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룡이 나르샤 / 방원무휼] 제목.. 모르겠다.. 무제.. 2/2
"형."
"예, 대군마마."
방원의 가라앉은 목소리에 하륜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방원의 심기가 불편한 이유를, 적어도 방원이 곁에 두고 부리는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그래도 일이 일단락되거든 조금은 표정이 펴질 줄 알았는데.
"무휼, 형이 가서 좀 돌봐줘."
"아닙니다, 대군마마. 정사는 제가 대신 볼 터이니 오늘은 일찍 들어가 보시지요."
하륜의 말에 방원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공은 공이고, 사는 사지요. 제가 무얼 하고 있는지, 무얼 하고싶은지, 무얼 해야하는지, 제대로 인지하고 구분하지 못하면 모순이 생기고 혼란이 생깁니다. 서늘하게 읊조리는 방원의 목소리는 스스로에게 당부하는 다짐의 말이었다. 그러니 자리를 떠서는 안 된다. 자신이 할 일은 여기에 있다.
"걱정 마세요, 마마. 무휼이, 튼튼하기로는 조선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놈입니다."
영규는 방원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곤 방을 빠져나왔다.
***
병사 두 명이 질질 끌어내는 무휼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처참한 몰골이었다. 병사들이 손을 놓자마자 바닥으로 쓰러지는 무휼을, 영규는 다급히 받아냈다. 무휼은 그 작은 충격에도 쿨럭이며 피를 토했다.
"아잇, 좀! 애 아픈 거 안보여!"
영규는 울컥하는 마음에 병사들을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으나, 병사들은 무표정하게 고개를 까딱 숙여 인사를 하곤 몸을 돌려 걸어가 버렸다. 영규가 데려온 가노들에게 들것을 준비시키려는 찰나, 무휼이 덜덜 떨리는 손을 들어 영규의 옷자락을 부여잡았다.
"혀.. 형.. 여, 영규 형.."
"어? 어, 어. 그래, 무휼아. 나다. 다 끝났어. 이제 집에 가자, 집에."
"마.. 마마는.."
무휼의 눈은 금방이라도 감길 듯 가물거리고 있었다. 영규는 제 옷자락까지 피에 젖어가는 것을 느끼며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무사하셔. 무사하시다. 그러니까 걱정 마라. 우리 마마가 누구신데."
"아.."
무휼이 입을 꾹 다무는 모습을 보며, 영규는 애써 피식 웃어보였다. 울컥 울음이 받친 무휼이 눈물을 보이기도 전에, 영규는 무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울지 마라, 너 울면 바로 탈진해. 이그, 미련한 놈.."
가노들이 들것을 가져오자, 영규는 그 위에 무휼을 직접 눕혔다. 작은 움직임에도 얼굴을 찡그리며 신음을 흘리는 것에, 영규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조심히 옮기게. 가노의 등을 툭툭 두드리자, 무휼 또래로 보이는 젊은 가노는 긴장과 동정이 반반 섞인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영규는 그대로 의원을 부르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아직도 코끝에 피냄새가 선명했다. 잠시 품에 안고 있었던 몸은 열이 올라 뜨거웠다. 독한 놈들이다. 그 고신을 당하면서도 끝끝내 입을 다물고 있었던 저 놈이나, 사람을 저 지경이 되도록 고신할 수 있는 순금부의 금수들이나. 영규는 쯧쯧 혀를 찼다. 목구멍을 타고 넘는 침이 썼다.
***
가노들이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는 것도 무시한 채, 방원은 성큼성큼 걸음을 내딛었다. 가장 안쪽으로 깊은 방에 무휼을 눕혀놓았다고 했다. 의원에겐 두둑이 은자를 내려주고 바로 옆방에서 묵게 했노라 했다. 영규에겐 무슨 일이든 믿고 맡길 수 있었다. 이도 영규가 나름대로 생각을 하고 취한 배치일 것이다.
벌컥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서자, 열기와 약재 냄새로 숨이 턱 막혔다. 짙은 향 때문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가노 몇 명이 상의를 벗겨 침상에 눕혀놓은 무휼의 몸을 물수건으로 닦고, 바람을 부치고 있었다. 영규는 바짝 마른 무휼의 입술을 간간히 물수건으로 적셔주며 그의 얼굴 가까이에 앉아있었다.
무휼이 뭐라고 입술을 달싹이자 영규는 무휼의 얼굴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방원이 서있는 곳까지도 닿지 않는 희미한 목소리에, 영규는 나직하게 대답하며 무휼의 이마를 짚었다. 아무리 차가운 물로 얼굴을 닦아내도, 무휼의 체온은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셨어요, 마마."
"무휼은.. 어때? 좀 괜찮아?"
"안 좋아요. 에이, 독한 것들. 어떻게 사람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영규가 몸을 일으켰다. 방원은 영규가 앉아있던 의자에 앉아 무휼의 앓는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식은땀으로 젖은 얼굴이 창백했다. 굳이 손을 뻗어 이마를 짚어보지 않아도, 무휼의 온몸이 열로 끓고 있다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가서 쉬세요. 여긴 제가 보고 있을게요.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옆방에 의원도 대기하고 있으니까요. 별 일 없을 겁니다."
"어떻게 별 일이 없을 수가 있어."
애가 이 지경이 됐는데. 방원의 서늘한 중얼거림에 영규는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방원은 영규의 손에 들려있던 젖은 수건을 가져가, 무휼의 마른 입술을 적셨다. 더운 열기를 품은 바람이 손끝에 스쳤다.
"가서 좀 쉬어, 형. 무휼은 내가 돌볼게. 너희들도 이만 나가거라. 무슨 일이 있으면 내가 부를 것이니, 그때까진 아무도 이 방에 들이지 말고."
방원의 단호한 목소리에 가노들은 꾸벅 허리를 숙여 인사하곤 방을 빠져나갔다. 쌕쌕거리는 무휼의 숨소리만이 들려왔다. 영규는 무슨 말을 할까 한참동안 말을 고르다가, 결국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마마 탓이 아닙니다. 너무 자책 마세요."
방원은 영규를 돌아보았다. 그의 얼굴을 보자 갑자기 숨이 턱 막혔다. 고마워. 방원의 중얼거림은 소리 없이 흩어져버렸다. 영규는 방원에게 인사를 하곤, 그대로 방을 나가려다 걸음을 멈췄다.
"무휼이 뭐라고 하거든, 다 괜찮다고 말해주세요. 다 끝났다고. 대답해주기 전까진 입을 안 다물더라고요. 어떻게 된 놈이, 이런 상황에서까지 수다스러워."
조용히, 문이 닫혔다.
방원은 차가운 물에 수건을 담갔다. 있는 힘껏 수건을 비틀어 짜, 열이 오른 무휼의 몸을 조심스럽게 닦아주기 시작했다. 상처에 물이 닫지 않게 조심스럽게 닦아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성한 곳보다 상처의 면적이 더 넓은 듯 했다.
옥사에서 홀로 앓는 아이를 지켜보는 것이 고통스러워, 일부러 그를 찾아가지 않았다. 모든 일이 끝나고 그를 구해내면, 그 때 찾아가 품에 안고 미안하다 말해주려 했다. 그러나 자신이 그를 버려둔 동안, 그는 자신의 생각보다도 더 처참한 고신을 겪은 것이 분명했다.
부드러운 천이 살갗을 쓰는 것조차 괴로운 듯, 무휼은 연신 몸을 움찔거렸다. 차라리 푹 잠들기라도 하면 좀 덜 괴로울 것을. 무휼은 의식이 희미한 와중에도 어떻게든 정신을 차려보려 애쓰고 있었다.
문득 무휼의 입술이 다시 달싹였다. 방원은 영규가 했던 것처럼, 무휼의 입술을 향해 귀를 가져다 댔다.
"마.. 마는.."
"..뭐?"
방원은 무휼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정확하지 않은 발음으로도, 무휼은 분명히 자신을 찾았다. 그래, 무휼아. 나 여기 있다. 왜 그래. 작게 속삭여보아도, 무휼은 방원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마마는.. 도련님은.. 잔뜩 쉬어 거칠어진 목소리로 무휼은 정신없이 주워섬겼다. 무휼. 무휼아. 아무리 이름을 불러보아도 무휼은 알아듣지 못했다. 점차 무휼의 숨이 가빠졌다. 몸을 뒤채기라도 하려는 듯, 무휼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방원은 문득, 영규의 말을 떠올렸다.
"괜.. 찮다."
방원의 목소리에, 무휼의 움직임이 우뚝 멎었다. 방원은 뜨거운 무휼의 뺨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다 괜찮아. 다 끝났어."
"도.. 도련.. 님.."
"무사하다."
방원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무휼을 바라보았다. 거칠어지던 무휼의 숨소리가 잦아들었다. 참으로, 미련하고 독한 놈. 방원은 그가 기쁘면서도 아팠다. 놓기 싫을 만큼 예뻤고, 품기 힘들 만큼 버거웠다.
"네 마마도, 네 도련님도 다 무사해. 네 덕분에 다 무사하다, 무휼."
무휼의 입술이 몇 번인가 더 달싹이더니 이내 쌕쌕거리는 숨소리만 흘러나왔다. 잠이 든 모양이었다. 방원은 붉게 열이 오른 무휼의 얼굴을 부드러운 손길로 닦아주며 입을 꾹 다물었다. 고개를 쳐드는 살의는, 참기도 힘들었고 참고 싶지도 않았다. 화가 치밀었다. 그것이 누가 되었든, 이 대가는 치르게 해야만 했다. 이방원의 사람을 건드리면 어찌 되는지, 그 결과를 만천하에 공포해야만 이 뭉치고 꼬인 마음이 풀릴 것만 같았다.
그러나 지금 당장, 이 침상 곁을 떠날 만큼은 아니었다. 방원은 밤늦도록 찬물에 직접 손을 담갔다. 무휼의 가물거리고 의미 없는 중얼거림을 들어주고, 그것에 하나하나 나직한 속삭임으로 답해주면서. 그렇게 그 밤을 통째로 지새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