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커크] My Crew - 4. 200년 전의 기술
*칸커크
*리부트 스타트렉 영화만 감상한 뒤 쓰는 날조글입니다. 캐릭터 붕괴, 원작 붕괴, 원작 설정 붕괴 주의.
*필자의 칸 편애 주의. 칸 보고싶어서 쓰기 시작한 글이라 어쩔수가 없습니다.
[My Crew]
4. 200년 전의 기술
- “당장 눈앞의 싸움만 피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건가, 함장?”
엔터프라이즈는 푸른 잔상을 남기며 우주를 가로질렀다. 함선 자체는 어마무지한 속도로 날아가는 중이었으나 내부에는 물리적인 작은 흔들림조차 없었다. 그러나 마냥 평화로운 것은 아니었다. 분란의 중심점은 뻔했다. 칸. 커크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함교에 제한 없이 출입할 수 있는 것은 수석장교들과 함교에 배속된 일부 선원들뿐입니다. 소속조차 정해지지 않은 자에게 함교 출입의 권한을 줄 수는 없습니다, 함장님.”
“스팍, 제발. 적당히 하자고.”
“나도 그건 마음에 안 들어, 짐. 그 녀석이 하루 종일 함교에 서서 삐딱한 표정으로 우리를 훑어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 스트레스로 머리가 빠지고 없던 위염까지 생길거야.”
“본즈. 칸이 네 시야에 항상 노출되어 있는 쪽이 좋은 거야. 어디서 뭘 하는지 모르게 엔터프라이즈를 돌아다니면서 은밀한 곳에서 널 감시 한다고 생각하는 게 더 끔찍하지 않아?”
통상적인 함장의 권위라는 것은 찾아볼 수 없다. 본디 엔터프라이즈가 다른 집단보다 훨씬 유하고 친근한 분위기의 함선이긴 했으나, 오늘은 특히 그 정도가 심했다. 그만큼 엔터프라이즈의 함교는 불만과 불안에 가득 차있었다. 커크는 생각보다 완강한 저항에 당황했으나 고집을 꺾지는 않았다. 크루들 역시 그 사실을 깨달았는지, 그에게 반대한다기보다 그저 일방적인 불만들을 토해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 소란도 거기까지였다.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문으로 향했다. 무소속을 뜻하는 검은색 셔츠를 입은 칸이 함교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는 함교의 입구에 멈춰 서서 커크를 보았다.
“함장?”
Captain? 깊은 울림을 가진 낮은 목소리가 부드럽게 커크를 불렀다. 적어도 지금 그에게 시비를 걸 생각은 없는 듯 했다. 커크는 슬쩍 입꼬리를 끌어올려 선명한 미소 지으며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들어와도 돼.”
몇몇 크루들이 궁시렁거리는 불만에 찬 소리들이 들려왔다. 그러나 칸은 아랑곳하지 않고 당당한 걸음걸이로 다가와 커크의 앞에 섰다. 군인들의 경례를 올려붙이는 칸의 몸놀림엔 날카로운 절도가 배여 있었다.
“중령, 존 리처드 해리슨. 오늘부로 엔터프라이즈호의 무소속 장교로 배정되었습니다.”
“그래. 잘 부탁하지, 해리슨 중령.”
곁에서 맥코이가 가증스럽다며 몸서리를 치는 것을 무시하고, 커크는 칸에게 손을 내밀었다. 칸은 그를 향해 내민 손을 흘낏 내려다보았다. 한쪽 입꼬리가 비죽 올라갔다. 흐릿한 비웃음을 띤 채, 칸은 커크의 손을 마주잡았다. 두 사람이 천천히 악수를 하는 동안, 함교 내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쏟아졌다.
“당신은 지금부터 내 허가 없이도 자유로이 함교에 출입할 수 있어. 하지만 되도록이면 나나 수석 장교들의 시선이 닿는 곳에 있어줬으면 좋겠군. 어디론가 가게 된다면 행선지도 알려주고. 이유는 딱히 설명하지 않아도 알겠지.”
“예. 함장.”
“좋아. 그럼 이제 그걸 풀자고.”
커크는 칸의 목에 채워진 구속구를 가리켰다. 칸의 얼굴에 걸려있던 비웃음이 지워졌다. 비죽하게 올라가있던 칸의 입꼬리가 순식간에 내려갔다. 칸이 천천히 눈을 깜빡이며 커크를 바라보는 동안 스팍이 그를 제지했다.
“그 결정 역시 찬성할 수 없습니다, 함장님. 그가 저희들을 다시 배신 할 확률은 낮지 않습니다. 만일의 경우에 그를 제압할 재빠른 대처를 위해서는 그의 구속구를 해제해서는 안 됩니다. 그 구속구만이 현재 저희가 가지고 있는 거의 유일한 방어도구입니다.”
“그럼 해리슨 중령은 반란의 여지가 있다는 이유로 앞으로 5년간의 항해와 탐사 과정동안 계속해서 동맥에 칼날을 꽂은 채 지내야 한다는 뜻인가, 스팍? 그건 네가 그토록 중요하게 여기는 ‘윤리적인 행동’이야? 내 생각엔 아닌데.”
커크는 칸의 어깨를 잡아당겨 상체를 조금 숙이게 하곤 구속구의 해제 버튼을 찾아 눌렀다. 허공에 떠오른 스크린에 보안 접속 코드를 입력하자 구속구에서 미세한 기계음이 들려왔다. 동맥에 꽂혀있던 바늘이 안전하게 회수되고, 이내 구속구의 잠금장치가 풀렸다.
“그리고 잊고 있는 모양인데, 스팍. 해리슨 중령에 관련된 모든 문제의 최종결정권은 내게 있어. 네가 아무리 반대하더라도 소용없다는 걸 미리 말해둘게. 앞으로도 대체적으로 말이야.”
칸은 일주일 만에 자유로워진 목덜미를 문지르다가 커크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까닥여 인사했다. 커크는 그의 목에 선명히 남아있는 멍 자국을 보며 잠시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칸이 옷깃을 정리하자 검다 못해 푸르죽죽해진 목덜미의 멍은 금세 가려졌다. 아마 몇 시간 뒤면 사라질 거다.
커크는 함장의 의자에 익숙하게 걸터앉았고, 칸은 커크의 뒤에 선 채 함교 내부를 휘 둘러보았다. 크루들은 그와 눈이라도 마주칠까 황급히 자신의 업무에 집중하는 척 했다. 두려움의 반응이 아니었다. 두려움도 섞였을지는 모르지만, 대부분은 명백한 혐오의 반응이었다.
그러나 칸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의 예상범위 내의 반응들이었다. 참으로 재미없는 작자들이다. 칸은 함교의 내부를 머릿속에 기계적으로 새겨 넣으며 생각에 잠겼다.
어차피 엔터프라이즈는 그의 함선이 아니었고, 이 함선에 타고 있는 크루들 역시 그의 사람이 아니다. 그는 스타플릿과 커크에게 협조하며 일단 인질로 잡혀있는 72명, 그의 사람들의 안전을 도모하기만 하면 된다. 그 외에는 관심도, 흥미도 없었다. 수많은 적을 만들며 살아온 그는 적대적인 시선에 새삼 상처를 받을 만큼 심약하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이 그런 한가하고 감성적인 생각에 잠겨있을 만큼 여유로운 상태가 아니라는 것도 알았다.
그들이 목표한 스타플릿의 전초기지에 닿기까지 소요될 예상시간은 일주일이었다. 거의 일주일이 다 지나도록, 칸은 엔터프라이즈의 일원으로 녹아들기 위한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았다. 그에게 적대적인 자는 무시했으며, 그에게 말을 걸어오는 자-예를 들면 커크나 스카티, 그리고 의외로 체콥-에게는 적당히 예의를 갖춰 대꾸할 따름이었다.
한 가지 의외인 점이라면, 그가 체콥에게 비교적 많은 관심을 보였다는 것이다. 그에게 다정하게 대한다거나, 특별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가끔씩 체콥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생각에 잠기곤 하는 것이다. 체콥은 그의 시선을 무척 부담스러워했고, 술루는 칸이 체콥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 자체를 탐탁치 않아했다. 그나마 커크가 다행이라고 여긴 것은, 대부분의 크루들이 칸의 앞에서 칸에 대한 불만을 터트리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스팍은 감정적인 태도를 좀처럼 보이지 않았고, 맥코이는 칸을 볼 때마다 커크를 향해 궁시렁거리며 불만을 토했다. 그 두 사람의 태도는 어찌 보면 평소와 똑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평소와 다른 것은 캐롤이었다. 그녀는 칸에게 적개심을 보이는 것은 물론이요, 칸으로 인해 마음에 상처를 받을 때마다 커크에게마저 종종 원망하는 눈빛을 보내곤 했다.
칸은 커크의 말대로 대부분의 시간을 함교에서 보냈다. 그의 의자에 앉아 조용히 생각에 잠겨있거나, 함교에 서있는 투명한 보드에 그때그때 떠오르는 공식이나 착상 등을 적곤 하면서. 칸이 보드 가득 복잡한 수식과 기호들을 채워 넣고 한 발 물러나 공식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노라면 스카티가 무심하게 지나가는 척 그의 뒤로 스쳐지나간다. 그러다가 우뚝 걸음을 멈추고, 투명 보드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비속어를 내뱉으며 보드 앞으로 달려든다. 스카티가 무언가를 중얼거리며 수식들을 읽고 있으면, 칸은 오류를 발견했다며 보드를 미련 없이 지워버린다.
거진 일주일 사이 몇 번이나 반복된 일이었다. 커크는 함교에 울려 퍼지는 스카티의 짧은 욕설이 익숙해져버렸다는 것이 새삼 재미있었다. 스카티가 호들갑을 떨 때마다 칸에게 확연한 거부감을 표시하던 체콥이 호기심을 느끼며 그를 흘끗 곁눈질하는 모습도 종종 보였다. 적어도 과학 장교들, 그 아래의 생도들, 그리고 기술자들은 칸의 지식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는 자들이 많았다. 그들 대부분은 칸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심하게 배척하지도 않았다. 스카티는 시간이 지날수록 칸이 썩 마음에 드는 눈치였고, 스카티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던 킨저 역시 자신을 정중히 대하는 칸에게 별다른 적대감을 드러내지 않았다.
칸은 킨저뿐 아니라 모든 이를 정중하게 대했다. 냉소적인 그의 태도 탓에 자주 조롱으로 비춰지긴 했지만, 예의만큼은 확실하게 차리는 것이었다. 필요 이상의 갈등이 조장되는 것에 피곤함과 귀찮음을 느끼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타인과의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새로운 인간관계를 만들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스카티는 커크에게 허락을 구한 뒤 칸을 데리고 엔터프라이즈의 곳곳을 보여주는 것에 재미를 붙였다. 칸은 그 일에 그다지 흥미를 느끼는 기색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스카티의 안내를 받으며 엔터프라이즈의 곳곳을 돌아다녔다. 함교에만 갇혀있는 것은 제법 지루하고 따분한 일이었기에.
칸은 함선뿐만 아니라 다방면으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 날 저녁이면 스카티와 함께 다니며 그가 살펴본 장소들의 대략적인 설계도를 그려낼 정도였다. 스카티의 전문 용어와 엔지니어들의 속어가 가득 섞인 수다를 막힘없이 이해하고, 대답하기도 했다. 커크가 스카티에게 칸이 마음에 드느냐고 물었을 땐 펄쩍 뛰며 부정하긴 했으나, 적어도 스카티와 킨저만큼은 더 이상 지나가는 칸의 뒤통수로 모욕적인 손짓을 던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지금도 간간히 그러는 선원들이 보였다-. 물론 칸은 그런 소심한 모욕들을 모두 눈치 챘고, 무시하거나, 청록색의 싸늘한 눈동자로 잠시 동안 상대를 물끄러미 응시할 뿐이었다. 그러면 상대는 슬쩍 시선을 돌리고 자리를 피해버린다.
엔터프라이즈에 탑승한 선원들 중 칸의 힘을 직접 목격했던 이는 몇 되지 않았다. 일 년 전의 사건에서도 정신없이 휩쓸리다 얼떨결에 지구로 귀환한 선원들도 제법 되었고, 일 년 사이 보충된 인력들도 꽤 많았다. 칸이 무슨 짓을 했는지는 들었기에 그를 미워했지만, 정작 그의 만행을 직접 두 눈으로 목도하지 못한 이들도 많았다. 실제로 겪었다고 하더라도, 벌써 일 년 전의 과거였다. 평범한 사람의 기억은 주관이 섞이며 제멋대로 퇴색되거나 변형되기 마련이다.
그들이 칸의 힘을 다시 목도하는 것은 엿새째 되는 날이었다. 전초기지의 도착을 하루 앞둔 시점.
애초에 지구에서 그들이 목표한 전초기지로 직행했다면, 지속적으로 최고 속도로 항해한다고 가정했을 때, 나흘이면 도착했을 것이다. 그러나 커크는 기존의 항로를 우회하는 길을 택했다. 중립 지역을 통해 아직 탐험선이 닿은 적 없던 작은 미발견 지역으로 나가, 미지의 지역을 이틀 동안 가로지르며 간단한 사전답사를 겸한 탐사를 할 계획이었다.
보고되지 않은 행성이나 이상 현상은 목격되지 않았다. 애초에 행성 연합의 두 주둔지 사이의 작은 지역이었다. 커다란 위협이나 놀랄만한 발견에 대한 기대는 애초에 없었다. 그저 기분이나 내고, 각오나 다질 요량으로. 그렇게 평화롭게 첫 목적지에 닿을 줄 알았다.
“함장님. 전방에 미확인 함대가 출현했습니다.”
레이더를 확인하던 술루가 급하게 커크를 찾았다. 분명 근방에 생명체가 살 수 있는 행성은커녕, 어떤 교신 신호조차 확인되지 않았는데. 함장의 자리에 흐트러진 자세로 걸터앉아 무료하게 기지개나 켜고 있던 커크는, 갑작스런 적의 출현에 당황했다. 그러나 그는 타고나길 함장이었다. 어린 나이로 인한 경험 부족을 메우며 무려 ‘그’ 엔터프라이즈의 함장직을 꿋꿋이 지켜나갈 수 있음에는 그의 무모할 정도의 담력과 순발력도 어느 정도 영향을 끼친 것이 분명했다. 아마도 상당히 많은 부분을.
“전방에 실드를 올려.”
“예, 함장님.”
“그리고 교신을 시도해봐. 일단 상대의 정체부터 파악해.”
“상대가 응답하지 않습니다!”
커크는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미간을 꾹 눌렀다. 미확인 함선들은 말 그대로 함대였다. 외관상으론 처음 보는 기종이었다. 엔터프라이즈에 비해 크기도 무척 작았지만 전투 기능이 현저히 떨어지는 엔터프라이즈에게, 열 대가 넘어가는 함선 부대는 위협적일 수밖에 없었다. 커크가 다시 명령을 하려 입을 열었을 때였다. 미확인 함선으로부터 발사된 무기가 엔터프라이즈의 실드를 때렸다.
“윽……!”
함체가 크게 요동쳤다. 통상적인 교전 중에 겪는 충격이 아니었다.
“뭐에 맞은 거야, 술루?”
“모르겠습니다, 함장님. 처음 보는 무기입니다. 충격에 비해 실드가 크게 손상되진 않았습니다.”
“워프 준비해.”
술루의 보고를 듣는 사이, 두 번의 충격이 더 전해져왔다. 커크가 혼란스러움에 이마를 짚는 순간, 함교의 문이 열리며 칸이 뛰어 들어왔다.
“스캔은?”
“해리슨?”
“스캔은 했나, 함장?”
“소용없을 거야. 저들은 이미 무기를 날려대고 있다고. 이미 실드를 다 올리고도 남았지. 차라리 동력을 빨리 끌어 모아서 워프를…….”
“스캔 해. 실드는 없을 거다.”
“무슨 뜻이야?”
“우리는 포위당했다, 함장. 안전하게 도망칠 수 있다는 보장은 없어. 워프 하는 순간엔 미묘한 연쇄반응으로 인해 실드가 불안정해질 수 있다. 상대의 무기가 페이저라면 상관없지만, 지금 저들이 사용하는 무기는 당신에게 익숙한 물건이 아니다. 차라리 실드를 유지한 채 싸워야 해. 그 쪽이 승리 할 수 있는 확률이 더 높아.”
“엔터프라이즈는 전투 함선이 아니야, 해리슨 중령.”
“한 가지 확인할 사항이 있습니다. 당신은 저들이 사용하는 무기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까? 현재 스타플릿의 생도들이 받는 실전 교육과정의 다수의 사례들 중 지금의 상황과 정확히 일치하는 사례는 없습니다. 당신이 가진 지식의 정확성과 적절함에 의문을 제기하겠습니다.”
스팍이 커크를 거들어 칸에게 반대하고 나섰으나, 칸은 그들을 향해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술루는 워프 경로 설정을 마친 뒤, 스캐닝 시스템을 준비하며 어느 쪽이든 커크의 결정에 곧바로 따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스캔 해. 날 믿어봐, 함장.”
커크는 잠시 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칸은 전방을 비추고 있는 스크린을 바라보며 적함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커크는 술루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스캔 해, 술루.”
“예, 함장님.”
체콥은 술루를 보조하며 칸을 흘끗 보았다.
체콥은 칸에게서 위화감을 느꼈다. 지난 일주일동안 늘 짓고 있던 냉소적인 표정이었는데도, 어쩐지 낯설었다. 삭막하고 숨 막히는 공기를 두르고 있었다. 체콥은 일 년 전의 사건에서 칸을 직접 대면한 적이 없었다. 그가 칸의 모습을 본 것은, 그 누구도 그를 환영하지 않는 함교 안에서 뻔뻔하고 무표정한 얼굴로 혼자만의 생각에 잠겨있는 모습뿐이었다. 오만함. 거만함. 그런 것들. 체콥은 칸이 내뿜는 매서운 느낌이 ‘살기’라는 것을 몰랐다. 그런 것을 내뿜을 수 있는 남자라는 것을 처음 보았다.
“스캔 완료 되었습니다, 함장님. 정말로 실드는 올라가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처음 보는 기종입니다. 내부 구조가…….”
“실드를 올리지 않은 게 아니야.”
칸은 스크린에 떠오른 적함의 구조를 보며 입가에 비웃음을 걸었다.
“실드를 올릴만한 기술이 없는 거다. 저건 두 세기 전의 모델이야.”
다시 한 번 적함의 무기가 엔터프라이즈의 실드를 때렸다. 함체가 크게 흔들렸으나 칸의 자세에는 작은 흔들림조차 없었다.
“엔터프라이즈를 공격하고 있는 이 무기는 페이저가 아니다. 구식 미사일이지. 저들은 적어도 지구보다 200년 즈음 낙후된 문명에서 살던 자들인 모양이다.”
“200년 전의 기술을 어떻게 알아본 거야? 그걸 다 외우고 있었다니, 당신도 참 별나군.”
“너희들에겐 별 의미 없는 역사일 뿐일지 몰라도, 내겐 아니니까.”
칸은 커크를 돌아보았다. 서늘한 눈동자에 날카롭고 살벌한 빛이 어려 있었다. 커크는 그 눈빛을 본 일이 있었다. 최초의 사건이었던 런던 테러에 이어, 데이스트롬을 덮쳤던 두 번째 테러. 그를 처음 보았던 때. 방 안으로 무자비하게 페이저를 난사하던 냉혹한 살인마.
“어떻게 할 거지, 함장?”
“무슨 뜻이야?”
“저들이 '미사일'을 쏘았다는 건 우리를 죽이겠다고 마음먹었다는 뜻이다.”
커크는 의아한 얼굴로 술루를 보았다. 술루는 실드를 체크하고 있었다. 꽤 오랫동안 공격을 받고 있었음에도, 실드의 잔여 수치는 87% 언저리를 가리키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살기가 실린 공격은 아닌데. 커크의 시큰둥한 반응에 칸은 답답하다는 듯, 혹은 한심하다는 듯, 복잡한 시선으로 커크를 보았다.
“그들이 현재 가지고 있는 모든 화력을 퍼부으려 마음먹었다는 뜻이야. 화력이 약하니 실감이 나지 않는 모양이군. 저들의 문명 수준을 고려했을 때, 비유하자면 우리에게 광자어뢰와 페이저를 쏟아 붓고 있는 셈이다. 예를 들어줘야 이해를 하겠나? 저들이 벤전스의 절반만 되는 기술력을 가지고 있었다면, 엔터프라이즈의 이 얇디얇은 실드는 진즉에 날아가고 우리는 지금쯤 우주로 쓸려나가 먼지가 되고도 남았을 거야.”
칸은 낮게 목을 울리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가소로워서.
“그래서 요지가 뭐지, 해리슨 중령? 확실히 지금 저들이 우리의 실드에 큰 타격은 주지 못하고 있지만 언제까지 여기에 멈춰 서서 공격을 받고 있을 수는 없어. 당신 말대로 뒤떨어진 문명의 함선이라면 엔터프라이즈의 속도를 따라올 순 없을 테니 작은 고장의 위험을 무릅쓰더라도 빨리 워프를…….”
“당장 눈앞의 싸움만 피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건가, 함장?”
스팍이 두 사람을 향해 다가왔다. 그러나 칸은 그를 향해선 어떤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다. 칸의 시선은 커크를 똑바로 향해있었다. 눈빛만으로도 그를 꿰뚫어 죽여 버릴 듯 강렬한 시선이었다. 그러나 그 강한 시선은 커크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그가 머릿속으로 몇 번이나 찢어발기고 있는 상대는 저 초라한 함선에 타고있는 얼굴 모를 적이었다.
“스타플릿의 전초기지로부터 하루거리에, 열 척 이상의 전투 함대가 나타났다. 그리고 어떠한 교신의 의지도 보이지 않고, 상대방의 신분조차 확인하지 않은 채 화력을 퍼붓는다. 이게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겠나, 함장? 저들은 싸움을 원하고 있는 자들이야. 스타플릿으로의 공격이란 말이다.”
“그게 어쨌다는 거야? 저 함대를 보라고. 저런 군대는 한 트럭이 더 몰려와도 아무런 위협이 되지 못해.”
“하찮은 미물의 한심한 공격이라고 해서, 반역 행위를 묵인해선 안 돼. 그런 안일한 생각으론 결국 아무 것도 지켜낼 수 없다, 함장. 우리를 향해 저런 한심한 공격을 퍼붓고 있는 저 함대에게 지금 당장 적절한 응징을 가하지 않는다면, 현재 연합에 속하지 않은 모든 세력들의 도전을 암묵적으로 허용한다는 메시지를 남기게 될 거야. 무궁한 발전의 가능성을 가진 미개한 문명에도, 우리보다 막강한 화력을 가진 미지의 선진 문명에도 말이야.”
칸은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상세히 설명해야 한다는 것이 귀찮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커크는 눈에 보이지 않는 미지의 세력까지 염두에 둔 채 생각하고 행동하는 일은 익숙하지 않았다. 그의 관심사는 탐험과 모험이었다. 복잡하고, 어쩌면 정치의 성향까지 띨 수 있는 상황에 대한 판단력은, 다른 고위직의 장교들에 비해 현저히 떨어진다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저 함대를 향해 페이저라도 난사하라는 뜻인가?”
“그건 안 될 말이지, 함장. 저들이 페이저와 실드에 대한 개념을 정립하기까지, 지구의 발전 속도에 빗대어보자면 대략 두 세기가 지나야 할 거다. 문명의 발전에 직접적인 영감을 줄 수 있는 행동은 최대한 배제하는 것이 좋아.”
엔터프라이즈와, 커크와, 자신. 그들을 싸잡아 물어뜯고 싶어 하는 이들은 생각보다 많을 터다. 칸은 그들에게 만일의 여지를 남기고 싶은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그럼 어쩌자는 건데? 이제 수수께끼는 그만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해보게, 해리슨 중령.”
커크는 피곤한 표정을 숨기지 않으며 자신의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실드의 잔여 에너지가 70% 미만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칸은 커크를 향해 완전히 몸을 돌렸다. 그의 청록색 시선은 사나운 열기를 품고 있는 듯 했다. 마주보는 것만으로도 피부를 따끔거리게 하는 강렬함이 있었다. 그는, 현 인류와는 전혀 다른 또 다른 인류였다. 한 인류의 우두머리. 과거의 그림자들의 제왕. 그 사실을 새삼스레 함교에 각인시켰다. ‘나는 너희들과 다르다’고.
“날 전송해주시오. 저 함선 속으로.”
“뭐?”
커크는 관자놀이를 문지르던 손을 멈칫하며 칸을 보았다. 칸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낮게 으르렁거리는 포식자의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날 적함 속으로 전송해. 함선을 탈취하고, 나머지 함선들을 격추시키도록 하지.”
“저 속에 군사가 몇 명이나 탑승하고 있는 줄 알고 그런 말을 해?”
“몇 명이든 상관없다. 적어도 나는.”
칸은 평온한 어조로 답했다. 아, 그래. 어련하시겠어. 궁시렁거린 커크는 근처를 어슬렁거리는 스카티를 흘끗 보았다.
“스캇. 그를 저 함선 속으로 당장 전송할 수 있어?”
“뭐 그런 걸 새삼 물어보고 그래. 나라다호로도 전송했었구먼. 기본적인 실드도 없는 저런 고철덩어리 속으로 보내주는 거야 간단하지.”
“좋아.”
커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스카티는 칸을 향해 따라오라는 손짓을 했고, 칸은 별다른 반응 없이 그를 향해 한 발을 내딛었다. 그 순간, 커크가 칸의 어깨를 움켜쥐며 활발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갈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