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애만/기타

[딕슨딕] 마음과 마음이 上

O.A 2015. 12. 27. 12:55

초능력, 마법, 외계인, 그 밖의 모든 불가사의한 것들은 언제나 그들을 괴롭혀왔다. 그들이 아무런 능력도 타고나지 못한 평범한 인간들이라는 것은, 그들의 적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박쥐에게서 파생된 이들은, 고담의 어둠 속에서 태어난 이들은 지나치게 뛰어난 인물들이었지만, 미지의 것은 늘 벅찼다.

극도의 훈련을 거쳐 남들보다 '조금' 뛰어난 체술, 막대한 자본을 바탕으로 이뤄낸 몇 가지 오버테크놀로지, 뛰어난 탐정술과 논리적인 전략, 끔찍한 고난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강인한 의지 등등. 한낱 인간이 불과한 그들이 초능력자와 외계인 못지않은, 어쩌면 그들보다도 높은 승률과 강인함을 자랑하는 이유는 상당히 많았다. 그중에는 그들이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은 가족이었고, 같은 뿌리에서 뻗어 나온 가지였다. 사이가 좋지 않더라도, 매번 반목하더라도 서로의 위험에 민감했고, 도움이 필요할 땐 돕기도 했다. 같은 피라곤 한 방울도 흐르지 않는 네 형제는, 이따금 한 자리에 모이는 일도 있었다. 아무리 멀리 떨어져나가더라도 그들은 기본적으로 눈과 귀를 열어두도록 훈련받았다. 본인이 필요한 장소를 스스로 찾아낼 수 있는 능력도 있었다.

고담은 미치광이들을 불러 모으는 도시였다. 그들의 적은, 마법사나, 초능력자나, 외계인보단 미치광이인 경우가 많았다. 그래, 그런 경우가 많긴 했지. 그러나 그것이 100%의 확률을 자랑하는 것은 아니다. 더러 있긴 했다. 인간을 초월한 존재들이.

자타나가 있었으면 좋았을 거야.

나이트윙은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며 로빈의 곁에 착지했다. 우스꽝스러운 코스튬을 입은 신생 악당의 거슬리고 과장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듣기 싫다.. 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탕, 탕, 권총의 격발소리가 울렸다. 사실 탕, 탕, 하는 정도로 깔끔하고 점잖은 소리는 아니었다. 저 짜증나는 웃음소리를 전부 덮어버릴 만큼, 요란하게 쏟아지는 소리의 폭포였다.

권총에서도 저런 소리가 날 수 있구나. 딕은 옆을 흘끗 돌아보았다. 권총 두 자루를 꺼내들고 미친 듯이 쏴대고 있는 제이슨의 표정은 볼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붉은 헬멧 아래의 얼굴이 짜증으로 가득 차있으리라는 것은 추측할 수 있었다. 그의 총알이, 보이지 않는 투명한 장벽에 막혀 전부 튕겨나가거나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으니까.

"쯧. 시끄러워."

곁에서 로빈이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로빈은 다쳐있었다. 망토가 찢어지고, 붉은 코스튬 아래로 피가 배어나왔다. 나이트윙이 그런 로빈을 부축하려 했으나 로빈은 그의 손을 매몰차게 쳐냈다.

"저 새끼는 또 왜 여기에 와있는 건데? 또 네가 불렀지? 총기 난사나 테러를 하고 싶으면 이런 건물 옥상이 아니고 저기 있는 대학에나 쳐들어가라고 해."

"로빈."

나이트윙이 고개를 저으며 로빈의 어깨를 꽉 잡아주려던 찰나였다.

"뭐하고 있어, 병신들아!"

두 사람을 향해 뛰어든 레드후드가 로빈의 멱살을 움켜쥐며 집어던지고, 다리를 들어 나이트윙의 복부를 걷어차 넘어트렸다. 뒤로 두 바퀴를 구르며 튕기듯 몸을 일으킨 나이트윙은 정체 모를 빛줄기가 레드후드의 몸을 관통하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레드후드!"

"무슨 짓이야, 개자식아!"

멀찍이 나가떨어진 로빈이 몸을 벌떡 일으키며 악을 지름과 동시에, 나이트윙은 비틀거리며 뒤로 두어 걸음을 내딛는 레드후드를 향해 달려갔다. 가까이 다가가면서, 나이트윙은 그의 몸에 기묘한 빛과 열기가 맴돌고 있음을 눈치 챘다. 그러나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하기도 전, 레드후드의 무릎이 꺾이며 바닥으로 풀썩 쓰러졌다. 넘어지기 직전에 간신히 손을 짚으며 몸을 지탱한 그를 일으키기 위해, 나이트윙은 그의 어깨를 잡았다.

쐐액.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났다. 건너편 고층 건물의 옥상에서 뛰어내린 레드로빈이 공기를 타고 하늘을 날아, 저 우스꽝스러운 마법사 빌런의 뒤통수를 후려갈기며 착지했다. 손을 등 뒤로 결박하고, 입에 재갈을 물리고, 눈을 가리는 움직임이 민첩했다. 그러나 나이트윙은 그런 레드로빈을 보면서 휘파람을 불지도, 로빈의 상태를 살피러 달려가지도 않았다. 레드로빈이 이름 모를 빌런의 뒷목을 쳐 기절시키는 그 순간까지도.

"레드후드, 괜찮.."

어깨에 손이 닿는 순간, 나이트윙의 목소리가 뚝 끊겼다. 손이 닿는, 바로 그 순간. 뒷목을 가격당한 빌런이 정신을 잃는 그 순간. 생전 처음 느끼는 생경한 느낌이 나이트윙의 머릿속에 가득 들어찼다. 젊은이가 말하기엔 적절하지 않은 무게를 가진 단어였지만, 어쨌든 그가 '평생' 느껴본 적 없는 새로운 감각이었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몰랐다. 무슨 증상인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나이트윙은 그것이 자신의 손을 타고 흘러들어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레드후드의 어깨를 잡은, 자신의 손을 통해서. 그의 몸에 스몄던 기묘한 빛과 열기가 자신에게로 흘러들어오는 듯 한 감각이었다.

"네 병아리나 챙겨."

레드후드가 나이트윙의 손을 털어낼 때까지, 나이트윙은 멍하니 레드후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레드후드는 자리에서 일어나 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를 한 대 걷어차려 날아드는 로빈의 발목을 잡아 다시 한 번 바닥에 패대기친 뒤, 훌쩍 옥상의 난간 아래로 뛰어내려 버렸다.

"나이트윙? 무슨 일이야?"

"응? 아니, 아무 일도 없어, 레드로빈. 왜. 내가 어디 다치기라도 했을까봐 그래?"

레드로빈이 그를 향해 다가왔다. 나이트윙은 부드럽게 웃으며 레드로빈의 카울 위로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니야, 난 그냥 형이 좀.. 멍해보여서."

"아무 일도 없다니까 그러네. 아, 아까 공중제비 멋졌어."

"공중제비 전문가에게 그런 칭찬 들어봐야 민망하기만 하다고."

유쾌한 목소리로 농담을 건네면서도, 나이트윙은 멍한 기분이 가시지 않는 것을 느꼈다. 그것이 무슨 감각인지는 여전히 알지 못한 채로.

***

딕은 멍하니 침대에 누워있었다. '밤일'을 끝낸 뒤엔 아무리 체력이 좋은 그라도 지치기 마련이고, 눕자마자 곯아떨어지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런데 잠이 오질 않았다. 몸은 피곤하고 눈꺼풀은 무거운데,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자리가 불편한가 싶어 이불을 정돈해보고, 담요를 들고 소파에도 누워보고, 공기가 탁한 걸까 싶어 창문도 활짝 열어봤다. 그러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는 조용히 누워서 멍하니 천장을 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기분을, 마음을 조용히 곱씹어보았다. 어째서 이런 기분이 드는 것인지. 그 근원을 더듬어 올라가려했다.

그러나 그는, 지금의 자신이 어떤 기분인지도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분명 자신의 마음은 더할 나위 없이 편안하고 평온했다. 오히려 개운하기까지 했다. 동생들-누군가는 이런 호칭을 들었다간 펄쩍 뛰겠지만-과 호흡을 맞춘 것은 오랜만의 일이었다. 장성한, 자라고 있는, 그리고 아직 어린 로빈과 로빈이었던 아이들. 딕인 오늘 밤과 같은 일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음 한편이 너무나도 불편했다. 그가 지금껏 겪어본 적 없는 감각이었다. 두루뭉술하고, 불안한. 우울함인지, 슬픔인지, 분노인지 모를 불편함.

딕은 조용히 그 낯선 한 점에 집중했다. 그가 잠이 든 것은, 그 감정이 점차 격해지다가 어느 순간, 갑작스레 찾아온 감정의 암전. 그 후로도 반시간은 더 지난 뒤였다.