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라이/판타지au] [Homunculus] - 05
[이슬라이/판타지au] [Homunculus] - 05
아이작은 마당에 쌓아둔 장작더미 위에 오도카니 앉아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작의 몸은 작은 생채기조차 잘 회복되지 않았고, 혹여나 아이가 다치거나 다른사람에 눈에 뜨일까 걱정한 라이퀴아는 아이가 밖으로 나가는 것을 별로 내켜하지 않았다.
라이퀴아는 아이작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들어주었고, 무작정 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일도 없었다. 그러나 아이작은 라이퀴아를 불안하게 만들기보다,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참는 쪽을 선택했다. 언제나 그랬다. 열 살도 되지 않은 작은 아이는 무척 얌전했고, 제 마음을 접는 일에 제법 능숙했다.
아이작의 세상은 언제나 인적 없는 곳에 외따로 떨어진 집과, 별다른 장식이나 관목이 없는 조촐한 마당뿐이었다. 라이퀴아가 생필품을 구하기 위해 마을로 내려간 날이면, 아이작은 현관 앞의 세 칸짜리 계단에 걸터앉아 책을 읽거나, 지금처럼 장작더미 위에 앉아 햇볕을 쬐며 시간을 보냈다.
지루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아이작은 예전에 한 번, 담장에 매달려 장난을 치다가 떨어져 발목이 부러진 적이 있다. 부러진 부분을 다시 붙일 수가 없었기 때문에, 아이작은 무릎 아래 부분을 통째로 교체해야만 했다.
라이퀴아의 마법으로, 아이작은 꼬박 하루하고 반나절을 잠들어 있었다. 아이작이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을 때, 가물거리는 시야에 가장 처음 들어온 것은 라이퀴아의 얼굴이었다. 피곤함과 불안으로 초췌해진 라이퀴아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 아이작은 어쩐지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아이작은 라이퀴아를 향해 손을 뻗었고, 라이퀴아는 두 손으로 아이작의 작은 손을 잡아주었다. 죄송해요. 입술을 달싹였으나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라이퀴아는 아이작의 말을 알아들은 것 같았다.
아이작은 그 날부터 스스로에게 결심했다. 다시는 라이퀴아가 그런 표정을 짓지 않도록, 자신이 라이퀴아를 지키기로 했다. 만약에 내가 선생님을 슬프게 한다면. 아이작은 라이퀴아의 손을 꼭 움켜쥐며 생각했다. 나는 나를 용서하지 않을 거야. 나에게 벌을 줄 거야.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도, 라이퀴아에게 자신이 어떤 의미인지도, 애초에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도 모르고 있었지만, 그 결심만큼은 확고했다.
아이작은 담벼락에 매달리거나 나무에 기어 올라가는 대신, 책을 읽거나 공상 속에 잠기는 놀이를 시작했다. 그것들은 혼자서도 할 수 있는 놀이였고, 몸을 다칠 염려도 없었다. 아이작은 눈을 감고 즐거운 상상을 해보려 했다.
아름다운 도시의 모습을 그려보는 것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었다. 얼마 전부터 아이작은 기억 속의 도시를 회상하듯, 뚜렷하고 구체적인 도시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게 되었다.
높게 솟은 탑과 진주색의 커다란 건물. 쏟아지는 햇빛이 통과하며 바닥에 아름다운 그림자를 남기는, 색색의 유리로 메워진 창문들. 남자와 여자 모양의 커다란 상아색 동상들. 그리고 그 동상들의 발치를 가득 메운 색색의 꽃들.
갈색 옷을 입고, 수건을 이마에 동여맨 사람들은 작은 모종삽을 들고 꽃밭을 가꾼다. 가벼운 가죽갑옷으로 무장한 병사들은 도시 안을 순찰하고, 검은 옷과 흰 옷을 입은 사람들은 두세 명씩 짝을 지어 걸어 다닌다.
건물 안의 가구들은 모두 보기 좋게 길이 들어있거나, 반짝반짝한 새것이다. 흉한 것, 불편한 것, 망가진 것들은 찾아볼 수 없다. 은은한 빛으로 밝혀진 실내는 마음이 편할 만큼만 어둡다. 긴 복도를 걸어가면 넓고 천장이 높은 공간이 나온다. 그곳엔 새하얗게 칠해진 높은 단상이 있고, 황금으로 만든 촛대에 은으로 장식된 초가 타오르고, 그 앞에서 기도를 올리는 사람은..
“야, 꼬맹아.”
아이작은 갑작스레 들려온 목소리에 퍼득 공상에서 깨어났다. 덥수룩한 검은머리를 올려 묶은 남자가 담장 너머에서 아이작을 불렀다. 담장은 결코 낮은 높이가 아닌데, 남자는 가슴 위쪽이 다 드러나 보일 정도로 키가 컸다.
새빨간 겉옷을 입은 남자는 의아한 표정으로 아이작을 바라보고 있었다. 몸 성한 아이가 집안에 붙어 앉아있을 시간은 아니다. 부모의 일을 돕든, 학교에 가든, 구걸을 하든, 한 사람 분을 하기위해서, 뭐든 하고 있어야 했다.
그러나 장작더미 위에 올라앉은 소년은 크게 풍족해보이지도, 어디가 크게 아파보이지도 않았다. 소년은 슬슬 엉덩이를 움직여 장작의 끝으로 옮겨갔다. 경계하는 기색이 분명했으나, 키도, 덩치도 큰 남자는 소년의 태도는 아랑곳하지 않고 아예 담벼락에 팔을 걸쳤다.
“너 거기서 뭐하냐?”
“..아무것도.”
“허. 말 짧은 것 보게. 집에서 혼자 뭐해. 어른 없어?”
“...”
소년은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 소년의 몸은 더 이상 물러날 곳도 없이, 장작더미 끄트머리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었다. 저러다가 굴러 떨어지면 다칠 텐데. 오늘 처음 본 꼬마가 다치거나 말거나 신경을 쓸 일은 아니었지만, 넘어진 걸로 울음을 터트리기라도 한다면 귀찮은 일이 생길지도 몰랐다. 보호자의 항의나 힐난을 받는다든가, 아이가 다쳤으니 치료비를 물어내라고 한다든가하는 종류의 일들이.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장작더미는 무너지지 않았다. 소년의 몸이 생각보다 가벼운 모양이었다. 남자는 턱까지 괴며 소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소년은 아예 대꾸조차 않겠다는 듯, 남자에게서 완전히 고개를 돌려버렸다.
“나 이상한 사람 아니야. 뭣 좀 물어보려고 그런다.”
“..”
“와, 저거 싹퉁바가지 쩌네.”
남자는 혀를 찼다. 얼굴을 찡그리자 사나운 인상이 한 층 더 험악해졌다. 그가 나직한 목소리로 으르렁거리면 대부분의 아이들은 겁을 먹고 얌전해졌지만, 소년은 여전히 그를 본체만체 하고 있었다.
“허.”
“왜 그래, 대빵. 아무도 없어?”
“아니, 꼬마 하나는 있는데. 어른은 있나 없나 모르겠네.”
검은머리 남자의 곁에서 또 다른 남자가 고개를 내밀었다. 어두운 금발을 가진 남자는 검은 머리의 남자보단 서글서글한 인상을 주었으나, 그 역시 불량해보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꼬마야. 집에 어른 안계시니?”
“...”
“우리 이상한 사람들 아니야. 난 응석이라고 하고, 여기 승깔 드러운 놈은 에이스라고 하는데, 우리가 뭣 좀 찾는 게 있어서, 길 좀 물어보고 싶어서 그래.”
“...”
소년은 붙임성 있게 말을 걸어오는 남자를 슬쩍 쳐다보았다. 이상한 이름이네. 생각은 속으로 삼켰으나 비죽 웃음이 튀어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입을 가리고 킥킥 웃는 소년을 보며 응석은 어깨를 으쓱였다. 거봐, 애들한텐 죄다 먹힌다니까, 내 이름.
“..선생님은 안 계셔요.”
아이는 웃음이 그친 뒤에도 한참을 망설이다가 그렇게 말했다. 그래도 한없이 장작더미의 끄트머리로만 밀려가던 몸은 멈춰있었다. 두 사람을 똑바로 쳐다보는 것이, 경계심은 제법 풀린 것 같아 응석은 에이스를 보며 씨익 웃어보였다.
“그래? 그래도 여기 어른이 살긴 한단 말이지? 그럼 조금만 기다렸다가 돌아오시면 길 좀 물어보고 가도 될까? 언제 돌아오시니?”
“그건 저도 잘 모르는..”
아이작은 대놓고 에이스를 무시하고, 응석이라는 남자만 똑바로 쳐다보며 대답했다. 에이스는 어린 소년의 노골적인 태도에 기분이 상한 듯 혀를 찼지만, 사실 아이작은 스스로도 조금 당황하고 있었다.
아이작은 라이퀴아 외의 사람과는 만나본 경험이 거의 없다고 해도 좋았다. 누군가를 만날 때에는 언제나 라이퀴아가 함께 있었다. 라이퀴아가 없을 때면 아이작은 언제나 숨을 죽이고 있었고, 조용하고 얌전한, 어딘가 음울해 보이기도 하는 작은 소년에게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아이작은 라이퀴아의 얼굴이 일그러질 때마다 눈물이 날 정도로 가슴이 아팠기 때문에, 자신은 누군가가 속상해하거나 슬퍼하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성격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저 에이스라는 남자가 얼굴을 찡그리는 것은 별다른 느낌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아주 약간은, 기분이 좋은 것 같기도 했다.
에이스를 놀리고, 응석에겐 간간히 대꾸하고, 제 딴에는 나름대로의 경계를 풀지 않으며 야무지게 굴던 아이작은 멀리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발소리에 퍼득 고개를 돌렸다. 갑자기 달라진 아이의 표정에 응석과 에이스는 나란히 고개를 갸웃했다.
“선생님..”
아이작은 장작더미에서 뛰어내려 문으로 달려갔다. 어린아이가 들기엔 무거울 빗장을 끙끙거리며 벗겨낸 아이작은, 온몸으로 문을 밀어내며 열었다.
“선생님!”
아이는 금방이라도 넘어질 듯 비틀거리며 달려갔다. 커다란 가방을 등에 맨 남자가, 놀란 표정을 지으며 달려와 아이의 몸을 받아 안았다.
“왜 나왔어. 다치면 어쩌려고.”
“선생님 발소리가 들렸어요.”
남자는 손에 들고 있던 꾸러미를 아이의 품에 안겨주고, 아이의 몸을 고쳐 안았다. 남자는 결코 건장한 체구라고 할 수 없었으나, 아이의 몸이 워낙 작고 가벼워 안을 수 있는 듯 했다.
“선생님. 이상한 사람들이 왔어요.”
“..뭐?”
“저기..”
아이가 손을 들어 자신들을 삿대질하는 것을 본 에이스는 혀를 찼다. 응석은 그런 에이스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꾹 찌르며 남자를 향해 씨익 웃어보였다. 남자의 표정이 굳어졌다.
“누구십니까?”
“아, 저흰 이상한 사람은 아니구요. 힐더라는 용병단인데요. 길 좀 여쭤보려고 했는데 아이 혼자 있어서요. 아, 저는 응석이라고 하고, 이쪽은 저희 대장인 에이스라고 합니다. 저희 진짜 이상한 사람들 아니니까 그렇게 보지 마시구.. 혹시 이 산, 잘 아세요? 길 좀 여쭤도 될라나?”
아이는 남자의 옷자락을 꼭 잡으며 에이스를 흘끔거렸다. 아이의 푸른 눈동자와 에이스의 붉은 눈동자가 마주치자 에이스는 괜히 눈을 부라렸다. 남자는 아이를 보호하듯 품 안으로 더욱 당겨 안으며 방어적인 자세를 취했다.
“아, 진짜. 새끼야, 쫌.. 아하하, 신경 쓰지 마세요. 얼굴이 좀 드럽게 생겨서 그렇지 나쁜애는 아니에요.”
남자는 아이를 문 안으로 들여보냈다. 아이는 눈을 깜빡이며 남자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남자는 한쪽 무릎을 굽혀 아이와 눈높이를 맞추고, 아이의 품에 안겨줬던 짐을 다시 받아들며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어주었다.
“오래 걸었더니 목이 마르구나. 물 좀 떠다줄래?”
“네, 선생님.”
“뛰지 말고. 넘어지거나 다치면 안 되니까.”
아이는 크게 고개를 끄덕이고, 집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문이 굳게 닫힌 뒤에야 남자는 몸을 일으켰다. 아이에게 지어주던 다정한 표정은 간데없이 딱딱하게 굳어있는, 경계심 어린 얼굴이었다.
“저도 이곳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아 자세히 아는 것은 아닙니다. 무엇이 궁금하십니까?”
응석이 묻고, 에이스는 흘끔거리며 담 안쪽의 정원을 돌아보고, 라이퀴아는 그런 에이스를 경계하면서도 응석의 질문에는 성심껏 대답했다.
아이작이 컵에 물을 가득 따라 가지고 나왔을 때, 라이퀴아는 문을 닫고 빗장을 지르는 중이었다. 아이작은 물이 넘칠세라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아이작을 돌아본 라이퀴아의 표정은 언제나처럼 다정했다.
“고마워, 아이작.”
아이작은 급하게 물을 들이키는 라이퀴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평소와 조금 다른 것 같았지만, 아이작은 라이퀴아의 옷자락을 살짝 잡아당기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자, 아이작. 선물이야.”
라이퀴아는 아이작의 품에 작은 종이봉투를 안겨주었다. 아이작은 고개를 갸웃하며 봉투의 내용물을 꺼내보았다. 작은 모종삽과 나무호미, 두꺼운 장갑, 몇 개의 작은 꾸러미들이 나왔다.
“이게 뭐예요?”
“꽃씨란다. 이건 노란 꽃이 피고, 이건 파란 꽃이, 이건 하얀 꽃이 핀다고 하더구나.”
“이건요?”
“그건 보라색이라고 했어.”
아이작은 꾸러미를 묶은 노끈을 잡아당겨 풀었다. 까맣고 작은 씨앗들이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아이작이 당황하며 씨앗을 주우려 몸을 굽히자, 라이퀴아는 웃으며 그런 아이작의 손에 빈 컵을 쥐여 주었다.
“이것 좀 다시 가져다두고 나오련? 그리고 같이 꽃밭을 만들자. 내가 땅을 골라놓고 있을 테니까. 알겠지?”
라이퀴아는 바닥으로 흩어진 씨앗들을 주워 모으기 시작했다. 아이작은 안절부절 못하며 컵의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다가, 집안으로 후다닥 달려 들어갔다. 라이퀴아는 아이작이 완전히 집 안으로 들어간 것을 확인한 뒤, 바닥에 굴러다니는 나무호미를 주워 화단의 흙을 파내고 고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