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육룡이 나르샤

[육룡이 나르샤/방휼/논컾]

O.A 2016. 2. 21. 04:01

육룡이 나르샤 20화쯤 보고 쓰는 글.. 후반부 내용 아직 안봐서 몰라요(그리고 글 쓰는 이틀사이 10화를 더봤다..)

컾성향 별로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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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연희낭자 말이야."

이방지는 등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흘끗 뒤를 돌아보았다. 웬일로 조용히 따라온다 싶었는데, 자신만의 생각에 푹 빠져있었던 모양이었다.

"연희가 뭐."

"아니, 내가 진짜 궁금해서 그러는데. 이상한 뜻은 아니니까 오해는 말고 들어. 괜히 화내지 말고."

"또 무슨 말을 하려고 그리 뜸을 들여."

방지는 무휼의 진지한 표정에도 그리 신경을 쓰지 않았다. 무휼은 온갖것에 반응하는 사내였다. 아주 작은 일에도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은 표정을 짓다가, 닭다리 하나에도 금세 활짝 웃는 단순한 사람이었고, 사소한 것에도 발끈하고, 분노하고, 기뻐하는 아이같은 이였다.

"너 진짜로, 지인짜로, 아직까지 연희낭자 좋아해?"

"뭐?"

방지의 걸음이 우뚝 멎었다. 사나워진 그의 눈빛을 느낀 무휼 역시 그 자리에 멈춰서서,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어물어물 입을 열었다.

"아, 진짜. 너 인상 더러워서 그렇게 흰눈뜨면 진짜 무섭거든? 화내지 말라고 했잖아. 나쁜 뜻 아니야."

"그럼 무슨 뜻인데."

퉁명스레 되물으면서도, 방지는 무휼의 말을 의심하진 않았다. 나쁜 뜻이 아니라는 말은, 의심할 필요도 없는 진실일 것이다. 무휼은 악의를 품고 누군가를 비난하거나 떠볼 수 있는 성품의 사람이 아니었다.

"난 진짜 모르겠어서 그래. 연희낭자랑은 어렸을적 동무라면서. 그리고 엄청 오래 못만났고. 그런데도 아직도 그렇게 좋아하는거야?"

방지는 그런 무휼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등을 돌렸다. 저자는 이런 상황에도 그런 쓸데없는 일에 호기심이 생기는 것인지. 겁이 없건, 간이 크던, 이는 자신과는 또다른 담력이다.

딱히 답할 마음도 들지 않고, 답할 말도 떠오르지 않아 그냥 무시하기로 한 것인데. 무휼은 그의 침묵에서 대답을 들은 모양이었다. 솔직한 감탄의 탄성이 등뒤에서 들려왔다. 이상한 생각 그만하고 빨리 걸어, 하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오를 즈음, 급히 자신의 뒤를 따라잡는 발걸음이 들려왔다.

"너 진짜 멋있는 놈이야."

"뭐?"

방지가 뜬금없는 무휼의 칭찬에 고개를 휙 돌리자, 움찔하며 순간적으로 어깨를 움츠렸던 무휼이 입을 삐죽 내밀고 툴툴거렸다.

"아니, 넌 뭐 칭찬을 해줘도 때리려고드냐?"

"때리려던 적 없어."

"눈빛이 딱 그건데, 뭐."

어흠. 헛기침을 하며 과장스레 가슴을 쭉 펴는 무휼을 보니 피식 헛웃음이 나왔다.

"이 고려의 정점인 삼한제일검이지. 분이낭자 잘 지켜주는 괜찮은 오라비지. 네 앞가림 할 줄 알지. 노래 잘부르지. 네 정인도 몇 년째 생사도 몰랐으면서 계속 마음에 품고있었다지."

무휼의 눈이 가늘어지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혀를 차는 것이 보였다. 방지가 한쪽 눈썹을 올려보였지만, 그의 표정을 미처 살피지 못한 무휼은 다음 말을 입에 담고야 말았다.

"아, 아까워, 진짜. 생긴 것만 좀 더 멀끔했으면 여인들이 줄을 섰을 텐데."

"뭐라고?"

"아, 그렇잖아. 전에도 말했다시피 넌 생긴게 너무.. 아니다, 됐다."

무휼은 후다닥 방지의 팔이 닿을 거리를 벗어났다. 방지는 궂이 그를 쫓아가 뒷통수를 후려칠 생각까진 들지 않았다. 땋아내린 무휼의 머리카락과, 넓은 어깨가 시야에 들어왔다. 어느 사내보다 훤칠한 키와 당당한 체격은 무사로서는 누구나 부러워할 조건이었다. 그가 가진 뛰어난 힘도.

"나도 너 부러워."

"어엥?"

방지의 말에 무휼은 뒤를 휙 돌아보았다. 땋은 머리채가 허공을 가르며 곡선을 그리다가 툭 늘어진다.

"나도 너 부럽다고. 무휼."

"허, 참. 삼한제일검이 입발린 소리를 다 하고 그러냐. 우리 할머니 앞에서 그 말 한 번만 더 해봐라. 배추잎으로 맞을걸. 정신 못차린다고."

무휼이 입술을 삐죽 내밀고 툴툴거리는 것을 본 방지는 새어나오는 웃음을 숨기지 않았다. 입꼬리가 슬쩍 올라간다. 그래, 이것도 재능이라면 재능이다.

검을 잡는 이들은 바람을 닮는다. 무휼 역시 바람같은 사내였다. 그의 검이 날랜 것도, 성품이 매서운 것도 아니다. 그저 한여름 무더위에 어디선가 불어와 이마를 식히고 숨통을 틔어주는, 그런 강바람같은 사내라고. 그런 생각이 들었다.

"넌 착해. 난 그게 부러워."

"얘가 뭐래. 그럼 넌 나쁘냐?"

"넌 진짜로 착하다는 말이야."

방지의 말에 무휼은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가, 헤죽 웃으며 땋은 머리채를 만지작거렸다.

"그런가?"

방지는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삼봉의 동굴은 쉽사리 찾을 수 없는 곳이었다. 우연과 필연이 닿아 점차 드나드는 사람의 수가 많아진 지금도, 길을 알지 못하는 자는 평생가도 찾아내지 못할 수도 있는 곳. 그들이 하는 일은 힘겨웠고, 거대했고, 버거웠다. 그것은 비단 그들뿐만 아니라, 이 고려를 무겁게 내리누르는 공기나 다름없었다. 이 땅에는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진 사람들이 많았다.

"널 보면 사람들이 웃어. 분이도, 이방원도."

"에이.. 그거야, 내가 생각이 좀 짧고 멍청해서 자꾸 이상한 소리를 하니까 그런거고."

"멍청한건 알긴 아는구나. 그러니 공부 좀 해."

"..이씨. 칭찬 잘하다가 갑자기 또 욕이야?"

방지는 무휼의 표정을 보며 피식 헛웃음을 흘렸다. 무휼은 그런 방지의 얼굴을 보곤 다시 예의 순박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참으로 구김살 없는 성격이고, 햇살같은 웃음이다. 거짓말 못하고, 정 많고, 단순하고. 이 난세에 그러한 성품을 지니고있다는 것이 얼마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인지를 알고있기에, 방지는 그것이 부럽고 기특했다.

"무휼."

"아, 또 왜."

퉁명스런 얼굴이 방지를 휙 돌아보았다. 삐졌구나. 하지만 한식경도 못가 다시 웃을 것이다. 그 단순한 반응에 자신도, 이방원도, 심지어 분이까지 그를 놀려먹는 것을 좋아하는 것일 터다.

"넌 왜 검을 잡은거야?"

"어엉?"

"넌 왜 검을 잡게 된거냐고. 이유가 있을 것 아냐."

무휼은 의아한 표정을 짓다가도, 잠시 대답을 생각하는 듯 생각에 잠겼다. 그러나 대답이 나올 때까지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그야 이름 날리는 무사가 되려고 그랬지. 난 인맥도, 가문도, 재산도 없으니까 출세하려면 검술밖에 없다면서 할머니가 사부한테 데려갔었어."

"출세해서 무엇을 하려고 했어."

"글쎄..에이, 뭐가 그렇게 복잡하냐? 사내로 태어나서 입신양명 하겠다는데 꼭 이유가 필요해?"

밥상에 올라온 고기반찬 하나에 세상 다가진 표정을 짓는 녀석이 칼을 잡고 사람을 죽이게하는 세상이다. 욕심이 없어도 누군가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고, 정치를 몰라도 정적들을 견제하게 되는 세상이다. 빼앗기지 않으려 독해지고, 빼앗으려 악해지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오직 그런 사람들만을 보아온 방지에게, 무휼은 이질적이고 낯설었다.

"난 사람을 죽이려고 검을 배웠어."

방지는 걸음을 멈췄다. 두어걸음 더 나아갔던 무휼도 걸음을 멈췄다. 방지는 언제나 지친 눈빛을 하고있었다. 이 세상이 얼마나 더러운 곳인지를 보아왔고, 그 칼에 몇 번이나 베어왔기 때문에. 희망을 빼앗긴 채 숨만 쉬며 살아가는 이들을 너무나 오랫동안 보아와서,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과 열정으로 불타는 이들을 바라보는 눈빛마저 빛바래고 처연했다.

"그런데 넌 아니야. 입신양명? 그걸 왜 하려는 건데. 네 가족들을 부양해야 하니까. 그래서 아니야? 열명 가까이 되는 네 동생들과 할머니를 부양해야 하니까. 그래서 시작한거지, 너는."

"아, 뭐. 그렇긴 한데. 아, 그래서, 그게 뭐 어쨌다고 그러냐? 난 동방쌍룡 24수를 전수받은! ..아니, 전수 받는 중이긴 하지만 어쨌든 나도 무인이라고. 언젠간 나도 삼한제일검이 되어서.."

"말했잖아. 넌 못해."

방지의 냉정한 대답에 무휼의 얼굴이 찡그려지는 것이 보였다. 그에게 대꾸할 말을 찾으려 눈동자를 굴리는 것이 보였다. 방지가 무휼을 알게된 것은 그리 오래지 않은 일이었지만, 그래도 그는 무휼에대해 어느정도는 알고있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그가 타고난 천재성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넌 사람 못죽일거야, 무휼. 장군님을 위해서, 이방원을 위해서, 혹은 네 동생이나 할머니를 위해서라면 죽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널 위해서 사람을 죽일 수는 없어. 넌 그런게 불가능해."

"아, 아니거든? 나도 할 수 있거든?"

"그래, 할 수 있다고 쳐. 그래도 하지마."

"뭐? 나 참. 아니, 그건 또 무슨 소리래? 너 어르신 호위 맡더니 막 어려운 말 하고 그러는거 옮았어?"

방지는 천천히 두 팔을 들어올려 팔짱을 꼈다. 그리고 눈을 가늘게 뜬 채 무휼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런 방지의 시선에 멋쩍어하던 무휼은, 헛기침으로 목청을 가다듬으며 자신도 팔짱을 꼈다. 그리곤 과장스레 당당한 표정으로 턱을 처들었다.

방지는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말을 이었다.

"그게 네 재능이야, 무휼. 검술, 살의, 욕망. 그런건 누구나 익힐 수 있는 거고,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거야. 그런데 네가 가진건 가지고싶어도 가질 수가 없고, 배우고싶어도 배울 수가 없어. 지키긴 어렵고, 잃긴 쉽고, 다시 되찾는건 불가능하지. 그런데 넌 그걸 아직도 가지고있어. 검술이나, 삼한제일검의 자리 같은 것보다 훨씬 중하고 가치있는 거."

방지는 무휼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고, 자신의 말이 중간쯤부턴 슬슬 그의 귀 밖으로 흐르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무휼은 복잡하거나 추상적인 이야기는 잘 이해하지 못했다. 분명 사람이 아둔한 것은 아닌데, 깊고 길게 생각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듯 했다.

"아, 그래서 그게 뭐냐니까?"

"선함."

바람이 불어왔다. 나뭇잎이 일제히 흔들리는 소리가 들린다. 그 바스락거리는 소음 속으로 바람소리는 숨어버렸다.

"넌 선한 사람이야, 무휼. 이 난세에, 이 미치도록 힘든 세상에도 너처럼 선한 사람이 남아있을 수 있다는게 신기할 정도로. 그래서 널 보면 사람들이 웃어. 네 앞에선 마음을 놓아. 넌 눈에 보이는 지표가 돼. 모든 백성들이 너처럼 선한 사람으로 남아있을 수 있는 시대가 오면, 그게 바로 태평성대지."

무휼은 미묘한 표정을 지은채 방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니 그대로 남아있어. 이방원을 위해서라도. 다른 사람은 다 변해도 넌 그대로 남아있어. 그냥 네가 타고난대로, 그냥 네 천성대로만 살면 되는 일이야. 어려울 것 없잖아."

"..글쎄다. 난 잘 모르겠다."

뒷머리를 벅벅 긁은 무휼은 다시 몸을 돌려 성큼 걸음을 내딛었다. 땋아내린 머리채가 걷는 걸음에 맞춰 흔들거렸다. 무휼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방지는 다시 한 번 뒤를 돌아보고, 무휼의 뒤를 따라 산길을 걸어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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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타 수정은 나중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