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커크] My Crew - 6. 실전의 가르침
*칸커크
*리부트 스타트렉 영화만 감상한 뒤 쓰는 날조글입니다. 캐릭터 붕괴, 원작 붕괴, 원작 설정 붕괴 주의.
*필자의 칸 편애 주의. 칸 보고 싶어서 쓰기 시작한 글이라 어쩔 수가 없습니다.
[My Crew]
6. 실전의 가르침
- “이 세상에 돌이킬 수 있는 것은 없어.”
“지도자의 생명은 그 무엇보다 무겁고 귀중한 거야, 함장. 왕이 살아있는 한, 그 국민은 어디서든 혼란에 빠지지 않을 채 살아갈 수 있다. 돌아갈 장소가 어딘가에는 남아있음을 알기 때문에. 우두머리는 단순히 영웅 심리에 취해서, 자신의 수족들을 보호하겠다는 명목으로 자위하며 사지로 뛰어들어선 안 돼. 막중한 책임을 외면하지 않고 자신의 목숨을 바쳐 무고한 수많은 사람들을 살린 영웅? 평화의 시대에나 통하는 지루한 논리다.”
녹색 외계인은 구속구를 채우기 위해 허공을 배회하는 칸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칸의 입가에 삐딱한 미소가 어렸다. '항복'을 맹신하는 어리석은 적. 평화와 평온에 찌든 순수하고 젊은 함장. 이 부드럽고 여린 시대는 그에게 있어 하품이 나올 정도로 따분하고 밋밋한 시간이었다.
그러나 그런 세상에도 여전히 부조리는 존재하고, 불필요한 권력과 계급이 존재하며, 부당히 착취당하는 가녀린 자들이 있다. 그의 임무는 여전히 끝나지 않은 것이다. 3백여 년을 뛰어넘은 지금도 여전히.
“그래서 네 한 목숨 보전을 위해서 엔터프라이즈를 배신하고, 냉동인간들의 목숨을 포기하겠다는 소리야? 참 대단한 성군 나셨군. 적어도 네 가족에 대한 애정은 진짜인줄로 알았더니.”
“적절한 단어를 고르지 못하는군, 함장. 난 그 누구도 배신하지 않았어. 내가 누굴 배신할 수 있다는 거지?”
커크를 바라보는 칸의 시선은 차분했다. 커크는 그의 시선에서 어떤 감정을 읽어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배신은 '믿음'으로부터 나오는 행위다. 엔터프라이즈호에 탑승한 그 누가 나를 믿고 있다는 거지? 지금 내가 배신할 수 있는 존재가 이 우주를 통틀어 몇이나 될 것 같나? 어느 누가 내게 믿음을 보내고 있다는 거지? 나를 믿는 이들은 모두 차갑고 오래된 잠에 빠져 300년째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들 말고도 내게 마음을 쓸 여지가 있는 자가 존재한다면, 혹시나 하는 기대를 걸고 있던 당신 정도겠지.”
힐난의 빛인가. 그도 아니라면 오랫동안 지쳐온 자의 삭막하고 건조한 눈빛인가. 사사건건 간섭하고 있는 자신에 대한 짜증. 위험과 위협과 자극에 대한 흥분. 다채롭지만 하나같이 사납거나 부정적인 감정들 위로 두텁게 한 겹 깔린 오만함과 우월감.
“아니면 내가 순순히 항복을 했다고 '믿고'있는 어리석은 이 녹색 병사들이라던가.”
칸은 잡힌 손목을 천천히 치켜들었다. 동료에게서 넘겨받은 구속구를 칸의 손목에 막 채우려던 상대는 예상외의 악력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커크가 칸이 마지막에 덧붙인 말을 채 이해하기도 전에, 비틀린 입술 사이로 음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실전의 가르침을 주겠다, 함장.”
그는 커크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팔이 빠르게 휘둘러졌다. 그는 그의 손목을 단단히 움켜쥐고 있던 상대의 손을 떨쳐내고 그대로 손을 위로 뻗었다. 창백한 손가락이 녹색 비늘 사이에 구슬처럼 박혀있던 상대의 눈을 후벼 팠다. 상대는 비명을 지르며 구속구를 놓쳤고, 칸은 그대로 상대의 멱살을 움켜쥐고 끌어당겼다.
외계인 병사들이 당황하여 커크에게로 겨누던 무기를 칸에게로 겨눌 즈음엔, 칸은 안구를 잃은 인질의 목을 움켜쥔 채 그들의 흐트러진 포위망을 벗어나 있었다. 인질의 두 눈에서 거무죽죽한 피가 눈물처럼 흘렀다.
“첫 번째, 모든 종족을 통틀어 가장 보편적이고 치명적인 급소는 눈이다. 시각이 완전히 퇴화하지만 않았다면 말이야. 지금처럼 정체를 알 수 없는 적들의 적진으로 침투한 경우, 가장 먼저 조명 시스템을 살펴라. 빛에 대한 의존도가 적을수록 고통과 일시적인 혼란을 주는 정도의 효과밖에는 줄 수 없으니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하지. 하지만 대부분은 상대를 전투 불능 상태로 만들고 효과적으로 제압할 수 있다.”
“…이, 이 미친 자식.”
커크는 얼이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제 병사들은 모두 커크에게서 등을 돌린 채 칸을 향해 무기를 겨누고 있었다. 혼란이 가스처럼 좁지 않은 그 공간을 가득 메웠다. 커크는 의식적으로 숨을 쉬었다. 가슴이 영 답답하고 뻐근했다. 군집한 녹색 병사들 사이에서 누군가가 낮고 빠르게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그가 지휘자인 모양이었다.
칸의 입꼬리가 한차례 더 뒤틀리며 완연한 비웃음을 그렸다. 지휘관 즈음 되는 자라면, 적어도 생각은 할 줄 안다는 뜻이렷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분명히 통제할 수 없는 변수는 존재한다.
“두 번째, 지적 생명체에게는 감정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이용해라. 공동체에서는 어떤 방식으로든 인연이 생기고, 감정적인 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지. 사지로 향하는 성질의 임무를 수행중이거나, 지속적으로 위험에 노출되는 집단이라면 더더욱. 감정은 실전에 있어서 그 무엇보다 강력한 약점이다.”
칸은 잔인하게 눈을 빛내며 인질로 잡힌 병사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녹색 비늘 덮인 인질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처절한 비명을 내뱉는 것이 보이고 들렸다.
“인질이 있다면 감정적인 동요를 일으키기 훨씬 수월하지. 인질에게 굴욕을 안겨라. 끔찍한 고통을 주는 정도면 돼. 간단하지. 비명을 지르게 하고, 비굴하게 목숨을 구걸하도록 만들어.”
“적당히 해, 이 자식아!”
“그러다보면…”
우득, 어깨가 완전히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인질의 찢어지는 비명이 허공을 갈랐다. 병사 중 하나가 괴성을 지르며 칸을 향해 뛰쳐나왔다. 그는 지휘관의 통제를 벗어나 칸에게 무기를 겨누고, 무기의 작동 장치를 건드렸다. 뭉툭한 쇠막대기처럼 보였던 그것의 앞부분이 떨어져 나가며 날카롭고 거대한 송곳 같은 날이 드러났다.
“주로 감수성이 풍부하고 어린놈들이 젊은 혈기를 참지 못하고 저렇게 중요한 정보를 노출하곤 하지.”
병사는 네 개의 손으로 무기를 단단히 움켜쥔 채 돌진했다. 칸은 인질로 잡고 있던 병사의 어깨를 놓고, 그에게 달려드는 상대를 향해 집어던졌다. 달려오던 그는 힘없이 나가떨어지는 그의 동료를 붙잡기 위해 세 개의 손을 무기로부터 떨어트렸다. 그가 동료의 몸을 단단히 끌어안았을 때, 칸은 이미 자리를 박차고 그의 앞으로 튀어나간 뒤였다.
칸은 그의 손목을 차올렸다. 뼈가 부러지는 소리에 커크는 미간을 좁혔다. 병사는 신음을 흘리며 무기를 놓쳤고, 동료의 몸을 끌어안고 그대로 바닥으로 넘어지듯 쓰러져 나뒹굴었다.
“자, 사용 방법을 도저히 알 수 없던 쇠막대기에서 살상력을 가진 날카로운 무기가 되었군. 이제 세 번째다, 함장. 세 번째 가르침은, 어쭙잖은 예상을 하지 말라는 거야.”
칸은 바닥으로 떨어지는 무기를 날렵하게 낚아챘다. 날은 서슬 퍼렇게 날카로웠다. 손잡이를 한 손으로 잡고 가볍게 휘둘러보는 동작에서도 바람을 가르는 위협적인 소리가 났다.
“모든 경우의 수를 떠올리고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하며 유동적이면서도 완벽한 전략을 세울 자신이 없다면, 예상은 곧 편견과 선입관이 되어 다방면의 사고를 차단하지.”
사방에서 금속성의 소음들이 들려왔다. 지휘관의 명령에 따라 병사들이 일제히 각자 무기의 안전장치를 해제하고 있었다.
“아무런 생각을 하지 마. 직접 목격한 것만이 그 자체로 진실이고 사실이다. 닫혀있는 상자 속 고양이의 생사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듯이.”
“칸.”
칸은 무기를 높이 쳐들었다. 그렇게 위협적인 자세로 석상처럼 흔들림 없이 버텨선 채, 싸늘한 시선으로 사방을 훑었다.
“신체구조는 제법 많은 정보를 줄 수 있지. 이들은 네 개의 팔을 가지고 있으니 대부분의 무기들은 네 개의 손을 필요로 할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것은 단순한 물리 타격 계열의 무기들뿐일 것인데, 외피나 뼈의 강도는 지구인의 두 배 가량 되는군. 아쉽게도 당신이 대인격투능력을 직접 발휘하기는 힘들겠어.”
압도하고 있다. 그가 말하던, 야만성으로. 살기와 폭력으로. 그의 본질에 가까운 것. 모든 생명체의 본성에 새겨진 그것으로.
지휘관은 더 이상 돌발행동을 하는 병사가 생기지 않도록 목소리를 높여 끊임없이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좁고 밀폐된 공간에, 적은 하나고 그들은 여럿이다. 섣불리 무기를 사용하기 시작했다간 그들끼리 서로를 상처 입히게 될 가능성이 농후했다. 게다가 그곳은 무기고의 앞이었고, 동력실의 지척이었다. 전투가 무기에 영향을 주어 연쇄적인 피해가 생길 가능성도, 동력실까지 퍼질 피해도 생각해야했다.
그리고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자신의 병사 두 명을 자신의 발치에 늘어놓고 응시하고 있는 정체불명의 침입자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확연한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그다지 불리한 위치가 아니라는 사실을. 적어도 평범한 병사나 용병은 아니라는 소리다. 평범하지 않은 사고를 할 수 있는 자.
그러나 그는 혼자다. 일행이 하나 있긴 하지만, 그의 동료라는 자는 그에게 무기를 겨누고 있지 않은가-심지어 그 무기조차 거꾸로 들고 있다-. 절대적인 우위는 자신과 병사들이 가지고 있다. 지금처럼 도발에 넘어가 한 명씩 차례대로 당하지만 않는다면. 병사들을 진정시키고, 차분히 상대해나가면 될 일이다.
“모든 문명의 파악은 무기에서 시작해라. 생명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것……. 무기와 의학 기술은 항상 기술력의 최첨단을 달리기 마련이지. 무기도 현지에서 조달하는 편이 효율적이다. 지구의 무기가 외계인에게는 통하지 않을 수도 있으니.”
“그만둬, 칸. 제발 그쯤 해! 돌이킬 수 없는 짓은 하지 말라고!”
“본인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대해선 고민하지 마. 적의 손을 빌리는 것을 부끄러워할 필요 없다. 지금처럼. 어떤 고민이나 시행착오를 거칠 필요도 없이, 모든 무기가 즉시 사용 가능한 상태로 바뀌지 않았나?”
칸은 커크의 외침을 듣지 못한 척,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으며 높이 쳐들었던 팔을 휘둘렀다. 그러나 그 끝에 찔린 것은 칸의 발밑에서 버르적거리던 두 병사가 아니었다. 매서운 소리와 함께 바람을 가르며 날아간 날카로운 끝에 꿰뚫린 것은, 빠르고 또렷한 목소리로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리고 있던 자였다. 지휘관으로 추정되는.
“네 번째. 지휘관은 스스로의 신분을 노출하지 말 것. 반대로, 수적 열세에 처했을 때에는 지휘관 사살을 최우선으로 여길 것.”
거무죽죽한 피가 또다시 튀었다. 칸이 던진 날카로운 창은 상대의 머리 절반을 날려버리면서도 멈추지 않고 날아가 뒤에 서있던 병사의 가슴에 꽂혔다. 날카로운 비명이 울려 퍼짐과 동시에, 그 공간의 모든 이는 혼란에 빠졌다. 한 사람을 제외하고.
정의를 내릴 수도, 마땅한 호칭을 붙일 수도 없는 무기들이 두 명의 인간을 노리고 발사되고 휘둘러졌다. 대부분의 병사들은 칸을 향해 몰려갔다. 커크는 어정쩡하게 들고 있던 무기-아직도 어떻게 작동을 시켜야 하는지 파악하지 못한-를 내던지고 칸이 던진 창을 향해 달려갔다. 지구인의 것보다 배는 높은 점성을 가진 피가 무기에 끈적하게 엉겨붙어있었다. 그러나 그것에 한가롭게 불만을 터트릴 여유는 없었다. 병사 두어 명이 커크를 발견하고, 그가 칸의 동료였다는 사실을 상기한 것이다. 더불어 그가 칸에 비해선 훨씬 덜 호전적이며, 제압하기 쉬우리라는 예상을 하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이다.
“실드 잔여 에너지가 27%로 떨어졌습니다.”
“스코티. 워프 동력의 에너지 일부를 실드로 돌려주십시오. 오차범위를 5% 이내로 고정하고 잔여 에너지를 50%로 유지해주세요.”
“오-케이.”
술루의 보고를 들은 스팍은 담담히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그에 대답하는 스카티의 말꼬리는 늘어졌다. 그들이 보고 있는 소리 없는 영상은 등장인물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선명하거나 자세한 것이 아니었다. 인간의 형체를 하고 있는 것이 둘, 그리고 비슷하지만 한 쌍의 팔이 더 달린 것이 다수.
엔터프라이즈에서 지켜볼 수 있는 것은 검은 단색을 배경으로 격하게 움직이는 초록색, 수십 개의 외곽선들이었다. 꼭 삼차원 영상 모델링 프로그램처럼 보이는 것들이, 화면을 가득 채우며 격하게 넘실거렸다. 오로지 선으로만 이루어진 2차원의 자료로 상세한 상황을 파악하기는 어려웠다.
스팍은 귓가에서 끊임없이 들려오는 파열음과 비명소리에 불쾌함을 느꼈다. 그러나 수신기를 귀에서 빼낼 수는 없었다. 싸움에 열중하고 있는 칸은 잠시 말을 멈췄지만, 그가 언제 다시 입을 열지 쉽게 예상할 수 없었다. 그가 내키는 때, 하고 싶은 말이 문득 생각나면 그는 망설이지 않고 다시 말을 꺼낼 것이다. 그러면 순진한 그들의 함장은 그의 뱀 같은 목소리를 다시 마주해야 한다.
커크를 칸의 곁에 혼자 놔둘 수는 없었다. 이미 그들은 자신의 손이 닿을 수 없는 곳에 있지만, 귀만이라도 열어두어야 했다. 속내를 알 수 없는 칸의 의중을 그나마 짐작이라도 할 수 있는 것은, 커크가 아니라 스팍이었다.
푸욱. 살이 찢기고 무언가가 꽂히는 소리와 함께 비명이 울렸다. 숨이 끊어진 상대가 천천히 바닥으로 쓰러졌다. 커크는 들고 있던 무기를 던지듯이 내려놓고 숨을 골랐다. 폐가 찢어질듯 아팠다. 그는 힘겹게 헐떡이며 칸을 보았다. 칸은 시체들 사이에 우뚝 서서, 눈을 감고 고개를 쳐든 채 가만히 서있었다. 그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커크로서는 알 수 없었다. 기도를 하는 듯도 했고, 숨을 고르는 것 같기도 했다.
커크의 시선을 느낀 칸은 눈을 뜨고 천천히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청록색 눈동자에 열기라곤 없었다. 바닥에 널린 시체보다도 더 차가운 온도였다.
“돌이킬 수 없는 짓은 하지 말라고?”
칸은 커크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그 표정은 결코 호의적이지도, 살갑지도 않았다. 언제나와 같은 비웃음도 아니었다. 체념 섞인 그 표정은 어쩌면 지친 듯 보이기도 했다.
“마지막 가르침이다. 함장.”
칸은 커크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악수를 청하거나, 부축을 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검은 피로 흠뻑 젖은 손바닥을 보여주며 말했다.
“이 세상에 돌이킬 수 있는 것은 없어.”
칸의 손바닥을 내려다보는 커크의 시선은 가라앉아있었다. 칸은 커크를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커크가 놀라 그의 팔을 쳐내기도 전에, 칸은 그의 주머니에서 통신기를 꺼내갔다.
“듣고 있나, Mr. 스팍.”
[예.]
“함장을 데려가라. 이런 상태로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아. 도움은커녕 제 몸 하나 제대로 지키지 못할 것 같군. 날 감시할 필요는 없다. 난 당신들을 배신하지 않아. 적어도 이번 항해에서는.”
[제가 당신을 믿을 수 있는 타당한 근거를 제시해주시면 저도 안심하고 당신의 말에 따를 수 있겠습니다만. 현재로선 당신의 말을 신뢰할 수 없습니다.]
“믿지 않겠다면 어쩔 수 없지. 동행하도록 하겠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내가 함장을 보호하지 못해 그의 신변에 문제가 생긴다면 그 책임은 누가 지게 되나? 만일의 사태를 예상해서 함장의 보호를 요청한 나인가, 아니면 그 요청을 거절한 당신인가?”
칸은 더 이상 스팍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손에 힘을 주었다. 그의 손가락 사이에서 소형 통신기는 간단하게 부서졌다. 부서진 부속품이 바닥으로 우수수 떨어졌다. 칸은 남은 잔해를 커크를 향해 휙 던지고 걸음을 옮겼다.
커크는 정신을 차리고 그를 쫓아가려했다. 그러나 곧 그의 몸은 빛무리에 휩싸였다. 익숙한 감각이 찾아왔다.
“짐!”
가장 먼저 들린 것은 맥코이의 목소리였다. 커크는 감았던 눈을 떴다. 쿵쿵거리는 발소리가 울렸다. Dammit, Jim. 이젠 입버릇처럼 따라붙는 어휘가 익숙했다.
“이게 무슨 꼴이야. 일단 가서 좀 닦아야겠어.”
“난 괜찮아, 본즈.”
“의사로서 충고하건데 절대 안 괜찮아. 이 검은 거 뭐야. 다 피잖아? 네 면역체계로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장담 못해. 빨리 가서 씻고 나와.”
“하지만 아직 칸이 저기 남았어. 그 녀석이 무슨 일을 벌일지…….”
“그건 너보다 저 홉고블린이 더 잘 처리할 테니까 넌. 제발. 좀. 가서. 씻어.”
맥코이는 숫제 으르렁거리며 한 마디 한 마디를 뚝뚝 끊어 말했다. 커크의 고집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커크는 온몸에 뒤집어쓰다시피 했던 검은 피를 닦아내고,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마자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맥코이에게 붙잡혀 의료실로 끌려갔다. 맥코이의 험악한 기세에 눌린 커크는 조용히 입을 다문 채 하이포 세례를 받고, 채혈과 트라이코더를 포함한 각종 검사들을 마친 뒤에야 풀려날 수 있었다.
그가 함교로 돌아왔을 때, 스팍은 정면에 출력되는 영상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선원들이 제각기 자신의 업무에 집중하는 동안, 스팍과 체콥, 스카티는 말없이 영상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어떻게 됐어, 스팍?”
“함교를 성공적으로 장악했습니다.”
스팍은 의자에서 일어났다. 함장의 의자에 털썩 주저앉은 커크는 녹색으로 가득한 화면을 보았다. 제법 오랫동안 영상을 들여다보아 익숙해진 스팍이나 다른 크루들과는 달리, 커크는 화면이 무엇을 뜻하고 있는 것인지 빠르게 파악할 수는 없었다.
“이게 저쪽 함선 내부 영상이야?”
“예. 직접적인 영상은 감지할 수 없고, 모션센서를 해킹해 입체 영상으로 바꿔 출력하고 있습니다.”
모든 녹색 선이 멈춰있는 가운데, 천천히 움직이고 있는 형체가 하나 있었다. 여러 개의 선이 겹쳐져 뚜렷한 모양을 파악할 수는 없었지만 그것이 칸임은 쉽게 알아챌 수 있었다.
“저거 칸 맞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야?”
“영상을.”
스팍의 목소리가 들리자 즉시 화면에 출력되던 영상이 바뀌었다. 적함으로 전송되기 전의 영상을 아직 기억하고 있던 커크는 당황하여, 눈을 크게 뜨고 두어 번 깜빡이는 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엔터프라이즈를 둘러싸고 있던 함대는 사라졌다. 그들의 함선 주변을 맴도는 것은 우주쓰레기라고 불릴 것들이었다. 부서진 함선의 잔해들.
광자어뢰와 비슷한 모양을 한 정체 모를 무기들이 함선들 사이를 날아다녔다. 조준은 정확했고, 비록 구식 미사일일지언정 파괴력은 무시할 수 없었다. 엔터프라이즈호에는 아무런 타격을 주지 못하던 그 공격으로, 저들의 함선은 처참하게 부서져갔다.
“함장님. 슬슬 그를 이쪽으로 전송해야합니다.”
“아아, 그렇지. 체콥. 전송할 수 있겠어?”
“예, 함당님! 잠씨만 기다려주쎄요!”
통신기 너머로 체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커크를 함선으로 전송시킨 것은 체콥이었다. 칸 역시 그가 수동으로 조작하여 전송시켜올 생각인 듯 했다.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는 함선에서, 분주히 움직이는 상대를 정확히 잡아내기란 제법 까다로운 일이었으니까. 엔터프라이즈에선 그가 가장 적임자였다.
“조준이 끈나씁니다, 함당님! 당장 전송 가능함니다!”
“그래. 그대로 유지해. 저 자식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 돌발행동에도 대처할 수 있게 준비하고.”
교전은 쉽게 끝나지 않았지만 승기는 한쪽으로 확실히 기울고 있었다. 조금 전 장악한 타문명의 함선을 제 손발처럼 부리는 것을 보며, 커크는 마른 침을 삼켰다. 고전 영화에나 나올법한 촌스러운 교전은 생각보다 화려하고 처절했다. 안전장치가 확실히 마련되지 않은 함선들은 적중하는 구식 미사일 하나만으로도 완파되어버렸다.
그리고 우주공간을 가로지르던 구식 미사일 하나가, 칸이 타고 있는 함선에 맞는 것을 보았다. 그 장면을 목격한 커크는 황급히 예의 화면을 찾았다. 모션센서를 해킹하여 출력하는 그 영상에서, 누군가가 바닥으로 쓰러졌다가 비틀거리며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치명적인 피해를 입힐 만큼 위력적인 공격을 가한 것은 아니었으나, 함선의 일부가 작동하지 못하게 된 것 만큼은 확실해보였다. 계기판을 조작하던 칸이 사납게 내리치는 것을 보았다. 비록 초록색 선화로 이루어진 형체이기에 자세한 표정을 살필 수는 없더라도, 그가 분노하고 있음은 너무나 확실했다.
그리고 그가 다시 계기판을 들여다보는 모습을 보고, 커크는 무언가의 예지를 느꼈다. 직접 겪은 일은 아니기에 데쟈뷰라고 부르기에는 애매했다. 그러나 그가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인지는 분명했다.
“젠장, 저 미친 놈. 체콥, 내가 신호하는 즉시 그를 전송해와. 다른 선원들은 모두 자기 자리를 지키고, 충격에 대비한다.”
커크는 초록빛 화면속의 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의 손이 마지막으로 계기판을 내리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가 시체가 널린 그 조타실 내부에서 홀로 분주하게 오가는 동안, 우주를 비추고 있는 화면에선 움직임이 끊이지 않았다. 칸이 타고있는 함선이 제자리에서 천천히 회전하는 동안, 미사일이 두 대나 더 명중했다. 함선에선 이미 불꽃이 일고 있었다.
칸이 주먹으로 내리치듯 계기판을 강하게 두드리는 순간, 커크는 고함을 버럭 질렀다.
“지금. 체콥, 지금!”
그 순간 칸의 함선이 질주하기 시작했다. 급발진이나 다름없는 급격한 속도로 쏘아지듯 튀어나갔다. 그 목표는 아직 격추시키지 못한 세 대의 다른 함선들이었다. 커크의 귓가에 체콥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 잠시만요, 타겟을 놓쳤……! 아닙니다, 잡을 수 이써요! 잡을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