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애만/기타

아픈 나이 上

O.A 2015. 12. 29. 16:06

빌런빔 맞고 15살로 어려진 제이슨 망상글

***

"."

데미안이 진심으로 구역질이 난다는 듯 혀를 빼물었다. 딕은 그런 데미안을 나무라며 억지로 의자에 앉혔다. 배트컴퓨터에 걸터앉은 제이슨은 그런 데미안을 노려보며 인상을 구겼다.

", 꼬맹아. 싸우자고?"

평소와 다름없는 말투였으나 위압감은 반절 이하였다. 높아진 목소리가 어색해서, 제이슨은 다시 한 번 얼굴을 찡그렸다. 담요 바깥으로 드러난 맨다리가 서늘해서, 제이슨은 무릎을 가슴에 닿을 정도로 끌어올리고 담요로 완전히 덮어버렸다.

"씨발."

"욕하면 못써, 제이슨."

". 내가 진짜 꼬맹이라도 된 줄 알아? 너까지 헛소리 하진 말라고, 디키버드."

", 미안. 나도 모르게."

유아퇴행이라는 것은 그다지 놀랄만한 것도 아니었다. 수도 없이 많은 사례가 보고되고 있는 심리학 관련의 문제일 따름이었다. 아니면 정신 질환 관련이었나. 그딴 거야 어찌되든 상관 없었다. 그러나 그것이 정신적인 문제가 아니라, 신체적인 문제로 나타난다면 말이 달라지는 법이다.

열다섯의 제이슨은, 지금에 비해선 상당히 왜소한 체격이었다. 크기만 한 바디아머는 오히려 짐짝이었다. 그래, 때마침 함께 있던(물론 평화롭게 맥주나 한 잔 마시며 담소를 나누고 있지는 않았다) 나이트윙 덕분에 위험에 빠지는 일은 없었다. 어려진 자신에게 달려들던 빌런들을 깡그리 때려눕혀준 것 까지는 좋았다. 그래, 거기에서 그쳤으면 정말로 좋았으련만. 어디 이 집 식구들이 저 좋은 일을 하는 꼴을 본 적이 있던가.

본인을 그대로 들쳐 업고 이 망할 동굴까지 쌩하니 달려오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곧 죽어도 저택으로는 올라가지 않겠다는 제이슨의 고집 때문에, 너무 커서 부담스럽기만 한 바디아머를 벗기고 푹신한 담요를 둘둘 감아줬다. 아머 안에 받쳐 입은 티셔츠 한 장이 이렇게 고마울 수 있다는 것에 제이슨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 나이를 먹고 남들 앞에 알몸뚱이를 드러낼 수는 없는 법이다.

딕은 놀라긴 했지만 당황보단 흥분으로 눈을 반짝이고 있는 것이 뻔히 보였다. 제이슨은 평소보다 낮아진 눈높이에 적응해보려 애쓰면서(딕의 얼굴을 올려다봐야 하는 것이 영 마뜩찮았다) 투덜거렸다. 좋냐? 좋아? 이런 모양새가 퍽이나 재밌는 모양이야?

결국 참지 못하고 머리를 쓰다듬으려 슬금슬금 다가오는 손을 매몰차게 쳐내면서, 제이슨은 걸터앉아있던 컴퓨터에서 뛰어내리려 다리를 흔들었다.

"갈 거야."

"? 어디로?"

"어디가 됐든, 다른 놈들한테 이딴 꼬락서니 더 보이기 전에 어디든 가버릴 거라고."

"하지만 여긴 고담이야, 제이슨. 거기다 지금은 한밤중이라고."

"누가 그걸 몰라? 죽기 전에도 시시껄렁한 불량배한테 걸려서 납치라도 당할 만큼 한심한 로빈은 아니었어."

그러나 딕은 재빨리 다가와 제이슨의 어깨를 꾹 눌러 앉혔다. 그런 딕의 뒤에서, 데미안이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

"조커의 손에 맞아죽을 만큼 멍청한 로빈이긴 했지."

"데미안!"

딕이 흠칫 놀라며 데미안을 돌아보았다. 그의 이름을 부르는 얼굴은 엄했고, 제이슨의 어깨를 잡은 손에는 힘이 들어가 있었다. 제이슨은 불만이 가득한 데미안의 얼굴과, 턱선만 보이는 딕의 얼굴을 번갈아 보다가 제 어깨에 올라온 손을 툭 털어냈다.

"뭘 네가 화를 내고 그래?"

제이슨은 아래로 늘어트렸던 다리를 다시 끌어올렸다. 손으로 담요를 꾹꾹 잡아당겨 발목까지 가려버린 제이슨은, 문득 느껴지는 피곤함에 늘어져라 하품을 했다.

"제이슨. 졸려?"

자신에게 물어오는 딕의 다정한 목소리를 들은 제이슨은 무심코 대답을 하려다가, 문득 어깨를 부르르 떨며 딕을 쏘아보았다.

"보모 노릇 할 생각은 꿈도 꾸지 마라. 소름 돋는다고."

"하하, 들켰네."

"그런 건 네 병아리한테나 해. 저기서 두 눈 시퍼렇게 뜨고 나를.."

딕의 어깨 너머를 보기 위해선 목을 쭉 빼야만 했다. 불안정한 자세로도 중심을 잡으며 딕의 어깨 너머를 기웃거리던 제이슨은 의아한 표정이 되어 눈을 깜빡였다. 여전히 퉁명스럽긴 하지만, 평소의 그보다 선명한 표정의 변화에 딕은 속으로만 웃었다. 입 밖으로 감상을 내었다간 정강이를 한 대 걷어차이는 걸로는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 어디 갔지?"

제이슨의 중얼거림에 딕은 뒤를 돌아보았다. 의자에 팔짱을 끼고 앉아 제이슨에게 눈을 부라리고 있을 줄 알았던 데미안은 자리에 없었다. 딕은 무심코 저택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보며 대답했다.

"저택으로 올라갔나?"

***

"잠깐만, 제이슨!"

", 멍청아. 갈 거라고!"

"옷도 제대로 안 입고 어딜 간다는 거야! 갑자기 왜 그래?"

소년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동굴 안을 울렸다. 그에 답하는 청년의 목소리엔 당황스러움이 흠뻑 묻어났다. 딕은 제이슨의 손목을 붙잡은 채 놔주지 않았고, 열다섯 소년이 아무리 날뛰어도 성인 남성의 악력을 쉽게 뿌리칠 수는 없었다.

"곧 알피가 내려올 거고, 브루스도 돌아올 거야. 일단 문제가 없는지 검사를 해보고, 같이 해결 방법을 찾아봐야지. 넌 지금 아무리 많이 잡아도 팀이랑 비슷한 또래로밖에 안보여. 계속 이런 모습으로 있을 수는.."

"그러니까 일단 좀 놓으라고!"

"놓으면 바로 도망갈 것 아냐!"

데미안이 저택으로 올라갔다는 확신이 든 순간, 제이슨은 자리를 박차며 동굴 밖으로 뛰쳐나가려 했다. 그러나 어려진 몸에 적응하지 못한 그는 바닥에 제대로 착지하지 못해 두어 바퀴를 굴렀고, 접지른 발목이 시큰거림을 느꼈다. 하지만 발목의 고통은 느끼지도 못하는 듯, 그대로 다시 몸을 일으켜 뛰쳐나가려는 제이슨을 딕이 간발의 차이로 붙잡았다.

제이슨은 눈에 띄게 당황한 모습이었고, 딕은 그런 제이슨이 의아하면서도 걱정스러웠다. 제이슨은 막무가내였고, 그런 제이슨을 붙잡은 딕 역시 고집을 부렸다. 성인의 헐렁한 셔츠 한 장 위로 담요 한 장을 휘감은 열다섯 소년. 고담이 딱 좋아할만한 먹잇감이다. 그가 평범한 삼류 악당에게 호락호락하게 당할 소년은 아니었지만, 조금 전에도 어이없이 바닥에 뒹구는 모습을 보았다.

딱히 밤의 고담이 위험하기 때문만도 아니었다. 마법은 그들의 전문 분야가 아니었고, 제이슨이 노출된 마법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적어도 그들에게 가장 안전한 곳은 이 동굴이다. 그의 안전이 확인되기 전 까지는, 어떤 수를 써서라도 제이슨을 동굴 안에 잡아둘 생각이었다.

"도망갈 필요 없어, 제이슨. 여기 있어도 돼. 팀은 오늘 밤엔 오지 않을 거야. 이제 동굴로 돌아올 사람은 알프레드와 브루스밖에 없단 말이야. 물론 네가 브루스를 만나는 걸 반기지 않을 수도 있지만.."

"멍청한 딕 그레이슨. 정말 모르겠냐? 내 꼴을 봐. 내 꼴을 좀 보라고. 그가 나를 보고 너처럼 아무 생각 없이 실실 웃을 것 같아? 진짜 모르겠어?"

소년은 악을 썼다. 분노보단 절박함이었다. 딕이 그의 사나운 기세에 멈칫했다가 다시 입술을 달싹였을 때, 등 뒤에서 누구보다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이슨 도련님?"

"..망할."

노집사는 잠시 딕의 존재를 잊은 것처럼 제이슨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제이슨은 고개를 돌리며 딕의 손을 쳐냈다. 그가 동굴을 벗어날 마음을 버렸음을 느낀 딕은 이번엔 순순히 손을 놔주었다.

동굴 안에 잠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어둠 속에서 박쥐의 날갯짓 소리가 간간히 들려왔다. 동굴 안을 휘감고 지나가는 바람 소리도 들렸다. 집사의 시선에 담요 아래로 드러난 제이슨의 맨발이 들어왔다. 차가운 동굴의 온도 탓에 발바닥이 붉게 물들어있었다.

"옷을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제이슨 도련님."

언제나처럼 의연하고 부드러운 대처였다. 내리깐 그의 눈빛이 과연 흔들렸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제이슨은 알프레드를 잠시 올려다보다가 딕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멍청이."

소년의 목소리에 체념이 묻어났다. 소년의 차분한 반응에, 딕은 문득 어딘가에 생각이 닿았다. 지금의 제이슨이 몇 살 때의 모습을 하고있는지, 딕은 너무나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열다섯.

그가 제이슨의 나이를 정확히 떠올릴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과거에 어떤 모습이었는지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제이슨이 로빈으로 있었던 기간은 너무나 짧았고, 딕은 그가 언제 죽었는지를 알고 있었다. 열다섯.

그가 제이슨의 나이를 정확히 떠올릴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가진 마지막 기억 속의 모습과 똑같았기 때문이다. 열다섯의 제이슨.

"제이슨.."

딕의 부름에도 제이슨은 단호하게 몸을 돌렸다. 아직 적응하지 못한 어린 몸으로,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기는 소년은 그에게서 빠르게 멀어졌다. 알프레드는 딕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제이슨의 뒤를 따라 저택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