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IF) 코너가 죽고>배트맨이 죽고>팀이 레드로빈이 되어서>라스 알 굴에게 협력중일 때>코너가 부활해서>그 소식을 들었다 <-이런 내용 베이스로 망상글..
***
라스의 군대는 모두가 암살자였고, 열 몇살 먹은 어린 소년의 목 하나쯤은 쉽게 잘라낼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런 암살자들이 단 한 명의 소년 앞에서 무력하게 쓰러지고, 나가떨어지고, 무릎을 꿇었다. 우스운 일이었지만, 농담은 아니었다. 그 소년이, 철의 남자와 같은 이름을 공유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상기하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건장한 성인 남성을 너무나 손쉽게 집어던지고, 달려드는 세 사람은 하늘로 훌쩍 날아올라 피해버린다. 칼날을 잡아 우그러트려도 자상은 남지 않았다. 그의 등을 노리고 뛰어오른 자는, 망토를 두른 하얀 개가 옷자락을 물어 멀찍이 끌고가 던져버렸다.
"그만."
등 뒤에서 흉측한 목소리가 들려왔을 때, 코너는 여유롭게 뒤를 돌아보았다. 기괴하게 일그러진 얼굴을 한 유령 같은 사내가 걸어나오고 있었다.
"하, 그래. 다음 문지기는 당신인가?"
"그분이 너를 직접 보고자 하신다."
유령사내(코너는 그를 줄여서 이렇게 부르기로 마음먹었다)는 코너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코너는 더 이상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휘적 뒤돌아 멀어지는 그의 몸놀림이, 커다란 지네로부터 서둘러 멀어지려는 모양새와 제법 닮았다고 생각했다.
"가자. 크립토. 여차하면 그 늙은이 발치에 실례 해버려도 좋아."
나도 너 마음에 안 들거든.
멍! 그의 말을 알아들은 양 대답하는 크립토의 목덜미를 쓰다듬으며 코너는 땅에 두 발을 디뎠다. 그의 말을 들은 유령사내가 신경질적으로 뒤를 돌아보며 그를 쏘아봤지만, 그는 어서 앞장서라는 듯 까딱 고갯짓을 했을 따름이었다.
***
"인사가 화려하더군. 코너 켄트."
"선물도 없이 빈손으로 와버려서 말이야. 급하게 마련한 깜짝 선물이었는데 마음에 들었을지 모르겠네."
빈정거리는 코너의 말투를 들었음에도 라스 알 굴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의자에 기대앉은 거만한 자세 그대로, 눈썹을 미세하게 한 번 꿈틀했을 뿐이었다. 재수 없는 늙은이. 그에게 뭐라고 속삭여 꾀어냈을까. 코너는 이를 악물었다. 생각만 해도 이가 갈릴만큼 분했다.
죽음으로부터 돌아 왔을 때, 가장 놀라운 사실 중 하나는 배트맨이 죽었다는 것이었다. 나이트윙이 그의 자리를 물려받았다는 것은 새삼스럽게 놀랄 일도 아니었으나, 로빈이 티모시 웨인이 아니라는 것에는 놀랐다. 데미안 웨인이 로빈 자리를 꿰차고 있다는 사실에는 분노했고, 팀이 제이슨이 입었던 레드로빈의 코스튬을 선택했다는 사실은 안쓰러웠으며, 그리고 그가 지금 누구와 함께 있는지를 알게 되었을 때에는 기절할 뻔 했다.
두 사람은 가장 친한 친구였지만, 코너는 그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을 거라는 사실을 알았다. 고담은 어둡고 일그러진 도시였다. 슈퍼맨도, 자신도, 그 누구도 고담을 지키는 영웅들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들을 이해할 수 있는 이들은 그들 스스로 뿐이었다.
그러나 코너는 팀이 얼마나 자경단의 일에 집착하는지를 알고 있었다. 그가 점점 편집증적인 모습을 보이며 배트맨을 닮아가고 있다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 친부를 잃은 뒤로 그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그는 일부나마 알고있었다. 팀이 배트맨 마저 잃었을 때, 어떤 기분이었을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매우 끔찍했으리라는 예상을 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라스 알 굴은 악마라고 했다. 팀에게서 로빈 자리를 빼앗아간 그 꼬마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그런 꼬맹이는 악마의 자식인 것이 분명했으니까. 그래, 그 새끼 악마가 쫓아낸 내 로빈을 늙은 악마가 꼬드겨서 날름 삼켜버렸단 말이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코너는 이를 악물었다. 어떤 위협이 있더라도 그의 로빈을 찾아와야 했다.
"내 로빈을 돌려받으러 왔다, 라스 알 굴."
"너의 로빈이라고?"
라스 알 굴은 깍지 낀 손을 풀어 의자의 팔걸이에 걸었다. 동시에 썩 유쾌한 듯 보이는 웃음을 터트렸다. 코너는 그런 라스를 똑바로 바라보며 얼굴을 찡그렸다. 재수 없기는 제 손자랑 똑 닮았다. 누가 혈육 아니랄까봐.
"내가 설마 티모시를 붙잡아 새장에 가둬두기라도 했다고 생각하고 있는 건가."
"아니면 인질을 잡고 있을 수도 있고, 무슨 짓을 해놨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고서야 팀이 너 같은 악마와 손을 잡고 있을 리가 없어."
라스 알 굴의 표정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자신의 곁을 지키고 서있는 예의 유령사내에게 고개를 돌렸다.
"가서 탐정을 데려와라."
"그럴 필요 없어, 라스."
코너는 자신의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반색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열린 문에 비스듬히 기대선 팀이 서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팀으로 보이는 인물이 서있었다. 온통 검은색과 붉은색의 무거운 가죽 코스튬을 입은 팀은 너무나 낯설었다. 얼굴의 절반을 덮어버린 검은 카울이 너무나 낯설었다.
"팀?"
"어린애처럼 하나하나 챙겨주지 않아도 내가 해야 하는 일 정도는 알아."
코너의 부름에도 팀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는 라스 알 굴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고, 그에게 말을 건네는 목소리는 건조했다. 일말의 혐오마저 담긴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사실에 코너는 안심했다. 팀 역시 라스와 협력하는 일을 달가워하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이제 그를 데리고 돌아갈 것이다. 고담으로 데려가서, 그 망할 꼬마 로빈 앞에 데려다 놓고 싶었다. 어쨌든 자신이 인정하는 로빈은, 티모시 웨인 한 사람 뿐이라고.
"아무렴. 그렇겠지, 티모시."
"오랜만이야. 코너."
이번엔 라스 알 굴의 말을 무시하며 코너에게로 시선을 돌린다. 라스의 곁에 서있는 유령사내가 발끈했으나 라스의 눈치를 보며 분을 삭이는 모습을 본 코너는 아주 조금 유쾌한 기분이 되었다. 그는 라스의 앞에서 휘적 몸을 돌리며 문가에 서있는 팀에게로 다가갔다.
"데리러 왔어, 버디. 같이 가자."
"코너."
카울 아래로 보이는 입매가 딱딱하게 굳어있다. 팀의 얼굴에 어울리는 표정이 아니다. 코너는 그의 표정을 보며 다가가던 걸음을 잠시 멈췄다. 팀의 얼굴 위에선 처음 보는 표정 같은데, 낯선 표정은 아니다. 그러니까, 꼭, 배트맨. 배트맨 같은 입매다.
"내 선택이야."
"팀?"
"난 내 의지로 라스를 선택했어. 타협해버렸지."
"그게 무슨 소리야, 팀? 넌 로빈이야. 로빈은.."
"난 이제 로빈이 아니야. 로빈은 데미안이지. 그게 바로 배트맨의 선택이고."
팀은 비스듬히 기대서있던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묵직하고 검은 망토가 흔들리며 늘어졌다.
"난 레드로빈이야."
"팀.."
"돌아가."
팀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두 사람을 보고 있는 라스 알 굴을 흘끗 보았다. 카울 아래 가려진 눈동자에 경멸의 빛이 어렸다.
"바깥까진 바래다 줄 테니까."
냉담히 등을 돌리는 그의 몸짓을 따라, 검은 망토가 크게 펄럭였다.
***
"팀. 그게 무슨 소리야."
"넌 이해 못 해, 코너. 절대로 이해 할 수 없을 거야."
"그래, 이해 못해. 그렇다고 쳐. 하지만 널 도울 수는 있을 거야. 돌아가자, 팀. 저 악마 대신 내가 널 도울 수 있어."
바람이 불었다. 그 바람을 따라 망토가 펄럭였다. 코너는 어렵지 않게 바닥 위로 마른 모래가 굴러가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었다. 상대의 심장 소리를 듣는 것도 별반 다를 것 없었다.
팀은 거짓말을 잘했다. 자신이 그것을 좋아하느냐의 문제는 별개로, 늘 누군가에게는 거짓말을 해왔다. 자신이 로빈임을 들키지 않기 위해 아버지에게 거짓말을 했고, 그들을 가로막는 어른들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거짓말을 하기도 했다. 난 배트맨에게도 거짓말을 해. 언젠가의 기억 속에 묻어있는 말이었다.
그렇기에 코너는, 지금도 팀이 거짓말을 하는 것이기를 바랐다. 당장 라스 알 굴에게서 벗어날 방도가 없어서, 기회를 보기 위해 코너를 돌려보내려는 것이라고. 슈퍼보이 혼자만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을 만큼 커다라고 지독한 함정이 기다리고 있어서. 팀은 똑똑하니까. 라스 알 굴에게 커다란 '선물'을 떠넘기고 요령 좋게 도망칠 기회를 노리고 있을 뿐이기를.
그러나 애석하게도, 코너는 팀을 매우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수도 없이 거짓말을 입에 담아온 그가, 지금만큼은 결코 의심할 수 없는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타협한 것이다. 정말로. 라스 알 굴을 선택했다. 그의 로빈이.
"코너."
팀의 목소리를 듣고, 코너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음을 알아챘다. 코너가 천천히 시선을 들어 올려 눈을 마주치자, 팀은 같은 속도로 손을 들어올려 카울을 벗었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 그곳에 있었다. 무척 그리워하고, 보고 싶었던 얼굴이. 조금 야윈 것이 보인다. 수척해졌다. 그 수척함이, 단순한 피곤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 것이다.
"배트맨은 살아있어."
"팀."
"딕을 말하는 게 아니야. 브루스. 브루스는 살아있어."
코너는 대답하지 않았다. 확신에 찬 고집스러운 눈동자는 잔잔한 푸른색이었다. 그의 눈동자 안에서 어떠한 광기의 징조를 읽을 수 없다는 사실에, 코너는 어떤 기분을 느껴야 하는지 혼란스러워졌다.
두 사람 사이의 침묵을 깬 것은, 예상 밖으로 팀의 옅은 웃음소리였다.
"너도 지금 내가 미쳤다고 생각하고 있지?"
"..팀. 넌 지금.."
"알아, 코너. 그 누구도 내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이유를 알아. 모든 사람이 내가 미쳤다고 생각하고, 어리석다고 생각하고, 내 말을 헛소리라고 치부하는 이유를 알아. 하지만 그렇다고 그만둘 수는 없어. 포기할 수도 없어. 나는, 브루스를."
팀은 무심코 신발 뒤축으로 땅을 비볐다. 흙이 뭉그러지는 소리가 코너의 귀에 선명하게 들려왔다.
"절대로, 포기해선 안 돼."
코너는 손을 뻗었다. 팀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자신에 비해 왜소한 체격이던 팀의 어깨가, 기억 속의 그것보다 조금 더 야윈 것 같았다. 그가 이토록 한계까지 내몰린 이유들 사이에는, 자신과 바트의 죽음도 포함되었을 것이다. 그래, 그는 배트맨과 다르니까. 그와 똑같은 표정을 지을 수 있을 정도로 스스로를 한계로 내몰고 있어도, 어쨌든 그는 배트맨과 다르다. 적어도 그에겐.. 친구가 있지.
"아무도 날 도와주려 하지 않아. 날 이해조차 하려고 들지 않지. 하지만 나 혼자서 브루스를 찾아낼 수는 없어. 그러기엔 내 능력이 너무나 부족해. 지금 날 돕는 건.. 내 생각에 동조하고, 날 지원해주는 건 이 세상에 딱 한 사람뿐이니까. 네 말대로 악마같은 라스 알 굴. 딱 저 한 사람 뿐이니까."
그래, 친구. 친구가 있었다. 자신과, 바트, 그리고 틴 타이탄의 다른 아이들이라던지. 그러나 지금 그의 곁엔 누가 있지? 라스 알 굴?
코너는 조금 전, 라스 알 굴의 앞에서 보았던 팀의 입매를 떠올렸다. 배트맨을 닮았던 그 입매. 점점 일그러져가는 그의 로빈. 가슴이 답답하고 안타까웠다. 그가 애달팠다.
"난 라스를 떠날 수 없어, 코너. 브루스에 대한 작은 실마리 하나라도 찾아내기 전엔 절대로. 지금은 어쌔신 리그가 내 눈과 귀야. 그들이 내 오라클이야. 그리고 라스가 내.."
팀의 표정이 문득 흐려졌다. 그는 재빨리 손을 올려 카울을 뒤집어썼다. 그리고 나서도 아랫입술을 깨물며 숨을 한 번 삼켰다. 말을 고른 뒤 흘러나온 목소리는 가라앉아 있었다.
"라스가 내 새로운 알프레드야."
팀은 여전히 자신의 어깨를 잡고 있던 코너의 손을 밀어냈다. 완력으로 결코 이길 수 없는 상대임에도, 코너는 순순히 손을 거뒀다. 팀의 얼굴은 다시 검은 카울로 절반을 가려버렸으나, 코너는 그 카울 위로 선명히 떠오른 우울함을 읽을 수 있었다.
"타협해버린 로빈에게는 딱 어울리는 집사지."
"팀."
크립토가 다가와 코너의 다리에 머리를 비볐다. 이 똑똑한 개는, 슬슬 떠나야할 시간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코너는 푸른 눈동자로, 팀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난 너를 믿어, 팀."
몸을 돌리려던 팀이 멈칫하며 코너를 보았다. 흔들림 없는 우직한 눈빛이었다. 늘 그랬다. 코너는 늘 그랬다. 커다랗고 굵은 기둥처럼, 늘 강했다.
"이 세상 모두가 널 부정해도, 설사 네가 너 스스로를 부정하더라도, 넌 로빈이야. 나한텐 네가 로빈이야. 내게 진짜 로빈은 너밖에 없어, 팀."
팀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코너는 그가 일부러 소리 내어 말하지 않더라도 그의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심장소리. 너무나도 선명하게 들려오는 심장 소리가 있었다.
"그리고 난 로빈을 믿어."
"..코너, 난.."
팀은 급히 그를 불렀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숨과 침을 함께 삼키며 움직이는 목울대는 카울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팀은 천천히 시선을 떨어트렸다. 상대의 시선을 받아내기가 벅찼다. 참으로 오랜만에 느끼는 기분이었고, 생경해서 힘겨운 감각이었다.
"..브루스는 살아있어."
그렇게 말하면서도, 팀은 목이 메는 것을 애써 참았다. 들키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숨을 내쉬었지만, 상대는 고담의 수많은 소음 사이에서도 자신의 목소리를 알아듣는 친구였다. 과연 숨길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행운을 빌어, 로빈."
훌쩍 떠올라, 지평선 너머로 멀어져간다. 팀은 멀어져가는 슈퍼보이의 모습을 새삼 돌아보지 않았다.
"잘 가, 코너."
중얼거림에 가까운 인사는 듣는 이도 없이 허공으로 흩어졌다. 그가 이 작은 목소리까지 들었을지, 귓가를 빠르게 스쳐지나가는 매서운 바람소리를 뚫고 자신의 작은 목소리가 그에게 가서 닿았을지, 그는 자신할 수 없었다. 차라리 닿지 않았기를 바랐다.
팀은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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