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F썰/(弱)자룡공명] 용은 하늘의 아들이 되고
용은 하늘의 아들이 되고
제갈량은 아픈 머리를 짚으며 침상에 풀썩 주저앉았다. 오늘만 같은 말을 열 번은 더 들었을 터다. 그 말에 화를 내고, 타이르고, 설전을 벌여 설득해 상대를 돌려보낸 횟수도 그만큼은 된다는 소리다. 본디 몸이 약한 제갈량은 체력이 완전히 바닥났음을 느꼈다. 이런 쓸데없는 논쟁과 고민 말고도 할 일은 산더미처럼 쌓여있거늘, 죽간을 향해 손을 뻗을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승상. 조장군께서 오셨습니다.”
그를 시중드는 내관 하나가 그리 알려왔다. 제갈량은 규율을 지키는 것에 있어선 엄격하지만, 한 나라의 승상으로서 누리는 권력을 체감하고자 아랫사람을 핍박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내관에게도 예의를 지키고, 큰 실수만 하지 않으면 대개는 상냥한 제갈량의 날선 모습에 내관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들라하시게. 다른 이들은 모두 이십 보 밖으로 물리도록 하고.”
“예, 승상.”
제갈량은 그리 명했다. 옷깃은 여몄으나, 침상에서 일어날 생각은 하지 않았다. 제갈량에게 자룡은 그런 사람이었다. 자룡 역시 이해해줄 것이다. 그는 제갈량의 사람됨과 신념과 각오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최근 제갈량이 처한 상황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통찰력과, 타인을 생각하는 배려와 다정함 역시 갖추고 있었으므로.
“승상.”
“어서 오시오, 장군. 무슨 일입니까?”
“죄송합니다. 고단하실 줄 알면서도 무례를 범했습니다.”
“아닙니다. 자룡이라면 먹던 것을 세 번 뱉고서라도 일어나 맞이해야지요.”
자룡은 과분한 말이라며 겸손하게 답했다. 제갈량은 그런 자룡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장군이 이런 말을 듣고자 절 찾아오진 않으셨겠지요. 정무를 보는 때를 피해 저를 따로 찾은 것은 제게 하고자 하는 말이 있기 때문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남에게는 할 수 없는 말이 아니라면, 앞으론 이리 사사로이 찾아오시면 아니 됩니다, 장군. 장군은 이제 이 나라의 가장 큰 장수입니다. 저와 이리 사적인 만남을 가지시면, 사람들은 저 뿐만 아니라 장군마저 의심할 것입니다.”
제갈량은 조운을 타이르듯 부드럽게 말했다. 그들이 젊었을 적, 아직 기반을 잡지 못한 채 거센 난세의 기류에 휩쓸려 좌충우돌하던 시절부터, 조운이 가르침을 청할 때마다 으레 들려주던 다정한 목소리였다. 문득 그 시절을 떠올린 제갈량의 얼굴엔 옅은 미소가 떠올랐으나, 조운의 표정은 여전히 굳어있었다. 긴장을 하다못해, 결연하기까지 한 얼굴이었다. 수십만 대군을 눈앞에 두고도 당당한 조운에게서,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운 표정이었다.
“저는 상관없습니다. 승상에 대한 견해는 진정 오해일지도 모르나, 소장에 대한 이야기라면 오해가 아니라 통찰이 됩니다.”
“무슨 뜻입니까, 자룡.”
제갈량은 조운의 말을 곧바로 알아들었다. 제갈량은 평생 서책과 시문을 끼고 사는 선비들과의 설전에서도 한 번도 진 적이 없었다. 우직하고 정직한 무장인 조운이 말을 조금 돌려한들, 그 뜻을 파악하지 못할 리도 없었다. 그러나 제갈량은 단번에 얼굴을 굳히고, 굳이 그렇게 다시 한 번 되물었다. 조운이 자신의 표정과 반응을 보고, 머쓱한 얼굴로 소장이 실언을 했습니다, 소장도 나이를 먹으니 그냥 문득 옛 생각이 나, 승상과 술잔을 기울이며 옛 이야기를 나누고싶어 찾아온 것입니다, 그리 답해주기를 바랬다.
“승상. 구석을 받고 제위에 오르십시오.”
“자룡!”
제갈량은 앉아있던 침상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무릎 위에 올려두었던 부채가 바닥으로 떨어졌으나, 제갈량은 그것을 주울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조운은 제갈량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어앉고 고개를 죽였다.
“어찌, 어찌 자룡마저 내게 그런 말을 하시오!”
“승상.”
“내가 선제께 받은 은혜가 얼마고, 그분께 바친 마음이 어떠하며, 그대들과 더불어 선제께 충성한 시간이 얼마인지는, 자룡이 가장 잘 알지 않소? 조정의 다른 이들은 뒤늦게 우리와 뜻을 함께하거나, 속이 없고 이익을 쫓는 소인배들이니 참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자룡이 어찌 그러오? 그대가 어찌..”
“승상. 그러기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승상을 잘 알고, 선제의 뜻과 꿈을 알고, 저희가 함께한 시간을 모두 기억하기에, 이리 노하실 것을 알고도 찾아와 드리는 말씀입니다.”
제갈량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있었다. 급히 일어난 탓에 눈앞이 까맣게 점멸하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비틀거리는 몸을 억지로 다잡았다. 목덜미 뒤로 열이 오르고, 가슴에 무거운 돌덩이가 얹힌 듯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승상. 승상께선 스물일곱, 어린 나이에 세상으로 나오셨습니다. 승상을 만나기 전, 선제께선 반평생을 강적들에게 핍박받으시면서도, 역적을 처단하고, 한 황실을 부흥시켜, 나라를 안정시키고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하시겠다는 높은 꿈 하나를 위해 몸을 아끼지 않고 동분서주하셨습니다. 그리고 승상을 얻은 뒤로는 이무기가 여의주를 얻고, 용이 삼일우를 만나듯, 승상의 뛰어난 책략과 운장, 익덕, 한승, 맹기의 용맹이 더불어 어우러지니, 역적 조씨를 처단하고 한 황실을 부흥시킬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제갈량은 고개를 돌려버렸다. 더는 듣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조운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제갈량은, 이번만큼은 저돌적이고 우직한 그의 성정이 원망스러울 지경이었다.
“조조가 얼마나 강대했습니까? 동오의 손권은 또한 얼마나 단단한 기반을 가지고 있었습니까? 선제께선 그토록 강한 적들의 사이에서 때로는 수모를 감내하시고, 때로는 목숨을 핍박받으시고, 때로는 당당히 맞서시며 이윽고 이 땅을 일궈내셨습니다. 하지만 승상. 태자께서는.. 직언을 용서하십시오. 지금의 태자께서는 아직 배움이 얕고 재주가 미력하시어, 선제의 대업을 능히 이어가실 수 없으십니다.”
“그만 하시오, 자룡! 어찌 그런 말을 입에 담으십니까? 만일 그대의 말이 사실이라 하여도, 신하된 자로서 마음을 다해 주군을 모시며 맡은바 직무를 다하고, 성실히 보좌하여 대업을 이어나가면 되는 일입니다. 그것이 신하의 도리요, 군자의 책임입니다. 그대는 어찌 나에게 또 다른 조비가 되어 황위를 찬탈하라 종용하십니까?”
“시간과 사람과 물자가 충분하다면 저도 그리 하였을 것입니다. 승상의 명을 받아 전장을 누비고, 가장 선봉에 서서 승상과 폐하의 창과 방패가 되어 적들을 무찌를 것입니다. 하지만 승상.”
조운은 말을 한 번 끊었으나, 제갈량은 그 뒤로 이어질 말을 짐작할 수 있었다. 제갈량은 나라의 크고 작은 정무를 모두 총괄하고 있었고, 나라 안팎의 사정을 그보다 더 정확하고 포괄적으로 꿰고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조운이 하려는 말은 제갈량이 가장 걱정하고 있는, 동시에 가장 외면하고 싶은 현실이었다.
“우리에겐 이제 아무것도 없습니다.”
조운의 말에 제갈량은 짧은 탄식을 내뱉으며, 다시 침상 위로 주저앉고 말았다. 쓰러졌다는 말이 더 정확할 듯 했다.
제갈량이 피땀 흘려 일군 군량과 병사들은 모두 이릉에서 한줌의 재가 되어버렸다. 이제 그들의 손에 남은 것은, 위나 오의 병력에 절반도 되지 않을, 상하고 사기가 꺾인 병사 한 줌뿐이었다.
무너진 성벽은 몇 개월이면 쌓을 수 있고, 부족한 곡식은 다음 해에 추수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은 어찌한단 말인가. 사내아이를 낳아, 창을 들고 말을 몰 수 있을 때까지 길러내고 가르치는 것은 수십 년이 걸리는 일이다. 자식과 오라비와 아버지를 빼앗긴 백성들의 민심을 다시 거두는 것은 또 얼마가 걸린단 말인가.
제갈량은 다시 조운을 보았다. 훤칠하고 잘생긴 소년 장수였던 상산의 조자룡은, 이제 반백이 넘어 노장이라 불러도 좋을 나이가 되었다. 먹는 시간, 자는 시간을 줄여가며 일하는 자신의 몸이 하루가 다르게 나빠지는 것도 느끼고 있었다.
제갈량은 알고 있었다. 조운과 자신은 이 나라를 든든히 받치고 있는 기둥이었다. 그리고 이 나라는, 단 두 개의 기둥으로 간신히 유지되고 있었다. 오래된 고목처럼, 앞으로도 천 년은 더 갈듯하던 관우와 장비와 유비가 모두 세상을 떠난 지금, 두 사람마저 사라진다면 앞으로의 일은 장담할 수 없다.
그래, 시간이 문제다. 사람과 물자는, 어떻게 해서든 만들어 댈 수 있다. 그러나 시간만큼은, 저 옛날의 소하가 살아 돌아온다 하더라도, 그것만큼은 어찌할 수가 없는 문제다.
“내가 어찌해야한단 말입니까..”
제갈량은 탄식했다. 가슴속에 불덩이가 들어찬 듯 했다. 선제를 부르며 목 놓아 울고 싶었다. 하루하루 하늘이 원망스러운 날 뿐이었다.
조운은 바닥에 떨어진 부채를 주워들었다.
“승상. 제위에 오르십시오. 세상 사람들이 승상을 역적이라 욕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승상의 공명과 명성을 위해 선제의 뜻을 꺾지 마십시오. 지금도 어디에선가 핍박받으며 굶어 죽어가는, 가여운 백성들을 외면하지 마십시오. 나라를 위한 충忠은 주군을 위한 충忠보다 크고 밝은 것입니다. 세상을 안정시키고 400년 한 왕조를 부흥시키는 일에, 뒤따라올 오명이 두려워 망설이는 것은 졸장부나 하는 일이고, 사사로운 이익을 쫓는 소인배들의 생각입니다.”
그것은 억지였고, 말장난이었다. 제갈량이 조운의 언변을 꺾는 것은, 얇은 회초리를 분질러 꺾는 것보다도 쉬운 일이었다. 그러나 제갈량은 반박하지 않았다. 그저 소매로 얼굴을 가리고, 깊은 한숨만을 내쉬고 있을 뿐이었다.
“승상. 부디 대업을 이루십시오. 그리고 대업을 이루는 그날, 황위를 다시 선양하고 융중으로 돌아가 농사를 짓고 삽시다. 저는 승상의 곁에서 직접 흙을 만지고 나무를 기르며, 평생 승상을 스승으로 모시고, 죽는 날까지 가르침을 청하겠습니다.”
조운은 두 손으로 부채를 받쳐 들었다. 제갈량은 고개를 죽인 조운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망설임으로 떨리는 손이, 조운이 내민 부채를 머뭇거리며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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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한 왕조가 세워질 때, 한고조 유방께선 유씨가 아닌 자는 황제가 될 수 없다 하셨다. 그러나 간악한 조씨가 천자를 핍박하고, 이내 하늘의 뜻을 거슬러 참혹한 짓을 저질러 버렸으니, 천하가 공노하고 역적의 생살을 씹고자 하였으나, 그 힘이 막강하여 그 누구도 당당히 분노치 못하였다.
이에 선제께선 400년 한 왕조의 계승을 천명하시고, 억울하게 돌아가신 천자를 위해 역적을 토벌코자 맹세하셨다. 한 왕조의 신하라면 누구나 그 매서운 뜻과 기세를 받들고, 온 힘을 다해 북으로 진격하여 기울어가는 한 황실을 바로 세워야 할 것이나, 동오의 손권과 그를 따르는 소인배 무리는 개인의 사사로운 이익을 쫓아, 오히려 역적과 손을 잡고 관운장을 해하였다.
관운장은 선제와 형제의 정을 나누고, 한날한시에 태어나진 못했으나 한날한시에 죽기로 도원결의하였다. 선제께선 형제를 잃은 슬픔에 깊이 한탄하셨고, 관운장의 넋을 달래고, 하늘이 내려준 인륜을 끊어버린 손권의 죄를 묻기 위해 직접 군사를 일으키셨다.
그러나 후안무치한 동오의 개들은 뉘우침도 없이, 황실의 종친인 선제 역시 핍박하여 돌아가시게 만들었으니, 이들이 저 역적 조씨와 다를 것이 무엇인가? 선제께선 이 량을 직접 찾으시고, 선제의 유지를 직접 받들어, 저 역적들을 죽여 세상을 편안케 하라 명하셨다.
이 량은 유씨가 아니고, 인덕이 부족하여 대업을 이어갈 수 없으니 통촉하여 달라 거듭 빌었으나, 선제께선 마찬가지로 400년 한 왕조와 가여운 민초들을 거듭 부탁하시며 승하하셨다.
이에 이 량은 미천하고 부족한 재주로나마 선제의 유언과 유지를 받들고, 위로는 역적을 처단하며 동으로는 선제와 관운장, 장익덕의 원수를 갚아 한을 풀 때까지 식소사번하여, 몸이 부서져도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을 하늘에 고한다. 나의 뜻은 이 몸이 죽은 뒤에야 비로소 멈추리라.
다만 이 량은 결코 황위와 권력에 욕심이 있지 아니함을 하늘과 대소신료와 만백성 앞에 고하는 바이다. 선제의 유지를 받들고 대업을 이루며, 나라가 안정되어 백성들이 부르는 태평가가 어전 앞까지 들리는 그 날, 이 량은 분수에 넘치는 자리를 다시 유씨에게 선양하고, 선제께서 세 번이나 찾아주셨던 그 융중으로 돌아가, 직접 누에를 치고 농사를 지을 것이다.
이는 나의 진심이고 하늘이 그것을 알고 있으니, 만약 내가 저 역적들과 마찬가지고 역심을 품는 날이 오거든 하늘이 직접 천벌을 내려, 이 한 목숨을 거두어 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