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라이/판타지au] [Homunculus] - 06
[이슬라이/판타지au] [Homunculus] - 06
글로리아는 어린 아이들에겐 대가 없는 보호와 은혜를 베풀어주었지만, 그것도 열다섯 살까지였다. 열다섯이 된 아이들은 그간 자신이 받아온 교육과 보여준 재능을 토대로 자신의 진로를 결정해야만 했다.
타이난은 다섯 살에 글로리아로 들어온 아이들 중 하나였다. 1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고, 부모의 얼굴은 이미 깨끗하게 잊어버렸다. 타이난은 타고난 신성력은 전혀 없었고, 마법이나 학문에도 별다른 재능을 보이지 못했다. 다만 멀리 있는 것도 선명히 볼 수 있을 만큼 눈이 밝았고, 활을 다루기를 좋아해서 궁술병을 자원했다. 사실은 활을 쏘고 싶었던 것은 아니고, 칼을 꼬나 쥐고 최전방으로 나서고 싶지 않았을 따름이었다.
성인식은 매년 성축일에 열렸다. 그 해 열다섯이 된 아이들은, 대성당의 커다란 홀에 모여 평생 성실히 자신의 직무에 충실할 것을 맹세한다. 신과 글로리아의 무궁한 영광을 빌고, 축복을 받으면 된다. 일반병사나 잡일꾼을 지망하는 아이들이 맡은 역할은 그 정도였다.
“야. 저쪽 봐라.”
타이난은 누군가 제 옆구리를 꾹 찌르는 것을 느끼고 얼굴을 찡그렸다. 성직자나 마법사가 아닌 사람들은 대성당에 함부로 들어갈 수 없었고, 간혹 기념일이 돌아오거나, 특별한 일이 있어 성당이 개방될 때에나 구경해볼 수 있었기 때문에, 일반병사가 될 아이들은 다들 들떠있었다. 애초에 그런 것에 별다른 관심이 없는 타이난은 매사가 귀찮을 뿐이었지만.
“뭐야.”
“저기 까만 머리 둘 보이냐?”
이름도 잘 모르는 아이가 손짓하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니, 각각 검은 옷과 흰 옷을 입은 소년 둘이 이야기를 나누며 걸어가는 것이 보였다. 흰 옷을 입은 소년은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연신 웃음을 터트리고 있었다.
“‘그’ 비숍이 직접 키우는 제자들이래. 차기 비숍이랑 아크메이지 후계자라고도 그러고.”
“허?”
“저기 하얀 쪽이 비숍이고, 까만 쪽이..”
“아, 성직자랑 마법사는 나도 구분해.”
타이난은 두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거리는 조금 떨어져있었으나, 그 정도의 거리는 타이난에게 별다른 장애가 되지 않았다.
라이퀴아. 이슬레이. 두 사람의 이름은 글로리아 내에서도 유명했다. 고결한 성직자이자 위대한 마법사인 비숍이 직접 거두고 데려와, 식사 하나까지 신경 쓰며 기르고 있다는 제자들이었다.
또래보다 큰 키와 마른 몸매, 아름다운 얼굴을 가진 이슬레이는 이미 많은 이들의 시선을 받고 있었다. 그는 가장 촉망받는 마법사 중 하나였고, 그와 친해져보려 주변을 맴도는 이도 적지 않을 터였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적당히 예의를 지켜 대꾸를 해주다가 금세 자리를 떠버린다고 했다.
‘성격 존나 나쁘게 생겼는데.’
라이퀴아를 바라보는 이슬레이의 표정은 다정했으나, 사납게 치켜 올라간 눈매를 보며 타이난은 눈살을 찌푸렸다.
라이퀴아는 이슬레이의 팔을 잡아당기며 입가로 손을 가져갔다. 귓속말을 하려는 듯 하자, 이슬레이는 순순히 허리를 숙여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라이퀴아의 말을 들은 이슬레이가 나직한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것이 보였다.
‘저쪽은 존나 맹하게 생겼고.’
라이퀴아는 원래도 크지 않은 체격이었지만, 이슬레이의 곁에 서있으니 더욱 덩치가 작아 보였다. 열다섯 살로는 보이지 않는 작은 몸과 순한 얼굴 탓에 더욱 어리게 보였다. 활짝 웃는 얼굴은 천진난만하기 그지없었다.
“둘이 존나 친해 보이는데.”
“그런 듯.”
“어쨌든 줄 서는 건 쉽겠네. 저 둘한테만 어떻게든 잘 보이면 된다는 거잖아.”
“그치? 아크메이지랑 비숍이 척지면 난리난다고 들었는데. 지금 아크메이지는 완전 퇴물이라잖아. 비숍한테 아주 밀렸다고.”
어른들이 저들끼리 하는 말을 주워들은 아이들은,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한 채 어려운 말들을 주워섬기곤 했다. 타이난은 옆에서 쉴 새 없이 조잘거리는 목소리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귀를 후볐다.
“아크메이지보단 비숍 쪽이 쉽겠는데.”
“그래 보여?”
“어. 좀 맹해 보이네. 웃는 것도 그렇고..”
타이난은 문득 이슬레이가 고개를 드는 것을 보았다. 그는 무엇을 찾는 모양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주변은 사람들로 가득 차있었고, 이슬레이는 결국 아무것도 찾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는 것 같았다. 라이퀴아가 이슬레이의 팔을 잡아당기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슬레이는 라이퀴아에게 고개를 저으며 웃어보였다.
대성당의 문이 열리고, 삼삼오오 모여 배회하던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 들어갔다. 타이난이 잠시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린 사이 라이퀴아와 이슬레이는 자취를 감추었다. 아, 놓쳤다. 문 열리기 전에 인사라도 해둘걸 그랬나. 에이, 어차피 같은 도시 안에 사는데 언젠가 한 번은 또 마주치겠지. 타이난은 벅벅 뒷머리를 긁으며 걸음을 옮겼다.
성축일은 한 해를 통틀어 가장 성대한 행사가 열리는 날이었다. 평소 성당에 들어올 수 없는 아이들, 대부분의 의식이나 행사에 참석할 기회가 거의 없는 아이들은 화려하고 경건한 성당의 내부에 눈이 휘둥그레졌고, 훗날 성직자, 혹은 마법사가 될 아이들은 그런 아이들을 보며 저들끼리 수군거리고 소리를 죽여 웃어댔다.
타이난은 내내 시큰둥한 반응이었고, 저를 흘끔거리는 아이들에게도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다. 어차피 사흘쯤 지나면 저들 중 자신의 얼굴을 기억하는 아이들은 거의 남지 않을 것이다. 그런 아이들에게 일일이 신경을 쓰기엔 너무 귀찮고, 시간이 아까웠다.
타이난은 홀의 입구에 서서 몰려나오는 아이들의 얼굴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라이퀴아는 인파에 휩쓸려 놓칠 수도 있다지만, 키가 큰 이슬레이는 어느 정도의 인파 속에 섞여있다고 하더라도 눈에 띄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홀을 가득 메웠던 아이들이 거진 다 빠져나온 다음에도, 타이난은 이슬레이와 라이퀴아를 발견할 수 없었다. 타이난은 어떻게 할까 잠시 고민하다가, 다시 홀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홀 안에는 상아를 깎아 만든 아름다운 제단이 있었다. 의식과 행사를 집도했던 어른들은 이미 자리를 비운 뒤였고, 하얀 옷을 입은 열 살 남짓한 아이들이 제단을 장식했던 꽃들을 치우고 있었다.
라이퀴아는 그 제단에 걸터앉아있었다. 어른들에게 들킨다면 크게 꾸중을 들을지도 모르는 일이었지만, 라이퀴아는 별로 신경 쓰는 기색이 아니었다. 불편한 신발은 아예 벗어버리고 맨발을 가볍게 흔들며, 제단에 기대선 이슬레이와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새하얀 옷감에 금색 실로 무늬를 수놓은 성직자들의 예복은 아름다웠고, 라이퀴아는 하늘에서 내려온 작은 천사처럼 경건해보였다. 검은 옷감에 붉은 실로 무늬를 수놓은 마법사들의 예복은 화려했고, 이슬레이는 귀족처럼 그린 듯 귀하고 수려해보였다.
이슬레이의 말에 라이퀴아는 뒤로 넘어갈 듯 깔깔 웃어댔다. 맑은 웃음소리가 흐르자, 제단을 청소하던 아이들이 흘끔거리며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라이퀴아는 한참을 웃다가, 아이들과 눈이 마주치자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눈동자를 데로록 굴렸다.
“저기, 안녕하세요.”
타이난은 두 사람에게 다가가며 살가운 웃음을 지어보였다. 라이퀴아는 타이난을 향해 얼굴을 돌리며 눈을 깜빡였고, 이슬레이는 눈을 가늘게 뜬 채 타이난을 빤히 쳐다보았다. 두 사람은 각기 어린 성직자들과 마법사들을 대표하여 의식에 참여했기에, 타이난은 의식이 진행되는 내내 두 사람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먼발치에서 보는 것과 눈앞에서 마주하는 것은 제법 차이가 있었다.
“저는 일반병사 지원자인 타이난이라고 하는데요. 조금 전에 너무 감명을 받았거든요. 그래서 인사나 드릴까 해서요, 네.”
“아아..”
“그래, 안녕!”
라이퀴아는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고, 이슬레이는 고개를 까딱이며 타이난을 훑어보았다. 누가보아도 적대적인 시선에 타이난은 속으로 혀를 찼다. 아, 역시 까다롭고 성깔 더러운 놈인 모양이지. 역시 내 사람 보는 눈은..
“인사 다 했으면 그만 돌아가지. 여긴 아무나 머물 수 있는 공간은 아닌데.”
“아, 좋은 날에 왜 그래. 그러지마, 어차피 어른들도 아무도 없는데.”
라이퀴아는 손을 뻗어 이슬레이의 머리를 쓰다듬었고, 이슬레이는 순순히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변함없었다. 그는 불쾌하다는 표정으로 타이난을 쏘아보았고, 타이난은 실실 웃으며 라이퀴아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나는 라이퀴아야. 얘는 이슬레이고.”
“아이고, 성함이야 당연히 알죠. 제가 두 분을 얼마나 존경하는데요.”
타이난은 라이퀴아를 향해 두 손을 뻗었다. 라이퀴아의 손은 무릎위에 가볍게 놓여있었고, 타이난은 그 손을 잡으려했다. 손이 가까워질 즈음, 이슬레이가 그 사이로 몸을 끼워 넣었다. 바닥에 떨어져있는 라이퀴아의 신발을 집어든 이슬레이는, 대놓고 타이난을 무시하며 라이퀴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만 가자, 라이퀴아. 스승님 도와드리러 가야지.”
이슬레이는 라이퀴아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그의 발목을 감싸 쥐고 신발을 신겨주었다. 하얗고 얇은 발목이 한 손에 잡혔다.
“그래.”
라이퀴아의 두 발에 정성스럽게 신발을 신긴 이슬레이가 몸을 일으키자, 라이퀴아는 이슬레이를 향해 팔을 뻗었다. 이슬레이는 익숙하게 라이퀴아를 안아 올려 바닥에 내려주었다.
‘애야?’
타이난은 어이가 없었으나, 이슬레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흐트러진 라이퀴아의 옷까지 정리해주었다. 라이퀴아는 타이난에게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만나서 반가웠어, 타이난. 또 보자.”
“네? 아, 아, 넵.”
“가자, 라이퀴아.”
이슬레이는 라이퀴아가 흔들고 있는 손목을 부드럽게 감싸 쥐고 잡아끌었다. 라이퀴아는 손을 미끄러트리듯 살짝 빼내, 이슬레이의 손을 마주잡았다. 이슬레이는 제 곁을 지나가던 아이를 불러 세워, 아이가 품에 안고 있던 꽃다발에서 꽃 한 송이를 빼들었다. 아이는 멀뚱히 이슬레이를 올려다보다가, 이슬레이가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이자 얼굴을 붉히며 후다닥 달려가 버렸다.
이슬레이는 라이퀴아의 귓가에 꽃을 꽂아주었다. 하얀 꽃잎과 노란 꽃술을 가진 꽃송이는 라이퀴아의 예복과 썩 잘 어울렸다. 라이퀴아는 이슬레이를 올려다보며 웃다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시선을 느끼고 뒤를 돌아보았다. 라이퀴아와 타이난의 눈이 마주쳤다.
라이퀴아는 웃으며 입모양을 벙긋거렸다. 잘 가, 타이난. 타이난은 그의 입술을 분명히 읽었다. 이슬레이가 라이퀴아에게 뭐라고 말을 걸자, 라이퀴아는 금세 타이난에게서 시선을 돌려 이슬레이를 올려다보았다.
글로리아는 신성도시였고, 성직자와 마법사들은 암묵적인 귀족이자 지배계층이었다. 공식적인 신분이 아니기에, 비숍과 아크메이지의 관계나 재능에 따라 성직자와 마법사들 사이에선 미묘한 위계질서가 생겼다.
그러나 그것도 어디까지나 저들끼리의 문제였을 뿐, 일반병사나 잡일꾼들은 그들 사이에 끼어들 수 있었다. 아이들은 그 미묘한 상하관계를 눈치 챘고, 어른들을 흉내 내어 저들끼리도 위계질서와 상하관계를 만들었다.
타이난이 이슬레이의 태도에 별다른 반감을 품지 않았던 것은, 그것이 그만큼 당연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타이난은 멀어지는 라이퀴아의 뒷모습을 멀뚱히 바라보았다. 흰 옷을 입은 아이들도 자신을 보며 곧잘 웃어댔지만, 그들의 얼굴에 어렸던 비웃음이나 경멸은 라이퀴아에게선 찾아볼 수 없었다.
“거봐. 존나 맹해 빠졌지.”
이슬레이와 라이퀴아의 뒷모습이 홀 밖으로 사라졌다. 타이난은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이내 킥킥 웃음을 터트렸다. 제단을 비단수건으로 닦던 아이들이 타이난을 흘끔거리며 저들끼리 소곤거렸다. 타이난은 아이들을 흘끗 돌아보곤 천천히 홀을 빠져나갔다.
퍽이나 순진하고 착해 보이는 인사였다. 친해지기에 껄끄러울 것 같진 않았다. 아크메이지 쪽이야 까다로워보였지만, 단순히 비위를 맞추는 것은 어려울 것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