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트렉/My Crew

[칸커크] My Crew - 5. 잠입과 배신과 인질

O.A 2015. 12. 15. 09:17

*칸커크

*리부트 스타트렉 영화만 감상한 뒤 쓰는 날조글입니다. 캐릭터 붕괴, 원작 붕괴, 원작 설정 붕괴 주의.

*필자의 칸 편애 주의. 칸 보고싶어서 쓰기 시작한 글이라 어쩔수가 없습니다.

 

[My Crew]

5. 잠입과 배신과 인질

    - “네 놈을 믿는 게 아니었어.”

 

Dammit. 맥코이가 습관적으로 중얼거렸다. 또 시작이군. 저 망할 놈의 자식. 칸은 자신의 어깨를 잡은 커크의 손을 한 번 보고, 눈썹을 치켜 올리며 커크의 얼굴을 한 번 보았다. 커크는 말간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나도 갈 거라고. 두 번 말하지 않겠다는 듯, 그의 표정은 더할 나위 없이 고집스럽고 확고했다.

 

“저는 반대합니다, 함장님.”

 

스팍은 기계적이고 딱딱한 목소리로 커크에게 반대하고 나섰다. 그러나 커크가 그를 돌아볼 때까지, 그의 시선은 칸의 뒤통수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짧게 자른 단정한 머리와, 검은 셔츠 위로 조금 드러난 목덜미. 그곳에 칸의 얼굴이라도 있는 양 단호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칸도 분명히 그의 시선을 느꼈다. 그러나 새삼스레 뒤를 돌아보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스팍은 이 함선의 그 누구보다도 강박적으로 규칙을 지키는 벌칸이었다. 그가 칸이 대처할 수 없을 돌발적인 행동을 취할 리는 없다. 그러니 굳이 몸을 돌려 그에게 시선을 던지거나 새삼 경계할 필요는 없다. 벌칸은 논리적인 종족이니, 논리적으로 특정한 예상범위를 벗어나는 행동은 하지 않을 것이다.

스팍은 다른 벌칸에 비해 감정적인 행동을 보이는 경우도 종종 있었으나, 그것은 그다지 흔한 경우는 아니었다. 치명적인 위급사항이거나, 커크의 안위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사건일 때. 지금은 둘 다 해당되지 않는다. 그들에게 나름대로 맹렬한 공격이 쏟아지고 있었으나 아직 실드가 소진되기까지 한 시간 정도의 여유가 있다. 커크가 위험을 무릅쓰겠다고 버티는 중이지만 칸이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은 아니니 그를 향해 거부감을 드러낼 이유도 없다……. 스팍의 움직임은 쉽게 예상할 수 있고,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그에게 대처할 수 있는 계획을 짜는 것도 쉽다.

이 순간 칸의 신경은, 온통 커크에게로 쏟아지고 있었다. 함장이 이토록 쉽게 함선을 비우겠다는 뜻을 내비친다. 일 년 전에는 상황이 워낙에 급박했으니까. 벤전스는 당장에라도 엔터프라이즈를 가루로 만들고 탑승자 전원을 죽여 버릴 수 있을 만큼 막강하고 잔인한 상대였으니까.

그러나 지금 그들이 상대하는 적은 결코 위협적이지 않았고, 상황도 그다지 급박하지 않았다. 실드의 잔여 에너지가 떨어진다고 해도, 비상 전력이나 워프코어의 에너지를 일부 실드로 돌려 사용한다면, 조금 과장해서 이 자리에서 이틀은 더 버틸 수 있을 것이다. 그 안에 적 함대의 무기가 떨어지지 않을 리도 없고. 사실 칸의 말을 깡그리 무시하고 당장 워프를 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

혹여 칸이 그들을 배신할 꿍꿍이가 있다고 여기고 감시역을 자처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아니면 또 다른 속셈을 품고 있거나, 갑작스레 출현한 함대의 공격 자체가 스타플릿의 연극일지도 몰랐다. 함장인 커크만이 사전에 언질을 받은, 누군가를 속이기 위한 사기극. 그밖에도 있을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를 생각해보며 칸은 짧은 생각에 빠졌다.

그것은 칸이 커크를 겪어보지 못했기에 생긴 혼란이었다. 커크가 어디로 튀어 오를지 모르는 고무공 같은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무척 단순한 인간임을 겼어보지 못했기 때문에. 새로운 사건이나 자극에 얼마나 눈을 빛내는 인간인지를.

 

“함장님이 방금 말씀하셨듯이 저 미확인함선 안에 어느 정도의 병력이 존재할지 알 수 없습니다. 존 해리슨 중령이 전송되어 넘어가겠다는 작전 역시 비합리적이라고 판단되어 전적으로 찬성할 수는 없지만, 함장님께서 그와 동행하시겠다는 것은 납득조차 하기 어려운 제안입니다. 아군의 전력이 부족할 경우를 걱정하시는 거라면 차라리 전투장교 몇 명을 동행하게 하시는 게 낫습니다.”

 

스팍의 목소리를 귓등으로 흘려들으며 생각을 마친 칸은 그들이 나누는 대화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자신이 어떤 결론을 내리던지, 그에겐 커크의 동행을 거부할 이유나 권리가 없었다.

그렇게 판단한 칸은 어깨를 가볍게 털어 커크의 손을 떼어내고,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스카티를 지나쳐 성큼 걸음을 옮겼다. 전송실을 찾기 위해 관광객처럼 길을 물을 필요는 없었다. 그는 이미 엔터프라이즈의 내부 구조를 대부분 외우고 있었다. 스카티는 커크와 스팍, 그리고 멀어져가는 칸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칸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은 곧 함교를 벗어났다.

 

“스팍.”

“예. 함장님.”

“날 말리는 게 아무런 소용이 없을 거라는 건 알고 있지?”

“예상은 하고 있습니다만 불합리한 결정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저의 의무이자 제가 맡은 가장 중요한 업무입니다. 함장님.”

 

커크는 늘 한결같은 답을 하는 그의 일등 항해사를 보며 가볍게 웃었다. 그와 함께 우주를 누빈 것이 벌써 몇 년째인데, 이쯤 되면 슬슬 지겨워서 포기할 법도 한데. 맥코이는 이제 커크의 무모함에 제법 적응해서, 그가 무슨 사고를 치겠다고 통보를 하든지 간에 그저 가볍게 비속어를 내뱉으며 무자비하게 하이포를 찔러 넣을 준비를 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자, 그럼 내가 없는 동안 우리의 엔티를 잘 부탁해. 임시 함장.”

“당신의 신변에 문제가 생기면 어떻게 합니까?”

“비상 프로토콜을 따라야지. 네가 제일 잘하는 거잖아?”

 

커크는 스팍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리고 스팍이 그를 향해 다시 입을 열기 전에, 낮고 빠르게 읊조렸다. 입술조차 거의 움직이지 않고.

 

“칸을 혼자 저기로 보낼 수는 없어. 그가 저 함선을 탈취한 뒤에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 난 지금 감시역을 자처하는 거야, 스팍. 오, 아니, 스팍. 지금은 그냥 입 다물고 내 말만 들어. 난 당장 칸을 따라가야 하니까 너랑 실랑이를 할 시간은 없다고. 아무 일 없을 거야. 칸은 지금 인질이 잡혀있어. 그가 전혀, 전, 혀, 통제할 수 없는 곳에. 난 안전해. 적어도 칸으로부터는. 저 정체불명의 적군으로부턴 어떨지 모르겠지만.”

“함장님.”

“그래도 안심이 안 되지? 그럴 줄 알았어. 스캇한테 미리 받아둔 거야. 이거 받아.”

 

커크는 스팍의 손에 작은 기계를 쥐어 주었다. 스팍이 용도를 묻기도 전에 커크는 자신의 귀를 툭툭 두드렸다.

 

“장거리 도청장치야. 성능은 확실하지. 스카티가 직접 만든 거라고. 정 안심이 안 되면 그거라도 귀에 꽂고 있어. 칸이 하는 말 정도야 남김없이 네 귀로 전해줄 거야. 저 자식이 무슨 수작을 부리든, 내가 눈치 못 채면 너라도 눈치 채야해.”

“하지만, 함장님. 도청장치로는 그의 비언어적 표현까지 감지할 수 없습니다. 그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서라면 차라리 당신 대신 제가 그와 동행하는 편이 효과적입니다.”

“저 젠장 맞게 우월한 자식은 적어도 너보단 나를 더 좋아하니까 말이야. 음, 아니지. 좀 덜 싫어하니까 말이야.”

 

위험 속으로 뛰어드는 것은 그의 습관과도 같은 것이었다. 스팍은 결국 커크의 고집을 꺾을 수 없음을 인정하고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커크가 넘겨준 도청장치의 송신기는 손 안에 단단히 감추고 있었다. 금속과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작은 기계가 체온으로 미지근하게 덥혀지는 것이 느껴졌다.

커크는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몇몇 사람들에게 경쾌하게 손을 흔들어준 뒤 칸과 스카티를 찾아 함교를 나섰다.

커크가 전송실에 도착했을 때, 스카티는 칸에게 손바닥 크기의 작은 기계를 들이대며 열을 올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 안에는 일종의 해킹 프로그램이 들어있다, 이 말이요. 댁이 이걸 저 함선의 모션 센서에 접속만 시켜주면 이쪽에서 그쪽 상황을 실시간으로 모니터링 할 수 있다고.”

“날 감시하기도 한결 편해지겠지. 하지만 그 기계와 프로그램을 사용해서 모션 센서를 해킹하려면 일단 ‘연결’해야 할 텐데. 연결 단자가 맞지 않는다면 애초에 접속조차 불가능해. 저 함선의 컴퓨터에 원격 접속 기능이 탑재되어있다는 보장도 없다.”

 

칸은 스카티의 손에 들려있던 패드를 향해 고갯짓을 하며 손을 내밀었다. 넘겨달라는 뜻이었다. 스카티는 아무런 생각 없이 패드를 넘겨주려다가 멈칫했다.

 

“이건 왜 달라고 그러쇼?”

“해킹 프로그램의 알고리즘을 확인하려는 거다. 이 기계를 저 함선의 컴퓨터에 직접 연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느니, 차라리 저곳으로 전송된 뒤에 내가 중앙 프로그램에 접속해서 센서를 해킹하고 엔터프라이즈에 연결하는 것이 빠를 거야.”

“우리랑 같은 언어권일 줄은 어떻게 알고?”

“언어는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을 거다. 중요한 건 시스템의 구성이고, 지적 생명체가 최고의 효율을 위해 상상하고 구상하고 실제로 구현할 수 있는 알고리즘은 대부분 엇비슷하지. 오차범위가 그리 다양하거나 넓진 않아.”

 

스카티는 반신반의한 표정으로 기계를 패드에 연결하고, 해킹 프로그램의 알고리즘을 허공으로 옮겨 띄웠다. 칸이 복잡한 수식과 문자들을 빠르게 눈으로 훑고 있을 즈음, 커크가 전송실로 들어섰다.

 

“뭐야, 스캇?”

“‘Mr. Super’의 뛰어난 해킹 능력을 목격할 준비를 하고 있수. 조만간 명예퇴직이라도 생각해봐야겠구먼. 내 후임은 Mr. Super로 해주쇼. 실력도 좋고, 똑똑하고, 헤어스타일도 당신만큼이나 완벽하네.”

 

스카티의 빈정거림인지 별 의미 없는 푸념인지 모를 주절거림이 끝나기 전에, 칸이 먼저 복잡한 홀로그램으로부터 시선을 떼었다. 스카티는 눈을 끔뻑였고, 커크는 간단히 몸을 풀고 있었다.

 

“그만 출발할까, 함장. 아마 페이저 무기는 사용하지 않는 편이 좋을 텐데, 괜찮겠나.”

“걱정 마. 대인격투실력은 평균 이상이라고.”

 

스카티는 어깨를 으쓱이곤 전송을 위해 계기판 앞에 자리를 잡았다. 최대한 정확한 좌표를 측정하여 입력한 뒤 간단히 화면을 조작한 스카티는 두 사람을 향해 간단한 손 인사를 건넸다.

 

“이번엔 배신당하지 마쇼.”

 

스카티가 커크를 향해 농담처럼 한 마디를 던지는 순간, 두 사람은 엔터프라이즈호를 떠났다.

 

 

 

전송이 끝나고 시야가 확보되자 커크는 주변을 휘 둘러보았다. 그로선 난생 처음 보는 물건들이 즐비한 곳이었다. 그러나 그곳이 어디인지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무기고인 모양이네.”

“그래.”

 

칸은 컴퓨터처럼 보이는 묘한 모양의 구조물 앞으로 휭하니 가버렸다. 커크는 도청장치를 주머니 속에 넣고 전원을 켰다. 미세한 알림음과 함께 송신기가 켜졌다. 아마 지금쯤 스팍 역시 수신기의 전원을 켰을 것이다.

 

“운이 좋았군.”

 

커크의 중얼거림을 들은 칸은 외계 컴퓨터의 구조물을 살펴보다가 그를 흘끗 돌아보았다. 익숙한 눈빛이 커크에게 전해져왔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한심하고 지루하고 재미없고 생각 없는 말을 할 수가 있느냐, 뭐 그런 의미의 시선.

 

“왜 그런 눈으로 봐?”

“무슨 눈을 말하는 건가?”

“뭐랄까……. 뱀? 사자?”

“‘싱’은 사자를 뜻하지.”

 

칸은 미련 없이 고개를 돌리고 다시 구조물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가 마침내 계기판에 손을 대기 시작한 것은 반분의 시간이 더 지났을 때였다. 커크는 주변을 둘러보며 무기들을 구경했다. 처음 보는 디자인의 무기들뿐이었지만 대부분은 물리적인 타격을 주는 물건으로 보였다. 총과 비슷한 모양새를 가진 것들도 제법 되었다. 커크는 금속 재질의 막대기처럼 보이는 것을 손가락으로 쓸어보았다. 먼지는 묻어나오지 않았다. 관리자가 성실하거나, 자주 사용하거나, 둘 중 하나일 텐데.

 

“뭔지는 알고 건드리는 거야? 계기판을 읽을 수나 있어?”

“Mr.스카티에게 한 말을 그대로 읊어주지. 언어는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을 거다. 중요한 건 시스템의 구성이고, 지적 생명체가 최고의 효율을 위해 상상하고 구상하고 실제로 구현할 수 있는 알고리즘은 대부분 엇비슷하지. 오차범위가 그리 다양하거나 넓진 않아.”

“그래?”

“그래. 변수는……. 요즘 시대의 말로 하자면 ‘거기서 거기’다. 경우의 수는 2의 4승.”

“흠. 의외로 간단하군.”

 

칸은 빠른 속도로 버튼을 누르며 말을 이었다. 그는 커크를 향해 어떤 관심도 전하지 않았다. 모든 신경은 눈앞의 기계로 쏠려있었다. 본인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사실은 인지나 하고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 그 뒤에 0이 여덟 개가 붙지.”

“켁! 뭐? 지금 그걸 다 계산하고 앉아있겠다고?”

“우선 중앙 시스템을 해킹해 기본적인 알고리즘을 파악하고, 시스템에 적용했을 때 비효율적인 처리 속도와 오차 범위가 넓은 순서대로 몇 가지 변수를 제외시키고 나면…….”

 

칸은 굽혔던 허리를 펴며 마지막 버튼을 눌렀다. 커크는 그 손놀림이 ‘경쾌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커크를 향해 고개를 돌리지 않았으므로, 커크는 그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끝났군. 이만 갈까?”

 

그리고 그다지 보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았다. 아마도 무척 건방지고 재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을 것 같아서.

 

“놀리니까 재밌냐.”

 

커크의 불만 섞인 중얼거림에 칸은 딱히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무기고를 한 바퀴 휘 둘러보더니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용도가 불분명한 물건들 사이에서, 그가 사용할 무기를 망설임 없이 선택하고 무장했다.

 

“좋겠군. Mr. Super는 처음 보는 물건들도 매뉴얼을 달달 외운 것처럼 완벽하게 파악할 수 있어서.”

 

칸은 그제야 바쁘게 움직이던 걸음을 멈추고 커크를 흘끗 돌아보았다. 커크도 적당한 무기들을 골라 집어 들고 있었다. 문득 따가운 시선을 느낀 커크 역시 칸을 보았다. 칸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씰룩이는 것이 보였다.

 

“그런 눈으로 날 보지 마, 함장. 그런 눈빛엔 약하거든.”

“무슨 눈?”

“강아지.”

 

Puppy. 한껏 조롱을 담은 목소리에 커크는 잠시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뭐야!]

 

스팍은 한쪽 눈썹을 씰룩 올렸다. 커크가 버럭 소리를 지른 목소리가 그의 귀에 꽂힌 수신기를 통해 가감 없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스팍은 혹시 자신이 그의 결정에 반대한 것에 대한 앙금을 이런 식으로 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봤다. 그러나 커크는 그 정도로 꽁한 인간은 아니었다. 그저 단순히 칸의 조롱을 참치 못하고 감정적으로 대응했을 가능성이 더 높았다.

 

[작고 연약하고 귀여운 강아지 같은 눈을 하고 있지 않나. 주인이 놀아주지 않아 토라진 것 같은 눈을.]

 

수신기를 통해 칸의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칸!]

[해리슨이다. 대령.]

 

커크가 참지 못하고 칸의 이름을 외쳤을 때, 음울한 웃음기를 머금고 있던 칸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싸늘하게 바뀌었다.

 

[스타플릿의 개 노릇을 하고 있는 건 칸 누니엔 싱이 아니라 존 리처드 해리슨 중령이다.]

[어? 아, 그래. 알았어. 뭘 그렇게 정색을 하고 그러나, 해리슨 중령. 주의하지.]

 

비언어적 표현을 감지할 수 없다는 생각은 수정해야 할 것 같았다. 칸이 어떤 표정을 지었을지, 스팍의 눈에는 무척 선명하게 떠올랐으므로. 그는 자신의 감정에 충실했고, 어떠한 가식도 없었다. 그러나 스팍은 그 솔직함이 그의 도덕성에서 나온 결과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스스로가 지나치게 우월했기에, 자신의 감정을 숨길 필요도, 절제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것은 그의 자만이자 오만이었다.

스팍은 전방의 스크린에 띄워진 입체 홀로그램을 주시했다. 칸이 함선의 모션 센서를 해킹하여 보낸 신호를 스카티가 잡아내, 시각적으로 정보를 파악하기 용이한 이미지로 만들어 화면으로 띄우는 중이었다. 배경음악처럼 끊임없이 깔리는 스카티의 불만 가득한 중얼거림은 신경을 쏟아 인식할 가치가 없는 것이다. 스팍은 그렇게 판단한 뒤 자신의 귀에 꽂혀있는 수신기로 정신을 집중했다.

 

 

 

칸은 커크에게 시선 한 번 던지지 않은 채 출입문으로 보이는 곳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칸이든 해리슨이든 어차피 다 자기 이름인데 뭘 그렇게 까다롭게 구는 거람. 커크는 터지려는 불만을 속으로 삼키며 그의 뒤를 쫓았다.

 

“길은 알고 가는 거야?”

“아까 당신도 보지 않았나, 함장? 함교에서 말이다. Mr.술루가 직접 스캔한 뒤 내부구조를 스크린에 띄웠고, 분명히 당신도 그 자리에 함께 있었는데.”

“미안하게 됐군. 난 난생 처음 보는 함선의 내부구조의 외곽선만 보고 함선의 설계도를 머릿속에 그릴 수 있는 재주는 없어서.”

 

칸은 커크의 투덜거림에 더 이상 맞장구칠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와의 대화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없다. 적어도 이 함선에 대해서, 그리고 앞으로 그들을 향해 닥쳐올 적에 대해선 자신이 그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 역시 무지하긴 마찬가지였지만. 적어도 자신은, 그들의 언어 체계와 지적 능력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파악했다고 자신하니까.

이를테면, 이 함선의 주인들은 표의문자를 사용한다. 눈앞의 개폐장치를 조작하는 데에는 그 정도의 정보만 있으면 충분했다. 버튼을 누르면, 문이 열린다. 칸은 복잡한 계기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커크를 돌아보았다.

 

“준비는 끝났나?”

“뭘 새삼 준비를 해?”

“당연한 것을 묻는군. 미지의 존재에 대한 전투 준비를 묻는 거다.”

 

커크는 그의 대답에 헛웃음을 흘렸다. 나라다호의 사건에서는……, 스카티가 영 엉뚱한 곳으로 그와 스팍을 전송시키는 바람에 그들은 도착하자마자 상황도 파악하지 못하고 싸워야했다. 그러나 지금 그들은 경비병조차 보이지 않는 조용한 무기고로 전송되어있었다. 문명의 노출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페이저를 사용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두 사람은 여유롭게 무장을 마친 뒤였다. 끝끝내 사용법을 파악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여차하면 쇠몽둥이처럼 쓸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 잠입한지 얼마나 지났다고. 최대한 조용히 함교를 찾아가서 지휘부만 제압하면 되는 것 아냐?”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면 유감이로군.”

 

칸은 개폐장치를 작동시켰다. 약간의 소음과 함께 문이 열리고, 커크는 다시 불퉁하게 질문을 던지려던 입을 다물었다. 뭐가 그렇게 유감인 일이 많은 거야, 하는 질문은 입안에서 맴돌았다. 문 밖에는 다수의 무장 병력이 문을 향해 정체를 알 수 없는 무기를 겨눈 채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일단은 인간과 비슷한 모양새를 갖춘 외계인들이었다. 직립보행이 가능한 신체구조를 가진. 다만 팔이 한 쌍 더 달려있었고, 녹색 피부는 비늘로 덮여있었다. 커크는 그들을 보며 곤충을 연상해야할지, 뱀을 비롯한 파충류를 연상해야할지 헷갈렸다.

칸은 무장했던 무기들을 그들이 보는 앞에서 바닥으로 멀찍이 던져두었다. 그리곤 빈손을 어깨높이로 들어 올려 비무장상태를 알리며 그들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커크는 여전히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진정시키지 못한 채 들고 있던 무기를 칸의 등으로 겨눴다.

 

“뭐가 그렇게 유감인 일이 많은 거야?”

 

입안을 맴돌던 질문을 내뱉고, 커크는 스스로의 혀를 깨물고 싶었다. 이것 말고 분명히 해야 할 질문들이 몇 개는 될 텐데. 칸이 가벼운 한숨을 내쉬는 것이 보였다. 커크는 그의 뒤통수를 노려보고 있었지만, 그의 표정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새삼스럽게 멍청한 질문이로군, 함장. 굳이 지금 할 필요도 없는 말이고.”

 

한심해 죽겠다는 기색이 역력한 어투였다.

 

“그래. 새삼 멍청해진 김에, 멍청한 질문 하나 더 해보자. 젠장. 대답이 뻔히 예상되는 데 질문을 하려니 진짜로 빌어먹을 멍청이가 된 기분이네. 저들이 어떻게 우리의 침입을 이토록 빨리 알아차렸지?”

 

칸은 이미 무기고를 벗어나 그들의 곁으로 가까이 다가간 다음이었다. 그가 별다른 저항의 기미를 보이지 않자 무장한 녹색 외계인들 역시 그에게서 신경을 거두는 것이 느껴졌다. 그들은 오히려 커크를 향해 경계의 시선을 던졌다. 그들 중 누군가가 그를 향해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으나, 커크는 그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내용은 뻔했지만. 아마도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라, 그런 의미일 것이다.

칸은 커크를 흘끗 돌아보았다. 녹색비늘 피부를 가진 외계인들 사이에 서있는 그의 창백한 피부와 차가운 청록색 눈동자는 냉혈동물을 연상시켰다. 파충류. 뱀. 소리 없이 은밀하게 움직이고, 순식간에 누군가의 혈관을 불태울 치명적인 독을 품은 사내.

 

“내가 보안 시스템을 우회하지 않았으니까.”

 

Shit. 낮게 중얼거린 커크는 그에게 쇳덩어리에 불과한 무기를 고쳐 잡았다. 이 빌어먹을 쇠막대의 사용법만 알았다면 당장 칸을 향해 난사하고도 남았을 기분이었다.

 

“네 놈을 믿는 게 아니었어.”

“후회의 말은 언제 내뱉듯이 늦는 법이야.”

“지구에 잡혀있는 네 인질들은 까맣게 잊어버린 모양이로군.”

“잊을 수 있을 리가. 그들은 내 전부인데.”

 

절그럭거리는 쇳소리가 났다. 녹색 외계인이 수갑처럼 보이는 물건을 가져오는 것이 보였다. 인질을 들먹이며 협박을 하는 꼴이라니, 꼭 악당이 된 것 같아서 기분이 찝찝했지만 지금 커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다지 없었다.

 

“하지만 그들의 목숨이, 정체조차 알 수 없는 금속덩어리들을 들고 적진 한복판으로 뛰어들 이유는 되지 않아. 사용 방법을 알 수 없는 무기에 무슨 의미가 있지? 나방이 모닥불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 멍청한 짓이라는 건 누구나 동의할 거다. 돌바닥에 머리를 짓찧는 것과 다를 바가 있나? 난 목숨을 걸고 자해하는 취미는 없어.”

“누군들 그런 취미가 있겠어. 하지만 난 승산이 없다고 동료를 배신하진 않을 거야.”

“그러시겠지. 그 누구보다 도덕적이고 모범적인 함장님께선.”

 

녹색 외계인이 칸을 향해 아마도 수갑일 물건을 내밀었다. 칸은 빈손을 그를 향해 순순히 뻗었다. 그러나 칸의 시선은 여전히 커크를 향해있었기에, 칸의 팔은 정확한 자리를 찾지 못하고 허공을 약간 헛돌았다. 커크는 기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허우적거린다고? 저 ‘칸’이?

 

“저돌적이고, 양심적이고, 맹목적인 함장. 하지만 그렇게 단순히, 닥치는 대로 들이박았다간 너와 너의 선원들 전부를 죽음으로 몰고 갈 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