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룡이 나르샤/주체무휼] 변방의 어린 짐승
피를 뒤집어쓰고 포효하는 무휼의 모습은 가히 야차와 다름없었다. 주체는 자신의 눈이 틀리지 않았음을 느꼈다. 다른 병사들과 어울릴 때에는 소탈하기 그지없고, 웃음은 아이처럼 순박하던 자가 검만 잡으면 눈빛이 돌변한다. 아직 검 끝엔 망설임이 보이나, 결국 검을 휘두르는 것은 단호함이었다.
"여봐라."
"예, 전하."
주제의 나직한 목소리에 곁에 서있던 장수 하나가 잽싸게 다가왔다. 주제는 무휼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제 수하 중 한 명이 그에게 달려들어 등을 치며 환호하는 것이 보였다. 변방의 오랑캐 주제에, 무휼은 요동성에서도 제법 인기가 좋았다.
"가서 털가죽으로 만든 외투를 하나 지어오너라."
"털가죽 말입니까?"
"그래."
주체가 무휼을 향해 턱짓하자, 장수의 시선이 그들 돌아보았다. 뺨에 튄 피를 문질러 같으며 웃고있는 조선의 사내가 있었다.
"내 저자에게 옷을 한 벌 내려야겠다."
"..예. 알겠습니다."
어찌 저런 오랑캐 촌놈에게 직접 옷을 내리신단 말입니까, 하는 항변은 목구멍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목이 달아날 것이 뻔했기 때문에.
"부르셨다 들었습니다."
꾸벅. 주체는 거만하게 의자에 기대어 앉은 채, 고개를 숙이는 무휼을 올려다보았다. 언제나 가벼운 목례로 인사를 올릴 뿐, 무휼은 절대로 자신에게 고개를 조아리거나 허리를 숙이지 않았다.
그래봐야 무사 나부랭이가. 주체는 코웃음을 쳤다. 그에 무휼이 시선을 올려 자신을 흘끗 보다가, 눈이 마주치자 다시 시선을 내리까는 것이 보인다. 참으로 순박한 얼굴을 가진 사내였다. 주체는 제 곁을 지키고 서있던 병사에게 고갯짓을 했다.
병사가 비단천으로 싸맨 꾸러미를 내밀었으나, 무휼은 그것을 받아들지 않았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무엇인지 알면 어쩔 것인가? 네 마음에 들지 않는다하여 거절할 것인가?"
"그렇다고 뭔지도 모르면서 아무거나 덥썩 받아들 수는 없지 않습니까."
"허. 네 옛 주인을 닮아 건방지기 짝이 없구나. 이것이 이방원이 내린 하사품이라 하더라도 네가 그리 반응했겠느냐?"
무휼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주체는 씰룩이는 입꼬리를 숨기지 않고, 선심쓰듯 입을 열었다.
"그래, 못알려줄 것도 없지. 짐승의 털가죽으로 지은 외투다."
"털가죽이요? 그런 귀한 것을 어찌 일개 병사인 제게 내리신단 말입니까?"
"말이 많은 놈이로구나."
주체는 손짓으로 병사를 물러나게 했다. 병사는 무휼 앞의 탁상에 보따리를 올려놓은 채, 조용히 막사를 빠져나갔다. 무휼이 여전히 꾸러미에 손을 댈 생각이 없는 듯 보이자, 주체는 불만스런 숨소리를 토했다.
"네 칼은 인간의 것이 아니다."
"예?"
저 자의 스승이라는 작자가 떠드는 말에 따르면, 고려말의 그는 도화전 야차라 불리었다고 했다. 술과 연회를 즐기는 도화전이란 곳에서, 살수 수십을 도륙하고 현 조선의 왕을 구해내었다고 했다.
방원은 무휼이 무사로서의 명예 하나만을 바라고 자신을 따르기 시작했노라 말했다. 그러나 주체가 보기에, 무휼은 스스로의 입신을 위해 칼을 뽑는 이가 아니었다. 그의 칼에는 그 자신의 사심이란 단 한조각도 들어서지 못했다. 그의 생각 역시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었다.
그의 칼은 사람의 칼이 아니다. 어떠한 생각도, 목표도 없는 칼이다. 그저 그의 주인이 베라면 베고, 죽이라면 죽이는 칼일 뿐이다. 충실한 사냥개의 칼이고, 길들인 호랑이의 칼이다.
"어찌 짐승이 인간의 옷을 입고 있느냐. 짐승이라면 으레 털가죽을 두르고 있는 것이 온당한 일일진데."
주체는 무휼을 보며 낄낄 웃었다.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무휼이 눈을 꿈뻑이며 꾸러미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것이 보였다. 주체는 무휼이 쉽게 그의 선물을 받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렇다고 고작 이런 일로 겁박하거나 설득할 마음은 들지 않아, 주체는 대충 거짓말을 지어내 둘러대기로 했다.
"농이다. 제 이름자도 모를만큼 무식하다더니 농조차 못알아듣느냐."
"농..이요?"
"그래. 너는 조선에서 왔다 하였다. 저 남방땅에 살던 놈이 요동까지 올라왔으니 많이 추울 것이 아니냐. 네 옛 주인이 너를 버리며 잘 돌봐달라 부탁하고 갔으니, 난 그에 대한 덕을 베풀어주려는 것이다."
무휼의 눈이 천천히 깜빡이는 것이 보였다. 그 모습이 꼭 밭을 갈던 소를 떠올리게해, 주체는 피식 웃어버렸다.
"마마께서 부탁하셨단 말입니까?"
"그러니 어서 들고 꺼지거라. 내 몸이 고단하여 좀 쉬어야겠는데, 언제까지 네놈을 이리 붙들고 독대를 해줘야 한단말이냐?"
"..송구합니다."
까딱. 다시 가벼운 고갯짓 뿐이다. 그러나 무휼의 손은 비단꾸러미를 단단히 움켜쥐었다. 손끝이 가볍게 떨리는 것이 보였다. 흥.. 주체는 속으로 그를 한껏 비웃었다. 요동을 지나게 해줄테니 무휼을 달라는 그의 말에, 이방원은 한 식경의 고민도 없이 그러겠다 대답했다. 그런자를 아직 주군이라 믿으며, 그의 이름만으로도 손까지 떨며 따르는 꼴이 자못 우스웠다.
무휼은 그대로 몸을 돌려 막사를 나가버렸다. 마지막까지 흔들거리던 그의 머리채가 꼭 철모르는 아이들의 그것을 닮았다고 생각됐다. 그러나 그 꼴이 우스운 것은 둘째치고, 주체는 자신의 기분이 왜이리 언짢은 것인지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보았다.
***
짐승이 어찌 사람의 의복을 입었느냐<-이 대사 치면서 털옷 주는 주체가 보고싶었던 것 뿐인데 사족이 뭐이리 기냐..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