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반] 새로운 로빈
알프레드 페니워스는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는 작은 소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브루스 웨인은 고담에서 가장 유명한 이름이었고, 웨인 저택을 찾아오는 귀찮은 손님들도 많았다. 그런 불청객들을 쫓아내는 것 역시 알프레드의 업무 중 하나였고, 그는 방문객의 행색이나 표정만 보고서도 상대가 어떤 의도로 웨인 저택을 방문했는지를 유추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지금 자신의 눈앞에 당당히 서있는 작은 소년은 그가 예상하지 못했던 종류의 손님이었다. 하지만 알프레드는 당황하지 않고, 침착한 표정으로 상대의 기색부터 살폈다. 열다섯은 되었을까 싶은 어린 아이가 그를 향해 예의바른 미소를 지어보이고 있었다. 깨끗한 옷과 깔끔하게 손질 된 검은 머리칼, 순한 인상의 얼굴과 왜소한 체격의 아이였다.
"당신이 알프레드 페니워스군요. 맞지요? 웨인 저택의 집사님."
"그렇습니다, 꼬마 도련님. 무슨 일로 찾아오셨는지요? 데미안 도련님의 친구이십니까?"
"아니요. 제가 찾아온 건 브루스 웨인도, 데미안 웨인도 아니에요."
소년은 여전한 미소를 띤 채, 주변을 조심스럽게 둘러보았다. 두 손을 얼굴까지 끌어올려 손나팔을 만들고, 소리를 죽여 속삭이는 모습에선 어린아이다운 천진함이 느껴져 알프레드는 보이지 않을 만큼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이려 했다. '아이다움'은 이 저택에서 사라진지 오래였다.
그러나 이어진 소년의 대답에, 알프레드의 입꼬리는 조금 전보다 더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전 배트맨과 로빈을 찾아온 거라고요."
데미안 웨인은 자식을 티모시 드레이크라고 소개한 꼬마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험한 일이라곤 겪어본 적 없을 것처럼 생긴 도련님에, 남의 저택에 불쑥 쳐들어온 주제에 주눅 드는 기색조차 없는 당당한 태도도 얄미웠다. 그러나 가장 고까운 것은, 자신을 대놓고 무시하는 태도였다.
브루스보다 먼저 도착한 데미안이 응접실로 들어섰을 때, 티모시는 알프레드가 내왔을 홍차를 마시며 안락의자에 몸을 파묻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와 티모시의 맞은편에 놓인 의자 하나를 골라 앉을 때까지, 자신을 향해 시선을 한 번 흘끗 던졌을 뿐 그 이상의 인사나 눈짓은 없었다.
그러나 브루스가 응접실로 들어왔을 때, 티모시는 찻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먼저 악수를 청했다. 데미안이 보기엔 가증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예의바른 미소를 띤 채, 그제야 자신의 이름을 소개했다. 악수하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데미안은 티모시가 하는 말을 전부 기억해뒀다가, 조금이라도 틀린 말을 했다간 돌아가는 길에 알프레드와 브루스의 눈을 피해 정강이를 한 대 걷어차 주리라 다짐했다.
"그래, 내게 할 말이 있다고 했다면서? 배트맨과 로빈에 대해 할 말이 있다니. 물론 웨인 기업이 배트맨을 후원하는 것은 맞지만, 그들에 관한 일이라면 내 저택에 개인적으로 찾아오기보단 회사를 통해 문의를 하는 것이 간단했을 텐데."
브루스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뭇여성들의 마음을 녹이는 자상한 억만장자의 목소리였다. 그러나 티모시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브루스가 다시 입을 열기 전, 그는 분명한 목소리로 모든 단어에 힘을 주어 말했다.
"나를 로빈으로 삼아주세요."
티모시가 무슨 말을 하건 무시하려했던 데미안은 그 말에 퍼뜩 고개를 들고 티모시를 사납게 쏘아보았다. 그러나 티모시는 여전히 데미안에겐 시선 한 번 주는 일 없이, 그의 존재 자체를 잊기라도 한 것처럼 그를 무시하며 브루스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네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구나."
"난 당신이 배트맨이라는 것을 알아요, 브루스. 그리고 당신의 아들이 로빈이라는 것도 알고 있어요."
티모시는 그제야 데미안을 향해 흘끗, 아주 짧은 시선을 던졌다. 그를 바라보기 위함이라기 보단, 그를 향해 고갯짓을 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시선이 닿은 것뿐이었다.
"그리고 당신의 로빈은 잘못됐다는 것도 알아요. 당신의 로빈은 옳지 않아요, 브루스."
"하, 네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는 알고 있는 거냐, 꼬맹아? 어디서 되먹지도 못한.."
"데미안."
데미안은 티모시의 말에 울컥해 소리치려다 브루스의 부름에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나 눈빛만은 더할나위없이 흉흉했다. 브루스가 없었더라면, 저 망할 꼬마는 진즉에 바닥에서 나뒹굴고 있었을 것이다.
"당신의 로빈은 배트맨과의 균형을 맞출 수 없어요. 그는 너무 폭력적이니까요. 하지만 난 아니에요."
"글쎄. 좋은 생각 같지는 않구나. 네가 훌륭한 탐정이라는 것은 알겠다. 하지만 이 일은 너무나 위험하고, 아마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간단하지도 않을 거란다."
"난 옳은 로빈이 될 수 있어요, 배트맨. 왜냐하면 난 당신을 이해하고 있으니까요. 난 당신의 선을 넘지 않는, 당신과 균형을 맞출 수 있는, 그런 바람직한 로빈이 될 수 있다고요."
브루스의 완곡한 만류가 무색하도록, 티모시의 눈은 반짝이고 있었다. 점점 사나워지는 데미안의 기색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확신에 찬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브루스 웨인을 열렬히 바라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