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커크] My Crew - 7. 항생제
*칸커크
*리부트 스타트렉 영화만 감상한 뒤 쓰는 날조글입니다. 캐릭터 붕괴, 원작 붕괴, 원작 설정 붕괴 주의.
*필자의 칸 편애 주의. 칸 보고 싶어서 쓰기 시작한 글이라 어쩔 수가 없습니다.
[My Crew]
7. 항생제
- “내 말을 믿나?”
“응? 나한테 거짓말 했어?”
칸이 탄 함선은 그대로 다른 함선을 향해 돌진했다. 최대로 끌어올린 출력으로 빠르게 날아드는 함선은, 그대로 다른 함선과 충돌했다. 두 함체가 산산이 부서지며 큰 폭발이 일어나고, 그에 휘말린 다른 함선이 연쇄적으로 부서지며 폭발했다.
그 요란한 폭발들로 엔터프라이즈가 크게 요동쳤다. 직접적인 손상은 없었으나, 선원들은 혼미해진 정신을 가다듬으려 고개를 가볍게 털었다.
“체콥? 어떻게 됐나, 체콥?”
“아으으…….”
통신기 너머로는 체콥의 앓는 목소리만 들려왔다. 커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직 기체가 완전히 안정화되지 않았다는 술루의 만류에도 커크는 함교를 벗어났다. 전송실로 가는 통로의 전등이 깜빡거리며 점멸했다. 함선이 망가지는 일이 또 일어난다는 생각은 만약에라도 하고 싶지 않았다.
엔터프라이즈의 기체가 다시 한 번 크게 흔들렸다. 함교의 화면을 확인할 수 없으니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자신이 자리를 비운 동안에도 스팍이 알아서, 적절한 조치를 취해줄 것이다. 커크는 벽을 짚으며 비틀거렸다. 앞으로 몇 걸음 걸어가기도 어려울 만큼 심한 진동이었다. 그는 그대로 자세를 낮추고 흔들림이 사그라질 때까지 잠시 기다리려했다.
어지럽게 흔들리는 시야 끝에 거뭇한 형체가 보인 것은 그때였다. 누군가를 어깨 위에 짊어진 사람의 형상이었다. 그 역시 벽에 손을 짚고 있긴 했으나, 그는 심한 흔들림에도 아랑곳 않고 커크를 향해 똑바로 걸어오고 있었다. 커크는 그가 칸이라는 것을 금세 알아보았다. 그런 이질감을 풍길 수 있는 사람은 이 함선 내에 얼마 없었다.
칸은 커크를 보고도 별다른 말을 건네지 않았다. 그가 바로 앞까지 다가왔을 때, 요동치던 함선은 어느 정도 안정되었다. 커크는 그제야 칸이 짊어진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보았다. 그는 의식을 잃은 체콥이었다.
“어떻게 된 거야?”
“넘어지면서 머리를 부딪친 모양이더군.”
“다른 선원들은?”
“부상은 없었다. 단순히 의식만 잃은 선원들은 의자에 고정해두고 이 소년만 데리고 나온 거야.”
커크는 칸에게서 풍기는 검은 피의 냄새에 얼굴을 찡그렸다. 그가 온통 뒤집어쓴, 인간이 아닌 자가 흘린 검은 피에선 역한 냄새가 났다. 칸은 체콥을 커크에게 넘겼다. 핏방울이 후두둑 떨어졌다.
“무슨 짓을 한 거야?”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을 했을 뿐이다.”
“함선을 통째로 들이박아서 연쇄 추돌 사고를 일으키는 게?”
“항로 계산은 완벽했다. 다만 마지막 조작을 하기 전에 엔터프라이즈로 전송되어 왔을 뿐이야.”
커크는 체콥을 들쳐 업으며 칸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피를 대강 닦아낸 얼굴엔 아직 검은 얼룩 같은 자국이 남아있었다.
“미친 놈.”
“또 듣는군.”
칸은 대수롭지 않게 넘겨들으며 커크를 지나쳐 걸어갔다. 커크는 그가 남기는 검붉은 발자국을 바라보다가, 요란하게 울리는 통신기를 들어올렸다.
“그래, 무슨 일이야.”
[어디에 계십니까, 함장님?]
“전송실로 가는 통로야. 체콥이 의식을 잃어서 의무실로 데려가려고.”
[적함은 전멸했고, 나머지 충돌 위험이 있는 대형 잔해들은 페이저를 이용하여 정리했습니다. 더 이상의 위험요소는 없다고 판단되어 전초기지를 향해 워프 경로를 설정하려 합니다. 잔해들로부터 벗어나고 있습니다.]
스팍의 차분한 보고를 들으며 커크는 칸이 걸어간 방향으로 흘끗 시선을 주었다. 그는 이미 모습을 감춘 뒤였다. 남은 흔적은 피로 찍힌 발자국 뿐이었다.
“그래, 그렇게 해. 참, 본즈 거기 있어?”
[예.]
“의무실로 오라고 좀 말해줘. 혹시 방금 충격으로 다친 선원들이 더 있을지도 모르니까 선내에 방송도 좀 부탁해.”
[알겠습니다, 함장님.]
전초기지에 도착한 그들은 여독을 풀 새도 없이 곧바로 보고부터 올려야했다. 칸이 직접 보고를 하는 것이 가장 간단한 일이었지만, 칸은 ‘몸이 좋지 않다’는 핑계로 보고를 커크에게 미뤄버렸다. 커크는 그만큼 설득력 없는 변명도 없을 것이라 생각하며 속으로 불만을 삼켰다.
“그 말을 믿으라는 건가?”
전초기지의 관리소장은 커크의 구두보고를 듣고 영 못미덥다는 표정을 지었다. 스팍의 보조적인 설명이 있었지만, 뜬금없이 나타난 우주함대의 기습이라는 것은 쉽게 믿을 수 있을 것이 아니었다.
“사실입니다. 녹화된 영상은 후에 증거물로 제출하겠습니다.”
스팍은 소장을 향해 담담한 눈빛을 던졌다. 소장은 두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푹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그 대단한 전투를 치렀다는 남자는 왜 오지 않았나? 그도 주요 참고인이니 같이 오는 편이 나았을 텐데.”
“몸이 좋지 않아 쉬고 있습니다.”
“몸이 좋지 않다고?”
존 해리슨이 어떤 인물인지에 대한 사항을 이미 전달받았던 소장은 눈을 가늘게 떴다. 커크는 그 표정을 단번에 알아봤으나, 뻔뻔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네.”
더 이상의 변명은 없었다. 관리소장은 엔터프라이즈의 함장과 부함장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만 돌아가 보게. 이틀 뒤의 정기보고에서 자세한 사항을 듣기로 하지.”
커크와 스팍은 경례를 붙여 올리고 소장실에서 벗어났다.
“젠장, 망할 자식.”
커크는 소장실의 문이 닫히자마자 괜스레 바닥에 발길질을 하며 투덜거렸다. 스팍의 시선이 느껴지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은 커크의 버릇없는 행동거지에 새삼스레 타박을 할 사이는 아니었다.
“날 엿 먹이려고 제 방에 틀어박힌 게 틀림없어.”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 자식은 날 정말, 정말, 정말, 싫어하니까 말이야, 스팍.”
커크는 복도를 스쳐지나가는 여성 연구원에게 눈썹을 까딱여 인사를 보내며 중얼거렸다. 칸이 자신을 좋아할 이유는 없었다. 그에게 마땅히 미움 받아야 할 이유를 꼽아보라고 하면 정작 할 말은 없었지만, 그래도 새삼스레 억울해할 필요는 없었다. 반드시 이유가 있어야만 하는 악의는 벌칸 사이에서나 통할법한 이야기였고, 칸은 야만스러울 정도로 인간적인 본능에 충실한 남자였다.
“내가 올라가지. 서류 작업은 귀찮으니까 네가 좀 해줘.”
“예, 함장님.”
스팍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자 커크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었다. 건물 밖으로 나오자 보이는 것은 푸른 하늘이었다. 약간의 인공적인 조작만으로도 충분한 산소를 머금게 된 대기는 지구와 제법 비슷한 환경을 만들고 있었다.
“엔터프라이즈. 올려줘.”
흰 빛무리에 둘러싸여 전송되어 올라가는 커크를 바라보던 스팍은,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커크는 도킹 허가가 떨어졌음을 알렸다. 술루가 수동으로 엔터프라이즈를 운행하는 동안 커크는 맥코이를 찾았다. 그러나 함교에는 그가 없었다.
“우후라, 본즈는?”
“의료실에 계실 거예요.”
“그래, 고마워.”
커크가 의료실 문을 열었을 때, 의료실 안에는 두 사람 뿐이었다. 맥코이는 침대에 걸터앉아 칸의 말을 듣고 있었다. 꼿꼿이 서있는 칸의 자세는 더할 나위 없이 반듯했고, 표정은 언제나처럼 딱딱했다.
“그게 전부인가?”
“그래.”
“실망스럽군.”
“짐만큼 나를 열 받게 할 수 있는 자식도 그다지 많진 않은데 말이야, 넌 그중에서도 특출한 것 같군.”
칸의 서늘한 청록색 눈동자가 맥코이를 응시하다가 열린 문을 향했다. 그의 무심한 시선을 받은 커크는 헛기침을 하며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여긴 무슨 일이야, 짐? 어디 아프기라도 해?”
“어, 아니. 드디어 우주선에서 탈출할 수 있게 되었다는 소식을 알려주려고 왔는데.”
“오, 그래? 그거 참 젠장 맞게 잘됐군. 이 자식을 당장 생명유지 장비 없이 우주로 던져버리라는 명령이 떨어졌다거나, 그런 소식은 없어?”
“글쎄. 하지만 말은 좀 조심하는 게 좋지 않을까, 본즈. 그 자식은 당장에 네 머리가 반쪽이 나도록 쪼개버릴 수도 있는 놈이라고.”
맥코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의료실을 나갔다. 칸은 멀어지는 맥코이의 뒷모습에는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커크의 눈을 뚫어져라 보고있었다.
“왜 왔지?”
“무슨 소리야? 방금 본즈한테 하는 말 못 들었어?”
“일개 의료 장교에게 겨우 그런 말을 전하려고, 함장이 입항 수속마저 미뤄둔 채 직접 함교 내부를 돌아다닌다는 말인가?”
“미뤄둔 게 아니라 내 부함장에게 일임한 거고, 본즈는 우주를 정말 끔찍하게 싫어해서 말이야. 겨우 그런 말이라고 하기엔 꽤 큰 선물이란 말이야. 그럼 넌 왜 여기에 와있는 건데? 이 함선에서 이 장소랑 가장 상관없는 사람은 너 아니야?”
“말하지 않았나.”
칸의 대답에도 커크는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며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해보였을 뿐이었다.
“몸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약이 필요했고. 의료실을 찾는 것에 그 이상의 이유가 필요한가?”
커크는 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역시 농담하는 센스만큼은 스팍보다 낫다니까. 그래, 어디에서 지낼 거야? 혹시 함선에 이상이 있지는 않을까 싶어서 정밀 검사를 받기로 했어. 일주일 정도는 이 행성에 머무르게 될 거야. 아마 선원들 대부분은 기지에서 지낼 텐데.”
칸은 커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커크가 눈을 가늘게 떴으나 칸은 더 이상의 대답은 하지 않았다.
“아무도 없는 함선에 혼자 남아있겠다고? 아, 물론 당직 선원이나 기술자들은 함선에 남아있겠지만…….”
“문제라도?”
커크는 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없어. 너야말로 필요한 건 없는 건가?”
“항생제가 필요하다. 그리고 함선 내부에 있는 의료 연구 시설의 일부를 사용하고 싶다. 의사는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 알 수 없다며 처방을 거부하더군.”
“그건 나도 동감이긴 한데. 무슨 다른 속셈이 있는 건 아니고?”
“전혀.”
칸의 짧은 대답에 커크는 어깨를 가볍게 으쓱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병자의 기색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그가 항생제를 요구하는 상황도 상황이거니와, 상식적으로 그에게 평범한 항생제가 필요하다는 말을 쉽게 납득할 수는 없었다. 세균감염이, 죽은 사람마저 살려낼 수 있는 특수한 항체를 가진 그에게 문제가 될 리가 없다.
본즈의 성질을 긁고 싶은 모양이지. 커크는 그렇게 생각하며 피식 웃었다. 친구에 대한 장난기가 되살아난 커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원하는 만큼 가져다가 사용해. 본즈에겐 내가 말해두지.”
“내 말을 믿나?”
“응? 나한테 거짓말 했어?”
커크의 되물음에 칸은 입을 다물었다. 눈썹이 미세하게 씰룩였다. 그의 표정을 ‘한심하다’는 뜻으로 읽어낸 커크는 괜스레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네가 허튼 짓 할 사람이 아니란 건 알아. 지구에 남아있는 네 크루들의 안위가 달린 문제니까. 그들의 목숨과 네 자존심이나 자유 같은 것들을 놓고 저울질 해봐야, 네 선택은 뻔하지. 안 그래?”
“지나치게 순진한 생각이야, 함장.”
“진심은 어디서나 통하는 법이거든.”
“그런 바보 같은 환상에선 언제 깨어날 생각이지? 다시 한 번 배신당한 뒤에?”
커크는 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시원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는 칸이 이상하게 생각할 정도로 칸에게 호의적이었다. 칸은 그것이 자신의 마음을 열게 하기 위한 것이라는 노력임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는 모든 방면에서 뛰어났다. 평범한 인간들의 술수나 감정싸움따위야 그에겐 문제될 것도 없을 터다.
커크는 칸을 이른바 ‘교화’시키겠다며 자신의 선원으로 받아들인 터였다. 그의 호감을 사기 위한 노력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다. 칸은 그런 커크의 처신이 못내 못마땅할 것이다. 목적 없는 호의가 있을 리 없다마는, 그 사실을 알고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기껍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얼마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가식에 기대야하는, 무기력한 자신의 꼴이 마음에 들리가 없었다. 그는 칸이었으니까.
“네가 네 손으로 네 사람의 목을 꺾어버리는 꼴을 내 두 눈으로 본다면, 그때는 한 번 고민해보지.”
커크의 말에 칸의 눈이 조금 커졌다. 그러나 커크가 보기엔 시종일관 딱딱하고 무심한 표정일 뿐이었다. 커크가 한 말의 내용 탓에 화가 난 듯도 했다. 그는 칸에게서 시선을 거뒀다. 커크는 그에게서 그 이상의 반응을 기대하지 않기로 했다.
“제임스.”
그래서 칸이 그의 등을 바라보며 그의 이름을 불렀을 때, 커크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를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칸은 오른손을 움찔거리고 있었다. 손을 뻗으려다가 주먹을 쥐며 눌러 참는 것이 보였다.
“왜 그래?”
“…아니.”
칸은 고개를 저으며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났다. 드물게 방어적인 자세에 커크는 의아함을 느꼈으나 칸은 손을 털며 자세를 바로 했다.
“아무것도 아니다. 실수를 한 것 같군. 신경 쓸 것 없다.”
“아니, 다짜고짜 이름을 불러놓고 그런 말을 해봐야……. 그래, 네 마음대로 해. 나 간다.”
커크는 의료실을 나가기 직전에 다시 한 번 뒤를 돌아보았다. 칸은 한 손으로 제 얼굴을 덮은 채, 천천히 숨을 내쉬고 있었다. 천천히 힘이 빠져 쳐지는 어깨를 보면서 커크는 낯섦을 느꼈다. 평소의 그가 공기처럼 한 겹 두르고 다니는 이질감과는 또 다른 감각이었다. 보아선 안될 모습을 본 것 같은 민망함에 커크는 자리를 떴다.
기지 내에 마련된 복지시설은 모든 선원들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커크는 스팍의 도움을 받아 보고서를 작성하는 일이 바빠, 이틀째 몸을 쉴 틈이 없었다. 다만 휴게실 하나를 통째로 차지하고 앉아 푹신한 소파 위에서 작업을 하는 것으로 타협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창밖으로 지나가는 여성 직원들을 바라보며 아쉬운 입맛을 다신 커크는, 소파 위에서 발버둥을 치며 기지개를 켰다.
“하룻밤 사이에 사고를 치진 않았겠지.”
“누가. 네가?”
소파 등받이에 몸을 푹 파묻고 앉아 보충해야할 의약품 목록을 작성 중이던 맥코이가 시큰둥하게 되물었다. 술루와 체콥, 그리고 스카티까지, 다섯 남자가 모인 휴게실은 복작거리고 답답한 공기가 가시지 않았다.
“아니, 나 말고 칸 말이야.”
“아아, 엔터프라이즈에 남아있겠다고 했다며? 그리고 네놈은 그러라고 냉큼 허락해줬고, 의료 장교인 내 의견을 무시하고 항생제를 다 퍼다 줬다고?”
“그냥 항생제일 뿐이잖아, 본즈. 그걸로 설마 폭탄이라도 만들 생각이겠어?”
“모르지. 그 자식 머릿속에 무슨 화학식이 들어있을지 어떻게 알아. 물리공식 몇 줄로 기술자들은 홀랑홀랑 넘어가고 있는 모양이더만. 아무튼 그자식이 요구한 항생제의 양은 말도 안 되는 수준이었다고. 그 정도를 한 번에 처방했다간, 내 의사인생 처음으로 약 먹다가 죽는 꼴을 보겠더구먼.”
“알아서 하겠지. 자살할 생각은 없을 거야.”
“그걸 네가 어떻게 아냐고? 저 잘난 강화인간께서 다시 한 번 스타플릿의 개가 된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다가 약을 들이마시고 죽어버릴지?”
“그야, 너희만 놔두고 죽을 생각은 없는 나랑 똑같을 테니까?”
스카티는 커크의 말을 듣더니 헛기침을 하며 휴게실을 나갔다. 커크의 말에 휴게실 안에는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한 번 죽었던 놈이 말은 잘 한다.”
맥코이의 투덜거림에도 기운이 빠진 것이 느껴졌다. 덜그럭거리고, 자그락거리는 소음만 들릴 뿐,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스카티가 나갔던 문을 부술 듯 열고 들어오며 패드를 흔들어댈 때까지.
“이 양반 이상한 짓 하고 있는뎁쇼?”
“무슨 일이야, 스캇?”
“밤새 뭐 하고 있나 싶어서 좀 살펴보려고 했는데, 방에도 없고 의료실에도 없더라고요. 그래서 여기저기 찾아보고 있었는데, 함교에서 내내 혼자 놀고 있수다.”
“미스터 스카티. 그런 행동은 보안 규정에 어긋나는…….”
커크는 손짓으로 스팍의 설교를 막으며 스카티의 패드를 제 앞으로 끌어당겼다. 스카티는 화면을 조작해 녹화한 영상을 재생시켰다.
불이 꺼진 함교는 무척 어두웠다. 어둠 속에서 사람이 움직이는 형태만이 희미하게 보일 뿐이었다. 키를 보았을 때, 남자인 것이 확실했다. 칸일 것은 뻔했다.
칸은 계기판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간단한 조작 몇 번으로 화면을 켰다. 우주의 모습이 화면 가득 차올랐다. 우주의 연약한 빛이 함교 안을 희미하게 밝혔다. 칸은 천천히 뒤로 돌아 함장의 의자로 다가갔다. 그리고 손을 뻗었다.
의자를 어루만지는 손길은 느릿했으나 탐욕스럽지 않았다. 의자에 천천히, 거만하게 몸을 눕히듯 기대앉는 몸짓은 자연스러웠다. 커크는 칸의 입술이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그는 우주를 바라보며 혼잣말을 하고 있었다. 그의 오른손이 천천히 올라갔다.
허공을 헤집던 그의 손은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손을 잡고, 팔을 쓸어 올리고, 어깨를 한 번 움켜쥐었다가, 뺨을 쓰다듬었다. 자연스러운 손짓이었다. 수도 없이, 몇 번이나 해본 적 있는 동작이라는 것이 드러나는 손짓이었다.
“뭐라고 하는 거지?”
“뭐라고 하고 있어?”
“응. 그런데 어두워서 입모양이 제대로 안보여.”
기억 속의 누군가를 더듬던 칸은 올라간 만큼 느린 속도로 내려갔다. 허벅지 위에 얌전히 놓인 손은 그 뒤로 움직이지 않았다. 동영상을 몇 배속으로 재생을 해보아도, 칸은 굳어버린 돌조각처럼 꼼짝도 하지 않은 채로 아주 오랫동안 함장의 의자에 앉아있었다. 아침을 바라보는 늦은 새벽이 되어서야, 칸은 의자에서 일어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함교 내부를 정리하고 그대로 빠져나갔다.
“뭘 한 거야, 이 자식은?”
“글쎄. 내 의자가 탐이 났나?”
“말조심해, 짐. 이 자식이 잠재적인 배신자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고. 저게 놈이 선상 반란을 꾀하고 있다는 증거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애초에 안 하지?”
“본즈.”
커크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맥코이는 그런 그에게 다시 한 소리를 퍼부으려다가, 한숨을 내쉬며 입을 다물었다.
“스캇. 이거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도청장치라도 설치하라굽쇼?”
“혹시 모르니까 한 번 해봐. 만약에 오늘 밤에도 칸이 함교로 온다면 뭔가 하나라도 건질 수 있겠지. 그 음성파일, 내가 직접 들을 수 있을까?”
“아무렴. 내가 그 정도도 못할까봐.”
스카티의 자신만만한 목소리를 들으며 커크는 웃었다. 그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리자, 그는 당장에라도 준비하겠다며 휴게실을 나가버렸다. 슬쩍 그를 따라 나가려던 커크는, 맥코이와 스팍의 눈총을 받고 앓는 소리를 내며 다시 소파에 몸을 파묻었다.
커크는 침대에 누워 뒹굴며 패드의 화면을 넘기고 있었다. 엔터프라이즈 내부의 모습이 빠르게 지나갔다. 함선 안에 남아있는 선원들 대부분이 잠자리에 들거나 자신의 일에 집중하고 있었고, 칸은 자신의 침대 위에 반듯하게 앉아있었다. 그가 이윽고 침대에서 일어난 것은, 자정이 지나고도 두 시간이 더 흐른 뒤였다.
칸은 유령처럼 일어나 자신의 방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엔터프라이즈의 함교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아직 함선 내부를 돌아다니는 선원들이 간혹 있긴 했지만, 칸은 그 누구와도 마주치지 않았다. 어젯밤과 똑같이 조용히 함교로 들어온 칸은, 조용히 화면을 켜고, 함장의 의자에 앉았다. 커크는 스카티가 넘겨준 수신기를 귀에 꽂고 전원을 켰다.
[제임스.]
다짜고짜 들려온 자신의 이름에 커크는 놀라 침대에서 몸을 벌떡 일으킬 뻔 했다. 혹시 칸이 도청장치의 존재를, 그리고 우주공간 너머에서 패드를 통해 자신을 감시하고 있음을 눈치라도 챈 것인지.
그러나 칸은 오른손을 뻗어, 누군가의 손을 잡는 시늉을 했다.
[약속하지 않았나. 언제쯤 날 찾아낼 생각인거지.]
그 말을 듣고서야, 커크는 칸이 부르는 이름이 자신의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제임스라는 이름이 흔한 것은 아니었으니까. 어쩌면 기억을 되찾기 전, 존 해리슨이었을 때 알게 된 남자의 이름일지도 몰랐다.
[난 약속을 지키고 있어. 그래, 아직까진 지키고 있지. 그러니까 빨리 나를 찾아내라. 우주 따위는, 시간 따위는 네게 문제될 것이 없다고 하지 않았나.]
칸이 찾는 제임스가 누구인진 몰라도 허세가 심한 양반이었던 모양이다. 커크는 피식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않으며 자세를 편하게 고쳐 누웠다. 자신이 관음증 환자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지금 이 상황은 제법 흥미로웠다. 단단한 석회질 껍데기를 열고 내보인, 조개의 속살 같은 느낌이 들었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입에 담는 칸은, 상당히 매력적인 감칠맛을 가진 모습이었다.
[…나보다 오래 살아남아서, 내 시체를 비웃어주겠다고 하지 않았나.]
귓가에 들리는 칸의 목소리가 한결 부드러워지고, 미약한 떨림이 어리는 것이 느껴졌다. 감정을 읽을 수 있는 칸의 목소리라는 것이 너무 낯설어서, 커크는 눈을 가늘게 뜬 채 패드의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러나 이어지는 칸의 목소리에, 커크는 잠시 말을 잊었다.
[만일 네가 아직도 살아있다면, 3백 살도 넘은 노인이겠군.]
그가 찾고 있는 제임스라는 남자는, 과거의 잔재였다. 3백 년 전의 인간.
[아니. 그럴 리가. 내가 네 말을 왜 의심하겠어. 그랬다면 널 지구에 남기고 떠나진 않았을 거다.]
상상 속의 상대와 대화를 하는 칸은 다정했고, 목소리엔 물기가 묻는 듯 했다. 커크는 그런 그의 목소리가 어색하고, 그 내용이 우스워 눈을 데록 굴렸다. 어느 행성의 상식으로도, 인간이 3백 년 동안 생존하기란 불가능한 문제다. 그 불가능을 뛰어넘어 살아있는 존재의 목소리를 들으며 하는 생각치곤 비관적인 내용이지만, 칸이 말하는 ‘약속’이라는 것은 지켜질 수 없는 것이고 그것을 칸 역시 알고 있음이 틀림없다.
[너를 실망시키느니 죽는 게 낫지.]
그의 목소리에서 묻어나는 그 다정함에, 커크는 괜스레 민망해져 패드를 엎어버리고 수신기의 전원을 껐다. 내일 다른 선원들이 물어보면, 마커스 제독에 대한 뒷담화나 하고 있었더라고 둘러대기로 마음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