에 마음 놓고 환호하는 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바깥사람들의 일이었다. 저택의 가장 깊은 곳은, 브루스와 그의 아들들의 공간은 침울하기 그지없었다. 데미안은 브루스가 죽었을 거라 여겨졌던 지난 일 년 동안에도 본 적 없었던 딕의 모습에 적잖이 당황하는 중이었다. 그는 여전히 브루스를 대신해 가문을 돌보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우울해하고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언제까지 그런 멍청한 얼굴을 하고 있을 생각이야, 그레이슨."

딕은 데미안의 목소리를 듣고 문득 고개를 들었다. 그는 손끝에 묻은 잉크를 닦아내며 미소 지었다.

"브루스는?"

"그 시체랑 같이 있어."

"브루스 앞에선 농담으로라도 그런 소리 하지 마."

"그럼 이름이라도 알려주던가."

딕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데미안은 알게 뭐냐는 듯 무심한 얼굴로 팔짱을 낀 채, 소파에 풀썩 주저앉았다. 딕은 알프레드에게 따듯한 차를 부탁했다. 알프레드가 은은한 향의 차를 내어올 때까지, 딕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데미안을 보며 웃어보였다. 최근 들어선 드물게 장난스러운 미소였다.

", 좋아. 그동안 궁금했을 텐데도 잘 참아줬으니 나도 슬슬 대답을 해줘야겠지."

"애 취급 하지 말라고 누누이 말했을 텐데."

"그럼 뭐부터 말을 해야 하나.. 일단 이름부터 알려줄게. 그 애의 이름은 제이슨이야. 내 의붓동생이고, 네 형이기도 해. 나를 이어서 두 번째로 웨인의 이름을 받을 아이였고. 지난 3년 동안 죽은 줄로만 알고 있었지."

제이슨 토드는 이슈가르드의 많은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고아였다. 웨인가문 마차의 바퀴를 훔치려다가 브루스에게 들켰고, 그의 재능을 알아본 브루스가 아이를 거뒀다. 아이는 딕과 마찬가지로, 성인이 되는 날 웨인의 성을 물려받기로 했다.

아이는 브루스를 따라 전장으로 나가는 일이 잦았다. 검은 망토를 두른 브루스와, 샛노란 망토를 두른 채 그의 옆을 지키는 어린 종자는 언제나 당당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제이슨은 이단자들의 손아귀에 떨어졌다. 처음엔 포로로 잡혔으리라 판단한 딕과 브루스는 제이슨을 구하기 위한 방법을 갈구했다. 그러나 다음날 그들에게 커다란 궤짝이 배달되었고, 그 안에는 포로로 잡혀 들어간 이들의 몸과 머리가 가득 들어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 놓인 것은 찢어발긴 노란 망토였다.

브루스는 이를 으득 갈며, 시신들의 신원을 파악해 가족들에게 부고를 알리라 전했다. 그리고 시신은 일괄적으로 화장을 명했다. 이런 처참한 몰골을 유가족에게 보일 수는 없다는 판단이었다.

마법사들에게 노란 망토에 스민 피가 제이슨 본인의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받은 브루스는, 더 이상 새로운 종자를 들이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그러던 브루스가 어째서 팀을 받아들인 것인지는 딕도 알지 못했다.

여하튼 브루스도 딕도, 그렇게 제이슨은 가슴에 묻었다. 제이슨의 시신은 없었지만, 그것이 제이슨의 생사를 판가름하는 근거는 될 수 없었다. 돌려받은 시신은 온전한 것이 없었다. 용이 뜯어먹은 흔적이 선명했다. 용의 뱃속으로 들어간 시체가 몇 구나 될 것인지, 가늠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그런데 지금, 제이슨은 그들의 저택으로 돌아와 있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아이가 그들에게 돌아왔다. 3년만의 재회였지만, 제이슨은 일주일이 지나도록 의식이 없었다. 끊어질 듯 가느다란 숨만 내쉴 뿐이었다. 그가 3년간 무슨 짓을 당했을지, 딕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브루스는 말을 아꼈다. 그는 지금 제이슨의 침대 맡을 지키고 있었다.

딕의 설명을 들은 데미안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딕은 그런 데미안의 머리를 쓰다듬고 서재를 나섰다.

 

***

#3

***

"브루스."

달칵. 조용히 방문이 닫혔다. 딕은 의자에 미동도 없이 앉아있는 브루스를 향해 다가갔다. 아직 본인도 상처가 다 낫지 않았으면서, 그는 며칠째 제이슨의 곁을 지키고 서있었다.

딕은 브루스의 어깨에 손을 얹은 채 침대 위에 죽은 듯 누워있는 제이슨을 보았다. 신경을 안정시키고 숙면을 돕는 향이 방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마력을 품은 크리스탈이 머리맡에서 빛났고, 침대를 중심으로 바닥에 빼곡히 그려진 마법진은 알아보기도 힘들었다.

제이슨은 죽은 듯 잠들어있었다. 딕은 조심스럽게 침대로 다가가, 손을 뻗어 그의 입술 위로 손가락을 가져갔다. 습한 숨이 손가락에 감긴다. 너무나 희미한 숨이었다.

처참한 몰골에 가슴이 아팠다. 이단자라고 하더라도 그들 역시 인간일진데. 그들에게 잡혀갔던 소년은 고작 열다섯이었다. 어린아이에게 이런 끔찍한 짓을 할 수 있는 자들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딕은 용납할 수가 없었다.

제이슨은 왜소한 체격의 아이였다. 오랫동안 길거리를 떠돌고 추위에 떨던 몸은 작았고, 다리는 새처럼 얇았다. 열여덟의 제이슨 역시 미라처럼, 뼈만 남다시피 비쩍 마른 상태였다. 다만 골격만큼은 훌륭하게 자라서, 치료가 끝나고 조금만 재활을 거치면 건장한 성인 남성의 태가 날 것도 같았다.

딕은 붕대로 단단히 감아놓은 제이슨의 손을 보았다. 그러난 손가락 끝이 끔찍하게 뭉그러진 것이 보인다. 손톱이 나려면 꽤 시간이 지나야 할 것 같았다. 딕은 침대가 흔들리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걸터앉았다.

"당신 탓이 아니에요, 브루스."

브루스는 딕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딕은 손을 뻗어 브루스의 무릎에 손을 올렸다. 두 남자의 시선이,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입술로 가 닿았다.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숨결이 눈에 보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

#4

***

창문을 닫자 펄럭이던 커튼이 조용히 내려앉았다. 늘 피워두는 향은 넓은 방을 금세 채웠다. 하루에 두 번씩 환기를 시켜야 하지만, 찬바람이 방 안으로 드는 것은 늘 걱정스러웠다.

브루스는 눈으로 뒤덮인 창밖의 정원을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대로 그 자리에서 굳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제이슨은 눈을 뜨고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브루스는 소리 죽인 걸음으로 침대를 향해 다가갔다. 얼굴을 가린 붕대 사이로, 몇 년 만에 마주하는 푸른 눈동자가 보였다. 그 푸른색만은 기억속의 어린 눈동자와 다를 것이 없어서, 브루스는 울컥 치받는 기분을 느꼈다.

"제이슨."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도 제이슨은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다. 제이슨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조금 더 천천히 다시 눈을 떴다. 그의 눈동자에 초점이 제대로 맞지 않는 것이 보였다. 브루스는 느릿하게 손을 뻗어, 제이슨의 손을 조심스럽게 감싸 쥐었다.

 

"브루스!"

딕은 방문을 열고 뛰쳐 들어오다가 멈칫했다. 침대에 깔린 이불이 피로 얼룩져있었다. 온통 난장판이 된 방안을 하인들이 부지런히 치우며 침대를 흘끗거렸다. 환술사들이 침대를 둘러싸고 주문을 외우는 것이 보였다. 딕은 의자에 앉아있는 브루스를 향해 다가갔다. 브루스의 셔츠에도 피가 스민 것이 보였다.

"어떻게 된 거예요?"

"발작을 일으켰다."

브루스의 눈은 가라앉아 있었다. 자신의 손이 닿는 순간, 제이슨은 그 몸 상태로는 도저히 불가능할 힘으로 몸을 솟구치며 비명같은 고함을 질렀다. 그는 브루스의 손을 뿌리치고, 날뛰며 손에 잡히는 대로 집어던지고 부수기를 반복했다. 그를 말리려던 브루스가 결국 강제로 그의 몸을 제압해 찍어 눌렀을 때에도, 제이슨은 광인 같은 비명을 멈추지 않았다. 격렬한 저항으로 상처가 터지고 피가 흘렀다. 뒤늦게 달려온 환술사들의 수면마법이 들기 전까지, 제이슨은 짐승처럼 날뛰었다.

브루스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자신의 어깨를 잡은 딕의 손 위에 제 손을 올리고, 침묵을 지켰을 뿐이었다. 딕은 자신의 손등 위로 느껴지는 브루스의 손과, 그 온기와, 맥박을 느꼈다.

"나중에 이야기하자."

한참을 기다린 뒤에 나온 말도, 고작 그것뿐이었다.

 

***

#5

***

딕은 방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었다. 책에 고정되어있던 시선이 느긋하게 올라갔다.

"제이슨."

제이슨은 조용히 문을 닫고, 문을 등진 채 우두커니 서있었다. 딕이 그를 향해 손을 뻗자, 그는 천천히 다가가 그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딕은 읽던 책을 덮어 테이블에 올려두고, 두 손으로 제이슨의 손을 끌어당겨 잡았다.

그 하나를 전담하는 환술사의 수에 비하면 무척 더뎠지만, 제이슨은 조금씩 상태가 호전되었다. 누군가의 손길이 닿기만 하던 발작하며 난동을 부리는 일도, 의미 모를 괴성을 지르는 일도 줄어들었다. 그러나 여전히 그는 아팠다.

뒤틀린 뼈마디를 맞추고, 썩어 들어가던 상처를 치료하고, 결핍된 영양소를 보충 받아 더 이상 신체적인 고통이 없다고 하더라도, 그는 여전히 아팠다.

"무슨 일이야. 졸려서 그래?"

제이슨은 딕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딕은 어린 아이를 대하듯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채, 그를 물끄러미 올려다봤다.

"브루스는 방에 없어?"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인다. 딕은 의자에서 일어나, 제이슨의 손을 잡고 자신의 침대로 다가갔다. 깨끗하게 정리된 이불을 들추자, 제이슨은 그 안으로 기어들어가 베개에 머리를 뉘였다.

딕은 방안의 모든 불을 껐지만, 침대 맡의 은은한 등 하나만은 켜두었다. 제이슨은 어둠을 싫어했다.

"제이슨."

딕이 그의 이름을 부르자, 제이슨은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희미한 빛이 비친 눈동자는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딕은 그의 가슴팍에 조심스럽게 손을 올렸다. 딕을 빤히 바라보던 제이슨의 손이 천천히 올라와 딕의 손을 잡았다. 그 온기를 느낀 딕은 피식 웃으며 눈을 감았다.

"잘 자. 제이슨."

잠시 뒤에 딕이 눈을 떴을 땐, 제이슨은 그의 손을 잡은 그대로 잠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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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리런치 전후 설정 혼용..

커플링성향 아주 적음..거의 없음?

 

***

 

고담의 공기는 메트로폴리스의 것과는 너무나 달랐다. 비단 공기 뿐만은 아니었다. 그 무엇도 비교할 수 없었다. 대도시 특유의 매캐하고 건조한 공기는 비슷하다 치더라도, 그것 역시 닮지는 않았다. 메트로폴리스의 공기는 삶의 냄새가 난다. 햇빛의 냄새가 난다. 고담의 공기는 그러기엔 너무나 무겁다. 안개와 화약, 피의 냄새가 난다. 박쥐가 숨어드는 어둠의 냄새가 난다.

슈퍼맨은 그런 고담에서도 희망을 찾아내려 했다. 희망과 빛과 박애는 그의 본질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는 악인이 아닌 그 누구에게서든 선을 찾아내려 했다. 그것은 아둔한 고집이 아니었다. 숨을 쉬듯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절친한 친구인 배트맨은 그런 그를 이해했지만 동감하진 못했다. 그 역시 배트맨을 이해하지만 동감할 수는 없었다.

고담에 올 때마다 바람소리처럼 자연스럽게 들려오는 소리 중 하나는, 비명과 총소리였다. 그의 뛰어난 청력에는 도시 곳곳에서 들려오는 범죄의 소리들이 쉴 새 없이 쏟아졌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총소리가 두 번 울리고, 남자가 지르는 고통스러운 비명이 허공으로 흩어졌다.

그는 배트맨의 도시에 깊게 관여하지 않았다. 그를 존중하기 위함이었다. 그의 도시에 멋대로 끼어드는 일은, 두 사람의 우정에 깊은 상처를 낼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그것을 알고 있음에도, 슈퍼맨은 매번 반사적으로 총소리에 반응해버렸다.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날아가 들키지 않도록 살펴보는 것 까지는 괜찮을 것이다. 슈퍼맨은 그렇게 스스로를 납득시켰다. 그것마저 싫었다면, 배트맨은 진즉 자신이 고담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했을 것이다.

슈퍼맨이 그나마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총격의 대부분은 무고한 희생자를 만들기 위함이 아니었던 것이다. 고담은 갱과 양아치가 넘쳐났고, 저들끼리 다투다가 결국 총까지 꺼내드는 일은 빈번했다. 당장 그들 사이로 뛰어들어 그들을 무장해제 시키고, 고담의 경찰들에게 인수해버리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으나 슈퍼맨은 늘 한 번 더 인내했다.

슈퍼맨은 비명이 들려오는 곳으로 날아갔다. 고담이 아무리 대도시라고 하더라도, 그에겐 손바닥만큼 좁은 땅이나 다름없었다. 아무리 높은 상공에 떠있어도, 신문 헤드라인의 커다란 활자만큼 선명하게 거리를 내려다볼 수 있었다. 나지막한 목소리는 꽂아둔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처럼 선명하게 들렸다.

", 난 정말 아무 잘못 없다고! 믿어줘, 진짜야!"

"내가 정해준 규칙이 그렇게 어려웠나? 아니야, 잘 지키는 놈들도 있는 걸 보면 그냥 네놈의 머리가 나쁜 것뿐이야."

총을 든 남자는 바닥을 기어가는 사내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사내는 도망치려 버둥거리다가, 머리를 걷어차는 남자의 발길질에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얼굴을 처박았다.

"내가 너희들에게 개과천선을 바라는 게 아니잖아. ? 너희들끼리 마음껏 사기를 치든, 배신을 하든, 난 신경 쓰지 않아. 하지만 내 뒷통수를 때리려는 건 용서 못해. 너희들끼리 약을 빨고, 범죄를 저지르고, 그러다가 서로 죽고 죽이는 건 신경 안 쓴다고. 하지만 애들을 건드리는 건 안 돼. 애들은 건드리지 말라고. 애들. 학교를 다니는 그 어린애들 말이야. 이게 그렇게 외우기가 힘든가?"

", 살려줘! 누구 없어? 살려줘!"

"아아, 이해해. 하긴, 머리가 나쁜 게 본인 탓은 아니지. 기다려봐. 이마에 구멍이 뚫려서 그 머릿속에 고이다 못해 썩어버린 피를 좀 빼내고, 바람이 좀 통하면 조금은 똑똑해질지도 모르지. 예쁘게 뚫어 줄테니 가만히 있어."

타앙. 총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바닥에 처박힌 사내는 그대로 바지를 더럽혀버렸다. 바닥에 얼굴을 처박고 한참을 덜덜 떨던 사내는 각오하던 고통이 느껴지지 않자 슬며시 눈을 떴다.

총구도, 거구의 남자도 없었다. 붉은 헬멧도 보이지 않았다. 남자는 총을 맞은 다리를 질질 끌며, 피 외에도 말하기 민망한 것이 섞인 액체의 흔적을 거리에 남기며 황급히 자리를 떴다.

 

". 그만둬요, 클락. 난 이제 병아리 취급 받을 이유 없으니까. 아니, 이건 병아리보단 고양이인가."

"너야말로 그만두는 게 어떻겠니, 제이슨."

"뭘 말하는 건데요?"

"이 모든 것."

클락은 붉은 헬멧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의 투시력에 대비한 듯, 헬멧에는 납 도금이 되어있었다. 아니면 충분한 양의 납 성분을 함유하고 있던가. 아무튼.

제이슨은 까마득한 높이에서, 클락의 손에 목덜미가 잡힌 채 발판 하나 없이 둥둥 떠 있었지만 전혀 두려워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는 태연하게 홀더에 총을 꽂아 넣고, 팔짱을 끼며 클락의 푸른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 오지랖은."

"넌 영리하고 똑똑한 아이였다. 지금도 그렇겠지. 넌 네가 무엇을 원하는지 스스로 알고 있어."

"역시 기자는 다르네요. 감춰진 사실을 알아채는 심안이 굉장하군요. , 그럼 그 능력으로 한번 답해보세요. 방금 당신이 내 총으로부터 구해준 그 남자는 누구였을까요?"

클락은 대답하지 않았다. 붉은 헬멧 속에서 나직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명백한 비웃음의 소리였다.

"당신 때문에 열두 살짜리 여자아이가 신세를 망치게 생겼다고. 해결할 자신이 없거들랑 빨리 내려놔요. 당장."

 

와장창. 창문이 깨지고 사방으로 유리조각이 튀었다. 남자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남자의 손에 어린 여자아이의 가느다란 손목이 단단히 잡혀있었다. 창문을 통해 뛰어든 레드후드가 더럽고 초라한 집안을 휘 둘러보았다.

", 그래. 두 번째 기회도 그렇게 차버리겠다는 거지."

슈퍼맨은 창밖에서, 레드후드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풍경을 보며 살짝, 아주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벽지보다 잡지에서 뜯어낸 헐벗은 여자 사진이 더 많이 보이는 벽. 쌓여있는 피자박스와 맥주캔. 쥐 오줌자국이 선명한 천장에, 구석에 대충 뭉쳐 던져놓은 이불 두 개. 여자아이는 지저분했고, 제대로 먹지도 못한 듯 비쩍 말라있었으며, 입고 있는 옷은 너무 크고 낡아있었다. 사내애가 입어도 품이 남을듯 한 옷이었다.

그러나 슈퍼맨이 얼굴을 찡그린 것은 그런 열악한 환경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단순한 가난에 경멸을 느끼는 사람이 아니었다. 아이의 얼굴이, 드러난 팔과 다리와 어깨와 목덜미가, 온통 상처와 멍투성이였기 때문이다. 아이의 뺨은 붉게 부어있었다. 얼마 안 된 손찌검의 흔적이다. 레드후드는 홀더에 꽂았던 총을 다시 빼어들었다.

", 네가 할 일을 알려주지. 아이의 손을 놓는다. 그것 딱 하나야. 그마저도 못하는 머저리라고는 하지 말아줘. 블랙마스크를 동정하고 싶진 않거든."

".. .. .."

"물론 블랙마스트는 네놈 얼굴도 모를 테지만 말이야. 하긴, 네놈도 블랙마스크는 본 적도 없지? 그런데 말이야, 네 위로 일곱 다리 쯤 건너가다 보면.. , 됐어. 설명하기 귀찮아. , 총 맞기 싫으면 일단 그 손부터 놓으라고. 당장."

철컥. 총을 장전하는 소리에 남자는 새된 소리를 내며 아이를 집어던질 듯 손을 뿌리쳤다. 비쩍 마른 아이는 그 힘을 이기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레드후드는 재빨리 그런 아이에게 손을 뻗어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아이는 총을 겁내는 기색이 아니었다. 제 아빠와 붉은 헬멧을 번갈아 쳐다보기만 했다.

", 꼬마야. 지금 창문 밖에 아주아주 착한 사람이 와있거든."

슈퍼맨은 그것이 자신을 칭하는 말이라는 것을 금방 알아차렸다.

"가서 놀아달라고 하렴."

"하지만 아빠가 혼자 밖에 나가면 혼난다고 했는데.."

"흐응. 글쎄? 괜찮으니까 가봐. 가서 아이스크림 사달라고 해."

"두 개 먹어도 돼요?"

"배탈 나."

"치이.."

레드후드가 아이를 안았던 팔을 풀고 머리를 쓰다듬자, 아이는 창문을 향해 총총 다가왔다. 슈퍼맨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아이를 향해 팔을 벌렸고, 아이는 어색하게 그의 품에 안겼다.

"경찰은 안 돼요. 보호시설도 믿을만하진 못하고. 크라임 앨리에서 톰킨슨 박사를 찾아서 조언을 구해 봐요. 내 얘기는 절대 하지 말고. 아니면 당신 도시로 가던가. 절대로 여기에 다시 데려오진 말아요."

레드후드는 작은 목소리로 빠르게 중얼거렸다. 그러나 아무리 작은 소리라도, 슈퍼맨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조르고 졸라 결국 아이스크림을 세 개나 먹어치운 아이는, 그의 품 안에서 잠들어버렸다. 그는 아이를 톰킨스의 병원에 부탁했다. 그녀는 아무런 설명도 듣지 않았지만, 아이의 몸에 가득한 상처만 보고서도 무슨 일인이 짐작하고도 남는 것 같았다. 그녀는 믿을만한 시설에 아이를 인계할 테니 걱정 말라며 미소 지었다. 후줄근한 코트와 두꺼운 테안경을 낀 클락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클락이 다시 붉은 망토를 휘날리며 그 더러운 방으로 돌아왔을 때, 제이슨은 남자의 이마에 총을 겨누고 있었다. 제이슨의 손가락이 방아쇠를 당기려하는 것을 본 클락은, 방안으로 뛰어들어 남자의 이마를 향해 날아가는 총알을 손으로 붙잡았다. 입에 재갈을 문 채 부들부들 떨던 남자는, 허공을 가로지르는 총소리에 그대로 기절해버린 뒤였다. 뒤로 단단히 묶인 손발 탓에 부자연스러운 자세로 바닥으로 쓰러졌다.

"또 참견이시네."

"넌 그를 죽이려고 했어."

"당연하죠."

"넌 지금 그를.."

클락은 바닥에 쓰러진 남자를 돌아보곤 멈칫했다. 남자의 몸은 온통 만신창이였다. 옷은 피로 흥건하고, 얼굴은 알아보기도 힘들 정도로 구타당한 듯 보였다.

"그를 고문했어?"

"그걸 말이라고."

제이슨은 혀를 차며 다시 권총을 홀더에 꽂았다. 그가 눈앞에 버티고 있는 이상, 총으로 저 남자를 죽일 수는 없었다.

"대화와 설득보다 빠른 방법은 얼마든지 있어요. 저런 쓰레기를 사람취급 해주기엔 시간이 아깝지."

"제이슨!"

레드후드는 짜증스럽게 헬멧을 벗어 바닥을 향해 집어던졌다. 카랑한 소리와 함께 헬멧이 바닥 위를 두어 번 튀고, 구석으로 굴러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넘겼다. 누가 보아도 불친절한 몸짓이었다.

"그래요. 그런데 그게 뭐가 어쨌다고? 법을 지켜? 선을 넘지 말고? . 당신네들이 하는 말은 어쩌면 그렇게 단 한글자도 변하질 않지. 왜 그게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모를까."

제이슨은 흉하게 쓰러진 남자를 손으로 가리켰다. 푸른 눈에 분노가 어렸다.

"그래. 저 남자는 무슨 핑계를 대고 끌고 갈까요? 본인의 집에 들어온 걸 무단침입으로 저지할까? 아니면 법적인 보호자가 미성년자를 데리고 외출하는 걸 유괴로 체포할 수 있나? 효력 있을 증거? 없지. 계약서를 쓰거나, 녹취록을 남기거나 할 만큼 똑똑한 양반도 아니거든. , 그럼 당신들의 기준에 맞춰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뭐가 있지?"

클락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제이슨의 물음이 답을 구하기 위한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제이슨은 헐떡이는 숨을 삼켰다. 이상하게 숨이 가쁘고 가슴이 답답했다. 응어리진 것이 목구멍을 틀어막고 내려가질 않았다.

"열두 살 먹은 제 딸을 업소에 팔아넘기는 꼬라지를 멍하니 바라만 보다가 현장을 덮치기라도 하라는 거야? , 당신들 눈에는 어린애들이 마냥 멍청하고 바보 같아 보이지. 어리다고 해서 아무것도 모를 줄 알아?"

클락은 조용히 몸을 돌리고, 굴러가다가 벽에 가로막혀 덩그러니 놓여있는 붉은 헬멧을 향해 다가갔다. 힘껏 집어던진 주인의 만행에도 흠집 하나 나지 않은 그것을 주워들고, 그는 다시 천천히 몸을 돌렸다.

제이슨은 한손으로 눈을 가린 채 생각에 잠겨있었다. 그가 어떤 생각을 하더라도, 저 남자를 죽이지는 못할 것이다. 자신이 막을 것이니까. 어떤 돌발행동을 하더라도 자신의 눈보다 빠를 수는 없다. 브루스와 마찬가지로 고도의 훈련을 받았더라도, 그는 평범한 인간이니까.

"제이슨."

클락은 제이슨에게 다가가 헬멧을 내밀었다. 제이슨은 반쯤 숙인 고개를 들어 올리진 않았지만, 손가락 사이로 그 헬멧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클락은 그가 손을 뻗어 헬멧을 가져갈 때까지, 그리고 그것을 다시 쓸 때까지 작은 흔들림도 없이 가만히 서있었다.

"당신이 다 망쳤어. 고담의 일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아. 이 더러운 시궁창에 사는 것들은, 그렇게 닥치는 대로 들쑤신다고 치울 수 있는 쓰레기가 아니란 말이야."

"난 아직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클락은 손을 뻗어 제이슨의 어깨에 얹었다. 제이슨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으나, 클락은 개의치 않고 그렇게 손을 얹은 채 헬멧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깊이를 알기 어려운 푸른 눈동자는 언제나처럼 강직했다.

"넌 잊었겠지만, 난 아직도 기억하고 있어."

제이슨은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조용히 손을 들어올려 클락의 팔을 치우고, 그대로 몸을 돌려 창문으로 다가갔다. 뛰어내리기 위해 창틀에 한 다리를 걸치는 그를 보며 클락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래서 난 아직 네가 돌아올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제이슨."

"거참 말 많네."

제이슨은 창틀에 걸터앉은 채 몸을 돌렸다. 작은 실수로도 5층 높이에서 추락할 수도 있지만, 제이슨은 그것을 새삼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두 번째 홀더에 끼워둔 총을 꺼내들었다. 클락의 눈썹이 가볍게 씰룩였다.

". 투시가 안 되니 당황하셨나? 납으로 만들어진 탄창이거든. , 이번엔 대답 해보라고. 이 무거운 납덩이를 내가 왜 가지고 다녔을까? 이 안에는 뭐가 들어있을까? , 젠장. 점점 리들러를 닮아가고 있군. 난 옛날부터 그 자식이 싫었는데."

그러나 클락은 제이슨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 이번 질문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제이슨은 목소리에 한껏 비웃음을 담아 이죽거렸다.

"세상 모든 크립토나이트가 루터와 브루스의 손에 있다고 생각하진 않았겠지. 그러니 이제 제발 이상한 헛소리는 그만하고, 옛날일 헤집는 것도 그만두고, 그냥 내가 당신 눈앞에서 사라질 때까지 그 잘난 입 좀 다물고 있어줬으면 좋겠군."

클락은 제이슨의 그 말에 입꼬리를 끌어올려 미소를 지었다. 일말의 긴장이 어렸던 눈빛이 한층 누그러졌다. 제이슨은 그의 표정에 입술을 씰룩였으나, 그에게 표정을 읽히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은 있었다. 슈퍼맨이 가진 투시력의 한계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으므로.

"제이슨. 내가 네 얼굴을 볼 수 없다고 해서, 네 심장소리까지 듣지 못하는 것은 아니란다."

"?"

아이를 대하는 듯 한 태도가 짜증나 대충 툭 내뱉은 말꼬리가 미묘하게 올라갔다.

"다 들린다니까. 네 심장소리가."

"...재수 없는 꼰대."

제이슨은 총을 다시 홀더에 꽂고, 훌쩍 뒤로 몸을 뉘였다. 그의 몸이 창밖으로 훅 떨어졌으나, 클락은 그를 걱정에 창가로 달려가진 않았다. 곧 쇠난간을 붙잡는 소리, 장갑의 미묘한 마찰음, 몸을 솟구치는 소리, 가볍게 비상계단을 박차고 옆 건물로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심장소리가 멀어진다. 그래, 그 심장소리. 클락은 누군가의 진심을 곧잘 꿰뚫어보는 재주가 있었다. 그것은 독심술도, 초능력도 아니었다. 그의 귀에 상대의 심장소리가 너무나 선명하게 들려오기 때문이었다. 그는 제이슨이, 정확히 말하면 그의 심장소리가 가장 처음 반응했던 단어를 곱씹어보았다.

믿는다는 말이 그렇게 고프면서.

클락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 여러모로 아픈 아이였다.

 

 

클락은 익숙한 망토를 발견했다. 샛노란 망토. 동그란 뒤통수. 그는 조용히 건물의 옥상에 내려앉았다. 바람에 담배냄새가 실려 왔다.

"담배는 건강에 좋지 않단다, 로빈."

아이는 자신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더니 아랫입술을 삐죽 내민다. 축 늘어진 어깨가 당당하게 펴질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끊는 중이예요."

불퉁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면서도 아이는 바닥에 꽁초를 비벼 껐다. 클락은 제이슨의 곁으로 다가와 나란히 난간에 걸터앉았다. 손을 뻗어 작은 어깨를 감싸자 밤바람에 차가워진 체온이 느껴졌다. 그는 자신의 붉은 망토를 끌어올려 아이의 어깨에 둘러주었다. 내심 추웠던 모양인지, 제이슨은 밀어내지 않고 얌전히 앉아만 있었다.

"아저씨."

제이슨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다가 문득 클락을 올려다보았다. 클락은 자상한 미소를 띤 채, 제이슨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놀란 아이의 심장이 쿵쿵 뛰는 것을 들으며 클락은 손을 들어 올려 아이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어 주었다.

"어떻게 하면 아저씨처럼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어요?"

"?"

혼났군. 클락은 그렇게 생각하며 아이의 다음 말을 기다려주었다. 제이슨은 뾰족하게 튀어나온 제 아랫입술을 손가락으로 툭툭 치며 말을 골랐다.

"어떻게하면 나이트윙이나 아저씨처럼.."

브루스를 실망시키지 않을 수 있을까요? 아이의 두 번째 물음은 반 토막 나 아랫배 깊숙한 곳으로 밀려들어갔다. 이제 열 몇살 먹은 어린아이의 속내를 읽는 것쯤은 쉬운 일이었다. 클락은 그가 어떤 말을 하고 싶은지 금세 눈치 챘지만, 조금 더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보았다. 아이가 생각을 정리하고, 제가 원하는 것을 스스로 입 밖에 낼 때까지.

", 아무튼요."

그러나 결국 아이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클락은 잠시 진지한 얼굴로 생각하는 척 하다가, 멋진 미소를 띤 채 대답했다.

"너를 믿는 사람들을 떠올리면 된단다. 네가 받은 사랑과 보살핌을 잊지 않으면."

클락의 얼굴을 흘낏거리던 제이슨은 그 말에 눈에 띄게 시무룩해졌다. 아이의 손가락이 꼼질거리는 것이, 고담의 야경에 비쳐보였다. 난간 아래로 늘어트린 가느다란 다리가 흔들거렸다.

"그럼 난 평생 불가능한 일이겠군요. 부모님조차도 날 사랑한 적 없는데. 누가 날 믿고 사랑하겠어요."

"글쎄다."

클락은 웃으며 아이의 등을 토닥였다.

"그렇게 말해도 사실은 알고 있지?"

".."

제이슨은 클락의 말에 고개를 푹 떨어뜨렸다. 꼴깍, 침이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지만 클락은 시치미를 뚝 떼고 모른 체했다. 이윽고 아이가 발딱 몸을 일으켰다. 높은 고층건물 옥상의 난간 위였지만, 전혀 스스럼없는 몸짓이었다.

"브루스한테 사과하러 가야겠어요. 안녕히 가세요, 아저씨."

아이는 그대로 훌쩍, 난간 아래로 뛰어내렸다.

"나도 브루스에게 볼일이 있긴 했지만 말이다."

하룻밤쯤, 미뤄도 상관없긴 할 터다. 오늘밤은 저 어린 아이에게 기꺼이 양보해주기로 했다. 절반은 수줍고 절반은 기뻐 반짝거리던 얼굴이 퍽이나 귀여웠다.

 

 

그래, 기억하고 있다. 선명하게. 저 사람 좋은 클락 켄트는, 자신이 그날 밤의 대화를 깡그리 잊어버린 줄로만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브루스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그에게 이렇게 반발하는 일도 없을 거라고.

당신은 이 도시를 몰라, 슈퍼맨. 절로 비웃음이 났다. 나를 사랑하니 나도 사랑한다. 그런 단순한 등가교환이 이루어지는 도시가 아니었다, 이 고담은. 그의 성격처럼 그렇게 티 없이 맑고 흔들림없는 사랑은 이 도시에 어울리지 않는다. 존재할 수조차 없다. 만일 한줄기 피어난대도, 뿌리부터 버적버적 말라갈 것이다. 이 미친 도시는 그런 연약한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래, 그땐 어렸지. 애정이니 믿음이니 하는, 쓸데없는 것에 목을 맸다. 그의 온전한 믿음을 얻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몰랐고, 그에게 순수하게 사랑받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몰랐다. 누구에게나 그러진 않겠지. 그러나 자신에게는 그랬다.

만일 그때 죽은 로빈이 자신이 아니라 딕이었다면.

제이슨은 그 의문에 대해서, 어떤 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만일 그랬다면, 브루스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그는 여전히 조커를 방치해두고, 새로운 로빈을 들였을까. 쉽게 답을 낼 수 있을 질문임에도, 제이슨은 어떠한 결론도 내릴 수 없었다. 누가 알겠어, 그 양반 속을.

제이슨은 홀더에서 권총을 빼내어 점검했다. 남은 탄약의 개수를 세고, 가진 무기를 확인했다. 그래봐야 아동포르노 촬영지다. 그가 확인한 바로는 무장한 인원은 많아봐야 열다섯. 그나마도 우스운 어중이떠중이들이다. 제이슨은 난간 위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목덜미와 손목을 스치는 밤바람이 날카로웠다.

기억하고 있다. 알고 있다.

난 언제나 고아였어. 어린 시절 잠시 착각 속에 산 적은 있었지만, 결국은 부모가 필요했던 적도, 부모가 있었던 적도 없었지.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야.

AND

레드후드 제이슨&로빈 되기 전의 어린 제이슨..망상글ㅠㅠ


***


제이슨은 욱신거리는 어깨를 주무르며 더러운 골목을 걸었다. 비단 어깨뿐만 아니라 온몸이 아팠다. 그는 소매치기에 실패한 대가로 호된 매를 맞았다. 고담 경찰의 발길질은 무자비했고, 제대로 먹지도 못하는 어린 소년이 견디기엔 너무나 억셌다.

그러나 몸이 조금 아프다고 해서 팔자 좋게 퍼질러질 수는 없었다. 하루라도 벌지 않으면, 그날은 온전히 굶게 된다. 자신은 또래보다 야무지고 영리한 아이였다. 자신의 벌이 정도라면 쓰레기통을 뒤져 썩은 토마토를 찾을 필요는 없었다. 그러니 할 수 있는 한 벌어야 했다.

재빠르게 도망칠 몸 상태는 아니니 소매치기는 포기해야 했다. 누군가에게 사기를 쳐서 돈을 좀 뜯어내던지, 아니면 값이 나갈만한 것을 훔쳐 팔아야 할 것 같았다. 자동차 타이어가 제일 만만한 물건이다. 좀 무겁고, 날이 어두워져야 하지만.

그러나 제이슨은 밤이 될 때까지 마냥 시간을 낭비할 생각은 없었다. 그는 어깨를 축 늘어트린 채, 기운 없는 걸음걸이로 거리를 걸었다. 누군가의 동정을 사기 위한 몸짓이었다. 혹은 상대를 방심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조금만 큰 길로 나가면, '잘 사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이런 뒷골목과는 평생 연이 없을 테지만 실수로 길을 잘못 들었든지, 아니면 우연찮게 이 근처에 볼일이 있다든지, 그런 이유로 뒷골목 근처로 걸음한 사람들. 그런 사람들에게 구걸을 하던지, 사기를 치던지, 어떤 방법으로든 몇 달러쯤은 뜯어낼 요량이었다.

더러운 골목에 사는 얼굴들은 대부분 서로를 알고 있었다. 서로에게 뜯어낼만한 것이 없다는 것도 알았고, 서로의 삶이 밑바닥 인생이라는 것도 알았다. 마땅히 스트레스를 풀어낼 수단이 없는 어른들은 가끔 지나가던 아이들에게 시비를 걸어나 공연히 괴롭히는 일도 있었지만, 제이슨은 그런 일에서 자유로웠다. 제이슨 본인의 성격이 상당히 '앙칼진' 것도 있었다. 그의 아버지가 어느 무서운 사람 밑에서 일한다는 소문이 도는 것도 있었다. 아버지라고. 제이슨은 그런 소문이 들려올 때마다 코웃음을 쳤다. 나한테 아버지가 어디 있어. 애초에 그 인간은 그렇게 거물도 못 돼. 찌질하거든.

여하튼 제이슨은 그랬다. 그에게 몇 번 물린 적이 있는 어른들은 그를 무시하거나 슬슬 피했다. 비록 두려움이 아니라 귀찮음으로 인한 작태이긴 하더라도, 제이슨은 그게 마음에 들었다. 어른들은 하나같이 짜증나고 싫었다.

제이슨은 문득 매캐한 냄새를 맡았다.

담배냄새가 새삼스러울 것은 없었다. 이곳은 열 살짜리들도 마약을 하는 쓰레기장이니까. 그러나 제이슨은 문득 고개를 들었고, 매서운 눈매의 남자가 자신을 똑바로 쏘아보는 것을 발견했다.

조금 흐트러진 검은 머리카락은 약간 곱실거렸지만 우습지 않았다. 짙은 눈썹은 남자다웠고, 눈매는 매서웠다. 제이슨은 그의 푸른 눈이 무척 사납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는 눈치가 빠른 소년이었다. 덤벼도 괜찮을 상대와, 미리 피해가야 할 상대를 알았다. 생존을 위한 감각이었다.

그의 눈빛은 이 지옥 같은 슬럼의 누구보다도 무서웠다. 그에게 어쭙잖은 수작질은 통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쉽게 깨달을 수 있었다. 제이슨은 고개를 돌리고 그의 앞을 조용히 지나가려고 했다.

"꼬마야."

제이슨은 걸음을 멈추고 상대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무서운 사람이지만 미리 주눅들 필요는 없다. 이 골목에선 얕보이면 빼앗기고, 빼앗기면 죽는다. 그런 곳이었다. 제이슨은 당당한 표정으로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남자는 키가 컸다. 키뿐만 아니라 덩치도 컸다. 넓은 어깨와 가슴, 근육질의 팔뚝이 보였다. 덩치에 비해 허리가 얇아 날렵한 인상이었지만, 사나운 인상과 맞물려 어마무지한 위압감을 풍기고 있었다.

가죽자켓을 입은 터프가이는 한물 간 유행이라고 비아냥거리고 싶었으나, 제이슨은 그 말을 속으로 삼켰다. 방금 전 자신을 때렸던 부패경찰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덩치와 분위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에겐 그 촌스러운 복장이 무섭도록 잘 어울렸던 것이다. 그는 억지로 꾸며낸 터프가이가 아니었다.

"내가 길을 잃어서 그러는데."

"?"

그래서 남자가 그에게 말을 건넸을 때, 제이슨은 자신도 모르게 얼빠진 소리를 흘렸다. 그의 분위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남자는 담배를 깊게 태웠다가, 연기를 훅 뱉었다. 침침한 허공으로 흰 연기가 흩어졌다.

"마땅히 할일도 없고 해서 말이야. 너도 비슷한 처지인 것 같은데 길안내나 좀 부탁할까 해서 말이야."

"한가해 보인다고요? 내가?"

제이슨은 피식 웃었다. 생긴 건 갱 두목의 아들쯤 되는 것처럼 생겨서, 이런 후미진 곳은 처음 와보는 것이 분명했다. 슬럼 태생들은 누구나 알고 있는 것이 있다. 슬럼의 아이들이 학교를 가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이 한가롭게 땅따먹기나 하고 있을 수는 없다는 것을. 그들은 언제나 살기위해 발버둥쳐야 했다. 그들은 바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이봐요, 아저씨."

제이슨은 그렇게 툭 내뱉고 움찔했다. 상대는 젊었다. 어림잡아 20대 초반쯤. 그런 상대가 좋아할만한 호칭은 아니다. 그러나 자존심을 굽히기는 싫었다. 그는 기본적으로 누군가의 눈치를 보는 것이 달가운 소년은 아니었다.

다행스럽게도 눈앞의 남자는 눈썹을 가볍게 까딱 움직였을 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진 않았다.

"아저씨가 잘 모르는 모양인데요, 슬럼에 사는 애들은 전부 노동자라고요. 하루라도 일을 안하면 그날은 종일 굶을 수밖에 없어요."

"모르긴 뭘 몰라. 일이라고? 도둑질이나 하고, 구걸이나 소매치기나 사기로 근근이 푼돈이나 뜯어내는게 전부면서 뭘."

"그게 우스워 보이죠? 아저씨처럼 좋은 집에서 태어나서 비싼 가죽 자켓이나 입고, 담배나 피우면서 어른이 돼버리기까지 한 사람들은 절대로 이해 못해요. 우리 애들이 하는 일은 다 우스워 보이죠."

"우습다고 한 적은 없고."

남자는 담배를 땅에 떨어트리고 워커 뒤축으로 비벼껐다. 발도 크다. 제이슨은 담배를 따라 무심코 시선을 내렸다가, 남자의 신발을 보고 그런 생각을 했다. 상대는 어른이다. 정말로. 커다란 어른이다.

"네가 뭘 하고 살든 난 왈가왈부할 생각은 없어. 그런데 오늘 하루정도 널 고용해보려고 하는 사람한테 그런 건방진 태도는 별로라고 생각하지 않아?"

"고용이요? 나를 고용하겠다고요? 아저씨 정말로 이 골목에는 처음 왔죠?"

"물론 네 성격이 얼마나 지랄 맞은 꼬맹이인지는 알고 있지. 걱정마라, 이상한 일에 부려먹지도 않을 거고 사기 치지도 않을 거야. 못 믿겠다면 선금을 주지."

남자는 품안에서 지갑을 꺼내 지폐 한 장을 내밀었다. 지폐 위에 그려진 벤자민 프랭클린과 마주친 제이슨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그는 분명히 '선금'이라고 말했다. 이만큼의 돈을 더 주겠다고?

". 적냐? 다리 절면서 동냥이나 하는 것보단 이게 더 쏠쏠할 텐데."

"좋아요. 이야기나 들어보죠. 이상한 이야기 같으면 가버릴 거예요. 그리고 저기 있는 아저씨들한테 당신이 큰돈을 가지고 있다고 고자질해버리겠어요. 그럼 내 몫으로 얼마쯤 떨어지겠죠."

"네가? , 이게 아주 나를 물로 보는구나. 나도 사람 보는 눈 정도는 있거든, 꼬마야? 그러느니 죽지, 너는."

남자는 제이슨에게 다가와 그의 손에 지폐를 억지로 쥐어주었다. 제이슨은 구겨진 백 달러 지폐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주머니에 대충 찔러 넣었다.

"좋아요. 뭘 시키려는 건데요?"

"안내해."

"? 뭘요?"

"아무거나 좋으니까 안내하라고. 아까 길 잃었다고 말한 거 못 들었어? 슬럼 투어를 한번 해볼 생각이니까, 한번 안내해보라는 거야."

"슬럼.. 뭐라고요? 여기가 무슨 동물원인줄 알아요?"

제이슨은 빈정거리는 목소리로 대꾸했으나 남자는 고개만 까딱였을 뿐이었다. 돈 받았으면 움직여. 입 밖으론 내지 않았지만 너무나 명백한 표정에 제이슨은 괜스레 남자를 향해 돌을 차버리고, 휙 몸을 돌려 먼저 성큼성큼 걸어가 버렸다.

 

쪼로록. 콜라와 공기가 섞여 빨대를 타고 올라오며 그런 소리를 냈다. 제이슨은 몇 번이나 빨대를 더 빨고 나서야 유리컵을 손에서 놓았다. 사람들이 오가며 지저분한 행색의 소년을 흘끔거렸지만 아무도 그에게 잔소리를 하지는 않았다. 그들을 조금만 뚫어져라 보고 있으면, 예의 남자가 얼굴을 구기며 인상을 썼던 것이다. 그의 사나운 기색에 사람들은 고개를 숙이고 제 앞에 놓인 음식을 퍼먹기 바빴다.

종류별로 시켜둔 음식들은 반쯤 먹다 남은 것 천지였다. 그러나 남자는 음식에 일체 손을 대지 않았다. 주문한 맥주를 간간히 마시며 제이슨을 물끄러미 바라보거나, 그들에게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을 노려봐 쫓아내는 것이 다였다. 소년에게 말을 거는 일도 없었다.

 

슬럼 투어라는 괴상한 짓은 반나절도 가지 못해 끝났다. 고작 슬럼가에, 볼만한 것이 있을 리가 없었다. 어딜 가도 노숙자와 약쟁이 천지였고, 더럽고, 위험한 것들뿐이었다. 그에게 괜스레 시비를 걸려던 양아치는 그가 쏘아보는 눈빛에 움찔하며 물러섰고, 통행료를 받으려던 갱의 끄나풀은 그가 품에서 꺼내든 권총을 쭈뼛거리며 달아났다. 제이슨은 새삼 남자를 신기하게 쳐다보다가도,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걸음을 옮겼다.

그 망할 '투어'가 끝나고 제이슨이 남자를 올려다봤을 때, 남자는 지루해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제이슨은 그의 기분에 동감했다. 지루하고 끔찍한 곳이다. 새삼 자존심이 상할 것도 없었다. 그게 사실이니까.

"슬슬 정오가 지났군. 점심시간이네."

". 그러네요. 잘 가요, 아저씨."

제이슨은 남자에게 그렇게 쏘아붙이고 냉큼 몸을 돌렸다. 그러나 남자의 커다란 손이 불쑥 튀어나와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어딜 도망가려고 그래. 오늘 하루는 내가 샀어."

"안내만 해달라고 했잖아요."

"그래. 그러니까 안내해봐. 제일 가까운 식당으로. , 난 분명히 '식당'이라고 말했어. 술집이나 돼지우리 말고. 사람이 이용하는 식당."

"아저씨 재수 없다는 소리 많이 듣지 않아요?"

"아무렴 너만 할까."

 

그리고 찾아온 곳이 이곳이었다. 고담 중심은 아니지만 그래도 슬럼에 속한 지저분한 곳도 아니다. 이들은 매달 갱에게 자릿세를 바치지도 않고, 창고에 밀가루포대 대신 마약포대를 쌓아두지도 않는 곳이었다. 아마 그런 곳일 것이다. 제이슨은 그런 생각은 콜라와 함께 뱃속 저 아래로 밀어 넣었다.

남자는 점심 정도는 제가 살 테니 먹고 싶은 것은 전부 시키라며 큰 선심을 썼다. 제이슨은 그런 남자를 골탕 먹일 심산으로 메뉴판의 제일 꼭대기부터 아래까지 죽 훑어 내렸다. 그리고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순진한 표정을 지으며 남자를 쳐다보았다.

남자는 피식 웃더니 웨이터를 불렀다. 제이슨의 지저분한 행색과 남자의 사나운 인상을 보고 나가주십사 정중히 부탁해야하나, 하는 고민을 하고 있던 웨이터가 그들에게로 다가왔다. 남자는 제이슨의 손에서 메뉴판을 빼앗아 웨이터에게 건넸다.

"어린애가 먹을 수 있는 거라면 전부 하나씩 가져다주십시오. 그리고 음료수는.."

"콜라요."

"콜라랑 맥주 한 잔. 부탁드립니다."

웨이터는 예상 밖의 정중한 주문에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꾸벅 고개를 숙이고, 부리나케 자리를 떴다. 천천히 턱을 괴는 남자를 보며 제이슨은 입을 삐죽였다.

"어린애가 먹을 수 있는 음식은 또 뭐예요?"

"혹시 모르니까. 술이 들어갔다거나, 지나치게 맵다거나."

". 아직도 슬럼 태생이 얼마나 끈질긴지 모르시는군."

"그게 뭐 그렇게 자랑이라고 말끝마다 붙이면서 강조 하냐."

"난 이제 어른이 필요 없다는 말을 하는 거예요."

제이슨은 짐짓 턱을 쳐들며 당당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른이 필요 없어지면, 그때부터 어른이 되는 거죠. 난 이미 어른이라고요."

남자는 제이슨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손을 뻗어 냅킨을 집어 들었다. 그리곤 단단한 손끝으로 야무지게 구겨, 제이슨의 이마를 향해 던져버렸다. 소년의 이마에 뭉친 냅킨이 툭 맞고 테이블 위로 떨어졌다.

"뭐예요?"

"아니. 너 잘났다고."

콜라와 맥주가 가장 먼저 서빙 되고, 하나 둘 음식이 나오기 시작했다. 포크와 나이프, 스푼을 세팅하려는 직원에게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난 됐으니 저기만 놔주세요."

제이슨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남자를 보았다. 남자는 맥주잔을 입으로 가져가다말고 입술을 벙긋거렸다.

뭘 봐.

입모양을 읽은 제이슨은 얼굴을 팍 찡그리고, 포크를 들어 훈제 소시지 한 점을 푹 찍었다.

 

더 이상 먹을 수 없을 만큼 뱃속에 꽉꽉 채워 넣은 뒤, 제이슨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등받이에 몸을 기대는 것을 본 남자는 피식 웃으며 빈 맥주잔을 내려놓았다. 그는 웨이터를 불러 음식 값을 현금으로 계산하고, 자리를 조금 더 차지하고 있어도 되겠느냐 물었다. 웨이터는 곤란한 얼굴로 지배인을 돌아보았고, 지배인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하루를 통틀어 최대 매출을 올려준 손님의 작은 부탁쯤은 들어주지 못할 것도 없었다.

남자는 지갑을 꺼내 지폐 한 뭉치를 꺼내 내밀었다. 제이슨은 생전 본적도 없는 돈다발에 입을 떡 벌렸다. 남자는 제이슨을 향해 돈뭉치를 내밀었다. 프랭클린, 프랭클린, 그랜트, 또 프랭클린..

"뭐예요, 이건?"

"아까 그건 선금이라고 말했을 텐데."

"아니, 내가 뭘 했다고 이런 돈을 주느냐고요? 나 모르게 뭔가 한 거예요? 젠장, 난 마약거래 같은 건 끼어들기 싫다고요. 솜 대신 마약을 채운 봉제인형을 운반하는 짓 같은 건 사양이거든요."

"소설을 써라."

남자가 다시 냅킨을 집어 드는 것을 본 제이슨은 입을 꾹 다물고 지폐다발을 집어 들었다. 빳빳한 감촉이 느껴졌다. 혹시 위조지폐라서, 나한테 떠넘기고 도망치려는 것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 즈음이었다.

"제이슨."

제이슨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가, 눈을 깜빡였다.

"내 이름 가르쳐준 적 없었을 텐데."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아저씨 뭐예요? 진짜 수상한 사람이잖아."

"후우.."

남자는 제 미간을 문지르다가,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진중한 그 분위기에 덩달아 긴장한 제이슨이 자세를 고쳐 앉으려는 찰나였다.

"난 슈퍼휴먼이야."

".. ?"

"초능력을 가진 인간이라고. 난 누군가의 과거도, 미래도 훤히 알 수 있지."

제이슨은 눈을 깜빡였다. 분명히 헛소리일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마저도 단정하긴 어려웠다. 시종일관 시니컬하고 가볍던 상대의 어조가 지나치게 진지해졌기 때문이다. 제이슨이 그의 말을 믿을까 말까 고민하고 있는 사이, 남자는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널 불러 세운 건 너한테 꼭 해줘야할 충고가 있어서야. 그러니 내 말 잊어버리지 말고 꼭 기억하도록 해. 정말 중요한 충고니까."

"알았어요."

제이슨이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보고서도, 남자는 아랫입술을 한 번 핥았다. 입안이 마르는 모양으로, 시선이 이미 비어버린 맥주잔에 가 닿았다.

"머지않아 네 생에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 나타날 거다. 인정받고 싶고, 실망시키는 것이 두렵고, 언제까지나 따르면서 함께 있고 싶은 사람이 생길거야. 네 짧은 생을 통틀어서, 가장 행복한 시간을 줄 사람이지."

짧은 생. 그 단어가 귓가에 꽂히자 뒷목에 쭈뼛 소름이 돋았다. 내가 아직 어리니 그런 단어를 쓴 것이겠지만. 가히 좋게 들리는 단어는 아니었다.

"착한 아이가 되지 마."

제이슨은 그의 말에 눈을 깜빡였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남자는 별다른 설명 없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의 말을 듣지 말고, 대들고, 사고를 쳐라. 그가 널 좋아할 수 없게 만들어. 미움 받는 사람이 되는 거다. 그건 우리가 가장 잘 하는 일이니까."

제이슨이 입술을 달싹이자 남자는 손을 들어 소년의 말을 막았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제이슨에게로 다가갔다. 그의 머리를 손으로 꾹 누르고 거칠게 쓰다듬었다. 머리가 헝클어졌지만 제이슨은 그에게 불평하지 않았다. 남자의 분위기가 조금 전과는 또다시 달라진 것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에.

"네가 언제 떠나더라도, 그가 상처받지 않을 수 있도록. 철저하게 미운 아이가 되는 거다. 이 돈은 그것에 대한 돈이야. 말하자면 이것도 선불이 되는 셈이지. 알아들었어?"

남자는 단단한 손은 크고, 뜨거웠다. 제이슨은 목구멍까지 차올랐던 말을 꿀꺽 삼키고 얌전히 그러겠다 대답했다.

"네가 정말 나쁜 아이가 되거든, 내가 다시 돌아와서 더 큰 돈을 주지. 잊지 마. 그 사람은 곧 찾아올거다. 네가 그를 정말 좋아한다는 확신이 들거든, 꼭 나쁜 아이가 되어야 해."

그의 머리를 누르던 압박이 사라졌다. 제이슨은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만지며 투덜거리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내가 바보인줄 알아요? 했던 말을 몇 번이나 반복하는 거야. 그런데 아저씨, 방금 우리라고..?"

그러나 그의 눈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제이슨은 의자에서 벌떡 몸을 일으켜 주변을 빠르게 둘러보았다. 그러나 식당 안에도, 식당의 유리창 밖으로 보이는 거리에서도 남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소년은 급히 식당 밖으로 뛰쳐나왔다. 종업원들의 상냥한 작별인사를 들은 체 만 체하고, 아무 방향이나 골라잡아 달려보았다.

그러나 머릿속으로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 남자는 아마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식사를 마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시작된 달음박질 탓에 옆구리가 심하게 아팠다. 제이슨은 결국 뜀박질을 멈추고 숨을 몰아쉬었다.

숨이 가라앉자, 그는 습관적으로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문득 낯선 종이의 질감이 느껴졌다. 그것을 잡아 주머니 밖으로 빼내자, 또다시 프랭클린과 눈이 마주쳤다.

오늘 처음 본 아이에게 950달러를 턱하니 내어준 그 남자의 정체는,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었다. 거기다 음식도 사줬지. 슬럼 투어라는 웃기지도 않은 핑계까지 대면서.

". 알게 뭐람."

나쁜 아이가 되라고 했다. 스스로 생각해봐도, 자신은 이미 바르고 착한 아이는 아니었다. 누군가에게 미움을 받는 것쯤은 못할 일도 아니었다. 그에겐 시시껄렁하고 한심한 애정보단 당장 손에 떨어진 100달러짜리 지폐가 훨씬 가치 있었다.

"까짓것 해주지, ."

제이슨은 지폐를 접어 주머니에 꾹 찔러 넣었다. 소년의 혼잣말에 신경을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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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런빔 맞고 어려진 제이슨 망상글

***

대도시의 밤하늘에 별이 보이지 않는 것은 새삼스러울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제이슨은 웨인 저택의 지붕 위에 올라앉아, 밤하늘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열다섯 살 소년이 입을 기성복을 준비하는 일 따위가 웨인에게 문제가 될리는 없었다. 그러나 최고의 옷감으로 만든 고급 브랜드의 의상이더라도, 한밤중의 냉기가 스멀스멀 스며오는 것은 막을 수가 없었다.

제이슨은 입가에 가져갔던 손을 내렸다. 입술 밖으로 하얀 연기가 흩어졌다. 청소년의 흡연이 결코 바람직한 일은 아니었으나, 제이슨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손가락을 가볍게 털어 재를 떨어트린다. 바람에 실려 가는 잿가루를 눈에 담기엔 너무나 어두웠다. 달빛뿐인 밤은 어둡고 추웠다.

"알프레드가 반기지는 않을 것 같구나."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가 어쩐지 지쳐있다고 생각했다. 그래, 지쳤겠지. 밤새 도시를 누비고 다니는 일은 적지 않은 체력을 잡아먹는다. 제이슨은 속으로 혀를 차며 다시 한 번 담배를 입에 물었다.

"저택의 지붕까지 청소하기에 적당한 나이는 아니니까 말이다."

"그래서 어쩌라고요?"

제이슨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목소리와 함께 연기가 다시 한 번 흩어진다. 냉기에 가늘게 떨리는 어깨는 생리적인 현상이기에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제이슨은 몸을 웅크리지 않았다.

"내가 당신 자식이기라도 해요? 웃기지 말아요, 나는 웨인이 아니니까. 나한테 알프레드의 편의를 봐줄 의무 같은 건 없거든요."

"제이슨."

"내가 언제부터 그렇게 착한 아이였다고."

제이슨은 브루스가 자신에게 다가오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다가올리 없다. 다가올 필요도 없고. 제이슨은 다시 담배를 물었다. 사실 여기에 남아있을 필요도 없을 것 같은데. 자신이 무엇을 바라고 이 빌어먹을 저택에 발을 붙이고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딕이 붙잡아서? 웃기지도 않은 헛소리였다. 누군가의 부탁 따위는 자신이 알 바 아니다. 제이슨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 내가 언제부터 그렇게 착한 아이였다고.

제이슨은 몸을 일으키며 담배를 툭 떨어트렸다. 꽁초를 신발로 비벼 끄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브루스를 향해 몸을 돌렸고, 정말로 오랜만에 그를 올려다본다고 생각했다. 옅은 하늘색 셔츠와 검은 스웨터를 입은 브루스가 몇 걸음 떨어진 자리에서 가라앉은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이슨은 기억 속의 시선과 지금의 시선이 겹치는 것을 느꼈다. 그는 언제나 커다란 사람이었고, 아득하게 어른이었다. 다만 지금 눈앞에 보이는 얼굴은 그때보다 지쳐있었고, 나이를 먹었다.

"자타나에게 도움을 구했다. 그녀가 해결할 수 없으면 다른 방법을 찾아보마. 일단 자세한 상태를 알아야하니 나중에 동굴로.."

"천하의 배트맨이 도움이라니 별일이네요. 내가 쪼그라든 게 당신에겐 그렇게 급한 문제란 말이죠?"

밤바람이 불어와 소년의 머리를 헝클었다. 오랫동안 차게 식은 뺨에 닿는 바람이 칼날처럼 느껴졌다. 바람에 베여 보이지 않는 피가 흐를 테다. 비단 뺨 뿐만이 아니더라도.

"그래요, 빨리 당신의 눈앞에서 치워버리고 싶겠죠. 이따위 모습. 꼴도 보기 싫겠죠."

소년의 입매가 비틀린다. 그 어느 때보다도 잔인하고 지친 표정을 짓는다. 브루스는 여전히 가라앉은 푸른 눈빛으로 그런 제이슨을 조용히 바라보기만 했다.

"그런데 어떡하죠? 난 갑자기 이 모습이 좋아지기 시작해버렸는데요. 당신이 어떤 표정을 짓는지 보고나니까 즐거워서 견딜 수가 없네요. 이 작은 몸집을 보니 다시 떠올라요? 당신의 실수가 다시 떠오르는 모양이지요? 당장에 동굴로 내려가서 내 옷을 다시 입을까봐요. 어차피 내 물건이었으니까, 당신이 그걸 막을 권리는 없어요. 그렇죠?"

소년의 목소리가 점차 격해진다. 자신의 감정에 휩쓸린다. 악을 쓰며 상처 입힌다. 상대의 마음을 너무나 잘 알고있음에도, 그가 어떤 사람인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무슨 감정을 느끼고 있을 지 너무나 잘 알고 있음에도, 그것이 다 무슨 소용이랴.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게 아닌데. 그래, 자신이 그를 신경써줄 의무는 없는 것이다. 그가 자신에게 있어 대체 뭐라고?

그렇지만 만약에 그가 다가온다면.

그가 다가올 리 없다는 걸 알지만, 만약에 그가 자신에게 다가온다면.

제이슨은 문득 그런 생각을 떠올리고 입을 다물었다. 뒷덜미가 오싹했다. 만일 그가 다가온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곳은 거대한 저택의 지붕이다. 평소라면 이 높이에서 뛰어내린다고 다치지야 않았겠지만, 지금의 그는 아직 작아진 몸에 제대로 적응조차 하지 못한 상태다. 어쩌면 크게 다치는 것만으론 끝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 정말로 죽을 수도..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제이슨은 문득 온몸을 떨었다. 그의 눈앞에서 다시 한 번 죽는다는 생각에 눈앞이 아찔했다. 두려움인지 흥분인지 모를 감정으로 마음이 불안정해졌다. 딱히 힘든 일은 아니었다. 그는 되살아난 이후로 늘 들끓는 감정 속에서 지내왔으므로. 단지 아까 전부터 추위에 떨고있던 어린 몸이 고마울 따름이었다. 아무리 브루스라도, 방금 전의 새로운 떨림을 눈치채진 못했을 것이므로.

제이슨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애써 억누르며 브루스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멋대로 뻗어나가는 상상과, 그곳에서 스며 나오는 감정과, 작아진 몸 만큼 줄어든 폐활량으로 숨이 가빴다.

그러나 그는 알고 있었다. 브루스는 자신에게 더 이상 다가오지 않을 것을. 아마 저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알프레드가 잠자리를 봐둘거다. 가서 식사나 좀 하려무나."

애초에 바라지도 않았어. 그래, 내가 언제부터 그렇게 착한 아이였다고.

"마음이 복잡한 것 같지만 나쁘진.. 않은 모양이더구나. 팟 로스트를 만들고 있다. 네가 제일 좋아하던 음식이라면서."

제이슨은 애꿎은 꽁초만 자근자근 지르밟았다. 불씨는 이미 꺼진지 오래인데도.

"제이슨."

제이슨은 브루스의 부름에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바람에 차게 식은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듣지 않겠다는 듯 눈을 감았다. 브루스는 그런 제이슨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조용히 몸을 돌렸다. 떠나가는 그의 발소리가 들렸다.

"..씨발."

제이슨은 조용히 중얼거렸다. 소년의 욕설은 연기처럼 밤하늘 속으로 흩어졌다. 여전히 별빛 하나 보이지 않는 밤하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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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런빔 맞고 15살로 어려진 제이슨 망상글

***

"."

데미안이 진심으로 구역질이 난다는 듯 혀를 빼물었다. 딕은 그런 데미안을 나무라며 억지로 의자에 앉혔다. 배트컴퓨터에 걸터앉은 제이슨은 그런 데미안을 노려보며 인상을 구겼다.

", 꼬맹아. 싸우자고?"

평소와 다름없는 말투였으나 위압감은 반절 이하였다. 높아진 목소리가 어색해서, 제이슨은 다시 한 번 얼굴을 찡그렸다. 담요 바깥으로 드러난 맨다리가 서늘해서, 제이슨은 무릎을 가슴에 닿을 정도로 끌어올리고 담요로 완전히 덮어버렸다.

"씨발."

"욕하면 못써, 제이슨."

". 내가 진짜 꼬맹이라도 된 줄 알아? 너까지 헛소리 하진 말라고, 디키버드."

", 미안. 나도 모르게."

유아퇴행이라는 것은 그다지 놀랄만한 것도 아니었다. 수도 없이 많은 사례가 보고되고 있는 심리학 관련의 문제일 따름이었다. 아니면 정신 질환 관련이었나. 그딴 거야 어찌되든 상관 없었다. 그러나 그것이 정신적인 문제가 아니라, 신체적인 문제로 나타난다면 말이 달라지는 법이다.

열다섯의 제이슨은, 지금에 비해선 상당히 왜소한 체격이었다. 크기만 한 바디아머는 오히려 짐짝이었다. 그래, 때마침 함께 있던(물론 평화롭게 맥주나 한 잔 마시며 담소를 나누고 있지는 않았다) 나이트윙 덕분에 위험에 빠지는 일은 없었다. 어려진 자신에게 달려들던 빌런들을 깡그리 때려눕혀준 것 까지는 좋았다. 그래, 거기에서 그쳤으면 정말로 좋았으련만. 어디 이 집 식구들이 저 좋은 일을 하는 꼴을 본 적이 있던가.

본인을 그대로 들쳐 업고 이 망할 동굴까지 쌩하니 달려오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곧 죽어도 저택으로는 올라가지 않겠다는 제이슨의 고집 때문에, 너무 커서 부담스럽기만 한 바디아머를 벗기고 푹신한 담요를 둘둘 감아줬다. 아머 안에 받쳐 입은 티셔츠 한 장이 이렇게 고마울 수 있다는 것에 제이슨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 나이를 먹고 남들 앞에 알몸뚱이를 드러낼 수는 없는 법이다.

딕은 놀라긴 했지만 당황보단 흥분으로 눈을 반짝이고 있는 것이 뻔히 보였다. 제이슨은 평소보다 낮아진 눈높이에 적응해보려 애쓰면서(딕의 얼굴을 올려다봐야 하는 것이 영 마뜩찮았다) 투덜거렸다. 좋냐? 좋아? 이런 모양새가 퍽이나 재밌는 모양이야?

결국 참지 못하고 머리를 쓰다듬으려 슬금슬금 다가오는 손을 매몰차게 쳐내면서, 제이슨은 걸터앉아있던 컴퓨터에서 뛰어내리려 다리를 흔들었다.

"갈 거야."

"? 어디로?"

"어디가 됐든, 다른 놈들한테 이딴 꼬락서니 더 보이기 전에 어디든 가버릴 거라고."

"하지만 여긴 고담이야, 제이슨. 거기다 지금은 한밤중이라고."

"누가 그걸 몰라? 죽기 전에도 시시껄렁한 불량배한테 걸려서 납치라도 당할 만큼 한심한 로빈은 아니었어."

그러나 딕은 재빨리 다가와 제이슨의 어깨를 꾹 눌러 앉혔다. 그런 딕의 뒤에서, 데미안이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

"조커의 손에 맞아죽을 만큼 멍청한 로빈이긴 했지."

"데미안!"

딕이 흠칫 놀라며 데미안을 돌아보았다. 그의 이름을 부르는 얼굴은 엄했고, 제이슨의 어깨를 잡은 손에는 힘이 들어가 있었다. 제이슨은 불만이 가득한 데미안의 얼굴과, 턱선만 보이는 딕의 얼굴을 번갈아 보다가 제 어깨에 올라온 손을 툭 털어냈다.

"뭘 네가 화를 내고 그래?"

제이슨은 아래로 늘어트렸던 다리를 다시 끌어올렸다. 손으로 담요를 꾹꾹 잡아당겨 발목까지 가려버린 제이슨은, 문득 느껴지는 피곤함에 늘어져라 하품을 했다.

"제이슨. 졸려?"

자신에게 물어오는 딕의 다정한 목소리를 들은 제이슨은 무심코 대답을 하려다가, 문득 어깨를 부르르 떨며 딕을 쏘아보았다.

"보모 노릇 할 생각은 꿈도 꾸지 마라. 소름 돋는다고."

"하하, 들켰네."

"그런 건 네 병아리한테나 해. 저기서 두 눈 시퍼렇게 뜨고 나를.."

딕의 어깨 너머를 보기 위해선 목을 쭉 빼야만 했다. 불안정한 자세로도 중심을 잡으며 딕의 어깨 너머를 기웃거리던 제이슨은 의아한 표정이 되어 눈을 깜빡였다. 여전히 퉁명스럽긴 하지만, 평소의 그보다 선명한 표정의 변화에 딕은 속으로만 웃었다. 입 밖으로 감상을 내었다간 정강이를 한 대 걷어차이는 걸로는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 어디 갔지?"

제이슨의 중얼거림에 딕은 뒤를 돌아보았다. 의자에 팔짱을 끼고 앉아 제이슨에게 눈을 부라리고 있을 줄 알았던 데미안은 자리에 없었다. 딕은 무심코 저택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보며 대답했다.

"저택으로 올라갔나?"

***

"잠깐만, 제이슨!"

", 멍청아. 갈 거라고!"

"옷도 제대로 안 입고 어딜 간다는 거야! 갑자기 왜 그래?"

소년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동굴 안을 울렸다. 그에 답하는 청년의 목소리엔 당황스러움이 흠뻑 묻어났다. 딕은 제이슨의 손목을 붙잡은 채 놔주지 않았고, 열다섯 소년이 아무리 날뛰어도 성인 남성의 악력을 쉽게 뿌리칠 수는 없었다.

"곧 알피가 내려올 거고, 브루스도 돌아올 거야. 일단 문제가 없는지 검사를 해보고, 같이 해결 방법을 찾아봐야지. 넌 지금 아무리 많이 잡아도 팀이랑 비슷한 또래로밖에 안보여. 계속 이런 모습으로 있을 수는.."

"그러니까 일단 좀 놓으라고!"

"놓으면 바로 도망갈 것 아냐!"

데미안이 저택으로 올라갔다는 확신이 든 순간, 제이슨은 자리를 박차며 동굴 밖으로 뛰쳐나가려 했다. 그러나 어려진 몸에 적응하지 못한 그는 바닥에 제대로 착지하지 못해 두어 바퀴를 굴렀고, 접지른 발목이 시큰거림을 느꼈다. 하지만 발목의 고통은 느끼지도 못하는 듯, 그대로 다시 몸을 일으켜 뛰쳐나가려는 제이슨을 딕이 간발의 차이로 붙잡았다.

제이슨은 눈에 띄게 당황한 모습이었고, 딕은 그런 제이슨이 의아하면서도 걱정스러웠다. 제이슨은 막무가내였고, 그런 제이슨을 붙잡은 딕 역시 고집을 부렸다. 성인의 헐렁한 셔츠 한 장 위로 담요 한 장을 휘감은 열다섯 소년. 고담이 딱 좋아할만한 먹잇감이다. 그가 평범한 삼류 악당에게 호락호락하게 당할 소년은 아니었지만, 조금 전에도 어이없이 바닥에 뒹구는 모습을 보았다.

딱히 밤의 고담이 위험하기 때문만도 아니었다. 마법은 그들의 전문 분야가 아니었고, 제이슨이 노출된 마법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적어도 그들에게 가장 안전한 곳은 이 동굴이다. 그의 안전이 확인되기 전 까지는, 어떤 수를 써서라도 제이슨을 동굴 안에 잡아둘 생각이었다.

"도망갈 필요 없어, 제이슨. 여기 있어도 돼. 팀은 오늘 밤엔 오지 않을 거야. 이제 동굴로 돌아올 사람은 알프레드와 브루스밖에 없단 말이야. 물론 네가 브루스를 만나는 걸 반기지 않을 수도 있지만.."

"멍청한 딕 그레이슨. 정말 모르겠냐? 내 꼴을 봐. 내 꼴을 좀 보라고. 그가 나를 보고 너처럼 아무 생각 없이 실실 웃을 것 같아? 진짜 모르겠어?"

소년은 악을 썼다. 분노보단 절박함이었다. 딕이 그의 사나운 기세에 멈칫했다가 다시 입술을 달싹였을 때, 등 뒤에서 누구보다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이슨 도련님?"

"..망할."

노집사는 잠시 딕의 존재를 잊은 것처럼 제이슨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제이슨은 고개를 돌리며 딕의 손을 쳐냈다. 그가 동굴을 벗어날 마음을 버렸음을 느낀 딕은 이번엔 순순히 손을 놔주었다.

동굴 안에 잠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어둠 속에서 박쥐의 날갯짓 소리가 간간히 들려왔다. 동굴 안을 휘감고 지나가는 바람 소리도 들렸다. 집사의 시선에 담요 아래로 드러난 제이슨의 맨발이 들어왔다. 차가운 동굴의 온도 탓에 발바닥이 붉게 물들어있었다.

"옷을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제이슨 도련님."

언제나처럼 의연하고 부드러운 대처였다. 내리깐 그의 눈빛이 과연 흔들렸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제이슨은 알프레드를 잠시 올려다보다가 딕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멍청이."

소년의 목소리에 체념이 묻어났다. 소년의 차분한 반응에, 딕은 문득 어딘가에 생각이 닿았다. 지금의 제이슨이 몇 살 때의 모습을 하고있는지, 딕은 너무나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열다섯.

그가 제이슨의 나이를 정확히 떠올릴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과거에 어떤 모습이었는지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제이슨이 로빈으로 있었던 기간은 너무나 짧았고, 딕은 그가 언제 죽었는지를 알고 있었다. 열다섯.

그가 제이슨의 나이를 정확히 떠올릴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가진 마지막 기억 속의 모습과 똑같았기 때문이다. 열다섯의 제이슨.

"제이슨.."

딕의 부름에도 제이슨은 단호하게 몸을 돌렸다. 아직 적응하지 못한 어린 몸으로,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기는 소년은 그에게서 빠르게 멀어졌다. 알프레드는 딕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제이슨의 뒤를 따라 저택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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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 코너가 죽고>배트맨이 죽고>팀이 레드로빈이 되어서>라스 알 굴에게 협력중일 때>코너가 부활해서>그 소식을 들었다 <-이런 내용 베이스로 망상글..

***

라스의 군대는 모두가 암살자였고, 열 몇살 먹은 어린 소년의 목 하나쯤은 쉽게 잘라낼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런 암살자들이 단 한 명의 소년 앞에서 무력하게 쓰러지고, 나가떨어지고, 무릎을 꿇었다. 우스운 일이었지만, 농담은 아니었다. 그 소년이, 철의 남자와 같은 이름을 공유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상기하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건장한 성인 남성을 너무나 손쉽게 집어던지고, 달려드는 세 사람은 하늘로 훌쩍 날아올라 피해버린다. 칼날을 잡아 우그러트려도 자상은 남지 않았다. 그의 등을 노리고 뛰어오른 자는, 망토를 두른 하얀 개가 옷자락을 물어 멀찍이 끌고가 던져버렸다.

"그만."

등 뒤에서 흉측한 목소리가 들려왔을 때, 코너는 여유롭게 뒤를 돌아보았다. 기괴하게 일그러진 얼굴을 한 유령 같은 사내가 걸어나오고 있었다.

", 그래. 다음 문지기는 당신인가?"

"그분이 너를 직접 보고자 하신다."

유령사내(코너는 그를 줄여서 이렇게 부르기로 마음먹었다)는 코너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코너는 더 이상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휘적 뒤돌아 멀어지는 그의 몸놀림이, 커다란 지네로부터 서둘러 멀어지려는 모양새와 제법 닮았다고 생각했다.

"가자. 크립토. 여차하면 그 늙은이 발치에 실례 해버려도 좋아."

나도 너 마음에 안 들거든.

! 그의 말을 알아들은 양 대답하는 크립토의 목덜미를 쓰다듬으며 코너는 땅에 두 발을 디뎠다. 그의 말을 들은 유령사내가 신경질적으로 뒤를 돌아보며 그를 쏘아봤지만, 그는 어서 앞장서라는 듯 까딱 고갯짓을 했을 따름이었다.

***

"인사가 화려하더군. 코너 켄트."

"선물도 없이 빈손으로 와버려서 말이야. 급하게 마련한 깜짝 선물이었는데 마음에 들었을지 모르겠네."

빈정거리는 코너의 말투를 들었음에도 라스 알 굴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의자에 기대앉은 거만한 자세 그대로, 눈썹을 미세하게 한 번 꿈틀했을 뿐이었다. 재수 없는 늙은이. 그에게 뭐라고 속삭여 꾀어냈을까. 코너는 이를 악물었다. 생각만 해도 이가 갈릴만큼 분했다.

죽음으로부터 돌아 왔을 때, 가장 놀라운 사실 중 하나는 배트맨이 죽었다는 것이었다. 나이트윙이 그의 자리를 물려받았다는 것은 새삼스럽게 놀랄 일도 아니었으나, 로빈이 티모시 웨인이 아니라는 것에는 놀랐다. 데미안 웨인이 로빈 자리를 꿰차고 있다는 사실에는 분노했고, 팀이 제이슨이 입었던 레드로빈의 코스튬을 선택했다는 사실은 안쓰러웠으며, 그리고 그가 지금 누구와 함께 있는지를 알게 되었을 때에는 기절할 뻔 했다.

두 사람은 가장 친한 친구였지만, 코너는 그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을 거라는 사실을 알았다. 고담은 어둡고 일그러진 도시였다. 슈퍼맨도, 자신도, 그 누구도 고담을 지키는 영웅들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들을 이해할 수 있는 이들은 그들 스스로 뿐이었다.

그러나 코너는 팀이 얼마나 자경단의 일에 집착하는지를 알고 있었다. 그가 점점 편집증적인 모습을 보이며 배트맨을 닮아가고 있다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 친부를 잃은 뒤로 그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그는 일부나마 알고있었다. 팀이 배트맨 마저 잃었을 때, 어떤 기분이었을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매우 끔찍했으리라는 예상을 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라스 알 굴은 악마라고 했다. 팀에게서 로빈 자리를 빼앗아간 그 꼬마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그런 꼬맹이는 악마의 자식인 것이 분명했으니까. 그래, 그 새끼 악마가 쫓아낸 내 로빈을 늙은 악마가 꼬드겨서 날름 삼켜버렸단 말이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코너는 이를 악물었다. 어떤 위협이 있더라도 그의 로빈을 찾아와야 했다.

"내 로빈을 돌려받으러 왔다, 라스 알 굴."

"너의 로빈이라고?"

라스 알 굴은 깍지 낀 손을 풀어 의자의 팔걸이에 걸었다. 동시에 썩 유쾌한 듯 보이는 웃음을 터트렸다. 코너는 그런 라스를 똑바로 바라보며 얼굴을 찡그렸다. 재수 없기는 제 손자랑 똑 닮았다. 누가 혈육 아니랄까봐.

"내가 설마 티모시를 붙잡아 새장에 가둬두기라도 했다고 생각하고 있는 건가."

"아니면 인질을 잡고 있을 수도 있고, 무슨 짓을 해놨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고서야 팀이 너 같은 악마와 손을 잡고 있을 리가 없어."

라스 알 굴의 표정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자신의 곁을 지키고 서있는 예의 유령사내에게 고개를 돌렸다.

"가서 탐정을 데려와라."

"그럴 필요 없어, 라스."

코너는 자신의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반색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열린 문에 비스듬히 기대선 팀이 서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팀으로 보이는 인물이 서있었다. 온통 검은색과 붉은색의 무거운 가죽 코스튬을 입은 팀은 너무나 낯설었다. 얼굴의 절반을 덮어버린 검은 카울이 너무나 낯설었다.

"?"

"어린애처럼 하나하나 챙겨주지 않아도 내가 해야 하는 일 정도는 알아."

코너의 부름에도 팀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는 라스 알 굴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고, 그에게 말을 건네는 목소리는 건조했다. 일말의 혐오마저 담긴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사실에 코너는 안심했다. 팀 역시 라스와 협력하는 일을 달가워하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이제 그를 데리고 돌아갈 것이다. 고담으로 데려가서, 그 망할 꼬마 로빈 앞에 데려다 놓고 싶었다. 어쨌든 자신이 인정하는 로빈은, 티모시 웨인 한 사람 뿐이라고.

"아무렴. 그렇겠지, 티모시."

"오랜만이야. 코너."

이번엔 라스 알 굴의 말을 무시하며 코너에게로 시선을 돌린다. 라스의 곁에 서있는 유령사내가 발끈했으나 라스의 눈치를 보며 분을 삭이는 모습을 본 코너는 아주 조금 유쾌한 기분이 되었다. 그는 라스의 앞에서 휘적 몸을 돌리며 문가에 서있는 팀에게로 다가갔다.

"데리러 왔어, 버디. 같이 가자."

"코너."

카울 아래로 보이는 입매가 딱딱하게 굳어있다. 팀의 얼굴에 어울리는 표정이 아니다. 코너는 그의 표정을 보며 다가가던 걸음을 잠시 멈췄다. 팀의 얼굴 위에선 처음 보는 표정 같은데, 낯선 표정은 아니다. 그러니까, , 배트맨. 배트맨 같은 입매다.

"내 선택이야."

"?"

"난 내 의지로 라스를 선택했어. 타협해버렸지."

"그게 무슨 소리야, ? 넌 로빈이야. 로빈은.."

"난 이제 로빈이 아니야. 로빈은 데미안이지. 그게 바로 배트맨의 선택이고."

팀은 비스듬히 기대서있던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묵직하고 검은 망토가 흔들리며 늘어졌다.

"난 레드로빈이야."

".."

"돌아가."

팀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두 사람을 보고 있는 라스 알 굴을 흘끗 보았다. 카울 아래 가려진 눈동자에 경멸의 빛이 어렸다.

"바깥까진 바래다 줄 테니까."

냉담히 등을 돌리는 그의 몸짓을 따라, 검은 망토가 크게 펄럭였다.

***

". 그게 무슨 소리야."

"넌 이해 못 해, 코너. 절대로 이해 할 수 없을 거야."

"그래, 이해 못해. 그렇다고 쳐. 하지만 널 도울 수는 있을 거야. 돌아가자, . 저 악마 대신 내가 널 도울 수 있어."

바람이 불었다. 그 바람을 따라 망토가 펄럭였다. 코너는 어렵지 않게 바닥 위로 마른 모래가 굴러가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었다. 상대의 심장 소리를 듣는 것도 별반 다를 것 없었다.

팀은 거짓말을 잘했다. 자신이 그것을 좋아하느냐의 문제는 별개로, 늘 누군가에게는 거짓말을 해왔다. 자신이 로빈임을 들키지 않기 위해 아버지에게 거짓말을 했고, 그들을 가로막는 어른들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거짓말을 하기도 했다. 난 배트맨에게도 거짓말을 해. 언젠가의 기억 속에 묻어있는 말이었다.

그렇기에 코너는, 지금도 팀이 거짓말을 하는 것이기를 바랐다. 당장 라스 알 굴에게서 벗어날 방도가 없어서, 기회를 보기 위해 코너를 돌려보내려는 것이라고. 슈퍼보이 혼자만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을 만큼 커다라고 지독한 함정이 기다리고 있어서. 팀은 똑똑하니까. 라스 알 굴에게 커다란 '선물'을 떠넘기고 요령 좋게 도망칠 기회를 노리고 있을 뿐이기를.

그러나 애석하게도, 코너는 팀을 매우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수도 없이 거짓말을 입에 담아온 그가, 지금만큼은 결코 의심할 수 없는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타협한 것이다. 정말로. 라스 알 굴을 선택했다. 그의 로빈이.

"코너."

팀의 목소리를 듣고, 코너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음을 알아챘다. 코너가 천천히 시선을 들어 올려 눈을 마주치자, 팀은 같은 속도로 손을 들어올려 카울을 벗었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 그곳에 있었다. 무척 그리워하고, 보고 싶었던 얼굴이. 조금 야윈 것이 보인다. 수척해졌다. 그 수척함이, 단순한 피곤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 것이다.

"배트맨은 살아있어."

"."

"딕을 말하는 게 아니야. 브루스. 브루스는 살아있어."

코너는 대답하지 않았다. 확신에 찬 고집스러운 눈동자는 잔잔한 푸른색이었다. 그의 눈동자 안에서 어떠한 광기의 징조를 읽을 수 없다는 사실에, 코너는 어떤 기분을 느껴야 하는지 혼란스러워졌다.

두 사람 사이의 침묵을 깬 것은, 예상 밖으로 팀의 옅은 웃음소리였다.

"너도 지금 내가 미쳤다고 생각하고 있지?"

"... 넌 지금.."

"알아, 코너. 그 누구도 내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이유를 알아. 모든 사람이 내가 미쳤다고 생각하고, 어리석다고 생각하고, 내 말을 헛소리라고 치부하는 이유를 알아. 하지만 그렇다고 그만둘 수는 없어. 포기할 수도 없어. 나는, 브루스를."

팀은 무심코 신발 뒤축으로 땅을 비볐다. 흙이 뭉그러지는 소리가 코너의 귀에 선명하게 들려왔다.

"절대로, 포기해선 안 돼."

코너는 손을 뻗었다. 팀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자신에 비해 왜소한 체격이던 팀의 어깨가, 기억 속의 그것보다 조금 더 야윈 것 같았다. 그가 이토록 한계까지 내몰린 이유들 사이에는, 자신과 바트의 죽음도 포함되었을 것이다. 그래, 그는 배트맨과 다르니까. 그와 똑같은 표정을 지을 수 있을 정도로 스스로를 한계로 내몰고 있어도, 어쨌든 그는 배트맨과 다르다. 적어도 그에겐.. 친구가 있지.

"아무도 날 도와주려 하지 않아. 날 이해조차 하려고 들지 않지. 하지만 나 혼자서 브루스를 찾아낼 수는 없어. 그러기엔 내 능력이 너무나 부족해. 지금 날 돕는 건.. 내 생각에 동조하고, 날 지원해주는 건 이 세상에 딱 한 사람뿐이니까. 네 말대로 악마같은 라스 알 굴. 딱 저 한 사람 뿐이니까."

그래, 친구. 친구가 있었다. 자신과, 바트, 그리고 틴 타이탄의 다른 아이들이라던지. 그러나 지금 그의 곁엔 누가 있지? 라스 알 굴?

코너는 조금 전, 라스 알 굴의 앞에서 보았던 팀의 입매를 떠올렸다. 배트맨을 닮았던 그 입매. 점점 일그러져가는 그의 로빈. 가슴이 답답하고 안타까웠다. 그가 애달팠다.

"난 라스를 떠날 수 없어, 코너. 브루스에 대한 작은 실마리 하나라도 찾아내기 전엔 절대로. 지금은 어쌔신 리그가 내 눈과 귀야. 그들이 내 오라클이야. 그리고 라스가 내.."

팀의 표정이 문득 흐려졌다. 그는 재빨리 손을 올려 카울을 뒤집어썼다. 그리고 나서도 아랫입술을 깨물며 숨을 한 번 삼켰다. 말을 고른 뒤 흘러나온 목소리는 가라앉아 있었다.

"라스가 내 새로운 알프레드야."

팀은 여전히 자신의 어깨를 잡고 있던 코너의 손을 밀어냈다. 완력으로 결코 이길 수 없는 상대임에도, 코너는 순순히 손을 거뒀다. 팀의 얼굴은 다시 검은 카울로 절반을 가려버렸으나, 코너는 그 카울 위로 선명히 떠오른 우울함을 읽을 수 있었다.

"타협해버린 로빈에게는 딱 어울리는 집사지."

"."

크립토가 다가와 코너의 다리에 머리를 비볐다. 이 똑똑한 개는, 슬슬 떠나야할 시간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코너는 푸른 눈동자로, 팀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난 너를 믿어, ."

몸을 돌리려던 팀이 멈칫하며 코너를 보았다. 흔들림 없는 우직한 눈빛이었다. 늘 그랬다. 코너는 늘 그랬다. 커다랗고 굵은 기둥처럼, 늘 강했다.

"이 세상 모두가 널 부정해도, 설사 네가 너 스스로를 부정하더라도, 넌 로빈이야. 나한텐 네가 로빈이야. 내게 진짜 로빈은 너밖에 없어, ."

팀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코너는 그가 일부러 소리 내어 말하지 않더라도 그의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심장소리. 너무나도 선명하게 들려오는 심장 소리가 있었다.

"그리고 난 로빈을 믿어."

"..코너, .."

팀은 급히 그를 불렀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숨과 침을 함께 삼키며 움직이는 목울대는 카울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팀은 천천히 시선을 떨어트렸다. 상대의 시선을 받아내기가 벅찼다. 참으로 오랜만에 느끼는 기분이었고, 생경해서 힘겨운 감각이었다.

"..브루스는 살아있어."

그렇게 말하면서도, 팀은 목이 메는 것을 애써 참았다. 들키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숨을 내쉬었지만, 상대는 고담의 수많은 소음 사이에서도 자신의 목소리를 알아듣는 친구였다. 과연 숨길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행운을 빌어, 로빈."

훌쩍 떠올라, 지평선 너머로 멀어져간다. 팀은 멀어져가는 슈퍼보이의 모습을 새삼 돌아보지 않았다.

"잘 가, 코너."

중얼거림에 가까운 인사는 듣는 이도 없이 허공으로 흩어졌다. 그가 이 작은 목소리까지 들었을지, 귓가를 빠르게 스쳐지나가는 매서운 바람소리를 뚫고 자신의 작은 목소리가 그에게 가서 닿았을지, 그는 자신할 수 없었다. 차라리 닿지 않았기를 바랐다.

팀은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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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초능력, 마법, 외계인, 그 밖의 모든 불가사의한 것들은 언제나 그들을 괴롭혀왔다. 그들이 아무런 능력도 타고나지 못한 평범한 인간들이라는 것은, 그들의 적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박쥐에게서 파생된 이들은, 고담의 어둠 속에서 태어난 이들은 지나치게 뛰어난 인물들이었지만, 미지의 것은 늘 벅찼다.

극도의 훈련을 거쳐 남들보다 '조금' 뛰어난 체술, 막대한 자본을 바탕으로 이뤄낸 몇 가지 오버테크놀로지, 뛰어난 탐정술과 논리적인 전략, 끔찍한 고난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강인한 의지 등등. 한낱 인간이 불과한 그들이 초능력자와 외계인 못지않은, 어쩌면 그들보다도 높은 승률과 강인함을 자랑하는 이유는 상당히 많았다. 그중에는 그들이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은 가족이었고, 같은 뿌리에서 뻗어 나온 가지였다. 사이가 좋지 않더라도, 매번 반목하더라도 서로의 위험에 민감했고, 도움이 필요할 땐 돕기도 했다. 같은 피라곤 한 방울도 흐르지 않는 네 형제는, 이따금 한 자리에 모이는 일도 있었다. 아무리 멀리 떨어져나가더라도 그들은 기본적으로 눈과 귀를 열어두도록 훈련받았다. 본인이 필요한 장소를 스스로 찾아낼 수 있는 능력도 있었다.

고담은 미치광이들을 불러 모으는 도시였다. 그들의 적은, 마법사나, 초능력자나, 외계인보단 미치광이인 경우가 많았다. 그래, 그런 경우가 많긴 했지. 그러나 그것이 100%의 확률을 자랑하는 것은 아니다. 더러 있긴 했다. 인간을 초월한 존재들이.

자타나가 있었으면 좋았을 거야.

나이트윙은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며 로빈의 곁에 착지했다. 우스꽝스러운 코스튬을 입은 신생 악당의 거슬리고 과장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듣기 싫다.. 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탕, 탕, 권총의 격발소리가 울렸다. 사실 탕, 탕, 하는 정도로 깔끔하고 점잖은 소리는 아니었다. 저 짜증나는 웃음소리를 전부 덮어버릴 만큼, 요란하게 쏟아지는 소리의 폭포였다.

권총에서도 저런 소리가 날 수 있구나. 딕은 옆을 흘끗 돌아보았다. 권총 두 자루를 꺼내들고 미친 듯이 쏴대고 있는 제이슨의 표정은 볼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붉은 헬멧 아래의 얼굴이 짜증으로 가득 차있으리라는 것은 추측할 수 있었다. 그의 총알이, 보이지 않는 투명한 장벽에 막혀 전부 튕겨나가거나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으니까.

"쯧. 시끄러워."

곁에서 로빈이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로빈은 다쳐있었다. 망토가 찢어지고, 붉은 코스튬 아래로 피가 배어나왔다. 나이트윙이 그런 로빈을 부축하려 했으나 로빈은 그의 손을 매몰차게 쳐냈다.

"저 새끼는 또 왜 여기에 와있는 건데? 또 네가 불렀지? 총기 난사나 테러를 하고 싶으면 이런 건물 옥상이 아니고 저기 있는 대학에나 쳐들어가라고 해."

"로빈."

나이트윙이 고개를 저으며 로빈의 어깨를 꽉 잡아주려던 찰나였다.

"뭐하고 있어, 병신들아!"

두 사람을 향해 뛰어든 레드후드가 로빈의 멱살을 움켜쥐며 집어던지고, 다리를 들어 나이트윙의 복부를 걷어차 넘어트렸다. 뒤로 두 바퀴를 구르며 튕기듯 몸을 일으킨 나이트윙은 정체 모를 빛줄기가 레드후드의 몸을 관통하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레드후드!"

"무슨 짓이야, 개자식아!"

멀찍이 나가떨어진 로빈이 몸을 벌떡 일으키며 악을 지름과 동시에, 나이트윙은 비틀거리며 뒤로 두어 걸음을 내딛는 레드후드를 향해 달려갔다. 가까이 다가가면서, 나이트윙은 그의 몸에 기묘한 빛과 열기가 맴돌고 있음을 눈치 챘다. 그러나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하기도 전, 레드후드의 무릎이 꺾이며 바닥으로 풀썩 쓰러졌다. 넘어지기 직전에 간신히 손을 짚으며 몸을 지탱한 그를 일으키기 위해, 나이트윙은 그의 어깨를 잡았다.

쐐액.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났다. 건너편 고층 건물의 옥상에서 뛰어내린 레드로빈이 공기를 타고 하늘을 날아, 저 우스꽝스러운 마법사 빌런의 뒤통수를 후려갈기며 착지했다. 손을 등 뒤로 결박하고, 입에 재갈을 물리고, 눈을 가리는 움직임이 민첩했다. 그러나 나이트윙은 그런 레드로빈을 보면서 휘파람을 불지도, 로빈의 상태를 살피러 달려가지도 않았다. 레드로빈이 이름 모를 빌런의 뒷목을 쳐 기절시키는 그 순간까지도.

"레드후드, 괜찮.."

어깨에 손이 닿는 순간, 나이트윙의 목소리가 뚝 끊겼다. 손이 닿는, 바로 그 순간. 뒷목을 가격당한 빌런이 정신을 잃는 그 순간. 생전 처음 느끼는 생경한 느낌이 나이트윙의 머릿속에 가득 들어찼다. 젊은이가 말하기엔 적절하지 않은 무게를 가진 단어였지만, 어쨌든 그가 '평생' 느껴본 적 없는 새로운 감각이었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몰랐다. 무슨 증상인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나이트윙은 그것이 자신의 손을 타고 흘러들어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레드후드의 어깨를 잡은, 자신의 손을 통해서. 그의 몸에 스몄던 기묘한 빛과 열기가 자신에게로 흘러들어오는 듯 한 감각이었다.

"네 병아리나 챙겨."

레드후드가 나이트윙의 손을 털어낼 때까지, 나이트윙은 멍하니 레드후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레드후드는 자리에서 일어나 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를 한 대 걷어차려 날아드는 로빈의 발목을 잡아 다시 한 번 바닥에 패대기친 뒤, 훌쩍 옥상의 난간 아래로 뛰어내려 버렸다.

"나이트윙? 무슨 일이야?"

"응? 아니, 아무 일도 없어, 레드로빈. 왜. 내가 어디 다치기라도 했을까봐 그래?"

레드로빈이 그를 향해 다가왔다. 나이트윙은 부드럽게 웃으며 레드로빈의 카울 위로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니야, 난 그냥 형이 좀.. 멍해보여서."

"아무 일도 없다니까 그러네. 아, 아까 공중제비 멋졌어."

"공중제비 전문가에게 그런 칭찬 들어봐야 민망하기만 하다고."

유쾌한 목소리로 농담을 건네면서도, 나이트윙은 멍한 기분이 가시지 않는 것을 느꼈다. 그것이 무슨 감각인지는 여전히 알지 못한 채로.

***

딕은 멍하니 침대에 누워있었다. '밤일'을 끝낸 뒤엔 아무리 체력이 좋은 그라도 지치기 마련이고, 눕자마자 곯아떨어지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런데 잠이 오질 않았다. 몸은 피곤하고 눈꺼풀은 무거운데,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자리가 불편한가 싶어 이불을 정돈해보고, 담요를 들고 소파에도 누워보고, 공기가 탁한 걸까 싶어 창문도 활짝 열어봤다. 그러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는 조용히 누워서 멍하니 천장을 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기분을, 마음을 조용히 곱씹어보았다. 어째서 이런 기분이 드는 것인지. 그 근원을 더듬어 올라가려했다.

그러나 그는, 지금의 자신이 어떤 기분인지도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분명 자신의 마음은 더할 나위 없이 편안하고 평온했다. 오히려 개운하기까지 했다. 동생들-누군가는 이런 호칭을 들었다간 펄쩍 뛰겠지만-과 호흡을 맞춘 것은 오랜만의 일이었다. 장성한, 자라고 있는, 그리고 아직 어린 로빈과 로빈이었던 아이들. 딕인 오늘 밤과 같은 일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음 한편이 너무나도 불편했다. 그가 지금껏 겪어본 적 없는 감각이었다. 두루뭉술하고, 불안한. 우울함인지, 슬픔인지, 분노인지 모를 불편함.

딕은 조용히 그 낯선 한 점에 집중했다. 그가 잠이 든 것은, 그 감정이 점차 격해지다가 어느 순간, 갑작스레 찾아온 감정의 암전. 그 후로도 반시간은 더 지난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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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프레드 페니워스는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는 작은 소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브루스 웨인은 고담에서 가장 유명한 이름이었고, 웨인 저택을 찾아오는 귀찮은 손님들도 많았다. 그런 불청객들을 쫓아내는 것 역시 알프레드의 업무 중 하나였고, 그는 방문객의 행색이나 표정만 보고서도 상대가 어떤 의도로 웨인 저택을 방문했는지를 유추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지금 자신의 눈앞에 당당히 서있는 작은 소년은 그가 예상하지 못했던 종류의 손님이었다. 하지만 알프레드는 당황하지 않고, 침착한 표정으로 상대의 기색부터 살폈다. 열다섯은 되었을까 싶은 어린 아이가 그를 향해 예의바른 미소를 지어보이고 있었다. 깨끗한 옷과 깔끔하게 손질 된 검은 머리칼, 순한 인상의 얼굴과 왜소한 체격의 아이였다.

"당신이 알프레드 페니워스군요. 맞지요? 웨인 저택의 집사님."

"그렇습니다, 꼬마 도련님. 무슨 일로 찾아오셨는지요? 데미안 도련님의 친구이십니까?"

"아니요. 제가 찾아온 건 브루스 웨인도, 데미안 웨인도 아니에요."

소년은 여전한 미소를 띤 채, 주변을 조심스럽게 둘러보았다. 두 손을 얼굴까지 끌어올려 손나팔을 만들고, 소리를 죽여 속삭이는 모습에선 어린아이다운 천진함이 느껴져 알프레드는 보이지 않을 만큼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이려 했다. '아이다움'은 이 저택에서 사라진지 오래였다.

그러나 이어진 소년의 대답에, 알프레드의 입꼬리는 조금 전보다 더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전 배트맨과 로빈을 찾아온 거라고요."

데미안 웨인은 자식을 티모시 드레이크라고 소개한 꼬마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험한 일이라곤 겪어본 적 없을 것처럼 생긴 도련님에, 남의 저택에 불쑥 쳐들어온 주제에 주눅 드는 기색조차 없는 당당한 태도도 얄미웠다. 그러나 가장 고까운 것은, 자신을 대놓고 무시하는 태도였다.

브루스보다 먼저 도착한 데미안이 응접실로 들어섰을 때, 티모시는 알프레드가 내왔을 홍차를 마시며 안락의자에 몸을 파묻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와 티모시의 맞은편에 놓인 의자 하나를 골라 앉을 때까지, 자신을 향해 시선을 한 번 흘끗 던졌을 뿐 그 이상의 인사나 눈짓은 없었다.

그러나 브루스가 응접실로 들어왔을 때, 티모시는 찻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먼저 악수를 청했다. 데미안이 보기엔 가증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예의바른 미소를 띤 채, 그제야 자신의 이름을 소개했다. 악수하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데미안은 티모시가 하는 말을 전부 기억해뒀다가, 조금이라도 틀린 말을 했다간 돌아가는 길에 알프레드와 브루스의 눈을 피해 정강이를 한 대 걷어차 주리라 다짐했다.

"그래, 내게 할 말이 있다고 했다면서? 배트맨과 로빈에 대해 할 말이 있다니. 물론 웨인 기업이 배트맨을 후원하는 것은 맞지만, 그들에 관한 일이라면 내 저택에 개인적으로 찾아오기보단 회사를 통해 문의를 하는 것이 간단했을 텐데."

브루스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뭇여성들의 마음을 녹이는 자상한 억만장자의 목소리였다. 그러나 티모시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브루스가 다시 입을 열기 전, 그는 분명한 목소리로 모든 단어에 힘을 주어 말했다.

"나를 로빈으로 삼아주세요."

티모시가 무슨 말을 하건 무시하려했던 데미안은 그 말에 퍼뜩 고개를 들고 티모시를 사납게 쏘아보았다. 그러나 티모시는 여전히 데미안에겐 시선 한 번 주는 일 없이, 그의 존재 자체를 잊기라도 한 것처럼 그를 무시하며 브루스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네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구나."

"난 당신이 배트맨이라는 것을 알아요, 브루스. 그리고 당신의 아들이 로빈이라는 것도 알고 있어요."

티모시는 그제야 데미안을 향해 흘끗, 아주 짧은 시선을 던졌다. 그를 바라보기 위함이라기 보단, 그를 향해 고갯짓을 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시선이 닿은 것뿐이었다.

"그리고 당신의 로빈은 잘못됐다는 것도 알아요. 당신의 로빈은 옳지 않아요, 브루스."

"하, 네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는 알고 있는 거냐, 꼬맹아? 어디서 되먹지도 못한.."

"데미안."

데미안은 티모시의 말에 울컥해 소리치려다 브루스의 부름에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나 눈빛만은 더할나위없이 흉흉했다. 브루스가 없었더라면, 저 망할 꼬마는 진즉에 바닥에서 나뒹굴고 있었을 것이다.

"당신의 로빈은 배트맨과의 균형을 맞출 수 없어요. 그는 너무 폭력적이니까요. 하지만 난 아니에요."

"글쎄. 좋은 생각 같지는 않구나. 네가 훌륭한 탐정이라는 것은 알겠다. 하지만 이 일은 너무나 위험하고, 아마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간단하지도 않을 거란다."

"난 옳은 로빈이 될 수 있어요, 배트맨. 왜냐하면 난 당신을 이해하고 있으니까요. 난 당신의 선을 넘지 않는, 당신과 균형을 맞출 수 있는, 그런 바람직한 로빈이 될 수 있다고요."

브루스의 완곡한 만류가 무색하도록, 티모시의 눈은 반짝이고 있었다. 점점 사나워지는 데미안의 기색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확신에 찬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브루스 웨인을 열렬히 바라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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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주의

*콘팀뎀슨(?)/브루딕..인데 커플링 중심은 아님


코너 켄트는 어깨를 조금 더 움츠렸다. 그는 결코 왜소한 체격이 아니었으나, 그의 덩치와 구부정한 자세가 합쳐지자 필요 이상으로 둔하고 멍청한 인상이 되었다. 두꺼운 뿔테 안경이 그런 그의 인상을 한층 더 강조했다.

두 도시간의 교류를 위한 사회 활동의 일환으로, 아카데미 스몰빌과 아카데미 고담 사이의 교환학생 프로그램은 나름대로 오랫동안 유지되어온 전통 있는 행사였다. 억만장자라는 칭호가 무색하다는 브루스 웨인의 짧고 유머있는 연설이 끝나고, 학생 회장의 환영사가 시작되도록 스몰빌 출신의 학생들은 조금씩 주눅이 든 모습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기에 바빴다.

초등학교부터 시작해서,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아우르는 고담 아카데미의 부지는 스몰빌 학생들이 실감할 수 없을 만큼 넓었고, 대도시의 명문 사립학교의 이미지에 걸맞은 세련된 모습의 건물들이 그들을 둘러싸고 있었다. 규칙적으로 의자를 늘어놓은 장소는 광장이라고 불러도 좋을 넓이였고, 연단은 꽃과 풍선과 리본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단정한 차림새의 학생들은 필요 없는 소음을 만들어내지 않았다. 짧지 않은 행사가 진행되는 동안, 그들은 훌륭하게 집중했다. 환영사와 축하공연이 끝난 뒤에는 무대를 향해 적당한 박수와 환호를 보냈다. 폐회사가 끝난 뒤에 차례대로 일어나 행사장을 벗어나는 것까지, 수도 없이 반복된 인형극처럼 깔끔하고 일사불란한 움직임들이었다.


"안녕?"

코너는 거대한 건물을 멍하니 올려다보다가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단정하게 빗어 정리한 머리와 구김 하나 없이 깔끔한 교복을 입고 있는, 비교적 가느다란 체격의 남학생이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손을 내밀었다.

"네가 코너 켄트지?"

"어, 으응. 그런데."

코너는 얼떨떨하게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손을 내밀어 악수하자, 굳은살의 흔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부드러운 감촉이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

"반가워. 난 티모시 웨인이야."

티모시는 코너를 향해 상냥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모범적이고 바른 아이의 표본 같은 미소였다. 쉽게 호감을 주고, 좋은 인상을 심어줄 수 있는 부드러운 표정.

"스몰빌 아이들이 쉽게 적응할 수 있도록, 고담의 학생들이 너희들을 한 명씩 맡아서 도와주기도 되어있거든. 난 네 짝꿍이고, 학생회기도 하니까 곤란하거나 모르는 일이 생기면 언제든지 물어봐."

친절한 목소리와 완벽한 문장, 당당한 표정을 비롯한 수많은 이유로, 코너는 그가 그 누구도 흠잡을 수 없을 존재라는 것을 느꼈다. 유약해 보이는 인상이라는 이유로 누군가의 표적이 되는 일 같은 것은 없을 것이다. 무시하기엔 단단한 심지가 있는 사람이었고, 억압하기엔 너무나 당당한 아이였다.

게다가, 어쨌든, 그런 막연한 예감들을 제외하고서라도 그는 웨인이니까. 설령 그가 지진아였어도 그의 앞에서 대놓고 그를 무시할 수 있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코너는 티모시의 자연스러운 미소에 어색한 웃음으로 답하며 티모시의 등 뒤로 지나가는 한 무리의 학생들을 보았다.

치맛자락이 흔들리지 않는 부드러운 걸음걸이, 결코 일정한 크기 이상으로 올라가지 않는 목소리들, 대도시 최고의 명문 사립학교는 다 이런 걸까, 그런 생각을 했다. 코너에게는 너무나 낯설고 어색한 분위기가, 그들에게는 숨쉬듯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처럼 보였다.

"코너?"

코너는 자신을 조심스럽게 부르는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렸다. 티모시가 의아함과 걱정스러움이 섞인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코너는 이유 모를 위화감을 애써 의식 밖으로 밀어냈다. 고담은 그에게 있어서 낯선 곳이니까, 이런 어색함은 당연한 것이다.

"아, 미안해. 잘 부탁해, 티모시."

코너의 대답에 티모시의 표정이 풀리는 것이 보였다. 눈에 보일만큼 선명한 변화에 코너가 오히려 당황할 정도였다.

"편하게 팀이라고 불러도 좋아."

티모시는 그를 향해 다시 한 번 상냥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학교가 끝나는 시간은, 당연히 활기가 넘치기 마련이다. 최고급 가죽소파에 몸을 파묻은 작은 소년은 열어둔 창문으로 흘러들어오는 소란스러운 소리들을 듣고 있었다. 등을 뭉근히 데우는 온도만큼이나 짜증스러운 소리였지만, 데미안은 10분 째 참을성 있게 그 소음을 참아내는 중이었다. 조금 뒤에 저 문을 열고 들어올 녀석이, 병적으로 그런 소음을 싫어한다는 것을 알고있기 때문에. 아마 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 열린 창문을 보고 얼굴을 찡그릴 것이다. 그 꼴을 상상하니 기분이 썩 유쾌해졌다.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고, 커다란 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데미안은 무심한 시선으로 문가를 흘끗 돌아보고, 활짝 열린 창문을 보며 미간을 좁히는 티모시를 발견하곤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오늘은 웬일로 지각을 다 하셨나, 드레이크?"

"오늘부터 교환학생 프로그램이 시작되니까 말이야, 데미안. 넌 아직 어려서 상관없는 일이지만."

그 말대로, 초등학교는 교환학생 프로그램 시행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데미안은 얼굴을 찡그리며 입을 꾹 다물었다. 나이로 상대를 깔아뭉개려는 수작이 얼마나 저열한 것인지 따져 묻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으나, 그것이 티모시를 상대로는 별다른 효과가 없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저런 사소한 도발에 넘어가 하나하나 반응해주진 않을 것이다.

데미안이 몇 번이고 튀어나오려는 빈정거림을 애써 삼키는 동안, 티모시는 문을 단단히 닫은 채 빠른 걸음걸이로 창가로 다가가 창문을 닫았다. 두꺼운 커튼까지 쳐버리자, 커튼 사이로 간신히 스며들어오는 가느다란 빛줄기가 책상과 바닥에 얇은 선을 그렸다.

"또 소란을 피웠던데."

티모시는 커다란 마호가니 책상에 걸터앉으며 넥타이를 잡아당기고 셔츠의 단추를 두어 개 풀어냈다. 소매의 단추를 풀어 팔꿈치까지 걷어 올리고, 머리를 손가락으로 쓸어 올렸다. 상냥하던 티모시 웨인의 얼굴은 이미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지워진 뒤였다. 무표정한 얼굴에, 서늘한 눈빛을 품은 푸른 눈은 오싹하고 자연스럽게 어울렸다. 

"내가 뭘 어쩌든 네가 무슨 상관이야, 드레이크."

"당연히 상관있지. 너도 웨인이니까, 데미안. 나도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 사실이지만, 네 평가가 나, 아버지, 나아가선 웨인 가문의 명성 자체에까지도 누를 끼친다는 사실을 똑똑히 알아둬."

"웨인 가문? 네가 그걸 왜 신경 쓰는데?"

데미안은 소파에 파묻었던 몸을 반쯤 일으키며 신랄한 비웃음을 흘렸다. 그의 눈빛 가득 경멸의 빛이 흘렀다.

"넌 웨인이 아니야, 티모시 드레이크. 넌 드레이크라고. 갑자기 나타나선 아버지의 이름에 빌붙어서 살아가는, 기생충 같은 고아새끼란 말이야."

티모시는 책상을 짚고 있던 손을 들어 올려 팔짱을 꼈다. 드러난 손목에 드리워진 아르마니 손목시계에, 그의 시선이 잠시 머물렀다가 떨어졌다.

"곧 딕과 제이슨이 올 거야, 데미안. 네가 두 사람 앞에서도 그런 말을 꺼낼 멍청이는 아니길 바라. 아마도 제이슨은 네 목을 조르려고 할 테니까. 딕도 내색은 않겠지만 상처를 받을 테고."

티모시는 입꼬리를 끌어올려 기계적인 미소를 지어보였다. 데미안은 아무런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그 미소에서, 심한 모욕감을 느꼈다.

"나나 제이슨은 몰라도, 딕 마저 괴롭히고 싶은 생각은 없을 것 아냐?"

데미안은 티모시를 노려보다가 휙 고개를 돌려버렸다. 말대꾸는 잊지 않았으나, 불만 가득한 불퉁한 목소리였다.

"어쩌라고, 또라이야."

티모시는 그런 데미안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무심히 고개를 돌렸다. 팔짱을 풀었던 손을 풀어 책상 위로 드리워진 가느다란 빛의 선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고급스러운 마호가니 책상의 감촉이 손가락 끝에 감겼다. 일반 고등학교에 놓아두기엔, 지나치게 고급스러운 고가의 물건이었지만. 어쨌든 이곳은 고담 아카데미였고, 이곳 학생회실은 웨인 형제들의 공간이라고 해도 좋을 장소였다.

"그래. 그래야지 착한 동생이지."

그의 말이 끝날 즈음, 닫혀있던 문이 활짝 열렸다. 거칠게 열렸으나, 이번에도 소리는 없었다. 문간에 서있는 것은 세 사람이었다. 제이슨은 거의 멱살을 잡다시피 한 학생을 질질 끌며 방으로 들어왔고, 딕은 그런 두 사람의 뒤를 따라 들어오며 문을 단단히 닫았다.

제이슨의 손에 끌려 들어오는 학생은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불량아로 유명한 제이슨이 저를 끌고 올 때만 하더라도 다리가 덜덜 떨릴 정도로 겁을 먹고 있었으나, 어느 순간 그들을 뒤따라오던 리처드 웨인을 발견한 뒤로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은 뒤였다. 서글서글하고 순해빠지기로 유명한 학생회장이 지켜보는 앞에서라면, 제 아무리 무법자 제이슨이라도 함부로 자신에게 해코지를 하진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대외적으로는 완벽하고 모범적인 사립학교로 알려져 있지만, 어쨌든 고담 아카데미 역시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 수백 명이 모이는 곳이었다. 개중에는 불량한 태도의 학생들도 으레 섞여있기 마련이었고, 교내에서 일탈을 일삼는 아이들도 분명히 존재했다. 그들 중에선 종종, 울새의 문 안으로 끌려들어가는 아이들도 있었다.

울새의 문은 공식적으로는 아카데미 고담의 고등부 학생회실이었다. 그러나 정기적인 학생회의 조례, 종례, 회의를 비롯한 집회는 몇 년 전부터 다른 교실로 옮겨졌다. 울새의 문이라는 시적인 이름은, 사실 문에 울새 네 마리가 새겨져있다는 사실을 나타낸 성의 없는 네이밍이었지만 그것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사실 대부분의 아이들은 그 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도 몰랐다. 그 안을 출입하는 것은 암묵적으로 금지되어 있었고, 그 안을 궁금해 하는 아이들도 없었다. 적어도 그런 내색을 대놓고 내비치는 아이는 없었다.

고급스럽게 꾸며진 내부는 고등학교의 일부라고 생각하기 어려운 모습이었다. 제이슨이 멱살을 잡았던 손을 거칠게 뿌리치자, 끌려 들어오던 남학생은 그대로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넘어졌다. 그 와중에 그는, 이 방이 예전부터 이런 모습이었을까 생각했다. 분명히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학생회실이었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누가 보아도 개인적인 공간처럼 꾸며져 있었고, 누군가의 분명한 취향이 드러나도록 꾸며진, 폐쇄적인 방이었다.

바닥에 꿇어앉은 그대로, 그는 고개를 들었다. 그와 동급생은 아니었으나, 그는 티모시 웨인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리처드 웨인의 곁에서 학생회의 일을 가장 많이 돕는 임원인 것은 차치하고라도, 그는 엄청난 유명인이었다. 친아들도, 장자도 아닌 그가 어째서 웨인가문의 상속자가 되었는지는 몇 년이나 호사가들의 입을 오르내리는 주제였다.

"분부대로 대령했습니다, 폐하. 구워먹든 삶아먹든 이제 네 마음대로 하고."

티모시 웨인은 성실한 재벌2세이자 반듯하고 모범적인 학생이었다. 학생들에겐 친절하고, 선생에겐 깍듯했다. 지금처럼 넥타이를 풀어헤치고,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이마 위로 드리워진 모습은 낯설었으나 평소의 모습이 어디로 가진 않을게다. 바닥에 부딪힌 무릎이 뒤늦게 아파옴을 느끼면서, 그는 티모시를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그는 제이슨이 자신의 곁을 떠나 소파에 풀썩 주저앉음과 동시에 티모시가 걸터앉아있던 책상에서 가볍게 뛰어내리는 것을 보았다. 티모시는 제이슨의 등 뒤로 조용히 걸어가며 그의 어깨를 가볍게 잡았다 놓았다. 제이슨이 고개를 살짝 젖히며 티모시의 뒷모습을 흘끗 보는 모습을 지켜보던 데미안은 얼굴을 찡그리며 툴툴거렸다.

"먼지 나잖아, 멍청한 토드."

"뭐, 꼬맹아."

제이슨은 어깨가 뻐근한 듯 손을 올려 가볍게 주물렀다. 그의 시선은 스치듯 티모시의 뒷모습을 몇 번이나 훑었고, 여전히 바닥에 꿇어앉은 이름모를 학생에게 다가간 티모시가 천천히 무릎을 꿇고 눈높이를 맞추는 것을 보았다. 그가 상대의 귓가에 입술을 대고 작은 목소리로 무언가를 속삭이기 시작했을 때, 제이슨은 본인의 어깨를 주무르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곤 짜증스레 손을 내렸다. 눈을 꾹 감고 소파에 몸을 파묻는 그의 귀에 데미안의 비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데미안. 그러지 마."

상냥한 목소리가 가까워지며, 자신이 앉아있는 소파 한쪽이 조금 꺼지는 것이 느껴졌다. 딕의 부름에 데미안은 혀를 차며 금세 입을 다물었다. 입이 댓 발은 나왔는지, 곁에 앉은 딕이 소리를 죽여 웃는 것이 느껴졌다. 그 떨림이 소파를 타고 느껴졌다. 제이슨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한쪽 입꼬리를 명백히 끌어올렸다. 딕이 그를 지켜보고 있는 한, 그는 마음대로 짜증도 내지 못 할 것이다. 열 좀 받으라지.

"..어? 어?"

얼빠진 목소리가 들려와, 제이슨은 천천히 눈을 뜨며 고개를 돌렸다. 조금 전까진 애써 허세를 부리며 뻔뻔한 표정을 짓고 있던 녀석의 얼굴이 눈에 띄게 창백해진 것이 보였다. 그는 경악한 표정으로 티모시를 휙 돌아보려다가, 티모시의 손가락에 머리채가 붙잡히며 강제로 고개가 뒤로 젖혀졌다.

티모시의 목소리가 조금 더 낮아졌다. 희미하게나마 들려오던 알아들을 수 없는 목소리마저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제이슨은, 티모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했다. 그다지 알고 싶은 기분도 들지 않았다. 그러나 입가에 미소를 걸고 눈을 반짝이며 속삭이는 티모시와, 시간이 흐를수록 겁에 질려 창백해져가는 불쌍한 학생 A를 지켜보는 일은 언제나 즐거웠다. 저번의 녀석은 5분도 버티지 못하고 눈물을 뚝뚝 흘렸는데, 이번 녀석은 그때의 녀석보단 간이 큰 모양이었다.

아카데미 고담은, 티모시 웨인의 손바닥 속의 작은 왕국이었다. 몇 년 전부터, 이 방에 그들 네 형제만이 출입하기 시작한 그 날부터, 이곳은 천천히 잠식당했다. 그의 눈에 거슬리는 것은 치워지고, 교정당하고, 사라졌다.

자신은 제법 성실하게 티모시를 도왔다. 처음엔 분명히, 티모시가 원하는 대로 학교가 바뀌어갈 때마다 잔뜩 기분이 상해 어쩔 줄 몰라하는 데미안의 꼴이 보고싶었기 때문에. 그리고 지금은, 다른 이유로.


최종수정:12/15



...망했다.. 나.. 쓴다.. 2..(쥬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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