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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어공주AU/이슬라이] 바다가 사랑한 왕자 1

O.A 2017. 5. 2. 05:36

[왕자님. 왕자님.]


해마 한 마리가 호들갑을 떨며 헤엄쳐 들어왔다. 바위에 걸터앉아 푸른색과 붉은색의 산호들을 감상하던 이슬레이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긴 머리카락이 해초처럼 너울거렸다.


[무슨 일이야?]

[바다 위에 배가 떴어요.]

[인간들이야 늘 배를 띄우잖아.]

[아이, . 그런 배가 아니라니까요. 불도 밝히고, 음악이랑 음식도 많고, 사람들도 많이 타고 있는 배라고요.]


이슬레이는 그 말을 듣고서도 별로 흥미가 당기지 않았다. 인간들이 사는 세상에서 무엇을 띄우고 무엇을 벌이든, 그가 신경 쓸 이유는 없었다. 어차피 그는 바다에서 살아가는 존재였으니까.

그러나 눈앞에서 알짱거리며 재잘대는 목소리가 귀찮아, 이슬레이는 결국 몸을 일으켰다. 검은 지느러미가 물살을 갈랐다. 그는 온 바다를 통틀어 그 누구보다 빠르고 강한 존재였다.

물 밖으로 고개를 내밀자, 별이 쏟아질 듯한 밤하늘과 잔잔한 밤바다를 배경으로 삼아, 화려하게 장식된 배 한 채가 떠있었다.

인간들의 음악은 요란하고 귀에 설었다. 갑판에서 춤추는 인간들, 웃음소리, 기름진 음식냄새가 멀리까지 풍겨왔다. 이슬레이에게 구경을 가자고 졸라댔던 해마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아마 배를 구경하기 위해 가까이 다가간 모양이었다.

이슬레이는 파도에 몸을 맡긴 채 배 위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예민한 이슬레이의 귀에는 갑판 위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하나하나 구분해낼 수 있었다. 인간들의 목소리는 거칠고 귀에 거슬렸지만, 그 내용은, 이따금은 재미있기도 했다.

알랑거리며 아부하는 간드러진 목소리도, 진중한 체 억지로 내리깔아 긁는 듯한 소리가 들리는 목소리도 있었다. 이슬레이는 갑판 위뿐만 아니라, 배의 안쪽 깊숙한 곳, 이를테면 조타실에서 코를 골고 있는 누군가의 잠꼬대, 창고에서 포도주통을 갉아대는 쥐의 소리, 선장실에서 저들끼리 수군거리는 암살모의 같은 것들.

저 배에 인간왕자가 타고 있구나. 이슬레이는 입안으로 중얼거리며 천천히 배를 향해 다가갔다. 너무 가까이 다가갈 순 없었다. 자신의 외형은 일단 인간과 상당히 닮아있었으므로, 혹여나 물에 빠진 사람으로 착각하여 소란이라도 일어나면 곤란했기 때문에.


-왕자님. 아주 귀한 백포도주를 내어올 테니 맛이라도 보시지요.

-아하하, 괜찮습니다. 이미 많이 마셨는걸요.

-맛만 보세요, 대공비의 고향에서 올라온 최고급 포도주라고 합니다.

-네에, 알겠습니다. 알겠어요.

-어딜 가십니까?

-속이 안 좋아서 바람이나 좀 쐬려고요.

-떨어지지 않게 조심하십시오.

-아직 그만큼 취하진 않았어요.


인간왕자의 목소리는 생각보다 높고 맑았다. 드물게 거슬리지 않는 목소리였다.

이슬레이는 그 얼굴이 조금 궁금해져, 배를 향해 더 가까이 다가갔다. 작은 체구의 남자가 비틀거리며 난간으로 다가와 몸을 기대는 것이 보였다. 배는 컸고,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멀었지만, 이슬레이는 밝은 빛을 등진 그의 얼굴을 선명하게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짧고 검은 머리카락이 바닷바람에 날리며 흐트러졌다. 눈매는 날카로웠지만 사나운 인상은 아니다. 이미 포도주를 몇 잔 받아 마셨는지, 얼굴이 발그레하게 물들어있었다. 얼굴은 희었고,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남자는 난간에 몸을 기대고 한숨을 내쉬었다. 졸립다.. 힘없이 중얼거리는 목소리와 함께 갑판을 빠르게 걸어가는 발소리가 들렸다. 이슬레이는 그 발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발소리는 갑판을 벗어나 선장실로 이어졌다.


-준비는 다 되었겠지?

-물론입니다.

-그래. 와인잔이 깨지는 소리가 나면 일제히 뛰쳐나오도록. 다른 놈들은 어찌되어도 좋다만, 라이퀴아 왕자만은 확실히 죽여야 한다. 만일 실패하거든 모두 자결할 각오를 하도록.

-, . 알고 있습니다.


긴장이 역력한 목소리였다. 이슬레이는 피식 웃으며 속으로 혀를 찼다. 육지의 인간들이 저들끼리 얼마나 죽고 죽이든 상관없었다. 다만 저들은 분명 바다 속으로 몇 구나 되는 시체들을 던져 넣을 것이고, 그것은 얼마간 바다를 오염시키게 될 것이다. 단지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을 뿐이었다.


..?”


선장실 안의 대화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던 이슬레이는, 귓가를 스치는 여린 탄성에 퍼득 정신을 차렸다. 생각보다 배에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시선을 올리니 난간에 매달리듯 기대선 인간왕자가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쳤다.

인간왕자는 입술을 달싹였고, 이슬레이는 황급히 손가락을 세워 입술에 댔다. 인간왕자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이슬레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슬레이를 향해 손짓했다. 이슬레이가 더 이상 가까이 다가오려는 기미가 없자, 그는 두 손을 모아 비비며 시무룩한 표정을 지어보이기까지 했다.

이슬레이는 결국 배 앞으로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언젠가 보았던, 작은 육지동물을 떠올리게 만드는 표정에 결국 마음이 내켜버린 것이다. 라이퀴아는 난간 밖으로 몸을 쭉 내밀었다.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처럼 위태로운 자세였다.

선장실로 향했던 발소리가 가까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이슬레이는 발소리가 다가오는 만큼 뒤로 몸을 물렸다. 인간왕자는 의아한 기색이었으나 다시 이슬레이를 향해 손짓을 하진 않았다. 곧 그의 지척으로 다가온 한 남자가 그의 어깨를 잡았다.


떨어지십니다, 왕자님.”

? 아아..”

말씀드린 포도주를 가져왔습니다.”


남자는 쟁반에 와인잔 하나를 받쳐들고 있었다. 아마 그것을 인간왕자에게 건네주다가 실수인 척 바닥에 떨어트릴 것이고,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들리면 문 너머에 숨어있던 병사들이 제각기 칼을 쥐고 튀어나오리라.

구해줄까.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은 순전히 변덕일 뿐이었다. 그러나 이곳은 바다 위였고, 이슬레이는 단지 마음을 먹는 것만으로도 손쉽게 상황을 뒤엎어버릴 수 있었다.

밤바다는 드물게 잔잔했고, 선상파티가 벌어지는 내내 배는 거의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남자가 인간왕자에게 와인잔이 얹힌 은쟁반을 내미는 순간, 배는 순식간에 크게 기울며 흔들렸다.

인간왕자는 난간을 붙잡고 매달렸지만, 그의 앞에 서있던 남자는 비틀거리며 넘어져버렸다. 들고 있던 쟁반이 손을 떠나고, 와인잔이 바닥에 부딪히며 산산조각이 났다. 이슬레이는 남자가 당황하여 숨을 들이키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그와 거의 동시에 갑판을 요란하게 울리는 발소리도 들었다.

음악소리가 끊기고, 비명소리가 빈자리를 채웠다. 남자가 인간왕자를 붙잡으려 손을 뻗는 것이 보였다. 이슬레이는 배를 한 번 더 크게 흔들었다. 남자는 중심을 잡기 위해 허우적거렸다. , 저 왕자. 이름이 뭐라고 했더라. 조금 전에 분명히..


라이퀴아!”


인간의 목소리를 내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그러나 이슬레이의 목소리는 또렷했다.

 



난간에 매달려 갑작스런 선상반란에 혼란스러워하던 라이퀴아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조금 전 보았던 남자가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


뛰어내려!”


미친 소리였다. 배는 육지에서 제법 떨어져 있었고, 자정을 훌쩍 넘긴 늦은 시간이었다. 이 시간에 바다로 뛰어든다면 파도에 휩쓸려 익사하거나, 체온이 떨어져 죽을 것이 뻔했다. 저 남자가 근처에 안전한 배를 대어두고 있으며, 왕궁까지 자신을 안전하게 데려다줄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라이퀴아는 망설임 없이 뛰어내렸다. 이대로 갑판 위에서 버티고 남는다고 하더라도 살아날 방법이 생길 리는 없었다. 이렇게 죽으나 저렇게 죽으나 마찬가지다.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또한, 오늘 처음 본 남자에 대한 묘한 믿음도 있었다. 고작 2분 전에 처음 본 사람일 뿐인데도, 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라이퀴아의 가슴을 가득 채웠던 불안감과 당혹스러움은 파도에 휩쓸리듯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자신이 인어의 목소리에 홀렸다는 것을, 라이퀴아가 스스로 알아챌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차가운 바닷물이 온몸을 덮쳤다. 몸이 뻣뻣하게 굳으며 순식간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라이퀴아는 간신히 눈을 뜨고, 물 밖으로 나가려 팔다리를 허우적거렸다.

하얀 손이 뻗어와 라이퀴아의 팔을 부드럽게 움켜쥐었다. 조금 전 보았던 그 남자였다. 남자의 아름다운 얼굴이 천천히 다가왔다. 입술이 겹쳐졌다.

라이퀴아의 팔을 붙잡았던 손이 천천히 올라가 뒷목을 감싸 쥐었다. 고개를 젖히자 절로 입술이 벌어졌다. 입에서 입으로 숨이 넘어갔다. 라이퀴아는 기묘한 고요 속에서 짧지 않은 입맞춤을 받았다.

이윽고 입술이 떨어졌다. 멍하니 남자를 바라보던 라이퀴아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남자는 그 표정이 퍽이나 마음에 들었는지, 보기 좋은 입술에 옅은 미소를 걸었다.


인어의 숨을 받으면 너희 인간들도 물속에서 숨을 쉴 수 있다지.”


라이퀴아는 그제거야 남자의 허리 아래로 뻗어나간 지느러미를 발견했다. 인간과 다를 바 없는 반라의 몸은 진주처럼 희었고, 검고 아름다운 비늘로 뒤덮인 하반신은 물고기를 닮아있었다.


인어..”


라이퀴아는 남자의 말을 따라 중얼거렸다.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미간을 좁히며 손을 뻗었다.


병사들이 네가 뛰어내리는 모습을 봤어. 곧 네 시체를 찾으러 저들도 뛰어내릴 거야.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기자.”


라이퀴아는 남자의 손을 잡았고, 남자는 그런 라이퀴아의 몸을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허리에 단단히 팔을 감은 남자는, 이내 물살을 가르며 거침없이 헤엄치기 시작했다.

제법 거친 물살이 부딪혀왔으나 라이퀴아는 그것이 생각보다 힘들게 느껴지지 않았다. 아프지도 않았고, 춥지도 않았으며, 숨이 막히는 일도 없었다. 그러나 한치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어둑한 심해를 바라보는 것은 조금 무서웠기에, 라이퀴아는 자신을 안고 있는 남자의 목에 팔을 감은 채, 그의 얼굴만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네 이름은 뭐야?”


라이퀴아의 물음에 남자는 작게 소리를 내며 웃었다.


이슬레이.”


이슬레이. 라이퀴아는 이번에도 그의 말을 한 글자씩 따라 되뇌었다. 이슬레이는 퍽이나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 모를 물고기 몇 마리가 두 사람의 곁을 스쳐지나갔다.


다 왔어. 저길 봐, 라이퀴아.”


이슬레이는 헤엄치는 속도를 줄이지 않은 채, 호의적인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을 걸었다. 라이퀴아는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산호와 진주, 해초, 조개로 장식된 궁전은 아름다웠고, 또한 거대했다. 한 나라의 왕자인 라이퀴아조차 한 번도 본 적 없는 거대함이었다. 수십, 수백 개의 건물들이 발 아래로 펼쳐졌다.

이슬레이는 여전히 라이퀴아를 품에 안은 채, 그중 가장 커다랗고 화려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붉은 산호와 상아색 조개껍데기, 흑진주로 장식된 건물은 아름답기 그지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