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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라이 / 오선五線의 언어 1

O.A 2017. 10. 28. 23:32

오선五線의 언어 - 1

-이슬라이

 

이슬레이는 건반에서 손가락을 떼었다. 피아노에 몸을 기댄 채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라이퀴아의 시선에 속이 메슥거릴 만큼의 부담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피아노에 기대면 소리가 망가져.”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라이퀴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슬레이는 그의 푸른 눈을 보다가 천천히, 자연스럽게 시선을 떨어트렸다. 되도 않는 변명은 접어두라는, 네 본심은 그것이 아닐 거라는 그 시선을 마주하기 껄끄러웠다.

이슬레이는 펼쳐둔 악보를 대강 그러모았다. 건반 위에 가볍게 내리쳐 악보를 정리하는 손길은 조급하고 히스테릭했다. 라이퀴아는 여전히 피아노에 몸을 기댄 채, 이슬레이의 말을 무시하듯 오히려 체중을 더욱 실었다.

연습은 다 끝난 거야?”

그래.”

.”

남 연습하는 게 뭐가 재미있다고 그렇게 보고 있어.”

그러게. 다른 애들이 연습하는 건 재미있는데, 넌 되게 재미없다.”

이슬레이는 악보를 정리하던 손을 멈추고 라이퀴아를 바라보았다. 이 연습실은 비숍이 이슬레이에게 빌려준 공간이었다. 가장 유망하고, 촉망받고, 동시에 젊은 피아니스트는 이슬레이의 스승임과 동시에 넘볼 수 없는 우상이었고, 그의 연습실에 자유롭게 출입해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을 때에는 현기증이 날 만큼 기뻤다. 적어도 바로 다음날, 그것이 자신에게만 주어진 특권이 아니며, 그보다도 일찍 이 연습실을 드나들던 아이의 존재를 알게 되기 전까지는.

라이퀴아는 음악에 조예가 깊은 편은 아니었다. 그는 음악의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있지도, 어떤 악기를 능숙하게 다루지도 못했다. 그러나 음악을 듣는 귀만은 누구보다 예민하고 정확했고, 누군가가 음악을 연주하고 있노라면 그 근처에 기대어 앉아 상대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을 좋아했다.

이슬레이는 그 순간의 라이퀴아에게 좀처럼 익숙해질 수 없었다. 차분히 가라앉은 눈으로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라이퀴아는 아주 사소한 실수조차 잡아낼 것만 같았다. 이슬레이는 피아노 건반에 집중하다가도, 문득 라이퀴아의 시선을 의식하는 순간이면 가슴이 철렁했다.

이슬레이는 결코 실수를 하고 싶지도, 그리고 누군가에게 자신의 실수를 들키고 싶지도 않았다. 이슬레이는 같은 곡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연습했다. 악보와 건반을 외우고, 손끝의 미세한 감각과 호흡마저 암기했다. 이슬레이의 연주는 점차 완벽해져갔다.

이슬레이가 최초로 자신의 연주에 만족하고 라이퀴아를 돌아보았을 때, 라이퀴아의 표정은 어느 때보다 굳어있었다.

그럼 듣지 않아도 돼.”

듣기 싫다는 건 아니야. 네 음악은 아름다운걸. 내가 들어본 그 어떤 음악보다도 듣기 좋고.”

라이퀴아는 뚜껑이 열린 피아노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손끝에 해머가 들려올라갔다가, 떨어지며 현을 때렸다. 둔탁하고 형편없는 소리가 났다. 피아노엔 전혀 좋을 것이 없는 그 행동에, 이슬레이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그래도 재미는 없어.”

이해를 못하겠어. 무슨 재미를 말하는 거야?”

..”

라이퀴아는 피아노에 기댄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이슬레이의 앞으로 다가오는 발걸음은 가볍고 경쾌했다. 라이퀴아는 그대로 이슬레이를 지나쳐, 피아노 앞으로 돌아갔다. 피아노 의자에 한쪽 무릎을 걸쳐 앉은 라이퀴아는, 팔을 뻗어 눈앞의 건반 하나를 눌렀다. 연주나 조율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어떤 규칙이나 의도도 없이, 라이퀴아는 무작정 건반을 눌러댔다.

너는 꼭 사진 같아.”

무슨 소리야?”

사진 같다구. 다른 애들은 다 나무거나, 나무를 그린 그림이거나, 그런 느낌인데. 넌 그냥 나무를 찍은 사진이야. 딱 사진.”

이슬레이는 이내 라이퀴아에게서 고개를 돌려버렸다. 악보를 정리하는 손길이 바빴다. 라이퀴아는 몇 번이나 건반으로 장난을 치다가, 이내 흥미를 잃고 두 손을 내렸다.

이슬레이. 나 아무거나 노래 하나만 쳐줘.”

무슨 노래?”

아무거나. 악보 없는 거면 더 좋고. 네 즉흥곡 들어보고 싶어.”

없어, 그런 거.”

이슬레이는 단호하게 대답하며, 악보들을 추려 파일에 넣고 단단히 닫았다. 음표를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빽빽한 메모들이 가득 들어찬 악보였다. 라이퀴아는 악보를 빼앗아 펼쳐보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눌렀다.

오선지는 음악을 담는 종이다. 그러나 라이퀴아는 그 위에서 조금 다른 것을 들을 수 있었다. 라이퀴아는 그것을 스스로도 정확히 명명하지 못했으나, 그것은 누구나 자연스레 겉으로 드러내는 것이었고, 그것을 듣고 느끼는 일을 좋아했다. 그것은 라이퀴아만이 들을 수 있는, 오선지 위의 특별한 언어였다.

라이퀴아는 어릴 때부터 비숍의 허락을 받아 이 연습실을 드나들었고, 비숍의 연주는 물론, 이 연습실을 스쳐간 모든 음악가들의 음악을 들어왔다. 결코 짧지 않은 그 시간들을 통틀어, 가장 훌륭하고 아름다운 음악을 들었던 날을 꼽으라고 한다면 라이퀴아는 선택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가장 기억에 남고, 충격적이었던 날을 꼽으라고 한다면, 라이퀴아는 망설이지 않고 이슬레이의 음악을 처음 들었던 날을 고를 수 있었다.

이슬레이가 연습실을 방문하기 전날, 비숍은 라이퀴아에게 아주 훌륭한 피아니스트가 이 연습실을 찾아올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라이퀴아는 내심 기대하고 있었다. 음악은 언제나 그에게 상상해본 적 없는, 새로운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비숍이 말한 대로 뛰어난 피아니스트라면,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아름다운 소리를 들려줄 것 같았다.

그러나 이슬레이의 연주를 처음 들었을 때, 라이퀴아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처음엔 말을 하지 못하는 벙어리를 마주한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은 빠르게 바뀌어, 라이퀴아는 이슬레이의 음악이 사진을 닮았다고 단정 지었다. 벙어리는 말은 할 수 없어도 나름의 소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슬레이는, 아무런 소리를 품을 수 없는 사진 같았다. 정교하고 아름답긴 했으나, 단순히 아름다운 풍경을 찍은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라이퀴아는 이슬레이의 사라진 목소리가 저 악보를 가득 채운 메모 사이에 숨겨져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이토록 끈덕지게 달라붙을만한 것은 아닐지도 몰랐다. 하지만 늘 단단히 닫아두는 저 파일 속의 악보가, 그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은 오선지 위의 메모들이 궁금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라이퀴아는 결국 스스로의 호기심을 이기지 못했고, 몇 번이나 거절당하면서도 이슬레이를 조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