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라이] 2017.03.19 롤겜만화 전력 4회 - 고백
[이슬라이] 2017.03.19 롤겜만화 전력 4회 - 고백
“라이퀴아.”
“어. 왔냐. 자쿠 지금 자리비움인데. 똥 싸고 온다고.”
“아, 그래? 기다리지 뭐. 이거 먹을래? 시장에서 팔더라, 사왔어.”
“헐, 웬일.”
“남의 집 오는데 빈손으로 오는 건 예의가 아니잖아.”
“미친. 인성하자가 존나 상식적인 소리를 했어.”
이슬레이는 에피타이저의 황당하다는 얼굴을 보며 소리를 내어 웃었다. 아하하, 허공으로 흩어진 목소리는 와작, 에피타이저가 단단한 과자를 깨무는 소리에 밀려났다.
“오, 맛있네.”
“앉아도 돼?”
“그러던가.”
“고마워, 에피타이저.”
“이 새끼가 은근슬쩍 친한 척?”
이슬레이는 자리비움 상태의 라이퀴아가 앉아있는 소파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소파는 출렁이지도, 풀썩이며 먼지를 뿜지도 않았다. 진짜 잠든 것도 아닌데, 자는 아이를 깨우고 싶지는 않다는 듯한 태도였다.
“나 지금 잠깐 나가야 하는데.”
“어디 가?”
“자경단 일 때문에.. 수배범 떴대서. 자쿠 좀 전에 가서 오래 걸릴지도 모르는데. 계속 있을 거야?”
“괜찮아. 기다리지, 뭐. 아, 타이난은?”
“몰라, 아직 접속 안했는데.. 그럼 나 갔다 온다. 어지르지 말고 있어. 하우징 건드리지도 말고.”
“아하하. 알았어. 잘 다녀와, 에피타이저.”
에피타이저는 어깨를 으쓱이며 하우징을 나섰다. 저 새끼가 원래 저렇게 친화력이 좋은 새끼였나. 캐릭터 바뀌어도 너무 바뀐 것 같은데. 아, 몰라. 과자 맛있는데 이따 올 때 사올까. 템 이름 뭐지.
***
하우징이 닫히자, 찾아드는 것은 적막함이었다. 예민한 청각엔 벽 너머의 소리까지 쉽게 들려왔으나, 이슬레이는 어렵지 않게 그 소리들을 무시할 수 있었다. 아, 좋다. 조용하다, 라이퀴아. 이슬레이는 그렇게 말하며 소파에 기대앉은 라이퀴아를 돌아보았다.
자리비움 상태인 라이퀴아는 마치 잠이라도 든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이슬레이는 라이퀴아의 검은 머리칼을, 그 아래로 보이는 눈썹을, 뻗어 나온 콧대를, 작은 입술을, 흰 얼굴을 차례대로 눈에 담았다. 아직 어린 소년 같은 골격은 말랑하고 부드러운 인상을 주었다.
감긴 눈꺼풀 속의 검푸른 눈동자를 떠올리면, 어쩐지 가슴께가 간지럽다. 네 시야에 내 얼굴이 담기고, 네가 나의 존재를 인지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목덜미가 오싹해질 정도의 기쁨을 느껴.
“오늘도 사과하려고 왔어. 타이난이 오기 전에 끝내고 싶은데. 걔가 오면 시끄럽고 귀찮아서.”
니가 양심이 있으면 그딴 소리는 못하지?! 쨍하게 울리는 목소리가 귓가에 어른거리는 것 같았다. 아, 시끄러워. 이 집은 분명 조용한데.
“라이퀴아.”
이슬레이는 소파 위에 놓인 라이퀴아의 손을 조심스럽게 쥐었다. 손등을 부드럽게 쓰다듬다가, 손가락 사이로 자신의 손가락을 밀어 넣어 깍지를 낀다.
고작 게임일 뿐인데. 지나치게 현실적인 감각은 네 손의 온기가 진짜인 양 착각하게 만들어버린다.
“미안해.”
연습. 네 얼굴을 떠올리며 몇 번이나 혼자 되놰봤고, 네 얼굴을 바라보며 몇 번이나 중얼거렸던 단어가 다시 한 번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몇 번을 말해도 모자랄 말이라는 것을 알아. 결코 바닥을 메울 수 없다는 것도 안다.
매일 네게 인사를 대신하여 건네는 사과가 입에 붙어 버릴까봐, 나는 미안하다는 단어 한 마디에 신경을 바짝 곤두세운다. 익숙해지면 퇴색되기 마련이기에. 그리고 나는 내가 얼마나 염치가 없는 인간인지를 알고 있기에. 네게 건네는 사과는 늘 새롭고, 어색하고, 낯설어야했다.
“보고 싶다.”
네 눈동자를 보고 싶다. 네 몸이 움찔하고, 감긴 눈꺼풀을 들어올리고, 나를 발견하고, 네 손을 잡은 나의 손을 발견하고. 손을 재빨리 빼내면서 아, 뭐야. 왜 이렇게 바짝 붙어있어. 좀 떨어져, 징그러워. 퉁명스레 타박을 놓는 너의 모습이 보고 싶다.
이슬레이는 천천히 고개를 숙여, 라이퀴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네 얼굴이 시야에서 사라진다. 눈에 보이는 것은 네 무릎과, 발끝, 하우징의 바닥. 그 정도 뿐.
“..많이 좋아해, 라이퀴아.”
이슬레이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눈을 감았다. 네가 돌아오면 소스라치게 놀라며 나를 밀쳐내겠지. 듣는 사람이 부재한 고백에 감정을 담는 것은 이토록 간단한 일이다.
이슬레이는, 자신이 라이퀴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순간, 그의 위에서 자리비움 표시가 사라졌던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잡힌 손을 꼼지락거리지 않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고 있는 라이퀴아를 눈치 채지도, 새빨갛게 달아오른 라이퀴아의 얼굴과 귓바퀴를 보지도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