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질하는 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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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공방 지벨

프롤로그


데네브는 마땅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 답답함을 무척 싫어했다. 스스로가 작문에 대한 재능을 전혀 가지고 태어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드는 참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불평을 해본들, 이곳에 있지도 않은 교수가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리는 없었다. 이미 정해진 과제의 내용이 바뀔 리도 없었다.

데네브는 한숨을 푹 내쉬다가 지하실에서부터 걸어 올라오는 묵직한 발소리를 들었다. 시계를 돌아본 데네브는 한숨을 푹 쉬며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 뭐야. 너 아직 안 갔냐?”

아저씨가 늦게 나오니까 그렇죠. 부르러 들어갈 수도 없고.”

문고리를 잡은 채 지하실로 내려가는 통로에 어정쩡한 자세로 서있던 제임스는, 다시 멈췄던 걸음을 옮겨 가게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 정말 못살아. 아저씨!”

또 왜.”

날카로운 데네브의 목소리에 담담히 대꾸하던 제임스는, 데네브의 시선을 따라 자신의 신발을 내려다보고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올라올 때 그 장화 좀 갈아 신고 나오라니까요! 흙발로 가게 안 돌아다니지 말라고 몇 번이나 더 말해야 기억하실 거예요?”

. 한 번에 다 말해주려고?”

그래서 아저씨가 그 버릇 고치기만 한다면요!”

제임스는 슬쩍 장화를 벗어 통로 안쪽에 내려두고, 지하실로 내려가는 문을 닫았다. 그가 열쇠로 문을 단단히 걸어 잠그는 동안, 데네브는 벽에 기대놓은 빗자루를 집어 들었다.

지금 치우고 가려고? 너 오늘 야외실습 있다고 하지 않았냐?”

놔두고 가면 아저씨는 안 치울게 뻔하잖아요. 말라붙으면 더 치우기 힘들단 말이에요.”

아냐, 아냐. 치울게. 치울 테니까 넌 이만 가봐.”

어차피 늦은 거 10분 늦으나 20분 늦으나 별 차이 있겠어요?”

데네브는 자신의 일을 남에게 떠넘기는 것을 무척 싫어했다. 지벨 공방에서 청소와 재고관리를 맡게 된 이후로, 데네브는 적어도 자신이 보는 앞에선 제임스가 빗자루에 손을 대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제임스는 언제나 그런 데네브의 의사를 존중했다. 그는 이번에도 더 이상 데네브를 설득하거나 억지로 내보내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는 맨발로 가게를 가로질러, 자신의 의자로 다가갔다.

푹신한 1인용 소파와 작은 협탁. 가게의 전반적인 운영을 데네브에게 모두 맡긴 제임스가, 가게에 있을 때에는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장소였다. 협탁 위에는 데네브가 조금 전까지 머리를 싸맨 채 고민하던 작문과제의 흔적이 어지럽게 흩어져있었으나, 제임스는 협탁 위로는 시선조차 던지지 않았다.

협탁의 서랍을 열어 엄지손톱 크기의 작은 나무판과 간단한 세공도구를 꺼낸 제임스는, 마법잉크의 뚜껑을 열고 작고 예리한 핀의 끝을 잉크에 적셨다.

 

흙이 묻은 바닥을 깨끗하게 닦아내고 뒷정리까지 끝마친 데네브는 시계를 돌아보았다. 생각만큼 시간이 오래 걸리진 않았다. 집합 장소까지 쉬지 않고 달려가면, 지도교수에게 잔소리를 조금 듣는 정도로 끝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데네브. 이리 와볼래?”

자신을 부르는 제임스의 목소리에 데네브는 뒤를 돌아보았다. 제임스는 세공도구를 정리하고 마법잉크의 뚜껑이 단단히 닫혔는지 확인하는 중이었다.

왜요?”

이거, 나가는 길에 좀 버려주고.”

제임스는 구겨진 종이를 데네브의 손에 쥐여 줬다. 데네브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종이를 슬쩍 들쳐보았다. 전혀 사용한 흔적이 없는 제도용지였다. 제임스는 한쪽 눈썹을 슬쩍 들어 올리며 자신을 쳐다보는 데네브에게 조금 전까지 만지고 있던 나무판을 내밀었다.

데네브는 나무판을 받아들고 뒤집어보았다. 얇은 핀으로 낸 흠을 따라 채워진 마법잉크가 반짝거리며 말라가는 것이 보였다.

쓰는 방법은 알지? 등산로 입구 서쪽에 있는 전나무 옆으로 갈 수 있을 거다.”

아휴, 진짜.. 더 어지르지나 마세요. 저 오늘은 공방에 안돌아오고 바로 집으로 갈 거에요.”

그래. 내일 보자.”

데네브는 제임스에게 인사를 건네고 문을 향해 다가갔다. 지각을 면할 방법이 생겼으니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마음이 가벼워지자 발걸음도 가벼워졌다. 문고리를 붙잡은 데네브는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아저씨.”

세공도구를 마저 정리하던 제임스는 고개를 들어 데네브를 보았다. 데네브는 제임스가 건네준 나무판을 가볍게 흔들어보였다.

고마워요. 토큰 잘 쓸게요.”

그래. 다치지 말고 조심해라.”

 

데네브는 공방을 나오며 문을 단단히 닫았다. 새것이나 다름없으나 사정없이 구겨져버린 제도용지는 공방의 소각로에 버렸다. 그리고 제임스가 건네준 토큰을 두 손으로 잡았다.

토큰의 가운데를 정확하게 부러트리자, 현기증이 이는 것처럼 잠시 눈앞이 까맣게 점멸하며 어지러움이 느껴졌다. 눈을 질끈 감자 문득 코끝을 감도는 나무의 냄새가 느껴졌다. 나무와, 비에 젖은 공기의 냄새. 제임스가 만든 순간이동 토큰을 사용할 때면 늘 맡게 되는 냄새였다.

데네브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냄새를 맡는 일에 집중하고 있었고,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어지러움이 사라져 있었다. 천천히 눈을 뜬 데네브가 본 것은 조금 전까지 앞에 서있었던 공방의 벽이 아니었다. 굵은 전나무 세 그루가 보이고, 산에서 불어오는 저녁바람이 자신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흔들고 지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제임스는 서랍을 닫다가 문득 협탁 위로 시선을 던졌다.

마법학을 공부해야하는 이유와, 지향해야하는 마법사회의 이상향에 대하여

마법교육학원 고등부 1학년 B클래스. 데네비아 스텔라

제임스는 피식 웃으며 협탁 위에 어지럽게 흩어진 종이들을 가지런하게 정리했다. 내용을 읽지는 않았으나, 제목만 읽어보아도 데네브가 쉽게 해결할 수 없는 주제라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데네브는 언제나 철학적인 주제나 개념의 이해를 어려워했다.

마법학아니지. 레이첼 교수님이 내실만한 문제는 아닌데. 그럼 마법과 철학? 그 강좌 아직도 남아있는 건가.”

제임스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공방의 다락으로 올라갔다. 잠시 뒤에 다시 가게로 내려온 제임스의 품에는 몇 권의 책이 안겨있었다.

데네브는 다시 돌아오지 않겠다고 말했지만, 과제를 놓고 간 이상 실습이 끝나는 대로 공방으로 돌아와 과제를 다시 챙겨가야 할 것이다. 제임스는 책 한 권은 협탁 위에, 나머지 책들은 바닥에 대충 쌓아둔 채, 소파에 비스듬하게 기대어 앉았다. 담요를 덮고 편안한 자세를 찾아 두꺼운 책을 펼쳐드는 몸놀림은 무척 익숙하고 자연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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