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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라이/판타지au] [Homunculus] - 08

O.A 2017. 5. 10. 03:24

[이슬라이/판타지au] [Homunculus] - 08

 

라이퀴아님.”


아침기도가 끝난 뒤 성당을 나서던 라이퀴아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성당에 출입할 수 없는 타이난은 기둥 뒤에 서서 라이퀴아를 향해 손짓하고 있었다.


, 그러니까.. 타이난?”

. 기억해주셨어요? 완전 영광.”


감히 성직자를 손짓으로 부른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무례였지만, 라이퀴아는 크게 신경 쓰는 기색이 아니었다. 열다섯 살의 라이퀴아도, 열일곱 살의 라이퀴아도 마찬가지였다.

3년간 직접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를 나눠본 것은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였다. 라이퀴아는 매일매일 조금 더 고귀한 존재가 되어갔고, 타이난은 많고 많은 병사들 중 하나로 남아있을 뿐이었다.

이미 그에게도 후배가 제법 많이 생겼고, 선배 중 몇 명은 목숨을 잃거나 글로리아에서 쫓겨났다. 그들과 특히 친했던 몇 명을 제외하곤, 대부분의 이들은 그들의 얼굴조차 잊어버렸다. 글로리아의 일반병사들이나 일꾼들은 대개가 그런 삶이었다. 있어도 그만이고, 없어져도 대부분은 기억하지 못하는.

그렇기에 그들 세대에서 가장 고결하고 높은 아이인 라이퀴아가, 자신의 이름을 기억해주는 것은 특별하고 놀랄만한 일이 맞았다. 타이난뿐만 아니라 만흔 아이들의 이름이 그의 기억 속에 남아있었으며, 타이난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매번 호들갑을 떨고 감사를 표하는 것은 그의 의무였다.


무슨 일이야?”

, 그게. 아까 순찰 돌다가 산딸기를 좀 땄거든요. 드시라고 좀 챙겨왔는데..”


타이난은 품안에서 작은 꾸러미를 꺼냈다. 그다지 청결해보이진 않는 천을 풀어내자, 제법 익은 빛깔의 산딸기가 드러났다.


아까 하나 먹어봤는데 맛있더라고요. 다 익었어요.”

나 주려고 따온 거야? 고마워, 타이난.”


라이퀴아는 웃으며 산딸기를 향해 손을 뻗었다. 작은 손가락이 가장 작은 것을 골라 집어 들려는 순간, 라이퀴아의 뒤쪽에서 서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뭐하는 거야?”

, 이슬레이. 아침공부 끝났어?”


이슬레이는 타이난을 똑바로 노려보며 두 사람에게로 다가왔다. 라이퀴아는 찔끔한 얼굴로 산딸기를 향해 뻗었던 손을 소매 속으로 감췄다.


너무 화내지 마, 타이난은 모르니까..”

그럼 알려줘야지. 참고 넘어갈게 아니라.”


타악. 이슬레이는 타이난의 손을 쳐냈다. 그의 손에서 떨어진 산딸기가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라이퀴아가 당황하며 이슬레이의 옷자락을 붙잡았지만, 이슬레이는 여전히 서늘한 얼굴로 타이난을 쏘아보고 있을 뿐이었다.


무슨 짓입니까?”

나에게 화를 낼 상황은 아닐 텐데. 오히려 감사해야하지 않나. 비숍의 후계자를 독살하려 했다는 혐의로 글로리아에서 퇴출당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면.”


이슬레이는 라이퀴아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단호한 그 손짓에, 라이퀴아는 슬쩍 챙겼던 산딸기 한 알을 넘겨주었다. 이슬레이는 그것을 바닥으로 대충 던져버리고, 구둣발로 짓밟아버렸다. 붉은 과즙이 터져 나와, 깨끗하게 닦여있던 돌바닥을 더럽혔다.


선물을 하고 싶었다면 상대에 대한 조사부터 하는 것이 첫 번째 순서 아닌가. 적어도 선물해선 안 되는 것은 골라내는 정도의 성의는 보여야지.”

이슬레이.”

라이퀴아는 산딸기를 먹을 수 없어. 음식에 조금이라도 섞여있으면 열이 나고, 심할 경우엔 정신을 잃기도 하지. 그래서 라이퀴아의 식사를 준비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각별한 주의를 기울인다. 그 정도는 네 능력으로도 충분히 알아보고 주의할 수 있었을 텐데.”

“..죄송합니다. 몰랐습니다.”

그랬겠지. 부디 심문 받게 되거든, 그대로 말하길 바래. 어디 한 군데 상하는 일 없이 온전한 몸뚱이로 쫓겨나고 싶다면 말이야. 만약에 네가 이 일로 털끝이라도 다치게 된다면, 라이퀴아는 거기에 대한 책임을 느낄 테니까. 온전히 네 잘못 뿐일지라도 말이야. 그런 걸 바랄 정도로 뻔뻔하진 않겠지.”


구둣발에 짓이겨진 산딸기가 더 이상 묻어나오지 않을 때까지, 이슬레이는 바닥에 신발 밑창을 몇 번이나 비볐다. 그리고 품 안에서 손수건을 꺼내, 라이퀴아의 손을 직접 닦아주었다. 비단실로 수를 놓은 손수건은 수도에서 직접 공수해온 고급품이었다.


가자, 이슬레이. 오늘 할 일 많잖아.”


라이퀴아는 이슬레이의 눈치를 보며 손목을 잡고 끌어당겼다. 이슬레이는 언제나 라이퀴아의 안전에 예민했다. 언젠가 비숍의 실수로 라이퀴아가 가벼운 부상을 입었을 때에도, 이슬레이는 오랫동안 비숍에게 화를 냈다. 비숍은 물론, 라이퀴아 자신마저 당황할 만큼. 차마 평소 다른 이들에게 하는 것처럼 목소리를 높이거나 빈정거리진 못했지만, 화가 난 기색을 숨길 생각도 없는 듯 했다.

라이퀴아에게 해를 입히는 것은, 그렇게 잘 따르는 비숍에게도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평소에도 늘 고까운 눈빛을 보내는 타이난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미안해, 타이난.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자. 라이퀴아는 입모양으로만 그렇게 말하곤 고개를 돌렸다. 손수건을 움켜쥔 이슬레이의 주먹은 펴질 줄을 몰랐다. 라이퀴아는 이슬레이의 등을 다정히 쓸어주며, 걸음을 재촉했다.

 

***


이슬레이.”


라이퀴아는 높은 창틀에 걸터앉으며 이슬레이를 불렀다. 이슬레이는 여전히 굳은 얼굴로 라이퀴아의 앞에 섰다.


미안해, 내가 거절했어야하는데.”

“..네 잘못 아니잖아. 네가 왜 미안해.”

너 놀라게 만들었잖아. 너 그런 표정 짓는 거 진짜 오랜만에 봤다.”


라이퀴아는 이슬레이를 향해 손을 내밀었고, 이슬레이는 라이퀴아의 손 위에 제 손을 얹었다. 라이퀴아가 손가락 사이로 손가락을 밀어 넣으며 손깍지를 꼈다. 이슬레이는 그런 라이퀴아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이슬레이는 하루가 다르게 자라났지만, 라이퀴아는 잘 자라지 않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두 사람의 체격차이는 커져만 갔다. 처음엔 머리 반 개 정도의 차이였으나, 이젠 눈높이를 맞추려면 이슬레이가 허리를 숙이거나 라이퀴아가 높은 턱 위로 올라가야 했다.


그래도 그렇게 화내지 마. 남한테 함부로 화내면 안 돼.”

내 마음이야. 화를 내건 말건.”

그러다가 나중에 벌 받아. 하늘은 어디에나 뻗어있으니까.”

내 신은 하늘 위에 없으니까 괜찮아.”


글로리아의 성직자들은 수십 가지의 엄격한 계율을 외워야했다. 신은 하늘 위에서 모두를 살펴보고 있기 때문에, 신을 모시고자하는 성직자들은 언제나 마음가짐을 경건히 하고 바른 삶을 살아야했다.

물론 엄격한 규율을 모두 지키는 성직자는 없었다. 남이 보는 앞에서나 바른 척 하고, 뒤에서는 방탕한 생활을 서슴지 않는 고위 성직자들은 셀 수도 없었다. 청렴한 생활을 하는 비숍마저도, 하루 종일 수십 가지의 계율과 글로리아의 규칙들을 모두 외우고 지키며 지내지는 않았다. 남 보는데서 책잡힐만한 잘못만 하지 마려무나. 라이퀴아와 이슬레이에게마저 그렇게 가르치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슬레이가 내뱉은 말은, 그 정도로 가벼운 잘못이나 철없는 실수로 넘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지나치게 불경한 말이었고, 차기 아크메이지로 내정된 유망한 소년이라는 것만으로는 벌을 피해갈 수 없을 중죄였다.

라이퀴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이슬레이의 손을 꽉 잡았다. 이곳은 두 사람이 어릴 때부터 사용해왔던 그들의 침실이었고, 이제는 청소나 허드렛일을 담당하는 일꾼들도 쉽게 다가오지 못하며, 지금 이 층에는 두 사람 외에는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라이퀴아의 얼굴에는 짙은 긴장의 기색이 스쳐지나갔다.


그런 말 하면 안 돼.”

뭐 어때. 난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본 적 없는데. 계율이고, 글로리아의 규칙이고. 나한텐 다 의미 없어. 성서, 그것도. 다 외운 다음엔 펴본 적도 없는데.”


이슬레이는 깍지 끼워 잡은 손을 천천히 잡아당겼다. 두 사람의 사이에 손이 가로놓였다.


내 계율은.. 그래, 따지자면 스승님이시지. 난 그분의 말씀을 따르겠다고 마음먹었으니까. 그리고 그분의 말씀대로, 바램대로 되고자 노력하고 있으니까. 그분의 말씀 외의 것은, 내게 별다른 의미도 없어.”


이슬레이는 잡힌 손가락을 빼내어, 라이퀴아의 손을 감싸 쥐었다. 이슬레이의 손가락이 라이퀴아의 손목에 닿았다. 긴장하여 거세게 뛰고 있는 맥박이 느껴졌다.


“그리고 나의 신은, 너야. 라이퀴아.”


이슬레이는 라이퀴아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라이퀴아는 눈앞의 아름다운 소년을 바라보았다. 자신과는 다르게 조금씩 소년의 티를 벗고, 청년의 향기가 풍기기 시작한 아이였다. 자신이 등진 창문으로부터 쏟아진 햇빛이 그의 얼굴을 비췄다. 긴 속눈썹 끝에 걸린 햇빛이 하얗게 반짝이고 있었다.


네 음성, 네 눈빛, 네 손길. 그 외의 것은 무의미해. 처음부터 그랬어. 내 신은 처음부터, 내 눈앞에 있었어.”


글로리아에선 성애(性愛)를 지양한다. 고위성직자나 마법사들의 사회에 이르면 그것은 거의 죄악으로 취급되거나, 미천한 자들이나 저지르는 품위 없는 범죄나 다름없는 것으로 치부되곤 한다.

물론 많은 이들이 정부를 두거나, 숨겨진 아이가 존재한다는 소문이 빈번하게 떠돌곤 하지만, 그들은 기본적으로 성애나 육욕을 기본으로 한 모든 행위를 배척하는 체 해왔다. 저들끼리 나눠가진 권력에 불순물이 끼어들어, 흩어지거나 분산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나는 오로지 너만을 위해 살고, 너를 위해 죽을 거야.”


이슬레이가 그를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라이퀴아는 그의 차분하고 푸른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햇빛을 받은 눈동자는 제단에 박힌 연녹색 보석처럼 아름다운 색을 띠고 있었다.

그의 얼굴이 천천히 다가왔다. 만약 라이퀴아가 고개를 돌리거나, 잡힌 손을 놓았거나, 이슬레이를 밀어냈다면, 이슬레이는 순순히 물러났을 것이다. 어쩌면 망설이거나 두렵다는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그의 생각을 읽어내고 한 걸음 물러나줬을지도 모른다.


나는, 너를 위한 순교자가 되기로 했어.”


그러나 라이퀴아는,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이슬레이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숨이 닿을 거리로 가까워지자, 라이퀴아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입술이 겹치고, 숨이 섞였다. 서툴게 혀가 얽히고, 서로의 뺨과 목덜미를 더듬으며 끌어안았다. 맹세의 입맞춤은 세례가 되었다. 잠시 떨어진 입술 사이로 타액이 실처럼 늘어졌다. 그것이 늘어지거나 끊어지기도 전에, 두 사람은 다시 입술을 겹쳤다.

하늘엔 구름 한 점 없었다. 글로리아 본성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두 사람의 침실은, 이 신성도시에서 하늘과 가장 가까운 장소 중 하나였다.

두 번째로 입술이 떨어지고, 세 번째로 다시 입맞춤이 이어졌다. 이슬레이는 자신의 옷자락을 쥐어오는 라이퀴아의 손을 겹쳐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