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슌우키] 감정의 얼굴, 얼굴의 이름
쿄라쿠 슌스이는 수완이 좋았다. 그는 적당히 상냥한 태도를 취할 줄 알았다. 호의적인 태도의, 상급 귀족 쿄라쿠가의 차남. 누구나 한 번 쯤은 접근해보고자 하기에 충분한 존재였다. 만약 친해진다면 좋을 것이고, 눈도장이나 찍어둔다고 쳐도 좋은, 적어도 미운털이 박히지만 않는다면야 손해 볼 것은 없는.
쿄라쿠 슌스이의 주변에는 늘 그런 관계들이 뻗어와 그를 옭아매었다. 그저 늘 적당한 관계들. 그래서, 쿄라쿠 슌스이는 그들에게 그만큼의 친절함을 베풀 뿐이었다. 무난하고, 깊지도 길지도 않은.
쿄라쿠 슌스이는, 타인을 구분하는 것이 어려웠다.
단순히 이름과 얼굴을 정보로서 받아들여 암기하는 것은 어려울 것 없었다. 그러나 그들이 짓는 표정, 그들의 행동, 그들의 말투, 그 모든 것이 틀에 찍어낸 듯이 똑같았다. 개중 몇은 다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결국엔 엇비슷한 친절이었다.
이유 있는 호의에 너무나 오랫동안 노출되어 왔기에, 쿄라쿠 슌스이는 그 감정이 가진 얼굴을 알았다. 그 얼굴에 이름을 붙일 수도 있었다. 쿄라쿠 슌스이는 그 얼굴에 어울리는 이름을 고르기 위해 오랫동안 고민했다. 이윽고 그 오랜 고민이 귀찮아진 쿄라쿠 슌스이는, 얼마 전 적당히 결론을 내렸다.
'무의미'로 하자. 쿄라쿠 슌스이는 무의미에 둘러싸인 채, 오늘도 무의미한 살가움으로 웃었다.
**
"슌스이 군."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오자, 아이들은 흘끗 뒤를 돌아보았다. 쿄라쿠 슌스이는 늘 주변으로 모여드는 무의미의 군집, 그 중심점에 서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 또래의 유일한 군집이 아니었다.
우키타케 쥬시로.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훌륭한 인품과 성품으로 늘 아이들의 중심에 서있는 아이. 그런 우키타케 쥬시로가 쿄라쿠 슌스이를 부를 때면, 모든 아이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잠깐, 괜찮을까?"
"어-. 그래."
우키타케 쥬시로는 누군가를 미워하거나 괴롭히지 않았다. 천성이 박애가 넘치는 것인지는 몰라도, 어떤 사람에게서든 선한 면을 찾아내고 그것을 좋아해주는 재주가 있었다. 그런 우키타케 쥬시로가 유독 쿄라쿠 슌스이에게만은 다른 태도를 취하는 것이었다.
언제부터인지 우키타케 쥬시로는 쿄라쿠 슌스이의 주변을 맴돌기 시작했다. 문득 시선을 느껴 돌아보면,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말간 눈동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시선이 마주치면 우키타케 쥬시로는 밝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쿄라쿠 슌스이는 그 표정이 분명한 호의라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가끔 가볍게 고개를 까닥여 인사를 건네고, 몇 번 마주 웃어준-야마모토 겐류사이는 그 표정을 보고 어린놈의 표정이 벌써부터 음흉하다며 꿀밤이나 놨지만-것뿐인데. 언제부터인지 은근한 괴롭힘이 시작됐다.
"나 잠깐 다녀올 테니까, 너희끼리 먼저 가고 있어."
"아, 그래."
심한 괴롭힘은 아니었다. 동급생인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있노라면 의미 없는 말-정말 의미 없는 말이었을 뿐 악의가 있거나 한 건 아니었다-을 던져 대화의 맥을 끊어놓는다던가, 가끔 무서운 눈초리-솔직히 눈을 부릅뜨고 있을 뿐 워낙 순하고 반듯하게 생긴 미형이라 무섭진 않았다-로 자신을 쏘아보고 있다던가.
그러나 상대가 그 '우키타케 쥬시로'였기에, 그의 성격을 알고 있는 아이들은 한동안 굉장히 당황하고 놀랐다. 알고 보니 쿄라쿠 가문이 우키타케 가문의 원수라도 되는 것 아니냐는 둥, 말도 안 되는 소문이 퍼질 지경이었다.
쿄라쿠 슌스이 역시 우키타케 쥬시로의 행동에 당황하고 있었지만, 다행스러운 일인지 우키타케 쥬시로는 예상하기 쉬운 성격이었다. 그의 모든 행동은 단순했으며, 놀랄 만큼 직관적이었다.
적어도 우키타케 쥬시로의 기행은 쿄라쿠 슌스이가 혼자 있을 때에는 행해지지 않았다. 두 사람은 늘 누군가에게 둘러싸여 있었기에 무척 드물게 찾아오기는 해도, 두 사람만이 남게 될 때의 우키타케 쥬시로는 쿄라쿠 슌스이에게도 친절했다. 다른 이에게 대하는 것보다도 더욱.
그러나 문제는 누군가가 함께 있을 때였다. 정확히는 쿄라쿠 슌스이가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 그가 누군가와 대화를 하던지, 함께 무언가를 하고 있던지 하는 경우.
쿄라쿠 슌스이가 판단하기에 '누군가의 눈앞에서 자신을 방해할 기회가 있을 때'에만 튀어나오는 행동이었다.
**
'우키타케군. 네가 쿄라쿠군을 별로 안 좋아한다는 건 알고 있는데 말이야.'
'응? 무슨 말이야?'
'아니, 이해는 할 수 있어. 너야 워낙 반듯한 녀석이니까 그런 성격인 쿄라쿠군이 마음에 안 들 수는 있지만.. 너무 신경 쓰거나 시비는 걸지 마. 전혀 너답지 않다구.'
'아..'
고의는 아니었지만 언젠가 지나가다 훔쳐들었던 대화. 당황한 듯 더듬거리던 우키타케 쥬시로의 목소리. 그렇기에 쿄라쿠 슌스이는, 제법 시간이 지난 지금도 그 대화를 기억하고 있었다.
별다른 내용은 없는 대답이었으나, 평소의 우키타케 쥬시로는 당황스러울 만큼 거침없는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긍정, 부정, 어떤 내용의 대답을 했더라도 뇌리에 남았을 터였다. 그것이 탄식인지 신음인지 알 수 없는 발음뿐이었다고 하더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기억 속에 새겨진 것은 언어가 아니었다. 그저, 그 목소리.
**
다시 쿄라쿠 슌스이가 파악한 우키타케 쥬시로의 기행으로 돌아오자면, 쿄라쿠 슌스이가 우키타케 쥬시로의 부름에 매번 응하는 이유는 단순했다.
"오늘도 바람이 좋네."
"그렇지?"
우키타케 쥬시로는 대부분 대화를 방해하는 정도에서 그칠 뿐, 쿄라쿠 슌스이를 밖으로 불러내는 날은 많지 않았다. 그리고 그 뒤에 건네는 첫마디는 매번 날씨가 좋다는 둥, 하늘이 예쁘다는 둥, 바람이 선선하다는 둥 하는 말뿐이었고, 이젠 쿄라쿠 슌스이가 그 첫마디를 대신 뗄 정도가 되었다.
**
쿄라쿠 슌스이는 자신이 처음으로 먼저 말을 건넸던 날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여섯 번째였던가, 일곱 번째였던가. 쿄라쿠 슌스이는 몇 번이나 영문도 모른 채 불려나와 시답잖은 대화를 몇 마디 나누고, 수업이 시작할 즈음 다시 교실로 돌아가기를 반복해왔다.
그 날도 어김없이 부름을 받았고, 함께 시시덕거리던 아이들에게 인사를 하느라 조금 뒤늦게 교실을 벗어났다.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으나, 쿄라쿠 슌스이는 당황하지 않았다. 우키타케 쥬시로가 그를 데려가는 장소는 늘 똑같았다.
영술원 교정, 건물과 건물 사이의 작은 뜰. 정원이라고 부를 수도 없을 작은 공간. 푸른 하늘 아래 서있는 우키타케 쥬시로의 뒷모습은 부드러운 햇빛을 받아 희게 빛나고 있었다.
쥬'시로'. 그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땐 지나치게 정직한 이름이라고 생각했더랬다. 쿄라쿠 슌스이는 짧은 생을 통틀어, 그만큼 흰 색이 잘 어울리는 사람을 본 일이 없었다.
이름을 적는 글자야 달랐다지만.
'오늘도 날씨가 좋네.'
좋은 바람 아래의 짧은 대화는 매번 우키타케 쥬시로가 운을 떼어왔으나, 오늘은 쿄라쿠 슌스이가 먼저였다. 왜 그럴 마음이 내켰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아무렴 어때. 크게 어려운 일도 아니고, 말 한 번 먼저 건다고 큰 일이 날 것도 아니고.
쿄라쿠 슌스이는 자신을 돌아보는 우키타케 쥬시로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머리카락 아래로 보이는 마른 목덜미는 희었다.
아니, 목덜미나 머리카락 따위로 한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어지러울 만큼 잘 어울리는 흰색 일색의 하얀 사람이었다.
'응. 그렇지?'
쿄라쿠 슌스이를 돌아본 우키타케 쥬시로는 환하게 웃어보였다. 슌스이는 그 웃음에 당황해 저도 모르게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악의가 없다는 표현으로 설명될 것이 아니었다.
지금껏 한 번도 본 적 없을 만큼, 분명하고 선명한 기쁨과 호의였다.
그러나 쿄라쿠 슌스이는 마음을 정리해내는 일에 능숙했다. 당황한 눈빛은 밖으로 비쳐 나오지도 못했을 터였다. 낯설든 어쨌든, 결국은 호의의 표현이었다. 나쁠 것은 없었다.
이상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보기 좋은 표정이었다. 동시에 아직 이름을 알 수 없는 감정이었다. 누구와도, 무엇과도 다른 얼굴을 한 감정.
그 날부터 쿄라쿠 슌스이는, 이따금 먼저 우키타케 쥬시로에게 말을 걸었다. 누구도 자신에게 보여주지 않는 얼굴이기 때문에. 그 감정에 이름을 붙일 수 있을 때까지 몇 번이고 마주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어쩌면 단지, 보기 좋았던 그 표정을 한 번 더 보고 싶어 할 뿐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사심 없는 순수한 웃음에 압도당한 쿄라쿠 슌스이의 생각은, 거기까진 미치지 못했다. 그저 그 웃음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싶어 할 뿐이었다.
**
우키타케 쥬시로가 쿄라쿠 슌스이를 불러내는 날에는, 어김없이 하늘이 예뻤다. 바람은 부드럽고, 날씨는 좋았다. 날씨에 대한 인사가 끝나면 평범하고 일상적인 대화가 오갔다.
우키타케 쥬시로는 나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누가 무엇을 해냈다더라. 누가 누구와 화해를 했다더라. 누가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받았다더라, 하는 일들.
영술원 안의 소문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이야기들. 쿄라쿠 슌스이는 이미 진즉에 알게 된 이야기들을 다시 한 번 듣게 될 뿐이었다.
그러나 듣기가 좋았기 때문에, 쿄라쿠 슌스이는 그것을 막지 않았다. 순진하게 들리는 소문을 다 믿어버리는 모습이, 그 두서없는 소문들 중에서도 귀신같이 좋은 이야기만을 골라내는 모습이 신기하고 보기 좋았다.
적당히 맞장구를 치다가 대화가 끝날 즈음이면, 다음 수업을 시작할 시간이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몸이 약한 우키타케 쥬시로는 서둘러 움직이는 것을 힘들어했고, 다음 수업이 있는 교실을 향해 천천히 걸어가면 얼추 시간이 맞았다.
그러나 오늘은 우키타케 쥬시로의 귀에까지 흘러들어간 소문이 좀 적었던 탓인지, 소문의 대부분이 썩 유쾌하거나 즐겁지 않은 내용이기 때문인지, 대화가 조금 더 빨리 끝나버렸다. 지금 돌아가면 교실에 남아있는 친구들과 대화를 좀 나누다가 수업에 들어갈 수 있을 터였다.
그리고 쿄라쿠 슌스이가 지금껏 우키타케 쥬시로를 관찰해온 바에 따르면, 우키타케 쥬시로는 그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을 터였다.
우키타케 쥬시로의 표정을 읽는 것은 무엇보다 쉬웠다. 쿄라쿠 슌스이는 데로록 눈동자를 굴리는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여기까지 불려나와 지금까지 대화를 했으니, 몇 분 정도 더 장단을 맞춰준다고 달라질 것은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말이야.”
쿄라쿠 슌스이가 입을 열자, 우키타케 쥬시로는 당황한 듯 눈을 깜빡였다. 쿄라쿠 슌스이는 대부분의 관계에서 청자의 위치를 고수하려 했기 때문에. 그러나 우키타케 쥬시로의 표정에선 곧 당황의 빛이 사라지고, 다시 예의 그 기쁜 표정이 떠올랐다.
그 표정은 몇 번을 보아도 쿄라쿠 슌스이를 당황하게 했다. 낯선 표정은 언제나 적응하기 힘들었다. 더군다나 그런 표정을, 그런 감정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단 한 명뿐인 경우라면 더더욱.
그러나 한 번 입을 뗀 이상 말을 끊을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쿄라쿠 슌스이는 여전히 당황한 채, 가장 먼저 떠오른 문장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넌 왜 그렇게 나를 싫어해?”
그리고 자기가 내뱉은 말의 의미를 깨달은 것은, 그 다음이었다.
“응?”
깜빡. 우키타케 쥬시로는 쿄라쿠 슌스이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반듯한 눈매를 가진 눈이 천천히 깜빡였다. 그제야 아차, 하는 마음이 되었지만 이미 뱉어버린 말을 적당히 수습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자신 없는 분야는 아니었다. 쿄라쿠 슌스이는 거의 모든 관계에서 앞장서서 관계를 이끌어가려 하지는 않았으나, 적당히 흐름을 타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방향을 틀어내는 일 정도는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었다.
“아니, 내가 널 잘 안다고는 못하겠지만 말이야. 네가 이렇게까지 신경 써가면서 날 괴롭힐 정도면 너한테 어지간히 미운털이 박혔나싶었나 싶어서 이젠 궁금할 지경이거든.”
“아..”
쿄라쿠 슌스이는 우키타케 쥬시로의 목소리를 기억하고 있었다. 적어도 그가 기억하는 목소리는 두 가지였다.
평소의 망설임 없고 언제나 직선적인, 막힘없는 당당한 목소리. 그리고 지금의 목소리. 당황한 목소리. 탄식인지 신음인지 분간할 수 없는, 그저 한 음절의 발음.
기억 속의 목소리에는 얼굴이 없었다. 얼굴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 목소리에 얽힌 감정, 그 감정이 가진 얼굴. 실제로 보지 못한 얼굴은 제멋대로 상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지금 두 눈으로 보게 된 우키타케 쥬시로의 얼굴은, 쿄라쿠 슌스이가 상상했던 얼굴과는 달랐다.
그런 얼굴이었구나.
쿄라쿠 슌스이는 그렇게 생각하며 말을 이었다.
“이렇게 번거롭게 매번 불러낼 필요 없다고. 넌 오래 걷는 것도 힘든 몸이잖아? 그냥 마음에 안 드는 게 있으면 나한테 직접…”
“아, 아니!”
우키타케 쥬시로는 다급한 목소리로 쿄라쿠 슌스이의 말허리를 잘랐다. 우키타케 쥬시로는 평소 동년배는 물론 학년 아래의 후배들에게조차 깍듯하게 예의를 갖추는 사람이었다.
오늘은 예상외의 모습을 많이 보여주는구나. 본인도 당황하고 있는 것일까. 그래, 본인의 입에서 왜 자신을 싫어하냐는 질문을 듣고서도 평정을 유지할 수 있는 뻔뻔함은 그들 또래의 아이들이 가지고 있긴 힘들었다.
사람 사이의 관계에선, 언제나 당황하는 쪽이 상대방의 페이스에 말려들게 되어있었다. 당황한 상대가 평정심을 되찾기 전 다시 뒤흔들고, 멈칫하는 사이에 원하는 것을 취한 뒤,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상대를 밀어버리고 자신은 빠져나온다.
간단한 일이었다. 적어도 쿄라쿠 슌스이가 본 우키타케 쥬시로는, 재빨리 마음을 다스려 평정심을 되찾고 상대의 틈을 파고드는 신경전을 벌일 수 있는 성품은 아니었다.
"너를 괴롭히겠다던가, 그런 생각 한 적 없어!"
"허어? 없긴. 그럼 왜 매번 꼬박꼬박 나를 여기까지 불러내는 건데?"
"그건 그냥, 오늘 하늘이 예쁘고 날씨가 좋다는 걸 너한테 알려주고 싶어서.."
우키타케 쥬시로는 말을 하다가 갑자기 입을 꾹 다물었다. 하얀 손가락이 핏기 없는 입술을 반쯤 가렸다. 쿄라쿠 슌스이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입술을 가린다는 것, 얼굴과 얼굴 사이에 손을 끼워넣는 것은 분명한 방어적인 자세다. 변명이라고 하기엔 조금 우스운 이유라는 걸 본인도 알고 있는 것인지. 어쩐지 흥미가 떨어지는 것 같아서, 쿄라쿠 슌스이는 하늘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이제 적당히 침묵을 지키다가, 적당히 상대를 정리해내고, 적당히 교실로 돌아가면 될 것이다. 이런 것은 말싸움이라고 할 것도, 신경전이라고 할 것도 없는 단순한 대화였다. 이정도로 순진한 상대는 차라리 상대하기 편한..
"미안해."
"..응?"
쿄라쿠 슌스이는 갑작스레 튀어나온 사과의 말에 한 박자 늦게 반응했다. 아직 생각이 다 정리되기도 전, 푸른 하늘을 멍하니 응시하던 쿄라쿠 슌스이의 시선은 우키타케 쥬시로의 얼굴로 옮겨갔고, 쿄라쿠 슌스이는 또 한 번 당황하여 입을 꾹 다물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널 괴롭히려던 의도는 아니었어."
"아니, 저기.."
"귀찮고 불쾌했다면 미안해. 넌 평소에 하늘을 잘 안 올려다보니까, 그냥 하늘을 보여주고 싶다고 생각했었는데.."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한 채, 눈을 내리깐 우키타케 쥬시로의 모습은 오늘 보았던 그 어떤 것보다도 낯설었다.
"사실은 그게 아니었나봐, 나도 지금 알았어. 그냥.. 그냥, 마음에 안 들었었나봐. 정말 미안해."
"..그러니까, 내가 마음에 안 든다고?"
쿄라쿠 슌스이는 이 대화가 어디로 흐르고 있는지, 어디로 튀어갈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한없이 밑으로 가라앉는 우울한 표정의 우키타케 쥬시로는 어쩐지 조금 전보다 좀 더 핼쑥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반짝이며 빛날 정도로 생기 넘치던 표정이 사라지자 야위고 병자의 기색이 남아있는 얼굴이 제대로 보인 것일지도 몰랐다.
"아니! 그런 건 아냐, 절대로!"
"흠.."
"..미안. 나도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네."
쿄라쿠 슌스이는 우키타케 쥬시로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우키타케 쥬시로는 대답을 회피하려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알 수 있었다.
우키타케 쥬시로는 언어는 생각을 거쳐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우키타케 쥬시로는 언제나 자신의 마음과 감정을, 진심을 뱉어내는 사람이었다. 그의 ‘모른다’는 단어는 회피와 외면이 아니었다. 다른 많은 이들의 것과는 달랐다.
“그럼 내가 싫은 건 아니라는 말이야?”
“그래.”
“그런데 하여튼 교실에서 나를 보면 뭔가 마음에 안 들긴 했고?”
“응.”
“그리고 무작정 하늘을 보여주겠다고 나만 따로 불러내서, 매번 여기까지 데리고 나왔다는 말이지? 하늘이 예쁘고 날씨가 좋다고?”
우키타케 쥬시로는 쿄라쿠 슌스이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쿄라쿠 슌스이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인지라, 당황스러우면서도 피식 웃음이 났다.
쿄라쿠 슌스이는 우키타케 쥬시로에게로 다가갔다. 우키타케 쥬시로는 여전히 정확한 단어를 고르지 못한 채 생각에 잠겨있었다.
제 감정의 정체를 알았더라면 우키타케 쥬시로는 대답을 망설이지 않았을까. 쿄라쿠 슌스이는 어쩐지 우키타케 쥬시로라면 그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단순한 생각보다는 거의 확신에 가까웠다.
쿄라쿠 슌스이는 턱하니, 우키타케 쥬시로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우키타케 쥬시로는 놀란 얼굴로 제 얼굴 가까이 바짝 다가온 쿄라쿠 슌스이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깜빡. 동그랗게 뜬 눈은 어린아이처럼 순하지만 반듯한 눈매를 하고 있었다.
“이건? 기분 나빠?”
쿄라쿠 슌스이의 물음에 우키타케 쥬시로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목덜미를 살짝 덮는 하얀 머리칼이 흔들렸다.
“아, 아니! 전혀 아니야.”
“좋아, 그거면 됐어.”
우키타케 쥬시로는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쿄라쿠 슌스이를 쳐다볼 뿐이었다. 그 거침없는 시선에 괜스레 얼굴이 간지러워진 쿄라쿠 슌스이는 히죽 웃어보였다.
“그만 돌아가자고. 수업 시작할 시간 다 됐으니까 말이야, 쥬시로.”
갑작스레 불린 자신의 이름에 놀라던 우키타케 쥬시로는, 쿄라쿠 슌스이가 움찔 놀랄 정도로 환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알았어, 슌스이.”
겨우 이름 한 번 불린 것이 뭐라고, 우키타케 쥬시로의 얼굴에는 조금 전의 우울함은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그저 마냥 기쁨만이 묻어나는 표정이 쿄라쿠 슌스이는 결국 나지막한 소리를 내며 웃어버리고 말았다.
‘다른 아이들과 노는 것이 싫다’는 어린아이 같은 질투와 소유욕은, 쿄라쿠 슌스이가 진짜 어린아이였을 때에도 겪어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당황스러울 정도로 솔직한 질투, 그 자체가 낯설어 갈피조차 잡지 못하고 혼란스러워하는 순수함, 그리고 정체도 모를 감정에마저 솔직하게 반응하여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는 행동력.
그 모든 것들이 놀라울 만큼 귀엽게 느껴져 버린 탓에, 쿄라쿠 슌스이는 적어도 우키타케 쥬시로가 조금 더 자랄 때까지는 그를 돌봐주기로 마음먹었다.
우키타케 쥬시로가 자신에게 품은 감정이 우정 이상의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그 뒤로도 우키타케 쥬시로가 쿄라쿠 슌스이를 일곱 번쯤 더 불러낸 뒤였다.
우키타케 쥬시로의 소유욕이 쿄라쿠 슌스이가 처음 예상했던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무겁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은 그로부터 약 두 달 정도가 경과한 시점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쿄라쿠 슌스이는 아무것도 예상하지 못했다. 조금 더 자세히 살폈다면, 주의 깊게 생각해 보았다면, 어쩌면 알아챌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쿄라쿠 슌스이는 조금 흥분해있었다.
꽤 오랫동안 고민하고 또 고민했으나 결코 이름을 붙일 수 없었던 얼굴에 붙일 이름을, 그를 향해 이 세상에서 단 한 사람, 우키타케 쥬시로만이 보여주는 그 얼굴에 붙일 수 있는 적당한 단어를 드디어 찾아낸 탓이었다.
이 감정의 이름은 ‘애정’으로 해두자. 자신을 향해 환히 웃는 우키타케 쥬시로를 바라보며 쿄라쿠 슌스이는 그렇게 생각했다.
의도치 않게 감정의 본질을 꿰뚫었다는 사실은 알지 못한 채, 쿄라쿠 슌스이는 자신의 손목을 조심스럽게 감싸 쥐는 온기를 느끼며 미소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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