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육룡이 나르샤

[육룡이 나르샤 / 방원무휼] 양갈래 무휼 최고

O.A 2016. 4. 1. 13:51

"살아 돌아오다니. 네가 운이 좋구나."

좋은 술과 음식들이 탁상을 가득 채웠다. 주체는 여유롭게 웃으며 하얀 도자기 술잔을 내려놓았다. 방원은 주체의 앞에서 공손한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숙여보였다.

"전하께서 운이 좋으신 것이지요."

"내가?"

"제가 이렇게 살아 돌아왔으니, 다시 좋은 패를 손에 쥐게 되시지 않으셨습니까."

주체는 방원의 건방에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저토록 방자하게 굴면서도 눈에 밟히지 않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였다. 그러나 주체는 방원의 여유로운 태도에도 불구하고 그가 긴장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이유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전하."

포도 한 알을 집어 들던 주체는 한쪽 눈썹을 씰룩이며 방원을 보았다. 결연한 각오라도 한 듯 한 얼굴에 속에서는 실소가 터졌다.

"무휼, 말입니다."

그래, 그 말이 나올 줄 알았지. 주체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안에서 도로록 굴리던 포도를 씹었다. 향기로운 냄새가 퍼지며 달큰하고 새콤한 과즙이 터졌다. 차마 다음 말을 고르지 못하고 마른침을 삼키는 방원을 보던 주체는, 조금 더 편하게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놈은 지금 여기 없다."

"?"

"여진놈들이 조금 시끄럽게 굴기에 병사들을 보내놓았다. 그 놈도 그리로 따라갔지."

아아, 그렇습니까. 그리 대답하는 방원의 얼굴엔 불안함이 조금 스며있었다. 주체는 병사들이 출정한 시간을 헤아려보다가 문득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 보니 슬슬 돌아올 때도 되었군. 같이 마중이라도 나가보겠느냐."

"그리 하여도 되겠습니까."

"안될 것도 없지. 옛 주인을 만나면 그놈도 반가워할게다."

옛 주인. 그 말이 아프게 귓바퀴를 찔러왔다. 그러나 방원은 내색 없이, 그저 감사하다며 인사를 올리며 따라 몸을 일으켰을 뿐이었다.

요동성의 성벽 위에는 북방의 날카로운 바람이 불어왔다. 주체는 여유로운 몸짓으로 요동의 너른 땅과 까마득한 지평선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방원의 시선은 오직 한 점에만 고정되어 있었다. 주체가 일러준 방향으로 나있는 길, 지평선 너머로 자라지는 그 길의 끝만을 열렬히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지평선 너머에서 작은 점이 움직이는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무엇인지 알아보기도 힘들었던 작은 점은 이내 조그마한 사람이 되었고, 한 사람처럼 보이던 것은 금세 한 덩어리의 병사들이 되었다. 말을 탄 사람 몇 명이 앞서고, 땅에 두 발을 디딘 사람들이 뒤따르며 요동성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방원은 유난히 활발히 움직이는 사람 하나를 발견했다. 말을 타고 저 앞으로 혼자 내달리다가 슬쩍 멈추더니 다니 말머리를 돌린다. 그러다가 다시 천천히 본대로 합류했다. 말을 탄 다른 이 하나가 그 자를 향해 주먹을 휘두르는 것이 보인다. 병사들 사이에서 왁자한 웃음이 터졌다.

방원은 다른 이들과 어울려 장난을 치며 분주히 날뛰는 그 사내를 알아보았다. 그 자가, 무휼이었다.

무휼이 가까이 다가올수록, 방원은 무휼의 모습을 또렷하게 제 눈에 새길 수 있었다. 명나라 장수들이 입는 화려한 색채의 갑옷은 낯설었으나 잘 어울렸다. 늘 하나로 단단히 땋아내렸던 머리를 두 갈래로 나눠 묶었다. 어깨 앞으로 늘어져 흔들거리는 그 머리채가 참으로 곱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를 함빡 뒤집어쓴 무휼의 살갗은 여전히 희었다.

병사들이 성 가까이로 다가왔을 때, 문득 성을 올려다본 무휼의 몸이 퍼득 굳었다. 그의 말이 걸음을 멈추자 다른 병사들도 걸음을 멈추고 성을 올려다보았다. 그들은 주체가 저들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을 알자 황급히 말에서 뛰어내렸다.

무휼은 멍하니 성벽 위를 올려다보다가 저도 말에서 내려, 다른 병사들과 함께 허리를 숙였다. 주체는 그런 무휼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방원을 흘끗 보았다. 기둥을 짚은 방원의 손이 가늘게 떨리는 것이 보였다. 주체는 다시 자신의 병사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들을 향해 손짓하자, 그들은 허리를 펴고 분분히 성문 안으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데려가거라."

"?"

"무휼, 말이다. 데려가거라."

방원은 당황하여 주체를 보았다. 그러나 주체는 어떠한 내색도 없이, 여전히 비스듬한 미소를 띠고 있을 뿐이었다.

"어찌.."

"인사를 하지 않더냐."

주체는 천천히 방원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방원은 새삼, 그가 참으로 큰 사람이라는 것을 느꼈다. 욕망과 목적이 뚜렷하나, 결코 졸렬해지지 않는다. 판단이 정확하고, 대와 소가 분명한 사내다. 구질구질하게 늘어지고 사소한 것에 집착하지 않는다. 그야말로 제왕의 상이라고, 방원은 그리 생각했다.

"네가 저놈을 이 성에 남겨두고 떠난 이래, 내 처음 보았다."

"무엇을 말입니까?"

"저놈이 허리를 숙이는 꼴을 말이다."

주체는 끌끌 혀를 찼다. 네 말대로 제 이름자 하나 쓸 줄 모르는 무식한 놈이, 그 기개 하나만은 어찌나 서슬 퍼런지. 선비놈들 못지 않더구나. 내 앞에서도 고개는 숙일지언정 그 몸만은 꼿꼿하더니, 네놈의 얼굴을 보자마자 허리를 숙이지 않느냐. 주체의 웃음 섞인 농에 방원은 그저 미소만 지었을 뿐이다.

"여긴 지켜야할 꿈이 없다네. 아주 미친놈이야. 내 흥미가 뚝 떨어져버렸다."

그래, 제 주인을 닮아 아주 미친놈이더군. 그 말에 방원은 피식 터지려는 웃음을 감추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가보거라. 지금도 나와 이리 농이나 주고받느니, 한시라도 빨리 놈을 찾아가 해후를 기뻐하고 싶을 것이 아니냐. 나도 이만 정무를 보러 가야 할 것 같으니."

"감사합니다, 전하."

방원은 주체를 향해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고, 급히 성벽을 내려갔다.

 

***

 

무휼의 막사는 따로 준비되어 있었다. 건방지게 구는 무휼의 마음을 얻어보고자 주체가 해준 배려였으나, 주체는 그 성과가 없다하여 그 호의를 거두지도 않았다.

무휼은 옷을 갈아입지도, 얼굴이나 몸을 닦아내지도 않은 채 침상에 멍하니 앉아있었다. 성벽 위, 주체의 곁에 서있던 것은 자신의 주군이 분명했다. 당장에라도 달려가 인사를 드리고 싶었으나, 주체와 함께 있을 그를 멋대로 찾아갈 수는 없었다. 이야기가 얼마나 길어질까. 두 식경쯤 기다리면 찾아가도 될까. 무휼은 안절부절 못하며 검의 손잡이만을 매만지고 있었다.

"무휼."

그러다가 문득, 막사의 입구를 들추고 들어온 방원의 목소리에 퍼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짧지 않은 시간동안 내내 그리워했던 얼굴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 마마.."

무휼은 침상에서 벌떡 일어나려했다. 그러나 방원은 고개를 저으며 무휼의 어깨를 눌러 앉혔다. 그리고 자신은 무휼의 손을 잡은 채 그의 곁에 걸터앉았다. 그립고 그리던 시선이 서로 얽혀 떨어졌다.

무휼을 열렬히 바라보던 방원은 문득 한쪽 손을 들어 올려 무휼의 묶은 머리채를 손가락에 감아보았다. 늘 손질되지 않아 거친 머리칼의 푸석함이 느껴졌다. 이것만큼은 그대로여서, 방원은 쿡쿡 터지려는 웃음소리를 목 안으로 밀어 넣었다.

"곱구나."

"..만나자마자 놀리기부터 하십니까."

반갑고 벅찬 마음과는 별개로, 투덜거리는 목소리는 불퉁했다. 방원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농이 아니야. 북방 오랑캐의 복식이 이리도 잘 어울릴 줄은 몰랐다."

"조심하세요, 마마. 밖에 그 북방 오랑캐의 병사들이 즐비하지 않습니까. 저와 스승님 덕에 그들도 조선말 몇 마디는 알아들을 줄 압니다."

"그게 무슨 문제더냐. 네가 있는데. 저들 중에 널 이길 수 있는 자가 몇이나 되겠어."

무휼은 방원의 말에 활짝 웃어보였다. 없지요. 제가 여기에선 제일검입니다, 이제. 자랑스레 말하는 무휼을 보며 방원은 다시 한 번 피식 웃어버렸다.

"그래, 꼴에 야차란 말이지."

방원은 머리카락은 만지던 손을 올려 무휼의 뺨으로 가져갔다. 입술이 터져 흐른 피를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북방의 건조한 바람에 바싹 마른 입술 위로, 방원의 손가락이 훑고 지나간 자리를 따라 붉은 피가 한 겹 칠해졌다. 방원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뜬 무휼은, 별다른 반응 없이 방원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

방원은 무휼의 얼굴을 끌어당겨 입술을 물었다. 혀끝에 비린 쇠맛이 감돌았다. 여진족 누군가의 피라면 분명 역하게 느껴졌을 법도 한데, 무휼의 것이라고 생각하니 그 피마저 달았다.

방원은 무휼과 피내음 나는 혀를 섞으며, 그를 천천히 침상에 밀어 눕혔다. 제 옷자락을 조심스레 잡는 손이 느껴졌다. 이 아이는 늘 이랬다. 혹여 상처라도 날까, 뛰어난 제 용력에 멍자국이라도 생길까 언제나 조심하고 제 몸에는 손가락 하나 대는 것도 조심스러워하는 아이였다.

"누굴 서방으로 맞으려고 이리 곱게 연지를 바른 게냐."

가쁜 숨 사이로 속삭이는 목소리에 무휼의 몸이 뻣뻣이 굳는 것이 느껴졌다. 방원은 낮은 소리로 웃으며 무휼의 뺨을 쓰다듬었다. 제 손끝에 붉은 피가 묻어났다. 피로 찍어 바른 연지라니, 야차답구나. 제 농담에 무휼의 얼굴이 화다닥 붉어지는 것이보였다.

", 놀리지 마세요, 마마.."

울상을 지은 무휼의 귓바퀴를 깨물며, 방원은 그가 입은 갑옷을 벗겨내기 시작했다.

"농이라니. 내가 언제 네게 허튼 소리를 한 적이 있다고."

"만날 하시잖아요!"

"..."

그랬던가. 방원은 중얼거렸지만 그리 신경쓰고 싶은 일은 아니었다. 무휼을 놀려먹는 일이야, 자신이든, 영규든, 방지든, 숨 쉬고 밥 먹듯이 해오던 일이었는데, .

"이 복식이, 참 잘 어울리긴 하는데 말이야.."

그런데 별로 마음에 들진 않는구나. 방원의 목소리에 간신히 정신을 차린 무휼이 방원의 밑에서 빠져나오려 약하게 몸을 뒤챘다. , 마마, 저 지금 엄청 더럽거든요! ! ! 막 그런 것때문에! 씻으러 가야 하거든요! 허둥거리는 무휼의 목소리는 어허. 하는 방원의 단호한 말 한마디에 시무룩하게 사그라들었다. 방원은 낮게 웃으며 드러난 무휼의 어깨를 깨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