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전드 히어로 삼국전(레히삼)/ 유비제갈&제갈유비] 네가 나온 꿈
[레전드 히어로 삼국전(레히삼)/ 유비제갈&제갈유비]
네가 나온 꿈
-논컾
-스포주의
도원관의 하루는 늘 바쁘고 소란스러웠다. 무술을 배우고자 찾아온 이들, 어린 아이들, 친구들과 함께 바쁜 하루를 보내고 나면, 마음이 얼마나 즐겁고 기꺼웠던 간에 몸은 피곤에 찌들어 녹초가 되기 일쑤였다.
유비는 침대 위로 몸을 던졌다. 기분 좋은 수마가 몸을 타고 올라왔다. 유비는 감기려는 눈을 애써 깜빡이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벌레 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 조용한 밤이었다. 노식과 공손찬, 관우와 장비, 조운, 황개, 마초. 도원관 지붕 아래에는 유비의 평생을 통틀어 가장 많은 가족들이 함께 자고 있을 테지만, 유비는 슬그머니 고개를 쳐드는 허전함을 느꼈다. 이곳에 없는 또 다른 한 명 때문이었다.
“제갈량. 있지, 오늘은..”
찬이가 과제 때문에 짜증을 엄청 냈어. 조별과제가 있는데 선배 하나가 무임.. 뭐를 하려고 한대. 조운이랑 장비가 자꾸 편식을 해서 큰일이야. 영웅패일때는 몰라도, 인간이 됐으니 소세지 말고 다른 반찬들도 골고루 먹어야 하는데. 아, 그리고 사부님이..
유비는 잠이 잔뜩 끼인 목소리로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 날 하루 동안 있었던 일들을 전부 되짚기 전까지, 유비는 결코 잠들지 않았다. 가끔은 중간에 까무룩 잠들어버릴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그러했다. 그리고 그 일상적인 고해의 맺음말은 언제나 똑같았다.
“너도 잘 자, 제갈량.”
유비는 허공을 향해 방긋 웃어 보이고, 그대로 곯아떨어져버렸다.
**
유비는 눈을 깜빡였다. 익숙한 도원관의 풍경이었다. 그러나 유비는 이것이 꿈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창문으로 스며든 햇빛이 바닥에 하얀 무늬를 그렸다. 먼지와 나무냄새가 뒤섞인 부드러운 향기가 났다. 유비에게 가장 소중한 장소였으며, 동시에 그가 가장 좋아하는 풍경이었다.
“우와. 꿈인데 엄청 진짜 같다.”
“당연하죠. 누가 만든 꿈인데요.”
익숙한 목소리에, 유비는 퍼득 고개를 들었다. 천천히 몸을 돌리는 동안, 심장이 터질 것처럼 거세게 뛰었다. 차분하고 단정한 머리 사이, 한 줌의 초록빛 머리칼. 눈매를 따라 얇고 날카롭게 그려낸 선 역시 초록색. 나른한 동작으로 부치는 부채 역시 초록.
무심한 듯 담담한 눈빛이 유비를 향하고 있었다. 유비는 잠시 멍하니 상대를 바라보다가, 얼굴 가득 환한 미소를 띠며 상대를 불렀다.
“제갈량!”
유비는 제갈량에게 달려가, 그의 몸을 와락 끌어안아 버렸다. 제갈량은 익숙하게 그의 체중을 받아내며 유비의 등을 토닥였다.
“완전 오랜만이다! 어떻게 지냈어? 선계에서 계속 살고 있는 거야? 옥쇄는 잘 관리하고 있지? 선계에 먹을 건 많아? 소시지 같은 것도 있고 그래? 내가 만들어줄까?”
“..한 번에 하나만 물어보세요.”
제갈량은 유비의 팔을 슬쩍 밀어냈고, 유비는 순순히 물러나며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언제나처럼 순순히 그의 말을 긍정해오는 유비를 보며 제갈량은 피식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전 잘 지냈습니다. 당연히 선계에서 지내고 있고, 옥쇄를 관리하는 일쯤이야 어려울 건 없습니다. 선계에도 과일 같은 것들은 있지만, 신선들은 딱히 먹지 않아도 허기를 느끼지 않습니다. 소시지 같은 것은 당연히 없고요. 그리고 이곳은 어차피 주군의 의식 속.. 말하자면 주군의 꿈속이니 음식을 먹는 것에 별다른 의미는 없습니다.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
“방금 저한테 뭐 물어보셨는지도 까먹으셨죠?”
“..어..”
제갈량은 뒷짐을 진 채 혀를 찼으나, 유비를 크게 타박할 생각은 없었다. 그리고 유비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유비는 자신을 바라보는 제갈량의 눈빛에 웃음기가 스민 것을 보았고, 그를 향해 베시시 웃어 보였다.
“어떻게 된 거야? 내가 제갈량 꿈을 꾸고 있는 거야?”
“아뇨. 제가 주군의 의식 속으로 들어온 겁니다. 주군이 잠든 틈을 타서요.”
“어. 그래도 돼? 신선은 인간의 의식 속에서는..”
“소멸한다고요? 괜찮습니다. 내가, 이정도도 못할 것 같아요?”
제갈량은 자신만만하게 말하며 고개를 살짝 쳐들었다. 아냐, 제갈량이잖아. 당연히 할 수 있지. 할 수 있고말고. 유비의 대답에 제갈량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슬쩍 올라간 입꼬리를 본 유비는 다시 활짝 웃어 보이며 제갈량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런데 정말 괜찮아? 옥쇄 관리자가 막 이렇게 자리 비우고 그래도 돼?”
“괜찮아요. 난 그 누구보다 유능한 관리자니까요. 이 정도 여유는 부릴 수 있습니다.”
“우와, 넌 역시 대단해.”
제갈량은 평소에 자주 앉아있던 의자에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았다. 유비는 그런 제갈량의 앞에 앉아 턱을 괸 채, 제갈량을 바라보았다. 유비는 필요 없다고 극구 사양하는 제갈량의 앞에 소시지 한 접시와 커피 한 잔을 내려놓고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제갈량은 별수 없다는 듯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 순순히 포크를 집어 들었다.
“그래도 아무 생각 없이 놀러온 건 아닙니다.”
“그럼 왜 왔어?”
“주군에게 할 말이 있어서요. 부탁도 있고.”
“응? 부탁이라니.. 무슨 부탁? 말만 해. 제갈량 부탁인데, 뭐든 들어줘야지!”
제갈량은 포크를 내려놓고 커피잔을 집어 들었다. 접시에 담긴 소시지는 벌써 반으로 줄어있었다. 커피를 한 모금 머금은 제갈량은 슬쩍 시선을 올려 유비를 바라보았다. 유비는 여전히 빛나는 눈으로 제갈량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매일 저 신경써주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응?”
“힘들 때, 혹시 주군을 지켜보고 있는 제가 걱정할까봐 일부러 힘들지 않은 척. 그런 것 그만 하시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밤마다 하시는 것도요. 저 때문에 졸린 것도 참으시면서 몇 시간이고 혼자 떠들고 계실 필요 없다는 말입니다. 매일 늦게 잠드니 매일 늦게 일어나게 되잖아요. 어제도 결국 공손찬 아가씨께 혼나시고..”
“어. 어떻게 알았어? 헉. 설마, 선계에서도 나 지켜보고 있는 거야? 혹시 내가 위험해질까봐? 우와, 완전 감동이야, 제갈량!”
“...”
제갈량은 유비의 호들갑에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무슨 말을 해도 저 좋을 대로 알아듣는 것은 유비가 가장 잘하는 일 중 하나였다. 제갈량은 그런 유비를 애써 정정하며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도 않았고, 굳이 그를 달래거나 막을 필요도 느끼지 못했다.
드림배틀이 끝나고 얼마간의 시간은 지났으나, 그것은 제갈량이 앞으로 살아가야할 시간에 비하면 찰나라고 해도 좋았다. 제갈량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 기나긴 영겁의 시간을 버텨낼 자신도 있었다. 그러나 언제나 곁에 있던 사람이 그리워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멀리서나마, 늘 그를 바라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튼 제 말은, 그렇게 절 신경써주시지 않으셔도 된다는 겁니다. 전 충분히 즐겁게 지내고 있어요. 옥쇄를 관리하는 일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즐겁고, 인간계를 늘 바라보고 있으니 지루할 틈도 없죠.”
“그래두.. 걱정이 되는 걸 어떡해. 그건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잖아.”
“그래도 그렇게 하나하나 절 신경 쓰면서 무리하는 모습을 보면, 그건 걱정을 안 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차라리 힘들다고 칭얼거리는 쪽이 덜 걱정됩니다. 어떤 일이 닥치더라도, 주군이라면 반드시 이겨낼 수 있을 테니까.”
유비의 입술이 뾰족하게 튀어나왔다. 그의 뚱한 표정을 바라보던 제갈량은 피식 웃으며, 테이블 위를 손사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못 알아들으셨나요? 지금 주군을 걱정했다고 말하고 있잖아요.”
“어.. 어? 내, 내 걱정?”
“네. 주군 걱정. 배틀도 다 끝났는데 아직도 신선을 걱정시키다니, 정말 대단한 주군이시라니까.”
제갈량의 말에 유비는 쑥스러운 듯 뒤통수를 긁었다. 제갈량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조롱이나 비하의 뜻을 품지 않은 순수한 호의의 웃음. 서서가 없는 지금은, 오직 유비만이 볼 수 있는 표정이었다.
“앞으로도 절 계속 걱정시키실 생각입니까?”
“어? 아니, 그건 절대 싫어! 제갈량은 옥새 관리만으로도 바쁠 텐데.. 알았어. 앞으론 절대로 무리 안 할게. 자, 약속.”
유비는 새끼손가락을 펴 제갈량에게 내밀었다. 굳은살이 베긴 무술가의 손가락과, 곧고 고운 신선의 손가락이 얽혔다. 어린애들도 안 할 손가락 약속을. 제갈량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유비가 손가락을 풀 때까지 얌전히 그와 손가락을 걸고 있었다.
“그동안 많이 귀찮았겠다.. 미안해, 제갈량. 좀 더 일찍 말해주러 오지. 그럼 바로 그만뒀을 텐데.”
“됐습니다. 사과하실 필요는 없어요.”
“그래두..”
“저도 주군의 가족이라면서요. 그리고 가족끼린 일일이 사과하지 않아도 된다면서요. 아니면 제가 도원관에서 나갔다고, 이제 저는 주군의 가족도 아니라는 뜻인가요?”
“응? 아, 아냐! 그런 거 절대 아냐! 알았어, 사과도 안 할게. 제갈량의 말대로 우린 가족이니까.”
굳은 표정으로 각오를 다지는 유비를 보며, 제갈량은 문득 손을 뻗어 뺨을 잡아당겨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실제로 행동에 옮기진 않았다. 그는 자신이 선택하고 인정한 주군이었고, 그런 그에게 나름대로의 예의를 갖추는 것은 자신의 본분 중 하나였으니까.
제갈량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커피잔 안에 반쯤 남은 커피는 이미 식어있었다. 제갈량을 올려다본 유비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만 가봐야겠습니다.”
“어.. 벌써? 조금만 더 있다가 가지..”
“할 일이 많아서요. 주군도 곧 꿈에서 깨실 것 같고요.”
유비는 금세 시무룩해져 자리에서 일어났다. 참으로 감정기복이 크고 선명한 사람이다. 제갈량은 느릿한 몸짓으로 뒷짐을 지었다.
“제 말 명심하세요. 또 걱정시키면 다시 잔소리 하러 찾아올 겁니다.”
“그럼 제갈량 말 잘 들으면?”
“..제 말을 잘 들으시면..”
제갈량은 천천히 눈을 감으며 잠시 생각에 잠기는 체 했다. 유비는 두 손으로 주먹까지 꼬옥 쥔 채 제갈량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제갈량은 고개를 살짝 쳐들며, 짐짓 건방진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럼 칭찬해드리러 찾아오지요.”
“..제갈량..!”
제갈량의 대답에, 유비는 활짝 웃으며 그를 와락 끌어안았다. 제갈량은 이젠 익숙하게,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유비의 체중을 받아냈다. 제갈량의 손이 느리게 유비의 등을 토닥였다.
“이젠 정말로 가봐야 합니다. 주군, 부디 건강하고 무탈하게 지내시길.”
“응. 잘 가. 또 와야 해? 그땐 정말 맛있는 것 많이 만들어줄 테니까. 약속이야. 알았지?”
“..예. 약속입니다.”
제갈량의 몸이 빛으로 흩어졌다. 유비는 하늘로 춤추듯 올라가는 빛무리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잘 가, 제갈량. 나, 너 걱정시키지 않도록 힘낼게. 유비는 제갈량이 들었다면, 그러니까 그걸 그만두라는 겁니다, 하고 혀를 차며 짜증을 냈을 말을 입안으로 삼켰다.
**
창문을 통해 아침햇살이 스며들었다. 창틀에서 새가 지저귀는 소리에도 깨지 않을 만큼 곤히 잠든 유비의 입가엔 옅은 미소가 걸려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